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지의 기록
백지(白紙)의 기록(記錄) -오상원
1
스물 넷. 제일 젊음이 발랄하여야 할 시절이다. 그러나 이미 무너져 버린 젊음이었다. 전쟁으로 삼 년간이란 세월이 포연(砲煙) 속에 사라진 것이다. 집에는 벌써 불구가 된 형이 돌아와 있었다. 오른손이 보기 흉하게 몽둥아리가 되고 다리가 하나 절단되어 있었다, 돌아오던 날 어머니는 몸 성한 작은아들을 껴안고 불구가 되어 맏아들이 돌아오던 그날보다도 더 목메어 울었다. 아버지는 다만 묵묵히 작은아들을 지키면서 눈물을 머금고 서 있었다.
어머니는 목메어 울면서도 작은아들의 팔과 다리와 그리고 온몸을 아무리 하여도 믿어지지가 않는 듯이, 자꾸 더듬어 쓸어 보는 것이었다. 남편은 그러한 아내의 태도를 몹시 초조스럽게 지키고 있다가 넌지시 만류하며 큰아들을 돌아보았다. 큰아들은 아버지와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고개를 떨구고 절름거리며 급히 자기 방 쪽으로 걸음을 옳기는 것이었으나 그만 몇 걸음 못 가 헛디뎌 쓰러졌다. 아버지가 황급히 달려가 일으켜 세우려 할 때 큰아들은 눈을 꾹 지려감고 있었다. 다시는 영 뜨지 않으려는 듯이. 그 순간 아버지의 두 눈에서는 눈물이 소리 없이 주르르 흘러내리고 있었다
큰아들인 중섭(重燮)이 군에 입대한 것은 의대(醫大) 삼 년 재학 중에였다. 일 개월 후 중위의 계급을 달고 곧 야전 병원으로 배속을 받았다. 매일같이 부상병이 밀려들고 있었다. 더욱 휴전 협정 문제가 제기된 후부터는 적의 공격이 일층 가열하여졌으므로 부상병의 수가 격증하였다.
야전 병원까지 간신히 운반되자마자 숨지는 부상병들도 많았다. 어떤 부상병은 빨리 자기를 후방 육군 병원으로 이송하여 달라고 애원하기도 하였다. 어떤 부상병은 그 자리에서 다리를 절단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미 썩어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고지에서 부상을 당한 후 손이 없어 이송을 못한 채 일주일 이상이나 묵은 것이다. ‘절단하지 말아 주십시오. 중위님, 부탁입니다’. 부상병의 시선은 공포에 떨고 애걸하듯이 손을 모아 쥐는 것이었다. 그러나 야전 병원에는 이를 치료할 시간적 여유도 설비도 없었다. ‘그럼 생명을 빼앗겨도 좋은가?’ 그러면서도 메스를 든 중섭의 손은 여러 번 주저하는 것이었다. 어떤 부상병은 미처 손이 못 가 응급 치료도 하지 못한 채 목숨을 버리기도 했다. ‘주사 한번만이라도 놓아주십시오. 중위님, 그러면 꼭 살 것 같습니다. 아니, 그러면 죽어도 한이 없겠습니다.’ 중섭은 이렇게 죽어 간 시체들을 눈앞에 대할 때마다 그 부릅뜬 눈을 감으면서 울음을 머금었다. 때로는 곧 후방으로 이송만 되면 생명을 건질 부상병도 있었다. 그때마다 중섭은 앰뷸런스에 뛰어올라 핸들을 잡았다.
“김중위 !”
“녜!”
“귀관의 심중은 십분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다. 어느 부상병이나 살고 싶은 마음은 간절한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모두를 살릴 수 없는 것이다.”
“녜?”
“스스로 깨닫기를 바란다. 알겠나 ? ”
“………”
그럴 때마다 중섭은 의무대장인 박 소령의 얼굴만을 한동안 의아스러이 지키는 것이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어느 날 저녁이었다. 전방 연대장이 부상이라는 급보가 야전 병원에 날아 들어오자 중섭은 곧 하사 한 명과 함께 앰뷸런스를 몰고 전방으로 달렸다. 아군 진지에 가까왔을 때는 이미 어둠이 서서히 내리고 있었다. 섬광과 작렬하는 폭음이 점점 눈앞에 가까와 왔다. 지휘 본부 가까이에 이르러 중섭은 급히 차에서 뛰어내렸다.
부관이 뛰어나왔다. 추추추추 하는 소리를 듣자 그들은 얼굴을 서로 마주 볼 틈도 없이 땅에 엎드렸다. 일순, 작렬하는 폭음이 연거푸 사방에서 울렸다.
“적의 포격이 심하오. 조심하시오.”
중섭은 부관을 따라서 급히 샌드백으로 둘러친 참호 속으로 갔다. 연대장은 그 한구석에 누워 있었다. 붉게 충혈된 눈, 땀과 흙으로 목덜미가 함빡 얼룩져 있고 오른쪽 겨드랑이와 하복부가 피로 끈적끈적 검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는 거의 혼수 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의식을 잃지 않으려는 듯 입술을 꾹 한일자로 물곤 하였다
“부관 ! ”
“녜"
“606고지의 상태는?”
“녜, 안전합니다. ”
“좌익 고개머리는 어떤가?”
부관은 초조하였다.
“연대장님, 앰뷸런스가 왔습니다. ”
그 순간 연대장의 충혈된 시선 속에 험악한 물결이 스쳐 갔다.
“부관? 좌익 고개머리의 상태가 어떤가 말이다 ! ”
“녜, 안전합니다. ”
“적의 주 공격점은 바로 그쪽인 것 같다. 하지만 실은 606을 노리고 있는 것이다. 알겠나?”
“녜”
연대장은 다시 혼수 상태에 떨어졌다.
부관과 함께 중섭은 하사에게 하체를 들게 하고 곧 연대장을 참호에서부터 끌어내어 앰뷸런스 쪽으로 운반하였다. 추추추추 또 포탄이 날아왔다. 그들은 연대장을 그대로 땅에 놓고 엎드렸다. 섬광이 사방에서 번쩍이고 요란한 폭음이 어둠을 뒤흔들었다. 좌측 고개머리에서는 총성이 격렬하게 울려오고 606고지 쪽에서는 파란 신호탄이 석 줄 어둠을 뚫고 공중으로 확 올라가고 있었다. 그들은 곧 연대장을 앰뷸런스에 실었다. 그리고, 하사에게 연대장을 부축시켜 눕힌 다음 중섭은 급히 운전대로 뛰어올랐다. 엔진을 걸었다. 바로 그때였다. 누가 어둠 속에서 가슴이 터지게 부르짖는 음성이 들렸다. 중섭은 곧 약 5미터 앞에 비틀거리며 걸어오는 어두운 그림자를 보았다. 그 그림자는 몇 걸음 못 와 허공에 한번 손을 크게 내젓고 쓰러졌다. 그러나 다시 악을 쓰며 기어코는 어두운 그림자를 중섭은 눈앞에 가까이 보았다.
“나를 그 차에 좀 실어 주십시오. 출혈이 심합니다.”
“누구냐 ? ”
부관은 급히 소리질렀다.
“3소대 일등병입니다. 나는 앰뷸런스가 오는 것을 보고 참호에서부터 여기까지 기어왔습니다. 나를 좀 살려 주십시오.“
“연대장님이 급하다. 너로 인해 지체할 수 없다.”
부관은 그를 뿌리쳤다. 중섭은 벨을 누르던 발을 멈추고 뛰어내리려 하였다.
“빨리 가 주시오. 한 병졸 때문에 연대장님을 죽일 수는 없소. 시간이 급하오."
부관은 권총에 손을 대고 있었다. 중섭은 엔진을 걸었다. 그 순간 중섭은 분노에 부르르 떠는 병사의 입술과 살기 띈 횐 시선을 보고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였다.
중섭은 차를 몰았다. 멀리 등뒤에서는 여전히 작렬하는 폭음이 그칠 사이 없이 어둠을 뒤흔들고 있었다. 중섭은 자주 비에 젖어 뿌옇게 흐려 가는 차창을 옷소매로 문질렀다. 길 앞이 전연 보이지를 않았다. 라이트를 켤 수가 없었다. 대개 눈짐작으로 길을 더듬으며 차를 몰 수 밖에 없었다. 길이 험한 곳에 이를 때마다 몹시 차가 흔들려 속도를 늦추어야만 하였다.
부관? 606고지는? 알았나? 연대장은 자주 신음 섞인 말투로 중얼거리곤 하였다. 혼수상태에 떨어졌어도 아니 죽음을 눈앞에 재어 가는 순간일지라도 연대장의 입에서 이러한 질문과 명령이 떠날 수는 없었다. 이것이 연대장의 의무인 것이다. 그 순간 중섭은 가슴이 작 무엇에 찔리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어두운 그림자가 눈앞을 더욱 어둡게 흐려 가는 것이었다.. ‘나를 좀 살려 주십시오. 출혈이 심합니다.’ 중섭의 가슴은 뜨거운 불길에 타 들어가는 단백질처럼 뒤끓었다. 중섭은 핸들을 더욱 꾹 움켜쥐었다.
“이 하사 ! ”
“녜”
“아직 출혈이 심한가?”
“녜”
“몸을 좀 들어 줘.”
“녜.”
큰길에 나서자 중섭은 속도를 놓았다.
“이하사 !”
“녜 !”
“우리는 다시 한번 이 길을 되돌아와야 하네. 알겠나?”
“……녜!"
야전 병원에 도착하자 급히 중섭은 이 하사와 연대장을 치료소로 옮겼다. 의무대장과 의무관들이 곧 달려왔다, 중섭은 다시 되돌아 나와 차에 올랐다. 엔진을 걸려는 순간 이하사가 뛰어왔다.
“대장님이 부릅니다.”
중섭의 마음은 더욱 초조했다,
“또 어디에 가려는 거냐?”
“녜, 부상병이 아직 한 명 남아 있습니다.”
“누군데”
“일등병입니다”
“일등병 ? 지금은 어두워서 안 돼. 더욱 오늘밤은 적의 포격이 심하지 않나.”
“하지만 시간이 급합니다.”
“그러나 자기마저 희생하면 어쩔 셈인가?”
“의무관으로서의 의무입니다.”
박 소령은 더 말하지 않았다. 며칠 전 일이 아직 기억에 새롭기 때문이었다.
“의무관의 본분은 부상병을 치료하는 데 있습니다. 장교건, 일개 병졸이건 거기에는 계급에 의하여 치료의 선후가 운위될 수는 없습니다.”
어떤 말끝에 김중위는 이렇게 자기 신념을 철저히 표명했던 것이다. 그러한 중섭의 결심을 의무대장도 부인할 수는 없었다. 아니, 의무대장도 마음속으로는 이러한 중섭의 의지에 강한 충격을 받고 있었다. 중섭은 전속력으로 차를 몰고 있었다. 그의 마음은 달리는 차 이상으로 다급하였다. 출혈이 심하오. 나를 그 차에 실어 주십시오. 분노에 부르르 떨던 입술. 중섭의 눈앞을, 고리고 머릿속을 이러한 낱말과 긴장한 모습이 연거푸 쏜살같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그는 급히 핸들을 왼쪽으로 강하게 꺾었다. 차가 쓰러질 듯하면서 급커브를 돌았다. 또다시 눈앞에는 어둠만이 그냥 연속되고 있었다.
그는 어떡하고 있을 것인가? 만약 죽었다면? 어쩌면 지금 흙을 움켜쥔 채 무모한 자기의 죽음을 싸늘히 지켜 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앰뷸런스가 오는 것을 보고는 참호에서부터 여기까지 기어왔습니다. 앰뷸런스가 오는 것을 보고……다시금 이렇게 부르짖던 일등병의 음성이 중섭의 마음을 어둡게 뒤덮었다. 일등병인 고는 총에 맞은 채 참호 속에 쓰러져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는 자기 곁에 이미 쓰러져 죽은 전우의 시체를 마주 보며 자기 또한 그처럼 숨져 갈 그 시각을 재어 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죽음을 눈앞에 보고 또한 자기의 죽음을 눈앞에 바라보는 순간 그는 악을 쓰며 자기를 구출하여 달라고 사방에 소리쳤을 것이다. 그러나 목이 터지게 부르짖는 이 병사의 가슴을 뚫고 이어 오는 것은 오직 살기어린 총성과 작렬하는 폭음뿐이었을 것이다. 그는 하늘을 쳐다보았을 것이다. 구름이 어둡 게 내리 깔린 하늘을 한 끝에서 다음 끝까지 지켜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자기 주위를 둘러싼 참호의 흙벽을, 그 가장자리마다 자기의 발길에 또는 전 우의 발길에 짓밟혀 부서진 풀잎과 말라 버린 하얀 풀뿌리들을 쳐다보았을 것이다. 또한 내려다보이는 연대 본부와 훤출히 틔어 나간 벌판을 뚫고 길게 구부러져 남쪽으로 내닫는 도로를 따라 시선을 옮겨 보았을 것이다. 그 때 나는 앰뷸런스를 몰고 그 도로를 달리고 있었을 것이다. 멀리서부터 질주해 오는 앰뷸런스를 보았을 때, 그의 마음은 어떠하였을 것인가. 그리고 점점 가까이 와서 연대 본부로 꺾어져 들어오는 앰뷸런스를 보았을 때……중섭의 눈앞에는 그 순간의 병사의 빛나는 시선이, 복 눈물에 목메었을 그 얼굴이 그대로 떠오르는 것이었다. 그리고 죽을 힘을 다하여 참호를 기어 나와 악을 쓰며 언덕배기를 굴러 내려왔을 그 광경이 마치 눈앞에 보이는 것 만 같았다. 언덕을 돌아서자 중섭은 멀리 섬광이 연거푸 번쩍이는 것을 보고 더욱 차의 속력을 가하였다. 그 순간 중섭의 머릿속을 또 하나의 섬광이 스쳐 지나갔다. 어둠……아, 만일 이 어둠이 걷힐 수만 있다면……그 병사는 지금 이처럼 자기를 향해 달려오는 앰뷸런스를 볼 수 있을 것이 아닌가. 지금 막 숨이 끊어지는 그 순간을 더듬고 있다 할지라도, 또 자기를 구출하러 오는 차가 아니라고 굳게 마음속에 믿고 있다 할지라도 앰뷸런스에 그려진 적십자를 보는 그것만으로 고이 숨져 갈 수도 있을 것이다, 길이 점점 험하여지므로 차의 속도를 늦출 수밖에 없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중섭은 급히 사방으로 그 병사를 찾았다. 아까 그 장소에는 없었다. 있을 리가 만무하다.
“이 하사 ! ”
“녜”
“그쪽에도 없나 ? ”
“녜”
적의 포격은 그칠 사이가 없었다. 그들은 자주 포탄이 날아오는 소리를 듣기가 무섭게 엎디곤 하여야 했다. 약 반 시간 남아 찾아 헤매었으나 어두움으로 인하여 찾을 수가 없었다. 그는 길 쪽에 이하사의 음성을 듣고 곧 그쪽으로 달려갔다. 도로 둑 밑에 한 병사가 쓰러져 있었다. 아까 부상당한 병사에 틀림이 없었다. 그렇지 않고는 이렇게 길가로 나와 쓰러져 있을 리 가 없는 것이다. 중섭은 급히 맥을 보았다. 이미 숨져 있었다. 이 병사는 도로 가에까지 기어 나온 것이다. 도로상에까지 기어 나왔다고 하여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 하지만 남쪽으로 내닫는 길, 앰뷸런스가 사라져간 이 도로 가에 까지나마 하고 기어 나왔을 병사의 마지막 표정을 생각하는 순간 중섭은 확 눈물이 쏟아지는 것이었다. 자기의 권리도 주장할 줄 모르는 사병들! 중섭은 가슴이 메어 잠시 눈물을 머금고 있다가 그 병사의 피와 흙으로 얼룩진 이마 위에 입술을 가져다 대어 주었다.
“이 하사 ! ”
“녜”
“차를 이리로 돌려올 테니 기다리고 있어.”
“녜”
중섭은 곧 앰뷸런스 쪽으로 쏜살같이 달려갔다. 약 이십 미터 가량 갔을까 하였을 때 중섭은 눈앞에 번쩍 하는 한 줄기 섬광과 함께 몸의 중심을 잃고 고꾸라졌다. 강한 타격에 전신이 조각져 날아가는 것만 같았다. 의식이 어렴풋이 돌아왔을 때 중섭은 자기 주위에 흩어지는 발자국 소리 같은 것을 자주 들었다. 그러나 곧 그 발자국 소리 같은 것들은 점점 또 어둠 속에 뿌옇게 사라지고 짙은 농무(濃霧)가 의식을 덮어 가는 것이었다. 이따금 소곤거리는 말소리도 들렸다. 그는 마치 자기를 의식해 보려는 듯이 몸을 꿈틀거려도 보았다. 하지만 그것은 마음뿐 그의 몸뚱아리는 마치 그와는 이미 분리되어 버린 것만 같이 아무런 반응도 주지 않았다. 그는 눈을 떠보았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눈앞이 하얀 것인지 검은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 어쩌면 마음속으로 눈을 떴다고 생각하고 있을 뿐 실은 눈을 감고 있는 것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그는 눈을 깜작거려 보았다. 전연 눈시울이 움직이고 있는 것 같지가 않았다. 아니, 분명히 움직이기는 하나 무엇에 몹시 억제되고 있는 것 같았다. 신음 소리 같은 것도 들리는 것 같았다. 어떤 때는 몹시 심하게 들리고 어떤 때는 거의 들릴락말락도 하였다. 어쩌면 자기 자신의 신음 소리를 자기 자신이 모르고 이렇게 듣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며칠을 이렇게 지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깊이 잠에 떨어지고 있었다. 몹시 무더웠다. 지금 그는 자기 집 응접실 소파에 길게 누워서 낮잠을 자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여름철에는 더위에 시달린 몸의 피로를 풀기 위해 잠깐 낮잠을 자는 습관이 있었다. 그는 지금 막 포근히 잠에 빠져 들어가고 있었다. 내일은 두개골 해부 실험이 있다. 오늘 밤에는 그 준비를 해얄 텐데…… 활짝 열어 젖힌 창문으로 이따금 커튼 기슭을 스치고 건들 불어드는 바람에 중섭은 더욱 잠이 폭 쏟아지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희미하게 떠오는 의식의 물결은 마치 가볍게 하늘을 떠가는 송이구름처럼 머릿속에 여러 가지 생각을 이어 주는 것이었다. 미스터 정이 찾아온다고 했었는데 잠이 깰 때까지 안 찾아왔으면……정연이는 지금 뭐하고 있을까? 다음 일요일엔 단 둘이서 보트를 타러 가자고 해 봐야지.
초인종이 울린다. 미스터 정이 찾아온 게 아닌가.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어머님이 깨우러 오시는 모양이다. 자식두 지금 막 한잠 들려는데……
“얘, 얘, 친구가 찾아왔다. 얼른 일어나요, 응?”
제기 자식도 한 오 분만이라도 더 늦게 오지 않구……발자국 소리가 또 들려 온다. 확실히 마룻바닥에 울리는 걸음새가 여자의 걸음걸이다. 미스터 정이 이리로 들어오는 모양이다.
“얘 미스터 정이 들어왔다. 얼른 일어나요, 자.”
그는 허리를 일으키려 몸을 움직였다.
“아니, 몸은 움직이지 말고 그냥 계십시오.”
웬일일까? 미스터 정의 음성 같기도 하고 또는 아닌 것 같기도 하다. 그는 어머니하고 불러 보았다.
“그냥 눈만 떠 보세요. ”
어머니 음성 같지가 않았다. 훨씬 젊은 여자의 음성 같았다. 그 순간 뿌옇게 중섭의 마음을 덮어 가던 안개가 서서히 걷히고 맑은 빛이 어디선가 흘러 들어오는 것이었다.
“그냥 눈만 떠 보세요. ”
중섭은 눈을 떴다. 해맑은 광선이 확 안광으로 쏟아져 들어와 처음에는 아무 것도 분간을 할 수가 없어 곧 눈을 감아야 했다. 잠시 후 이번에는 서서히 눈을 떴다. 점점 눈앞이 맑아 오자 중섭은 조용히 자기를 내려다보고 있는 두 얼굴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들은 횐 옷을 입고 있었다. 중섭은 횐 빛깔 속에 다시 눈이 어지러워져 눈을 감았다. 하지만 여전히 눈앞에 맑은 빛이 떠돌고 있었다. 그는 다시 서서히 눈을 떴다. 그리고 자기를 지키고 있는 두 하얀 옷을 입은 사람이 의무관과 간호부라는 것을 알았다. 중섭은 잠시 생각을 더듬었다. 아직도 희미한 의식을 타고 꿈속을 헤매고 있는 것만 같았다,
손가락이 조용히 눈앞으로 다가왔다. 눈에서부터 약 20센티 가량 앞에서 그 손가락은 머물렀다.
“손끝이 움직이는 대로 시선을 옮겨 보십시오. ”
니코틴에 다갈색으로 물든 손톱 끝이 서서히 오른쪽으로 이동하였다가 다시 왼쪽으로 옮겨져 갔다.
“됐습니다. 시력에는 지장이 없겠습니다. ”
눈을 완전히 뜨게 된 이후부터 중섭의 마음속에 어두운 그늘이 점점 깃들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 어두움은 악몽처럼 짙게 눈앞을 덮어 오는 것이었다.
회진 시간이 되어 의무관이 들어오고 간호부가 오른손에 감긴 붕대를 풀기 시작하였을 때 중섭은 몹시 초조스러웠다. 중섭은 자주 의무관의 얼굴과 간호부의 조심스럽게 붕대를 풀어 헤치는 가느다란 손가락 끝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이윽고 붉게 약물과 피에 젖은 붕대가 한 겹씩 걷혀지고 손의 윤곽이 뚜렷이 나타났을 때 중섭은 숨이 꽉 막히고 눈앞이 어둠 속에 확 무너져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손은 완전히 몽뚱아리가 되어 있었다. 중섭은 가슴의 피가 분수처럼 터져 나오는 것 같았다.
“누가 내 손을 절단했소? ”
충혈된 중섭의 눈은 분노에 번쩍 빛나고 험악한 물결이 거세게 의무관을 향하여 쏟아져 가고 있었다.
“다리는 부득이 골수염(骨髓炎)이 심하여 내가 절단하였소. 그러나 손은 원래부터 이미 파
편으로 절단되어 있었던 거요. 나도 당신이 의무관이라는 것을 알고 있소. 심히 유감스러운
일이오.”
의무관의 음성은 퍽 부드럽고 동정에 가득 차 있었다.
중섭은 전신이 어둠 속으로, 아니 어둠이 끝없이 내닫는 동굴 속으로 그림자도 없이 꺼져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다리가 절단된 것은 괜치 않았다. 그러나 손이, 그것도 오른손이 몽뚱아리가 된 것은 곧 중섭에게 있어서는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나를 차라리 죽게 하여 주십시오. 나는 이미 끝났습니다.”
모질게 튀어나오는 음성과 함께 중섭의 눈 기슭에는 어둠이 짙게 물결치고 있었다.
“당신에겐 아직 생명이 남아 있소.”
“생명이 붙어 있다는 것이 산다는 거요? 생명과 산다는 것과를 혼돈하지 마시오. 그건 무식한 이야기요!”
중섭은 배앝듯이 소리를 질렀다.
침묵이 한순간 둘 사이를 험악하게 물결쳐 지나갔다.
“그렇소, 나는 무식하오. 당신에게서만이 아니오. 나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그러한 이야
기를 듣고 있소. 마치 당신도 예전에 들었을 그러한……”
처음 의무관의 얼굴에는 급격한 격동의 빛이 떠도는 듯하였으나 곧 침착하게 가라앉아 가고 있었다.
“생명이란 고귀한 거요.”
중섭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잠시 마음의 동요가 가라앉는 듯하였으나 어딘지 먹물 같은 캄캄한 뭉텅이가 가슴속 한구석에 확 박혀 있는 것만 같았다.
악몽이 왔다. 연속되는 악몽 속에 소리를 지르고 눈을 쓰면 어둠만이 첩첩이 눈앞을 도사리고 마주 지켜서는 것이었다. 몽뚱아리가 된 손, 폭음. 격렬히 이어오는 총성 속에 쓰러지며 부르짖은 마지막 비명. 누가 가슴을 향하여 가늠쇠를 겨누고 있다. 방아쇠를 당긴다. 불길과 함께 총알이 심장을 꿰뚫고 지나갔다. 나는 이미 없다. 심장에서는 검붉은 피가 줄줄 흐르고 있다. 누가 가까이 다가온다. 내 목덜미를 움켜쥐고 고개를 쳐들어 들여다본다. 낯이 익다. 입맛이 쓰게 픽 웃고 있다. 나를 쏜 놈이다. 그는 총을 들고 있다. 지금 막 나를 쏜 총을 멋적게 들고 있다. ‘나를 알아보겠어 ?’ 하는 듯이 자식이 또 쓰게 입맛을 다시며 픽 웃는다. 낯이 익다. 이상하다. 그는 바로 나와 꼭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이상하다. ‘내가 바로 너란 말이다. 이 못난 자식 ! 자기도 몰라봐!’ 그는 저주스러운듯이 움켜쥐었던 목덜미를 홱 뿌리치고 개머리판으로 뒤통수를 내리갈겼다. ‘너 같은 자식은 본적이 없다. 몽뚱아리 ! 손몽뚱아리!’ 침을 퉤 뱉고 더없이 저주스레 다시 한번 픽 웃고 성큼성큼 어둠 속으로 꺼져 버린다.
중섭은 부르르 몸을 떨며 악 소리를 지르고 눈을 떴다. 악몽. 식은땀이 등허리를 축축히 적시며 흘러내리고 있다.
일 주일 후 어머니가 찾아왔다. 아버지가 뒤따라 들어섰다. 아들을 보고 순간 말을 잊어버린 듯 어머니의 입술은 몹시 떨리고 있었다. 동시에 그녀는 마음의 격동을 이기지 못하는 듯 흑흑 느끼고 있었다. 어머니는 남편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아버지는 묵묵히 아내의 어깨 위에 손을 얹고 한 걸음 아들이 누워 있는 침대 쪽으로 다가섰다. 중섭은 어머니를 다시 바라보았다. 고개를 돌린 어머니의 어깨가 몹시 물결치고 있었다. 그리고 손수건을 든 손이 눈 가장자리로 옮겨지고 있는 것을 보았다. 중섭은 아버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조용히 자기를 내려다보는 아버지의 눈에서도 눈물이 핑 돌고 있었다. 중섭은 눈을 감았다. 잠시 후 중섭은 가느다란 손끝이 자기 얼굴 위에 와 닿는 것을 느꼈다. 그 손끝은 가벼이 떨리고 있었다. 중섭은 눈을 떠보았다. 어머니는 눈물에 젖어 있었다.
“중섭아.”
그러나 어머님은 더 말을 못 잇고 입술을 꾹 깨물어 버렸다. 목 줄기와 울대가 심한 격동 속에 물결치고 있었다. 중섭의 가슴속에도 뭉클 뜨거운 물결이 넘쳤다.
“미안합니다. 어머니”
중섭은 확 터져 나오려는 감정을 억제하면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그 순간 어머니는 중섭의 베갯머리에 얼굴을 묻고 흐느꼈다.
중섭은 아버지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아버지와 아들의 눈물어린 두 시선이 조용히 마주쳤다.
“미안합니다”
거의 숨죽인, 가슴 아프게 울려 나오는 목소리였다.
“살아 돌아왔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만족해야지. 여보, 우리는 하등 서러워할 것이
없는 거요”
그러면서 아버지는 웃으시는 듯 보였으나 곧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가벼이 눈 가장자리를 훔치고 있었다.
며칠 동안 중섭은 죽은 듯이 눈을 감고 누워 있었다. 어머님과 아버지가 다녀간 후부터 눈을 뜨는 것이 무서웠다. 나보다도 어머님과 아버지가 받은 타격은 더 심한 것이다. 나만이 불구가 된 것이 아니다. 어머님과 아버지의 마음 한구석에도 이미 나 이상으로 불구가 깃든 것이다. 차라리 죽었더라면…… 아니 지금도 죽을 수는 있다. 중섭은 어둠을 붙들고 무수한 사념의 단편들과 자기를 뒤틀고 괴로워하였다. 그들에게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그들은 결혼을 하였다. 아이를 낳았다. 기뻤다. 또 아이를 낳았다. 기뻤다. 그들은 점점 늙어 가면서도 자라는 아이들을 보고 즐거워하였다. 중학교를 거쳐 자기들이 바라는 대학교에 진학을 시켰다. 그들은 흐뭇했을 것이다. 큰놈은 의사가 된다. 작은놈은 상과니 졸업을 하면 은행에 들어간다. 확실히 그들은 스스로의 삶에 보람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전쟁이 오고 아들을 군대에 보내고 다시 아들이 군대에서 돌아왔을 때 그들의 보람은, 그들의 흐뭇하던 꿈은 전쟁에서 자기를 잃고 돌아온 아들보다도 더 비참했을 것이다. 자기를 상실한 아들, 생명은 붙어 있다 할지라도 이미 사회 생활을 영유키 위한 기능을 말살 당한 아들, 십 오륙 년 이상의 학구(學究)의 노력도 다 헛된 것이 되고 만 것이다.
‘차라리 죽었으면…… 차라리 죽었으면……’
중섭은 몇 번이고 마음속으로 되풀이하였다.
어느 날 아침이었다. 사병들이 병실마다 유별나게 청소를 하고 물을 뿌리고 하였다. 간호부가 들어와 침구와 부상병들의 의류, 기타 물품들을 정돈하고 나갔다. 얼마 후 주번 의무 장교가 몇 마디 주의와 함께 일일이 점검을 하며 지나갔다.
장군이 시찰을 온다는 것이다.
특히 중섭 병실에 들렀을 때 주번 의무 장교는 이런 말을 하였다.
“영광이시군.”
정오가 가까와서 병원장과 함께 별을 번쩍이면서 장군이 들어왔다. 늠름한 풍채였다. 뒤이어 부관들과 사진 보도반원들이 따라 들어왔다. 중섭은 의무관의 부축을 받아 침대에 일어나 앉았다. 곧 부동 자세를 취하였다.
“귀관이 김 중섭 중위인가?”
“녜, 각하.”
“귀관의 용전 분투한 공적과 의무 관념의 거룩한 정신을 높이 샀으므로 여기에 무공 훈장이 하사되었다.”
뒤에 섰던 부관이 조그만 상자를 정중히 열고 무공 훈장을 꺼내었다. 그리고 중섭의 가슴팍에 달아 주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사진 보도반원들의 플래시가 번쩍 하고 좌우에서 빛났다. 자욱이 흩어지는 연기와 함께 마그네슘 냄새가 코를 쿡 찔렀다. 중섭은 그 순간 한 줄기 섬광과 함께 폭음이 자기를 뒤덮고 지나가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파편과 함께 자기의 오른쪽 손가락들이 어둠 속으로 절단되어 날아가는 것만 같았다. 중섭은 입술을 부르르 떨며 저주스러이 가슴팍에 지금 막 달린 훈장을 홱 떼어 팽개쳤다. 일순 절박한 공기가 실내를 휩쓸고 지나갔다. 중압되는 분위기 속에 모두 호흡이 단절되어 버린 것만 같았다. 병원장의 얼굴에는 불안과 공포가 짙게 감돌고 있었다. 장군의 얼굴에도 짙은 굴곡이 무수히 주름져 가고 있었다.
“반항인가? 훈장이란 신성한 것이다 !”
중섭은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
“아닙니다, 각하”
“그럼 ?”
“전쟁에 대한 저주지 훈장에 대한 것은 아닙니다. 각하”
장군의 얼굴을 휩싸 가던 짙은 굴곡이 점점 풀려 갔다. 병원장의 얼굴에도 불안한 빛이 점점 스러지고 있었다. 장군은 중섭의 어깨 위에 손을 얹었다.
“좋다 ! 동감이다. 나도 귀관 이상으로 전쟁을 증오하고 있다. 나도 군복을 벗고 싶은 한 사람이다. 그러나 벗을 수 없는 것이 현실이자. 현실의 요구를 무시할 수는 없는 것이다. 알겠나?”
중섭은 앉은 채로 부동 자세를 취하였다.
제대되어 돌아오던 날 중섭은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눈물이 콱 쏟아졌다. 더우기 아버지의 부축을 받아 응접실에 들어섰을 때 그리고 커다란 책장 속에 자기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연구에 몰두하였던 두꺼운 의학서들을 눈앞에 대하였을 때 중섭은 소리 죽여 흐느꼈다.
“용히 그대로 책들을 간수하셨군요”
“네 어머니의 노력이었다. 하지만 뭐 그리 낙심할 필요는 없는 거다”
그때 어머님이 응접실로 화채를 만들어 가지고 들어왔다.
“어머니 !”
중섭은 어머니를 보는 순간 무슨 말이 확 터져 나을 것 같았으나 가슴이 메어 말보다도 눈물이 다시 앞서는 것이었다. 어찌된 영문인지를 모르는 어머니는 다만 남편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아마 얘가 자기 책들을 보니까 갑자기 눈물이 쏟아지는 모양이오”
그 순간 어머니의 두 시선이 붉게 빛나고 곧 눈물이 핑 돌았다,
“어머니, 미안합니다.”
