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수필2203 38. 낙화암을 찾는 길에 낙화암(落花岩) 찾는 길에' 이병기(李秉岐) 백제 왕릉을 보고 얼마쯤 가면 신작로가 나선다. 이 길로 들어가노라면 조그마한 산 하나가 가로놓여 있고, 그 산 밑으로는 초가 혹은 기와집들이 연해 있고, 집과 집 사이 부근에는 나무들이 수두룩히 서 있어 바야흐로 우거진 녹음이 새롭게 보인다. 여기를 처음 오는 사람으로도 ‘저기가 부여 읍내다’ 하는 생각을 얼른 나게 한다. 사람을 볼 때에는 첫눈에 드는 얼굴이 있다. 첫눈에 드는 얼굴은 눈이나 코나 입이나 귀를 똑똑히 다 본 것이 아니고 눈도 코도 귀도 입도 아닌 그러한 얼굴이다. 이와같이 글의 첫눈에 드는 부여는 저 산도 아니고, 집도 아니고, 나무도 아니고, 다만 그러한 부여만이다. 그리하여 나는 부여를 처음 볼 때부터 사랑한다. 부여에 드는 길로 평제탑.. 2022. 1. 5. 37. 금강산기행 금강산 기행 이광수 우리는 점심을 먹고 이럭저럭 한 시간이나 넘게 기다렸으나, 이내 운무가 걷히지를 아니합니다. 나는 새로 두 시가 되면 운무가 걷히리라고 단언하고 그러나 운무 중의 비로봉도 또한 볼 만한 것이다 하며 다시 올라가기를 시작했습니다.동으로 산마루를 밟고, 줄 타는 광대 모양으로 수십 보를 올라가면, 산이 뚝 끊어져 발 아래 천 길 낭떠러지가 있고, 거기서 북으로 꺾여 성루 같은 길로 몸을 서편으로 기울이고 다시 수십 보를 가면 뭉투룩한 봉두에 이르니 이것이 금강 만 이천 봉의 최고봉인 비로봉의 머리외다. 역시 운무가 사방으로 막혀 봉두의 바위들밖에 아무것도 보이지 아니합니다.그 바윗돌 중에 중앙에 있는 큰 바위를 '배바위'라 하는데, '배바위'라 함은 그 모양이 배와 같다는 것이 아니라, .. 2022. 1. 5. 36. 양잠설 양잠설(養蠶說) - 윤오영 어느 촌 농가에서 하루 저녁 잔 적이 있었다. 달은 환히 밝은데, 어디서 비오는 소리가 들린다. 주인더러 물었더니 옆방에서 누에가 뽕 먹는 소리였었다. 어려 누에가 어석어석 다투어서 뽕잎 먹는 소리가 마치 비오는 소리 같았다. 식욕이 왕성한 까닭이다. 이 때 뽕을 충분히 공급해 주어야 한다. 며칠을 먹고 나면 누에 체내에 지방질이 충만해서 피부가 긴장되고 윤택하여 엿빛을 띠게 된다. 그 때부터 식욕이 감퇴한다. 이것을 최면기 라고 한다. 그러다가 아주 단념을 해 버린다. 그러고는 실은 토해서 제 몸을 고정시키고 고개만 들고 잔다. 이것을 기잠(起蠶)이라고 한다. 이 때에 누에의 체질은 극도로 쇠약해서 보호에 특별히 주의해야 한다. 다시 뽕을 먹기 시작한다. 초잠 때와 같다. 똑.. 2022. 1. 5. 35. 해바라기 해바라기 /유진오 이렇다 할 아무런 업적도 남긴 것 없이, 벌써 인생의 절반을 살아온 내다. 20 전후의 불타오르는 듯하던 정열을 생각하면, 지나간 열다섯 해 동안 무엇을 해 온 것인지, 스스로 생각해도 모르겠다. 내깐으로는 허송세월은 하지 않노라고 해 왔는데 결국 이 꼴이니, 앞으로 남은 반생이 또 이 꼴로 지나가 버리면 어찌 될 것인가. 송연한 노릇이다. 그전에는 내 나이 젊은 것을 핑계 삼고, 누가 무엇을 쓴 것이 몇 살, 누가 무슨 일을 한 것이 몇 살 하고, 스스로 자신의 무능을 위로해 왔다. 그러나 어찌어찌 하다가 보니, 그렇게 스스로 위로하던 누구누구의 나이를 어느샌가 나 자신이 넘어서고 말았으니, 이제는 무엇으로써 스스로 위안할까. 환경을 따져 보고 시대를 원망해보고 해본 댔자 무슨 소.. 2022. 1. 4. 이전 1 ··· 39 40 41 42 43 44 45 ··· 5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