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단편 소설

어떤 파리

자한형 2022. 2. 17. 2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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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파리(巴里) -박순녀

 

낮의 소음이 점점 가시는 고충 빌딩의 사무실 안에서 우리는 좀체 일어서지 않았다. 우리의 대화는 바야흐로 장소와 시간을 넘어서는 흐름의 중류(中流)에 이르러 있었다. 우리는 어쩌다 동경이며 정열, 열망 같은 도처의 입김이 느껴지는 황금의 화제에 이르러 있었다. 우리가 파리에 가게 되면 첫째로 무엇을 느낄까,

우리는 -에어 프랑스-의 비행기표를 이미 속주머니에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처럼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홍재는 그 큰 눈을 굴리며 존경하는 여인에게처럼 나에게 말했다.

나는 느낄 거예요, 진정한 자유를 말입니다. 파리의 한복판에서 언론의 자유를 말예요. 류샤는 무엇을 느낄 것같아요?

지연이란 아주 한국적인 내 이름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만주벌판에서 함께 크던 때의 류샤를 지금껏 기억해주고 있는 홍재다.

나는 나는-----,

나는 더듬거렸다. 약간의 어린 부끄러움이 섞이어 나왔다.

나는 홍재씨, 사랑,,,,,, 사랑 같은 것을 생각할 거예요.

자유, 언론------홍재와 겨를 수 있는 당당한 말은 나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역시 그런 낱말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 나에게 어울리는 이야기는 꿈 같은 눈매로 지껄이는 갈망 섞인 사랑, 그리고 사랑의 주변을 서성대는 여자, 우리의 특기 같은 그런 것으로 고작이었다.

사랑입니까? 그것은 흡사 어느 혹인의 이야기와 같군요.

그의 화제 처리 솜씨는 언제나 이렇게 광범하고 국제적이다.

북미대륙에서 굴욕적인 인종 문제로 폭도화 됐던 어느 흑인의 이야깁니다만 그가 파리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는군요. 불덩이 같은 노여움에 떨며 미국과 백인에 핏발진 눈알을 휘 번득이던 그가 그러나 파리로 향하는 뱃속에서 이상한 변모를 맛보았습니다. 배가 항구를 뜨는 순간. 미국 대륙이 그의 시야에서 미처 벗어나기도 전에 지금껏 그를 붙잡고 놓지 않던 국가며 인종 같은 불꽃 튀던 문제들이 환영처럼 사라지고 남는 것은 오직 너와 나의 문제뿐이더란 겁니다.

자기를 둘러싸는 사면이 고요해지면서 비로소 너와 나만이 남는 곳, 그것이 파리더란 이야기예요.

이 파리의 이야기, 우리의 환상 속의 파리의 하늘, 그 도피의 도시,,,,,, 파리와 너무도 동떨어진 곳에서 사는 우리는 우리의 사는 곳을 의식하면 파리가 우리 생의 환희의 상징이나 되는 것처럼 파리의 이야기를 지껄이곤 한다. 세계에서 오직 하나 미워하지 않을 도시로 남겨놓은 듯한 곳, 그 파리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우리는 허망한 만족, 현실의 자기에 대한 잔인한 복수를 즐기는 습성이 있었다.

십 년을 살아서 파리의 지린내를 겨우 알겠더란 놈을 보았어요. 마찬가지로 파리를 스쳐오고 파지를 말하는 놈도 봅니다만 똑같이 그들은 존재하지 않는 국가. 존재하지 않는 인종에 열병을 앓는 무리지요. 우리에게 열병을 앓을 수 있는 자유란 욕구불만의 현실에 대한 복수가 아니겠어요. 우린 그런 숨구멍을 자신에 대한 무기처럼 키우고 있단 말예요.

그의 어조는 완전히 도취경에 빠져 있었다.

홍재씨 ,,,,,,

나는 그를 불러보았다. 파리는 우리가 진작 해야 하는 이야기의 전주곡에 불과하다. 그 이야기에 이르는 먼 여정(旅程)이다. 그것은 우리 서로가 빤히 아는 일이면서 우리는 파리에만 매달리어 우리가 할 이야기에서 도피하고 있는 것이었다.

기억하세요, 홍재씨? 우리가 망국의 백성답게 혹한(酷寒)의 형벌을 받으며 만주 벌판에서 크던 시절을 말예요. 그때 우리 마음속에서 크던 먼 훗날에 대한 무지개를 말예요. 기억하시죠?

진영이 이야기가 하구 싶군요.

마침내 진영이 이름은 튀어나왔다.

지금 거리에 꽉 차 있는 화제, 홍재가 의식적으로 말하고 싶어하지 않는 그 이야기를, 그 일반적인 성질을 떠나서 나는 그와 꼭 이야기하고 싶었다.

