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단편소설2

26. 강설

자한형 2022. 3. 3. 23:28
728x90

강설(降雪) 이제하

 

1

 

일자리를 옳긴 지 열흘쯤이 지났는가 하고 있는데, 또 눈이 내렸다.

, 라는 것은, 달포쯤 전에, 이럭저럭 3년 남짓을 용케도 배겨내던 직장을 뜰 결심으로 심란해하면서 그 반동인지 다 늦게까지 필요도 없는 일에 억지로 매달려 있던 무렵에 벌써 사나흘 간격으로 서너 차례나 눈이 왔던 터여서, 그 기억이 무슨 얼룩처럼 마음 한구석에 여직도 늘어붙어 있었던 모양이다. 버스바닥으로 질척질척 구정물이라도 괴어 오르는 느낌 속에서 나는 멍하니 차창 밖을 내다보았다.

여일한 콩나물시루의 찻속은 불나간 한증막처럼 차라리 후텁지근하고, '신이 그린 사회파 리얼리즘 풍의, 마디를 특히 강조한 그 흡사한 손들이 허공의 버스 손잡이에 무수히, 결사적으로들 매달려 있다,

그 너머로 횐 굵은 빗줄기처럼 거침없이 죽죽 내리는 눈발은, 오래 보고 있으려니 왠지 아래서부터 위쪽으로 갈퀴질을 하며 그어져 올라가는 무수한 세선(細線)의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텅 빈 바다 한복판의 그 공허한 하나의 소실(消失) ()으로 눈치도 보지 않고 가차없이 사라지고 있는 선(),,,,,, 눈을 축복으로 받아들이던 시대는 이제 끝났단 말인가,,,,,, 막연한 그런 상념에 짓눌리면서 사람의 냄새를 되도록 빨리 삼켜 버리려고, 나는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조 부장이 기어이 만나야겠다고 '바보'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우울한 출근길의 연장인 듯이 편집실에 들어서자마자 번역 담당의 김 선생이 곁으로 오면서 낮은 소리로 그런 전갈을 해 왔다. 교정, 편집, 레이아웃 담당의 네댓 명밖에 안 되는 사람들이 그와 함께 외면하듯 고개들을 숙여 버리고 있다. '기어이'란 말 속에 들어 있는 묘한 느낌을 뒤늦게 깨닫고, 자리에 앉자 나는 담배를 꺼내 물었다.

당신이 뭔데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거요 - 설마 노골적인 그런 항의의 기미 같은 것이 전해져 왔다는 것은 아니었지만, 뭐랄까 평정하달 수는 없는 감정의 앙분한 찌꺼기 같은 것이 희미하게나마 분명히 그 어조 속에는 들어 있어서, 우울이 겹치는 심사로 나는 고개를 돌렸다. 가늘어진 눈발 대신 바람이라도 이는 모양인지 창 너머, 돌비늘 같은 설편(雪片)들이 때로 회오리치듯 유리를 때리며 을씨년스레 흩날리고 있다. 조 부장은 보름 전까지도 이 방의 책임자로 있었던 사람이다. 월간부에서 소년 잡지 편집을 맡고 있던 그가 이 작은 방으로 넘어올 때 한 파트를 함께 차출해 왔던 터여서, 길든 짧든 잡지 일을 같이 해 왔던 그들이 같은 호흡의 유대감을 갖고 있는 것은 당연하다.

제판(製版)까지 끝난 일이 책임자가 없어 달포째 겉돌고 있다 - H신문에 있는 T선생의 호의에 겨운 그런 알선을 액면대로 받아들였다는 것은 아니었지만, 들어와 놓고 보니 불과 대엿새 전에, 그것도 해고라는 형식으로 자리가 비어 있었던 것이다. 첫날, 인사들을 치를 때 편집진들이 왠지 이쪽을 보지 않으려는 눈치들 같아서 이상하게 생각했는데, 나이 든 김 선생만은 그래도 보기에 딱했던지 퇴근길에 차를 마시면서 그간의 자초지종을 대강 설명해 줬다.

(어린이 세계 명작 만화 전집) 100- 2년의 기간을 두고 파트가 해내야 할 일은 그것이었다. 3개월 간격으로 한 세트 20권씩이 완간되고 사이에 낀 여분의 2개월씩이 검토, 보완 선전 기간으로 할당됐다. 그러니까 한 해에 50권을 목표로 차질을 감안해서 약간씩 신축성을 둔 셈이다.

(다람쥐 세트) 20권의 첫 일이 착수된 것은 3개월 전으로 20명의 만화가가 선정되고 출판부 쪽에서 기왕에 완간돼 있던 (소년소녀 세계 문학전집) 전 백 권 중의 한 권씩이 텍스트로 주어졌다. 권당 3백 페이지, 원고 제작기간 2개월, 제판 인쇄 제본 I개월. 첫 세트는 만화가 한 사람이 휴식 없이 매일 3내지 4페이지씩은 그려내야 하는 셈이 된다. 강행군이긴 하지만 역량 있는 작가라면 못해낼 것도 없다. 화료는 권당 3백만 원으로 책정이 됐으나 선진국의 그것을 운운할 계제가 못 될 바에야 그 반도 안 되는 통례적인 화료에 비하면 사뭇 후하다고 할 수밖에는 없다. 20권의 원고가 모두 들어온 것은 두 달이 좀 넘었을 무렵으로, 화료가 일시불로 지불됐다. 그때까지 월간부에서 잡지 일을 계속 보고 있던 사람들이 신임 편집진과 교체되면서 비로소 팀이 짜졌다.

들통이 난 것은 그 10여 일 뒤다.

사장을 따라 방에 들어 왔던 대학 교수 한 분이 응접소파 탁자 위에 쌓여 있던 제판의 '스리'(수정용으로 먼저 나오는 인쇄 원고)를 집어들고 무심히 봤다.

"이건 왕년의 '아사떼''사자에'상이 아닌가, '산와리'군도 있군."

인쇄지를 한 장씩 들고 보던 교수의 얼굴이 일그러지면서 노성이 터져 나왔다.

"한국 놈들 대가리에서 이런 흉내 말고 또 뭐가 나올 수 있다는 말이냐?"

한탄하는 어조였다면 또 모른다. 표정이 하얘진 교수가 탁자까지 주먹으로 내리쳤고, 그림들이 바닥에 흩어졌다.

"난 가네."

교수가 휭하니 밖으로 나가면서 말했다.

"내 이름 빼."

그는 모 명문대의 과장 교수였다. 이름을 배라는 것은 물론 편집 위원에서 제외시켜 달라는 뜻이었다. 제작부터 시작해놓고 편집 위원이 선정되는 통례와는 달리 이 기획은 웬일로 열 명의 편집 위원이 먼저 확정된 채 1년여의 공백기까지 두었다는 것이어서 제작의 중요성이나 면밀함이 그것만으로도 입증되는 일이었는지는 몰라도 어쨌든 이것 역시 파격이었다고 할 수밖에는 없다. 원로, 인기 작가 각 한사람, 미대(美大) 학장과 유명 화가 한 사람, 방송국 사장, 텔리비전의 어린이프로 개그맨 한 사람, 컬럼니스트로 알려진 소비자 보호 협회의 주부 대표, 대학의 과장으로 있는 교수 둘,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장 자신의 이름이 들어 있었다. 창창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진용이었으나 자사(自社) 책에 사장의 이름이 들어 있는 것도 그렇고, 처음 그걸 보았을 때 나는 어딘가 묘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판매를 감안한 배려라고 해도, 구색이 허전하기는 마찬가지다. 이를테면 당연히 한 사람쯤은 들어가야 할 원로 만화가의 이름도 없고, 국민학교장이거나 어린이 도서관장의 이름 같은 것도 없다. 하긴 편집 위원의 이름쯤이야 의례적인 것이어서 대수로운 일이 못 될지 모른다. 사장은 아마 평소의 교분을 바탕으로 최상의 멤버를 골랐을 것이다.

그 교수가 입에 올린 아사떼 군이니 사자에 상이니 하는 인물들은 물론 일본 일간지의 연재만화 주인공들이다. 교수가 나가고 한참 뒤까지 어리벙벙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사장의 히스테리가 드디어 발작했다.

"고료는 나갔어?"

안면 근육을 경련시키면서 사장이 중얼댔다.

스스로 결재 도장을 찍었고, 화료만도 한 장(1)이 나갔다고 자랑삼아 뇌어오던 사장은 어딘가 얼이 빠진 것 같았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던 모양이다. 책을 가져오라고 사장은 소리쳤다. 사장이 손수 일본서 들여왔던 참고용 주간, 월간지들이 한아름씩 방으로 날라지고, 모두들 덤벼들어 원고와 그것을 일일이 대조하는 작업이 세 시간여나 계속됐다. 아사떼 군 사자에 상 정도가 아니었다. 만화에 등장하는 동물이나 다른 인물들은 그렇다 쳐도, 주인공의 모습만은 유사한 데가 없기를 확인하는 작업이었지만, 거의 전부가 그것에 오염이 돼 있었던 것이다, 눈망울을 정도 이상으로 크게 그리고 단에다 반짝이는 점을 찍어 넣는 이른바 순정(純情) 극화(劇畫)류의 백설공주나 난장이들의 유형뿐만이 아니고 삼총사나 조로에 나오는 자객의 모습은 검은 두건으로 입을 싸맨 닌자의 모습 그대로였으며, 소공자나 쿠오레가 만화화 된 그 주인공들도 의상만 다르게 입혔을 뿐 인기만화 주인공의 낯짝을 그대로 빼다 박은 꼴이었다. 필체가 분명히 서로 다른 20명이나 되는 만화가가 이럴 수가,,,,,, 싶었으나, '!'이니 '?'이니 하는 대사 부호에 나오는 감탄사까지가 그대로다.

