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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수필

3. 강희자전과 감투

by 자한형 2021. 1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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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자전과 감투 김용준

단권으로 된 "강희자전"(청나라 강희제 때의 '옥편'을 포함해서 역대의 자전을 집대성한 중국 최대의 자전)이 한 권, "단씨설문해자주(段氏說文解字注)" 축쇄판(크기를 작게 하여 인쇄한 출판물)이 한 갑. 그리고 이 밖에 또 무슨 책이던가 두어 가지를 합해서 끼고 나오면서, 큰 구실이나 하러 가는 것처럼 마누라더러,

"내 곧 다녀올게. 잠깐만 기다리우." 하고는 쏜살같이 명동으로 향했다.

내 속 요량으로는 '오늘 수입에서 적어도 쌀 한 주발과 고깃근을 살 수 있으려니.' 싶어서 몇 달 만에 지글지글 고깃점이나 구워 먹을 행복을 머리에 그리면서 나선 판이었는데, 의외에도 내 공상은 공상대로 돌아가고 말았다.

"모두 백 원 드리지요. "강희자전"만은 대접해서 오십 원을 쳤습니다. 그래도 이걸 칠십 원 받는다 쳐도 이십 원밖에 못 얻어먹는 폭입니다."

쌀 한 말에 팔백 원 하는 세상에 "강희자전" 값이 겨우 칠십 원밖에 안 된다는 것이 책을 사는 양반의 말씀이다.

나는 어이가 없어 눈만 떴다 감았다 할 뿐이었다.

그렇다고 다른 책사(冊肆, 서점)에를 가 본댔자 대동소이한 말만 들을 것 같고, 또 그걸 가지고 상판 광고나 시키는 것처럼 이 집 저 집 기웃거릴 맛도 없고, 더구나 그의 말이 어쨌든 '대접해서 오십 원 쳤다.'는데 비록 천금 값어치가 된다손 치더라도 '여보, 당치 않은 소리요, 안 되오.' 하고 빼앗아 가지고 돌아설 용기도 안 나서 그야말로 복잡미묘한 심리에서 "! 그러우." 하고서는 주는 대로 백 원 돈을 받아 가지고 나서면서 이를 꽉 물었다.

세상이 하도 살기가 어려워서 가다오다 말말끝에 "무어니 무어니 해도 장사가 제일이야. 그래도 서생이 할 수 있는 장사는 책 장사밖엔 없어." 하면 "책 장사? , 그보다는 고리대금이 몇 배 낫지." 하는 친구가 있어, 저 사람이 무슨 말을 저렇게 하나 했더니, 하긴 당해 놓고 보니 그 친구가 역시 경험 있는 소리를 했구나 싶었다.

그 뒤로 나는 사흘이 멀다 하고 내 "강희자전"이 팔리지나 않았나 싶어서 그 책사에를 풀 방구리에 쥐 드나들 듯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돈만 생기는 날에는 그가 말한 대로 칠십 원을 주고 다시 회수하리라는 생각으로 부리나케 드나들어 보았으나, 요행으로 내 "강희자전"은 열흘이 지나고 보름이 지나도 꽂아 둔 그 자리에 그대로 꽂혀 있었다.

꼭 한 달 만에야 겨우 돈 칠십 원을 마련해 가지고 갔다.

"여보, 이 책 나 삽시다." 하고 "강희자전"을 뽑아서 옆구리에 끼면서 돈 칠십 원을 주인 앞에 던졌다.

주인은 안색이 별안간 창백해지면서,

"그건 파는 책이 아닙니다." 하는 것이다.(책방 주인은 70원보다 더 많은 값을 받고 책을 팔려고 생각했는데, 내가 70원에 되살려고 하니까 당황해서 한 말임.)

"안 파는 책이 어디 있단 말이요. 당신이 오십 원에 사서 이십 원을 붙여서 칠십 원을 받는다고 그러지 않았소?"

"아닙니다, 그러지 맙쇼. 두고 보려고 합니다."