홍재는 사무실의 기물처럼 의자 속에 아무렇게나 쑤셔 박혀져 있던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우리에게 진영이 이야기는 결렬된 민족이란 비극성을 내세우고 덤벼도 결코 동정할 것은 못돼요. 다만 쇼킹한 것에 불과하죠. 국가를 십 년 이상 떠나 있는 사람들이 제 나라의 뭘 압니까.

그렇지만,,,,,,

나는 너무도 단호한 그의 말에 놀랐다.

진영이 이야기가 아니에요? 내가 펑치를 말하자는 것이 아닌 것을 잘 아시면서.

정치를 떠나서 우리에게 뭐가 있어요? , 있긴 하나 있군요. 이 나라의 상류계급에 속해 파리로 갔다가 간첩사건에 묶이어 우리에게 돌아온 그들에게, 꼬박 이 나라 속에서 갇혀 산 우리가 우린 너희 걱정을 할 수 없다고 소리칠 수는 있겠군요. 그러나 진영이에게 그럴 순 없다는 것이 류샤나 마찬가지 내 심정입니다. 아시겠어요?

모르겠어요!

, 이래서 그는 그 얘기를 퍼하고 있었구나. 이렇게 분명히 지금은 진영이라는 이름을 거의 잊은 상태가 돼서 우리 공유(共有)의 시절을 인정치 않으려는 것이었구나.

내가 아직 여학생이던 시절, 무지개를 이야기하던 한자리에서 진영이가 있었다. 그 무엇인가 방황하던 진영이의 소녀티의 눈길을 나는 홍재가 지금도 기억하고 있을 것으로만 생각했다. 그때의 염원대로 홍재는 지금 세계수준에 겨루기를 좋아하는 독자를 가진 시인이 됐고 진영이도 파리란 예술의 거리를 산책할 수는 있는 신분이 됐다. 다만 나만이 일개 외과 개업의 아내가 되어 우주공간에서 궤도를 잃은 끝날 길 없고 목적 없는 위성모양 지난날의 무지개 대열에서 탈락해 버렸다.

홍재씨. 어쩌면 진영이를 그렇게 잊고 말았어요? 우리가 아는 진영이는 결코 공산주의자가 될 소질이 있는 애가 아니지 않았어요 ? 그것을 우리가 증언할 의무가 있지 않아요?

류샤 마음속엔 아직도 영웅이 살아 있군요.

그럼 홍재씨는 진영이를 위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말씀이에요?

할 수 없습니다.

왜요, 왜요!

물론 진영이는 남한의 주민이라면 듣기만 해도 쇠뭉치로 때려주고 싶어하는 간첩 사건으로 묶이어왔다. 오랜 해외 생활에서 무슨 특권 같이 평양까지 내왕하면서...... 사실이지 우리 건국 사상 정보 사범 중 이렇게 제 조국을 완전 배반한 어마어마한 사건이 있었던가. 그것이 진영이가 당하는 일이 아니었던들 홍재가 말하듯이 이 나라의 상류 계급에 속해 있는, 서민의 현실에서 멀리 사는 그들의 수난을 나는 염려할 필요가 없었다, 아무리 내 머리를 박애, 인도주의로 씻어내도 나는 그들의 죽음에 이의를 제출치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같은 무지개 클럽의 진영이가 당하는 일이었다. 나와 같은 과거에 속했고 내가 너무도 잘 아는 내용의 이야기를 나누던 진영이었다. 그녀가 남편과 함께 묶이운 신문지상의 사진과 더불어 고국에 돌아왔다. 죽으러, 그렇다. 죽으러 왔다, 간첩 사건에 연루된 자를 보면 우리는 그렇게 단정하고 싶어한다. 그렇게 단정하는 데 있어 조금도 무리를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그 신문을 앞에 하고 묘한 일에 감격하여 마음으로부터의 갈채를 진영에게 보냈다. 남편이 묶이어와도 무사할 수 있는 아내가 아닌 것이 나를 떨리도록 감격케 한 것이다. 우리의 오욕, 저 부부가 뿔뿔이 헤어져 쫓겨다니던 6. 25에서 그 고독을 넘어서 우리도 이까지 왔구나, 나는 그런 일에 감회와 자랑을 느꼈던 것이다.

남편과 아내가 따로따로 그 인생을 걷는 일에 나는 참을 수 없는 모멸을 가지고 있다. 전란을 당해 그 화를 피할 때 남자 혼자만을 떠나보내는 부부관계가 견딜 수 없었다. 잠시의 피난으로 알았다고도 하고 도저히 행동을 같이할 사정이 아니었다고도 말들을 했다. 아니다, 한국적인 너무나 한국적인 편리 위주의 남자와 여자 관계가 나를 절망케 해왔다. 아내 앞에서 남편이 쓰러지고, 남편 앞에서 아내가 죽어 넘어지는 남녀 결합의 투철함이 우리에겐 왜 없을까, 그래서 우리의 비극은 감동이 없고 오로지 비참할 뿐이다. 내가 묶이어온 진영에게 감격하는 이유를 이해 못하는 사람은 못해도 좋다. 나는 부부가 함께 묶이어온 진영에게 내 감격을 표시하지 않을 수 없을 따름이다.

