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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생활

직장생활3

by 자한형 2021. 9.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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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7~2001)

농기계 팀에 온 지3년째 되었다. 계속 S과장이 업무를 맡고 계셨고 소형농기계와 농기계 교육을 맡아서 했다. 연초에는 승진시 험 출제를 위해 차출도 있었다. 평촌에 아파트를 분양받기 위해 자금의 투입이 있었다. 중도금은 대출을 받아서 충당했다. 98년도가 되었다. 업무분장이 되었고 계통농기계를 담당하게 되었다. 농기계업체인 대동농기계 국제, 동양, LG 등과 계통공급계약을 해야 했. 농기계 공급의 실적이 목표한 만큼 확대 되지를 못해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계통농기계를 담당하던 이가 주무 팀으로 이동되어 가버렸다. 경제위기가 왔고 IMF 구제 금융을 받았다 금 모으기를 하였고 국가경제가 휘청거렸다. J모씨가 과장으로 왔다. 진주고 출신이었다. 서민적이었고 소탈하였다. 목동 쪽에 집이 있었다. 기계 보조금과 관련해 감사를 받던 중에 문제가 발생되기도 했었. 99년이 되어서는 3명이 승진해 나갔다. 89, 90, 91 3개년 승진 자가 승진해 나가고 90승진자 3명이 남게 되었다. 참담한 상황이었고 어처구니없는 모습이었다. 기획실 3, 교육 연수부 쪽 2명이 발탁되었다. 부회장의 입김이었다는 얘기가 있었다. 승진에 누락된 사람의 심정이 피부에 와닿았다.. 다음 해의 부장으로 온 이는 K 부장이었다. 서울 북쪽 도봉산 자락에 집이 있었는데 무척이나 청빈하게 생활하였다. 농기계과 직원의 중매를 선적이 있었는데 잘되어서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집사람이랑 증인으로 같이 결혼식에 참석하기도 했다. 부장집에 갔는데 선풍기조차도 없어 사러 간다고 나갔으나 문을 연 곳이 없어 그냥 돌아가기도 하였다. 기획실 출신이어서 무척이나 예산 조직에 있어서는 탁월한 역량을 발휘하였다. 자재부장을 끝내고 농촌지원 부장을 하다가 지역본부장을 역임하셨고 상무로 자회사 사장으로 승승장구하였다.. 통장에 현금이 몇 억이 쌓여있을 정도였다. 막판에 분당에 아파트를 분양받아 이사하였다. 차를 레간자를 타고 다녔다. 무안 세발낙지를 무척이나 즐겨 잡수셨고 산을 좋아했다. 담배를 애용하셨는데 금연을 하시고 이빨에 문제가 생겨 한동안 고생했다. 그 연세에도 불구하고 술도 잘 드셨고 놀이도 즐겨하였다. 무척이나 엄격하고 무서울 것으로 예상하였으나 그렇게 심하지는 않았다. 업무에 상 당히 생소하고 처음 접하시는 데도 불구하고 무리 없이 잘 리드해 갔다. 체육행사로 북한산 등반을 하였다. 창녕 쪽에 출장을 갔다 가는 이 차장을 만나 식사를 같이 하였다. 화왕산 쪽을 조금 올라 가 보기도 하였다. 00가 지부장을 하고 있었다. ‘99년도 말에는 농축협 통합 관련 차출이 있었고 승진이 코앞이었음에도 울며 겨자 먹기로 가는 수밖에 없었다. 11월부터 익년 2월까지 있었다. 이 후의 통합작업은 실무작업반에서 최종 마무리를 지었다. 승진시기 와 맞물려 있었는데 이듬해에도 다시 또 승진에서 누락되었다.

 