"정도 이상으로 성이 나면 사장은 비죽비죽 웃는 성질이 있어요. 소파에 엉덩방아를 찧은 채 그렇게 비죽대고 한참 웃던 사장이 당장 나가라고 그제야 고래고래 소릴 지르기 시작합디다. 조 부장이 맞섰죠. 윌간부에서 여태 해 온 만화잡지가 그런 식으로 울궈 먹고 재미를 봐 온 게 사실인데 무슨 소리냐, 판매 부수 톱을 자랑삼는 우리 잡지가 알톨 같은 필진 덕이라고 큰소리쳐 온 게 누구냐, 그 베테랑들을 선발한 것밖에 내게는 책임이 없다, 기왕에 화료까지 다 나갔으니 어쩔 수 없지 않으냐 - 고 말이죠. 그게 화를 더 부채질 한 것 같아요. 사장이 껍벅 넘어가더니 조 부장의 따귀를 친 거예요. 사람들 보는 앞에서 말입니다. 조 부장이 짐을 꾸립디다. 하지만 그걸루 해결이 나나요?"

말을 끝낸 김 선생이 살피듯이 내 얼굴을 봤다. 그러니까 조 부장은 지금 완전히 퇴사를 한 게 아니다, 당신 입장이 묘하게 됐다 - 그런 표정 같았다.

"어딘지 이상하네요. 월간부에서 그 만화 잡지 지령을 보니까 삼십 몇 호까지 나갔던데,,,,,, 사장은 그럼 3년 동안이나 자기 잡지 필진들이 왜놈 주인공 그대로 베낀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습니까?"

"무슨 소리,"

김 선생이 펄쩍 뛰었다.

"가랭이가 찢어지게 바쁜 몸이긴 해도 빈틈이 없는 양반예요. 새 만화가 양성이 시급하다고 하면서 창간 당시 신인 만화가들까지 선발을 했어요. 그 사람들을 모아놓고 직접 브리핑까지 했죠. 왜놈 잡지들을 펼쳐놓고 말이죠. 이런 형의 주인공 재미있지 않으냐, 이런 이야기는 어떠냐 하면서 말예요. 사주나 다름없었죠. 그 풋나기 만화가들이야 어쨌든 고정 필진이 되려고 아첨을 한 건 당연하고--- 본 기업인 전자 제품이 그쪽과 기술 제휴가 돼 있어서 일본을 제집 뜨나들 듯하죠."

"그렇다면 엔간히 하고 넘어갔을 텐테---, 왜 그렇게 훌떡 뒤집혔죠? 그 교수분한테 사실이 발각됐기 때문인가요?"

"한마디로 자존심이 까뭉개진 거지."

김 선생의 입가에 비웃음이 어렸다.

"잘은 모르지만, 교수하곤 아마 아주 까다로운 라이벌 비슷한 관계예요. 들켰다는 사실이 속을 짓밟아논 거야. 더구나 처음부터 싫다는 걸 억지로 간청해서 편집 위원에다 끌어넣기까지 한 눈치였거든. 기업인이자 동시에 고고한 선비로 자처하고 있어요 사장은."

"선비요?"

"사장 수필 쓰는 줄 모르슈? 책이 두 권이나 돼요. 읽다 말아서 수준이야 어느 정돈지는 모르지만,,,,,, 좋은 수필 세 편만 얻는다면 이까짓 기업체 다 때려치워도 좋다 - 노상 입버릇처럼 뇌는 게 그 소리키. 갸륵하지 않우? 교수하고도 그 방면의 라이벌이지 아마?”

한 편두 아니고 세 편이란 말에 기묘한 뉘앙스가 풍기지 않습니까? 좋은 수필 세 편이라,,,,,, 씨도 안 먹히는 거짓말을,,,, ,, 어처구니가 없어,

"장삿속 들통나 상한 자존심을 그 알량한 수필가로서의 선비정신이 상처받았다고 착각한 거야. 사원들을 짐승 부리듯 후려먹는 주제에 무슨 얼어죽을 선비고 수필가야?"

흥분했는지 김 선생의 어성이 높아졌다. 사장과 동년배쯤으로 보이는 이 김 선생이 회사와 어떤 고용 관계인지는 짐작이 가지 않았다. 번역이라고는 해도 주로 일본어의 그것일 것이다. 그렇다면 사장의 대학 동문쯤이라도 되는지 모른다.

조 부장은 카페 '바보'의 예의 그 구석 자리에서 빤히 이쪽을 보고 앉아 있었다. 이걸로 세 번째 만나는 셈이었으나, 입사 이튿날 처음 대면했을 때도 같은 자리에서 그는 흘기듯이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던 것이어서, 저절로 시선이 비켜졌다. 자격지심으로 꿀리는 느낌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어도, 아무튼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별 경우를 겪고 보기도 했지만, 틈바구니에 꽉 긴 듯한 이런 곤혹감은 처음이었던 것도 사실이다. 나 아직 사표 쓰지 않았소, 당신이 도로 물러나시오 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나온다면 차라리 대처하기가 편할 것 같았다.

"어쩌고들 있습니까? 무슨 대안이라도 나왔습니까?"

수인사 뒤에, 노려보던 기세와는 달리 의외로 그가 부드러운 말로 입을 뗐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대안이라면 6천만 원이나 나가 버린 고료를 보상하는 방법과 공친 두 달이라는 기간을 어떤 식으로 까뭉개느냐 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생각할 겨를이 있을 리 없어 잠자코 있었더니, 주스를 훌쩍 들이키고 조 부장이 말했다.

"그것들은 안 됩니다. 새 사람들을 쓰세요."

조 부장이 '그것들'이라고 부르는 것이 그 20명의 만화가들이라는 것을 한참 만에야 나는 깨달았다.

"그런 거금을 사장이 다시 고료로 내놓으려 하지 않을 텐데요, 그 사람들이 새로 그리려 들지 않을 거란 말씀인가요, 못 쓴다는 것은?"

"그깟 6천이 사장에게 돈입니까. 지독한 구두쇠긴 하지만 쥐어짜야죠. 만화 그리는 치들은 거기서 손이 굳다시피 한 햇병아리들예요. 한번 굳어 버린 손은 풀리지 않습니다. 새로 그리라고 해 봐야 그게 그거죠. 기초가 없단 말입니다. 데생력들을 갖추고 있지 않아요."

그것은 어렴풋이 나도 깨닫고 있었던 우려였다. 사장이 일본 잡지를 펼쳐놓고 신인 만화가들을 브리핑했다고 들었을 때, 그리고 3년 동안이나 그쪽 만화 주인공들이 유형화돼서 여일하게 재미를 봐 왔다는 것을 알았을 때 저도 모르게 느꼈던 의아심이기도 하다.

대체로 선()에 자신이 있는 만화가는 아무리 처음에 남의 흉내를 냈더라도, 지적 당하거나 자각에 의해 조금씩 변형돼서 저 나름의 독특한 주인공으로 변모하게 마련이다. 아이들 잡지를 편집해 온 10여 년 동안에 재미가 있었다면 그런 것을 깨닫는 것도 그 하나였을 것이다. '짱바우''청개구리'니 이미 확고한 자기 분신이 돼 버린 원로 만화가의 그것을 예로 들지 앉더라도, 몇몇 사람들은 훌륭한 그런 자기 분신들을 갖고 있다,

풍자와 해학의 심도가 어느 수준이든 간에 그것은 만화가가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요건이다. 자신 없는 선이 그대로 굳어 버리면 대책이 서지를 않는 것이다. 김 선생에게서 사정을 듣고 혹시나 하고 서점에 들러 딴 데서 나오는 때들 잡지들을 들춰본 적이 있다. 3년 동안에 그들은 인기만화가들이 이미 돼 버려서 여기저기 원고들을 팔고 있었으나, 그 얼굴이 그 얼굴의 주인공들이었다. 의상만 바뀌었을 뿐이다. 날품팔이 직업으로 아예 치부해 버리고 공부조차 포기해 버린 것이 분명했다.

"다시 그리라고 윽박질러봤자 호락호락 응하지도 않을 거구,,,,”

……

"새 멤버를 짜라고 설득을 시키세요. 요행히 다음 세트는 아직 인선이 안 됐어요."

"김 선생이란 분은 사장과 친구지간인가요?"

물러나라는 소리는 못 하고 이런 지시조의 이야기만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 차마 그것을 바로 물어보지 못하고 나는 딴 얘기를 꺼냈다.

"아첨꾼에다 감시 역이죠. 이중 스파이라고나 할까,,,,,, 이쪽 저쪽에다 다리를 걸치구 있어요. 조심하세요. 사장 고교선뱁니다."

"주로 일어 번역이겠죠?"

"교열 자문 비슷하죠. 스파이 역이라니까요. 일본어는 사장이 더 잘합니다."

두 번째 대면했을 때야 조 부장의 거취를 물어 볼 용기가 비로소 생겼다. 물러서지 않겠다면 이쪽에서 작파하고 새 일자리를 속히 찾아야 할 형편이기도 했다. 그는 펄쩍 뛰었다.

"아무리 얼굴에 철판을 깔았기로서니 아무 것도 모르고 들어온 서형을 내가 몰아내요? 따귀까지 맞았는데 밸이 없는 놈으로 보입니까 제가? 서형이 나가면 딴 사람 들여앉히겠죠. 그냥 계세요. 나는 나대로 끝가지 싸울 테니,,,,,,"

무슨 요량인지 짐작이 가지 않아 우두커니 나는 그를 보았다.

"허구 많은 다방을 두고 왜 하필 내가 이 '바보'에서 서형을 만나고 있는 줄 아십니까, 바보가 되기루 작심했기 때문예요. 사람 인권 이렇게 묵사발 만든 자식을 그냥 둘 수 없어요. 끝까지 싸웁니다---”

어이없다기보다, 갈수록 진퇴양난인 것 같아서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날은 주로 비분강개한 어조의 회사 험구를 듣다 일어섰으나 그의 일에 관여 않기로 나는 마음을 굳혔다. 회사가 국내 4대 전자 제품 메이커의 하나로 부상하기가지 어떤 술수와 모략이 있어 왔는가 하는 얘기도 험구 속에는 들어 있다. 신빙성 없는 피상적인 얘기긴 했으나, 그가 얼마나 사장을 미워하고 있는가 하는 실감은 왔다.