중섭은 더 말을 못했다. 무엇이 죽 가슴을 송두리째 꿰뚫고 지나가는 것만 같았다. 피난을 나가시면서도 어머님은 이 책들이 한 권도 분실될세라 소중히 간직해 두었던 것이 아닌가 ! 그러하였을 어머님……그러나 나보다도 자신의 노력의 헛됨을 보는 지금 이 순간의 어머님의 심정은 어떠할 것인가? 이러한 생각이 번개같이 머리를 스쳐 가자 중섭은 다시금 자기 자신에 대한 저주가 악몽처럼 가슴을 후벼 가는 것이었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보살핌은 극진한 것이었다. 그러나 중섭의 마음을 덮고 있고 어두운 그늘은 조금도 그 농도를 흐릴 줄을 몰랐다. 동생이 부상을 입었다는 소식이 왔다. 어머니는 창백히 질려 넋을 잃은 채 파들파들 떨고 있었다. 아버지 회사로 전화를 걸었다. 아버지가 급히 달려왔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보자마자 울음에 젖어 입술만 움직거리고 있었다. 급히 대구 육군 병원으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솔아오기를 기다리는 아버지의 얼굴도 창백히 젖어 있었다. 신호가 왔다. 아버지는 황급히 수화기를 들었다. 한두 마디 말이 오고 가기도 전에 어머니는 작은아들의 부상의 정도가 어떠냐고 다짜고짜로 물었다.
“괜찮대요? 절단까진 안 하겠죠? 여보, 좀 자세히 물어 봐요”
발에 관통상을 입었을 뿐 리 대수롭지 않다는 것이었다. 수화기를 놓은 아버지의 이마에는 진땀이 쪽 흐르고 있었다. 어머님 얼굴에도 다시금 핏빛이 불그레 돌기 시작하였으나 곧 흐렸다.
“하지만 내 눈으로 보기 전에는 믿기지가 않아요. 여보, 아무래도 내가 저녁 차로라도 갔다 와야겠어요. "
아버지는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하다가 입을 열었다.
“내가 갔다 오리다.”
“그럼 같이 가요”
“아니, 나 혼자 갔다 오리다. 당신은 집에 있어야지”
그 순간 어머니는 그 뜻을 알아차리고 큰아들을 돌아보았다. 중섭은 어머니의 시선을 퍼하듯 고개를 떨구었다. 그러나 곧 얼굴을 들고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아버지, 어머님과 같이 갔다 오십시오”
약 이십 일 후에 작은아들은 완전한 몸으로 돌아왔다.
형과 동생은 응접실에 마주 앉아 있었다.
“다친 곳은 별로 없니 ?”
“발 잔등에 관통상을 입었습니다. 발가락 두 개의 기능을 상실하기는 했습니다만 걷는 데 그리 지장은 없습니다.”
“다행이군. ”
하지만 형의 마지막 음성은 몹시 어두웠다. 그 순간 동생은 형의 절단된 다리를 다시 내려다보고 공연히 걷는 데 지장이 없다는 말까지 하였다고 생각하였다.
그날부터 형의 마음속에는 동요가 더욱 심하게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어두움과 어두움의 갈등이 마음을 뒤흔들었다. 더우기 동생의 복교(復校) 수속이 끝나던 날 그는 자신을 더없이 저주하였다. 그는 몽뚱아리가 된 손을 탁자 위에다 마구 미친 사람처럼 내리치고 있었다. 뼈마디마디 껍질이 벗겨지고 붉은 피가 주르르 홀러내렸다, 그러나 그는 멈추지를 않았다. 그냥 뼈가 다 으스러져 부서져 나갈 때까지 막 후려갈겼다. 아프지도 않았다. 아니 그 몽뚱아리 손이 몽땅 꺽어져셔 부스러진대도 아플 수가 없었다.
어머니가 급히 달려왔다. 미친 듯한 큰아들의 거동을 보고 어머니는 깜짝 놀랐다.
“중섭아, 이게 웬일이냐?”
어머니는 아들을 붙들고 울었다. 그리고 피에 물든 몽뚱아리 손을 마치 귀중한 손이나 되는 것처럼 어루만지며 치맛자락으로 감싸는 것이었다.
“어머니 용서하십시오.”
큰아들의 음성은 울음에 목메어 있었다.
테이블을 중심으로 둘러앉은 네 사람 사이에는 근 삼십 분이 지나서도 아무런 말 한 마디 없었다. 아버지는 다만 묵묵히 석간 신문만 들여다보고 계셨다.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가만히 앉아 있었다. 형의 안색은 퍽 좋지 않았다. 동생은 지리한 태도였다. 동생과 이따금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형은 넌지시 그 시선을 피해 버리곤 하였다. 어머니도 그랬다.
“저어 양복을 하나 맞춰야겠는데요 ?”
둘째 아들인 중서는 기다리다 못해 말을 꺼냈다. 아버지는 한번 헛기침을 했을 뿐이었다, 어머니는 가만히 있었다. 형은 다만 시선을 밑으로 무겁게 떨구는 것이었다. 중서는 다시 한번 말을 붙였다.
“아버지, 내일 바쁘신 일없죠?”
아버지는 못 들었다는 듯이 응 하고 고개를 드는 듯하였으나 그대로 또 신문 위에 시선을 파묻었다. 중서는 어머니를 쳐다보았다. 역시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잠시 또 침묵이 흘렀다. 밖에는 어둠이 서서히 내리고 있었다.
“언제부터 개강이라든 ?”
이윽고 형이 입을 열었다. 그 음성은 평범하였지만 어딘지 어둠이 희미하게 감돌고 있어 보였다.
“월요일부터라니까 내일 모레부터죠. 그런데 임시 교사(臨時敎師) 공부할 기분이……”
“중서야 ! ”
“녜 ?”
그 순간 중서는 말을 넌지시 가로지르는 어머님의 부름에 채 끝을 맺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어머니는 중서와 눈이 마주치자 그대로 시선을 딴 곳으로 흘려 버리는 것이었다. 줄서는 잠시 이상한 기분으로 어머니 옆 얼굴만 지키고 있다 형을 다시 쳐다보았다. 그리고 문득 생각이 났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참 오늘 등록할 때 형님 친구를 만났어요. 그 중학 동창생인 박이라던가 있지 않어요. 별 명이……?”
“중서야 !”
“녜 ?”
중서는 또 말을 하다 말고 아버지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작은아들과 얼굴이 마주치자 아버지도 아까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슬며시 시선을 떨구며 다시 신문을 읽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중서는 자기도 모르게 이상한 암영을 마음에 받았다. 전쟁으로 흩어졌다가 한 가족이 이처럼 한가운데 테이블을 둘러앉아 보기는 몇 년만의 일이고 그것도 불과 일 주일이 지났을까한 것이다. 어제도 이렇지는 않았다. 오늘 아침도 이렇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저녁따라 왜 이렇게 분위기가 음울한지 알 수가 없었다. 제대되어 돌아오던 날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형 사이에 균열져 가던 미묘한 심리적 갈등을 깨닫지 못한 바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 후도 지금처럼 이렇지는 않았었다. 중서는 필경 무슨 일이 있었다는 것을 직감하고 힐끗 어머니를 쳐다보았다. 그때 중서는 어머니 시선이 형의 얼굴로 옮겨가는 것을 보고 뒤 를 따랐다. 형의 얼굴은 어둡게 흐리고 입술 위에 긴장이 극심하게 굴곡지고 있었다. 더욱 오른쪽 어깨머리가 가늘게 물결치고 있었다. 중서는 급히 테이블 너머로 형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몽뚱아리진 뼈마디마다 터져서 붉게 찢어져 있었다. 중서는 깜짝 놀랐다.
“형님?”
동생의 의문에 찬 시선과 마주치는 순간 형은 당황스러이 찢겨진 몽뚱아리 손을 왼쪽 손으로 가리었다. 중서는 왜 그랬느냐고 물으려 하였으나 어머니의 급한 눈짓으로 입을 다물었다. 어머니와 둘째아들 사이에 다시 시선이 오고갔다. 아버지도 고개를 들고 둘 사이에 급히 시선을 가로 저었다. 그리고 작은아들과 아내의 시선이 서로 슬며시 갈라져 가는 것을 보고 나서야 다시 신문 위에 시선을 떨구며 입 속으로 신문 구절을 띄엄띄엄 중얼거리면서 그리 신통한 기사가 없었다는 듯이 신문장을 뒤집었다.
“휴전 협정이 또 난관에 봉착할 모양인데……”
형인 중섭의 마음은 더욱 무겁게 동요를 일으켜 가고 있었다. 세 사람 사이를 가로지르고 흐르는 침묵의 무수한 이야기와 자기를 줄곧 기피해 가는 그들의 불안한 시선이 누구 때문인지를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중섭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머니 시선이 누구보다도 먼저 달려왔다, 아버지도 고개를 들었다. 동생도 곧바로 형을 지켰다. 한순간 무거운 침묵이 서로의 눈앞을 가로질러 갔다.
형은 지팡이를 양쪽에 찾아 들었다.
“먼저 가서 좀 눕겠습니다”
어머니는 무어라고 입을 열 듯하였으나 곧 그대로 잠자코 말았다. 아버지도 그랬다. 동생은 절룩거리며 걸어나가는 형의 절단된 다리 밑으로 늘어진 바짓가랑이가 기형적으로 너풀거리는 것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큰아들의 뒷그림자가 방안에서 아주 사라지자 어머니가 무겁게 한숨을 죽이며 이마를 괴어 짚었다. 아버지도 보던 신문을 테이블 위로 내려놓았다. 그리고 상심한 듯한 태도로 잠시 바라보고 있었다.
“여보, 내일은 내가 바쁠 것 같으니 당신이 앨 데리고 나가 옷을 마춰 주구려”
어머니가 고개를 들었다, 눈물이 글썽거리고 있었다.
“중서 양복도 양복이지만 중섭이 생각도 좀 해 보구려.”
아버지는 더 말을 하지 않았다. 큰아들에게 미칠 타격을 두려워하고 있는 아내의 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미안한 태도로 작은아들을 쳐다보았다.
잠시 후 중서도 마음이 거북하여 그대로 자리를 피했다.
두 아들이 각기 남기고 간 무거운 감정을 가슴에 지닌 채 아버지와 어머니는 말없이 마주 앉아 있었다. 어머니 눈에서는 눈물 빛이 잠시라도 떠나지를 않았다. 아버지의 얼굴도 어둡기만 했다. 오십이 넘은 부부, 주름진 얼굴, 그토록 마음 조리며 기다렸던 두 아들은 다시금 품안에 들어왔어도 그들의 눈앞에는 살벌한 어둠만이 떠돌고 있었다. 부인은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가락 끝으로 문질렀다.
“여보 그리 낙심할 것은 없는 거요. 만일 그 애들이 죽고 돌아오지 못했을 경우를 생각해 보구려.”
부인은 고개를 들고 남편을 쳐다보았다, 그렇게 말하는 남편의 눈언저리도 몽롱히 흐려 가고 있었다. 부인은 다시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가락 끝으로 조용히 문질렀다.
중섭은 자리에 쓰러져 누운 채 눈을 꾹 지려감고 있었다. 불구가 되어 버린 그, 잡초는 짓밟힐수록 더 생명력을 펴 가지만 그는 짓밟혀 버린 화판이었다. 무수히 갈등져 가는 사념을, 착란을 걷잡지 못하고 마음과 온몸을 뒤틀어야만 했다.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동생, 이 세 사람 사이에 말없이 오고가던 시선과 시선과의 이간(離間), 무섭게 덮여 오던 침묵의 그늘, 그것은 모두가 나 때문인 것이다. 그들은 서로 급히 말을 막아야만 했다. 나 때문에 그들은 사소한 동작 하나 말 한 마디에도 나의 감정을 살펴야 하는 것이었다. 그는 몽뚱아리가 된 손을 부르르 떨었다.
사변 전 그때는 참으로 단란하였다. 저녁 후 응접실에 모여 앉으면 그는 곧잘 아버지와 다이아몬드 게임을 하곤 하였었다. 어머니는 그 동안에 차를 끓여 오셨다. 동생은 줄곧 과실을 벗겨 먹기만 하였다. 다이아몬드 게임 같은 건 싱겁다고 안 한다고 했다.
음악. 무엇을 들을까? 어머니가 전축을 건다. 흐흥 또 그거시군. 간드러지게 흘러가는 멜로디, 밤낮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것 만이다. 모짜르트도 좀 틀어 주세요. 아버지가 웃으신다. 너희들도 인제 가정을 갖게 되면 다 그런 거란다. 아유. 어머니도 웃으신다. 중서야 영화 프로 좀 보렴. 신문을 펼쳐놓고 영화 프로란을 훑어본다. 어머님도 곁에서 더듬어 가고 있다. 수도가 좋아요. <제인 에어> 오손 웰스 주연이거든요. 난 영화보다 시공관 극이 나을 것 같아. 어머니의 의견이다. 그럼 당신 좋은 대로 시공관으로 하지. 우린 영화 볼 테야요. 아버지는 어머님하고 그럼 극 보러 가세요. 너희들도 인제 가정을 갖게 되면 다 그렇게 되는 거란다. 핫하하하. 어머님도 곁에서 훅 웃음을 터뜨린다.
두 아들이 점점 자기들의 전공길로 들어서고 자기 딴에 취미를 찾기 시작하게 되고부터 아버지와 어머니 마음에 어딘지 서운한 감정이 자주 떠돌았다. 일요일이 되어 모처럼 어디 야외라도 함께 놀러 가자고 해도 아이들은 그리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자기들 좋은 데로 용돈을 타 가지고는 훌쩍 나가 버리는 것이었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인제 이놈들도 다 컸구나 하고 멀지 않아 자기들로부터 하나씩 자기 좋은 여자들 택하여 떨어져 갈 생각에 무엇을 잃어버려 가고 있는 것만 같은 호젓함에 사로잡혀 서로 얼굴만 마주보는 것이었으나 한편 그러면서도 어딘지 만족감에 흐뭇이 젖어 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하였던 감정들은 이미 다 멍들어 버리고 쓰라린 자국만이 마음 한구석에 상처로 남아 버리고 만 것이다. 나 때문이다. 이렇게 과거고 생각을 더듬어 올라가던 중섭은 거의 발작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나토 동생처럼 경상을 입고 돌아왔다면 이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차라리 죽어서 못 돌아왔다면……
오뇌는 다시금 오뇌와 얽혀 칼끝처럼 마음을 후비고 지나간다. 그는 몽둥아리가 된 손을 쳐들어 눈앞으로 가져갔다. 어두컴컴한 속에 드러나는 그 윤곽이 무기미하다. 나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그는 더 참을 수가 없어 몽아리가 된 손으로 얼굴을 탁 내리쳤다. 그리고 잠시 눈을 꾹 지려감고 마음의 고통을 참으려는 듯하였으나 더욱 그럴수록 고통은 속으로 파고드는 것이었다. 그는 거의 의식 없이 몽둥아리가 된 손으로 얼굴을 마구 내리쳤다. 그러면서 왼손으로는 몽둥아리가 된 손을 사나웁게 쥐어틀고 있었다. 이윽고 무엇이 코밑으로 주르르 홀러내리는 것 같았다.
얼마 후 그는 지친 듯 그대로 누워 있었다. 머리가 찡 하고 무거웠다. 몸은 꿈틀거려 볼 기력도 없이 이대로 영 어둠 속으로 묻혀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이대로 죽어 갔으면……마치 이대로 죽어 가는 듯만 싶게 그의 의식이 몽롱히 흐려갔다. 그러나 자주 몽롱히 흐려 가던 의식은 바람결처럼 어둠을 헤치고 다시금 오뇌의 물결을 그의 마음속에 일으켜 가곤 하였다.
누가 가까이로 다가오는 것 같은 인기척을 듣고 그는 눈을 떴다. 어둠뿐 눈앞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다시 눈을 감았다. 그러나 잠시 후 또 그는 누가 가까이로 다가서서 부르는 음성을 듣고 눈을 떠 보았다. 역시 아무도 없었다. 그는 다시 눈을 감았다. 누가 이번에는 바로 귀 가까이에서 불렀다. 하지만 이번엔 그는 눈을 뜨지 않았다. 뚜벅뚜벅 주위를 왔다 갔다 하는 발자국 소리가 분명히 들렸다. 걸음걸이로 보아 몹시 성이 난 모양이었다. 무어라고 투덜대는 것 같기도 하였다. 그러나 곧 조용해졌다. 가만히 서 있는 모양이었다. ‘싱거운 자식이다. 쳇 !’ 분명한 음성이었다.
“누구야 ?”
중섭은 눈을 뜨며 이렇게 말을 뱉았다. 어두컴컴하여 상대의 얼굴을 잘 알아 낼 수가 없었다.
“흥! 누구냐고? 인제 알게 될 테니 듣고만 있으란 말야. 난 네게 꼭 한가지 말할 것이 있어 온 거야. 너는 나를 잘 알고 있을 게다. 생각해 봐요, 흥! 나는 바로 뭇 사람들한테서 멸시를 받고 있는 놈이야. 심지어는 너한테까지 저주를 당하고 있다. 내버리겠거든 하루 속히 내버려 달란 말이다. 나도 이 이상 너한테까지 굴욕을 당하고 싶진 않단 말이다. 흥, 내가 누구냐고? 자식두 뻔뻔스런군. 그럼 내가 누군지를 말할 테니 똑똑히 들어 둬. 바로 네 육체란 놈이다. 자 인제 그만 했으면 인연을 끊잔 말이다.”
말을 배앝듯이 끝마치고 사라져 가는 그림자를 붙들고 중섭은 황급히 소리를 질렀다.
“잠깐만. 왜 내가 너를 저주한단 말이야? 또 네가 무엇 때문에 저주를 받는단 말이냐? 자
보란 말이다. 나는 이렇게 건전한 거야. 자 이 손을 봐”
중섭은 자기 오른손을 펼쳐 보였다. 온전하게 손가락들이 다 달려 있었다. 중섭은 가슴이
확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자 보란 말이다.”
그는 다시 한번 이렇게 부르짖고 다섯 손가락들을 급히 놀려 보았다. 하나도 부자유스러운 것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어두운 그림자는 고개를 돌리며 픽 웃고 있다. 중섭은 픽 웃고 있는 그자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자 분노가 치밀었다. 그러나 상대는 멋적은 태도였다.
“그리 흥분할 필요는 없는 거야. 너의 어머님한테 물어 보렴. 또 동생한테도. 그러지 않아도 인제 그들이 들을 게다. 내 문을 열지. 벌써 문 앞에 와서 기다리고 있는걸.”
어두운 그림자는 싱겁게 픽 다시 웃고 절름거리며 문 쪽으로 가서 방문을 열었다. 어머니가 들어섰다. 창백하다. 어머니 뒤로 곧 동생이 따라 들어오고 있다.
“어머니 !”
어머니가 가까이 다가왔다. 동생도 다가섰다. 어머니가 그의 손을 끌어 잡아당겼다. 다정해야 할 어머님 태도가 몹시 거칠게 보였다.
“어머니 제 손을 보십시오. 제 손은 이렇게 건전합니다. 이것 보세요.”
중섭은 다섯 손가락을 펼쳐 보였다. 그리고 다시 오므려 보였다. 하지만 어머니는 아무런 말이 없이 동생이 들고 있던 가위를 가져다 쥐고 눈앞에 펼쳐 뵈는 중섭의 손을 우악스럽게 붙들었다. 그와 동시에 손가락을 싹둑 잘라 내었다. 중섭은 악 소리를 질렀다. 급히 어머니 손을 뿌리치려 하는 순간 동생이 달려들어 양팔을 꼼짝못하게 붙들었다. 날카로운 가위 끝이 다시금 손가락을 싹둑 잘라 냈다, 피가 줄줄 흘러내린다. 다음 손가락도 잘렸다. 잘린 손가락마다 붉은 피가 분수처럼 내뿜고 전신이 아픔으로 부르르 떨렸다. 중섭은 다시 신음 섞인 어조로 소리를 질렀다.
“왜 이러는 거요. 차라리 죽여요 죽여 !”
중섭은 벌떡 그들의 손을 뿌리치며 일어났다. 격동되는 숨결 속에 목이 콱 메는 것만 같았다.
“죽여요 죽여!”
중섭의 눈은 미친 사람처럼 흰자위가 불쑥 튀어 솟고 있었다.
어머니가 깜짝 놀란 시선으로 몇 걸음 물러선 작은아들 곁으로 다가서서 그 옷자락을 꾹 움켜쥐고 공포에 파들파들 떨고 있었다.
“쟤가 왜 이러냐? 미쳤냐?”
그 음성도 몹시 떨리고 있었다.
“미쳤냐고요?”
중섭의 눈앞에는 아직도 핏빛 같은 악몽의 반점(斑點)들이 그대로 연속되고 있었다. 어둠이 다시 짙게 눈앞을 빙그르르 휘젓고 지나갔다.
요란스러운 소동에 아버지가 급히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세 사람을 둘러 보는 아버지의 얼굴에도 금세 어두운 빛이 물결쳐 가고 있었다. 중섭은 쓰러질 것만 같아 눈을 감았다. 그리고 전신을 휩쓸고 지나가는 심한 격동을 잠시 참았다. 어찌 된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잠시 후 마음의 격동이 사라지자 중섭은 주위를 돌아보았다. 약병들이 곧 눈에 띄었다. 옥시풀, 아까 찡끼 기타 몇 개의 약병과 가제와 하얀 붕대가……그리고 그 곁에 떨어져 있는 가위도 눈에 띄었다. 중섭은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몽둥아리가 된 손에서는 붕대가 풀어져서 기다랗게 흘러내리고 있다. 중섭은 힘없이 털썩 쓰러져 앉으며 얼굴을 감쌌다. 울음이 그냥 북받쳐 오르는 것을 간신히 씹어 넘기고 있었다. 아버지는 몹시 동요되고 있는 큰아들의 어깨머리를 묵묵히 지키고 섰다가 그대로 고개를 떨구었다. 어머니 눈에서도 눈물이 주르르르 흘러내리고 있었다. 잠시 후 아버지가 아들 앞으로 다가갔다. 아버지는 불구가 된 아들의 손을 붙들고 풀어 헤쳐진 붕대를 조심스러이 다시 감고 매어 주었다.
“잡념을 버려요. 잡념을 가질수록 자기에 대한 애착은 줄어드는 법이야. 사람이란 어느 때를 막론하고 자기에게 주어진 그것만으로써 만족을 해야 하는 법이야. 자기에 대한 애착을 가져야지. 이것이 인간 사회의 섭리거든. 이 아버지는 지금의 너 그대로도 충분히 만족하고 있다. 어머니의 마음도 매한가질 게다. 알겠지 ?”
중섭은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아버지의 말은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아버지의 마음은 실은 지금 울음에 젖어 가고 있는 것이다. 나 이상으로 지금 울고 계시는 것이다. 중섭은 서서히 고개를 들어 어머니를 쳐다보았다. 나의 거부로 치료를 못하다가 내가 잠들기를 기다려 몽둥아리가 된 손일망정 어머니는 그 찢긴 곳마다 소독을 하고 약을 칠하고 붕대를 조심스러이 감아야 했던 것이다. 그때 약이 상처마다 주는 강한 자극에 더욱 악몽 속으로 휘몰려 가 소리를 지르게 된 것을 중섭은 깨달을 수 있었다. 서서히 떨구었던 고개를 다시 들어 눈물에 젖어 가는 어머님의 모습과 마주치는 순간 중섭은 가슴이 뭉클 뜨겁게 젖어 가고 있었다. 이처럼 나로 인하여 어머니와 아버지가 받아야 하는 마음의 고통, 이것은 날이 갈수록 더욱 짙어만 갈 것이자. 나는 그들에게 이처럼 고통의 씨를 뿌리면서도 살아야 하는 것인가. 중섭은 얼굴을 감싸고 울음을 머금었다.
2
동생인 중서는 부산 거리가 발에 익지 않아 발길 닿는 대로 이 다방 저 다방 찾아다니며 지리한 시간을 하루같이 메우었다. 이따금 탐탁치 않은 옛 친구를 만나면 다방 한구석에 구겨 박혀 담배만 연방 갈아 피우며 실없은 얘기에 마음을 묻어 보다가는 통행 금지 시간이 다 되어서야 집에 돌아오는 것이었다. 그러나 또 아침이 되면 눈이 뜨기 바쁘게 집을 나와 버리곤 하였다. 그는 집이 점점 싫어지는 것이었다. 더우기 불필요한 신경을 써야만 하는 것이 견딜 수가 없었다. 말 한 마디 동작 하나에도 형의 동정을 살펴야하고 어머니의 간섭과 아버지의 눈짓을 받아야 하는 것이었다. 제기랄 아예 감옥을 살라지 하고 이따금 불만이 튀어나오기도 하였지만 늘 꾹 참아야 했다. 집에 있으면 담배만 손끝이 타도록 뻐끔뻐끔 태우면서 무미한 벽의 장식들을 쳐다보고 앉아 있어야만 했다. 그러니 다방에서 시간을 보내는 편이 차라리 나았다. 학교도 마찬가지였다. 개강을 하였으나 학기초라 학생수도 적고 또 휴강 시간이 거의 태반이었다. 간혹 강의가 있다 해도 그는 중간에서 듣다 말고 슬며시 사라져 나오곤 하였다, 그러고 보면 자연 갈 곳이란 다방밖에 없었다. 그 수많은 학설과 논리가 중서에게 있어서 무미 건조한 한낱 휴지로 돌아가 버린 지는 이미 오랬고 지금 그의 손끝에 다정히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펜과 책장이 아니라 담배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교문을 나서려다 중서는 어깨를 누가 치는 바람에 고개를 돌렸다.
“오랜간만인데.”
그는 중학 동창이고 또 꼭 같이 이 대학에 진학했던 민이란 친구였다.
“전쟁에 갔었단 말을 들었는데……고생했겠군. 차나 한잔 할까 ? ”
그들은 번화한 광복동 거리로 나와 백양 다방으로 들어갔다. 중서는 그 다방이 처음이었다. 과연 민의 말대로 청춘 남녀들의 운집소란 말이 방불하게 젊은 남녀들로 봐 차 있었다. 화려한 옷차림, 빨간 입술들, 한쪽에서 청년들이 시시덕거리며 킬킬거리는가 하면 한구석에서는 두 남녀 사이에 다정한 이야기가 오가고 또 한편에서는 심각한 표정으로 조용히 흘러나오는 오케스트라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민은 거의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들어서면서부터 손을 들고 가벼이 인사를 하는가 하면 또 한쪽 친구들에게는 고개를 끄떡해 보이고 여자들에는 눈짓을 주고받았다. 맨 구석지에 혼자 앉은 여자가 민을 보자 몹시 초조스러운 낯으로 줄곧 민에게 시선을 던져 오는 것이었으나 민은 못 본 척하고 그와 반대쪽으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그 여자의 방향과 등지고 앉으며 중서에게 귓속말로 지껄였다.
“저 구석지에서 내게 자꾸 눈주던 여자 있잖아. 내 여러 번 그년을 후렸었지. 그런데……”
그는 싱겁게 그리 뒷맛이 좋지 않았다는 듯이 얼굴을 찡긋해 보였다.
“너도 인제 여기 자주 나오게 되면 알겠지만 맨 그런 것들이거든. 그러니 심심풀이로 물고 떨어지는 거지 뭐 별수 있어. 우리 젊은 놈들이 언제 어떻게 될지 알어. 내일이라도 학생
보류 폐지면 그냥 총대 메는 거야.”
중서는 흥미 없이 들으면서 구석지에 앉은 여자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 얼굴에는 원망스러운 빛이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민은 더욱 거들먹대었다.
그때 도어가 열리고 한 여자가 들어섰다. 스마트한 양장에 시원스럽게 뒷머리를 커트해 올리고 엷은 화장이 횐 얼굴 색을 더욱 아름답게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민의 시선이 잠시 그 여자의 모습을 붙들고 놓지를 않았다.
“멋지단 말야. 실은 저걸 톰쳤는데 딴 것이 걸렸거든. 그러나 내 꼭 휘어보고 말 테니 두고
봐요.”
중서의 눈도 한동안 그 여자를 붙들고 놓지를 않았다. 중서의 눈앞에는 여러 가지 생각들이 서로 꼬리를 물고 지나가고 있었다. 어쩌면 저리도 닮았을까. 다만 키가 좀더 크고 얼굴이 둥근 편이었다. 중서는 그 여자를 보는 순간 까마득히 잊어버렸던 정연이 생각이 문득 가슴을 헤치고 솟아오는 것이었다. 사랑스럽던 정연이, 그러나 1.4후퇴 이후 영 행방을 잃어버리고 말았던 것이었다.
여인은 잠시 실내를 두리번거리다 민의 시선과 마주치자 순간 횐 이빨을 드러내 보이며 방시시 웃어 보였다. 민도 눈짓으로 웃었다. 갓 들어온 여자는 맨 구석지에 혼자 앉은 여자 쪽으로 갔다.
얼마 후 중서는 생각에서 깨어나자 민의 말에 비추어 이해키 곤란하다는 듯이 물었다.
“저 여자들 서로 아는 사이 같은데……”
“서로 친구면 어때. 내가 자기 친구를 톰친 줄 알면서도 인제 나한테 떨어질걸. 미스터 김, 요즘 여자들의 사고(思考)가 사변 전과 같은 줄 알어? 천만에 !”
중서는 연방 시시덕거리는 민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들 여인 쪽으로 자주 시선을 돌렸다.
“왜? 맘에 있어?”
“아니”
“숨길 필요는 없는 거야. 네가 먼저 다리를 걸었다고 해서 다음에 내가 못 거는 건 아니야. 따져 보면 벌써 우리 이전에 어떤 놈팽이들이 벌써 다 걷어치웠는지도 몰라요. 어디 슬슬 이동해 볼까?”
중서는 민을 따라 두 여자가 앉아 있는 쪽으로 갔다. 소개가 오갔다. 성 순희 양, 정 옥경 양 둘이 다 여대 재학 중. 민이 놀았다는 미스 정은 퍽 새침스러워 보였다. 그리고 미스 성은 쾌활하면서도 어딘지 싸늘한 데가 있었다.
어느덧 엷게 내리던 어둠이 짙게 거리를 내려덮고 있었다. 식당을 나서는 그들 얼굴에는 불그레 술기가 번져가고 있었다. 두 여인의 눈망울도 붉게 타오르고 있다.
“댁이 대신동 쪽이라죠? ”
“녜”
“호오, 유감인데 ……”
민은 중서와 순회 사이에 오고가는 대화를 듣기가 바르게 이렇게 말을 건네며 중서에게 한 눈을 찔끔해 보였다.
중서와 순회는 나란히 광복동 길로 걸어 올라갔다. 둘 사이에는 거의 말이 없었다. 여인은 자주 옆눈으로 중서를 치어다본다.
“전쟁이란 무섭죠 ? ”
중서는 잠시 대답을 않고 있다가 무미하게 입을 열었다.
“불구가 되어 돌아온 사람에겐 전쟁이란 무서운 거겠죠. 하지만 죽은 사람이나 뭐 별루 다
치지 않고 돌아올 수 있었던 사람에겐 또 그저 그런 정도의 거죠.”
여인은 의외라는 듯이 중서의 얼굴을 잠시 지켰다. 형님의 입장과 자기를 대조해 볼 때 중서로서는 지금 말한 그대로였다. 그러나 자기를 지켜보던 여인의 얼굴빛이 슬며시 흐려 가는 것을 보는 순간 중서는 자기의 말이 여인의 마음 한구석을 퍽 아프게 다쳐 주었다는 것을 알았다. 둘 사이에는 또 잠시 말이 없었다.
그날 밤 중서는 정연이 생각에 꼬박 밤을 새우다시피 하였다. 어머니도 신문지상이나 여러 인연에 정연이 소식을 알려 애썼으나 모두가 헛일이었다는 것이었다.
다음날 중서는 백양 다방에서 저녁 늦게까지 앉아 있었으나 순희는 보이지 않았다. 순희를 기다렸다기보다는 정연이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다음날도 또 그 다음날도 역시 보이지 않았다. 어느덧 중서의 마음은 순회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그러나 곧 이러한 마음은 술로 변해 갔다. 중서는 다방에서 사귄 친구들과 어울려 저녁이 늦으면 그곳 가까운 술집으로 옮겨 앉곤 하였다.
“연애란게 뭔지 알어? 너희들 일선에 못 가 봤지? 나도 예전에는 연애란 걸 제법 알고 있 었는데 일선에 갔다 돌아와서 여자를 보니까 비로소 내가 연애란 게 어떤 것인지를 잃어 버리고 말았다는 것을 깨달았어. 미스터 김 그렇지 않어?”
중서는 그냥 웃었다. 그들 중 군대에 갔다 왔다는 또 한 친구는 술이 얼근히 들기 시작하면 술 냄새를 훅훅 입에서 풍기면서 으례 이렇게 일선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것이었다.