2000년도에 2명만 승진이 되었고 천덕꾸러기가 되었다. 중앙회 에 9090 승진자 중 누락자가 6명 인가였는데 그 속의 1인이었다. 턱관 절 관계로 수술을 받았다. 그 이 전해에 턱관절 뼈의 잘못된 부분을 긁어내었는데 그것과 연관된 수술이었다. 파견이 끝나고 부서 내로 복귀를 하고 자하니 농기계 팀에서는 퇴물이다 보니 받을 수 없다는 얘기였고, 하는 수없이 일반자재 팀으로 가서는 PP포대 업 무를 맡았다. PP포대의 원가조사차 부안으로 출장을 갔었는데 무리하게 음주를 한 게 원인이었는지 아무튼 턱관절뼈가 부러져 내 부에 철심을 박고 고정을 하였다. PP포대계약을 일반경쟁계약을 해야 한다는 부장 때문에 곤욕을 치렀다. 주원인은 PP조합의 전무를 역임했던 L모씨가 가 있었다. 부장의 학교선배에 원로 측에 드시는 분이라 무시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전무로서 불명예퇴직을 하다 보니 부장에게 그렇게 종용을 하는 상황이었던 것이었다. 팀장이 팀장직을 걸고 만류해서 단체수의 계약을 하고는 공급을 하였다. 원가계산을 하느라 출장을 다녀왔다. 업무 후에는 술을 한 잔씩 하였다. 어떤 때에는 일주일 내내 마시기도 하였다. 팀 원 중 한 사람이 갓 결혼을 한때라 집들이를 하기도 하였다. 팀장 의 집을 방문해서 술을 한 잔 하기도 하였다. 사모님이 미스코리아 출신이라 할 만큼 미인이었고 키도 컸다. 강남 대치동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명동 칼국수집, 호프집 비젼 등을 자주 갔다. 아들이 녹색 소년단에 참가를 해서 휴일마다 거의 자전거를 타고 나 가는 것에 같이 참가를 했다. 강화도를 시발로 해서 행사가 계속 이어졌다. 새벽6시부터 나가서는 자전거를 탔고 행사가 있을 때면 따라다녔다.. 정신문화원 6.25 임진각, 천불암, 가평 행사 전국일주 등등 거의 쉬는 휴일이 없을 지경이었다. 차를 프라이드 베타에 서 아반테로 2000년에 바꾸었다. 휴식시간마다 간식을 날라다 주 었고 물을 보충해 주었다. 학부형끼리 별도의 모임을 만들어 재미나게 지냈다. 산행도 몇 번 있었다. 설악산 대청봉을 가기도 했다. 작은 녀석도 데리고 갔는데 3학년짜리가 정말 힘든 일을 해냈다. 대청봉에서 내려올 때는 비를 흠뻑 맞기도 했다. 동해안에서 해수욕을 하면서 즐거워하기도 하였다. 부장은 N모씨였는데 목포 출신이었고 고대출신이었으며 해병대 출신이었다.. 하남지부장을 하였는데 전국 업적1위의 금자탑을 쌓고는 검사부장으로 왔다가 자재부장으로 왔다. 술은 잘못하셨는데 강한 인상을 보여 주었다. 연초에 복귀를 하자마자 승진시험 출제에 차출이 있었다.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었고 황당한 상황이었다. 하루를 지냈는데 모친이 병환이 나셨다는 연락이 왔다. 급거 부산으로 내려가 보니 뇌졸중이 와서 중환자실에 계셨다. 2일을 간호하다 올라왔다. 7.1일자로 농, , 임 삼협의 통합이 있었다. 자재부 쪽에서 축산자재 또는 인삼 자재의 신규취급이 논의되고 검토되었다. 인삼협, 축협쪽 직원이 일부 충원되었다. 인삼부 쪽 사람들과 간담회를 갖기도 하였으나 계통공급 품목으로 마땅하게 검토할 만한 것은 별로 발견할 수 없었다.. 조직적으로 여러 가지로 혼란스러웠고 복잡했다. 7월 1일 자의월1 인사 얘기도 나왔으며 내정자도 하마평에 올랐으나 모든 것은 원상회복되었다. 다음해(2001년)다음 해(2001년)가 되었다. 3명이 승진되었다. 나머지 2명은 92승진자를 승진시켰다. 서무과장은 배제되었다. 승진턱을 내었고 기쁨이 컸다. 팀장으로서의 발령은 추후 결정이었고 MBA 교육으로 결정이 났다. 본래는 양곡부 모씨가 교육을 가기로 되어 있었으나 시급한 현안 관계로 차출이 보류되었다.. 경제 쪽이었 고 인원은 20명이었다. 253급이 15명이었다. 농협이 13명 축 협이 7명이었다. 자체 모임의 총무로 선출이 되었다. 회장은 L모 씨였다. 매달 얼마씩 각출을 했고 그것으로 운영해 나갔다. 매달 한 번씩 교육 연수부를 가서는 급여명세표를 뽑아다 개별적으로 갖다 주었다. 교육은 3시303시 30분경에 종료되었다. 90분 강의를 4교 시 정도 하였다. 파트가 나뉘었다. 놀이파, 골프파, 술파로 나뉘었 다. 술자리가 잦았다. 수업을 마치면 호프집에서 한잔씩 하고 헤어졌다.. 모든 과정이 끝나고 서울역 앞 중국집에서 해단식 비슷하게 책거리 겸해서 한잔을 더했다. 