그래 류샤는 그들을 위해 진정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있고말고요.

나는 거의 자포자기로 소리쳤다.

남이 피할 때 나는 접근할 수 있고요. 남이 죽이라고 소리칠 때 나는 살리라고 소리칠 수 있어요. 그리고 그것을 하는 것이 옳다는 판단에 도달해 있어요?

왜 나는 이다지도 자신 없는 벅찬 소리를 지껄이고 있을까. 조국을 등진 자들을 위해 조국 안에서 시달림을 받은 홍재에게 말이다.

나는 류샤에게 충고를 하고 싶은데 우리 사정이 감상을 알아줄 때가 못됩니다.

감상일까요?

아니라고 나는 철학적인 풀이를 내세울 자료는 없다.

모든 것은 처리될 대로 처리되는 거예요.

그래서 홍재는 지금도 파출소 앞을 구보로 지난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구보로 지나기까지 그는 우리의 아들이차 이웃이 보초 서 있는 그 파출소 앞을 지나는 방법을 몰랐다.

파출소 뒤를 발소리를 죽여 순경이 보면 체포하고 싶어지지 않을 수 없는. 그런 방법으로 돌아다니곤 했다. 지금은 그 앞을 떳떳이 구보로 다니는 대담성이나마 가지게 됐지만 그의 머리의 일부분은 확실히 정상적인 사고를 할 기능을 상실하고 만지도 모른다. 그는 국사가 아무리 양해해준다고 공약해도 6. 25에 의용군으로 나가 조국을 저버릴 뻔했던 치명적인 과오를 잊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5-16이 났을 때 그는 상기되어 번들거리는 얼굴로 나에게 쫓아왔다.

지금 나는 피신을 가는 길입니다.

묘하게 기분이 앙등된 목소리였다.

홍재씨가 왜? XX정권에 장인이라도 있었던가요?

xx정권이 문제 아니라 정권 교체시의 예비검거를 하고 싶어할지 모르니까요. 그럴 때마다 시효가 되살아나거든요.

여전히 영웅적이다.

, , 수고스럽습니다. 어디 절간에라도 처박혀 있을 작정예요?

댁에 좀 망명처를 구할 수 없어요? 세상이 궁금해서 멀리 가 있을 수야 있습니까.

방조죄에 걸리면 어쩌라구요.

나도 마침내는 어떤 드릴의 예감에 신선한 흥분을 느껴 싱글대며 말했다.

결국 그는 우리 병원에 있게 됐다. 외과의의 수술 광경을 이런 기회에 한번은 꼭 보아두어야겠다며 입원실 한구석에 처박혀 있었다.

그의 예측은 적중했다. 그리고 우리의 상식도 맞아 들어갔다. 해산하는 아내의 머리맡을 지키고 앉았던 신문인이 연행됐다. 매스콤에 이름이 잘 팔리던 정치교수가 잡혀갔다. 죄가 없으니 걱정할 것 없다며 동료 시인이 역시 연행됐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홍재는 교통 신호를 무시한 국민학생 같은 부끄러운 얼굴로.

알고 보면 아주 소심한 녀석인데 무슨 필요로 잡았을까.

하고 중얼거렸다.

그후 며칠동안 그는 자기 입원실에서 나오지 않았다. 밀고라도 당할까봐 극도로 경계를 했다. 우리 병원에는 차실 신체적 고통으로 신경이 날카로와 언제 어떤 환상적인 착각을 일으킬지도 모를 환자가 많았다. -, 빨갱이 빨갱이!>하고 환자가 헛소리라도 크게 치는 날이면 그대로 도망칠 수 있게 그는 밤에도 옷을 벗지 않고 잤다.

그러나 검거됐던 사람들이 별 심각성 없이 하나, 둘 풀려 나오자 그는 완전히 씁쓸한 얼굴이었다.

그 검거 명단에 나는 없었던가?

그렇다면 국가는 국민과의 공약을 지킨 셈이 된다.

그런데도 나는 왜 벌레 같은 이런 도피를 하는가.

왜소한 자기가 정말 싫어졌다.

아니면 추적하다 결국 단념한 것일까?

한가닥 불안이 아직도 가실 길 없으면서 그는 집으로 돌아갈 날의 그 늦지도 빠르지도 않은 시기가 잡기 어렵다고 투덜대기 시작했다.

오늘쯤 가본다?

하루만 더 지내봐요. 마지막에 가서 스타일 구기면 안되잖아요.

나는 그저 버릇처럼 말렸다.

내일은 말리기 없습니다.

저녁에 안방으로 오세요. 이별주를 드릴 테니까요.