머리회전이 빠르고 두뇌가 비상한 천재 장사꾼임을 전제로, 조 부장은 주로 사장의 '인간 됨됨이'를 공박했다. '나보다 한 살밖에 더 먹지 않은 새끼가' 하는 말투 속에는 적개심이 역력했다. 그런 천재가 별 볼일 없는 출판에 왜 손을 대기 시작했는가고 물었을 때 조 부장의 대답은 김 선생의 관점과는 달랐다. 그는 '조직'을 우선 들먹였다. 대리점이나 전자 제품의 방대한 외판 조직을 잡지 판매에 시험적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끼워 팔기, 덤핑 같은 방법이 상호 지원으로 맞아떨어지고 있다는 것인데, 그렇더라도, 영리는 별도로 먹혀들지 않으면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여성지 인수 준비까지 하구 있어요. 지금은 애들 잡지하고 시시한 수필지 하나, 엉터리 단행본 종류지만 두고 보세요. 멀잖아 출판계를 통째 먹으려 들 거예요."

두어 번으로 친숙감이 생겨서인지 오늘은 마주앉자 꼿꼿한 눈길을 거둔 조 부장이 웃음을 보였다. 그가 웃는 것을 보기는 처음이다. 뛰어야 벼룩이라고, 출판계의 자리이동이란 뜨내기 직업답게 거기서 거기가 보통인데, 이 조 부장은 그 동안 왜 지면이 없었을까 하고 이상 한 생각이 나는 들었다.

"김 선생 보거든 내용 증명 보낼 절차 밟구 있다고만 전해 주쇼.

"내용 증명이요?"

"법정 투쟁으로 밀고 가야죠. 부당 해고 보상을 어떤 식으루 치뤄야 하는지 본때를 보여 줘야겠어요."

그게 가망 있는 일일까 하다가, 나는 생각을 멈춰 버렸다. 그 말뿐으로, 이쪽에서 시켜놓은 차 따위는 아랑곳 않고 자리를 차듯이 그는 일어섰다

 

2

 

호텔 식당에서 T선생 소개로 처음 인사를 했을 때, 사장의 인상은 어딘가 깡마른 듯한 그런 것이었다. 골똘히 이쪽을 쏘아본달 것까지는 없어도 언뜻 시선이 마주칠 때는 그 비슷한 느낌을 나는 받았다.

전체적으로 애늙은이 같은 풍모긴 했으나, 오십이 채 못 된 나이에 그 정도의 기업을 자수성가하다시피 장악했다는 걸로 미루어 보면 남다른 노심초사가 있었을 것은 당연하다. 4대 메이커 운운해도, 방계 사업들을 여럿 벌이고 있는 것도 아니고 단일 업종의 그것인 눈치여서 말하자면 성공한 중소 기업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일을 맡기기 전에 상대를 탐색하는 과정은, 더구나 이력서 제출이 생략된 그런 과정은 기업주로서는 당연한 노릇이고 한두 번 겪는 일도 아니어서 태연한 체는 하고 있었으나, 결과 여부를 떠나서라도, 실상 그런 순간이 당사자에게는 가장 곤욕스럽기는 마찬가지다. 불유쾌하다는 정도를 넘어서 때로 그것은 생리적인 거부반응까지도 일으킨다. 소개한 사람의 신임을 담보로, 그것도 비교적 후한 조건과 대우의 일자릴수록 술자리거나 점심을 빙자한 그런 사전탐색은 집요하고 악랄한 구석까지 있다.

사장의 눈초리에서 받은 그 같은 예감은 기우였을까. T선생은 싱글벙글하면서 뷔페 음식을 부지런히 날라다 먹고 있었으나, 사장도 나도 야채류 한 접시만으로 포크를 놓아 버리고 있었다. 단 둘이 대좌할 때는 외면하듯이 창 밖을 물끄러미 보고 있는 것도 사장의 예의 독특한 버릇인 것 같았다. 그런 자세로 있다가 T선생이 새 음식 접시를 들고 돌아오자 사장은, 저번 일자리를 왜 그만뒀는가고 물었다.

애매한 대답밖에 나을 것이 없어 망설이다가 비교적 사실에 가까운 감정을 실토하는 기분으로, 권태 때문이라고 나는 대답했다.

사장의 눈이 번쩍이듯이 잠깐 열리다 닫혔다.

"권태? 일이 재미 없었다는 얘깁니까?"

"어른들이나 보는 애들 잡지가 재미있을 리 없죠. 이쪽은 또 중구난방으로 난장판이어서 천덕스럽긴 했습니다만. 서점에서 봤어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내뱉은 말이었으나, 자기 회사 잡지 욕을 좋아할 사람이란 없다. 사장의 눈이 두 번째로 열리다 닫혔다.

내가 편집하고 있었던 것은 가톨릭 산하의 어느 단체가 내고 있던 어린이 잡지였다. 30년대 풍의 근엄한 교훈조 동화거나 교리용 소년 소설 . 동시 등이 주 내용으로 만화도 1할 가량 페이지를 할당받고 있었으나 표현 한계가 자연히 제한돼 있었다. 종교단체 산하의 눈에 보이지 않는 그런 제약은 편집장의 재량이 미-못하는 영역이다. 요량껏 그 한계를 벗어나려 했다가 사소한 트러블 같은 것도 몇 번인가 있었고 결국 그런 일들이 내게 권태를 몰고 왔었다. 시중 만화잡지가 아무리 앞이 아찔할 정도로 저속한 그런 것이라 해도 거기에는 아이

들의 생생한 법석거림이 있다. 설교하는 어른보다는 쌍욕하는 애들 쪽이 사랑스럽지 않은가- 내 대답은 그런 뜻으로 들렸을지 모른다. 호감을 주었다면 그것이었을 것이다. 더 이상 탐색하는 질문도 없이 T선생에게 사장은 결정의 뜻을 말했다.

"서형께 맡기려는 것은 잡지보다 훨씬 중요한 일예요. 단순한 '망가'가 아니라 이건 제 양심을 걸구 벌이는 일입니다......"

"서형께 맡기려는 것은 잡지보다 훨씬 중요한 일예요. 단순한 '망가'가 아니라 이건 제 앙심을 걸구 벌이는 일입니다,,,,,,"

그러면서, 헤어지기 전에 사장이 손을 꽉 잡던 기억이 남아 있다. 의례적인 손아귀 힘이 아니어서 웬일인가 싶었는데, 결국 일이 이 지경이 돼 버린 것이다.

건물 이층 중앙에 있는 사장실에서 고함치는 소리가 쩌렁쩌렁 울려오고 있다. 광고, 경영직 사원 50여 명쯤이 그 곁방에서 사무를 보고 있는 이 건물의 일층이나 여타의 공간은 창고 비슷이 대부분 회사 기자재나 제품으로 채워져 있어, 출판부는 버려진 듯이 가장 끝머리 부분의 방 세 개를 차지하고 있을 뿐이었으나, 고함소리가 들리기는 마찬가지다. '사원들을 짐승 부리듯' 한다는 김 선생의 말마따나 이틀에 한번 꼴로 그 고함소리는 들려 왔다. 인천 쪽에 있는 공장에서 온 근로자 대표인 듯한 사원이 맞지르는 고함이 그 새 두어 번 섞여 들렸으나 그것도 사장의 기세에는 녹아 없어져 버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사나흘씩 찍소리 없을 때도 있지만, 포효에 가깝다고 할 수밖에 없는 사장의 그런 일과가 출판부 쪽에 얼굴을 내밀 때는 갑자기 유순해져 버리는 것은 기이한 일이었다.

대책을 의논하며 김 선생과 함께 처음 사장실에 불려 갔던 날, 그는 일명(逸名) 고화(古畵) 족자 하나를 벽에 걸어놓고 머리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곁에는 신문, 잡지 등에서 낯이 익은 영문학 교수 한 사람이 빙긋거리고 있었는데, 둘 다 들뜬 표정들이었다.

"단원이라고 우기고 있는데 알면서도 내가 속는 거지, 아마?"

마주 웃으면서 사장이 말했다. 일명회화는 낙관이 없는 그림이다.

족자는 금강산의 일부를 그린 것인 듯했다.

"난두 그런 생각이 들기는 해. 하지만 필세는 예사가 아닌 것 같군."

교수가 맞장구쳤다.

"반으로 때려 잡아보지 한번?"

"? 3분의 1이면 되지 무슨 반야."

교수가 애매한 웃음을 띠고 머리를 긁듯이 글쎄----했다. 아마 그림 소개를 그가 주선하고 있는 눈치 같았다.

"생각 좀 해 보셨어요 서형?"

여전히 그림을 기웃거리면서 딴전 피듯이 사장이 중얼거렸다.

"세 가지 방법밖에는 없어,,,,,"

김 선생이 입을 열었다. 그것은 방에서 모두 같이 숙의가 된 대책이기도 해서 사장의 선택 여부에 달려 있는 일이었다.

"김 선배님은 쌍지팡이 짚지 말고 서형이,~1

사장에 대한 김 선생의 험구는 아마 이런 식의 경우가 쌓인 결과였으리라. 머쓱해하지도 않고 김 선생이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뾰족한 대책이 있을 리 없었다. 6천만 원과 두 달이라는 기간을 제로로 돌려버리고 새 팀을 짜는 것과, 먼저 팀을 다시 그리게 하는 방법과, 다시 그리되 다음 세트 팀을 앞으로 당기고 첫 세트만 화가들이 자기류의 역량을 정비할 충분한 여유를 주는 방법--- 그들의 설득 문제나 공짜로 나간 화료 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어느 쪽을 택하든 두 달이라는 시간적 공백은 상쇄시킬 도리가 없었다. 방마다 액자에 넣어져 걸린 '시간은 금이다'라는 진부하고 단순하기 짝이 없는 사시도 이 일에는 먹혀들지가 않아---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첫 번째나 세 번째 방법을 권했다.