“전쟁판이란 데가 어떤 덴지 알어 ? 연애라는 게 어떤 것인지를 잃어버리긴 해도 더없이 멋진 곳이야. 담배가 있지, 술이 있지, 계집이 있지……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이 세 가지 맛
에 그대로 홈뻑 젖어갈 수 있거든. 거기에는 가치 기준도 그 어떠한 한계도 있을 수 없는 거야, 쑥 얼큰해서 계집을 찾아가지 않어. 하나씩 붙들고 방으로 들어가는 거야. 다음날 서 로 얼굴만 마주치면 떠드는 거지. 야 네 것 좋던? 암 멋지지. 정말? 막 그냥 ×××××. 뭐? ××야? 야 그럼 오늘 밤은 내 차례다 양보해야 해, 알겠지. 자식은 그 날 밤 흥이 나서
쫓아가는 거야. 그러나 웬걸. 새벽도 되기 전에 화가 코끝까지 치밀어서 달려오거든. 자식 좋긴? 뱃가죽이 할머니 뜸떠먹겠더라. 때로는 둘이 하나씩 끼고 같은 방에 들어가는 거야. 한참 몸을 비비대며 킥킥거리다 보면 자식이 또 옆에서 킥킥거리고 있는 것이 전쟁판이거 든. 그런 것도 한번 맛보지 못하면 남자로 태어난 보람이 없어지는 거야. 미스터 김 그렇잖 어? 미스터 김은 병참단에 있었으니까 더 멋졌을걸.”
중서는 그냥 웃기만 했다. 항상 술이 오르면 오를수록 이야기는 이 친구 혼자판이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이것만은 진실이란 걸 알아야 돼. 전쟁판이라면 마치 독버섯들만 번식하
는 장소같이 생각하지만 실은 전쟁판이란 곳처럼 결백한 데가 없는 거야. 물론 악의란 걸 찾아볼 수가 없거든. 싸우고 죽고 다행히 죽지 않으면 그대로 그만이고 죽으면 또 죽는 대로 그만인 데야. 질투심도 욕심도 가졌댔자 하등 쓸데가 없거든. 그것들을 뭐 할 테야? 응? 그것들을 가져서 뭣에다 쓰겠냐 말이야. 불필요한 것들이거든. 또 요걸 알아야지, 필 요와 불필요가 철저한 곳이야. 하지만 여기선 필요 있는 것 이건 필요 없는 것이건 그대 로 몸에 질질 달고 다녀야 한단 말이야. 무슨 장식(裝飾)이야? 체 !”
중서는 늘 이 친구의 이야기가 모두 자기 자신의 말 같이만 생각되는 것이었다. 일선에서의 중서의 생활도 이 친구의 이야기 그대로였었다. 중서는 마구 술을 들이키곤 했다.
중서는 학교와도 점점 거리가 멀어져 갔다. 이따금 어머니의 꾸중을 듣고 책을 뒤적거려 보기도 하는 것이었으나 불과 몇 페이지를 넘기지 못하고 덮어 버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담배만 연방 손끝이 타도록 피워 물곤 하였다. 그는 자연 밤낮 백양 다방 주위에서 떠돌아 가고 있었다.
소나기라도 한판 쏟아질 듯이 무더운 저녁이었다. 다방 문을 나서려 할 때 중서는 막 들어서려는 순희와 마주쳤다. 얼굴이 몹시 야위어 보였다. 인사 대신 방시시 웃어 보이는 붉은 입술을 마주 보며 중서도 웃어 보였다. 그들은 잠시 걸어나와 좀 음침하기는 하지만 조용하다는 지하실 다방으로 들어 갔다.
“어디 아프셨어요 ?”
“좀 몸이 아픈 것 같아 죽 누워 있었어요.”
그들은 그 이상 더 말을 따지 않았다. 여인은 자주 중서와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눈을 살며시 내리깔았다. 중서는 다시금 이 여인 모습에서 정연이를 생각해 가는 것이었다.
그 후부터 만날 때마다 둘 사이에는 말없는 속에 수많은 이야기가 시선과 시선을 통하여 오고갔다. 그들에겐 말이 필요 없는 것만 같았다. 살며시 웃어 주는 눈웃음과 입가에 흐르는 가벼운 미소면 그만이었고, 조용히 얼굴을 이따금 스치고 지나가는 애틋한 표정을 서로 읽어가면 그만인 성싶었다. 그들은 어느덧 말없는 속에 마음과 마음을 주고받아 가고 있는 지도 몰랐다. 그러나 중서는 여인 얼굴 위에 자주 싸늘한 웃음이 스치고 지나가는 것을 놓치지는 않았다.
어느 날 그들은 해변가로 서서히 걸어나갔다. 서쪽 하늘에는 붉은 놀이 짙게 물들어 가고 넌지시 뻗쳐 간 산머리를 발갛게 태우고 있었다.
바다를 옆에 끼고 멀리 수평선을 바라보며 해변가 길을 걷고 있는 때는 이미 엷게 황혼이 수면을 덮어 가고 있었다. 출렁이는 파도 소리와 갯가 바위머리에 바서지는 횐 물거품만 무심히 바라보며 걷고 있던 중서는 여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여인은 깊이 생각에 잠겨서 걷고 있는 것만 같았다. 멀리 지평선 위에 던져진 여인의 시선은 단순히 지평선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때 여인은 걸음을 멈추고 잠시 바다를 향해 자기도 모를 웃음을 가벼이 던져 가고 있다가 중서에게로 얼굴을 돌렸다. 그 웃음은 지금 중서에게로 향해 있었다. 그러나 여인은 곧 다시 걷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어느 사이엔지 어깨를 가지런히 맞대고 걷고 있었다. 방파제까지 이르렀을 때는 어둠이 검게 바다 위를 덮어 가고 있었다. 방파제 위에는 사람들의 그림자가 어렴풋이 떠 있었다.
“저는 더 걷고 싶어요."
방파제 위에 사람들이 있어선지 알 수는 없지만 여인은 이렇게 말했다. 아니, 사람들이 있어서가 아니라 이 여인은 조용히 지금의 이 감정을 지속하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참 좋아요. 아아. "
감미한 꿈속에 잠겨서 이야기하는 듯한 음성이었다, 그러나 중서의 마음은 그렇지가 못했다. 이처럼 순박한 감정을 이미 다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의 마음은 지금 사변 전 정연이와 한강변을 거닐던 꿈과 같던 때를 생각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치고 지금의 자기를 돌이켜볼 때 그는 마음이 어두웠다. 전쟁과 담배와 술과 여자로 감정이 무딜 대로 무뎌 버린 지금의 그였다. 더우기 지금 이 여인의 한 점 티도 없이 샘물처럼 흐르는 감정의 맑은 물결을 바라볼 때 중서는 그렇지 못한 자신이 쑥스러워지는 것이었다. 거의 바다 전면을 눈앞에 바라보는 지점까지 이르렀을 때 여인은 마치 꿈속에서 깨어나듯이 아아 하고 조용히 감탄사를 던지며 그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바다를 가리켰다. 둥근 달이 수평선 위에 덮인 엷은 구름의 베일을 헤치고 점점 솟아오르고 있었다. 찬란히 파도 위에 흩어져 가는 은빛 비늘, 은빛 고기가 파도 위에서 파닥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여인은 그의 손목을 끌고 바닷가로 달려갔다. 여인은 높은 언덕 위에 올라서서 바다 위에 펼쳐진 야경에 온 정신을 잃고 바라보고 있었다. 발 밑에서는 바위에 은가루처럼 밀려온 파도가 부서지고 멀리 수평선 위에는 엷은 구름이 고요히 흐르는 달빛을 이고 그림처럼 떠 있었다. 저 멀리 눈앞에는 부서지는 달빛 아래 송도가 소곳이 바다 위로 나앉고 그 앞 바다에는 어선의 등화가 물결에 깜박이며 흔들리고 있었다. 여인은 그에게로 얼굴을 돌리며 마주 섰다. 달빛을 받은 여인의 얼굴은 창백한 그늘을 이고 더욱 아름답게 솟아 오고 바닷바람에 머리카락이 세차게 이마 위에서 나부끼고 있었다.
“참 아름답군요."
여인은 눈을 감았다. 그러나 곧 눈을 뜨고 조용히 땅 위를 손가락질하였다. 거기에는 가지런히 서 있는 두 그림자가 있었다. 둘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달빛 아래 웃음 짓는 여인의 미소는 더욱 아름다왔다. 중서는 여인을 자기 가슴 앞으로 끌어당겼다. 여인의 입술은 행복에 가득히 젖어 가고 있었다.
허리를 끌어당기는 중서의 품안으로 눈을 사르르 감고 조용히 넘어지듯 기대어 오는 여인의 하반신은 가벼이 늘어져 오는 버들가지와도 같았다. 여인의 조그만 입술은 방시시 웃음에 적시어져 가고 있었다. 치맛자락을 거쳐서 여인의 부드러운 허리와 탄력 있는 하체의 굴곡이 그대로 손으로 어루만지는 듯싶게 몸에 느껴지자 중서의 마음 한구석에 뜨거운 물결이 훅 파문을 일으키고 지나갔다. 그러나 다음 순간 부드러운 감각의 율동은 점점 중서의 전신을 세찬 물결 속으로 휘몰아 가고 있었다. 그리고 하복부 밑에서 벅찬 기운이 뭉클 치솟아 오르는 것을 느끼기가 바쁘게 전신의 퍼가 야수처럼 혈관을 사나웁게 달음질쳐 내려가는 듯하였다. 중서는 미친 사람처럼 여인의 전신을 우악스럽게 꽉 품안으로 끌어당겼다. 지금 그의 심중에는 단 한 가지뿐 그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점점 한 곳으로만 세차게 이어 오는 감각의 벅찬 파동이 팽팽히 부풀어오른 그의 욕망을 더욱 못 견디게 다그쳐 갔다. 그는 여인의 허리를 더욱 자기 몸으로 꾹 다가 안고 하체의 돌출한 부분을 여인의 그쪽에 밀착시켰다. 팽창될 대로 팽창된 날카로운 돌출한 피부의 첨단이 미묘한 마찰을 통하여 미칠 듯이 벅차게 전신의 감각을 율동시켜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도 짧은 순간이었다. 홱 그의 손을 강하게 뿌리치는 여인의 반발로 꾹 움켜쥐었던 여인의 허리를 놓고 한 걸음 물러서
야만 했다. 순간 격렬히 높아 가던 감각의 강한 물결은 터져 나갈 길을 잃고 맥없이 스러졌다. 미치지 못한 감각의 불만이 잠시 그의 마음에 실망의 그늘을 덮어 갔다.
그는 여인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토록 해변의 황홀한 정경에 넋을 잃고 방시시 웃음을 입가에 흘려보내던 여인의 얼굴은 분노에 확 젖어 가고 있었다. 금세 상대방의 뺨이라도 갈길 듯한 얼굴이었다. 입가에는 심한 경련마저 지나가고 있었다,
여인은 잠시 중서의 얼굴을 뚫어지게 노려보다가 곧 해변 쪽으로 돌아섰다. 그러나 분노를 이기지 못하는 듯 여인은 어깨머리가 심히 동요되고 있었다. 감미롭게 부풀어오르던 모든 감정은 중서의 난폭스러운 행동으로 이미 조각도 없이 깨어져 버리고 만 것이었다. 여인은 잠시 바다를 향하여 그대로 서 있었다. 염분을 담뿍 머금은 바닷바람이 훅 불어오자 달빛을 가득히 이고 서 있는 여인의 머리카락이 세차게 뒤로 나부꼈다.
얼마 후 그들은 오던 길로 되돌아 내려오고 있었다. 여인의 표정은 싸늘히 식어 있었다. 그들 사이에는 전연 말이 없었다. 무거운 침묵만이 둘 사이를 조용히 이어 가고 있었다. 방파제를 지나려 할 때였다.
“불쾌하셨어요 ?"
중서는 걸음을 멈추고 여인의 얼굴을 힐끗 지켰다. 도리어 자기가 했어야 할 말을 여긴 쪽에서 먼저 하였기 때문이었다. 여인의 표정은 음성과는 달리 몹시 차가와 보였다. 중서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만 마음속으로 무겁게 한숨을 죽였다. 어두운 그림자가 마음 한구석을 안개처럼 덮어 가고 있는 것이었다. 대답이 없으므로 여인은 넌지시 중서를 건너다보았다. 중서는 여인과 시선이 마주치자 뭉클 무엇이 가슴을 후비고 지나가는 것 같았다. 상대방의 마음을 훔쳐보려는 듯이 힐끗 시선을 던져 오다가 그와 시선이 마주치자 살풋 눈썹 밑으로 시선을 떨구어 버리는 그 모양이 흡사 정연이의 그것과 같았기 때문이었다.
만일 이 여인이 정연이었다면 나의 그러한 태도를 어떻게 생각하였을까? 또 그러한 순간에 부딪쳤을 때 나는 감히 그러한 태도를 정연이에게도 하였을까? 도대체 어쩌자고 나는 불과 안 지 얼마 되지도 않는 이 여인한테 그러한 태도를 감히 취하였던 것일까? 그러나 다음 순간 일종의 분노가 그의 가슴을 꿰뚫고 지나갔다. 그래 어떻단 말인가! 아무렴 어때 ! 일어나는 격정을 그대로 내쏟았을 분이다. 억제하면 어떻고 억제하지 않았으면 그래 어떻단 말인가? 신사적이건 비신사적이건 그러한 구분은 이미 나와는 아랑곳없는 개수작이 되고 만 지금인 것이다. 흥! 그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해변가를 거닐 때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여인과의 포옹이 그의 욕정을 격화시켰을 때 그는 이미 감각의 첨단까지 속속들이 알아 버린 여자의 살맛을 그대로 놓쳐 버릴 수는 없었던 것이었다. 결국 전쟁이 그에게 남기고 간 유산이었다. 여자의 살결을 아직껏 모르고 있었다면 그랬을 리도 없었다. 매춘부와 몸을 비비대며 희롱하던 그때의 격정이 이 여인의 몸을 포옹하던 순간 그를 사로잡아 버렸던 것이었다.
그러나 한 점 티도 없이 맑게 던져 오는 여인의 시선과 다시금 마주쳤을 때 그는 무질서하게 튀어 솟던 분노가 훅 자취도 없이 죽어 버리고 어딘지 자기를 잃어버리고 만 것만 같은 공허감이 눈앞을 가로막아 서는 것이었다.
“참 이상해 보여요. "
여인의 음성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중서는 의문에 가득 찬 시선으로 여인을 바라보았다.
“왜요 ? "
여인은 곧 대답을 하지 않고 다만 입가에서 웃음을 죽였다.
“말해도 괜찮겠어요 ? "
여인은 다시 입가에 훅 웃음을 띠어 가며 시선을 멀리 어둠이 짙게 덮여 가는 바다 위로 던졌다.
“선생님 표정을 가만히 지키고 있노라면 참 이상해요. 그 변화가 극심하거든요. 그러한 것
이 저는 무서워요. 꼭 저-아니,-전쟁에 갔다 온 사람들은 다 그런가요 ?”
중서는 주저하는 여인의 이야기의 뜻을 종잡을 수가 없어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 그러한 중서의 태도를 보자 곧 여인은 말을 이었다.
“아니예요, 아무 것도. 제가 말을 잘못했어요. 저는 다만 선생님의 음성만 자꾸 듣고 싶어서예요. 많이는 하지 말아 주세요. 다만 이따금 한 마디씩만 해 주시면 저는 만족할 수 있어요."
여인의 눈동자는 생각에 잠기듯 부드럽게 타오르고 있었다. 여인은 잠시 무엇을 생각해 가는 듯하다 남모를 웃음을 혼자 지으면서 입을 열었다.
“이런 말을 해도 괜찮겠죠? "
“녜?"
“선생님 음성이 꼭 그분 음성과 흡사하기 때문이에요. 처음 선생님을 뵈었을 때 저는 음성을 듣고 마치 예전에 그분을 만난 것만 같았어요. 몹시 반가왔어요”
여인의 음성은 북받쳐 오르는 감정에 매우 흥분해 가는 것 같았다.
“그분이라니요? "
중서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선생님께서도 예전에 좋아하셨던 분이 계셨을 테니까 제 말을 이해해 주시리라 믿어요. 그때 저는 철이 없는 여학생에 불과하였지만 지금 생각하면 참 그때가 몹시 그립고 또다시 그러한 때가 찾아올 수 없을까 하고 기다려져요. 그이는 조용히 제 얼굴만 들여다보곤 하 시는 것이었어요, 그래 왜 그렇게 제 얼굴만 들여다보느냐고 물으면 그이는 다만 눈웃음을 쳐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그 눈웃음은 마치 이렇게 제게 속삭여 주는 것만 같았어요. ‘나에 게 수다히 이야기하고 있는 당신 표정을 조용히 읽어 가고 있습니다. 수 없는 이야기들을 나는 당신 입을 통하여서 보다도 얼굴을 통하여 받고 싶어서입니다.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살풋 내리까는 그 가벼운 눈짓 하나도 놓치지 않고 바라보는 것이 더 즐거우니까요.' 참으로 그때는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무엇보다도 보람있고 산다는 것이 한없이 아름답게만 느껴졌습니다. 아마 선생님께서는 철없는 이야기라고 하실 거예요. 하지만 그리움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도 모르고 철없이 그냥 젖어 들어갈 수 있었던 그때가 철든 지금보다도 퍽 순 박하고 아름답게만 생각되어요. 무언지 모르게 꿈속같이 그냥 젖어 들어가도 좋을 것만 같은……”
“그래 지금은 그렇지가 못하단 말이군요?"
“그래요."
여인은 주저도 없이 솔직하게 말을 받았다.
“왜요?”
그러나 여인은 그 말에는 대답을 하지 않고 자기대로의 생각에 젖어 가고 있는 듯이 말을 잇는 것이었다.
“그 후부터 저도 그이한테서 상대방의 표정을 읽어 가는 버릇을 배워 버렸어요. 그리고 서로 표정을 조용히 더듬어 간다는 것이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인가를 깨달을 수 있었어요."
중서는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싸늘히 식어 버린 여인의 표정을 보고 마치 여인의 아픈 상처를 꼬집으려는 듯이 쿡 말을 뱉았다.
“그럼 실연을 하셨단 말이군요?"
그 순간 여인은 도리어 넌센스라는 듯이 웃음을 훅 터뜨렸다. 그리고 고개를 가벼이 저으며 입을 열었다.
“일사 후퇴 당시에 군대에 갔어요."
“그럼 아직 군대에서 돌아오지 않으셨군요?"
중서의 말이 떨어지기 나쁘게 여인은 거의 충동적인 몸짓을 하였다. 중서는 여인의 얼굴이 급기야 어둡게 흐려 가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예전에 ‘전쟁판이란 무서운 곳이죠?' 하고 물은 다음 그 얼굴빛이 죽은 사람처럼 싸늘히 식어 가던 생각이 중서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곧 짐작하였다.
“그럼 전사를 하셨군요 ? "
그러나 여인은 다시 고개를 저어 보였다.
“아녜요. 하여간 몰라요. 어떻게 되었는지……”
“그럼 ?"
중서는 대답을 기다리는 듯한 시선으로 여인을 잠시 지켰다.
“인제 그런 이야기는 고만해요. 전사하였다면 슬픈 일이지만 그렇다고 살아 돌아온다 하여도 즐거울 건 없어요. 완전한 몸으로 살아 돌아온다 하여도 저는 두려워요”
여인의 입술이 공포에 파랗게 질려가는 것 같았다. 중서는 여인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다시 캐물을 수도 없는 것이었다.
잠시 둘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이어 갔다. 그들은 묵묵히 해변을 끼고 걷고 있었다.
갯가를 향하여 세차게 밀려오던 파도가 바위에 부딪쳐 횐 물거품을 뿜고 깨어질 때마다 달빛이 은가루처럼 그 위에서 부서지고 있었다, 철썩이는 파도 소리. 달빛이 은은히 내리비치는 바다를 향하여 수많은 남녀들의 그림자가 둘씩 셋씩 서로 어울려 꿈속같이 거닐고 있다. 마치 달빛은 그 아름다운 정서를 모든 사람에게 하나같이 나누어주어 가고 있는 것만 같았다.
여인은 줄곧 바다 위로만 시선을 던져 가고 있었다. 그러나 중서는 이 우주가 내리는 꿈 같은 정경과는 동떨어진 사람처럼 어지러운 생각에 잠겨서 걷고 있었다. 그는 지금 이 여인이 한 말들을 다시금 머릿속에 상기해 가면서 이 여인이 무엇을 말하려 하였던 것인가를 곰곰이 생각해 가고 있었다. 사랑하던 사람이 죽음과 함께 포연(砲煙)에 묻혔다가 살아 돌아온다 하여도 두려워해야 하는 여인의 마음을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죽었다면 슬플 따름이라고 한다면 살아 돌아오는 것보다도 아예 죽는 편이 낫다는 말인가?
이렇게 생각이 미치자 중서는 일종의 분노가 다시 터져 오르는 것이었다. 그리고 정연이마저 이러한 생각을 갖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떠오르자 그는 더욱 사납게 마음이 격동되는 것이었다. 사랑하던 소녀, 소식은 아주 모른다 하여도 그는 아직도 정연이에 대한 사랑을 그의 마음 한구석에 고이 간직하고 있는 것이었다.
정연이도 이러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라면……그리고 나를 다시금 만나도 두려워해야 되고 피해 가야만 한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된다는 것인가. 그는 분노에 뒤이어 무겁게 가슴을 덮어 오는 불안감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왜 이 여인은 사랑하던 사람이 전쟁에서 살아 돌아온다 하여도 두려워해야 한다는 것인가. 그는 여인을 다시금 쳐다볼 의욕마저 잃어버려 가고 있었다.
3
번민은 날이 갈수록 더욱 상한 마음을 칼끝처럼 파고드는 것이었다. 창백한 얼굴은 더욱 백지장처럼 하얗게 -빛을 잃어 가고 있었다. 형인 중섭은 거의 밤을 새우다시피 악몽과 어두운 오뇌의 그늘에 짓눌려 버려야만 하였다. 귀찮은 존재가 되어 버린 자기, 사회 생활의 기능을 송두리째 상실한 이상 살면 살수록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그만큼 괴로운 부담이 되어 버릴 뿐인 것이다.
의존, 거기에는 아무런 주장도 용납될 수가 없다. 생활에 대한 주장의 상실은 이미 욕구를 잃어버린 생활인 것이다. 의존해 산다는 것은 무의미하다. 무의미를 위해서도 살아야 한단 말인가? 그 순간 중섭은 문득 세차게 떠오르는 한 가닥 생각에 사로잡혔다.
“뭐, 인간이란 것이 별난 건 줄 아나? 무의미한 거야. 인간이 장하다는게 어디 있는지 알어?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거기다 의미를 붙여 가지고 산다는 건데……쳇!"
그는 언젠가 일선 지대에서 부상당해 온 어느 보병 장교한테 이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도저히 그러한 이야기를 용납할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인간이란 자기에게 주어진 사회 생활에 성실해야 하는 데 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걸 잃어버리고 만 사람이 되어 버린 것이다. 자기에게 주어진 생명을 고이 간직해 가지고 돌아왔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만족해야 하고 그러한 이상 그것을 고이 간직해 가야 한다고 아버지는 말하였다. 알 수 있는 이야기였다. 처음 그들은 아들이 불구가 되어 돌아왔을 망정 살아서 돌아왔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었고 도리어 아들을 위로해 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아들로 인하여 받은 고통의 도가 점점 날이 갈수록 못 견디게 심해 가자 그들은 아예 죽어서 돌아온 것만 못했을 것이다. 순간적으로 받는 고통과 비애는 더 컸을지 모르지만 이처럼 지속되는 고통보다는 차라리 나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중섭의 마음은 지금 이러한 생각으로 압도되어 가고 있었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것이 그들을 위하는 길일 것이다. 중섭은 또다시 이렇게 입 속으로 되풀이하였다.
그는 조용히 눈을 떴다. 창문을 통하여 흘러드는 달빛이 베갯머리를 싸늘히 비치고 있었다. 그는 잠시 베갯머리를 적시고 있는 달빛을 바라보고 있다가 그 위에 뺨을 얹었다, 그리고 창 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추녀 끝 위로 올려다 보이는 맑게 갠 하늘 한가운데에 둥근 달이 환히 떠 있었다. 중섭은 문득 고개를 들고 동생인 중서의 잠자리를 건너다보았다. 잠이 든 중서의 얼굴은 퍽 온화스러워 보였다. 그 가벼이 다물은 입가에는 웃음마저 떠돌고 있는 듯싶었다. 티끌만한 어지러움도 없이 고이 내리 감은 눈, 즐거웠던 하루를 이것저것 생각나는 대로 더듬어 가다가 잠들어 버린 얼굴이었다.
예전에는 중섭에게도 그러한 밤들이 있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 잃어버리고 만 것이었다. 부러움도, 그러한 밤이 다시금 돌아올 수 있는 기대마저 잃어버리고 만 지금이었다. 중섭은 어지러이 그늘져 가는 마음을 걷잡을 수 가 없어 눈을 감고 베개 위에 머리를 묻었다.
잠들어 버린 중서는 아닌게아니라 밤늦게 집에 돌아와서 자리에 쓰러지자 여인과 해변가를 산책하던 생각에 잠시 마음을 묻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따금 여인으로 하여 불쾌한 감정을 갖지 않았던 것은 아니나 다시금 여인이 명랑하여지고 마지막 헤어질 때 내일의 약속을 되풀이하며 살풋 웃음쳐 주던 그 시선과 조그만 입술이 흐뭇하게 눈을 감아도 그대로 마음속으로 떠오는 것이었다. 이미 그의 마음속에는 불쾌하였던 이야기도 정연이에 대한 생각도 없었다. 더우기 마음껏 탐닉할 수는 없었다 할지라도 여인을 품안에 꽉 껴안았을 때 숨가쁘게 이어 오던 감각의 미묘한 파동이 미친 듯이 지금도 체내의 어느 한 부분에서 뭉클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감정들은 그대로 생각만 하여도 즐거운 것이 아닐 수 없었다. 이미 잠들어 버리기는 하였지만 꿈결 속에서도 이러한 감정이 그대로 지속되고 있는 것이 그의 얼굴에 아련히 떠돌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한 상세한 내용은 모른다 할지라도 부드러이 잠길을 더듬어 가고 있는 동생의 표정을 바라볼 때 죽음만을 생각해야 하는 중섭으로서는 더욱 괴로운 것일 수밖에 없었다.
그때 중섭은 잠결 속에서 쿡쿡 웃음치는 동생의 웃음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동생은 곧 웃음을 그치고 조용히 잠들어 가고 있었다. 그 얼굴은 아직도 빙긋이 웃음치고 있었다.
그 순간 중섭의 눈앞을 어두운 그림자가 스치고 지나갔다. 저녁에 있었던 일이 생각켜지기 때문이었다.
응접실에 들어가려던 순간이었다. 중섭은 상심한 표정으로 어머니가 혼자 호젓이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곧 발길을 돌려 자기 방으로 물러가려 하였으나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어머니를 잠시 바라보고 서 있었다. 어머니 손에는 사진 한 장이 들려 있었다. 어머니는 잠시 그 사진을 들여다보고 계시다가 한숨을 죽이며 그 사진 위를 손가락 끝으로 매만져 보는 것이었다. 중섭은 다음 순간 어머니 뺨 위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리는 것을 보았다. 중섭은 그 이상 더 그러한 어머니의 태도를 바라볼 수가 없어 자기 방 쪽으로 걸음을 돌리려 하였다, 부자유스러운지 팡이의 동요로 소리가 나자 어머니가 급히 고개를 돌렸다. 놀란 눈치였다. 어머니는 그때까지 큰아들이 방 건너편에 와 있는 것을 몰랐던 모양이다. 어머니는 곧 고개를 떨구며 슬며시 눈물을 홈쳤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태연스러이 방으로 들어오라고 중섭을 불렀다. 중섭은 그대로 물러갈 수도 없이 방으로 들어갔다. 어머니는 손에 들었던 사진을 급히 치마 뒤로 감추며 뒷손질로 테이블 서랍을 열고 그것을 넣은 다음 가볍게 몸짓으로 밀어 닫았다.
“참 내가 깜박 잊었었군. 약을 다려 놓라고 하였는데……그래 약효가 좀 있는 것 같으냐?"
“녜”
중섭은 의자에 앉으면서 대답을 약간 더듬었다. 중섭은 어머니의 시선을 마주 볼 수가 없어 잠시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어머니의 마음이 이토록 간절할수록 아들의 마음은 더욱 괴로웁게 죽음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어머니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약을 먹이고 몸이나 건강해 죽었으면 하는 것이 어머니의 마음이겠으나 몸이 건강해지는 것으로 중섭이의 고민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중섭의 안색이 좋아졌다고 하여 어머니 마음속에 끼쳐진 어두운 그늘이 가셔지는 것도 아닌 것이다. 다만 어찌 할 수 없는 어머니의 마음 그것뿐인 것이다. 더욱 이러한 중섭의 생각은 그로부터 단 일 분이 못 되어서 눈앞에 나타났던 것이다.
어머니가 약을 보러 나가신 다음이었다. 중섭은 곧 테이블 쪽으로 절름거리며 다가가서 서랍을 열었다. 서랍 안을 내려다보는 순간 중섭은 눈을 감았다. 웃고 있는 얼굴, 그것은 분명히 자기의 얼굴이었다. 하얀 가운을 입고 수술대 앞에 서 있는 예전의 자기…… 그는 잠시 격동되는 마음을 가다듬고 눈을 떴다. 그는 자기의 사진을 내려다보았다. 메스를 든 건전한 손, 빙긋이 정면을 향하여 웃고 있는 그는 분명히 자기였지만 지금은 자기가 아닌 것이 되어 버리고 만 것이었다. 어머니 마음속에 남아 있는 아들은 지금의 자기가 아니라 건전하였던 그때의 아들인 것이다. 그리고 지금의 내가 아니라 그때의 나를 그리워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뿐만 아니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이 사진을 매일같이 남몰래 들여다보면서 눈물을 머금었을 것이다. 웃던 아들의 모습. 의사가 된다. 내가 앓아 누우면 맥을 짚고 내 팔에 다 주사를 놓아준다. 그리고 ‘어머니, 근심 마세요' 하고 자신 있게 내 얼굴을 내려다보며 조용히 웃음져 주었을 아들이 아니었던가.
흉측스러운 꼴이 되어 자기 눈앞에 돌아온 아들, 꿈은 산산이 부서진 것이다. 그리하여 어머니는 사진만을 더듬으며 눈물을 머금어야 했고 메스를 든 아들의 손을 다시금 더듬으며 건전하였던 모습을 눈물을 글썽이며 바라보았을 것이다. 그러한 어머니의 태도가 죽은 아들의 사진을 들여다보며 죽은 아들을 그리워하고 서러움에 젖어 가는 그것과 무슨 차이가 있을 것인가. 이미 어머니는 나의 절단된 손과 다리에서 건전하였던 아들을 찾아볼 수 없는 것처럼 나의 모습에서도 아들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살아 돌아왔다 하여도 이미 죽어 버린 아들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이렇게 어두운 생각에 잠겨 가던 중섭은 급히 서랍을 닫았다. 그리고 고개를 돌리는 순간 어느 사이엔지 약그릇을 들고 방안에 들어서서 자기의 태도를 지키고 섰는 새파랗게 질린 어머니의 시선과 마주치자 억제할 수 없이 북받쳐 오르는 괴로움에 그대로 쓰러지듯 의자에 주저앉으며 머리를 감싸 버렸던 것이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쳤을 때 중섭은 다시금 잠든 동생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 얼굴은 아직도 빙긋이 웃음치고 있었다.
중섭은 조심스러이 일어나서 응접실로 갔다. 그리고 서랍을 열고 사진을 더듬어 쥐고 돌아섰다. 방에 돌아와서 그는 잠시 어둠을 지키고 앉아 있다. 성냥을 찾아서 그었다. 훅 유황을 풍기면서 타오르는 불길에 어둠이 눈앞에 서 흔들렸다. 그는 사진 한 끝에 불길을 가져다 대었다. 잠시 연기가 피어오르다 불길이 벌겋게 댕기고 점점 높아 가는 불길 속으로 하얀 가운을 입고 웃음 치는 중섭의 얼굴이 타 들어갔다. 불길 속에서 타 들어가는 중섭의 웃음 치는 얼굴은 마치 그에게 마지막 작별을 고하는 웃음과도 같았다. 중섭은 조용히 불길을 지키고 있었다. 그 시선은 흔들리는 불길에 이상하게 빛나고 있었다.
중섭은 사진을 다 태워 버리고 난 다음 자리에 누됐다. 모든 것을 끝내 버리기 위하여 내일 하루를 더 기다리자. 그것은 꼭 필요하리라. 그러기 위하여 나는 오늘만은 고이 잠들어야 한다. 그의 마음은 이상하리만큼 안정되고 있었다
4
중서는 다음날 저녁 순희와 약속하였던 다방에서 얼굴을 마주하였다. 어제보다도 얼굴이 퍽 여위어 보였다. 특별히 저녁을 산다고 하기에 중서는 순회가 안내하는 식당으로 따라 들어갔다.
술. 순회도 몇 잔 들이켰다. 붉게 타는 듯한 시선을 반짝이면서 여인은 퍽 유쾌한 표정이었다.
식사를 끝마치고 일어서려 할 때였다, 여인은 도톰한 봉투 하나를 중서에게 꺼내어 주었다. 중서는 무언가 하였다. 그러한 얼굴을 힐끗 치어다보면 서 여인은 입을 열었다.
“러브 레터라고 생각하시면 되는 거예요”
중서는 붕투를 받아 들면서 마주 웃었다. 술기에 불그레 눈망울을 적시면서 여인은 그냥 웃고만 있었다. 중서는 봉투를 뜯으려 하였다.