주인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면서 내 옆구리에서 곧 "강희자전"을 도로 빼앗을 것같이 굴었으나, 나는 잠자코 문을 열고 길로 나서고 말았다. 길을 걸으면서 나는 또 이런 생각을 했다.

 

'저 친구가 내가 갔기에 망정이지, 다른 사람이 갔더라면 필시 한 오백 원쯤은 받았으렸다.'

아무튼 생산력이 왕성한 세상임에는 틀림이 없어. 오십 원이란 놈이 열흘에 백오십 원씩 마구 새끼를 치는데. 이놈이 고작 한 달 만에 아홉 배 새끼를 치는 셈이다.

문명(門明)한 나라에서는 좁은 국토에 생식이 과다할 때는 산아 제한을 국책으로 강행한다는데……. 위정자, 모름지기 일고(一考)를 촉()할 만한(깊이 한번 생각해 봄직한) 이야깃거리다.

* "강희자전"을 팔았다가 되사 오면서 느낀 점

지난 여름에 시골서 교장 노릇하는 G군이 오래간만에 찾아왔다.

"자네 웬일인가?"

"? 감투 하나 쓰러 왔네." (벼슬, 관직에 대한 욕망을 드러냄.)

"정말인가?"

"그럼 거짓말로 아나?"

정계(政界)에 매일같이 감투 쌈이 벌어지고 장안 안 여관마다 감투 사러 온 친구들이 뒷간에 구더기 끓듯 한다는 소문이 신문마다 벅적거리는데, 난생 처음으로 교장 노릇도 해 보니 그깟 놈의 것 아무것도 아닐레, 나라고 감투 못 쓰란 법 있을라구, 에라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되겠다. 그는 이러한 생각 끝에 전후불고(前後不顧, 앞뒤 돌아보지 않고)하고 서울로 튀어 올라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막상 올라와서 동정을 살펴보아 한즉, "그 감투란 것 좀체로 쓰기 어렵데. 하불실(下不失, 아무리 적어도) 십만 원은 있어야 겨우 술잔 값이나 될는지 모르겠데."

허나 이 기회에 꼭 감투는 쓰고 내려가야겠는데,

"자네는 광면(廣面, 교제가 넓어 아는 사람이 많다)한 친구이니까 혹 그럴듯한 곬(, 방법)이 없겠느냐."는 것이다.

나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현상은 G 한 사람에 한한 것이 아니요, 이렇기 때문에 세상은 썩을 대로 썩어 가는 것이지만, 우선 아쉬운 대로 나는 G에게만이라도 충고할 의무를 느끼고서 이렇게 권고해 돌려보냈다.

"실례일지 모르나 자네는 세상을 좀 더 알아야 하네. 껍데기 세상만 보지 말고 속껍질을 벗기고 그 속에 있는 세상을 보아야 하네. 감투란 원래 값이 비싼 것이 아닐세. 아니라기보다 한 푼어치 값도 없는 것이요, 또 값이 있을 수도 없네. 감투가 돈으로 환산되는 날 세상은 망하는 날일세. 왜 그러냐 하면 감투를 밑천 들여서 사는 날 벌써 감투 밑천을 뽑아야 할 생각이 안 나겠나? 가령 책 장사가 "강희자전" 한 권을 오십 원이고 백 원이고 주고 샀다 치세. 학자 아닌 책 장사가 자기 신주덩어리가 아닐 바에야 그 책을 가보로 모셔 둘 리 없고, 팔게 될 경우에는 본전만 받고 팔겠나? 오백 원이고 육백 원이고 흠뻑 이()를 남겨야 팔 것 아닌가. 이를 테면 자네는 책 장사(돈이나 권력 등을 정도 상식 이상으로 탐내는 자), 감투는 "강희자전"(진정한 가치를 잃은 돈벌이의 수단)이란 말일세."(책 장사가 책을 사고 팔 때 이익을 보다 많은 이익을 취하려 하는 것처럼 돈을 주고 감투를 사면 당연히 들인 돈 이상의 이익을 취하고 싶어할 것이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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