"좋은 생각이긴 한데 근본적인 문제를 놓치고 있어요, 서형은--- 스무 명이나 되는 인재들이 폐품이 돼도 좋다는 거요? 모르고 왜색물이 들었다 해서 그 사람들을 내몰라라 하면, 사회 오염은 누가 책임집니까7"

……"

"둘째 번 방법으로 하세요. 보름이면 됩니다."

"무릴 텐데요. 체질개선이 문제라면 충분한 여유를 줘야 합니다."

기능공이 라도 불가능한 일인데,,,,,, 그 사람들은 작가들예요."

"작가? 글쎄, 하면 된다니까요. 여기서 큰 사람들이 아닌가. 다시 그리게 해."

눈꺼풀이 열리고 예의 번쩍이듯한 시선이 사장은 되어 있었다. 광기라고 해도, 이런 식의 것은 처음이어서 나는 말문이 막혔다. 일본 잡지를 울궈먹다 갑자기 사회오염 운운하는 적반하장은 그렇다 쳐도, 억지를 쓸 바에야 왜색이든 뭐든 불도저식으로 그냥 밀어붙이려는 생각은 왜 처음부터 염두에도 없었던 것일까 하는 해괴한 생각마저 들었다. 라이벌 교수에게 무안을 당했다 해서 이런 기세의 사장이 타격을 받고 각성한다는 것은 도대체 믿을 수 없고 우스운 일이었다.

"가만 있자, 인쇄 제본 기간이 한 달 정도도 남지 않았잖아. 이 기간의 보름을 그쪽으로 돌려드리죠. 그래도 한 달쯤은 차질이 납니다. 또 다른 차질 없도록 해 주쇼."

방으로 돌아오자, 바로 이틀 전에 정식으로 이력서를 낸 것을 후회하면서 나는 사표를 썼다. 입사 일 주일만에 자퇴를 하는 셈이었다.

어처구니없다기보다는, 질려 버렸다는 감정이 차라리 옳을지 모른다. 눈치를 살피다가 자청해서 그것을 빼앗아들고 사장실로 갔던 김 선생이 한참만에 어정쩡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관두더라도 며칠이나 후에 그러라고 하시는구먼."

갑자기 경어로 바뀌어 버린 사장에의 말투가 계면쩍지도 않은지 김 선생은 영문을 몰라 쳐다보고 있는 내게,

"직접 본때를 보여 주시겠대."

했다.

20명의 만화가를 소집하는 요란한 전화들이 가기 시작했다. 내일 저녁때 회사에서 회식이 있다, 와야 한다 - 그런 간단한 내용이었으나 영문을 알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다음날 저녁때 그 20명이 하나도 빠짐없이 모였다. 마감원고 때문에 안 된다, 양해해달라고 버티던 몇몇 작가들까지 결국 왔다. 시킨 요리와 시중 드는 여자들이 들어오기 한 시간쯤 전에 사장은 그 동안의 경과와 차질을 간단히 요약했다. 출판부 전 직원의 회식이어서 드넓은 방이 - 꼭 찬 느낌이었으나 잡담 한마디 들리지 않는 분위기였다.

인쇄 원고와 일본 잡지들을 만화가들 쪽으로 돌리면서 사장은 그 그림들의 어디가 표절인가를 내게 지적시켰다. 그 다음 거의 새 팀으로 들어온 월간지의 편집장을 일으켜 세워 왜 인기 연재물들을 부득이 곧 중단시킬 수밖에 없는가를 다시 설명하게 했다. 창피하다, 이건

모두가 자기 잘못 때문이라고 사장은 말했다. 그러면서 인수할 여성지 얘기며, 이 전집의 판매전망 여하에 따라 화료 폭이 어느 선으로 인상된다는 얘기를 분명히 했다. 책은 당신들이 만든다, 나는 경비를 댈 뿐이라는 점을 사장은 강조했다. 다시 그리라는 얘기는 그 다음에야 나왔다. 내일부터 보름 동안 이 방에 스무 개의 책상을 넣는다. 경우에 따라서는 철야도 강행한다. 식사도 여기서 한다. 응하고 안 하고는 당신들 자유다,,,,,,

동요라고는 할 수 없어도, 음식과 술이 돌면서 만화가들 새에 불만의 수런거림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싸구려 만화가든 뭐든, 작가라는 것은 일종 완전주의자를 꿈꾸는 무리들이다. 당연한 일도 눈꼽만큼 간섭받는다거나 억지나 협박의 기미가 느껴지면 그들은 흥분해서 물 불을 못 가리고 덤빈다. 모두 작파하려 드는 것이다. 적어도 내가 여태 보아 온 작가들의 공통된 속성은 그랬다,

양보나 타협이 될 일도 자신들의 자존심의 뒤틀린 변형이나마 내세워 으시댄 뒤에나 그것은 가능했다. 술이 취하자 비꼬면서 사장에게 대드는 언사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듣기 좋은 소리로 그럴 듯하게 까벌리긴 하는데 실은 돈나간 게 배 아파서 그러는 것 아니냐. 딴 데서는 찍소리 없는데 왜 여기서만 짓짜를 붙는가. 표절 표절 하지만 이게 어디가 왜색이고 흉내인가. 당신 잡지 아니면 원고 팔아먹을 데가 없는 줄 아느냐- 한 번 그린 원고는 죽어도 손 못 대,,,,,,

그랬긴 했어도, 도구들을 꾸려들고 출근하듯이 이번에도 하나 빠짐없이 나온 20명의 작가들이 이튿날 아침, 책상과 의자가 새로 놓인 그 방에 우줄우줄 들어갔다. 짜장면, 설렁탕이나 김치찌개가 점심 저력으로 배달되고, 밤 열 시 무렵까지 작업이 강행됐다. 그런 일은 불가능한 것도 없다. 제멋대로임을 자처하고, 진필중에는 사소한 잡음에도 신경이 곤두서서 히스테리가 예사인, 갋을 도리 없는 소위 개성파 작가들이 한 울타리 안에 몰아넣어졌을 때 문제가 되는 것은 결과이다. 더구나 남의 눈을 지독히도 꺼리는 그들이 거기서 해야 할 일이란 굳어 버린 제 손을 갈아 끼우는 작업이다. 이미 되어 있는 원고의 그림만 바꾸는 간단한 일일지는 모르지만 그것은 원형을 뜯어고치는, 다시 말하면 제 심장을 제 손으로 바꾸어 넣는 격이기도 해서, 이건 도저히 가망 없어 - 그렇게 생각하고 단념하고 있었던 것인데, 변고가 일어났던 것이다.

사흘째, 그 방에 들러 한 장씩 빠지는 원고들을 곁눈질하던 나는 이거면 되겠다 하는 결론을 내렸다.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새 그림들이 거기서 나오고 있었다.

 

3

 

12일 만에 스무 권의 새 책을 남기고 그들은 방에서 나갔다. 식자로 쳐진 만화의 대사들을 일일이 뜯어서 다시 새 원고에다 붙이고 그들은 화장실에 가 손들을 씻었다. 아침부터 밤 10시까지, 한 사람이 하루 평균 30페이지 정도씩을 그려 제낀 셈이다. 숙달된 만화가는 닷새 정도면 150페이지쯤 되는 웬만한 그림책 한 권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이건 경우가 달라,,,,,,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 눈 앞에서 일어나고, 시무룩한 얼굴들로 인사도 없이 고개들을 숙인 채 회사 정문을 빠져나가는 그들을 보면서, 언뜻 나는 만리장성을 생각했다. 감상

인지는 모르겠으나, 그것은 일종 슬픔의 감정이었다. 만리장성의 기적은 아무 힘도 대책도 없이 그냥 짓밟히며 동원될 수밖에 없었던 수 많은 천민들의 도로(徒勞)의 결과이다. 그 수백만의 도로의 결과가 모여 그처럼 장대한 성을 이어놓기는 했어도, 실제의 전쟁에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었더란 말인가.

"이건 돌려드리기로 하지. "

새 원고들을 보이며 기분이 들떠서 그것이 어째서 기적에 가까운 일인가를 다시 감탄하고 있을 때, 사표 봉투를 내밀며 사장이 말했다.

"속전속결 시대에 무슨,,,,,, 하면 되는 일예요. "

겸손해 한다거나 그렇다고 득의만면한 표정이 그의 얼굴에 떠올라 있었던 것은 아니다. 무거운 눈꺼풀 밑으로 실눈을 뜨고 사장은 권태로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속전속결이 만약에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면, 그것은 파괴로서의 그런 것뿐일 것이다. 예를 찾을 것도 없이 얼핏 떠오르는 것은 '와우아파트사건'이고, '광주사태 '까지도 그런 졸속 정신의 참담한 결과로 나는 여기고 있다. 새 원형(原型) 새 주인공이 탄생했다는 정도가 아니라 그 주인공들의 발랄한 움직임과 자연스러움이 이루어 놓은 책 한 권의 전체적인 창의성과 밸런스와 생기 - 를 말하는 이번 경우는, 그러나 그렇게 간단한 몇 마디로는 설명이 되지를 않는다. 하지만 한번 훑고 내던지는 싸구려 만화책 한 권의 개성이 그에게도, 온갖 잡종 만화의 산더미에 에워싸여 있는 어린이들에게도 실상 무엇일 것인가.

짐짓 심각한 체하거나 노기를 띨 경우라도 출판부 쪽을 향한 사장의 그것은 유희거나 일종 도락의 제스처에 불과하다는 느낌을 나는 받고 있었다. 전자제품부 쪽으로 내지르는 사장의 포효는 여일했다.

어느 아침 커피 자리에서 무심히 피력했던 자신의 말처럼 보따리장수로 직접 육탄전을 벌이면서 이룩해 놓은 기업이었으니만큼, 간단없는 그런 독려의 외침은 당연한 일이었을지 모른다.