그날 밤 우리 안방에서는 진짜로 망명생활의 일 막을 장식하는 맥주 파티가 있었다. 홍재는 알콜이 들어가자 좀 다변이 되어 서형, 서형을 연발했다. 외과의인 내 남편을 그는 그렇게 불렀다.

서형, 우리가 공산주의자가 될 수 있소? 서형이 공산주의자 될 수 있소?

흔히 마왕(魔王)이 판을 친다는 어둠 속에서 이런 말이 튀어나오자 만사에 세심한 외과의는 나에게 눈짓을 했다. 나는 일어나 창 밖을 내다보고 커튼을 당겨 경계하는 마음을 나타냈다.

홍재는 픽 웃었다. 그리고 계속했다.

서형이나 가나 우리는 언제나 지도를 받는 쪽이오. 이 지도 받는 쪽이 어쩌고 한마디 하면 저 자식 공산주의다, 하고 나온단 말예요. 도대체 권력은 필연적으로 반역자를 만드는 법 아니오. 반역자가 없는 것이 얼마나 비관이냐를 모른단 말예요, 우리 권력은.

외과의가 그 말을 받았다.

이 동네에 개구장이 녀석이 하나 있는데 아이들이 가기만 하면 때린단 말요. 우리 애 녀석도 늘 맞는 축인데 맞고 그리고 울고 왔으면 다신 가지 않으면 좋은데 또 갑니다. 어느 정도까지 접근하면 때리나 그걸 시험하러 가는 거예요. 이판 저판 한판 한다는 마음은 조금도 없이 패배주의예요.

에이 여보쇼, 그런 심한 소리 말아요. 이판 저판이 그렇게 쉬운 줄 알아요.

권력의 좌라는 것도 그리 쉬운 것은 아길 거요.

에이 여보쇼, 그렇다고 비겁을 자각증 없는 순응으로 알고 이 세상을 조용히 살란 말이오?

외과의는 시인의 원기회복이 우스웠다. 그래서 완전히 조롱조로,

그래서야 밤낮 주머니 털릴 판이지

하고 말했다.

그 소리 말아요.

홍재는 비명을 질렀다. 그것은 견딜 수 없이 즐거운 얼굴이었다.

어느 날 그는 술집에서 술김에 현정부를 비방하는 얘기를 했다가 앞에서 듣고 있던 대학생에게 호주머니 속의 돈을 모조리 털어 줬던 것이다, 물론 그 정부는 혁명 정부도 민주 정부도 아닌 4-19의 제물이 됐던 자유 정권이었다.

그 대학생이 정보원에 틀림없었을 거라는 홍재의 위구에서였다. 자기 이야기에 열성을 보여준 그 대학생을 그는 정보원으로밖에 더 볼 수 없었다.

대학생은 마구 털어놓는 돈을 받고 얼떨떨해서 홍재의 뒤를 미행했고 흥재는 그 미행을 따느라고 땅이 45도로 출렁이는 밤거리를 덮어놓고 도망쳤다. 그들은 완전히 쫓는 자와 쫓기는 자를 분간할 수 없는 엉망인 한밤의 추적전이었다.

서형, 내가 그때 말하고 싶었던 주제는 노 대통령이 이끄는 봉건지주적 정부의 비방 같은 것은 아니었단 말이오. 그 정체불명의 대학생이 하도 내 얘기에 열중하기에 그만 그런 곳으로 말이 흘러버렸지만 내가 진짜하고 싶었던 말은---

별안간, 들떴던 그의 말소리가 낮아졌다.

의용군으로 나갔다가 내가 반공 포로로 석방돼 돌아왔을 때 우리 어머니는 내게 물었어요, 너도 사람을 죽였냐구.

그의 낮은 목소리는 계속됐다.

나는 한참 생각하다가 대답했소. 어머니, 나도 물론 사람을 죽일 생각은 없었어요. 그러나 전쟁이라는 것을 설명해드릴까요. 내 옆의 친구가 그때 생각으로는 꼭 형제 같은 친구가 총에 맞아 쓰러집니다. 그 선량한 내 형제를 쓰러뜨린 총구멍이 저만치에 보여요. 내가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겠어요. 내 손가락은 방아쇠를 마구 잡아다닙니다. 어머니는 내 말을 듣고 아무 소리를 못했소....., 그 말이 내가 그때 해야 하는 주제였소. 그런데 그녀석이 내 말을 교묘히 유도해서 아차, 싶었을 땐 말이 이미 딴 데로 번진 게 아니겠소. 그건 확실히 지금도 자신을 말하는 전통적인 정보원의 수법입디다.

삶과 죽음을 이야기한 뒤의 방안에는 역시 한동안의 침묵이 있었다. 그 침묵을 깨고 외과의는 뜻밖일이만치 가볍게 물었다.

그 대학생의 눈빛을 잘 봤소?

눈빛? 본 것 같은데---

홍재는 애매한 확실성을 갖고 대답했다.