“안 돼요. 저하고 헤어지고 난 다음에 읽어 주세요. 속된 세리후 같지만 용서하세요”
그들은 거리로 나왔다. 헤어질 때 순회는 유달리 붉게 타는 듯한 시선으로 그를 잠시 지키고 섰다가 해죽이 입가에 웃음을 띄우며 얼핏 돌아서는 것이었다. 그러나 몇 걸음 못 가서 다시 힐끗 뒤돌아보며 손을 가벼이 저어 보였을 때는 그처럼 상냥스럽던 웃음도 어딘지 싸늘히 식어 있었다.
중서는 같이 손을 흔들어 보이려 하였으나 여자의 싸늘히 식은 웃음을 보자 들었던 손을 그대로 떨구었다.
중서는 순희와 헤어지고 나서 곧 가까운 다방으로 들어갔다. 레지가 차를 가져다 놓고 간 다음 그는 순희가 준 볼록한 편지 봉투를 꺼내었다. 겉봉을 뜯고 내용을 끄집어 들면서도 그는 순회가 이 편지를 내놓으며 러브 레터라고 생각하시면 되잖아요? 하고 가벼이 웃음 치며 던져 주던 그 타는 듯한 시선과 이와는 반대로 마지막 헤어질 때 힐끗 돌아봐 보며 보내 오던 싸늘한 웃음을 번갈아 눈앞에 그려보고 있었다. 확실히 이 두 상반된 웃음은 지금 그의 가슴 위에 어두운 그늘을 펴 가고 있었다. 그는 곧 첫 구절을 내리훑으며 차를 한 모금 가볍게 들이켰다.
김 선생님께
이렇게 감히 붓을 들어 제 마음을 적어야 하는 심정을 너그러이 용서하여주시리라 믿습니다. 선생님과 만난 후 몇 주일 동안은 참 즐거웠습니다. 이 편지를 쓰려고 처음 마음먹었을 때 저는 퍽 괴로왔고 펜을 든 손이 흰종이 위에서 몹시 떨리었습니다. 그러나 푸른 잉크의 짙은 무늬가 횐 종이를 물들이기 시작하였을 때 제 마음은 조용히 가라앉고 도리어 아름다왔던 선생님과의 어제를 즐겁게 더듬어 가고 있었습니다. 참 저는 행복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인제 저는 스스로 모든 것을 끝맺어야 할 순간에 다다랐습니다. 제게 대한 선생님의 마음 짐작 못 하는 바 아니며 지금이라도 이 편지를 중단하고 선생님의 가슴속에 그대로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파묻혀 보고 싶은 생각 간절합니다. 그러면서도 그럴 수 없는 것이 지금의 제 심정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저는 선생님이 몹시 두려워졌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두려운 이유가 무엇이냐고 선생님께서는 반문하시겠지요. 그러나 저는 그 두려워진 이유를 정면으로 말씀드릴 만한 용기를 가지고 있지 못함을 슬프게 생각합니다. 갑자기 이상한 말을 한다고 성이 나셔서 편지를 찢어 버리시거나 꾸겨 버리시지는 말아 주십시오. 부탁입니다, 혹 불쾌한 구절이 가끔 있다 하여도 끝까지 읽어보아 주십시오. 그러면 제 두려움도 알 수 있고 또 선생님 스스로 느끼는 바 적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저를 처음 만났을 때 전쟁이란, 불구자가 되어 돌아온 사람에게나 두렵고 무서운 것이지 죽어서 돌아오거나 그대로 온전한 몸으로 살아 돌아온 사람에겐 그리 무서울 것도 아닌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말을 들었을 때의 제 놀라움을 아마 선생님께서는 상상도 하지 못하실 것입니다.
서로의 편의를 위하여 전쟁에서 거의 온전한 몸으로 돌아온 한 남자의 예를 들어야 할 것 같습니다. 이것은 결코 꾸민 이야기가 아닙니다. 실지로 있었고 또 지금도 어디선가 이 사회 한쪽에서 계속되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또한 이것은 비단 선생님한테만이 아니라 전쟁에서 돌아온 모든 청년에게 묻고 싶고 하고 싶은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이제 여기에 한 여인의 수기를 적기로 하겠습니다. 그 수기를 다 적으려면 끝이 없습니다. 일기장에 꼭꼭 박아 쓴 글씨를 펼쳐볼 때마다 저는 터져 나오는 울음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그 여인은 약 이 개월 전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마지막 숨길을 돌리면서 이 수기를 제 손에 꼭 쥐어 주었던 것입니다. 왜 제가 이러한 편지를 올려야 하는지도 다음의 이 수기를 읽어보시면 스스로 깨달으시리라고 믿습니다. 이 수기는 다만 한 여성이 목숨을 끊으면서 자기 애인에 대한 눈물에 목 메인 기록만이 아니라 전 우리 여성의 기록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전쟁이란 청년들에게 있어 더없이 가혹한 것이었겠지만 우리 여성들에게 있어서도 또한 못지 않게 가혹한 것이었습니다.
그럼 필요한 부분만을 요약하여 적기로 하겠습니다.
수기(手記)
X월 X일
오늘 비로소 그이를 만났다. 나는 마치 꿈속만 같아 잠시 어쩔 줄을 몰랐다. 그이가 내 손을 꾹 움켜쥐며 내 이름을 불렀을 때 나는 다만 그이를 마주 보며 눈물을 흘렸었다. 나는 삼 년만에 다시금 그의 품에 안겼던 것이었다. 잠시 후 내가 고개를 들었을 때 그의 가슴팍은 눈물로 함빡 젖어 있었다. 그이는 눈물에 젖은 와이셔츠 가슴팍을 내려다보고 빙긋이 웃었다. 나는 그의 웃음 치는 시선과 마주치는 순간 나도 모르게 따라 웃으며 왜 그런지 수줍어져 다시 그의 품속에 머리를 묻었었다.
군대에서 돌아온 그의 모습은 예전과 다름이 없이 건강해 보였다. 아아, 삼 년 동안 그것은 악몽의 연속적인 나날이었었지만 인제 그이는 그리 심한 부상도 없이 돌아왔고 나는 그의 품에 행복을 수놓아 갈 수 있을 것이다.
X월 X일
벌써 일 주일이 지났다. 요즘은 왜 이렇게 시간이 빨리 가는지 알 수가 없다. 순혜가 같이 구경 가자고 하는 것을 간신히 따돌리고 그이한테로 갔다. 순혜한테 미안하기 짝이 없다. 다방에서 만날 때가 정각 여섯 시였었는데 어느 사이에 그렇게 시간이 지났는지 알 수가 없다. 하마터면 통행 금지가 되어 못 돌아올 뻔했다. 그이는 자꾸 시간이 아직 더 있다고 우겼지만 아쉬운 대로 뿌리치고 오길 참 잘했다.
X월 X일
그이가 정말 골이 나서 가 버린 것이나 아닐까. 그러나 어떻게 그의 요구를 선뜻 들어 줄 수가 있담.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 것 같다. 물론 앞으로 결혼하게 되면 의당히 있어야 할 일이기는 하지만 왜 그런지 부끄럽기도 하고 무섬증이 일어난다.
너무 숲 속 깊이 들어가 버린 탓도 있다.
우리는 관목과 활엽수가 늘어선 저수지 주변 숲 속을 헤치며 서서히 걷고 있었다.
‘출입 엄금'이라고 써 붙인 나무 패짝 앞에 이르렀던 우리는 걸음을 멈추었다. 나무 패짝은 오랜 풍우에 썩고 먹 글씨가 허이옇게 지워져 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부터 가시줄이 쳐 있었다. 가시줄 안으로는 조그만 길이 숲 속으로 이어져 갔고 저쪽 수림(樹林)사이로 바위가 늘어선 맞은편에는 맑은 물줄기가 바위틈으로 시원스럽게 흘러 내려가고 있었다, 그이는 엉성한 가시줄을 한 손으로 치켜 당기며 그 틈으로 몸을 구부렸다.
“인제 그만 돌아가세요. "
나는 곧 이렇게 말렸으나 그이는 벌써 가시줄 틈으로 넘어가 있었다. 그리고 가시줄을 다시 조심스럽게 치켜올리며 넘어 오라는 것이었다.
“금지 구역인데 들어갔다 야단맞으면 어떡하시려구 그러세요 ? "
나는 약간 눈살을 찌푸려 보였다. 그러나 그이는 싱긋이 웃으면서 넘어 오라는 것이었다.
“아이, 참, "
하고 주저하면서도 어느덧 나는 몸을 구부려 가시줄 틈으로 상반신을 들이 밀고 있었다.
가시줄 안에 들어선 우리는 잠시 신록이 우거진 나무 그늘들을 돌아보고 섰다가 물이 흐르는 바위 쪽으로 갔다. 그이는 바위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았다. 나는 바위 밑으로 내려가 물 속에 손을 잠갔다. 졸졸졸졸 흐르는 맑은 물줄기는 파릇파릇 이끼 낀 바위 표면을 구르듯 스치고 흘러내리며 그 밑에 괸 물 속에 잠근 내 손 잔등을 어루만지고 홀러 내려가는 것이었다.
“참 시원스러워요. 여기 와서 손을 좀 잠가 보세요."
그러나 그이는 바위에 기대어 앉은 채 나를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나는 손수건을 적셔 가지고 그이한테로 갔다. 손수건을 내미는 나를 마주 치어다 보던 그이는 손수건을 받아 바위 위에 내려놓고 내 손을 잡아끌어 주었다. 강파르게 솟은 바위 위로 다 올라섰을 때 잡아당기는 반작용으로 그의 몸도 내게로 다가와 있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그이는 어느덧 한 손을 내 등뒤로 돌리고 나를 포옹하고 있었다. 나도 어느 틈엔지 모르게 그의 어깨 위로 손을 얹고 있었다, 그리고 점점 그의 얼굴이 내 얼굴 위로 가까와 오고 있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그의 숨소리가 얼굴 가까이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다음 순간 뜨거운 물결이 내 얼굴 하나 가득히 쏟아져 오고 있었다. 감미론 율동이 점점 부풀어오르는 풍선처럼 전신을 휩싸고 지나갔다. 나는 간격을 두고 강하게 가슴 위로 조여 오는 그의 팔 힘이 숨막힐 듯이 무겁다기보다는 오히려 미치지 못하는 어떤 야릇한 몸짓을 충만시켜 주는 것만 같이 벅차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나는 타는 듯한 시선을 방시시 떴다. 그리고 그를 올려 치어다보았다. 그는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자기 뺨을 내 뺨 위에 애무하듯이 비비대어 주었다. 잠시 나를 잃고 그의 이러한 애무 속에 파묻혀 들어가면서 나는 그의 어깨 너머로 짙은 녹색이 우거진 나무 그늘 사이로 한없이 펼쳐 간 푸른 하늘의 단면을 쳐다보며 향긋한 꿈속에 잠겨 있었다. 그러다 나도 모르게 시선을 숲 속으로 떨구는 순간 나는 깜짝 놀라 그이를 뿌리치며 몸을 움츠렸다. 이쪽으로 시선을 모으고 있는 사람의 그림자가 관목 사이로 눈에 띄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죄나 저지른 사람처럼 얼굴이 빨개져서 주저앉았다. 관목이 가볍게 소리를 내면서 흔들렸다. 이쪽의 눈치를 채었음인지 엿보던 사람이 움직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관목 사이로 움직이는 사람이 곧 소년이 라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나는 곧 우리를 엿보던 또 하나의 얼굴을 발견하고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소년이 서 있던 바로 그 관목 사이로 커다란 개가 이상하다는 듯이 우리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소년이 물러가자 개도 곧 관목 숲 사이로 사라졌다. 그이는 다만 빙긋이 웃음 치며 태연스러이 소년과 개가 사라지는 쪽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소년은 숲을 헤치며 위쪽으로 물러가면서도 힐긋힐긋 나무 그늘 사이로 우리 쪽을 훔쳐보고 있었다. 소년과 개의 그림자가 완전히 숲 사이로 사라졌을 때에야 나는 비로소 일어섰다. 그리고 그이와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나는 왜 그런지 다시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아이 인제 돌아가요."
그러나 그이는 더 걷자고 하였다. 나는 하는 수 없이 그를 뒤따라 올라갔다. 소년으로 인하여 방해가 돼 버리기는 하였지만 그실 나는 지금의 그 감미한 정서를 조금이라도 더 지속하고 싶었었다. 그리고 아까처럼 그의 품에 안겨 조용히 모든 것을 잊고 그의 부드러이 타오르는 시선 속에 나의 시선을 잠겨 보고 싶었었다.
우리는 이끼 낀 돌 틈을 조심스럽게 건너서 오솔길로 들어섰다, 우리는 그 길을 따라 서서히 풀잎들을 밟으면서 걸어 올라갔다. 올라갈수록 숲은 더욱 우거지고 아름드리 나무들이 죽죽 수직으로 하늘을 이고 뻗쳐올라 그 무성한 가지와 잎들이 쌓여서 맑은 하늘이 간신히 이따금 내다보일 뿐이었다.
얼마 안 가서 우리는 곧 그 오솔길을 따랴 부질없이 나뭇잎들을 툭툭 쳐서 떨어뜨리며 걸어 내려오는 소년과 마주쳤다. 아까 고 소년이었다. 누런 개를 앞세우고 소년은 천천히 걸어 내려오고 있었다. 소년은 우리를 보자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빙긋 웃으면서 개와 함께 우리 옆을 지나가는 것이었다. 소년은 얼마 안 가 다시 힐끔 돌아보면서 놀리듯이 앗하하하 웃후후후 하고 웃으면서 개와 함께 뛰어내려가는 것이었다. 나는 그 순간 다시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이는 약간 어색한 듯이 ‘자식 !' 하고 웃음을 죽이고 있었다.
오솔길을 따라 다시 걸어 올라가던 그이는 점점 경사가 급해지자 관목을 헤치고 숲 속으로 접어 들어갔다, 이상한 새들이 나무에서 나무로 넘나들며 울고 있었다. 고요한 산 속의 적막을 깨뜨리는 것이라고는 이러한 새들의 신비스러운 울음소리뿐이었다.
“인제 그만 돌아가요, 네 ! "
나는 숲 속 기슭에 그냥 머물러 선 채 왜 그런지 마음이 조마스러워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그이는,
“응 ?”
하고 나를 한번 돌아다본 다음 그대로 숲을 헤치고 걸어들어만 가는 것이었다. 나는 오솔길에 망설이고 서서 관목 사이로 흘깃흘깃 지나가는 그의 뒷그림자를 쫓고만 있었다.
“어디로 가는 거예요? "
“글쎄 따라와 봐요. 여기 푹 앉아서 쉴 수 있는 좋은 자리가 있다니까……”
숲 사이로 그이가 돌아서서 손짓하는 것을 보고 나는 하는 수 없이 숲을 헤치며 조심스러이 따라 들어갔다. 관목 숲이 너무 무성하여 다리와 팔이 긁혀 마음대로 걸음을 옮길 수가 없었다. 치맛자락이 자꾸 나뭇가지에 휘감겨 마치 무엇이 뒤에서 잡아당기는 것만 같았다. 인제 다 왔으려니 하고 고개를 들어보면 그이가 보이질 않아 나는 사방을 휘돌아보면서 급히 이렇게 소리를 쳐야만 하였다.
“아이, 어디에 있는 거예요?"
그리고 나서 그의 음성 나는 쪽을 찾아보면 어느 틈엔지 그는 또 딴 곳에서 손짓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수 차례나 이렇게 하면서 간신히 그이가 서 있는 곳까지 갔다. 그곳은 참으로 아늑한 장소였다. 관목이 둘러싸인 가운데 편편하고도 넓은 바위가 하나 마치 우리들이 앉아 쉴 수 있게끔 미리 마련이나 해 놓은 것처럼 놓여 있었다. 그리고 몇 걸음 앞도 잘 내다보이지 않을 정도로 나무 그늘에 싸여 있었다. 그이는 나를 가볍게 껴안으면서 바위에 앉았다. 나도 그의 품에 몸을 던진 채 그가 하는 대로 몸을 맡기고 있었다. 그는 나의 귀밑을 입술로 간지려 주었다, 나는 급히 몸을 움칠하였다. 전신의 피가 확 상기되고 어째야 좋을지 모를 정도로 온몸의 감각이 미묘하게 물결을 이루면서 양 틈 사이로 질주하여 들어오는 것만 같았다. 그이는 나의 몸을 비긋이 눕혀 가고 있었다. 그의 손이 나의 젖가슴 위로 다가오는 것 같아 나는 그의 손이 그 이상 더 위로 올라오지 못하게 꼭 붙들었다. 그의 눈은 어떤 욕망에 불그레 타오르고 있었다.
“전 지금 이대로가 제일 좋아요."
나는 급히 그의 얼굴을 퍼하듯이 모로 시선을 홀리면서 입을 열었다. 그이는 잠시 내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다가 가벼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럼……?"
“………”
다음 순간 나는 그의 손을 강하게 뿌리치면서 몸을 일으켰다. 나는 그이가 그러할 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내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사변 전 그때 그이는 어디까지나 나를 포옹하는 데 그쳤고 나를 내 몸을 존중하여 주었었다. 그러하던 그이가 어느 사이에 이처럼 난폭하게 되어 버린 것일까.
그이는 내가 자기를 뿌리치고 입술이 파랗게 질려 일어서 버린 것을 보자 무뚝뚝하게 얼굴을 찌푸리며 자기도 곧 일어섰다. 그리고는 가자는 말도 없이 관목을 헤치고 혼자 나가는 것이었다. 나의 마음은 몹시 동요되고 있었다. 불쾌한 감정이 금세 확 터져 나을 것만 같았으나 나는 간신히 참았다. 나도 곧 나뭇가지들을 헤치면서 나왔다. 관목 숲을 거의 헤치고 나왔을 때는 그이는 눈앞에 보이지 않았다.
나는 뛰다시피 하면서 오솔길을 내려왔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수목 사이로 걸어 내려가는 그의 뒷그림자를 발견하였다. 양팔이 모두 성한 곳을 찾아 볼 수 없으리만큼 나뭇가지에 긁혀 울긋불긋 퍼가 퍼져 가고 있었다. 나일론 스타킹도 모두 터지고 장딴지 한쪽에서는 붉은 피마저 배어 가고 있었다.
그이가 아까 우리가 넘어 온 가시줄 앞까지 왔을 때에도 나를 돌아보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그러한 그의 태도를 볼 때 울고라도 싶었다. 가시줄을 간신히 넘고 큰길에까지 나왔을 때 뛰다시피 하여 나는 그의 앞길을 막아섰으나 그이는 그때까지도 화가 가시지 않은 태도였다.
“너무하세요. 제가 뭐 잘못했단 말이에요?"
나는 이렇게 말하며 그를 원망하는 것이지만 도리어 그는 불쾌한 표정을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벌써 오늘은 헤어지는 것이냐고 약간 아쉬운 표정을 하여 보였을 때에도 그이는 일종 조소에 가까운 표정으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지금부터 내가 어디로 가는 건지 아시오? 흥 ! "
나는 그이의 이 말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홧김에 하는 말로밖에 들을 수 없었다. 나로서도 불쾌하기 짝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어찌 할 도리가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나로서는 그이로부터 처음 당하는 참을 수 없이 모욕적이고 난폭한 일이었다 하겠지만 군대에 갔다 온 탓이라고 그냥 묵인해 버릴 수밖에 없다. 어쨌든 앞으로는 내가 잘 조종하기에 달린 것이다.
오늘 밤 술이나 과음해 주지 말았으면,,,,.
X월 X일
요즘 그이가 너무 술을 과음하는 것 같다. 나와 만난 것이 초저녁이었었는데 벌써 그이는 퍽 취해 있었다. 그리고는 말끝마다 용서하라고 누누이 되풀이하고 있었다. 그는 울기마저 했다.
“왜 그러세요?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요?"
나는 그의 태도가 아무래도 심상치 않아 곧 이렇게 묻는 것이었으나 그이는 그냥 아무 일도 없었다고 고개를 흔들면서 자꾸 자기가 잘못했다고 하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 봐도 무엇 때문에 그랬는지 알 수가 없다. 전번 숲 속에서 성을 내고 가 버린 일은 벌써 용서하여 준 지 오랬는데 새삼스러이 왜 또 그러는 것일까.
X월 X일
약속대로 오늘 해운대에 갔었다. 돌아오는 길에 동래 온천장에 들렀다. 몸을 가볍게 씻고 밖에 나왔을 때는 이미 서쪽 하늘을 붉게 물들였던 저녁 놀이 희미하게 비껴 가고 있었다. 좀 무덥기는 하였지만 종일 해변가에서 시달린 피로가 모두 스쳐 간 듯이 참 기분이 상쾌하였다. 중국집에 들러 저녁을 먹을 때 그의 강요에 못 이겨 나는 배갈을 두 잔이나 받아 마셨다. 처음에는 그의 유쾌한 기분을 혹시 상하게 할까 염려되어 가만히 있었지만 과음하는 것 같아 나는 곧 술을 더해서는 안 된다고 말렸다. 그러나 그이는 술을 더 가져오라고 보이에게 막무가내였다. 버스 시간이 끊어진다고 나는 일어섰다. 그이는 가져온 것만 곧 먹고 가자는 것이었다. 나는 다시 앉았다. 그이는 나더러도 한 잔만 더 마시라고 했다.
나는 그러지 말고 빨리 마시고 가자고 했다.
“왜?"
하고 그는 내 얼굴을 잠시 들여다보며 술기가 불그레 물들어 가는 시선을 가늘게 떠보였다. 그러면서 내 손을 잡았다. 그는 곧 내 몸을 가볍게 자기 쪽으로 끌어 당겼다. 나는 도리어 반대쪽으로 비켰다. 그러자 그는 가볍게 웃었다.
“왜 ? 내가 싫어졌어 ?"
나는 어떡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 말은 그만두세요. 시간이 없잖아요. 어떡하시려고 그러세요 ? "
“흥 ! "
그이는 싱거울이만큼 콧소리를 길게 끌고 나서 술을 연거푸 죽죽 들었다. 그의 얼굴에는 불만스런 감정이 점점 짙게 떠돌기 시작하고 있었다.
중국집을 나설 때는 이미 통행 금지 삼십 분 전 사이렌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고 최종 버스가 끊어진 지도 까마득하였었다.
그는 몹시 취해 있었다.
“언제까지 이래야 돼, 응? 한 걸음 나서 보지 못할 바에는 숫제 물러서든가. 뭐 좀 그런게
있어야 할 게 아니야?"
그이는 마치 지금의 자기 심정을 호소라도 하는 듯이 손가락을 세워 가지고 눈앞에 내저으며 말을 더듬었다. 그이는 자기가 내게 유치할 정도로 반말까지 쓰고 있다는 것도 모르게 취해 버린 모양이었다.
“좀 생각해 보란 말이야. 사랑하는 여자를 만난다. 이야기한다. 기껏해야 포옹이나 키스 정 도다. 헤어진다. 자극될 대로 자극된 육체의 감각. 여자의 살맛은 이미 알고 있다. 결국 사 랑하는 여자에게서 이를 수 없었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닥치는 대로 계집을 하룻밤 사서 끼고 잔다. 다음 날 또 사랑하는 여인은 여인대로 만난다. 밤낮 이래야 되니 어떡해야 된단 말이야? 응?"
그이는 막 지껄여 대면서 비틀거렸다. 그리고 나중에는 울화가 치미는 듯 주먹을 휘두르는 것이었다. 나는 곧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 세웠다. 그리고 그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고 그냥 올라탔다.
“흥 ! "
그이는 노기와 일종 조소 어린 코웃음을 치고 돈을 빼내어 운전수에게 퍽 내던졌다. 그리고 택시 문을 탁 밀어 닫고 나서 비틀거리며 온천장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운전수가 힐끔 나를 돌아다보았다. 차가 움직였다. 나는 잠깐 하고 운전수에게 차를 멈추게 하였다. 그러나 나는 차에서 내릴 수도 어떡할 수도 없었다. 운전수가 시간이 없다고 투덜대어 나는 곧 차를 그냥 몰게 하였다. 나는 그대로 혼자 돌아왔다. 돌아오는 차 속에서 나는 그이가 마구 지껄이던 이야기들을 한 마디씩 다시금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자리에 누워서도 그 이야기들을 아주 잊어버리고 잠들 수가 없었다. 나를 사랑한다는 그 자체에는 하등의 변화가 없다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확실히 그의 사랑에 대한 태도는 무서울이만큼 변모하고 있었다. 왜 그렇게 된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는 일이다.
X월 X일
그는 이미 술에 얼근히 취해 있었다, 그는 몇 마디 말을 하였지만 나는 한 마디도 입을 떼지 않았다. 나는 얼마 후 곧 헤어져서 돌아왔다. 내가 자리에서 아무 말 없이 그냥 일어섰을 때 그이는 벌써 가느냐고 선한 기미를 보이기는 파였지만 붙잡지는 않았다.
X월 X일
몹시 술에 취해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무겁게 감돌고 입술 언저리가 싸늘히 식어 있었다. 우리는 무더운 다방 한 구석지에 곧바로 마주 앉아 있었다. 한 시간 가까이 지나도록 우리 사이에는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누가 먼저 나가자고 한 것도 아니었다. 또 누가 먼저 일어나 나간 것도 아니었다. 우리는 어쨌든 다방에서 나와서 영도다리를 건너 해변을 끼고 높은 언덕배기 길을 묵묵히 걸어 올라가고 있었다.
몹시 무더웠다. 바닷바람도 건집집한 물기를 머금고 도무지 시원스럽지가 않았다. 공동 묘지를 지나 돌자갈이 심한 길에 이르렀을 때 그이는 나를 한 번 무겁게 돌아보았다. 그리고 내가 어두운 표정으로 시선을 내리깔고 그냥 뒤따라 걸어오고 있는 것을 보자 그이는 걸음을 멈추었다. 나도 곧 걸음을 멈췄다.
“왜?"
그이는 나의 침울한 태도를 보자 이렇게 물었다.
“그만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나는 전번 일들을 생각하고 또 오늘도 그와 같은 사태가 벌어지지 않을까 두려워서였다. 그는 잠시 어두운 표정으로 나를 지키고 섰다가 길 옆 바위로 가서 기대었다. 그리고 멀리 바다 위로 쓸쓸히 시선을 던졌다. 우리 사이에는 또 잠시 말이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예전 같지가 않으신 것 같아요."
나는 이윽고 이렇게 말머리를 끄집어냈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대답도 없이 그냥 묵묵히 바다 쪽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죠?"
나는 나직이 다시 한번 물었다. 그이는 내 말을 주인하지 않는다는 듯이 시선을 떨구며 가볍게 한숨을 죽였다.
“그럼 요전 동래에서 하시던 말씀이 모두 사실이군.”
“………”
“알겠어요. 그럼 이만 전 돌아가겠어요."
나는 약간 실망에 찬 눈으로 그를 한 번 마주 본 다음 곧 돌아섰다. 나는 그대로 걸어 내려왔다. 나는 울고 있었다. 한참 걸어 내려오다 나는 더 걸음을 옮길 수가 없어 발을 멈추고 잠시 섰다가 뒤를 돌아다보았다. 그이는 바위에 기대어 선 채 언제까지나 쓸쓸히 바다 쪽으로 시선을 던져 보내고 있었다.
X월 X일
오늘 그의 편지를 받았다. 편지를 받아 들고 나는 두렵고 착잡한 감정에 뒤얽혀 겉봉을 뜯기를 몹시 주저했었다. 그의 편지 내용은 이러하였다.
‘요전엔 참으로 미안했습니다. 실은 일부러 술을 먹고 갔었습니다. 나는 맑은 정신으로 이 미 추잡할 대로 추잡하여져 버린 나를 고백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편지를 쓰게끔 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내 생활을 아시려 하지 마십시오. 나는 더없이 무질서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형란씨의 사고 한계로써는 도저히 생각도 미칠 수 없는 위치에서입니다. 지금도 사는 확실히 형란씨를 사랑하고 있다고 자신하고 있습니다.
조금도 거짓이 아닙니다. 그러면서도 그 이면에서 추잡한 생활을 계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동래 온천장에서 형란씨에게 추태를 부리고 나서 내가 그날 밤 어디로 찾아갔어야 했었는 지 아마 모르실 것입니다. 그날 밤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형란씨를 사랑하지 않아서 가 아닙니다, 예전에 우리가 서로 마음과 마음으로만 주고받던 그러한 사랑을 저버린 것 은 결코 아닙니다.
나는 지금 자기 분열 속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되어야 하였느냐고 묻지는 마 십시오. 저는 ‘이유’를 싫어합니다. ‘이유’란 ‘자기 합리’에 불과한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자 기 합리'를 위해서 산다고 하지만 나는 이미 그러한 것과는 인연이 먼 사람입니다, 나는 결코 형란씨를 속인 것은 아닙니다. 추잡한 놈이라고 욕을 해도 좋습니다. 다시는 안 만나 준다고 거절을 해도 좋습니다. 나는 솔직히 지금의 나 그대로를 형란씨에게 알려드리고 싶 어서일 뿐입니다. 바로 전날 밤 매춘부의 젖가슴을 어루만지던 그 손으로 형란씨의 허리를 껴안았죠 뭇 남자의 입술이 지나간 매춘부의 음탕한 입술 위에 마구 비비대던 그 입술을 가지고 형란씨의 입술을 요구하였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형란씨를 모욕하기 위한 것도 희롱하기 위한 것도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형란씨로서는 분하기 그지없을 줄 알고 있습니다.
이토록 추잡한 생활을 가지면서도 저도 형란씨를 사랑하고 있다고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
습니다. 너무도 뻔뻔스럽다고 욕지거려도 좋습니다. 숲 속에서 또는 인적이 드문 길가에서 서로 피부가 스칠 때마다 그리고 서로 몸을 기댈 때마다 점점 고조되는 감각의 율동을 나로서도 억제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나는 너무도 많은 것을 알아 버리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는 ‘몰라야 할 일’이 많은 것 같습니다. 알고도 그것을 억제해야 하는 것이, 즉 인 간으로서 인간을 살아 나아갈 수 있는 힘이라고들 합니다만 종교가도 도덕가도 될 수 없는 나로서는 아예 ‘몰라야 할 일'은 끝내 그대로 모르고 그치는 것이 살아가는 데 수월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몰라야 할 일'은 더 많이 알아 버리게끔 마련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형란씨에게는 아마 예전에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전쟁으로 헤어질 때까지 한 점 티 없이 서로 고이 간직했던 그러한 애정을 지금도 간직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러한 마음을 그대로 유지하실 줄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미 그러한 이외의 것을 너무도 많이 알아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상 더 쓰고 싶지도 않습니다. 나는 아무 것도 탓하려 하지는 않습니다. 또 원망도 하지
않습니다. 원망을 했다고 해서 제자리에 돌아올 수 있는 것도 아닐 테니까요. 내가 술을 먹
고 형란씨 앞에서 여러 번 운 기억이 납니다. 제 딴에는 뉘우치고 나를 다시 올바르게 찾아
보려고도 하였지만 다 헛된 것이었습니다.
그럼 이만 펜을 놓습니다. 부디 행복 있으시기를……’
나는 편지를 다 읽고 나서 막 흐느껴 울었다. 분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이 편지를 썼을 때의 그의 심정을 동정해서도 아니었다. 무언지 모르게 울음이 확 쏟아져 나와서였다.
X월 X일
나는 그에게 편지를 썼다. 나는 그대로 그이를 내버릴 수는 없다. 그이는 지금 무너진 자기의 일부로 인하여 자기 전부를 무너뜨리려 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는 것이다. 그의 육체와 마음속에 침식해 버린 어두운 그늘, 이것은 결코 외적인 것이지 내 적인 것은 아니다, 그이를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
(이하는 다만 요약되어 있었다. )
벌써 이 개월이 지났다. 그러나 모든 나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모든 것을 허락하고 받아 줌으로써 그이가 완전히 나에게로 돌아오고 그럼으로써 나는 그이를 다시금 올바른 자기의 위치로 돌아오게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던 그 자체가 오산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확실히 나는 어리석었다. 나는 그이가 요구하는 것을 모두 충족시켜 줌으로써 추잡한 길에서 확실히 벗어날 수 있으리라고만 믿었다.
한번 그릇 시작되면 일은 힘들어진다. 확실히 모든 것이 그렇다. 그이가 마음대로 내 살결을 어루만지고 난 다음부터 그는 수시로 나에게 그것을 요구하였다. 나는 될 수 있는 한 그의 요구를 들어주려 했다. 숲 속에서 시작된 일은 점점 이상한 장소로 연장되어 갔다. 처음 한두 번 외박을 할 때 나는 집을 속일 수 있었다. 또 집에서도 내 말대로 속아 주었다. 그러나 외박의 도수가 점점 심해지자 나를 대하는 집사람들의 낯빛이 나 보기에도 이상하게 움직이는 것 같았다. 나는 스스로 자중하여야 하였다. 그러나 그이는 그렇지가 않았다. 이윽고 나는 집을 마음대로 나갈 수도 없게 되었다. 그렇게 되자 그의 불만은 노골적으로 터져 나오곤 하였다.
내가 그의 요구대로 응해 주지 못하고 헤어져야 할 때면 나는 애원하듯 그에게 부탁하곤 하였다. 그이는 그러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그이는 나와 헤어지자 또 그러한 곳으로 찾아가는 것만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나의 몸의 상태가 이상하여 곧 병원으로 가 볼까 하였으나 그냥 참았다. 다음날 아침 나는 바로 그쪽에 몹시 아픔을 느꼈다. 그리고 나의 생각에는 어떠한 어두운 공포가 치솟아 아픔을 간신히 억제하면서 그이를 찾아갔다. 내가 급히 사유를 이야기하자, 그이는 다만 머리를 무겁게 숙이고 어물대는 것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내가 흐느껴 울면서 다그쳐 묻자 그는 용서하라고 빌면서 나를 병원으로 데리고 가는 것이었다. 병원에 이르러 그 간판을 올려 치어다보는 순만 나는 그만 확 터져 나오는 울음을 억제치 못하고 돌아서며 전선대에 쓰러지듯 몸을 기대었었다. 더없이 참을 수 없는 굴욕이었다.