3천 부 정도의, 역시 보따리 장수로 시작해서 발행 부수 350만을 웃돌고 있는 일본의 (PHP)라는 잡지를 그대로 모방하오 있던 월간부의 미니 수필지가 윌 결손 3백만 원이 넘어 집어치느니 마느니 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파트는 광고준비에 들어갔다. 광고부에서는 회사 제품인 오디오 시스템이거나 비디오, 텔리비전 제품 광고의 기왕 나가고 있는 스파트에 전집광고를 끼워 넣어 활용한다는 방안을 세워 놓고 있었다. 인기가수가 나오는 화면에 간화컷들을 연속적으로 깔면서 (로빈슨 크루소)(빨강머리 앤)이니 하는 제명으로 엮어진 씨엠 송을 부르게 한다는 것으로, 상투적이기는 했으나 세련도나 화면 구성 여하에 따라서는 기발한 것이 될 수도 있었다. 그 내보내는 컷들이 애니메이션으로 바뀌어야 하는가 혹은 정지된 컷의 연속이나 책의 표지를 클로즈업 시키는 쪽이 효과적인가 하는 문제가 의논되는 자리에서, 편집 위원 문제가 다시 나왔다. 이미 전단 광고 원고가 대지(臺紙) 작업까지 되어 있었는데도 거기 대해서는 일언반구가 없었으므로, 궁금해서 이쪽에서 말을 꺼낸 것이다.

사장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굳어졌다.

"박 교수는 안 돼 !"

예사롭지 않은 어조가 내뱉어지더니, '빈 봉투 상()이나 받는 주제에!' 하면서 사장은 콧방귀를 뀌었다. 박 교수는 예의 '왜놈 흉내' 운운으로 편집실을 들쑤셔놓은 장본인이다. 그럼 누구가 좋겠느냐고 물었으나, 사장은 대답을 않았다.

"까짓, 교수 이름 나부랑이가 무슨 대수야? 싫다면 모두 뭉개 버리지 뭐."

아마도 사장의 심사 헤아리기에는 이력이 나 있었던지, 곁에 있던 김 선생이 재빨리 말을 받았다.

"애들이 그것 보고 책 사나? 그 따위,,,, ,"

사장은 무서운 눈초리로 김 선생을 노려보았다.

"편집 위원이라는 것이 책에서 어떤 비중인지 서형이 대신 말씀 좀 해 주쇼!"

간신히 분통을 참는다는 어투로 사장이 내뿜었다.

박 교수를 다시 설득시켜야 하는 게 아닌가, 정작 그걸 원하면서도 자존심에 자격지심을 느껴 사장은 반대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을 내가 가진 것은, 물러 나와 한참이나 지나서이다.

"빈 봉투 상이란 게 도대체 뭐예요?"

그따위 으르릉거림에는 역시 이골이 나 있다는 얼굴로 짐짓 선선한 표정이 돼 있던 김 선생이 허어 - 했다.

어느 수필가 협회에서 주는 문학상을 작년에 박 교수가 받았는데 그 상금이 밖으로만 백만 원으로 알려져 있지 실은 빈 붕투라는 것이다.

그 단체는 조촐한 수필지까지도 내고 있었으나 경영난으로 벌써 몇 년째 같은 짓을 해 오고 있어 모두 이해가 가는 척은 하고 있지만, 정작 시상식에서 실제로 보면 여간 우습지가 않다. 사장이 빈정대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 실은 그 상을 받고 싶어서이다 - 라는 얘기였다.

"웃기지도 않아. 사장이나 그 사람들 하는 짓거리들이,,,,,, 박 교수뿐이 아냐, 최 화백도 편집위원에서 빠졌으면 하는 눈치야."

"이번 편집위원은 주로 사장 교분관계로 선별이 된 건가요. 최 화백은 또 왜 그러죠?"

"그림 몇 점 사줬으니까 마다고 할 처지는 아니지. 하지만 최 화백은 챙피해 하구 있어. 약점이 잽혀 있다는 게,,,,,,"

"약점이라뇨?"

"동란 전까지도 최 화백은 만화를 그리구 있었어요. -허생전-이니 -장화홍련전- 이니를 본명 그대루. 궁하던 시절에는 그걸루 생계를 꾸렸지. 그 만화들을 어디서 구했는지 사장이 가끔 내보이면서 약을 올린단 말야. 시커먼 갱지에 나달나달한 물건들야. 동양 화단의 대가가 되어 있는 지금에사 최 화백은 그 만화들이 챙피한 모양이지. 통탄할 사람들야,,,,,, 그게 뭐 어때서,,,,,,"

김 선생 말대로 그건 그랬다. 제 손으로 만든 책을 처지가 달라졌다 해서 감추고 싶어할 지경이라면, 열 명의 편집위원들의 격이 어느 정도나 되는지 대충 짐작이 갈 수밖에 없었다. 박 교수만은 다시 설득을 시켜야겠다 싶어 김 선생을 통해 그런 의사를 전달했으나, 사장은 가타부타 답이 없었다. 승낙으로는 여겨졌지만, 찜찜한 기분인 채 나는 박 교수의 대학을 찾아 나섰다.

그 사이에 조 부장 문제가 폭발이 돼 있었다.

'바보'로 다시 나를 불러내지는 않고 조 부장은 그 동안 끈덕지게 김 선생에게 전화를 해 오고 있었는데, 협상을 벌이고 있었던 것 같다. 내용 증명을 곧 보낸다는 엄포로 조 부장이 요구해 온 것이 무엇이었던지는 알 바가 없다. 김 선생도 그에 대한 얘기만은 극비처럼 발설을 않아 거의 잊어버릴 지경이 돼 있었으나, 인천공장 쪽의 근로자 대표 여남은 명이 회사 뜰에서 벌인 소규모 농성에 그가 합세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농성은 그가 주도하는 듯한 양상을 띠고 밀고 당기는 육탄전으로까지 번졌던 모양이다. 사장실을 점거하려는 그들과 출입 현관문 쪽에서 그것을 저지하려는 소란을 이층에서 바라보고 있던 사장이 내려와, 조 부장과 근로자 대표 한 사람을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근로자들의 요구는 반만 들어 준다, 조 부장은 이 일에서 선동인가 단순한 가세인가, 무슨 역을 맡고 나선 것인가고 사장은 따졌다. 사장이 왜 조 부장의 이번 일의 성격을 물고 늘어졌는지는 뒤에야 밝혀졌다. 멋도 모르고 그랬는지 오기로서인지 조 부장은, 자기가 일을 꾸몄다, 이놈의 회사 뒤집히는 꼴을 보고야 말겠다고 소리를 질렀고, 근로자 대표도 수긍하듯이 말이 없었다는 것이다. 테이프를 가져오라고 사장이 소리쳐 그 자리에서 그것이 틀어졌으며, 만화가들에게 나가던 화료의 5프로 정도씩을 착복해 온 조 부장의 비위사실이 폭로됐

. 벼룩의 간을 빼먹어도 유분수지 당신은 그 동안 남의 고료 3천만 원 이상을 가로채 왔다. 내용 증명은 이쪽에서 준비중이다..,.. 사장이 소리소리 질렀다.

퇴직금까지 엔간히 주었는데 조 부장이 과욕한 게 화근야. 부인이 신장염을 앓고 있어요. 그놈의 테이프를 언제 녹음했던지 모르겠어. 만화가 한 녀석이 이번에도 15만 원을 떼고는 그걸 덮어두지 못하고 저번에 내게 왔었어. 하소연으로 그쳤는가 했어요. 내가 달래 돌려보냈으니까---, 좌우지간 빈틈없는 양반이라구, 정떨어져......"

말은 그렇게 하고 있었으나, 김 선생의 표정은 덤덤했다. 소름이 돋는 듯한 감각이 내 등을 훌고 지나갔다. 시장 통의 아귀다툼이라면 또 모른다. 그런 와중에 악을 쓰며 깨닫는 참담함이나 패배감에는 순수한 열정의 느낌이라도 있다. 이전투구랄 수도 없는, 조직체의 틈바

구니에서 새나오는 이 정떨어지는 쓸개 맛의 정체는 무어라 이름을 붙였으면 좋을까,,,,,,

어딘가 구라파 쪽 신사를 연상시키는 용모와 차림의 박 교수는 막무가내였다. 견본 원고를 일일이 보일 작정으로 한아름 싸들고 갔던 것이었으나, 한산한 구내 커피숍에서도 보자기를 그는 풀지 못하게 했다.

"내용이 달라졌다는 건 알겠어요. 창의적인 좋은 그림들이겠지 물론.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건 어째서 그 친구가 기를 쓰고 날 끌어들이려는가 하는 점예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율 모르겠어. 그 점이 싫다는 게야. 편집장은 알고 있소?"

김 선생이 말하던 라이벌 운운하는 얘기가 떠올라, 나는 망설였다.

"혹시 경쟁 관계 같은 거라도 아니세요 사장님과? 수필이나 무슨 다른 방면으로,,,,,"

무슨 소리냐는 듯이 박 교수가 메마른 웃음을 터뜨렸다.

"그 친구하고 경쟁할 이유가 어디 있어? 그 양반은 기업인이고 나는 접장인데. 여잘 사이에 두고 싸울 일이라면 차라리 재미라도 있지. 죽마고우라 해도 그래요. 그런 문제는 현실감각을 끌어들이지 않고 그냥 두는 게 나아요, 추억이라도 손상시키지 않으려면 ,,,, 좌우지간 이번 일은 싫어요."

말의 내용으로 봐서는 간청하고 매달리면 될 법도 한 부드러운 것이었으나, 박 교수의 표정에는 어딘가 얼음 같은 냉엄한 기색이 있었다. 찔러도 피도 안 날 것 같은,,,,,이라면 표현이 뭣하지만, 이런 얼굴이 설득에는 가장 어렵다는 것을 나는 몇 번의 경험으로 알고 있다. 훈장과 장사꾼을 구분 짓는 근본적인 갭을 그는 말하려 했던 것일까--- 재삼 청원하려는 내 입을 부드러운 말로 막고 훌쩍 일어서서 강의실 쪽으로 사라져 가는 교수의 등을 복잡한 기분으로 나는 지켜보았다.