혹시 불그레 긴장된 안타까운 눈빛은 아니었소? 그렇다면 시골에서 올 하숙비를 기다리다못해 변소에 나갔던 김에 한잔 걸치러 온 빈 주머니의 지방 학생일지도 모르는데.

그럴까?

홍재는 자기야말로 불그레 취기어린 눈빛을 하고 한동안 외과의를 쳐다봤다. 그리고 그 장난기 어린 지방 학생론에 별 반격도 가하지 않고 그저 회상하는 얼굴로 침묵에 빠졌다. -지방-이라는 말에 극히 약한 홍재를 보는 외과의는 갑자기 그에게 절실해지는 친근감을 느끼며,

나도 정보원이 들으면 당장 수첩을 꺼내야 할 얘기가 있는데

하고 나를 돌아다봤다.

나는 다시금 일어나 어두운 바깥을 살폈다. 내 시야에 닿는 한엔 번쩍이는 안테나도 보이지 않고 나무 그늘을 더 어둡게 하는 잠복한 인물도 느껴지지 않았다. 바람이 죽은 여름 밤에 나른히 커튼이 간혹 경련하듯 잘게 떨리는 일이 있었다. 그것도 방안의 선풍기 때문이었다.

내가 이 세상에서 만난 진정한 리버럴리스트 얘길 이런 밤에 피력하지요.

외과의의 목소리에는 고요한 안정과 깊은 추억에 서린 감정이 섞여 있었다,

서울이 그들 손에 뺏겼던 또 바로 그때 얘기요. 학생이 잡혀서 그들 앞으로 끌려갔소. 정치범도 포로도 아닌 불운의 우리는 다만 죽음에 해당하는 무리들일 뿐이었소. 죽음 - 막상 닥쳐놓고 보니 그것은 운명론으로 처리되는 것도 아니고 뱃가죽이 등에 다 붙도록 십자가를 그어서 주의 손에 위임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소. 조국이 당당히 있고 그리고 젊은 우리는 새가 되어서라도, 벌레가 되어서라도 살고만 싶은 것이 아니었겠소. 사실 그렇게 죽을 순 없는 일 아니오. 그때 우리에게 삶으로도 죽음으로도 통할 수 있는 마지막 기적 같은 기회가 왔소. 한때 우리와 학우이던 월북한 여학생이 우리와 마주치게 됐단 말예요. 그녀는 자기가 아는 우리의 하나 하나를 불러냈소. 불리워 딴 방으로 옮겨진 우리 몇몇은 토색에서 아찔아찔해지는 적동색으로 변하면서 -살려 놓고 죽인다-고 광기 어린 소리로 중얼대었소. 그러자 새로운 공포가 전신의 땀구멍 하나 하나로 찐득히 솟아 나오는 것이 아니겠소. 오줌이 나오더군요. 우리는 오줌을 싸면서 임종하는 사자(死者)처럼 임종한 거지요. 여학생이라고 밖에 달리 불려지지 않는 그녀는 우리에게 협력을 요구했소. 북으로 함께 가서 협력의 길을 찾는 것이 목숨을 부지하는 교환 조건이라는 거야. 당연히 했을 말 아니오. 그러나 이미 임종한 탓인지 우리는 삶의 마지막 기회에 그 미련을 상실한 자처럼 그것을 거절했소. 되풀이 강요해도 거절했고, 민족에 봉사하는 충성이라고 호소해도 거절했소. 드디어 우리의, 이미 임종한 얼굴을 하나하나 눈 여겨 보고 나서 아주 낮아진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더군요. -할 수 없군요, 사상은 자유니까--- 나는 여러분을 놓아드립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목숨껏 일하기를 약속합시다.>

말을 잃은 커다란 감동이 우리를 휩쌌다.

우리는 그 자각증 없는 리버럴리스트를 꼭 껴안아주고 싶은 격정으로 괴로울 지경이었다.

그 러버럴리스트의 영향은 나에게 컸던 것 같소. 그녀가 국가와 민족을 위해 목숨껏 일하고자 말한 탓은 아니겠지만 그후에 나는 학생복을 벗고 전투에 참가했어요. 뺏겼던 서울에 되돌아오자 우리에게 첫째로 맡겨진 것은 부역자들의 처치였소. 원커나 원치 않거나 전쟁은 그런 자의 처치를 전투원에게 맡깁니다. 어느 날 밤 나는 그런 자들을 이끌고 처형장으로 갔소. 한 사람 눈이 가려지고 처형이 진행되는데 한 사나이가 눈을 가리기 직전, 할말이 없냐고 묻는 말에 잠깐 달을 보게 해달라고 대답했어요. 마침 밤하늘에는 싸움터의 피를 모조리 빨아올린 듯한 시뻘건 달이 떠 있었어요. 순간 달을 쳐다보는 사나이의 눈에 번쩍하는 것이 보이는 것 같았소. -- 나는 뜻도 없는 소리를 지르고 -잠깐---하고는 그 사나이에게로 다가갔소. 다가가 다시 들여다본 사나이의 두 눈은 도저히 죽여 없앨 수 없을 정도로 맑고 단순한 것이었소. 도저히 도저히,,,,,, 나는 <할말은?>하고 이미 물은 말을 또 물었소.