그 후 나는 몇 주일 동안이나 굴욕을 씹어야 했다. 그러나 경과는 그리 호전되지가 않았다. 의사의 입을 통하여 내가 그러한 종류 중에서도 최악의 케이스에 놓여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차라리 죽어 버리는 것이 나을 것만 같았다.
“저 이렇게 말하면 흑 어떻게 생각하실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부인께서만 철저히 치료를 받
는다고 해도 효과가 없을 겁니다. 문제는 주인되시는 분이 철저히 치료를 끝내셔야지……
곧 또 옮게 되니까요. 그리고 지금 부인의 경우를 보면 몹시 치료 기간을 오래 잡아야 할
것 같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한심한 현상입니다. 젊은 층에 놀랄 만큼 이러한 병이 침범되
고 있으니까요. 글쎄 이것도 전쟁 탓이라 할 수 있겠지요……”
의사도 퍽 딱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것이었다.
나는 매일같이 치료를 받아야 했다. 그러나 그이는 게을렀다. 그이는 마구 술을 마시고 멋대로 떠돌아다니는 것이었다. 만일 그러다가는 일생을 두고 그 병으로 인하여 고통을 받게 될 것이라고 의사가 충고하는 것이었으나 아무런 반응의 빛깔도 보이지 않았다.
날이 바꾸일수록 나의 얼굴빛은 급속도로 여위어 갔다. 집에서는 눈치를 챘는지 내 등뒤에서 수군덕대는 것만 같았다. 아! 나는 어떡해야 좋을 것인가? 치료가 끝난다고 뭐할 것인가? 이미 모든 것은 무너져 버린 것이 다.
꿈 같던 이야기들, 그러나 이미 내 마음속에서 시들어 버린 지 오래다. 이처럼 싸늘히 식어 버린 내 얼굴 속에도 그처럼 꿈 같던 이야기들이 있었던가 하고 스스로 의아스러워질 정도로 나는 이미 빛을 잃고 말았다.
이 이상 더 일기를 옮겨 놓기에는 저로서는 용기가 부족한 것 같습니다. 또 이상 더 필요도 없을 줄 압니다. 그 후 이 수기를 적은 여인은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자신의 슬픈 생명을 종말지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물론 선생님께서는 이 수기를 옮겨 써야 하였던 제 심정을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으실 줄 믿습니다. 그리고 너무나 어리석은 이야기라고 고소(苦笑)해 버리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 여자의 입장으로서는 너무도 가슴 아픈 비통한 이야기입니다. 실없는 노이로제 환자라고 하여도 반대하려 하지 않습니다. 선생님과 함께 보낼 수 있었던 지난 몇 주일 동안은 참으로 제게 있어서는 더없이 즐거웠던 기간이었습니다,
언제까지라도 아름답게 제 마음속에 간직할 수 있었던 즐거움이었습니다. 이러한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슬픔으로 끝맺기보다는 언제까지라도 마음속에 간직할 수 있는 기회에 끝맺어 보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제 이러한 태도를 부질없는 것이라고 나무라기도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선생님에게 두렵다고 한 제 말이 불쾌하시리라 믿습니다. 선생님은 곧 한 사람의 경우를 따져서 그것을 누구에게도 적응한다는 것이 얼마나 그릇된 것이냐고 항의하실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선생님 자신이 생각하실 문제입니다. 인제 모든 것을 끝맺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한편 어쩐지 모르게 선한 공허감이 하염없이 마음속에 떠올라 스스로 제 자신이 야속스러워도 집니다. 그러면서도 또 한편 그럴수록 무언지 모르게 지난 일들이 그리워지고 더욱 아름답게 마음속에 떠오릅니다.
그럼 이만 펜을 놓겠습니다. 제게 있어서 그러한 것처럼 선생님께 있어서도 저와 함께 지난 몇 주일이 아득히 사라져 버린 그날에도 아름답게 기억 될 수 있으시기를……
×월×일 성순희 올림
편지를 다 읽고 난 중서의 얼굴빛은 어둡게 흐려 있었다. 그는 편지를 훅 꾸겨 쥐었다.
그리고 식어 버린 먹다 남은 커피를 입맛이 쓰게 들이마신 다음 다방을 나왔다. 이미 술도 다 깨 있었다. 그는 어두운 거리를 서서히 걸어 내려왔다. 그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그는 순회와 처음 만나던 때를 생각해 가고 있었다. 그리고 송도 해변가의 일을……, 그러자 뒤이어 편지 속에 적혀 있던 일기의 구절구절이 다시 머리에 떠올랐다. 모두가 사실이었다. 그는 하나도 아니라고 부인할 수가 없었다, 결국은 나를 두고 하는 이야기인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마음속으로 생각하였다.
그 순간 중서의 눈앞을 한 줄기 어두움이 스치고 지나갔다. 어쩌면 순희 자신이 나와의 접촉에서 힌트를 얻어 가지고 꾸며 쓴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는 곧 그러한 생각을 부인하였다.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너무나 일기에 기록된 이야기들은 사실 토대로를 빈틈없이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상상력이 풍부하다 할지라도 그러한 남자의 경우를 여자의 입장으로서는 도저히 생각해 낼 수 없겠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사실 그대로 자기가 아는 어떤 여자의 수기이었을까. 그러나 뒤미처 어두운 그늘이 그의 마음을 뒤덮었다. 어쩌면 자기 자신의 기록일지도 모른다. 해변가에서 돌아오면서 하던 순희의 이야기가 다시금 그의 마음속에 하나하나 떠올랐다. 사랑하던 애인이 전쟁에 갔었다고 했다. 하지만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지만 만일 살아 돌아온다 할지라도 반가울 것도 없다고 하였었다. 그렇다면 친구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쩌면 자기가 은폐해 버리기 위해서 그랬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렇게 생각이 드는 순간 그는 일종의 분노가 확 치솟았다. 그는 꾸겨 쥐었던 편지를 북북 찢어 팽개쳤다. 하만 종이 조각들이 뭉쳐져서 어둠이 내려 덮인 보도 위로 흩어지는 것을 바라보던 그는 더한층 어두운 생각이 납덩어리처럼 가슴을 내리누르는 것 같았다.
그는 친구들이 으레 모여 앉아 거들먹거리고 있을 술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는 수없이 뒤이어 오는 어두운 생각에서부터 한시라도 바삐 빠져나가고 싶기 때문이었다. 그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 애썼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다시금 순희에게로 이끌려 가는 것이었다. 언제까지라도 아름답고 즐거웠던 꿈 같은 기억들을 그대로 마음속에 고이 간직하는 것으로 끝을 맺겠다는 순희의 타는 듯하면서도 싸늘하던 그 웃음이 그대로 눈앞에 떠오르는 것이었다. 이렇게 순희를 생각해 가던 그는 문득 잊어버렸던 정연이 생각에 사로잡혔다.
정연이! 그는 마치 잊어버렸던 소중한 그 무엇을 찾은 것 같아 마음이 훅 타올랐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어두운 그늘 속에 파묻혀 갔다. 정연이는 어렸을 때부터의 친구였다. 서로 집안끼리도 잘 아는 사이였다.
그것은 어머니가 서로 같은 고녀 출신이었고 중서 어머니가 아버지와 결혼을 하게 되자 아버지가 솔선 나서서 중개함으로써 어머니 친구인 정연이 어머니가 아버지 친구와 결혼을 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그러한 연유로 두 가정은 원래부터 서로 왕래가 심했었다. 중서 어머니는 정연이를 퍽 귀여워하였다. 그것은 자기 앞에 딸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정연이는 무남 독녀였다. 중서보다는 한 살 밑이고 형인 중섭보다는 세 살 아래였다. 중서와는 어렸을 때부터 퍽 다정했고 중학교에 들어가서부터는 말없는 속의 일종의 애정 같은 것을 서로 느껴 가는 것이었다. 철이 들었을 때는 이미 서로 모르는 사이에 사랑을 속삭이고 있었다. 중서가 대학에 들어갔을 무렵에는 정연의 젖가슴이 꽃봉오리처럼 몽실 솟아오르고 제법 수줍은 웃음을 보내는 것이었다. 헝인 중섭도 정연이를 퍽 귀여워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동생이 정연이와 너무 가까이 지내는 눈치를 볼 때마다 조금 우울한 표정을 짓곤 하였었다. 그러나 정연이와 중서 사이는 더욱 깊어 가고만 있었다.
숲 속을 산책하다 서로 몸에 가까이 스치면 둘이 다 얼굴을 붉혔다. 그러나 어느덧 정연이는 중서의 몸에 기대어 타는 듯한 시선을 반짝이면서 중서의 얼굴을 올려치어다 보게 되었고 그의 탄력 있는 가슴팍에 머리를 수줍은 듯이 묻어 보게까지도 되었었다. 그런 때마다 중서는 윤이 흐르는 정연이의 까만 머리카락을 가볍게 더듬으며 솜털이 보오얗게 돋은 조그만 귀밑을 신비스러운 감정으로 내려다보곤 하였다. 그리고 중서가 몸을 살며시 껴안으면 정연이는 살포시 눈을 내리 감는 것이었다. 나직한 숨소리와 함께 한 점 티도 없이 조용히 이어 가는 표정의 물결 그것은 잔잔한 호수(湖水)가에 흐르는 잔물결과도 같았다, 그러한 정연이의 얼굴을 들여다볼 때마다 중서의 마음도 조용히 가라앉고 자기 스스로가 어떠한 신비 속에 젖어 들어가는 것 만 같았다. 고이 다문 조그만 입술, 그 입술 위로 중서는 마치 깊은 산 속에서 맑게 흘러나오는 샘터 앞에 무릎을 구부리고 그 괸 맑은 수면 위에 입술을 가져다 대듯이 자기 입술을 얹어 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샘물의 맑은 정기가 신비스럽게 마음속으로 울려오듯이 입술 위에서도 이어 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처럼 순진하였던 중서의 감각과 감정은 어느덧 그 잔영도 찾아 볼 수 없게 흩어져 버리고 말았던 것이었다. 이처럼 정연이와의 과거를 더듬어 가던 중서의 마음은 어둠 속으로 으스러져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그처럼 순진하였던 그는 전쟁이란 냉혹한 현실이 이루어 놓은 무질서한 울타리 속에서 자기를 매몰시키고 말았던 것이었다. 음탕한 여인의 웃음과 몸짓을 따라 같이 킥킥거리며 제멋대로 감각의 율동을 타고 히히덕거리고 술을 처먹고 비꼬일 대로 비꼬여 역설만을 지껄여 대게끔 되어 버렸던 것이었다.
만일 지금 정연이가 나와 만나게 되고 이렇게 되어 버린 나를 발견하는 순간 정연이의 갈 길이란 과연 어떠한 것이었을 것인가. 그것은 뻔한 것이다. 목숨을 스스로 끊어야 하였던 여인의 수기, 순희가 택하여야 하였던 비극적인 결말…… 그는 비탄과 저주에 물들어 가며 눈물짓는 정연이의 모습이 그대로 눈앞에 보이는 것 같았다.
이처럼 간단을 두고 뒤얽혀 오는 생각은 더욱 무겁고 어두운 그늘을 첩첩이 그의 마음속에 납덩어리처럼 내리덮어 오고 있었다. 그리고 갈래갈래 찢긴 자기의 모습이 그 어두운 그늘 밑으로 마치 죽음처럼 깔려 들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마치 무덤 속에 들어가 있는 것 같은 착란 속에 사로잡혀 가고 있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어두운 벽뿐, 한 줄기 희미한 빛깔도 영 다시는 찾아볼 수도 없는 그러한 아득한 어둠 속에 갇혀 있는 것만 같았다.
그 순간 그는 왈칵 터져 나오는 자신에의 저주를 억제할 수가 없어 입술을 꾹 움켜 물었다, 그러나 이러한 지금의 나를 나는 어떡할 수 있단 말인가. 이와 동시에 그는 자기도 모르게 일종의 분노가 가슴을 뚫고 확 터져 나왔다. 그리고 세찬 동요가 전류처럼 온 몸을 휩쌌다.
그래서 어떻단 말인가! 그래서 어떻게 되었단 말인가. 모든 것은 될 대로 돼 버린 것이다. 될 대로 돼 버린 것을 가지고 탓했댔자 아무런 소용도 없는 것이다. 누구나 그러한 것이다. 원 그 자세가 이미 그렇게끔 되어 버린 것이다. 전쟁에 갔었다. 그리고 돌아왔다. 그것뿐이다. 그리하여 모든 것이 그러하였던 것처럼 될 대로 되어 버린 것이다. 그것뿐이다. 그것뿐, 그 이상을 생각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되어 버린 그대로 살아가면 그만인 것이다.
그는 쓰게 입맛을 다시고 곧 동료들이 모여 있는 술집으로 갔다. 담배 연기가 자욱한 속에서 마구 지껄여 대는 음성들이 벌써 거나하게 술기에 젖어 들고 있었다.
“어떻게 된 영문이야? 응 계집은 술 다음이야. 술을 마시고 계집을 사면 그만이지 뭐야. 무 무미 건조하게 시간을 낭비하고 돈을 버리고…… 체!"
눈언저리마다 불그레 술기가 번지어 가고들 있었다.
“그렇지 않어, 김? 십 팔 세기나 십 구 세기와는 다르단 말야. 우리 젊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연애란 게 무미 건조해진 시대이거든. 즉, 과정이란게 불필요해졌난 말이야. 우리는 생각나는 대로 단도직입적으로 욕망을 충족시켜야만 하게끔 되었으니까 말이지.”
누가 뭐라고 한참 지껄여 대었다.
“뭐라구, 체! 누구는 안 그랬어. 살다보니까 그렇게 되어 버렸거든. 그럼 그만이지 뭐야. 누구나 제 딴에는 멋진 놈이 되고 싶었던 거야. 하지만 현실이란 모든 사람에게 다 공평할 수는 없는 거거든."
뽀오얗게 흩어지는 담배 연기 속에 술잔이 자주 오고갔다.
“너무 그렇게 높이 쳐들지 말어요. 그렇게 돼도 곤란하거든. 뭐, 뭐 ? 내가 너무 패러독스 가 심하다고……? 체! 역설(逆說)만 가지고도 인간이란 육십 년 동안을 충분히 살아갈 수 있게끔 마련되어 있는 거야. 사회란 묘하게 구성되어 있거든. 체!"
누가 이야기를 끄집어낸다.
“어디 기습을 가 볼까? 김도 오래간만에 오지 않았어. 어때?"
“자아식."
인제부터 밤을 찾아서 시작될 자기들의 몸짓을 생각하고 쿡쿡 속으로 죽이는 웃음소리가 잠시 서로의 술잔을 물들여 가고 있었다.
5
중섭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아무런 생각도 없었다. 괴로운 것 같지도 않았다. 인제 포근히 잠이 쏟아져 올 것이다. 그리고 잠들면 그만인 것이다. 중섭의 마음속에는 이러한 생각만이 맴돌고 있었다.
간단한 이야기다. 그러나 이처럼 간단한 것을 나는 여태껏 못했던 것이다. 인제 잠들면 모든 것은 끝이 난다. 끝이 나면 모든 것은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악착스러이 나의 뇌수를 좀먹던 오뇌도 악몽도 인제는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면 내게는 다만 하얀 공허만이 남게 될 것이다.
아아, 그는 가벼이 숨결을 내쉬었다. 그는 자기 자신을 다시금 돌이켜 생각해 가고 있었다. 몽둥아리진 손, 인제 몇 시간만 지나면 그처럼 저주스럽던 몽둥아리진 손목도 절단된 다리도 하등 괴로울 것이 못 되는 것이다. 중섭은 문득 눈을 서서히 뜨고 몽둥아리진 손목을 눈앞으로 쳐들어 보았다. 일그러진 뼈마디가 창문 틈으로 새어드는 달빛을 이고 그 윤곽이 또렷이 눈앞에 떠올랐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생각도 들지가 않았다. 왜 그토록 몽둥아리진 이 손목을 저주하고 학대했어야 하였는지 스스로 의문되는 것이었다.
그는 다시 눈을 감았다. 죽음, 그는 지금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점점 죽음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인제 약 기운이 전신으로 퍼져갈 것이다. 그러면 나는 약 기운에 포근히 젖어 잠이 든다. 그러면 끝이 나는 것이다. 그는 이처럼 조용히 다가오는 죽음을 왜 사람들은 그토록 두려워하는지 의심스러워지는 것이었다. 왜 사람들은 그토록 무서워하는 것일까.
그는 문득 자기의 얼굴을 보고 싶은 마음이 떠올랐다. 지금 내 얼굴 표정도 점점 험악하게 물들어 가고 있는 것일까. 그는 죽어 가는 사람들의 고통으로 경련하는 일그러진 얼굴들을 너무도 많이 보아 왔기 때문이었다. 그는 손을 얼굴 위로 가져갔다. 그리고 조용히 눈과 코와 입술을 어루만져 보았다. 뺨을 쓸어 보았다, 아무런 변화도 동요의 그림자도 있는 것 같지가 않았다. 그는 입가에 자기도 모르는 웃음을 가벼이 흘렸다. 그 웃음은 마치 만족에서 오는 웃음같이 보였으나 몹시 차가운 기운이 싸늘히 그 가장자리를 물들이고 있었다.
그는 다시금 조용히 눈을 뜨고 맑게 창문 사이로 흘러드는 달빛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그는 약간 고개를 돌리고 창 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맞은편 집 지붕 위에는 달빛이 하나 가득히 부서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따금 이쪽 지붕 위로 가지를 뻗은 라일락 나무 이파리들이 가벼이 불어오는 바람결에 하늘거리며 흔들릴 때마다 달빛이 나뭇잎들 사이로 부서지면서 반짝이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모든 것이 다 아름답게만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는 베갯머리로 시선을 떨구었다. 거기에도 달빛이 하나 가득히 부서지고 있었다.
중섭은 다시 똑바로 고개를 돌린 다음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는 마지막으로 보낸 오늘 하루를 조용히 더듬어 가기 시작하고 있었다.
참으로 보람있는 하루였다. 몇 달을 두고 주름져 가던 어머니 얼굴에 웃음이 자주 떠돌았고 아버지 입가에도 웃음의 빛이 감돌았던 것이다. 나로 인하여 그토록 괴로와하시던 아버지와 어머니 그들은 웃음마저 저버려야 하였었다. 중섭은 죽기 전 마지막 한 번이나마 그들 얼굴 위에 웃음을 띄워 주고 싶었다. 그리고 자기로서도 어머님과 아버지 얼굴 위에 예전처럼 웃음이 떠도는 것을 보고 싶었다. 끝까지 괴로운 그늘을 그들 가슴속에 덮어 두고 목숨을 끊어 버리기보다는 그토록 자기 때문에 고통을 받아야 했던 그들에게 순간적인 넋일망정 웃음이라도 그들 얼굴 위에 남겨 주고 싶었던 것이었다.
“어머니 ! "
아침 식사가 끝나자 아버지가 회사로 나가시고 동생이 제멋대로 훌쩍 집을 나가 버린 다음 응접실에 어머니와 마주 앉았을 때였다. 중섭은 조간(朝刊)신문에 눈을 떨구고 계시는 어머니 모습을 잠시 지키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아들의 부름에 어머니는 신문이 위에 떨구었던 시선을 들었다.
“어머니 ! "
“응?”
“저만을 쳐다보고 가만히 계셔 봐요. 시선을 딴 데로 돌리지 마세요."
갑작스런 아들의 이러한 이야기에 처음 어머니는 이상한 낯빛을 지었으나 아들의 맑게 개인 얼굴빛이 예전보다 훨씬 부드러워 보여서 그대로 아들만을 쳐다보았다. 중섭은 자기를 쳐다보고 계시는 어머님 얼굴을 한동안 조용히 지켜보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어머니, 인젠 어머니도 퍽 늙으셨군요. 그처럼 맑게 윤이 흐르던 살결이 다 빛을 잃어버리시구…… 결국 우리가 그만큼 성장했다는 뜻이군요. "
중섭은 이렇게 말하면서 조용히 입가에 웃음을 지어 보였다. 입가를 스치고 지나가는 아들의 웃음을 받으면서 어머니도 곧 입가에 웃음을 지었다. 아들의 의도가 어디 있는지는 모르는 어머니였지만 이처럼 조용히 자기 얼굴을 지키면서 이러한 이야기를 해 주는 아들의 마음이 비로소 가슴속 깊이 따스한 입김처럼 배어오기 때문이었다, 어제까지만 하여도 창백한 얼굴로 어머니의 시선을 피하곤 하던 아들이었다. 어머니도 또한 될 수 있는 한 아들의 시선을 피했었다. 그것은 서로가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상대방에 주는 괴로움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 어머니는 아들로부터 조금도 시선을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또 웃었다. 그처럼 어머니가 늙었다는 것을 보고서 그 반면에 자기가 그만큼 성장하였다는 것을 알게 된 아들의 마음이 어머니로서는 더없이 반가왔을 것이다.
어머니는 과실을 가지러 밖으로 나왔다. 사과를 바구니에 담으면서 어머님은 숨 죽여 울었다. 그러나 곧 눈물을 걷고 방으로 돌아왔다.
어머니가 방에서 나가신 다음 중섭도 터져 나오는 울음을 간신히 억제하며 속으로 울었다.
“딴 것 사오랴?"
"아뇨."
중섭은 붉게 젖은 어머니의 눈언저리를 놓치지는 않았다. 중섭은 어머니가 깎아 주는 사과를 받아 놓고 그것을 반으로 쪼갰다
“너나 어서 먹으렴."
그는 쪼갠 반쪽을 어머니에게 드렸다.
“어머님도 드셔요. "
중섭은 맛있어 보이게 사과를 먹었다. 어머니도 먹었다. 그러나 시늉에 불과하였다. 이발 끝으로 한 입 가장자리만을 베어 물곤 할 뿐이었다. 어머니는 맛있게 사과를 먹는 아들의 모습을 지키고 있었다. 다시금 미더워 만져 보였다.
“어머니 ! "
“응 ?"
“왜 어머니는 제 얼굴만 그렇게 쳐다보고 계셔요?"
어머니는 웃었다. 그러나 그 눈웃음이 가는 눈 기슭에는 어딘지 눈물기가 감돌고 있었다. 어머니는 그러한 기색을 안 보이려는 듯이 눈을 깜짝거리며 그때서야 사과를 한입 크게 베어 물고 또 웃었다.
중섭은 터져 나오는 울음을 꾹 씹어 삼키면서 같이 따라 웃었다.
여기까치 생각이 미쳤을 때 중섭은 갑자기 눈시을 위로 내려 덮이는 피로를 느꼈다. 약 기운이 전신으로 퍼져 들어간 모양이었다. 그는 눈을 떠보았다. 달빛은 영롱히 바람결에 하늘거리는 나뭇잎 사이로 부서지면서 창문 틈으로 새어들고 다름없이 그의 베갯머리를 싸늘히 적시고 있었다. 바람이 건듯 불어들자 감미로운 라일락 향기가 코에 스몄다. 그는 그 향기를 마음껏 한번 들이마시고 싶었으나 그렇게 하지를 못했다. 팔도 중노동에 지쳐 버린 후처럼 노근히 나가떨어진 채 꿈지럭거려지지 않았다. 그는 뽀얗게 눈 위로 내려 덮이는 어둠을 조용히 지키고 있다가 자기도 모르게 눈을 감아버리었다. 그러나 그는 애써 또 생각을 더듬어 갔다.
저녁때 아버지는 중섭 어깨머위에 손을 얹으면서 빙긋이 웃었다.
“나는 네가 부러워졌다. 너는 나보다도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셈이다. 나는 네 할아버지
가 노쇠하였을 때 인제 돌아가실 때가 되셨구나 하는 생각뿐이었지 그 외 것을 몰랐었다."
아버지는 이렇게 말하면서 중섭 어깨머리를 다시금 가벼이 두드리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그러한 남편과 아들을 마주 보면서 만족스러운 듯이 웃고 있었다. 중섭은 다시 눈을 떠보려 하였으나 몽롱히 뒤덮여 오는 어둠 속에 그대로 빠져 들어갔다. 어머님과 아버지 모습이 어렴풋이 눈앞에서 떠돌고 있는 것 같았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어디선가 지금 자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음성이 들려 오는 것도 같았다. 그리고 그것은 꿈결처럼 자주 흐려지곤 마였다. 이윽고 뽀얗게 흩어지는 의식의 그늘이 어두운 물결을 타고 한없이 넓은 공간으로 흘러 들어가기 시작하였다. 뒤밀려오던 어둠이 사라지자 하얀 공백이 그 속에 정지되어 있었다.
얼마나 그러한 하얀 정지된 공백이 지속되었는지 중섭은 알 수가 없었다. 정지된 공백 속에 어두운 물결이 밀려들기 시작하고 있었다. 잠시 후 그는 충만되었던 그 무엇이 밀폐된 육체의 일부를 찢고 외부로 터져 나가는 것만 같았다. 동시에 그를 뒤덮고 있던 어둠이 확 정지된 의식의 피막을 찢고 바 져 나가는 것 같았다. 그는 전신의 근육이 한곳으로 수축되어 들어가고 어떠한 부분들이 내부에서부터 찢어져 나가는 것같이 느꼈다. 간단을 두고 이러한 순간이 지속되었다. 무엇이 다자꾸 못 견디게 자기를 뒤흔들고 있는 것 같기도 하였다. 울음소리 같은 것도 들리는 것 같았다. 수없이 주위에 흩어지는 발자국 소리 같은 것도 들렸다. 자주 얼굴 가까이에 가쁜 숨결 소리 같은 것도 들었다. 무엇이 근육을 쿡쿡 찌르는 것도 같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어둠이 콱 못 박히듯이 정지되고 머리카락 한 오리도 움직이지 않는 것 같기도 하였다. 왜 그래야 하는 것인지 그는 알 수가 없었다. 금속이 서로 부딪치는 것 같은 소리도 들리는 것 같았다. 그는 몹시 괴로왔다. 인제는 자꾸 자기 자신이 못 견디게 움직이고 싶었다. 괴로움에 그는 몸을 뼈가 으스러지도록 뒤틀고도 싶었다. 가슴이 몹시 무거웠다. 그는 니코틴을 먹은 뱀처럼 창자들이 뱃속에서 못 견디게 꾸불떡거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이처럼 지속되던 고통의 순간이 지났다. 그는 의식을 잃고 다시 깊은 잠에 떨어졌다. 의식이 어렴풋이 돌아왔을 때 그는 눈을 떠 보았다. 자기를 내려다보는 뭇 시선에 마주치자 그는 곧 눈을 감았다. 흐느끼는 울음 소리가 곁에서 들려 왔다. 가느다란 손이 자기 손을 꼭 붙들고 있었다.
“중섭아!"
그는 조용히 눈을 떠 보았다. 아버지였다. 긴장이 쭈욱 깔린 얼굴이었다. 아버지 눈에서는 연방 눈물이 소리 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예전 중섭이가 일선에서 부상을 당하고 육군 병원에 입원하였을 때 아버지는 아들 앞에서 결코 눈물을 보이지 않았었다. 그러나 지금 아버지는 아들을 바라보며 흘러 내리는 눈물을 닦으려고도 하지 않고 있었다. 어머니는 터져 나오는 울음을 참지 못하고 그냥 흐느끼고 있었다.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의 이마에는 구슬 같은 땀이 쪽 솟고 귀밑 사이로 땀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간호부의 이마에도 땀이 물방울처럼 돋고 있었다.
6
중서는 다음날 아침 계집의 입술 냄새와 술 냄새를 훅훅 입가에 풍기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는 누구도 없었다. 그는 방으로 들어가 등의자에 털썩 쓰러진 채 그대로 잠에 떨어졌다. 근육의 구석구석까지 지쳐 버린 육체는 휴식 이외의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있었다.
정오가 가까와서 아버지가 돌아왔다. 아버지는 축 늘어져 잠에 떨어진 작은 아들을 발견하는 순간 어지러운 마음의 동요를 억제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중심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등의자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이마에 손을 얹고 긴 한숨을 한없이 속으로 죽이고 있었다.
잠시 후 중서는 멋적게 기지개를 하며 하품을 크게 내쉬었다. 눈을 끔벅거리고 고개를 치키는 순간 중서는 마주 앉아 있는 아버지를 발견하고 바로 일어나 앉았다. 아버지는 손을 이마에 괴어 짚은 채 그의 얼굴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 눈 가장자리에는 어두운 그늘이 걷힐 길 없이 무겁게 떠돌고 있었다. 중서는 그냥 싱거운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몹시 허기가 졌다. 중서는 아버지 얼굴 표정을 한번 힐끗 살피고 나서 무뚝뚝하게 입을 열었다.
“어머니 어디 가셨어요?"
그 순간 아버지 눈 기슭에 험악한 물결이 스치고 지나갔다. 중서는 곧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아버지 기분이 몹시 상해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중서는 그러한 것에 세심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는 배가 고프다는 생각뿐이었다. 중서는 푸시시 일어나서 의자 등에 벗어 던졌던 웃저고리를 걷어 쥐었다. 걸음을 옮기려다 그는 다시 머물러 섰다. 아버지의 어두운 시선이 그를 지키고 있었다. 그는 아버지의 뜻을 알 수 있었다. 거머쥐었던 웃저고리를 다시 의자 등에 내던지고 중서는 앉았다. 새삼스러이 무슨 훈계를 또 시작하려는 것일까 하고 그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중서는 아버지를 힐끔 노려보았다.
아버지는 이마에 손을 괸 채 눈을 감아 버렸다. 침묵이 잠시 두 사이를 이어 갔다. 아버지의 얼굴 위에는 수없이 어두운 그늘이 물결쳐 지나가고 있었다. 중서는 견딜 수 없이 지리였다. 그는 곁에 내어던진 웃저고리를 여러 번 거머쥐었다 놓았다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는 웃저고리 어깨 밑에 묻은 붉은 루즈의 흔적을 발견하고 아버지를 힐끔 엿보면서 옷자락을 뒤집어 놓았다. 망할 년, 되게 까불더라니…… 그는 어젯밤 자기를 놓치지 않으려고 아양을 떨던 계집의 빨간 입술을 생각하며 이렇게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한줌에 잡힐 듯이 조그마하던 계집의 몸뚱어리를 눈앞에 그려보고 있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아버지의 고민에 싸여 있는 어두운 표정과 부딪치자 그는 아버지 앞에서 그러한 추잡한 생각을 하고 있는 자신에 대하여 일종의 죄의식을 느꼈다. 그러면서도 한편 결코 그러한 것을 아버지는 꿈에도 모르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떠올라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아버지가 도리어 가엾어져서 그는 속으로 혼자 웃음을 죽였다. 하지만 어쩌면 자기가 추잡한 짓을 하고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이미 눈치채었으리라는 생각도 없지는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별러 오다가 마침 어제 집에 들어오지 않은 나를 발견하자 지금 꾸지람을 하려고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그는 곧 생각하였다.
중서는 아버지의 꾸지람을 기다렸다. 그는 아버지가 이야기를 시작하면 연속적으로 이렇게 대답하려 했다. 예! 얼마든지 꾸짖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탓은 아닙니다. 저는 다만 전장에 갔다 왔을 뿐입니다. 마음대로 꾸짖어 주십시오. 전장에 갔다 왔다는 것 그것뿐입니다. 그는 이렇게 마음속으로 되풀이하면서 빨리 아버지가 말문을 열고 자기를 꾸짖어 주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아버지는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중서는 그럴수록 더욱 마음이 조급해 오는 것이었다. 일 분 이 분 삼 분 그는 못 견디게 아버지를 노려보면서 기다려야 했다. 그럴수록 아버지는 더우기 입을 열 기색조차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중서는 참다 못해 생각했다. 흐흥 ! 침묵을 지킨다는 것, 즉 나를 쏙 자기 앞에 붙잡아 놓고 침묵만을 지키는 것으로써 나를 힐책하려는 것이로군. 과연 아버지다운 고답적인 수단이야. 그렇게 함으로써 나를 지리하고 못 견디게 하여 스스로 반성시키자는 툰가. 제기랄 ! 그는 아버지에 대한 견딜 수 없는 반발을 느꼈다. 좋은 대로 해 보라지, 마음대로 해 보시죠, 마음대로……그는 아버지를 향하여 마음속으로 이렇게 부르짖고 있었다. 그는 웃저고리를 그대로 거머쥐고 후닥닥 뛰어나가 버릴까도 생각했다. 그의 반발심은 더욱 세차게 터져 나오고 있었다. 아버지에 대해서만이 아니었다. 그는 사회 전반에 대하여 막 자기의 모진 감정을 터쳐 놓고 싶었다. 너희는 우리에게 전장에 가야 한다고 했다. 우리는 가야 했기 때문에 갔다. 격렬한 전투가 한 고비를 넘고 싸움과 죽음에 지쳐서 돌아을 때마다 술과 계집을 너희들은 우리에게 묵인했다. 우리는 저마다 전장에서 한 가지씩의 기능을 상실하고 또는 지쳐서 돌아왔다. 그때부터 너희들은 너희 스스로 우리에게 묵인했던 그것들을 모두 안 된다고 부인했다. 그리고 수많은 책임만을 우리에게 강요했던 탓이다. 좀더 순진해지라! 정신이 썩었다. 노력이 부족하다. 너희들 같은 자식들 때문에 사회는 더 부패되어 가고만 있다. 너희들은 사회를 좀먹는 악의 무리들이다 하고 너희들은 마구 지껄여댔다. 그리고 나서 너희들만이 정당한 것처럼 행세하였다. 중서는 몹시 흥분하고 있었다. 그는 저주에 가득 찬 시선으로 아버지를 노렸다.