조 부장 일의 여파 때문인지 파트는 저기압에 휩싸여 있었다. 밖에서 얼었다가 스팀 기운이 더울 정도인 방으로 들어서자, 맥을 놓고 있는 동료들의 그런 모습과 박 교수에의 무력감이 가세해 나는 곤혹감에 빠졌다. 조 부장 사건을 김 선생의 재재바른 어조로 전해 들으면서, 결과 보고라도 가야지 싶었으나, 드러누워 버리고 싶은 권태감에 몸을 맡긴 채 나는 복도로 나섰다, 월간부 쪽에서도 분위기는 마찬가지였다. 내달치 잡지를 제본소로 넘긴 만화 파트는 한가한 때라서 그런지 두엇이 책상을 지키고 앉아 낙서를 하고 있었고, 수필지 쪽의 서넛도 코가 빠져 아래만 내려다보고 앉아 있었다. 수기물이니 시시한 추리 소설류니 하는 몇 종을 만들고 있던 단행본 파트는 아예 자리들을 비워 버리고 있어, 나는 도로 돌아섰다. 그새 박 교수로부터 사장에게 직접 전화가 왔었던 모양이다, 태도를 분명히 한다는 식으로 박 교수는 새삼 전화를 해두고 싶었을지 모른다. 일종의 결벽증이 시킨 일이었을 것이다. 뒤에서야 안 일이었지만, 이 전화가 사장을 결정적으로 자포자기 상태에 빠뜨렸던 것 같다,

허둥거리는 듯한, 예외적인 모습인 채 이 쪽으도 뛰다시피 오다가 복도에서 나를 본 김 선생이, 당분간 파트 일을 중단하라는 지시가 내렸다는 전갈을 해 왔다. 그렇다고 해도, 벌써 기계로 넘어가 일부가 돌고 있는 본문 인쇄까지 연락해 스톱시키라는 지시여서, 아연한 느낌이었다, 제로로 돌린대, 모두,,,,, 김 선생은 막연한 그런 말을 했다. 팀을 해체한다는 뜻인가고 물었으나 그는 우물우물할 뿐이었다. 이건 도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간다는 것인가---

할말을 잃고 우두커니 김 선생을 마주보고 있는 곁을, 언제 이층에서 내려왔던지 사장이 스쳐 지나갔다. 시선은 이쪽을 향하고 있었으나, 눈만 뚫어놓은 가면을 뒤집어쓴 듯이 그는 아무도 보고 있지 않았다. 군중을 앞에 둔 연사들에게서나 가끔 볼 수 있는, 격앙됐으나 무기미한 그런 표정과 서슬이 그의 전신을 뒤덮고 있었다. 이런 경우 그 황폐한 감정의 피해를 입는 것은 오히려 무관한 상대편이다. 네모진 어깨에 소탈한 기업인의 폼처럼 아무렇게 걸쳐진 점퍼의 깃을 번갈아 구기고 접으면서 그는 현관문 쪽으로 걸어가, 발길로 그것을 열 어제꼈다. 불의에 꽁무니를 걷어 채인 개의 감정 같은 것이 스며들지 못하게 하려고 김 선생과 나는 결사적으로 그 등뒤를 바라보았다.

 

4

 

거들 일이 없어 그냥 앉아 있다는 것과 일을 빼앗기고 멍청한 상태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내용이 다르다. 한가하다는 사실이 휴식이라도 되어 주는 것은, 제대로 한 일이나 해야 할 일이 앞뒤로 보증을 서주고 있을 때뿐이다. 파트는 일 주일째 그런 상태로 멀거니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흡사 선고를 기다리느라 일주일째나 법정에 머물고 있는 기묘한 피고들의 모습을 연상시켰다. 월간부에 가서 일손을 도울 여지도,

", 맨날 이렇게 편했으면 좋겠다."

고 웃고 넘기는 것도 하루 이틀 정도였다. 담판을 지어야겠다 생각하고 일어서지 않았던 것은 아니나, 눈치를 챈 김 선생이 그때마다 앞을 막아서다시피 하면서 자기에게 맡겨달라고 나갔다 왔다. 발행 겸 편집 겸 주간은 사장 이름으로 돼 있었지만 김 선생은 아마도 천덕꾸러기 주간 역을 자청해서 떠맡고 있었다. 그가 받아온 대답은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대,,,,,, 하는 요령부득의 것들이었다.

철부지 애도 아니고,,,,,, 하는 생각보다도, 이번 기획은 순전히 사적이고 즉흥적인 충동에서 벌인 것이 아닌가 싶은 심증이 내게 들었던 것도 그 무렵이다. 비상하게 돌아가는 머리로 영리 전망까지도 고려에 넣은 충동인지는 몰랐으나, 책의 기획이 정말로 그런 동기에서 였다면 용납이 되지 않는다,,,,,, 하는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이 내게 들기 시작했다. 이렇게 뒤틀리기 시작하면 당앙 딴 일자리가 나서지 않아 해를 넘기며 전전긍긍 헤맬 경우가 닥치더라도, 어쩔 수가 없었다. 고질증이 내게도 도지기 시작한 것이다. 근처 다방으로 파트가 뿔뿔이 흩어지고 없는 텅 빈 방에서 나는 두 번째 사표를 썼다.

"아무도 안 만나고 싶댔잖아?"

겅중 뛰면서 폭소라도 터뜨리고 싶을 만치 높은 소리로, 봉투를 팽개치면서 사장이 울부짖듯이 고함쳤다.

어린이의 퇴행증 비슷한 충격적인 느낌-을 거기서 받고 말없이 물러 나왔던 것은 아니다. 그렇게 생각해서 그런지, 역시 텅 빈 방의 널찍한 자줏빛 소파에 이를 갈 듯이 움치고 앉은 사장은 지독히도 고독해 보였다. 모르긴 해도 한 주일 내내 그는 그 자리에서 꼼짝도 않았던 듯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어두운 갈색 커튼이 반쯤 열어 젖뜨려진 대형 유리창 뒤쪽에서부터 부어져 들어오는 꾸무럭한 저녁답 날빛이 사장의 표정을 실루엣처럼 흐려놓고 있었다. 카핏 바닥에서 봉투를 주워 문을 닫고 나와 바깥에서 찢으면서, 나는 손바닥 속의 그 둘로 나뉜 사표를 내려다보았다. 그를 도와야겠다는 생각이 진심으로 내게 든 적이 있다면, 아가 이때가 처음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구질구질하게 느껴지던 눈이라도 차라리 빨리 퍼부어 주었으면 싶어 찍어 눌리듯이 땅거미 지는 창 밖을 무료히 내다보던 퇴근 시간 무렵쯤에, 웬 여인의 목소리로 전화가 걸려 왔다. 허스키의 목소리만으로는 도통 판별이 가지지가 않았으나, 여성 문제를 다루는 무슨 단체의 간부라고 듣고 있던 사장 부인은 20대가 아닌가 여겨질 정도로 몹시도 젊어 있었다. 회사가 곧바로 내려다보이는 근처 스카이라운지의 구석진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그녀는 서슴지 않고 내게 손을 내밀었다.

"저번 저녁 파티에 오시지 않아 어떤 분이신가 했어요."

……"

"매달 한번쯤 집에서 저녁 대접들을 하구 있죠. 저번엔 사원들이랑 편집 위원분들이 오셨는데, 편집장은 왜 초대하지 않았느냐구 했더니 이런 데 오실 분이 아니라는 거예요 애기 아빠가. 거부 반응을 일으키실 게 틀림없다는 거죠."

그것은 금시 초문의 얘기였다. 언제 때 일이었는지는 모르나 그렇다면 파트는 거기 갔다오고서도 시침을 떼고 있었던 것이 된다.

"나쁘게 생각 마세요. 편집장을 몹시 어려워하구 있다고 하면 설명이 될는지 몰라,,,,,, 무서워한다면 말이 우습지만."

갈수록 이상한 말만 하고 있었으므로, 영문을 몰라 나는 그녀를 지켜 봤다.

"너무 정직해 뵌다는 거죠. 호화 주택이라고 낙인찍힌 집도 그냥 보아넘기시지 않을 거라면서,,,, "

"집이 그렇게나 큽니까. 그건 어리석다는 얘기로도 들리는데요 제가--- 무슨 소린지 모르겠습니다,"

"애기 아빠가 좀 그래요?"

그러면서 그녀가 회사 쪽을 내려다봤다.

"저건 애기 아빠의 양심 같은 거예요,,,,,,"

이 비슷한 소리는 어디선가 들었던 듯한 기억이 있다. 사장이 그랬던가 김 선생이 그랬던가. 그 양심이란 것은 출판부를 가리키는 말이었을 것이다. 건물 아래층 한쪽 귀퉁이에 내몰린 채 어디쯤인지 잘 보이지도 않는 회사의 그 추상적 심장을 나도 고개를 빼고 내려다봤다, 시간이 계시다면 저녁이라두 대접하려고 하는데요--- 하는 소리를 전화로 들었을 때는 으레 사장이 동석하는 걸로 여기고 있었다.

웨이터가 왔다, 그녀는 이것 저것을 권하면서 자신의 것으로는 내가 모르는 음식을 주문했다. 무엇 무엇을 첨가해달라는 주문이었는데 아마도 여기는 사장과 자주 들르는 눈치 같았다.

"천천히 드시면서 실컷 좀 얘기해 주세요. 어려운 점이라든가---"

사장에게 직접으로도 안 통하는 얘기가 뒤쪽이라고 통할가 싶기도 했으나, 어렴풋이 가는 느낌 같은 것이 있어서 나는 박 교수 얘기를 꺼냈다.

"저녁 파틴가 뭔가 거기 다른 한 분이 또 안 갔었죠?"

"박 교수 말예요?"

그녀에게서 즉각 반응이 왔다. 그녀도 편집 위원 건을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예측한 반응이었기는 해도 내가 기대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박 교수에 대한 존칭을 그녀는 빼버리고 있었다. 나는 자초지종을 말하고 그 때문에 전집일이 스톱 상태라는 것을 설명했다.