<내가 월남할 때 쳐다본 달도 저 달과 같았습니다.>

<그렇다면 월남자인가?>

<.>

<월남자가 진짜 빨갱일 수 없어!>

나는 크게 고함치고 그 사나이를 총부리 앞에서 끌어냈던 것이에요.

외과의의 이야기는 끝났다.

초저녁이 지나고 한밤중이 깊어가고 무덥던 기온은 새벽에 접어들면서 선듯선듯하게 추워졌다. 우리는 열대에서 한대로 날아온 사람 같은 굳은 표정들을 하고 날아 있었다. 그 사이 오줌 때문에만 세 사람은 번갈아 일어났다.

나는 슬프군.

홍재가 중얼댔다.

, 슬퍼, 슬퍼!

그는 눈물이 떨어지는 것같이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울고 있지 않더라도 그것은 우는 것보다 더 슬픈 모습이었다. 둥글고 길고 네모난 얼굴의 세 사나이가 얄타라는 곳에 모여 앉아 빚어 낸 그럴듯한 천하공론은 감사-를 전제하면서도 우리에게 이런 슬픔을 가져왔다.

비겟덩이의 비대한 몸집을 가누지 못하는 이 나라 지도층의 사람들에 이 소리를 들려주고 싶다. 생가하고 괴로워 해서 살이 싹 내려야 하는'건데.

홍재는 계속 중얼대고 있었다.

세 시군.

외과의는 팔뚝시계를 들여다봤다.

자야겠어.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잡시다.

증인대에서 증언을 마친 기분인 그는 쳐다보는 방청인 앞에서 빨리 없어지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새벽 세 시인 것도 알고 이미 잘 시간이 지난 것도 알면서 역시 그렇게 앉아 있었다,

나는 초야에 잠을 놓친 신부의 새벽 세 시를 생각해봤다. 지난날의 오늘로 이르는 행복했던 것만도 아닌 나날이 되새겨지고 오늘을 시작으로 미지의 이미 스타트한 앞날이 거창한 기대와 함께 밀어닥친다. 행복해지고 싶다 ! 나는 조그맣게 외과의에게 주의를 건넨다.

당신, 아무데 가서나 그런 소리하는 거 아니에요.

홍재가 문득 떠오르는 미소와 함께 나를 보았다,

이 사람은 가끔 아들을 열이나 길러낸 어머니같이 이런 소리를 해요.

외과의가 약간 행복하고 나머지는 우둔스럽다는 얼굴로 이런 주석을 붙였다.

나는 웃음을 머금은 채 지금이 아닌 언제고 외과의가 살려준 그 맑고 단순한 눈매의 사나이 이야기를 마저 들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때 병원 대문이 면해 있는 길 안으로, 아니 대문 밖에서 사람 소리가 들렸다.

무슨 사람들일까?

외과의가 긴장되며 귀를 모았다. 우리도 불길한 예감이 몸 속을 직선으로 달리는 것을 느꼈다.

환자 아닐까요?

나는 말해보았다.

글쎄,,,,,,

그러나 요즘 통금시간을 무릅쓰고 달려오는 환자는 선을 그은 듯이 끊어졌다. 그것은 비상시를 당하면 인체에 나타나는 수긍할 수 있는 변화였다.

대문을 두드려 댄다.

홍재씨 ,,,,,,

내가 외치는 것과,

역시,,,, ,,

하고 홍재가 일어서는 것이 동시였다.

우리는 일순에 모든 사태를 짐작했다.

내가 나가겠어.

외과의는 숨을 짧게 마시고 나서 X레이실 다락 속에 숨으라고 지시했다. 거기는 계단 밑의 고대 사원의 범죄적인 지하실을 방불케 하는 창고하고 통해 있었다. 홍재는 무언 속에 지시를 따랐다.

여보시오, 여보시오.

소리가 들려온다.

다시 분석해봐도 환자를 떠메고 온 방황과 애원이 섞인 목소리는 아니다. 저력이 있다. 나는 재빨리 외과의에게 잠옷을 건네고 맥주 컵들을 책상 밑으로 밀었다. 꾸무럭대며 외과의가 나간 뒤 이불을 끄집어내어 방구석에 말아 붙였다. 그것으로 부부가 깊은 잠 속에서 안면을 방해 당한 듯한 방 분위기를 조성하여 남을 속일 수 있을까 없을까. 나는 방안을 휘둘러보며 판단해보려 했다. 그것을 업으로 그것을 육감과 경험을 통해 오늘까지 되풀이해온 그 사람들이 용케 속아줄까. , 인간이란 1초 후의 일을 알 수가 없구나.