아버지는 무거이 이마를 괴어 짚고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어두운 그늘에 뒤덮인 아버지의 얼굴…… 꾹 지려 감은 눈 기슭에는 자주 동요가 가볍게 물결치고 있었다. 오뇌에 사로잡힌 아버지의 이러한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중서는 지금껏 터져 나오던 반감이 어느 정도 스러지는 것 같았다. 한 점을 치는 괘종 소리가 안방에서부터 울려 왔다. 그때서야 아버지는 고개를 들었다. 아들을 묵묵히 쳐다보는 아버지의 눈언저리에 또다시 어두운 그늘이 한 줄기 스쳐갔다.
“중서야……"
조용히 속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음성이었다. 중서는 아버지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잠시 또 침묵이 흘렀다.
“중서야……"
아버지는 다시 불렀다.
“네?”
“나는 너를 결코 탓하려 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꼭 네게 한 가지 말해 두어야 할 것이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곧 말을 잇지 않고 잠시 자기의 마음을 다짐하듯이 시선을 떨구고 있었다. 중서는 약간 마음의 동요를 느끼면서 아버지의 다음 이야기를 기다렸다.
“내가 하고자 한 말은 결코 너만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니다. 중서야, 너는 전장에 갔다 왔 다. 너는 전쟁으로 인하여 커다란 상처를 입었다. 정신적인 상처이건 육체적인 상처이건 그 것은 마찬가지다. 그러나 전장에 갔다 온 너희들만이 상처를 입은 것은 아니다. 너희 어머 니를 보렴. 너의 어머니는 직접적으로는 아니지만 간접적으르 너희들을 통하여 너희들보다 도 더 큰 전쟁으로 인한 상처를 입고 있는 거다. 알겠니……? 내 말이 무엇을 뜻하려는 것 인지를…… 내가 말하려던 것은 그것뿐이다."
말을 끝낸 아버지의 눈썹 기슭에는 눈물기가 점점 배어 가고 있었다. 중서는 시선을 떨구었다. 중서는 고개를 들고 아버지를 쳐다볼 수가 없었다. 자기는 너무도 아버지와 어머니를 생각지 않고 자기만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그리고 어머니는…… 형님의 자살 기도(企圖) 이야기를 들었을 때 중서는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아버지의 두 눈에서는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리고 있었다. 중서로서 아버지의 눈물을 보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중서는 다시 고개를 떨구었다.
병원으로 달려가서 병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형님과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중서는 형님의 이지러진 얼굴 속에서 마치 부스러져 나간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것 같은 고통을 받았다. 창백한 얼굴은 죽은 사람의 얼굴이나 다름이 없었다. 어머니는 중서를 보자 또 흐느꼈다. 소리를 내지 않으려 입술을 꾹 깨물고 울음을 씹어 삼키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은 더욱 볼 수 없이 괴로왔다.
일 주일 후 형님은 퇴원하여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형님의 정신 상태에는 이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중서의 마음속에도 어두운 그늘이 점점 짙어 가고 있었다. 중섭의 정신 상태에는 늘 혼돈이 지속되고 있었다. 맑은 정신 상태는 어떠한 무엇에 자꾸 흐려 버리곤 하는 것이었다. 주기적으로 발작의 순간이 연속되었다. 어머니와 중서는 교대로 꼭 옆에 붙어 있어야만 하였다. 아버지는 곧 정신 병원에 가서 진단해 보는 것이 좋다고 하였으나 어머니는 아들을 정신 병원에까지 보내야 한다고 생각하기에는 너무도 가슴이 아팠다.
6
자살을 기도하였다가 실패한 후부터 중섭은 모든 의욕을 잃어버리고 있었다. 살고 싶은 의욕도 아무 것도 없었다. 다만 있다는 그것뿐이었다. 그로서는 있다는 그것마저도 부인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부인할 수 없는 것이었다. 있으면서도 없으나 마찬가지의 존재가 되어 버리고 만 것이었다.
어느 날 저녁이었다. 중섭은 어머니와 같이 앉아 있었다. 중섭의 머릿속에는 가시지 않는 어두운 뭉텅이가 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몹시 머리가 무거웠다. 그는 과실 껍질을 벗기고 있는 어머니 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살살 벗겨져 내려가는 과실 껍질은 밑으로 감기면서 어머니 손이 움직일 때마다 빙글빙글 나선을 긋고 있었다. 중섭은 머릿속이 어두운 그림자로 확 차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중섭은 눈을 떴다.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사과를 깎던 어머니의 손은 가만히 정지되어 있었다. 그는 잠시 동안 어머니를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마찬가지였다. 과실 깎는 손을 내려다보고 있는 어머니의 그 시선도 과실을 벗기던 그 손도 그대로 정지되어 있었다. 그는 자기 몸을 움직여 보았다. 손가락을 오므렸다 펴도 보았다. 확실히 그것들은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어머니를 다시 쳐다보았다. 그러나 어머니의 손은 그대로 정지되어 있었다. 그는 발작적으로 무엇에 뒤쫓기듯이 벌떡 일어났다. 어둠이 머릿속에서 빙그르르 맴도는 것 같았다. 다음 순간 그는 다시 깜짝 놀랐다. 그는 일어선 것도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는 제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그리고 어머니의 손도 그대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었다. 더욱 놀란 것은 조금 전 어머니의 손이 정지되었다고 생각했을 때, 반 정도 과실 껍질이 깎여져 가고 있었는데 지금 어머니는 마지막 남은 껍질을 벗기고 나서 꼭지 쪽을 도려내려고 하고 있었다. 도대체 어찌 된 영문인지 그는 생각을 돌이켜 보려 하였으나 머리가 무거워 그대로 그만두었다.
이러한 증세는 날이 갈수록 더욱 빈발했다. 그리고 정지된 시간이 점점 연장되어 가고 있었다. 드디어 증세는 발작적으로 옮겨져 가고 있었다. 머리가 무거웠다. 그러고 나면 두통이 왔다. 어두운 뭉텅이가 머릿속에서 움직이기 시작하고 그것이 의식을 완전히 덮어버리는 순간 모든 것은 정지해 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자기에게 이야기하고 있던 어머니도 말을 하던 중간에서 정지해 버리고 자기를 쳐다보고 있던 동생도 그대로 자기를 쳐다본 채 정지해 버리고 마는 것이다. 지금껏 움직이고 있던 모든 것은 정지해 버리고 자기만이 상대 없이 움직이고 있어야 하는 것이었다. 입을 딱 벌리고 정지해 버린 어머니의 얼굴, 자기를 물끄러미 쳐다본 채 정지해 버린 동생의 시선, 모든 벗이 숨을 끊고 정지해 버린 공간 속에서 자기만이 움직여야 한 다는 건 너무도 무서운 사실이었다. 그는 어머니에게 말을 계속해 달라고 애원했다. 동생더러 시선을 움직여 달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런 반응도 없이 그대로 정지한 채 자기를 딱 지키고 있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흘러나오던 라디오의 음악도 정지해 버리고 노란 불빛만이 켜져 있는 것이었다. 그는 발광을 할 지경이었다. 그는 모든 것이 정지해 버린 것처럼 자기도 숨을 멈추고 그들과 함께 정지해 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의 의식을 덮고 있던 어두운 그늘이 물결처럼 한쪽으로 걷혀 가고 희뿌연 공간만 이 점점 스며들자, 모든 것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어머니의 입술이 움직이고 라디오의 음악이 조용히 계속되는 것이었다. 그때서야 그는 무겁게 숨을 돌리곤 하였다.
그리고 어머니의 이야기가 많이 진행된 것도 알았다. 모든 것이 정지되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자기만이 정지되어 있었던 것이다. 모든 것이 다름없이 그대로 움직이고 있는 속에서 자기만이 정지되어 있어야 했던 것이었다. 그때마다 그는 함부로 무엇에나 머리를 내리치곤 하였다. 어머니와 동생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머리가 부서져라 하고 그는 소리를 지르면서 마구 머리를 무엇에나 짓찧었다.
밤늦도록 아버지와 어머니는 마주 앉아 있었다. 어머니의 두 뺨에는 눈물이 얼룩져 있었다.
“그 애가 백분의 일만큼이라도 이 어미의 마음을 알아주기만 한다면......"
어머니는 말끝을 흐렸다. 잠시 또 침묵이 이어 갔다. 다시금 눈물에 젖어 가는 아내를 쓸쓸히 눈주고 있던 남편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차라리 모르는 편이 나은 거요. 그 애가 너무도 그러한 것에 세심하기 때문에 나는 도리
어 두려워하고 있소. 하여튼 내일 정신 병원으로 데리고 갑시다. "
“온전한 상태로 돌아오면 뭐하겠어요. 이미 희망을 잃었는데……”
아내는 맥없이 긴 한숨을 죽였다.
“희망이란 없으면 없는 대로 또 살게 마련이오."
남편은 될 수 있는 한 아내를 위로하려 하였으나 아내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희망까지는 바라지도 않아요. 다만 보통 상태로 있어만 주어도 좋겠어요. 나는 그 이상도 바라지 않아요."
이렇게 말하는 아내의 눈에서는 또다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리고 있었다. 남편도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듯 눈을 내리 감고 있었다.
양쪽에서 아들을 부축하고 정신 병원 문을 들어서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마음은 찢어지는 것만 같이 쓰라렸다.
대기실에 기다리게 한 다음 아버지는 진찰실로 들어가 원장을 찾았다. 지금 막 급한 일로 외출중이라는 것이었다. 사유를 이야기하자 간호부는 잠깐 기다리라 하고 조수실로 들어갔다. 얼마 후 조수실 문이 열리고 간호부에 뒤따라 하얀 가운을 단정하게 입은 젊은 청년이 나왔다. 청년은 중섭 아버지에게 공손히 인사를 하였다.
“김 중섭씨 부친이시죠?"
“네”
“원장님으로부터 사전 연락을 받았습니다”
중섭 아버지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청년의 얼굴을 유심히 지켰다. 눈알 하나가 기형적으로 번득이고 있었다. 한쪽 콧구멍이 짜부라져서 커다란 흉터를 남기면서 입귀 쪽으로 푹 파여져 있었다.
“같이 오셨습니까? "
“녜.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청년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이번에는 중섭 아버지를 제 편에서 유심히 들여다보는 것이었다.
“저, 실례시지만 자제분께서 ×중학을 나오고 사변 전에 ×의대에 다니시지 않았습니까?"
“네, 바로……”
중섭 아버지로서는 뜻밖의 일이라 청년의 얼굴을 다시 쳐다보았다.
“중섭 부친께서는 저를 기억하지 못하실 것입니다. 용모도 이렇게 험상궂게 변해 버려 서...... 중섭이와는 중학 동창입니다. 몇 번 집에 놀러도 갔었습니다. 대학은 서로 같은 계통이면서 갈라졌지만……아마 처음 뵈었을 때 중섭 아버님이 아니신가 하고 낯익은 인상을 받았습니다만 혹시 실수나 하지 않을까 해서 대뜸 말을 못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이 청년은 그 이지러진 용모와는 달리 퍽 명랑하고 침착해 보였다.
“그럼 같이 가시죠."
그들은 복도로 나왔다. 대기실로 가는 길에서 중섭 아버지는 청년에게 물었다.
“여기에 근무하고 계시오?"
“녜. 원장님 조수로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미숙해서 더 연구를 계속해얄 텐데 마음대로
되지를 않습니다."
이렇게 말하면서도 청년은 퍽 자신 있는 웃음을 웃어 보였다. 그것을 보는 순간 중섭 아버지는 가슴이 뭉클 뜨거운 물결 속에 젖어 들어가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이 청년을 통하여 중섭에 대한 어떠한 자신이 용솟음쳐 솟아오르기 때문이었다. 중섭 아버지는 약간 주저하는 듯하면서 물었다.
“전쟁에 갔었소?"
"녜."
그 음성은 한 점의 어두움도 찾아볼 수 없을이만큼 분명하게 울려 나오고 있었다. 어디까지나 건강스러웠다.
긴 복도를 빠져 나와 그들은 대기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청년은 중섭을 보자 몹시 반가운 듯이 웃었다. 중섭은 그대로 멍하니 이 젊은 친구의 얼굴만 지키고 있었다.
“내 얼굴이 너무 심한 흉터 때문에 잘 알아볼 수 없는 모양이군, 응? 나 ‘준'이야, ‘준’ 너도 몹시 변했다만 나 같진 않아."
이렇게 말하고 나서 청년은 또 웃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들과 친구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꼭 같이 허물어져 버린 얼굴들이 그 대조는 너무도 원격한 간격을 두고 있었다. 준은 중섭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 순간 어머니 얼굴 위에 한줄기 어둠이 스치고 지나갔다. 불안한 표정이 아버지 얼굴에도 곧 번지어 갔다. 중섭의 입술이 경련적으로 약간 꿈틀거렸다. 그러나 준은 태연스럽게 웃고 있었다.
“중섭이, 나는 네 오른손을 못 본 게 아니야. 나도 너한테 왼쪽 손을 내 밀고 있는 거야."
그리고 나서 준은 오른손을 들어 보였다. 그 손에는 하얀 장갑이 끼여 있었다. 청년은 또 웃으면서 중섭의 왼손을 꾹 움켜쥐고 잠시 흔들고 있었다.
약 보름이 지났다. 중섭의 정신 상태는 거의 정상적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지속되던 고민과 번민이 강한 충격으로 인하여 의식의 착란을 가져왔던 것이었다.
원장과 준은 늘 그에게 친절하였다. 무겁던 머리와 두통이 어디론지 사라져 버리고 굴레에서 벗어난 것처럼 정신이 홀가분해지기는 하였지만 그의 마음을 덮고 있는 어두운 그늘은 좀처럼 펴지지 않았다. 이미 구겨져 버린 자기란 인간, 원래의 형태로 아무리 펴 보아도 돌아갈 수는 없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생각에 잠긴 채 창가에 앉아서 우두커니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싱싱히 우거진 나뭇잎들, 돌 자갈로 아담하게 주위로 둘러친 화원 안에는 아름답게 핀 꽃들이 정성껏 가꾸어져 있었다. 햇볕을 가득 머리에 이고 따사로이 나부끼는 꽃잎들, 그것들은 생명력에 충일한 자기들의 모습을 하늘을 향하여 그대로 내어 솟고 있었다. 불과 한줌밖에 안 되는 땅 속에 뿌리를 박고 일어선 자기의 발랄한 생명력을 일 분의 양보도 없이 그들은 태양 앞에 드러내 놓고 있었다.
중섭은 곧 시선을 떨구었다. 그는 도리어 죽지 못한 자기가 괴로왔다.
준이 들어왔다.
“뭐 또 생각하고 있어? 아버지한테서 전화가 왔더군. 그래 인젠 퇴원해도 괜찮다고 했더니 몹시 기뻐하시던데. "
중섭은 대답 없이 준을 똑바로 지켰다. 한쪽 눈이 더욱 기형적으로 번뜩거리는 것 같았다.
“왜 ?"
다시 되묻는 질문에 중섭은 시선을 피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중섭은 정원에 핀 꽃들을 또 내다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어둡게 흐려 있었다.
저녁때 중섭은 준과 함께 후원으로 나와 풀잎들을 밟으면서 숲 사이를 거닐고 있었다. 중섭은 돌 자갈들 사이에서 번쩍이는 조그만 물체를 발견하고 그것을 주워 들고 손끝으로 매만졌다. 그는 손바닥에 그것을 들고 어루만지면서 구슬을 가지고 하듯이 공중으로 던졌다가는 채어잡곤 하였다. 그들 사이에는 거의 말이 없었다. 약 한 시간 가량이나 숲 속을 거닐다가 그들은 중섭의 병실로 다시 돌아왔다. 준은 시계를 보았다.
“가겠어 ? "
“응, 인제부터 또 좀 일이 있어."
준은 이렇게 말하고 중섭 얼굴을 훔치듯이 힐끗 노려보았다. 그는 중섭 가까이로 다가왔다. 그리고 어깨 위에 가벼이 손을 얹으면서 중섭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중섭은 시선을 들고 준을 쳐다보았다. 한쪽 눈알이 번득거리면서 준은 가벼이 웃고 있었다. 중섭은 자기 손을 꾹 움켜쥐었다. 손바닥에는 딱딱한 물체가 꼭 쥐어져 있었다.
“딴 생각은 아예 하지도 말어."
중섭은 손에 쥐었던 걸 슬그머니 떨어뜨렸다. 준은 그의 어깨를 가볍게 다시 한번 치고 나서 허리를 구부리고 떨어진 물체를 주웠다. 조그만 유리 조각이었다. 준은 아무런 일도 아닌 듯이 그것을 포킷에 집어넣었다. 중섭의 얼굴에는 심한 물결이 끼얹히듯 쪽 흘러가고 있었다. 그 시선 속에는 분노의 빛이 짙게 떠돌고 있었다. 그는 나무침대 위에 털썩 쓰러져 누웠다. 그리고 벽을 향하여 몸을 돌렸다. 준은 침대 기슭으로 가서 앉았다.
“아무 생각도 말고 집으로 돌아갈 생각만 해요. "
중섭은 고개를 흔들었다. 준은 가만히 그의 돌아누운 목덜미를 지키고 있었다.
“왜 집에 돌아가길 싫어해?"
“얘기했댔자 소용도 없어. 넌 알 수도 없는 일이야."
“말해 봐. 다 이해될 수 있는 거야. 사람이란 서로 이해하는 데서 살아가고 있는 건데 뭐그래."
그 순간 중섭은 고개를 돌렸다.
“이해? 그렇기 때문에 나는 더 괴로워. 나를 왜 죽게 놔두지 않나 말이야!"
준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나 좋아. 왜 네가 죽어야 하는지를 이야기해 봐. 만일 네 이야기가 정당만 하다면 나
는 방해하지 않겠어."
중섭의 어두운 시선이 잠시 준을 지켰다.
“나는 이상 더 어머니와 아버지에께 괴로움을 주고 싶지 않단 말이다. 나 또한 이렇게 된
나를 애써 살고 싶지도 않아."
준은 묵묵히 그의 이야기를 듣다가 입을 열었다.
“알겠어. 그러나 너는 아직 너를 완전히 모르고 있어. 너는 지금 너를 포기할 생각만에 못
하고 있는 거야. 왜 자기를 버리려고 해. 자기가 자기를 포기해 버리는 것처럼 비굴한 짓은 없어."
준은 잠시 말을 끊고 무엇을 생각하는 듯이 창밖을 내다보고 있다가 말을 이었다.
“너는 아직 충분히 아버지와 어머니를 만족하게 할 수 있고 네 자신을 만족하게 할 수 있
있는 힘이 남아 있다고 나는 생각해. 중섭이!"
그는 중섭의 이름을 부르고 나서 잠시 그의 얼굴을 정면으로 지켰다.
“내 얼굴을 똑똑히 봐……”
그는 말을 끊고 잠시 침묵을 지켰다. 중섭은 그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번득거리는 한쪽 눈알, 콧구멍이 하나 짜부라지고 움푹 파인 흉터가 징그럽게 떠올랐다. 준은 그의 오른손에 끼었던 횐 장갑을 풀었다. 손목에 끼었던 고무줄을 빼자 손가락 세 개가 달룽 떨어졌다. 고무손가락이었다.
“처음 나도 몇 번이나 자살을 하려 했었다. 내가 이 꼴이 되어 육군 병원에 들어왔을 때 나를 찾아 주는 사람이란 하나도 없었다. 나는 죽으려 하였으나 못 죽었다. 다음 두 번째도 죽으려 하였으나 또 못 죽었다. 못 죽은 게 아니라 미수를 한 거다."
그는 이때 옷깃을 헤치면서 목덜미를 내놓았다. 그 목덜미에는 깊은 상처가 낭자하게 흩어져 있었다. 그는 다시 옷깃을 바로잡고 가볍게 웃었다.
“내 네게 꼭 보여 줄 곳이 한 곳 있어. 오늘은 늦었으니 내일로 하지. 내가 받았던 충고를인제 내가 네게 할 차례가 된 모양이군. ‘당신은 왼손이 있지 않소. 그리고 정상적인 머리를 가지고 당신이 전공하려던 내과는 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정신병학 같은 것 그런 것은 할 수 있을 게 아니오? 사람이란 아무리 불행해져도 불행한 대로 남아 있는 능력이 있소. 그 능력을 살리면 되는 거요. 그 능력으로만도 죽을 때까지 다 발휘하고 죽을 수 있다면 그 사람으로선 더 없는 행복일 거요. 완전한 몸을 가지고 그 능력을 만분의 일도 발휘치 못하고 죽은 사람들보다는……' 나는 그때부터 나에 대한 자신을 가졌다. 그러니 다른 생각일랑 아예 집어쳐요. 내 내일 꼭 뵈어 줄 곳이 한 곳 있어."
여러 가지 위로를 주고 준이 나간 다음 중섭은 자리에 그냥 쓰러져 누웠다. 그는 눈을 꾹 지려감고 동요되는 마음의 격동을 잠시 이겨 가고 있었다. 준의 말은 참으로 강한 충격을 그의 마음에 남겼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 말을 그대로 받아들일 기력을 그는 이미 잃어버리고 있었다. 그날 밤 중섭은 이리저리 흩어지는 생각에 마음을 달래면서 꼬빡 밤을 새웠다.
다음날 오후 그는 준을 따라서 병실을 나왔다. 준은 긴 복도를 지나 그를 이층으로 데리고 올라갔다. 중섭은 지금껏 특수 대우를 받고 준이 숙식하는 방 가까이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었다.
이층은 본격적인 입원실이었다. 창문마다 감방처럼 철창문이 달리고 자물쇠가 잠겨져 있었다. 첫번 병실 앞에서 준은 걸음을 멈추었다. 중섭도 같이 걸음을 멈추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길게 자란 머리카락이 마구 헝클어지고 수염이 시커먼 청년이 픽 돌아서며 그들을 노리고 있었다. 그 청년은 눈을 크게 부릅뜨고 침을 튕기면서 갑자기 중얼거렸다.
“나는 죽고 싶지 않다 ! 나를 죽이기 전에 문명을 말살하라 ! "
그 청년은 이렇게 여러 번 되풀이하고 입에 거품을 한입 물었다. 그리고 그 침 거품을 그들의 서 있는 문 쪽으로 뱉았다. 그러나 준은 그 청년에게 다정하게 웃었다. 그러자 청년 얼굴 위에 짙게 물들어 가던 살벌한 감정이 점점 스러졌다. 준이 다시 정답게 웃어 보이자 잠시 청년은 눈을 끔벅끔벅 하며 머뭇거리다가 씩 웃었다.
“선생님 ! "
청년은 또 한번 씩 웃고 철창문 쪽으로 다가왔다.
“선생님 실은 저 자가 미워서 그랬습니다."
하고 중섭을 가리켰다.
“이 사람? 이 사람도 네 친군데 뭐 그래. 공연히 그렇게 함부로 사람을 나쁘게 보면 안돼."
준은 부드럽게 타일렀다. 청년은 얼치처럼 고개를 꾸벅하였다.
중섭은 준을 따라 또 다음 병실 철창 앞으로 갔다. 창백한 핼쑥 여윈 청년이 그들을 보자마자 파랗게 얼굴이 질려서 도망가듯 구석지로 쫓겨가서 벽에 등을 대고 착 달라붙어 서는 것이었다. 그리고 힐끔힐끔 이쪽을 토끼 눈처럼 노려보는 것이었다. 준은 아까와 마찬가지로 친절하게 말을 걸었다. 그러나 청년은 좀체로 벽에 착 달라붙어서 몸을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또 걸음을 옮겼다. 준은 걸음을 옮기면서 철창 속에 갇혀 있는 그들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모두가 우리와 동세대의 청년들이야. 그들은 우리와 같은 길을 걸었고 우리와 같이 고민하다가 자기를 잃어버린 사람들이거든. 나는 내게 허용된 범위내의 능력을 가지고 그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어. 이미 완쾌되어 나간 사람들도 많아. 이따금 나 있는 데 찾아와서 얘기도 하다 가곤 하지"
그는 만족스러운 듯이 웃고 있었다.
복도 끝에 이르렀을 때 그들은 또 걸음을 멈추었다. 한 청년이 벽에 대고 뭐라고 자꾸 중얼거리고 있었다. 중섭은 잠시 후에야 그가 중얼거리고 있는 말이 무엇인가를 알았다.
‘전쟁과 평화, 전쟁과 평화' 하고 그는 벽에 대고 연속적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준은 그에게 말을 걸었다.
“전쟁과 평화가 그래 어떻게 됐어?"
청년은 고개를 힐끗 돌리고 자기를 부른 것이 준이라는 것을 알자 고개를 끄덕하고 푸시시 웃었다.
“아직 계속되고 있어, "
“무엇이 계속되고 있어 ?"
“무엇이 계속되고 있는지 모르겠어. "
청년은 자기도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아무 것도 아니야. "
“아무 것도 아닌데 벽에 대고 왜 그렇게 중얼거려 ?"
“그 돼먹지 않은 썩어 바진 사람 자식들하고 이야길 하는 것보다는 아예 아무 것도 모르는 벽하고 이야기하는 게 나아서 그래. 아니 선생님하고 나하고만은 빼놓고……"
청년은 빙그레 웃었다.
계단을 내려오면서 준은 중섭을 돌아보았다.
“친절한 눈짓 하나 내가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것뿐이었는데 그처럼 괴팍스럽게 침울하던 그들 얼굴에 곧 웃음이 떠오른단 말이다. 사회란 것도 마찬가지야. 부드러운 말 한 마디 눈짓 하나면 서로 다정해질 수 있고 서로 따뜻한 마음을 나눌 수 있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못 하고 있거든. 힘들 것도 그렇다고 손해날 것 하나 없는데 말이다."
말끝과 함께 준은 가볍게 한숨을 죽였다. 계단을 다 내려섰을 때 준은 중섭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하였다.
“네게 꼭 보여 주고 싶은 곳은 인제부터야."
중섭은 그를 마주 보았다. 한 눈을 기헝적으로 번쩍거리면서 준은 웃고 있었다. 그들은 한길가로 죽 걸어나와서 버스를 기다렸다. 중섭은 오래간만에 버스에 흔들리면서 전원(田園)의 경치를 바라보고 있었다, 푸르름이 물결치는 논과 밭, 훤칠히 눈앞에 이어나간 벌 너머 초가집들이 웅기중기 돌아앉고 한가로이 꼬리를 치면서 소가 풀을 뜯고 있는 언덕 위에는 포플라 나무 한 그루가 우뚝 서 있다. 한길가에 나앉은 나지막한 초가집 앞을 버스가 질주하며 지나갈 때 길섶 풀 속에서 벌레를 쫓고 있던 닭들이 홰를 치며 무성한 아주까리나무 밑으로 쫓겨 달아났다. 그리고 집 앞에 나와 섰던 누런 개 한 마리가 물끄러미 먼지를 날리며 지나가는 고속 버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약 삼십 분 후 버스는 어떤 조그만 마을 앞에 와서 멎었다.
그들은 산 밑으로 내달은 시골길을 따라 걸었다. 양쪽에는 무성하게 자란 벼포기들이 이따금 스쳐가는 바람결에 머리를 내젓고 있었다. 멀리 산 밑에 검은 지붕들이 뵈기 시작하였다. 준은 손을 들어 그쪽을 가리켰다.
“바로 저기야."
준은 손수건을 꺼대어 이마의 땀을 씻었다. 짜부라진 콧구멍도 닦았다.
“내가 다시금 내게 자신을 갖게 한 곳이 바로 저기야."
그는 감개 무량한 듯이 빙그레 웃었다. 교실처럼 지은 검은 바라크를 중심으로 조그만 주택 같은 집들이 규격이 일정치 않은 흙벽돌로 빙 둘러져있었다. 그 문 앞에는 서투른 먹 글씨로 조그맣게 ‘우리들의 마을'이라는 나뭇조각이 써 붙여져 있었다. 약 십 세 가량돼 보이는 소년 하나가 문가에 나와 서 있다가 준을 보자 꾸뻑 절을 하고 빙긋 웃었다. 남루하지만 그 얼굴은 햇볕에 타서 검게 구릿빛을 하고 있었다. 소년은 곧 뛰어 안으로 들어 갔다. 그들이 현관 앞에 이르렀을 때 안에서 소년과 함께 한 청년이 나왔다.
“이거 최형이 어찌 된 노릇이요”
나온 청년은 준을 보자마자 몹시 반가운 듯 팔을 벌렸다. 그리고 옆에 서 있는 중섭을 돌아보았다.
“소개하지요”
인사가 끝난 다음 그들은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나무로 깎은 책상 의자 모두가 다 여기서 만든 것인 듯 제 규격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으나 아무런 장식도 없는 소박한 인상이 도리어 중섭에게는 좋았다.
이씨와 준은 몹시 반가운 모양이었다.
“그래 모두들 다 잘 있소?"
“그럼요. 그러지 않아도 최형한테 누굴 보낼까 하던 참이었었는데요. "
“왜 ? 무슨 좋은 기별이라도 있소?"
“장 준택 형이 이번 장가를 가게 됐소."
"네에?"
준도 몹시 놀랍고 반가운 모양이었다.
“참 반갑소. 처음에는 몹시 괴로와하더니만 이젠 아주 완전히 보람을 갖는군요. "
중섭은 그들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면서 이이를 자주 훑어보았다. 이씨 양쪽 팔이 모두 의수(義手)인 것을 곧 알수 있었다.
“그럼 장형을 가서 만나뵈어야겠군. "
준은 일어섰다.
중섭은 준을 따라 마당으로 나무 뒤뜰로 돌았다. 돼지우리가 있고 한쪽으로는 커다란 닭장이 줄서 있었다. 돼지우리 앞을 지날 때 울안에서 돼지 똥을 쳐내고 있던 한 청년이 준을 보자 소리를 질렀다.
“최형, 오래간만이여."
준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빙그레 웃었다
“이놈이 새끼 야달 놈을 낳지 않았겠시여."
그 청년은 마치 자랑스럽다는 듯이 돼지 똥이 튕긴 눈 기슭을 씰룩거리면서 누런 이발을 드러내고 웃었다.
“그래 다리는 인제 괜찮우?"
“총구멍 자리가 이따금 쑤시긴 해도 개않아여."
닭들이 한가로이 닭장 속에서 모이를 먹고 있었다. 중섭은 준을 따라 길을 다시 내려와서 긴 흙벽 집 앞으로 갔다. 안에서는 약 이십 명 가량의 청년과 여자들이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준이 안으로 들어가자 모두 고개를 돌리며 반가운 듯이 인사를 하였다. 검게 구릿빛으로 탄 얼굴들이 건강한 웃음을 띠고 있었다.
“최형, 오래간만이요. "
“왜 그렇게 안 왔능기요. 최형, 그럼 나무랍다이."
“장형이 장갈 가우. 어이 장형, 최형이 왔어, 최형이......"
중섭은 고개를 돌렸다. 구석지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 한 청년이 곧 눈에 띄었다. 중섭은 준을 따라 그쪽으로 갔다. 청년은 자기 자리에 가만히 앉은 채 그들이 오는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 앞에 이르렀을 때 중섭은 그가 장님인 것을 알았다. 그 청년은 준과 손을 꽉 붙잡았다.
“장형 축복합니다”
“고맙소."
청년의 얼굴에는 기쁨이 가득 넘쳐흐르고 있었다,
“나는 처음 주저했었소. 그러나 이형이 자꾸 권하고 모두가 야단이기에 승낙을 했소. 민형
과 철이란 놈이 우리가 들어갈 집을 짓는다고 지금 며칠째 야단법석이요. 최형 내 집을 구 경시켜 드릴게……”
청년은 일어나서 더듬으며 앞장 서 마당으로 내려갔다. 청년은 흙벽돌로 싼 담을 기고 돌았다. 담이 끊어지는 데서 청년은 걸음을 멈추었다. 거기에는 지금 흙벽돌로 쌓은 집이 한창 세워져 가고 있었다. 땀을 철철 흘리면서 흙벽돌을 나르고 있던 소년 하나가 준을 보자 고개를 끄덕하고 반가운 듯이 웃었다. 흙벽돌을 받아 연방 벽을 쌓아 가고 있던 청년도 준을 보자 이마의 땀을 팔뚝으로 쓱 문지르며 웃었다
“최형 ! 오래간만이요."
“수고하는군. "
“뭘요. "
준은 집 구조를 사방 돌아보며 자기도 흙벽돌을 하나 날라다가 흙벽 위에 쌓아올렸다.
중섭은 장님이 된 청년 얼굴을 조용히 지키고 있었다. 청년은 자기가 들어가서 살게 될 집을 마치 눈뜬 사람처럼 바라보면서 기쁨에 얼굴을 붉게 태워 가고 있었다.
“형씨 ! "
중섭은 청년을 쳐다보았다.
“초면에 안됐소만 확실히 나는 산다는 데 보람을 느끼고 있소. 나는 눈을 뜨고도 보람을
모르고 살고 있는 사람들보다는 몇백 배의 행복을 느끼고 있소. "
그 순간 중섭은 가슴이 무엇에 찔리는 것만 같았다.