'S사에서도 비슷한 기획을 하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와 있습니다. 한 발 늦으면 큰일이죠. 서둘러야 찰 텐데 그 건이 해결이 안 됩니다. 제 눈에는 하나도 걸릴 일이 아닌데 이해가 가지 않아요. 박 교수님을 빼고 딴 분을 넣어도 될 텐데,,,,,,"

"박 교수 일은 걱정 마세요. 내일 당장 제가 해결하죠. 오전에 허락을 받아놓을 테니 오후에 애기 아빠에게 말하고 편집장이 한번 더 거기 갔다오세요. 형식적인 거니까,,,,,, 여자가 나서서 됐다고 소문이라도 나면 좋을 게 하나도 없죠,"

"정말입니까?"

포도주 탓인지 희게 투명하던 그녀의 뺨이 분홍빛을 띠었다. 그녀가 조롱하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간단한 일인데도 한방 사람들을 통째 일주일 이상이나 공중에 매달아놓고 있었더란 말인가 하는 어이없는 느낌이 분노라기보다 허탈한 실감으로 전달돼 왔다. 포크와

나이프를 들었으나 나는 건성으로 고기를 잘라 입에 넣었다.

"또 어려운 점은 없어요? 죄다 얘기해 주세요? 이해가 안 가는 일처럼 재미없는 일이 또 없죠. 그게 사람을 타락시켜요."

그녀는 아마도 자신이 일하고 있는 단체에서의 경험을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위에서 모든 걸 주무르는 간부한테도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 있다는 것일까.

"따지기로 든다면 이번 일의 처음부터가 이해가 안 갑니다. 누구 발상인지는 모르지만 문학전집을 만화전집으로 고친다는 발상부터가..... 독해력이 부족한 아이들 상대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 문학 쪽은 쉽게 풀어서라도 문학으로 전달을 시켜야죠. 표현양식이 근본적으로 다른 거니까. 승산 없을 게 뻔한데 웬일인지 자신만만한 판매 쪽 일도 이해가 안 가고,,,,,,"

"판매 쪽은 신경을 쓰지 마세요. 애기 아빠를 모르니까 하시는 말씀예요 그건. 그인 승산 없는 일은 하지 않아요. 그보다도 좀 전에 하신 말씀이 좀 걸리네요. 좋은 이야기를 만화로 고친다는 건 불가능한 건가요?"

"한계가 있다는 얘기죠. 그런 식으로 고쳐서 나온 그림책의 종류가 이십여 종이나 됩니다. 판매는 어땠는지 모르지만 아이들의 관심을 제대로 끌 수 있었을까 하는 점이 문제죠. 하도 과격한 스토리에 에워싸여 있어서 웬만한 내용에는 아이들이 눈썹 하나 까딱 안 합니다. 먹혀들지 않을 바에야 원본대로 좋은 표현이나 말의 기능만이라도 제대로 읽어 듣기도록 애를 써야죠, 만화로는 원래의 문학 언어를 반밖에 전달 못합니다. 그것도 대사나 그림의 보조설명으루, 그 나머지 반을 보는 걸루 상쇄시킨다는 건데 쉬운 일이 아녜요. 그것도 스토리만이죠. 문학이 애들에게 전달하려는 건 사실은 스토리가 아니라 말의 기능이죠. 텔리비전 만화는 그걸 더 어렵게 하고 있더군요. 직접 대사도 나오고 움직이기도 하니까 문학의 배 이상이나 효과가 날것 같은 데도,,,,,,"

그러면서 나는 Y사에서 연전에 나왔던 비슷한 기획의 그림책 이야기를 했다. 그것은 국내 작가의 짧은 동화 한 편씩을 듬성듬성 원문으로 깔면서 A급의 순수화가들로부터 그림을 받아 만들어진 것이었다. 화료도 파격적이었을 뿐 아니라 화가들은 아이들을 위한다는 일념으로 기꺼이 응해 전력 투구를 했던 것이어서, 책은 수준 이상이었다. 광고비도 엄청났고 사회 각계에서도 추천이니 우량 도서상이니 하는 형식으로 적극적으로 호응했다. 왜 그것이 판매에서 완전히 실패해 버렸는가 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겠으나, 내가 느낀 근원적인 차질은 아이들의 감각을 전혀 도외시했다는 데 있다. 아이들이 뭘 좋아하는지 전혀 이해하려 하지 않은 것이다. 거기 실린 동화뿐 아니라 그림까지가 어른들이나 공감할 것이었지 아이들에게는 거의 절벽이었음에 틀림없다. 어른들은 모처럼 좋은 그림책이 나왔다고 사들고 들어가기도 했을 것이다. 호기심으로 덤벼들어 한두 페이지를 들추던 아이가, 에이 재미 없어 거지 같애-----라면서 팽개쳐 버린다,,,,,,

" “그처럼 비참한 일이 또 없교. 아이들을 전문으로 다루는 사람들도 쩔쩔매는 일을 순수한 화가들이 자기들 역량이면 아이들에게도 통하리라 생각한 것이 애초 오산이었어요. 물론 기획의 책임이었습니다만---

듣고 보니 예삿일이 아니군요. 이번 일도 처음부터 그런 오산이 들어 있다는 거죠?"

아이들의 감각이란 건 도대체가 레이다 망보다 더 복잡미묘해서 아무도 짐작을 못 합니다. 접근도 어렵구요. 기껏 애들이 좋아하는 형식이나 어렴풋이 알고 있을 뿐이죠. 그 형식의 하나가 낙서벽이 발전한 만홥니다. 아이들이 지금 그렇게도 좋아하는 잡지나 그런 만화들도 실은 아이들 감각을 제대로 짚은 게 아닙니다. 변칙이죠. 아이들이 난폭한 것을 좋아한다, 혹은 차마 입으로는 말못할 상소리를 좋아한다 하는 주로 그런 측면을 물고 늘어져 아첨을 하고 있어요. 뒷책임은 전혀 생각도 않고,,,,, 용서할 수가 없어요."

억진 줄 알면서 이런 일 계속하시는 것도 그 때문이군요."

포크를 놓고 냉수로 입가심을 하면서 그녀가 말했다.

"애기 아빠가 아까운 사람 하나 기어이 만났다고 칭찬이 자자하더니--- 또 얘기해 보세요. 어떻게 해드렸으면 좋겠어요?"

고용주 부인한테서 그런 소리 듣는 건 기분 나쁠 것도 없었다. 아마도 사장은 낮에 소리 지른 것이 뭣하고 직접 속을 털어놓기도 계면쩍어서 부인을 보낸 게 분명했다. 호화 주택 때문에 초대도 꺼릴 지경이었다는 소리가 사실이라면 그럴 법도 한 일이었다. 어떻게 해달랄 것이 있을 리 없어, 내친 김에 나는 이번 기획의 의미를 다시 말했다. 접근할 수 없는 아이들의 감각을 완전히 파악은 못 하더라도 기왕에 그들이 좋아하는 형식을 빌어 거기 가까운 어떤 것이라도 만들어 줘야 한다, 표준이 될 만한 것조차 없으면 아이들은 걷잡을 수가 없다, 판매 쪽은 승산이 없어 보이지만 의의는 충분히 있다--- 그러면서 나는 저번 만화가들의 그 기적 같은 일을 말했다. 사장도 주위에서도 그 일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었으나, 그런 기적은 두 번 다시 일어날 것 같지 않았다. 시중에 깔린 새 달치 잡지들을 들춰보고 그 심증은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 일이 있었는데도 잡지 여기 저기에 실린 그들의 원고는 의연히 원래의 왜색으로 되돌아가 있었다. 연재 만화들이야 주인공을 바꿀 수가 없어 그렇다고는 하지만, 단회치로 끝나는 완독물조차 하나도 달라진 게 없었다. 그것은 기묘한 절망감이었다,,,,,,

"어머, 저 눈!,,,,,,"

다음 세트의 만화가 인선은 신중을 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장의 독단이나 독선이 개입하면 그것도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그런 말을 하려는데 창 쪽으로 고개를 돌린 그녀가 작은 외마디 소리를 냈다. 오랫동안 그쪽을 내다보고 있다가 얼굴을 돌린 그녀의 눈자위 부

근이 놀랄 정도로 빨개져 있었다. 울었거나 갑자기 술이 올랐거나 둘 중에 하나였을 것이다

"사실은 이번 책의 아이디어도 기획도 전부 제가 한 거예요."

……"

"다시 한번 말씀해 주세요. 이런 일에 왜 그렇게 열심히 매달리고 계시죠?"

먹고살기 위해 왜 직장에 나가느냐는 투의 물음으로 들렸다면, 되려 이쪽에서 어안이 벙벙해 말문이 막혔을지도 모른다. 저렇게 피부가 매끄러운 유한 부인들 중에는 그런 질문을 해놓고도 늠름한 뻔순이들이 얼마든지 있다. 나는 여자를 지켜보았다.

"딸아이가 만화의 피해를 심하게 입었읍니다. "

"몇 살이에요?"

"열 살,,,,,, 부인도 애기 때문에 그런 아이디어가 떠오르신 겁니까?"

"아들은 제 전부죠. 저한테는 개밖에 없어요. 열 한 살인데 이제 4학년이예요, 생일이 늦어서,,,,,,"

뿌리는 눈발 쪽으로 그녀가 다시 시선을 돌렸다.

 

주차장에서 나온 부인의 차를 보내고 집으로 전화를 해 보았으나, 먼저 저녁을 먹고 아이가 일찍 잠들었다는 아주머니의 대답이었다.

아파트 문 단단히 잠그고 돌아가라 이르고, 미진했던 술 생각이 갑자기 북받쳐 올라 나는 포장집을 들치고 들어섰다.

아빠는 도둑놈이야,

동시(童詩)를 쓰는 친구의 아들 아이가 얼마 전에 느닷없이 그런 소리를 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내 머리에 떠오른 것도 그 만화였다. 급한 김에 아이의 저금통에서 만 원 남짓한 돈을 언젠가 꾸어 쓴 적이 있는데, 까맣게 잊고 있던 반 년 전의 그 일을 들추고 나오면서 아이가 대들었다는 것이다. 친구의 아들은 일곱 살 짜리였다. 겨우 떠듬떠듬 책을 읽을 정도여서 처음에는 찔금하기만 했는데, 가만히 있자니까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감정이 격해져서, 내가 왜 도둑놈이냐고 맞 고함을 질렀다고 한다, 너한테 꾼 돈은 갚으라고 어머니한테 벌써 주었다, 도둑놈이란 말은 어어니한테 가서나 해라, 이봐, 얘한테 갚으라고 준 돈 어따 쓸어박았어?