무작정 움직여 확인해야만 안정의 꼬투리라도 얻을 것 같은 다급한 마음의 나는 X레이실로 가려다 도로 주저앉았다. 야밤중에 수사진이 들이닥칠 때는 알 수 있는 일이다. 출구마다 천리안의 사나이가 검은 새처럼 깔려 있고 집안은 번번이 밤잠을 설쳐야 하는 직업의 사나이들의 신경질로 집요한 수색을 당하리라. 목소리는 이미 현관으로 올라섰다. 맞으러 가야 하나?

, 수고했어요.

그럼 가보겠습니다.

낯선 목소리가 주고받는다. 도로 돌아서는 사람이 있다. 동네사람이 길 안내라도 선 것일까, 신고자일까, 홍재가 위구했던 대로? 발소리는 문 앞에 이르고 있다. 나는 벌떡 일어섰다.

이리 들어오세요.

외과의는 방문을 열었다. 두 사나이가 들어섰다.

밤중에 미안합니다.

플래시를 든 사나이가 말했다.

이제 그 플래시를 내두르며 어둠마다를 찾아 긴장의 망을 펴갈 그들이지만 뜻밖에 목소리는 싹싹했다.

우리 이런 사람입니다.

호주머니의 수첩을 꺼냈다. 외과의와 나는 그 수첩을 충분한 시간을 들여서 확인했다. 그 수첩의 위력이 이제 우리의 목을 숨쉴 수 없이 뜨겁게 조여댈지라도 그러는 것이 그때의 우리에게 남겨진 오직 하나의 권리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었다. 수첩은 분명히 그들 신분을 제시하고 있었다. 우리의 불행한 예감은 조금도 어긋나 있지 않았다. 다만 우리의 근거 없이 얻어진 예측과는 달리 질풍같이 나타나 백 개의 문을 한꺼번에 열어 제끼며 -문답 무용-하고 그들은 소리치지 않았을 따름이다. 그들은 과히 서두르지 않고 고압적도 아니게 일을 시작했다.

서 아무갭니까?

.

부인입니까?

댁에 서건이라는 아홉 살 난 B국민학교 삼 학년 재학의 남자아이가 있지요?

. 우기 큰앱니다만.

나는 대답했다.

지금 있어요?

자고 있습니다만.

어느 방입니까?

저 방입니다만.

나는 건넌방을 가리켰다. 이 새벽의 비상같은 사태 속에서도 건은 그 견고한 잠을 방해 당하는 일없이 분명 자고 있을 것이었다.

그 애가 어쨌습니까?

외과의는 내 아들이,,,,,, 하는 우선 경이와 그것이 무엇인지 짐작도 못하는 데서 오는 묘한 얼굴이 되어 물었다. 30원 짜리 뿔난 요물의 탈바가지를 쓰고 아버지를 놀랜다고 수술중의 방문 앞에 숨어 있곤 하는 그 아홉 살 짜리가 이 혁명의 사후 조처와 무슨 연관이 있단 말인가.

좀 알아봐야 할 것이 있어서 그래요.

단호히, 내막에는 언급 없이 무수한 죄인에 준하는 사람들의 애소에 24시간을 넌더리났던, 비슷한 인상의 사나이의 따나가 말했다. 우리는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깨워 올까요?

나는 물었다.

아니. 그리로 가지요.

여유를 두지 않는 대답이었다.

아홉 살 짜리의 탈출,,,,,, 손을 써야 하나 쓰지 말아야 하나. 변두리 파출소 순경도 아닌 중앙기관의 베테랑급에 속해 있을 두 사나이가 와 있다. 이들의 본격적인 추적을 받아야 하는 건이란 놈은 오늘 학교에서 돌아와서도 다른 때와 조금도 다른 점이 없었다, 어제도 그랬고 그제도 그랬다. 내내 그랬다, 그놈이 그렇게 대담하고 조직적이고 위장에 능한 일면이 있었단 말인가. 도대체 어떤 선에서 국가가 찾고 있는 홍재와 연관되어,,,,,, 그렇다, 밀고자일까 아니다, 그놈은 홍재가 영이 아버지라는 것 뫼엔 다른 관심이 언다, 밀고자로서의 지식이 전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놈은 무리가 상상도 못한 특이한 착상을 해서 이 안일에 바진 가정에 오색찬란한 불꽂을 올릴 셈이었을까. 아뭏든 우리 부부는 은밀스런 쾌락처럼 공상해온 불온 시인의 체포와 함께 방조자로서의 비장한 각오의 예행 연습이 당치않은 극히 막연하고 극히 황당스런 사태에 이른 것을 알게 됐다.

우리는 아이들이 자는 방으로 갔다. 여섯 살과 아홉 살의 두 아이가 토끼가 소풍가는 무늬의 똑같은 타월 포대기를 아무렇게나 몸에 감고 마치 행복한 아이들처럼 조그만치의 불안도 없이 지나친 무관심 속에 자고 있었다, 나는 천사를 보는 듯한 감동으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건의 어깨께에 앉아 손을 디밀고,

건아. 건아.