흙벽돌을 한 덩이씩 나르던 준은 상의를 훌떡 벗어 버렸다.
“최형 그러지 마세요. "
소년도 곧 그만두라고 준한테서 벽돌을 빼앗았다. 그러나 준은 고개를 흔들면서 빙그레 웃고 또 왼손으로 벽돌을 쳐들고 있었다. 그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흥건히 배어 가고 있었다. 조용히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청년의 눈에서는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리고 있었다. 청년은 곧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했다.
“그럼 난 들어가서 일을 계속해야겠어.
“네, 어서 들어가 보세요. 장 아저씨."
소년이 대답했다. 청년은 더듬으며 돌담을 끼고 걸어 올라가기 시작하였다. 중섭은 왜 그런지 그와 헤어지고 싶지가 않았다. 무엇인가 이야기하고 싶었다. 아무렇지 않은 평범한 이야기라도 그와 한 마디 나누고 싶었다. 중섭은 곧 그를 따라서 같이 돌담을 끼고 걸어 올라갔다.
“이곳에 오신 지가 오래 되시요?"
중섭은 먼저 입을 열었다. 청년은 잠깐 생각을 더듬는 듯하다가 대답하였다.
“삼 일 후면 꼭 팔 개월 째 됩니다."
“고향은 어디시죠 ? "
“고향?"
그 순간 청년 얼굴 위에 어두운 그늘이 한줄기 스치고 지나가는 것을 중섭은 얼핏 보았다.
“고향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소."
청년은 묵묵히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무겁게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러나 다시 한번 고향에 가 보고 싶은 생각은 있소. 제대되어 돌아간 지 일 주일만에 순이 엄마가 도망간 곳이기도 하지만...... 장님이 되어 돌아온 내가 뭐 반가왔겠소? 나는 당 장에 자살을 하려 했었지만 단념하고 사방을 헤매었소. 도망간 계집이야 뭐 그리 보고 싶 었겠소만 딸자식, 날더러 아부지 아부지하고 말을 배워 가지고 나한테 재롱을 떨던 딸자식이 보고 싶어서였소. 신문사에 가서 호소도 하고 경찰에 가서 의뢰도 했었소. 그러나 모두가 헛된 노릇이었소. 더우기 후에 안 일이지만 내 아내가 내가 전선에서 근무하고 있을 때 벌써 어떤 젊은 놈과 부정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소. 나는 분노에 몸을 떨며 아내를 당장 잡아내려 헤매었으나 허덕이다 지친 끝에 내 자신을 저주하기 시작하고 드디어는 목숨을 끊으려 했던 거요."
이미 그들은 문 앞에 와 있었다. 청년은 입구를 더듬으며 안으로 들어가서 자기 자리에 앉았다. 그가 앉은 책상 위에는 초가 든 상자와 포장지 풀 그릇 이 놓여 있었다. 청년은 초를 여섯 개 정확히 뽑아 들었다. 포장지 가운데 그것을 놓고 네모를 재빠르게 접은 다음 풀을 가장자리에 칠하고 돌아가며 붙였다. 붙인 것을 한쪽으로 밀어 놓고 또 초를 여섯 자루 뽑아 들었다. 그 손의 동작은 기계처럼 정확하고 민첩하였다. 중섭은 그의 일하는 모습을 조용히 지키고 있었다.
“처음에는 몹시 서툴렀소. 그러나 이제는 눈을 뜬 사람이 하는 것과 손색이 없다오. 물론 이렇게 되기까지 몹시 애를 태우기는 하였지만…… 처음에는 모두가 나를 동정하여 그대로 놀고 있으라고 하였소. 그러나 나에게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나와 꼭 같이 어느 한쪽이 부족한 사람들이요. 손이 없다든가 눈이 한쪽 없다든가 귀머거리가 되었다든가…… 지금 여기서 나와 함께 일하고 있는 사람들 모두가 그렇소."
중섭은 이야기를 들으면서 방안을 휘돌아보았다. 모두가 열심히 자기 맡은 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확실히 어느 한 부분들이 부족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 중에도 나는 더욱 불행했소. 나는 시력을 잃어버린 사람이니 말이요. 내가 할
일이라곤 하나도 없었소. 처음 나는 몹시 고민했지만 나는 어떡하면 눈은 멀었지만 내게 남은 이 손,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는 이 손을 그들의 일에 도울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였소. 여기선 성냥과 초를 만들고 있소. 그래 나는 그 포장을 할 생각을 했소. 나는 혼자 그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 열심히 포장하는 법을 연습했소. 물론 철이란 어린이의 도움이 많았지만…… 그래 인제는 무엇이든 포장하는 데는 자신이 있게 되었소. 이렇게 되기까지의 고충이란 말할 것도 없지만……"
청년은 이렇게 말을 계속하면서도 잠시도 손을 쉬지 않고 정확히 초를 규모 있게 포장하고 있었다.
“일 주일 후엔 결혼식이요. 돼지도 잡는다고 야단이니 최형과 같이 오시오. "
말끝과 함께 청년은 감출 길이 없는 듯이 기쁨을 입가에 홀렸다.
저녁이 늦어서야 그들은 병원으로 돌아왔다. 그날 밤 자리에 누워서 중섭은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생각할수록 자기를 포기하였던 자신이 스스로 괴로와지는 것이었다. 오늘 아침 이층 병동을 죽 거닐면서 준이 환자들과 주고받던 이야기, 자기를 건실하게 다시 이룩하여 놓은 준의 인상, 그리고 시력을 잃어버린 청년의 다시 되찾은 자기에 대한 보람을 그는 너무도 뼈저리게 배운 것이었다. 그는 몸을 뒤틀었다. 눈을 뜨고 어두운 천장을 지키기도 하였다. 그는 무엇인가 자꾸 마음속에서 울부짖는 것만 같았다. 그는 벌떡 일어나서 지팡이를 찾아 들고 절름거리면서 창가로 갔다. 그리고 어두움이 고요히 내려 덮는 밖을 내다보았다. 결국 나는 과거의 나만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과거는 이미 지나가 버린 것이다.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의 나는 소용이 없는 것이다. 그 소용없는 지나가 버린 과거의 나로 인하여 나는 지금의 나를 경멸하고 저주하고 너무도 잔인하게 짓밟아 버렸던 것이다. 그는 지금껏 무겁던 속이 탁 터져 나가는 것만 같았다. 그는 내일로 곧 ‘우리들의 마을'로 가리라고 마음 먹었다. 그는 거기에서 지금의 자기로서 만족하고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자신을 키우려 생각하였다. 중섭을 ’우리들의 마을'로 데려다 주고 돌아오는 길에 어머니와 아버지는 형용할 수 없는, 그러기에는 너무도 벅찬 일종의 흥분에 싸여 있었다. 어머니는 그러한 속에 아들을 두고 오는 것이 몹시 애처롭고 가엾어서 속으로 울음을 죽이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어머니는 몹시 감격 속에 사로잡혀 있었다. 눈물에 젖은 어머니의 눈 기슭에는 웃음이 자주 떠돌고 있었다. 남편도 기쁨에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모양이었다.
“여보 중섭이가 웃고 있었소. 당신이 차에 오를 때 중섭이는 빙그레 나를 보고 웃고 있었소."
8
형이 자살 미수로 입원한 후부터 중서의 마음에는 어두운 동요가 잠시도 가라앉지를 않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들의 마을'로 떠난다고 집에 왔을 때 중서는 형을 보는 순간 곧 시선을 떨구었다, 형은 웃고 있었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웃음에 싸여 웃고 있었던 것이다. 그 속에서 자기만이 웃음을 잃고 서 있어야 하였던 것이었다.
중서는 자기 마음을 덮고 있는 어둠을 헤치려 애썼으나 마치 그것은 파문이 지나가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서는 수면(水面)처럼 걷혀질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자기를 다시금 가다듬으려 책들을 모아 놓고 뒤적였으나 몇 페이지를 못 읽고 그대로 내동댕이쳐 버리고 말았다. 그는 집을 뛰쳐나갔다. 자기에게 주어진 이 수많은 시간들, 이것들은 꾸역꾸역 메우어져 가야만 하였다. 무엇에고 정착되지 않는 이 시간들은 다방 한 구석지에 손끝이 타도록 담배만 피워 가며 머물러져야 했다. 중서는 스스로 마음의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다방에서나 술집에서나 주위에 흩어지는 수다한 얼굴들, 그 얼굴들은 모두가 직접적으로 또는 간접적으로 전쟁에 의하여 나가떨어진 일그러진 얼굴들이었다. 그는 그들 속에서 자기 또한 일그러진 얼굴을 비비대고 덧없이 허덕여야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언제까지 그래야 하는 것인가? 나는 언제까지 나를 가누지 못하고 멍청거려야 한단 말인가? 그의 눈앞에는 자주 형인 중섭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는 도리어 형이 부러웠다. 형을 동정하던 자기가 도리어 부끄러웠다. 육체적으로 파괴된 형, 외모로 보면 자기와는 비할 나위도 없이 가련한 존재였다. 그러나 정신적으로 파괴되어 버린 중서는 육체적으로 파괴된 형보다도 더 비참하였다. 중서는 지금 그것을 통감하는 것이었다. 발이 하나 절단되든가 눈이 하나 도망가든가 손몽둥아리가 되지 않은 자기가 중서는 도리어 원망스러워마저지는 것이었다. 그는 다시금 잃어버린 것들을 찾으려고 애썼으나 잃어버린 것은 잃어버린 것으로 그쳐야 했다. 이미 무디어 버린 지성과 멍들어 버린 정열은 골을 잃고 흩어지고 제자리로 모여들 중심이 없었다. 그는 때로 방안에 종일 틀어박혀 멍하니 벽과 천장을 마주 보며 담배만 태우기도 하였다. 그러나 중서에게도 그를 뒤덮고 있는 어둠을 헤치고 희뿌연 여명 같은 것이 다가오고 있었다.
중서는 어머니와 함께 초조한 불안에 쫓기면서 차를 형님이 입원하였던 정신 병원으로 재촉하고 있었다. 어머니의 시선 속에도 불안한 빛이 짙게 물들고 있었다. 차가 급커브로 돌면서 병원 정문을 꾸부러져 들어갔을 때 중서는 꾹 움켜쥐었던 문손잡이를 홱 돌려 잡고 있었다.
준은 한쪽 눈알을 번득거리면서 책상 서랍에서 노란 종이첩을 꺼내어 펼쳤다. 거기에는 꼬깃꼬깃 꾸겨진 사진 한 장이 있었다.
“이 사진을 보고 곧 연락을 했었죠."
준은 사진을 그들 앞으로 내놓으며 말하였다. 어머니는 사진을 보자마자 얼굴이 파랗게 질리면서 말을 더듬었다. 중서 얼굴에도 긴장이 잠시 물결치고 있었다.
“이게 정연이 아니냐?"
어머니는 다시 더듬으며 말하였다.
“소지품이라곤 그것뿐이었습니다. 그래 보았더니 중섭이 얼굴도 있고 또 중서씨도 뵈기에
아마 무슨 인척 관계나 되나 해서 곧 전화를 했읍죠.”
준은 짜부라진 한쪽 코 밑을 씰룩거리면서 말하였다. 중서는 사진을 들고 묵묵히 내려다보았다. 얼굴이 모두 꺾여서 대번에 알아보기에는 힘들었으나 그래도 곧 정연이 얼굴이 떠올랐다. 정연이가 앞에, 그 등의자 옆에 자기는 걸터앉아 있었고 중섭은 뒤에 서 있었다. 중서가 대학에 입학하였을 때 같이 기념으로 찍었던 사진이었다. 중서는 전신이 강한 물결에 뒤흔들리는 것 같았다.
“그럼 지금 여기 있나요?"
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소령 계급장을 단 어떤 군인이 어젯저녁 이리로 데리고 왔습니다. 여학교 때 가르치던 학이라고 하더군요. 아마 일선 지대서 배회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정연이는 정신 이상에 떨어져 있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남루한 옷깃 그리고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하게 시들어 버린 정연이를 대하는 순간 중서는 더 그 얼굴을 마주 볼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정연이 손을 꼭 붙잡고 눈물을 머금는 것이었으나 정연이는 도리어 무엇에 놀라는 것처럼 흠칫거리며 몸을 뒤로 비끼는 것이었다. 그처럼 상냥스럽고 맑게 빛나던 정연이의 눈동자는 이미 오랜 세월을 두고 그을어 버린 등잔 유리처럼 거칠게 구름 껴 있었다. 그가 생각하던 정연이는 이미 아니었다.
준을 따라 병실 문을 나섰을 때 중서는 병실 안에서부터 흘러나오는 정연이의 흐느끼는 울음 소리를 듣고 발을 멈추었다. 그것은 속으로 죽이는 흐느낌 소리였다. 어머니도 발걸음을 멈추고 눈물을 머금고 있었다. 중서는 다시 병실 안으로 들어가려 하였으나 준에게 곧 제지되고 말았다.
집에 돌아와서도 중서는 정연이로부터 받은 충격에서 오는 쓰라림이 물결처럼 전신을 휩싸고 있었다. 그리고 병실에서부터 흘러나오던 정연이의 흐느낌 소리가 어두운 그늘을 타고 간단없이 들려 오고 있었다. 그처럼 사랑하였던 정연이, 그리고 그처럼 마음속으로부터 기대하고 있던 정연이는 오늘 중서의 눈앞에 갈기갈기 부서져 버린 얼굴로 나타났던 것이었다. 지금껏 그는 그러한 정연이의 모습을 상상해 본 적도 없었다. 어디까지나 사랑하였던 그 옛날처럼 상냥스런고 맑은 눈동자로 떠돌고 있었다. 그리고 아무리 추태를 부피고 자기를 못 가누고 이어 가는 생활 속에서도 정연이만은 싱싱한 모습으로 중서의 마음 한구석에 살아 있었던 것이었다. 중서는 먹물 같은 어둠이 전신을 휩쓸고 달음질쳐 지나가는 것만 같았다.
나는 도대체 어떡해야 한다는 것인가. 나에게 지금 무엇이 남아 있단 말인가.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모든 것은…… 그 순간 중서는 무엇인가가 마음속에서 자기를 향하여 세차게 부르짖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것은 벅찬 물결처럼 곧 뒤로 밀려 나가고 있었다. 중서의 마음은 다시 어둠 속으로 파묻혀 들어갔다. 생각할수록 착란된 그의 머릿속은 갈래갈래 찢어진 자기 속으로 말려 들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밀려갔던 물결은 다시 벅차게 밀려오며 그의 전을 덮고 소용돌이치는 것이었다. 모든 것은…… 그의 가슴속은 다시금 터지는 듯 무엇에 부딪치고 있었다. 동시에 그를 덮고 있던 장막의 한 조각이 이윽고 부스러져 내리는 순간 무엇인가가 그 속으로부터 뜨거운 핏물처럼 터져 나오고 있었다. 그렇다! 모든 것은 끝났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다시 시작돼야 하는 것이다. 제대 이후 도대체 나는 무엇
을 살아 왔단 말인가. 다만 전쟁이 나의 가슴속 깊이 던지고 간 공백을 허덕허덕 그대로 더듬어 오고 있었다는 것뿐이었다. 제대되던 순간부터 나는 확실히 그 공백 속에서부터 나를 다시 시작했어야 하였던 것이다. 이미 상실된 나는 영원히 상실해 버려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상실한 거기에서부터 모든 나는 다시 시작되었어야 하는 것이다. 중서의 가슴속에서 뜨거운 피가 확 터져 나오는 것만 같았다. 한가닥 옛 모습도 찾아볼 길 없이 부서져 버린 정연이. 나 또한 그런 것이다. 우리는 둘이 다 자기를 잃어버리고 무너져 버린 젊음인 것이다. 우리는 이 무너져 버린 서로의 얼굴 속에서 다시 몸을 마주 대고 시작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이 들자 중서는 벌떡 일어섰다. 그의 가슴을 덮고 있던 수많은 어두운 그림자들이 그와 동시에 아득한 옛이야기처럼 걷혀 가는 것만 같았다.
준은 중서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만족스러이 씩 웃었다. 이미 밖에는 어둠이 서서히 내리고 있었다.
“과거에 서로 사랑하고 있었던 사이면 더욱 좋은 조건이죠. "
중서는 준을 따라 어두컴컴한 복도를 지나 계단을 올라갔다. 옆으로 꺾여서 잠깐 후에 그들은 병실 앞에 이르렀다. 준은 열쇠를 꺼내 들고 열쇠 구멍을 찾으면서 말하였다.
“완전히 기억 상실을 하고 있으니까 될 수 있는 한 기억을 다시 회복시킬 수 있는 여러 가지 과거를 들려주는 게 좋습니다, 그러나 심적 타격을 줄 어떠한 과거나 기억에 관한 것은 될 수 있는 한 피해야 합니다. 이 점에 유의하시도록……”
열쇠가 자물쇠 구멍에서 가벼이 부딪치며 돌아가고 이윽고 열리는 소리가 잘칵 하고 둔하게 울렸을 때 중서의 마음은 설레었다. 도어가 가벼이 열리었다. 순간 차가운 바람이 병실 안에서부터 확 그를 향하여 몰아오는 것 같았다. 그리고 곧 그의 전신을 스치고 멀리 뒤로 사라져 가는 것 같았나. 중서는 준을 따라 한 걸음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방안은 조용한 어둠 속에 파묻혀 있었다. 어둠 속에서 희뿌연히 침대가 중서의 눈앞에 떠올랐다. 정연이는 누워 있었다. 중서는 침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스위치 누르는 소리와 함께 불이 켜졌다. 불빛 아래 정연이 모습은 더욱 창백하게 그늘져 있었다.
정연이는 잠시 동안 눈썹을 깜작거리다 눈을 떴다. 그리고 우두커니 중서를 치어다보았다. 정연이는 또 눈을 깜작거렸다. 이상스러운 듯이 다시 중서를 치어다보았다. 그 눈동자는 불빛에 반사되어 유난히 빛나고 있었다. 준이 가까이로 오자 정연이는 일어나 앉았다.
“이분 모르겠어? "
준은 오랫동안 다정하게 사귀어 온 친구처럼 말하면서 정연이 표정을 유심히 지켰다. 정연이는 또 중서를 물끄러미 지키고 있다가 곧 고개를 저었다.
“왜 나보고 일전에 편지 냈다고 하지 않았어? 그 편지 받고 온 분인데……”
그 순간 정연이의 시선이 붉게 타오르는 것 같았다. 준은 곧 말을 놓치지 않고 계속하였다.
“누구 앞이라고 했던가? 왜 이름 쓰지 않았어…… 김 뭐라든가?"
준은 말을 하면서도 정연이 얼굴 위에 비치는 조그만 변화 하나도 놓치지 않고 지키고 있었다.
“조용히 생각해 봐요."
정연이는 고개를 갸웃하며 생각해 내려는 모양이었다.
“김……”
정연이는 그러나 곧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생각이 안 떠오르는 듯 머리를 저었다. 눈에는 금시에 눈물이 감돌고 있었다. 길게 파마가 풀어진 머리카락은 가느다란 목 위에서 가벼이 흔들리고 있었다. 중서는 정연이의 그러한 모습을 초조하게 지키고 있다가 무릎을 꾸부리고 정연이 앞으로 얼굴을 모아 갔다. 중서는 정연이 손을 조용히 잡았다.
“중서…… 중서……"
중서는 자기 이름을 정연이의 기억 속에 일깨우려는 듯이 되풀이하였다. 그러나 정연이 얼굴은 곧 어둡게 흐렸다. 개이지 않는 기억이 안타까운 듯 머리를 흔들었다. 정연이는 자기 손을 잡고 있는 중서의 손을 풀어헤치고 숨죽이고 흐느끼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잠시 후 정연이는 눈물을 걷고 기억을 더듬어 내려는 듯 허공 속으로 이리저리 눈을 살펴 가고 있었다.
“그이……"
정연이 음성이 퍽 흐려졌다.
“그이……”
정연이는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 듯 눈을 가늘게 접어 가며 옷깃을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준에게 시선을 던지며,
“저어, 그이는……”
하고 표현이 잘 떠오르지 않는 듯 손으로 형용하려 애쓰고 있었다. 자꾸 기억이 떠오르다가는 흐려 버리는 듯 말을 못 잇고 초조스러이 몸짓을 하였다. 그러나 끝내는 또 흑흑 느껴 버리고 말았다.
중서는 정연이 곁을 이대로 떠나고 싶지는 않았다. 어떻게 해서라도 지금 이 자리에서 자기를 기억시키고 싶었으나 준을 따라 그대로 병실 문을 나서야 했다.
“그러니까 삼 년째 되는 셈이죠?"
“네. 일사 후퇴 때 헤어지고 처음이니까요."
중서는 준이 끓여 준 커피를 마시면서 대답했다. 준은 잠시 혼자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알겠어요. 그러니까 정연씨가 기억하고 있는 것은 삼 년 전 그때의 중서씨 모습이죠.”
준은 고개를 혼자 또 끄덕였다. 중서는 마시려던 차를 멈추고 찻잔 너머로 준의 얼굴을 똑바로 지켰다. 중서의 마음을 지금껏 덮고 있던 어둠의 한쪽 모서리가 무너지고 그 새로 맑은 햇살이 비쳐 들어오는 것 같았다. 그렇다. 중서는 마음속에서 부르짖고 있었다. 마치 내 마음속에 지금껏 사변 전의 정연이가 살아 있었듯이 정연이 마음속에도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만 그 마음속에도 사변 전의 내가 간직되어 있었던 것이다. 내가 정연이를 마주 대했던 순간 조각조각 부서져 버린 정연이를 발견하고 실심하였던 것처럼 정상적인 기억을 가지고 있었더라면 정연이도 나를 발견한 순간 자기가 마음속에서 그토록 고이 간직하고 그리던 내가 아니라 갈기갈기 찢겨 무너져 버린 나를 보고 실심했을 것이다. 중서는 점점 무거워 오는 마음의 동요를 걷잡을 수가 없었다. 그는 비로소 예전 해변가를 거닐면서 이야기하던 순희의 이야기를 깨달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순희의 그 차갑던 웃음과 마지막으로 보낸 편지의 내용을 또 그 속에 나오던 형란이란 여자의 심정을 비로소 깨달을 수 있는 것 같았다. 어느덧 중서의 눈썹 기슭에는 눈물이 한 줄기 젖어 가고 있었다.
다음날부터 중서는 병원에 머물러 있었다. 그는 하루라도 빨리 상실한 정연이와의 가지가지 기억을 더듬어 가자고 이야기했다. 그럴 때마다 정연의 얼굴은 맑게 살아 나오다가도 곧 또 어둡게 흐려져 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중서는 틈 있는 대로 준이 참고로 읽어두라는 정신 병리학 서적들 중에서 실례를 인용한 기록들을 열심히 읽었다. 그리고 영화에서 본 기억 상실자의 회복 과정을 묘사한 신들을 생각해 보기도 하고 그러한 인물을 소재로 한 소설에서 느꼈던 여러 가지 심리적 변동 과정을 곰곰 기억 속에서 추리해 보기도 하였다.
억수같이 비가 쏟아지는 어느 날 오후였다. 천둥이 요란하게 자주 하늘을 울리고 지나갈 때마다 번갯불이 번쩍 빛났다. 중서는 집에 들렀다가 어머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 비를 팍팍 맞아 가며 병원으로 돌아왔다. 우비를 입기는 하였지만 병원 입구에 다다랐을 때는 비에 흠뻑 젖어 있었다. 중서는 죽죽 우비 기슭으로 흘러내리는 빗물을 어느 정도 떨구고 나서 그대로 병실로 올라갔다.
실내로 들어갔을 때 정연이는 혼자 침대 위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어두컴컴한 속에 그녀의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하게 질려 공포에 파르르 떨고 있었다. 그녀는 힐끗 중서에게 눈주었다. 마침 그때 세차게 번개가 치고 창문이 번쩍 빛났다. 그녀는 몸을 흠칫하고 어깨머리를 후르르 떨었다. 중서는 아직도 빗물이 가시지 않고 뚝뚝 처지는 레인코트를 벗어 걸었다. 상의(上衣)는 물론 속옷까지도 빗물이 스며든 듯 축축하였다. 그는 상의 윗단추를 끄르면서 정연이 앞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그의 거동을 죽 눈을 주고 있다가 그 순간 얼굴이 잿빛으로 변하며 침대 위에서 비실비실 뒤로 물러앉았다. 중서는 왜 그러는 것일까 하고 그녀를 잠시 지켰다. 또 벼락치는 소리가 요란히 울리고 번갯불이 번쩍 창문에 빛났다. 중서는 윗단추를 다 끌렀다. 러닝셔츠가 비에 젖어 가슴팍에 찰딱 달라붙어 있었다. 정연이는 더욱 몸을 뒤로 물리면서 가벼운 비명과 함께 공포에 찬 시선으로 중서를 무서웁게 노려보고 있었다. 가까이에서 낙뢰하는 소리가 났다. 그는 이러한 탓으로만 여기고 자기가 바로 앞에 있다는 안전감을 그녀에게 주기 위해서 더욱 가까이 다가섰다.
정연이는 단추를 풀어헤친 그의 앞가슴을 죽 노리고 있었다. 중서는 곧 자기 앞가슴을 내려다보았다. 왜 그토록 풀어헤친 자기 앞가슴을 노리고 있는지 중서는 알 수가 없었다. 중서는 정연이를 안정시키려고 어깨 위에 손을 얹었다. 그녀는 급히 어깨머리를 움츠리면서 피하듯 또 뒤로 물러섰다. 중서는 다시 곁으로 다가섰다. 그녀의 눈은 발간 독버섯처럼 이상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눈동자 속에서는 수많은 검은 반점들이 불안한 짐승처럼 떠돌고 있는 것마저 같았다. 파랗게 물든 입술은 경련을 일으키는 듯 파르르 이발 끝에서 떨리고 있었다. 중서는 일기 탓이라고 생각하고 무릎을 굽히며 정연이를 조용히 마주 지켰다. 그는 정연이 손을 끌어 잡았다. 그 손은 강하게 반항을 표시하고 있었다. 중서는 그럴수록 더 꼭 쥐어 주었다. 그 순간 정연이는 시선을 떨구고 잠시 빗물에 축축히 젖은 그의 아래 옷을 내려다보고 있다가 무어라고 알아듣지 못할 이야기를 짧게 한 마디 중얼거리고 공포에 전신을 떨면서 침대 위에 길게 누웠다. 한 순간이 흘렀다. 정연이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었다. 중서의 눈앞에는 탄력 있게 부풀어오른 하얀 굴곡이 물결치고 있었다. 부드러이 흘러간 곡선의 율동은 한 지점으로 모여 들고 불룩 솟아올랐다가 두 사이로 헤어져 있었다. 중서는 더 참을 수가 없어서 돌아섰다. 정연이는 왜 갑자기 이러한 행동을 하는 것인가. 중서는 알 수가 없었다. 흐느끼는 울음 소리를 듣고 중서는 곧 고개를 돌렸다. 정연이는 하체를 그대로 드러내 놓은 채 양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고 흑흑 느껴 울고 있었다. 그 순간 중서의 머리에 어두운 그림자가 번개같이 스치고 지나갔다.
이 얼마나 욕된 나의 과실이었던가. 그는 곧 모든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일선(一線)을 아는 사람이면 누구나 곧 짐작할 수 있는 문제였다. 모든 것은 비가 억수같이 쏟아진 탓이었다. 그는 비가 오기 때문에 양복을 벗어 놓고 군복으로 갈아입고 있었다. 나는 왜 기억 못 하였던가. 정연이가 일선 지대를 헤매고 있었다는 것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후회스러웠다. 중서는 죽어 버리고 싶도록 자신이 저주스러웠다. 그는 머리가 조각도 없이 부서져 나가고 전신이 갈기갈기 찢겨 으스러져 나가는 것만 같았다. 중서는 그녀의 마음을 덮고 있는 가장 더럽고 몸서리치는 기억을 다시 자극하여 상기시켰던 것이었다,
중서는 곧 미친 사람처럼 밖으로 튀어나왔다. 나오자마자 그는 재킷을 벗어 복도 위에 내동댕이쳤다. 비에 축축히 젖어 복도 위에 흩어져 나가 털어진 재킷, 그것은 마치 죽은 시체처럼 엎뎌져 있었다. 그리고 전쟁이 던지고 간 모든 죄악이 전쟁으로 번식된 모든 독소가 그 재킷에서 썩어 가고 부패된 속에서 발산하는 추악한 냄새가 무겁게 복도 위를 덮어 가고 있는 것 같았다. 중서는 횐 러닝셔츠 바람으로 다시 병실로 들어갔다. 정연이는 옷을 입고 침대 위에 몸을 후들후들 떨면서 앉아 있었다. 그녀는 입속말로 무어라고 혼자 중얼거리며 공포가 가시지 않은 시선으로 중서를 노려보고 있었다. 중서는 울고 싶었다. 아니 그는 기실 속으로 흐느껴 울고 있었다. 중서는 모든 것을 저주하고 싶었다. 이 저주는 지구가 무너져 형체도 없이 으스러져도 그칠 수 없는 저주다. 그는 눈물을 흘리면서 정연이를 우악스럽게 꾹 껴안았다. 마구 정연이의 머리카락에 얼굴을 비비면서 흐느껴 울었다.
중서는 얼마 동안이나 그렇게 흐느꼈는지 몰랐다. 그는 눈물에 젖은 얼굴을 들고 정연이를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정연이 두 눈에서도 그칠 사이 없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정연이는 언제까지나 그의 가슴에 꼭 머리를 묻고 있었다. 어느덧 파랗게 질렸던 그녀의 입술은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지금 그녀의 손은 그의 가슴속에서 따스하게 녹아 버리고 그 손을 통하여 중서의 뜨거운 입김이 그녀의 전신으로 흘러들어가고 있었다. 전신의 피가 다시금 소생된 것처럼 용솟음치고 지금것 그녀를 덮고 있던 어두운 그늘이 하나하나 걷혀 가고 있는 것이 점점 맑아 오는 그 눈동자 속에 뚜렷이 떠오르고 있었다. 중서는 디시금 그녀를 꾹 껴안았다.
창 밖에는 완전히 비가 그치고 한쪽으로 구름이 걷혀 가는 듯 맑은 하늘에 비에 쪽 씻겨 나간 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준 또한 중서 이상으로 정연이에 대하여 열심이었다, 준은 자주 중서와 함께 정연이 방에서 오랜 시간을 머물러 있곤 하였다. 정연이는 그럴 때마다 자기 머릿속을 덮고 있는 어둠을 헤치고 희미하나마 기억이 하나하나 떠오르는 모양이었다. 준이 이야기할 때면 정연이는 얼굴을 떨구고 조용히 있다가는 상냥스러이 머리를 끄덕여 보이곤 하였다. 그러나 기억이 살아 왔다 가도 그것은 오래 가지 못하고 다시금 어둠 속으로 싸여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때마다 정연이는 몹시 머리가 무겁다고 하였다. 저녁이었다. 창가에 드리우던 그늘이 길게 한쪽으로 빗겨 가고 그 끝이 창 밑으로 뚝 떨어지자 황혼이 물밀듯이 창가로 다가왔다. 중서와 정연이는 묵묵히 황혼이 물들어 가는 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중서에 대한 기억이 완전히 아직 살아 나온 것은 아니지만 정연이는 중서와 같이 있기를 퍽 좋아하고 있었다. 중서는 자주 정연이에게 얼굴을 돌렸다. 정연이는 어둠이 안개처럼 덮여 오는 창문을 조용히 지키고 있었다, 달빛이 창가를 물들이며 연연히 방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정연이 얼굴은 달빛 아래 더욱 굴곡을 지으며 그 윤곽이 살아 나오고 있었다. 그 눈은 달빛처럼 맑게 빛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얗게 달빛을 이고 숲 속으로 구부러져 나간 길, 나뭇가지 사이로 달빛을 흘리면서 잠든 듯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그 숲을 끼고 흐르는 샘터엔 달빛이 은가루처럼 반짝이면서 흐르고 있었다. 정연이 얼굴은 달빛을 받은 눈동자처럼 맑게 빛나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곧 숲 속으로 떨어졌다. 숲 그늘 사이로 두 그림자가 지나갔기 때문이었다. 잠시 후 그 두 그림자는 다시 숲 그늘을 헤치면서 달빛 속에 떠올랐다. 그들은 길로 나와서 잠시 머물러 선 채 달을 쳐다보고 있었다. 남자가 뭐라고 얘기를 하자 여자는 고개를 남자 쪽으로 돌리며 달빛 속에서 훅 웃고 있었다. 그들은 다시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걷기 시작하였다. 여자는 걸음을 옮기면서 나뭇가지를 손끝으로 가볍게 흔들곤 하였다. 그때마다 흔들리는 나뭇가지와 함께 나뭇잎들 위에서 달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들은 얼마 안 가서 또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리면서 서로 마주 보았다. 두 얼굴은 달빛 속에서 웃고 있었다, 남자가 뭐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여자는 고개를 상냥스럽게 끄덕이며 빵끗 웃었다.
