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니와 클라이드
지난달 말이었다. TV 교양프로 세계 다크투어라는 프로그램에서 보니와 클라이드(8회)란 제목으로 투어 가이드 문성준 경찰대학 교수가 소개를 했다. 1930년대 초 2년간 15군데의 은행을 터는 등 각양각색의 범죄행각을 벌여 12명을 살해한 희대의 범죄자 커플에 관한 내용이었다.
이중 9명이 경찰관이었다. 1960년대에 영화화 된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라는” 제목으로 우리나라에서도 상영된 바 있었다. 초원의 빛의 주인공이었던 위렌비티와 페이 데나 웨이가 주연했고 위렌비티가 감독한 작품이었다. 1929년의 대공황으로 암울했던 시대에 의적으로 호도되어 대중들의 선풍적인 인기를 받은 바 있었다. 보니의 패션인 베레모와 트위드 스커트가 대 유행의 물결을 타기도 했고 팍팍했던 삶의 질곡에서 한줄기 청량음료처럼 그렇게 역설적으로 대중적 인기를 얻었다. 그들은 범죄행각을 벌이면서 돈을 뿌리기도 했고 즉흥적으로 기분내키는대로 마음껏 공권력을 조롱하고 기존 사회질서에 반항하는 이단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1932년부터 1934년까지 2년간 배로우갱단을 조직하여 신출귀몰하게 범죄행각을 벌였고 은행, 상점, 주유소, 경찰서, 교도소 등지에서 닥치는 대로 총격전을 벌였다. 클라이드를 희대의 범죄자로 키운 것은 텍사스의 이스트햄 감옥이었다. 어린시절 17세에 절도죄로 감옥에 갔던 클라이드는 그곳에서 성폭행을 당했고 범죄 수법들을 재소자들에게서 하나씩 배워나갔다. 그는 굴욕적인 수치심을 견디지 못해 자신을 학대했던 재소자를 끝내 살해해서 복수를 하기도 했다. 이스트 햄 교도소는 노예를 부리듯 재소자들에게 부당하고 무리한 노역을 강제하기도 했다. 클라이드는 교도소에서 출소한 후 보니가 근무하던 카페에서 그녀의 어머니 차를 훔치려던 현장에서 둘은 서로 첫눈에 반하게 되고 의기투합해 2인조 강도가 된다. 보니는 글쓰기와 연설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던 모범 소녀였고 배우를 꿈꿨다. 어린 나이였던 16세의 젊은 시절에 로이 손튼과 결혼을 했으나 남편이 강도 혐의로 교도소에 수감됨으로 인해 제대로 된 결혼생활을 영위하지 못했고 어머니와 같이 생활하며 현실 생활에 불만을 느꼈던 때에 만나게 된 이가 클라이드였다. 그들은 클라이드의 형 벅 배로우, 형수 블랜치 부부와 같이 갱단을 조직하기도 한다. 1934년 1월 16일 이스트햄 교도소에서 동료 죄수 4명을 탈옥시키기도 한다. 교도소의 옛 동료 지미 멀렌스에게 권총과 탄약을 전달한다. 그들은 탈옥후 오클라호마까지 이동했고 경찰은 추격에 실패한다. 4명 중 3명은 도주 후 검거되어 재수감이 되고 나머지 1명 헨리 메스빈은 배로우 갱단에 합류한다. 이스트햄 교도소가 워낙 악명 높은 곳이다 보니 사람들은 이 사건을 ‘저항의 상징’으로 인식했다. 세계 다크 투어는 본래 우리 사회의 어두운 면을 제대로 파악하고 새롭게 재조명해 재인식함으로써 더 이상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경각심을 갖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어두웠던 과거로의 여행하는 것을 일컫는 내용이다. 사건 현장이나 사고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고 보여줌으로써 두 번 다시 그런 사고나 사건이 일어나서는 안된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던지기 위함이다. 세계 다크 투어의 내용으로는 독일의 나찌가 조직적이고 잔학하게 저지른 대규모 유태인 학살인 홀로코스트, 911테러, 존 F 케네디 대통령 암살사건, 안네의 일기 등이 소개되었다. 텍사스, 루이지애나 주 등 3개 주를 넘나들며 범죄를 저지른다. 