스승의 날에는 교수님에게 선물하 기도 하였다. 비용관리도 보통일이 아니었다. 수료 때에 공로패를 받았다. 편성된 조로는 5조였는데 농협유통의 도매사업에 관하여 조사보고서를 만들었다. 대전에서 출퇴근하는 분들도 있었다. 나 중에는 고시원에 방을 얻어 생활하였다. 7주간씩을 3회로 하여 나 누었다. 중국여행을 5일가량 다녀왔다. 최초로 해외를 나가는 것이었다.. 비디오로 촬영을 하였고 편집을 해서는 한 장 짜리VTR로 만들었다. 사진촬영도 많이 하였다. 발마사지도 받았다. 지도교수가 여행기간 내내 감기에 걸려 고생을 많이 했다. 중국의 상해, 항주, 소주를 돌아보았다. 매일 재미있게 지냈다. 중국술 오량액을 E 마트에서 한 병씩 사 가지고 왔다. 간단하게 리포트 형식으로 주제를 정해 분임별로 과제를 만들어냈다. 8월경에 MBA과정이 끝났 다. 어떤 이는 계속해서 대학원에 등록을 해서 석사학위를 받기도 했고 또 다른 한 사람은 중국어에 심취해서 능통할 정도까지 일취월장한 어학능력을 갖게 되었다. 안성교육원으로는 두 명이 발령을 받았다. Y모 박사로 잠시 머무는 인사였다. 인사발령은 안성교육 원으로 났다. 아이들의 전국국토 대행진 행사가 있어 다소 늦게 부임을 했다. 원장은 C모씨로 축협출신이었다. 부원장은 Y모씨였다. 생활지도 팀장으로 보직을 받아 부임하였다. 교육생들에게 처음 교육원을 소개하고 브리핑하는 역할을 맡았다. 파워포인트로 만들어 소개를 하였다. 진행교수 1명과 일일교육 담당 1명이1 있었고 밑에 직원 2명이 있었다. 한 사람은 간호사로 여직원이었다. 한분 은 연세가 지긋하신 분으로 평생을 교육원에서 근무하신 분이었 다. 팀 내에 진행을 담당하는 직원이 좀 문제가 있었다. 전산소 출 신이었는데 별로 업무에 충실하질 못한 듯 보였고 미덥지가 못했 다. 장교출신이라고는 하였지만 업무처리를 원활하게 해내지 못했다. 일일교육 담당교수는 오랫동안 교육원에서 근무해온 터라 무 난하게 업무에 충실하였다. 5-6세정도 연배였다. 간호사는 아주 맡은 바 일에 충실히 하였고 대인관계도 화목하게 잘 이끄는 편이었다.. 같은 농협 직원끼리 결혼하여 잘살고 있었다. Y팀장으로부터 업무에 대해 인수인계를 받았다. 교무팀장으로 있었던 H모씨가 MBA(서강대 금융)를 가게 되어 송별회를 했다. 술을 꽤 마셨음에 도 꼭 가야 한다는 부분 때문에 차를 끌고 갔다. 무척이나 걱정을 하였다. 교육이 끝나고 바로 본부로 갈 줄로 알았는데 다시 또 복 귀를 하였다. 참으로 아쉬워하였다. 교육원이 예전의 그 화려했던 명성을 잃어 가고 있었고 농업인 교육의 활성화도 예전만 못했다. 중앙교육원의 리모델링 얘기가 들려왔다.. 숙소는 상당히 열악한 상황이었다. 푸른 자연 속에서의 생활이었지만 익숙하지 못한 생 활패 턴에 적응하기까지는 다소간의 어려움이 있었다. 입사동기 교수가 한 명 있어 소주를 한잔하였다. 교육원 전체 시설 쪽을 담당 하고 있었다. Y모 팀장은 노조 창립멤버로 상당히 예리한 면모를 갖고 있었다. 승진한 후 여주 쪽에 있었는데 일 년 만에 교육원으 로 왔다. 노조에서 전화문의나 자문 요청이 많았다. 정책 전문이었 던 것 같았다. J팀장은 나주가 고향이었는데 독특하게도 서양화가로 상당한 수준이었다. 개인전도 연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테니스 를 잘 치셨고 단정하시고 깔끔하셨다. 부드러움과 온화함이 있었 다. 아주대에 대학원을 등록하셔서 열심히 석사과정 공부도 병행하였다.. 아들이 연대에 다니고 있었고 아들과 함께 유럽여행을 다녀 오기도 한 모양이었다. 사모님이 피아노를 레슨을 하였고 가계 를 책임지게 한 자책으로 미안한 마음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얼 마 후에 2관으로 가셨다. 큰녀석이 중학교에 들어갔다. 작은 녀석 이 자전거 타기를 시작하였다. 전국일주 코스는 강원도 쪽으로 시 작해서 부산 해운대로 마무리되는 것으로 무척이나 힘든 코스였다. 여름 땡볕이 무척이나 원망스러웠다. 큰 녀석도 동참을 하였다. 막판에 충돌 사고가 있어 병원 치료를 받은 녀석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기차를 타고 귀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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