남자가 숲 그늘 사이로 사라졌다. 여자는 잠시 동안 그대로 서슴은 채 숲 그늘을 향하여 뭐라고 얘기하면서 머리를 살래살래 젓고 있었다. 남자가 뭐라고 하는 모양이었다. 여자는 또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그러나 곧 무엇에 이끌리듯이 숲 그늘 사이로 사라져 들어갔다. 달빛은 두 그림자가 사라져 간 숲 속으로 더욱 연연히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정연이는 남모를 감탄사를 입 속에서 죽이면서 고개를 들었다. 끝없이 맑게 개인 하늘에는 둥근 달빛만이 은은히 빛나고 있었다. 중서는 정연이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정연이 입가에는 웃음 같은 것이 달빛처럼 물들어 가고 있었다. 중서는 정연이 손을 가만히 당겨 잡았다.
“정연이 ……"
중서는 나직이 불렀다. 중서에게로 고개를 힐끗 돌린 정연이는 중서와 시선이 마주치자 빙긋 웃었다. 그 순간 중서는 정연이의 따스한 입김 같은 것이 자기 얼굴로 다가오는 것 같았다. 중서는 정연이 손을 더욱 꼭 잡았다. 그는 정연이의 이름을 다시 한번 불렀다. 그의 음성은 나직하면서도 뜨겁게 울려 나오고 있었다. 정연이는 또 빙긋 웃었다. 달빛에 횐 이빨이 반짝 빛나고 있었다. 중서의 눈에는 정연이의 의식이 완전히 본 상태로 돌아와 있는 것만 같이 보였다. 중서는 정연이 손을 자기 가슴팍에다 꼭 모아 쥐었다. 그리고 정연이를 똑바로 지켰다.
“나를 기억할 수 있지, 내가 누구인지를……"
중서는 이렇게 되풀이하면서 정연의 얼굴 표정만 더듬어 가고 있었다. 한 동안은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중서는 곧 정연이 입술이 가볍게 움직이려 하는 것을 보았다.
“중서, 중서라고 이야기해 봐요. "
중서는 그녀의 말문을 깨쳐 주려고 애썼다. 가만히 듣고 있던 정연이 얼굴 위에 웃음 같은 것이 지나갔다. 정연이는 곧 눈웃음을 치며 중서에게 힐끗 눈주었다. 지금 정연이 머릿속에는 달밤에 중서와 어깨를 가지런히 공원숲 속을 거닐면서 서로 마음을 주고받던 생각이 까마득히 사라진 기억 속에서 다시 피어나고 있었다.
중서는 정연이를 꼭 껴안았다. 정연이도 그의 어깨 위에 손을 얹고 점점 그의 목덜미로 손을 모아 가고 있었다. 중서는 뜨거운 물결 속에 전신이 잠겨 들어가고 있는 것만 같이 가슴이 벅찼다. 그는 정연이 머리 위에 입술을 얹었다. 정연이 머리 냄새가 훅 얼굴을 스치고 가벼이 죽이는 정연이의 숨결 소리가 가까이 귓전에서 들려 오고 있었다.
중서는 전등을 켰다. 정연이에게 자기를 더 명확히 인식시켜 주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전등이 켜지는 순간 맑게 개어 가던 정연이의 얼굴 위에 무수한 그늘이 급격히 물결쳐 지나갔다. 지금껏 이어 오던 어떤 형태가 머릿속에서 무너지는 듯 정연이는 머리를 흔들었다. 그 시선은 사나운 짐승처럼 이상하게 빛나고 있었다.
중서는 불안해져서 곧 불을 껐다. 그는 정연이 손을 아까처럼 다시 모아 쥐었다. 그러나 정연이는 중서의 손을 뿌리쳤다. 그 얼굴과 가느다란 어깨 위에는 심한 감정의 흐트러진 물결이 벅차게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중서는 준에게 곧 이 사실을 이야기하였다. 묵묵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준은 고개를 끄덕 였다.
“대번에 모든 것을 요구하면 안 되지요. 서서히 하나하나 기억을 되살려 주어야지……, 하
여튼 좋은 현상입니다. "
9
정연이는 자기 귀에 대고 속삭이는 아름다운 천사의 음성을 듣고 있었다.
“나를 따라오세요. 나를 따라오셔야만 해요. "
감미한 꿈속에서처럼 그 음성은 맑게 울려 나오고 있었다. 정연이는 그 천사의 속삭임에 귀를 모아 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따라 자기의 기억을 더듬어 가고 있었다. 어둡게 자기 앞을 가로막고 있던 그늘은 맑은 천사의 음성과 함께 하나하나 걷혀 가고 해맑은 광선만이 뽀오얗게 흘러 들어오고 있었다. 정연이는 점점 앞으로 따라갔다. 이따금 채 걷히지도 않은 어두운 그늘에 걸려 그녀는 맑은 천사의 음성을 놓쳐 버리곤 하였다. 맑게 울려 오던 천사의 음성은 점점 멀리 사라져 가고 그 사이를 어두운 그늘이 다시 짙게 가로막곤 하였다. 정연이는 몹시 불안하였다. 어떻게 해서라도 이 어두운 그늘의 벽을 뚫고 천사의 맑은 음성을 쫓아가려고 하였으나 아무리 애써도 안 되는 것이었다. 어찌 된 노릇일까. 어린 천사는 인제 나를 버리고 가버리고 만 것일까. 아아 다시 와 주었으면……
정연이는 몹시 머리가 무겁고 아프다. 바늘 끝에 찔린 거머리가 흠칫거리듯이 뇌수가 무엇에 찔려 흠칫거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다시 이 어린 천사의 음성은 맑게 다가오고 친절히 어둠을 헤치면서 뽀오야니 기억의 문을 활짝 열어젖혀 주는 것이었다. 그녀는 가벼운 걸음걸이로 따라 올라갔다. 방울처럼 맑게 굴러 나오는 어린 천사의 목소리는 정연이의 마음속에서 마치 썰매를 끌고 흰 눈속을 달려가는 북극 에스키모의 ‘사도가이’ 목에 달린 방울처럼 울려 가고 있었다. 그리고 흰눈 속을 경쾌하게 미끄러져 가는 썰매처럼 점점 뽀오얀 안개를 헤치고 스며 오는 햇볕이 그녀의 의식을 덮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곧 또 눈앞 저 멀리 짙은 안개가 자욱이 밀려오고 있었다. 정연이는 퍽 초조하였다. 짙은 회색 빛 안개가 연한 구름처럼 눈앞을 가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어린 천사의 음성이 희미하게 그 안개 속에 싸여 들어갔다. 그녀는 성급히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이미 봉무 속에 감싸여 눈앞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잿빛 안개만이 겹겹이 물결처럼 눈앞에 다가서 있었다.
“어찌 된 노릇이에요. 눈앞이 뵈지를 않아요."
이렇게 부르짖는 순간 어떤 맑은 햇살이 자기를 둘러싸는 것 같았다.
“내가 여기 있어요. 내가……"
천사의 음성은 아니었다. 그러나 믿음직스럽도록 부드러운 음성이었다. 그리고 어딘지 낯익은 것 같은…… 정연이는 사방을 돌아보았다. 짙은 안개는 그대로 눈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이 짙은 안개, 눈앞을 덮고 있는 이 안개를 빨리 걷어 주세요. 네? 빨리."
그녀의 호흡은 몹시 가빴다. 눈앞을 가리었던 어두운 흑막이 다시 걷히기 시작하였다. 그녀는 퍽 불안하였다. 맑은 햇빛이 마음 하나 가득히 부서지게 흘러 들어왔다.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한 구석지에는 아직도 어두운 안개가 그대로 걷히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정연이는 사방을 둘러보았다. 무엇인가가 눈앞에 힐끗힐끗 떠오르고 있었다. 그 순간 이미 맑게 개어 버린 과거에로 정연이의 마음은 달려가고 있었다.
“도대체 어찌 된 노릇이에요?"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튀어나온 한 마디였다. 정연이는 다시금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얀 벽과 벽, 자기를 둘러싼 얼굴들. 한 얼굴 위에서 정연이는 시선을 멈추었다. 중서였다. 정연이는 곧 일어나려 하였다. 그러나 몸은 꽁꽁 침대 위에 묶여 있었다.
정연이는 어찌 된 노릇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었다.
그날 저녁 정연이는 왜 자기가 여기에 와 있었느냐고 다시금 되묻고 있었다. 그때마다 중서는 다만 고개를 저어 보였다.
“말해 주세요, 네? 말해 주세요."
중서는 대답 대신 그냥 웃었다.
“알 수가 없어요. 아무리 기억해 보려고 해도 떠오르지를 않아요. 어딘지 마음 한구석이 아직도 몹시 어두워요.”
“모르는 대로 그대로 잊어버려 주세요. 생각하지 말아 주세요. 부탁입니다”
중서는 정연이가 기억해 내려고 너무 안타까와하는 것 같아 비로소 이렇게 입을 열었다. 중서는 정연이 어깨 위에 손을 얹고 자기 앞으로 끌어당겼다. 중서는 정연이가 정신 이상에 떨어져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 내지 못하고 그대로 잊어 주기 바랐다. 만일 자기가 그러했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일선 지대에서 받은 온갖 굴욕을 기억하게 된다면 정연이 어떻게 될 것인가. 그렇게 되면 더욱 자기가 괴로와질 것이다. 차라리 미친 그 상태에서 버림받지 못한 것이 후회스러워질 것이다. 중서는 다시 기억하지도 생각하지도 말아 주기를 빌었다.
정연이 눈 위에는 언제까지나 초조한 빛이 가시지를 않고 있었다. 정연이는 자주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돌아보고 중서 얼굴을 믿기지가 않는 듯 다시금 다시금 마주 보았다.
중서는 곧 정연이 손을 꼭 붙잡아 주었다. 그리고 정연이에게 자신을 갖게 하기 위하여 두 번 세 번 꼭 움켜 쥐어 주었다.
중서의 두 눈에는 눈물이 핑 돌고 있었다. 중서는 무어라고 이야기를 하려 하였으나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아 정연이 머리 위에 뺨을 묻었다. 병실로 들어선 어머니는 정연이를 보자마자 꽉 껴안으며 눈물을 흘렸다. 어머니 품에 머리를 묻은 정연이는 눈썹 위에도 눈물이 가득히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울음을 머금으며 눈을 감는 순간 그 두 눈썹 밑으로 뜨거운 눈물이 밤을 스치고 길게 흘러내렸다.
정연이의 병세는 날이 갈수록 완쾌에 가까와 가고 있었다. 그 얼굴에는 웃음이 늘 떠돌고 살포시 눈을 내리깔며 던져 주는 눈웃음이 예전처럼 상냥스럽게 중서의 마음을 사로잡아 가고 있었다.
“저는 참 행복스러워요. 이렇게 행복된 순간이 다시 돌아을 줄은 전연 몰랐어요."
정연이 입술은 빨갛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러니까 실망을 하면서도 사람은 살아가는 거죠."
“정말 그런 것도 같아요."
정연이는 또 살포시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러면서도 또 일면 두려워도져요.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정연이의 맑은 시선이 말과 함께 중서의 얼굴 위에서 산뜻 빛났다.
“쓸데없는 생각은 그만둬요. "
중서는 고개를 저으며 말하였다. 정연이는 그러겠다는 듯이 웃어 보였다.
어느덧 초가을이 옅은 주홍색 빛깔을 나뭇잎마다 물들여 가고 있었다. 아침과 오후이면 그들은 정원을 거닐었다. 후원에 우거진 숲 속에는 가을빛이 날마다 싸늘히 짙어 가고 있었다. 그들은 조그만 벤치에 앉아 조용히 가을을 맛보고 있었다. 정연이는 발 밑에 깔린 횐 조약돌을 하나씩 주워 들고 손바닥 위에 고이 쥐어 보고는 즐거워하였다.
“이 차돌이 주는 감각, 이 싸늘한 감각이 가을이요."
정연이는 차돌이 손바닥의 온기로 따스하게 녹아 버리면 살짝 숲 속으로 내어 던지고는 다시 또 하나 주워들고 가을을 음미하고 있었다.
“보세요 한번."
정연이는 중서의 손바닥 위에 차돌을 하나 얹어 주고 손가락을 모아 쥐어 주었다. 차가운 감촉이 정연이 말대로 가을의 미각을 맛보여 주는 것만 같았다.
“그렇죠?"
중서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정연이는 가볍게 웃었다. 그녀는 들었던 돌자갈을 내던지고 손을 털었다. 그리고 흙이 약간 묻은 손바닥을 들여다보다가 곧 오므렸다.
“손금 볼 줄 아세요?"
중서는 모른다고 고개를 저었다. 그는 곧 정연이 손을 자기 손 안에 오므려 쥐었다.
“아녜요."
정연이는 몸을 지그시 중서에게로 쏟아져 오며 웃었다. 여학교 때에도 자주 정연이는 훅 지나가는 말결에 손금 얘기를 하였던 것이었다. 그리고 괜히 우울해지는 것이었다.
“이 손은 지금 내 손 속에 들어 있는데 왜 그런 말을…… 모든 것은 내 손 속에 들어 있는 거예요. 내가 손을 펴지 않는 한……"
중서는 알겠느냐는 듯이 정연이를 잠시 동안 지키며 손을 꼭 한번 쥐어 보였다. 정연이 눈 속에는 삽시간에 기쁨이 가득 차 있었다. 해가 매우 기울어진 듯 엷게 단풍든 나뭇잎들이 더욱 분홍빛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자 인제 일어납시다."
정연이는 어린애처럼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이대로 더 있고 싶어요. 저는 사시사철이 가을이랬으면 좋겠어요. 가을은 참 좋아요. 사람의 온갖 정서를 그대로 있게 해 주어요."
정연이는 서쪽 하늘에 붉게 물들어 가는 놀을 신비스럽게 눈주고 있었다,
이처럼 정연이의 마음은 날이 알수록 신비와 행복에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하나의 위기는 다시금 이토록 행복스러운 마음에 점점 짙은 그늘을 깔아 오고 있었다. 정연이의 심경에도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정연이는 자주 불안스러운 시선을 중서에게 던져 주곤 하였다. 그 얼굴에서는 초조스러운 빛이 잠시도 떠나지를 않고 있었다.
어느 날 정연이가 몹시 괴로와하는 것 같아 중서는 곧 자리에 눕게 하려 하였으나 괜찮다고 무가내였다.
“아녜요. 괜찮아요."
그러나 그 얼굴은 파랗게 질려 있었다.
“곧 의사를 데려오께 누워 있어요."
중서는 아무래도 심상치 않아 조급히 서둘렀다. 그 순간 정연이의 안색은 더욱 파랗게 질렸다. 그 시선은 공포에 떨고 있었다, 그녀는 나가려는 중서의 손을 꼭 붙들고,
“제 곁에 있어 주세요. 가면 안 돼요. 의사는 필요 없어요. 아무 것도 아녜요. "
하고 초조하게 말하는 것이었다.
“저 눕겠어요. 그 대신 제 곁을 떠나지 말아 주세요. 인제는 제게 의사는 필요 없어요. 중
서씨만 있으면 돼요."
중서는 하는 수 없이 침대 곁에 앉아 정연의 이마를 짚어 주고 있었다. 이마에는 식은땀이 촉촉히 배어 나고 있었다.
“암만해도 안 되겠어요. 식은땀이 이렇게 나는데……”
“싫어요.”
정연이는 중서의 손을 꼭 붙들고 놓지 않았다,
그 일이 있은 후부터 정연이는 중서가 병실 문을 열고 들어올 때마다 한 두 마디 주고받은 다음에는 반드시 원장 선생을 만났었느냐고 얼른 지나치는 말처럼 묻곤 하였다. 안 만났다고 하면 마음이 놓이는 듯 곧 웃음을 지어 보이는 것이었으나 항시 그 웃음 뒤에는 불안한 빛이 떠돌고 있었다. 중서는 심상치 않은 정연이의 그러한 태도에서 그녀가 자기에게 무엇인가를 숨기고 있다는 것을 곧 깨달았다.
어느 날 중서는 원장을 만났었다고 일부러 말하였다. 그 순간 정연의 눈언저리를 한 줄기 어둠이 스쳐 갔다.
“그래 뭐라고 하셔요?"
겉으로는 태연스러운 듯한 어조였으나 그 입술 뒤에는 불안한 감정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중서는 대답을 끌기 위하여 담배를 꺼내어 붙여 물었다. 성냥불을 끄고 고개를 들었을 때 초조한 태도로 그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던 정연이는 그의 시선을 피하듯이 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중서는 그녀의 어깨머리가 가볍게 물결치는 것을 보았다.
“아주 건강 상태가 좋아졌다고 하면서 퍽 기뻐하시더군. "
중서는 곧 말을 이렇게 돌렸다. 그는 공연히 그러한 말을 끄집어 냈다고 후회하였다. 그러나 한편 중서의 마음에는 걷힐 길 없는 어둠이 땅거미처럼 그의 마음속을 덮어 가고 있었다. 그는 정연이 옆으로 다가갔다. 정연이는 그에게로 결코 고개를 돌리지 않으려 하고 있었다. 중서는 곧 그녀의 두 뺨 위로 눈물이 소리 없이 흘러내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중서는 더욱 마음이 어두워졌다. 하지만 부드럽게 마음을 진정시키며 입을 열었다,
“왜 또…… 나는 기뻐서 이야기한 것인데……"
중서는 정연이 얼굴을 자기 쪽으로 돌렸다.
“아녜요. 아무 것도."
정연이는 말과 함께 시선을 떨구었다.
“그럼……?"
“………”
정연이는 언제까지나 시선을 떨군 채 다시 들지 않았다.
준은 석유 풍로의 화력을 조종하면서 중서의 말을 듣고 있었다. 슛슛 하고 타오르는 파란 불길 속에 준의 한쪽 눈알은 더욱 기형적으로 번쩍이고 있었다. 말이 끝나서도 준은 아무 대답 없이 커피 잔에 설탕을 따라 넣었다.
“자, 드시지. "
까뭇한 커피 냄새가 훅 코에 스며들어왔다. 중서는 커피를 마시는 것보다도 준의 대답이 더 기다려졌다.
그러나 준은 커피를 후루룩후루룩 마실 뿐 입을 열 기세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제가 알아선 안 될 이야긴가요?"
중서는 다시 물었다. 준은 또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 찻잔을 양손으로 모아 쥐었다.
“일선에 오래 계셨다지요 ? "
“녜"
대답을 하면서도 중서는 준의 얼토당토않은 질문에 도리어 의아하였다.
“전쟁……하면 흔히 청년들의 불행만을 생각하는데 아마 제 생각 같아서는 여자들의 불행
이 더 크게 생각되더군요”
중서는 비로소 이야기의 실마리를 채었다. 그는 준의 다음 이야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준은 입을 다문 채 좀처럼 말을 계속하지 않았다.
중서가 자리에서 일어섰을 때 준은 같이 따라 일어섰다. 문 앞에서 준은 중서 어깨 위에 손을 얹었다. 중서는 준을 돌아보았다.
“정연씨를 사랑해 주시오.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것뿐이요."
중서는 다시 한번 준을 돌아보았다.
정연이는 임신중에 있었다. 이 사실을 알았을 때 중서는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지는 것같이 눈앞이 어지러웠다. 그는 비로소 준이 한 말들이 다시금 뼈저리게 마음속에서 생각켜지는 것이었다.
중서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는 정연이 앞으로 가자마자 그 무릎에 얼굴을 묻고 흑흑 흐느껴 울었다,
“왜 그러세요? 누가 뭐라고 하셨어요?"
중서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왜 우셔요?"
정연이 얼굴에는 불안한 빛이 쭉 깔려 가고 있었다. 중서는 흐느껴 울면서도 자기 어깨 위에 얹은 정연이 손이 몹시 떨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지금 정연이는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모든 것을 다 들었다고 해야 옳은 것일까. 또는 아무 것도 모르는 척 언제까지나 숨기고 있어야 하는 것일까. 중서는 눈물에 젖은 얼굴을 들고 정연이를 치어다보았다. 그 순간 정연이는 피하듯 얼굴을 돌렸다. 그리고 그에게서부터 물러섰다. 정연이는 점점 눈앞에 다가오는 어두운 흑막의 그들을 보았다. 이미 다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정연이는 일어서서 창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 얼굴은 얼음장처럼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정연이의 이러한 태도를 본 중서는 곧 자기의 경솔을 속으로 꾸짖었다. 그는 모든 것을 숨기기로 하였다. 정연이에게 다시금 쓰라린 타격을 주어야 하는 것이 그는 무서웠다.
“정연씨……”
중서는 정연이를 자기에게로 돌이켜 세웠다. 이 얼마나 저주스러운 운명인가? 그러나 그는 모든 것을 잊고 싶었다.
“정연씨, 내가 왜 이렇게 흐느껴 우는지 아시겠어요?"
“네, 알고 있어요."
그 음성은 얼굴처럼 차가왔다. 중서는 고개를 저었다.
“정연씨, 우리는 결혼을 합시다."
“결혼?"
반문과 함께 정연의 눈은 어둡게 빛났다. 중서는 눈짓으로 끄덕이면서 정연이를 자기 품속에 껴안았다. 그러나 정연이 손이 그의 가슴을 강하게 가로막고 있었다. 그녀는 너무도 마음이 격심하게 동요되는 듯 어깨머리를 들컥이고 있었다.
잠시 후 정연이는 중서를 똑바로 지켰다,
“정말이에요 ? "
중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넘어지듯 정연의 몸이 그에게로 다가왔다. 그러나 그의 가슴에 머리를 묻기도 전에 정연이는 다시 몸을 뒤로 비켰다. 그리고 급히 고개를 저었다.
“안 돼요. 안 돼요."
불안에 가득 찬 그 눈에는 금시 눈물이 핑 돌고 있었다. 정연이는 또 고개를 저었다.
“믿어지지 가 않아요. "
그러면서도 정연이는 어느덧 중서에게로 몸을 기대어 가고 있었다.
날이 갈수록 정연의 얼굴은 더욱 창백하게 여위어만 가고 있었다. 그녀의 감정은 자주 심한 변동을 일으키고 중서와 가까이하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중서가 가까이 다가서면 정연이는 슬며시 얼마간의 거리를 두고 퍼했다. 중서도 왜 그러는지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정연이는 자주 자기의 몸을 훔치듯 내려다보곤 하였다. 혹시 자기 몸의 변화가 중서의 눈에 뜨일까 두려워하는 심사가 빤히 들여다보였다. 정연이는 잠시도 안정하지를 못했다. 중서는 몇 번이고 아예 다 말하여 버릴까도 생각했으나 할 수가 없었다. 다만 그는 자기의 성의를 기울임으로써 그의 마음을 알아줄 때가 오기만 기다렸다. 그는 앞으로의 계획 같은 것도 서로 이야기하며 정연이에게 어떠한 자신을 갖게 하려 애썼다. 그러나 정연이 얼굴을 덮고 있는 검은 그늘은 날이 갈수록 더 짙어져만 가고 있었다.
퇴원이 결정되던 날 중서는 집에 들렀다가 전화를 받고 급히 병원으로 달려갔다.
준은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
“아마 자기 자책 때문에 그럴 거요."
병원을 몰래 도망쳐 나가려는 것을 다행히 붙잡았다는 것이었다.
중서는 병실로 올라가면서 복잡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렇다면 정연이는 자기 자책 때문에 모든 것을 버리고 아예 영 어디론가 떠나가 버리려 결심한 것인가? 중서는 모든 것을 이야기하여 버리려고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정연이의 마음을 안정시키려 하였다.
방문이 열리자 정연이는 창가에 서 있다가 급히 몸을 돌렸다, 그리고 중서를 발견하고 곧 창 밖으로 다시 몸을 돌렸다.
중서의 손이 몸에 닿았을 때 정연이는 몸을 후루루 떨었다.
“내일 퇴원합시다."
중서는 나직이 말했다. 정연이는 고개를 저었다.
“싫어요. 저는 퇴원하고 싶지 않아요."
“물론 퇴원하기를 두려워하는 심정은 잘 알고 있어요. 그러나 두려울 것은 하나도 없어요.
우리는 곧 결혼을 해야 해요."
그 순간 정연이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급히 머리를 저었다
“결혼…… 안 돼요. 안 돼요."
“어머니도 이해해 주실 거예요."
정연이는 괴롭다는 듯이 더욱 머리를 흔들었다.
“다 알고 있어요. 두려울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정연이는 고개를 돌리고 중서를 마주 지켰다. 그 시선은 놀라움에 떨고 있었다.
“다 알고 계셨어요? 다……"
떨리는 음성과 함께 눈이 붉게 빛났다.
“하지만 정연씨 ……"
정연이는 침대 쪽으로 몸을 돌렸다.
“아무 말도 아무 말도, 말아 주세요. "
그리고 쓰러지듯 침대에 기대어 가쁘게 어깨를 들먹였다.
“모든 것을 잊어버립시다. 우리는 이제부터 다시 시작되어야 합니다. 어떠한 과거 그것 때
문에 우리들의 미래까지 짓밟아 버릴 수는 없는 겁니다. "
“제발 아무 말도 말아 주세요. 부탁입니다. 무서워요. 무서워요 ! "
정연이는 중서의 몸을 뿌리치면서 급히 몸을 일으키고 문 쪽으로 뛰어나갔다.
“정연이 ! "
중서는 정연이를 제지하려 하였으나 이미 그녀는 방문을 열고 뛰어나가고 있었다.
“정연이 ! "
중서의 눈앞을 한 줄기 어둠이 쏜살같이 스치고 지나갔다. 중서는 급히 정연이 뒤를 쫓았다. 정연이는 긴 복도를 달려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계단 앞에 이르자 그대로 몸을 던지듯 밑으로 떨어졌다. 중서는 눈앞이 아찔했다.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계단 밑으로 굴러 떨어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중서는 정신없이 계단을 뛰어내려갔다. 정연이는 계단 밑에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그 얼굴은 눈물에 얼룩져 싸늘히 빛나고 있었다. 사방에서 병원 사람들이 달려왔다. 중서는 급히 정연이를 안고 모여선 사람들을 헤치면서 응급실로 갔다. 하복부에서 퍼가 철철 흘러내리고 있었다. 정연이 얼굴은 얼음장처럼 차갑게 식어 가고 있었다. 한동안 정연이의 의식은 다시 솟아나는 것 같았으나 곧 흐려지고 말았다
훤히 새벽이 다가 오고 이윽고 창문의 일각이 붉게 물들었다. 중서의 손 속에서 정연의 손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붉게 물들었던 창문의 일각이 점점 이동되면서 일제히 창문 하나 가득히 광선이 맑게 흩어졌다. 어둠이 정연의 얼굴 위에서 한쪽으로 비켜갔다. 정연의 얼굴은 더욱 싸늘히 빛나고 있었다.
중서는 정연이가 있던 병실 침대 밑에서 편지 한 통을 발견하였다. 그것은 정연이가 몰래 병원을 뛰쳐나가려 하였던 그날 중서에게 써 놓은 편지였다.
중서씨
펜을 드니 너무도 한꺼번에 여러 가지 생각이 쏟아져서 무엇부터 써야 할 지 마음을 걷잡을 수가 없습니다. 마지막 떠나는 길에 좋은 소식을 남기고 가야 하는 것이 도리인 줄 알면서도 중서씨의 마음을 괴롭힐 소식을 남기는 것이 몹시 마음이 아픕니다.
일사 후퇴시 어머니를 낯 설은 땅에 묻고 일선 지대를 헤매다……아니 그 이야기는 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중서 씨는 저보다 더 뼈저리게 당하셨겠지만 전쟁이란 참으로 무서운 것이라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다시는 중서 씨를 만나지 못하고 어디선가 영 눈을 감을 것만 같았는데 중서씨를 다시 만날 수 있어서 참으로 기뻤습니다. 저는 잃었던 삶의 길을 다시 찾은 것만 같아 참 행복했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저에게 남긴 상처는 너무도 가혹했습니다. 그리고 그 상처는 다시금 행복되려는 제 눈앞을 무자비하게 가로막아 버리고 말았습니다. 아니 그런 말을 쓰려고 펜을 든 것이 아니었는데 마음이 저도 모르게 헝클어져 버린 것 같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저는 이제 모든 것을 버리고 어머님 곁으로 떠나려 합니다. 그것만이 제게 남은 길인가 합니다. 비관은 터럭끝만큼도 없습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이만 그쳐야 할 것 같습니다.
중서 씨! 중서 씨의 따스한 입김이 제 가슴속에는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저는 행복하였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중서 씨의 이 따스한 입김이 제 가슴에서 식기 전에 중서 씨의 곁에서 떠나고 싶습니다. 영원히 그 따스한 감촉을 간직하면서 저를 위하여 흘려주신 그 눈물을 제 마음속에 담아 두렵니다.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중섭 씨에게도 안부 전하여 주십시오. 끝으로 제가 떠난 다음에 절대로 저를 찾으려 하지 마시기 마랍니다, 저는 어머님 곁에 가서 어머님과 함께 중서씨의 행복을 빌고 있겠습니다.
그럼 안녕히.
이 정연 올림
중서는 정연이의 심정을 알 수 있었다. 정연이는 다시금 자기가, 불행해진 자기가 무서웠던 것이다. 그는 정연이에게 다시금 불행해지지 않는다는 자신을 주지 못했던 자기가 원망스러웠다. 그러나 이미 모든 것은 끝난 것이었다. 중서는 중심을 잃고 무너지듯 침대 위에 쓰러졌다. ‘그러나 전쟁이 저에게 남긴 상처는 너무도 가혹했습니다.' 중서의 귓전에는 이렇게 부르짖으며 울음을 머금는 정연이의 음성이 어디선가 들려 오고 있었다.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려야 했던 정연이…… 중서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정연이는 이제부터 눈앞에 전개될 자기가 두려워서 스스로 자기를 버리고 만 것이다. 중서는 자기 또한 다시금 헤어날 수 없는 어둠 속에 떨어져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여지없이 꺾여 버린 그의 의지와 신념은 흐트러지고 다시 그 위에 무거운 공허만이 떠돌았다. 도대체 나는 이 이상 또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무너져 버린 그의 마음속에는 희뿌연 안개만이 굽이치고 있었다. 그러나 한편 중섭과 준의 얼굴이 그의 마음을 다시금 일으켜 세우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하얀 천으로 덮인 정연의 시체 앞에 주저앉아 소리 내어 울었다. 그 소식을 듣고 중섭이도 달려왔다.
중섭의 검게 탄 얼굴을 보는 순간,
“형님 ! "
하고 중서는 그에게로 마주 나가며 그 품에 쓰러지듯 안겨서 흑흑 흐느껴 울었다. 중서는 햇볕에 곱게 그을린 건강스러운 형님의 얼굴을 통하여 이지러진 자기의 모습을 더욱 뼈저리게 발견하였기 때문이었다.
“중서야 ! "
중섭이도 눈물을 머금으며 동생을 얼싸안았다. 중서는 어린애처럼 형님 가슴팍에 눈물에 젖은 얼굴을 비벼 대었다.
“정연이는 죽었어요. 정연이는……"
중서의 음성은 울음에 젖어 있었다.
“중서야. 그렇다고 낙심할 것은 없어. 정연이는 죽었다만 나를 보렴. 우리는 더 꿋꿋이 살
살아야지."
“형님 ! "
중서의 마음은 다시금 벅차게 물결쳤다. 중서는 울음에 목이 메이면서 형님을 껴안았다. 중섭도 다시금 동생을 꾹 껴안아 가고 있었다.
정연이를 공동 묘지 한 구석지에 묻고 돌아온 날 저녁이었다.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중서와 중섭은 오래간만에 한자리에 모여 앉았다. 모두 다 울음에 눈이 벌겋게 부풀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정연이를 생각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불행히 정연이는 죽었다만 중서야 네 기특한 마음은 언제까지나 정연이 마음속에 살아 있을 것이다. 나는 비로소 아버지로서 보람을 느낀 것 같다. "
이렇게 말하는 아버지의 눈언저리에는 또 눈물이 핑 돌고 있었다. 어머니는 고개를 돌리고 살며시 눈물을 훔쳤다.
“너무 상심하지 말아요. 며칠 푹 쉬는 게 좋을 거야."
형이 중서를 향해 말하였다. 중서는 다시 눈물이 쏟아지는 것 같아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머금었다.
“중섭아 너도 며칠 집에 묵었다 가렴."
어머니가 눈물 머금은 음성으로 말하였다.
“녜."
중섭은 대답하였다.
“이렇게 서로 마주 앉아 보기가 참 생각해 보니 몇 년 만인 것 같구나. 정연이는 우리 곁 을 떠났지만 하여튼 기꺼운 일이다."
아버지 얼굴에는 어떤 새로운 기대가 훅 스쳐 가고 있었다. 어머님이 또 고개를 돌리고 눈물을 훔쳤다. 그들은 정연이의 죽음을 생각하고 서로 눈물을 머금으면서 한편 무너졌던 서로의 마음속에 다시금 찾아온 따스한 입김 같은 것을 느끼며 눈물을 흘려 가고 있었다. 그들은 지금 서로 표시치 않는 속에서 마음과 마음을 주고받으며 진정 눈물짓고 있는 것이었다.
오상원(吳尙源: 1939-1985)
평북 선천 출생. 서울대 불문과 졸업. <동아일보> 기자 역임. 1953년 <극협>의 희곡 현상 모집에 <녹스는 파편>이 당선되고 1954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유예(猶豫)>가 당선되어 등단. 그는 해방 직후의 정치 및 6 25 상황과 관련된 인간 문제를 다루면서 비인간적 현실 극복을 증언하고 희구하는 작품 세계를 보여 준 작가다.
주요 작품으로는 <담배>, <증인>, <모반>, <훈장>, <황선 지대>, <백지의 기록>, <무명>, <산>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