그들 목에는 막대한 현상금이 걸렸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행무진 활약을 펼쳤고 추격하는 경찰관들을 오히려 체포해서 같이 어울리는 모습의 사진을 찍어 언론사에 보내는 등 대범함을 보여 대중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기도 한다. 당국에서는 기존 경찰 인력으로는 도저히 그들의 신출귀몰한 행적을 추적할 길이 없어 텍사스 레인저스 출신인 전설적인 인물 프랭크 헤이머에게 도움을 요청하여 추격전을 펼친다. 그들은 예전 무법지대였던 텍사스의 자치 경찰 조직이었다.. 프랭크 헤이머가 재직 중 사살한 범죄자만 53명이었다. 그들은 과학수사, 수사추론 등의 다양한 수사 기법을 총동원하여 그들의 동선에서 일정한 패턴을 찾아낸다. 그들이 댈러스, 조플린, 루이지애나를 기점으로 활동한다는 것을 알아낸 것이다. 댈러스에는 둘의 가족이 거주하고 있었다. 미주리주 조플린. 배로우 갱의 은신처에 경찰이 포위한다. 쌍방간의 총격전이 시작되었고 이 사건으로 인해 수사관 해리 맥기니스가 사망한다. 이곳에서 경찰은 결정적인 단서인 보니와 클라이드의 사진을 찾아낸다. 이로써 둘의 얼굴이 전 세계에 공개되었다. 보니와 클라이드 등 일당은 미주리주 플래트 시키의 은신처로 도주한다. 이곳에서 엄청난 전투가 벌어졌다. 배로우갱은 도주하고 클라이드의 형 벅 배로우가 총을 맞고 중상을 입는다. 부상당한 벅 배로우와 블랜치는 이후 또다시 시작된 총격전 현장에서 체포된다. 벅 배로우는 결국 사망하고 블랜치는 10년형을 선고받았다. 보니와 클라이드는 15개의 은행을 털었는데 공교롭게도 첫 번째와 15번째의 은행은 같은 은행이었다. 보니와 클라이드가 턴 은행은 퍼스트 내셔널 뱅크라는 은행이었는데 현재 시점에서는 식당으로 운영 중이다. 1930년대 미국에는 갱단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금주법이 1920년 시행되었고 사람들은 밀주를 판매하기 시작했고 돈을 벌었으며 이를 통해 갱단도 많아졌다. 밀주 판매로 급성장한 대표적인 인물이 마피아 조직의 대표적 인물인 알 카포네였다. 1930년대는 대공황의 시기였다. 당시 은행은 공공의 적이었다. 당시 미국은 실직자가 넘쳐났고 세계 1차 대전으로 전쟁물자를 팔아 막대한 이익을 취했지만 종전 후 대규모 시장을 잃게 되자 많은 사람들은 일자리를 잃게 되었다. 시민들은 먹고 살기 위해 식료품을 절도했다. 이때 시민들의 재산 몰수에 앞장선 것이 은행이다. 그래서 보니와 클라이드의 은행 습격에서 사람들은 대리만족과 쾌감을 느꼈고 박수를 보냈다. 또 한 번은 은행을 털었는데 은행에 돈이 없는 기막힌 일도 있었다 그것은 은행이 파산한 은행의 한 지점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상황을 이해할 수 없으리라 여겼던 클라이드는 차에서 타고 대기하던 보니에게 직접 은행 직원을 데리고 가서 돈이 없는 이유와 형편을 직접 설명하게 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시민들이 보니와 클라이드에게 등을 돌리게 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텍사스에서 일어난 순찰 대원 살인 사건이다. 보니와 클라이드는 정차해 술을 마시고 있었다. 순찰을 돌던 머피와 휠러는 운전자에게 도움이 필요하다고 여겨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런데 클라이드가 순찰대원을 살해한 것이다. 머피는 결혼을 앞둔 22세의 청년이었다. 이런 내용이 보도되자 대중들은 그들을 나쁜 범죄자로 낙인찍어 버린다. 그런데 이후 밝혀진 사실에 의하면 헨리 메스 빈이 감형을 받는 조건으로 두 명의 경찰관을 자신이 죽였다고 진술한다. 보니와 클라이드의 인기에 찬물을 끼얹기위한 당국의 언론 플레이였다는 설도 있었다. 배로우갱은 멤버들 가족의 집을 기착지로 삼는 특성을 보여주었다. 1934년 5월 23일 두 범죄자는 깁스랜드를 방문한다. 그곳에는 헨리 메스 빈의 아버지가 있었다. 프랭크 헤이머는 헨리 메스빈의 아버지와 협상을 한다. 적극적으로 그들을 잡는데 협조를 하면 아들을 감옥에 보내지 않겠다고 한 것이다. 