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수필2

83. 어머니의 감

자한형 2022. 1. 10. 2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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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감   김우종

 

감과 배와 사과는 세계 어느 나라 것도 우리 것만큼 맛있지 않다. 외국인도 흔히 이에 동의하는 것을 보면 이것은 우리의 입맛에만 국한된 신토불이론은 아닌 것 같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감은, 내게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하늘 바람 별 시 산 바다 여름 겨울 어머니 아버지 등 모든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동일하지만 각자의 뇌리 속에 그려지는 그 영상은 모두 다르다. 깊은 산 속에서 가을의 풀벌레들이 밤새껏 울며 쳐다보는 밤하늘이나 윤동주가 <별 헤는 밤>을 쓸 때 머리 속에 그린 밤하늘은 지금 자라나는 도시의 아이들이 경험한 밤하늘과는 사뭇 다르며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경험에 의해서 그 단어의 의미를 풀어 나가게 된다.

그처럼 나는 감이라는 단어를 만나면 남들과 동일한 감 외에 나만의 특별한 의미를 따로 지니게 된다.

내게 있어서 감은 먹거리로써 식욕을 돋우기 전에 어린 시절의 그리운 추억들을 전설처럼 들려주는 감이다.

그 전설 속에는 떨어진 감꽃으로 목걸이를 만들어 목에 감고 놀던 옛 친구들의 초상화가 있다. 그들은 지금 모두 어디로 가버렸는지?

또 감이라는 단어를 만나면 풍경화 한 폭이 떠오른다. 새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높은 가지에 겨우 몇 개 매달려 있는 새 빨간 홍시, 거기에는 감잎도 겨우 한두 개 매달리고 가끔 찾아오는 까치도 한 마리 그려져 있다.

그리고 감이라는 단어를 만나면 어머니의 모습이 함께 떠오른다. 내가 감을 먹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며 그렇게도 좋아 하시다가 돌아앉으며 눈물을 닦으신 어머니의 모습이다.

맛있니?”

응 맛있어, 하나 더 먹어도 돼?”

그래, 지금 쉬었다가 하나만 더 먹자. 한꺼번에 둘씩이나 먹으면 안 된다.”

요 위에서 벽을 기대고 앉아 홍시 하나를 다 먹은 나는 힘이 들어서 옆으로 쓰러지며 누웠다. 어머니는 이불을 덮어주고 일어나 나가시며 누나에게 말했다.

홍시 하나를 다 먹었어. 또 먹고 싶다는구나.”

정말요?”

그래, 이젠 살았나보다. 이젠 살아났어.”

온 집안이 밝아졌다. 내가 감을 하나 먹고 또 먹고 싶다고 한 날부터 온 집안이 밝아지고 어머니의 얼굴에서는 웃음이 사라지지 않으셨다. 물론, 깊은 밤중에 뒤뜰 장독대에서 어머니 혼자 흐느끼시는 소리를 다른 식구들이 듣는 일도 없게 되었다.

그동안 나는 알지 못할 병으로 거의 죽어 가고 있었다. 해주 도립병원까지 기차 타고 가서 입원해 있다가 돌아온 것은 마지막 죽음을 집에서 맞이하기 위해서였는데 그렇게 입맛이 돌고 감이 먹고 싶어지며 살아 난 것이다. 그때 나는 중학 일년생이었다.

그런데 어머니를 그렇게 우시게 하는 일이 그 후 또 한번 일어났다.

대학생이 되고 전쟁이 터진 후 인천의 피난살이 집에서는 또 가끔 한 밤중에 어머니가 뒤뜰 장독대에 나가서 흐느끼며 우시게 되었다.

이상한 울음소리에 귀 밝은 형수님이 자다 말고 일어나 보면 어머니가 자리에 안 계시더라는 것이었다. 그럴 때마다 형수님은 어머니를 달래며 모시고 들어와 자리에 눕혀 드렸다고 한다.

그렇게 된 것은 나 때문이었다. 내가 북쪽으로 끌려간 후 다시는 살아서 돌아올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알고 난후부터 가끔 그렇게 밤잠을 못 이루시다가 울음을 참을 수 없게 되면 뒤뜰로 나가셨었나 보다.

그런데 나는 그 후 형수로부터 그런 얘기를 듣기는 했지만 어머니가 그렇게 울고 계시리라는 것은 나도 국군 포로수용소에 갇혀 있으면서 짐작하고 있었다. 예전에 내게 도립병원에서 집으로 돌아와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을 때에도 어머니는 그렇게 식구들이 모두 잠든 깊은 밤에 뒤뜰 장독대에 나가서 혼자 우셨으니까.

나는 그렇게 울고 계실 어머니를 생각할 때마다 견딜 수가 없었다. 어서 어머니를 만나러 가야 했다. 나는 무모한 탈출을 계획했다.

나는 오직 울고 계실 어머니 때문에 죽을 각오로 탈출한 것이다. 어머니가 북쪽에 계셨다면 나는 탈출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머니는 다시 살아 돌아온 나에게 예전처럼 내가 좋아하는 홍시를 주시지는 못했다. 그리고 밝게 웃으시는 대신 어머니는 마당에 들어선 나를 보자 맨발로 뛰어 내려 내 발 앞에 엎드려 그동안 다 흘리지 못했던 눈물을 한꺼번에 쏟아 내시었다.

어머니는 이런 불효자에게 떫은 감과 익은 감의 의미를 가르쳐서 일평생 내게 매우 귀중한 교훈을 주시기도 했다.

황해도 연안 읍의 내 고향 집 가는 길가에는 감나무들이 있었다.

나는 어느 날 발갛게 익은 감 하나를 따 와서 한입 덥석 물었는데 감은 입안에 쩍 달라붙고 목구멍까지 막히는 것 같았다.

어머니는 나를 보고 이렇게 말하셨다.

감은 발갛게 되었다고 다 익은 것이 아니다. 더 기다려야 돼. 제일 맛있는 걸 먹으려면 서리가 내릴 때까지라도 기다려야 한다. 기다릴 줄을 알아야 맛있는 감을 먹는 거란다. 왜들 그렇게 떫은 감을 따 먹는지 모르겠구나.”

사실로 길가에 있던 임자 없는 감은 익기도 전에 사람들이 다 따갔다.

더러는 아직 퍼런 감을 약물로 처리해서 떫은 맛 만 없애고 시장에 내다 팔기도 했다.

훗날 나는 어른이 되고 세상을 살아나가면서 때때로 감에 대한 어머니의 말씀을 되새기게 되었다.

어머니는 물론 그냥 감에 대한 말씀만 하셨던 것인 듯하지만 그 말은 시간이 지나면서 마치 떫은 감이 홍시가 되듯이 다른 깊고 더 소중한 의미로 숙성해 갔다.

인생은 떫은 감을 서둘러 먹어야 할 만큼 짧은 것만은 아니다.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아직 맛이 떫으면 먹지도 말고 남에게 권하지도 말고 기다리자. 서리가 내릴 때까지 기다려서 가장 맛좋은 감을 따먹고 남에게도 나눠주자.’

이런 생각에 도달하게 해준 어머니의 감은 내게 있어서도 그냥 맛으로만 먹는 감이 아니다. 나는 감을 통해서 감 맛만이 아니라 인생의 맛을 배웠다. 어떻게 살아야 가장 살만한 가치가 있는 삶을 얻을 수 있는지 그 지혜를 배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