하고 깨웠다.

천아. 건아. .

건이는 잠이 질기던 아이답지도 않게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자기를 둘러싸고 헤아릴 수 없이 무수한 눈의 응시가 집중돼 있는 듯한 것을 느끼자 몽롱한 의식의 눈을 한껏 크게 하고 두리번댔다. 몸에 감겼던 타월은 떨어져나가고 허슨한 삼각팬티의 다리께로 잠에서 먼저 깬 듯한 부동자세의 그러나 너무도 가련스런 고추가 비어져 나왔다. 눈물겨운 광경이었다. 나는 타월로 건이 몸을 감아줬다.

건아. 정신을 차렸니 ? 이분들이 너에게 알아볼 일이 있으시단다. 자는 걸 깨워서 미안하다.

외과의는 아들에게 정중히 사과했다.

뭘요?

건은 또렷하게 반문했다.

이제 잠에서 완전히 깬 모양이었다. 겁먹은 표정은 없었다. 우리는 건을 에워싸고 적당히 앉았다.

자는 걸 깨워서 미안한데.

수첩의 사나이는 주인의 말을 반복했다. 그러나 사나이끼리의 무언의 격려와 무엇인가 부탁하는 암시적 인 아버지의 목소리와는 너무도 달랐다. 다른 한 사나이는 조서용지를 꺼내서 펼친다.

B국민학교 삼 학년 이 반에서 오늘 데모가 있었지?

수첩의 사나이는 물었다. 아홉 살의 어린이를 놓고 순 직업적일 수는 없겠으나 그러나 그것은 사회 봉사 관념으로 굳어진 압력조의 목소리였다.

, 있었어요.

왜 데모했지?

우리 선생님. 도루 오시라구요.

어떻게 시작됐지.

어떻게 라니요?

명쾌하게 반문한다.

, 말하자면 누가 하자고 해서 시작했냐 말야.

우리들이요.

그런 생각을 누가 맨 먼저 했냐 말이다.

내 옆의 아이가요.

그 아이의 이틈이 뭐냐?

조서와 수첩의 두 사나이가 함께 흥분을 보인다

몰라요.

?

내 옆에 누가 있은지 모르겠는걸요.

잘 생각해봐. 누가 하라고 했지, 맨 먼저?

나도 하자고 했어요.

그럼 네가 먼저 말했어?

나도 먼저 말했어요.

조서는 뭔가 적어 넣는다.

너하고 또 누구야?

우리 반 아이 전부예요.

!

수첩은 약간의 짜증이 나고 약간은 맥이 풀린 얼굴이차.

거짓말하면 안돼. 아는 것 숨겨도 안되고.

.

선생님이 하래서 했나?

어느 선생님이요?

그들이 알고자 하는 바로 그 대답을 해주고 싶은 듯 건은 열심인 얼굴로 물었다.

조서가 펜을 놓았다. 우리는 우리의 아들의 얼굴을 쳐다봤다. 우리는 새삼스레 그 애의 지능에 놀랐다. 이 애는 이 사나이들을 명랑한 어린이가 되라고 교실 앞에 교훈을 써 걸고 동심으로 돌아가 하루를 같이 살아주는 학교의 선생쯤으로 생각하는지 모른다.

수첩은 심문을 중단했다. 성인들의 상식적이고 악질적인 회피에 비해 이것은 너무나 적극성을 띤 우롱 같은 협력이다. 피로가 문득 수첩의 입을 우리에게 열게 하여 우리는 비로소 우리 아들이 연루한 데모 사건의 일부를 정식으로 듣게 됐다.

이삼일 전 B국민학교에는 이삼 명 교사에 대한 인사 조처가 있었다. 담임을 잃은 아이들은 오늘 -우리 선생님 돌려달라-는 난데없는 구호를 외치며 데모에 나섰다. 교실에서 외치다가 복도로 나와서 내킨 김에 가두에까지 진출했다. 배후 조종이 없이 그 어린아이들이 데모를 어찌 알아서 그따위 짓을 했겠냐는 것이었다. 배후---반정부적인 배후는 이 어린이들까지를 도구로 이용한다. -우리 선생님 돌려달라-는 구호가 문제가 아니다. 배후를 캐야 하는 것이다. 수첩은 그렇게 말했다.

수첩은 일단 포기할 기분이던 심문을 우리들에 대한 피로 발산의 대화 끝에 다시 시작했다. 우리는 수첩이 정식 설명한 사건 내용의 댓가로서도 한마디 거들 입장이 아닐 수 없었다.

건아, 네가 아는 일에 대해서는 똑똑히 얘기해야 된다.

외과의는 말했다,

.

단순 명료한 대답이 돌아온다.

그래서 말이다 다시 묻겠는데, 데모하자,,,,,, 하고 너흰 떠들었단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