보니와 클라이드를 추격하기 위한 추격자 6 명은 두 명이 올 것으로 예상되는 헨리 메스번 아버지의 집 근처의 숲 속에 장총과 권총을 겨누고 둘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려며 매복에 들어간다. 드디어 둘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포위망에 걸려들게 된다. 매복조는 130발을 발사하여 둘을 즉사시킨다. 차량에 박힌 수많은 탄환의 자국에서 그 당시의 처참했던 모습이 그대로 보도되기도 했다. 결국 둘은 2년여에 걸친 범죄 행각에 종지부를 찍게 된다. 혹자는 아무리 잔혹한 범죄자라 할지라도 그렇게까지 잔인하게 학살을 했어야 하는가 라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그나마 둘의 얼굴에는 총알이 명중되지 않아 얼굴을 식별할 수 있는 정도였다고 한다. 두사람은 결국 각자의 가족 묘지에 안장되고 희망과 바람대로 둘이 같이 묻히지는 못했다. 장례식에 22천 명이 운집해서 그들의 영혼을 위로하기도 했다. 클라이드가 그렇게 오랫동안 추격을 피해 범죄 행각을 할 수 있었던 요인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첫 번째는 탁월한 그의 운전 솜씨였다.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의 운전실력을 갖고 있었다. 카레이싱 선수처럼 운전연습을 했다. 전속력으로 달리면서 자동차를 회전시키는 드리프트도 했다. 그는 포드사 차 1934년식 포드 V8을 타고 다녔는데 최후의 차량 트렁크에는 수십개의 차량 번호판이 발견되기도 했다. 그는 직접 포드사 회장에게 좋은 차를 만들어 주어 감사하다는 내용의 사연이 담긴 편지를 보내기도 했고 포드사는 그 편지를 이용해 포드 차량 판매에 열을 올리기도 했다. 올해로 그들이 죽은 지 90년이 지났지만 매년 5월 23일이 속한 주말에 이틀동안 깁스랜드에서는 보니와 클라이드를 추억하는 축제가 펼쳐지기도 한다. 보니와 클라이드의 복장을 하고 그들이 탔던 차량을 몰고 매복지로 가서 최후의 장면을 재현하기도 한다. 또한 그 둘이 최후로 먹었던 샌드위치 음식점 등은 오늘날에도 그대로 재현해서 불티나게 판매가 되기도 한다. 참으로 안타까웠던 사건이었고 암울한 시대가 낳은 웃지 못할 해프닝이라 할만한 부분이다. 두 번째는 그의 사격 솜씨였다. 명사수로 이름이 났고 1대 1 대결에서는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솜씨를 보였다고 한다. 그리고 세 번째는 주경계를 효율적으로 넘나들며 추격을 따돌릴 수 있었던 점이다. 네 번째는 신출귀몰할 수 있었던 부분은 대중적인 호응을 받았고 대중들이 그의 얼굴이 알려졌음에도 신고를 꺼렸고 경찰에도 비협조적이었고 그들을 비호하는 부분도 있었다. 그들은 범죄를 저지르는 중에서 한 인질을 풀어주었다. 그의 직업은 장의사였고 딜라스 다비라는 이였다. 보니와 클라이드는 그에게 여비까지 쥐어주며 풀어주었고 자기들이 죽으면 잘 장사 지내주기를 부탁했었다. 실제로 그 장의사는 그 둘이 죽은 후 장례식을 직접 치러주기도 했다고 전한다. 보니와 클라이드는 영화화되기도 했고 뮤지컬로도 상영되었고 수많은 음악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어 노래로도 작곡되기도 했다. 우리식으로 해석하자면 대도 조세형이나 연쇄 살인범 신창원 등과 비슷한 부분도 없지 않다. 그냥 말그대로 희대의 범죄자일 뿐이나 이들의 행각에 박수를 보내고 추종했던 것은 일상의 삶이 너무 궁핍했고 암울했던 부분이 그들에게서 조금이나마 위로를 얻고자 했고 희망을 품고자 했던 간절함이 있었으리라.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고 불행한 시대의 한 단면이었으리라.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저승에서나마 편안하고 행복하며 안정된 생활을 영위하길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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