그냥 '도둑'이라고만 했다면 덜했을지도 모른다, ''자 하나가 더 붙는다는 사실이 이토록 사람의 감정을 천양지판으로 저울질할 줄은 몰랐다면서 친구는 요즘 아이들의 성장속도를 한탄 조로 감탄했다.

언어를 다루는 직업이 불의에 당한 역습이어서 고소를 머금고 듣고는 있었으나, 남의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씨팔 자식아,,,, 하고 딸아이가 내게 덤벼든 것은 여섯 살 때였다. 그건 책의 영향이라고는 할 수 없다. 집안에서 제일 쉽게 손에 잡히는 게 그런 것이어서 그랬던지 다섯 살로 접어들면서 한글을 읽기 시작한 아이가 닥치는 대로 잡지를 읽고 있었다고는 해도, 어느 책에도 그런 쌍욕은 적혀 있지 않다. 동네 애들에게 배운 소리였을 것이다. 몇 단계로 거치는 반항기의 그런 조포성은 차라리 자연스런 것이다.

화가 나면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그것을 발산시켜 버리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고, 표현을 찾는다. 가슴이 아프다, 아프다는 말을 아이가 가끔 하기 시작한 것은 일곱 살로 접어들면서였다. 서너 번 비슷한 소리를 듣다 겁이 더럭 나서 병원으로 데리고 갔다. 의사는 이상이 없다고 했다. 몸을 씻기다 가슴 언저리에 손이 가기라도 하면 소스라치며 아이가 놀랐다. 왜 그러느냐고 물으면 죽이지 마 하고 갑자기 소리를 질러놓고 찔금거린다, 아빠, 내 심장을 빼려구 그러지? 내장을 모두 들어내려구 그러지?

개미떼를 기어이 쫓아다니며 발로 문대 버린다거나 작은 곤충을 돌로 짓이겨 버리는 잔인성 같은 것은 그런 커다란 공포에 대한 본능적인 반작용이었을지 모른다. 잡지사 친구들 몇이 거나해져 전화도 없이 왁자지껄 집에 들이닥친 적이 있다. 잠에서 깬 아이가 홑이불을 둘둘 만 채 어두운 책상 밑으로 기어 들어갔다. 나오라고 아무리 달래도 바들바들 떨면서 아이는 구석으로만 파고 들었다. 흡혈귀 군단이 물러간 거야? ,,,,,, 친구들을 억지로 돌려보내고 나자 눈물 투성이가 된 아이가 그런 말을 중얼거렸다.

말더듬이가 되었을 때, 나는 딸아이의 그것이 두어 주일쯤으로 끝나는 것이려니 했다. 생각날 때마다 잔소리도 하고 직접 들었을 때는 야단도 치면서 아이의 그런 말버릇에는 비교적 무심했던 것인데, 서너 달이 지나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때가 늦어 있었다. 잠든 틈을 타 아이가 보던 책들을 전부 꺼집어내 샅샅이 뒤진 끝에 연재만화 주인공의 말투에서 그 원인을 찾아내고는 대책이 서지를 않아 멍한 기분이었다. 그것도 하필 내가 편집한 잡지였던 것이다. 만화의 내용은 그렇게 난폭한 것은 아니었다. 여자아이들은 어느 나이가 되면 '태권 V''번개 아톰'이니 하는 남자애들의 세계에서 떨어지면서 딴 데로 방향을 잡는다. 그 만화의 여자 주인공도 노상 말더듬이는 아니었다. 한 회 치에 한두 번 정도로, 위기에 몰렸을 때, 혹은 커다랗게 소리를 쳐야 할 컷에서 저절로 말을 더듬는다는 식이었다. 그것이 아이의 감정에 정통으로 스며들어 버린 것이다.

근 일 년 남짓을 딸 아이의 그 굳어버린 말버릇을 고쳐 주려고 노심초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고쳐 주려고 애를 쓴다는 것이 되려 그것을 부채질하고 깊은 데로 밀어 넣었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고쳐졌을 때 아이는 의기소침한 성격으로 변해 있었다. 위험한 장난을 반복하는 것을 보고,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져."

하고, 아이도 잘 아는 속담으로 경고나 제동을 걸려 해도 돌아오는 대답은,

"떨어져도 사뿐야."

이다. 이것은 그 의기소침한 성격이 활로를 찾아 필사적인 재치로 바뀐 예에 불과하다, 만화나 텔리비전이 아니고는 그런 재담은 배울 데가 없다, 밥상을 앞에 놓고 게질게질하면서 하도 분통을 돋구길래,

"너 자꾸 그러면 아빠, 터져."

라고 위협하면 밥을 문 이쪽을 쏘아보면서,

"터지긴 뭐가 터져, 풍선이 터지지."

하는 식의 즉각적인 대답도 그런 예이다. 무슨 방법으로든지 자신 속의 불만을 이겨내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아이들의 그 성격이 자존심에 한번 깊은 상처를 받기라도 하면 스스로 그것을 풀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모든 부모들이 주지기수로 겪는 경험일 것이다.

어느 휴일 오후에 가까운 지방 도시에 있는 친구 집으로 아이를 데려가서 하룻밤을 지내고 온 적이 있다. 유니라는 세 살이나 어린 그 집 여자 아이가, 우리들이 가자마자 해수욕복을 꺼내 입고 미스유니버스에 나간다고 맵시를 자랑했다. 그러다가 집 아이의 다섯 번짼가 빠진 송곳니 자리를 어떻게 눈여겨보게 된 그 유니가,

"나두 얘만 했을 때 저렇게 이빨이 빠졌다구."

라고 했다. 저보다 훨씬 어린 꼬마로부터 그런 소리를 들었다는 것이 아이에게는 상당한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던 모양이다. 새침해지기는 했으나 아이는 필사적으로 참고 있었던 것 같다. 시간여를 놀다 그 새침이 풀어질 때쯤 해서 결정적인 일이 또 벌어졌나. 유니가 장롱 위에 던져 올린 공을 딴에는 언니 행세를 해 보이려고 자청해 베개를 쌓올리고 꺼내주려던 아이가 잘못 미끄러져 꼬나박힌 것이다, 유니가 데굴데굴 구르면서 웃기 시작하자 아이의 자존심은 여지없이 뭉개져 버렸다. 참 못났다, 다 큰 처녀가 그만한 일에...,,. 유니는 유치원에도 아직 못 가는 간난애가 아니냐, 하고 아무리 달래고 얼러도 소용이 없었다. 자정 무렵까지 저녁도 먹지 않고 면벽한 채 버티고 서 있던 아이가 단 둘이 남은 방 속에서 강제로 이부자리에 눕혔을 때야 엉덩이를 바닥에 놓았다. 두 시가 넘은 시각까지 한쪽 벽 구석으로 몸을 말아 붙인 채 씨근대고 있는 아이를 지켜보고 있노라니, 끝내 이쪽에서 비참한 기분이 들 지경이었다. 너는 엄마가 없다, 그러니까 아빠가 그 대신 몇백 배로 더 너를 좋아하고 있는지도 모르지 ? 하고 드디어 이쪽에서 거짓 눈물까지 보이면서 누선을 건드렸을 때야 아이는 울음을 터뜨리며 내게 엉겨붙었다.

그 아이의 눈물과 사장 부인의 눈물을 비교랄 것도 없이 같이 떠올리고, 포장 밑으로 들치는 눈송이를 바라보면서 나는 거푸 소주잔을 비웠다. 제집 아이 얘기가 나왔을 때쯤에 사장 부인은 분명히 눈가에 물기를 보이고 있었다. 포도주 탓도 있었을 것이다.

술이 왜 센지 식사가 끝나고 나서도 계속 그녀는 마시고 있었고, 그렇게 취해 창백해진 얼굴을 외투깃으로 감싼 채 단 둘이 엘리베이터로 내려오는 그 짧은 시간 동안에 이쪽을 노려보듯 하면서,

"제게는 남편도 애인도 있어요."

라는 말을 그녀는 했다.

"돈도 필 요해요. 하지만 일을 사랑하는 사람도 필요해요,,,,,, 욕심이 너무 많죠?"

쓰러지듯한 시늉을 하고 한쪽으로 쏠리면서 그녀는 노골적으로 내 앞 바지 위에다 손을 갖다댔다. 이쪽보다는 서너 살도 더 아래로 보이는 그녀의 그런 행동이 대담하다고 해야 할지 음란하달지 나는 판별이 서지가 않았다. 사장을 돕고 싶어 설사 발버둥을 치더라도 어쩐지 이 직장 역시 오래 못 붙어 있을 것 같은 그런 예감이 나는 들었다.

 

5

 

두 번째 찾아갔을 때 박 교수는 씁쓰레한 표정을 했다.

"동생 같은 여자라서---"

하고 꼬리를 흐리는 말투 속에는 그러나 정감의 느낌이 없었다. 그렇다고 경멸감 같은 것도 거기서는 전해져 오지 않았다. 내가 헛 짚었던 것일까. 동생처럼 생각하는 여자니까 그렇게도 꼿꼿하게 세우던 고집도 꺾을 수밖에 없다는 태도가 별로 실감으로 오지가 않아, 허전한 그런 느낌에 골몰했던 탓인지 캠퍼스의 얼어붙은 눈길에서 두 번이나 나는 미끄러질 뻔했다.

태도를 분명히 해둔다는 식의 깔끔함은 아마도 박 교수의 습벽인 듯했다. 그에게서 사망한테 승낙 전화가 왔었다는 얘기를 돌아오자 김 선생이 알렸다

"그럼 기계 돌아가도 되겠군요. 인쇄소로 연락하죠. "

"오늘은 안 될걸? 오야붕 자존심이 그렇게 호락호락 풀릴 리가 있나. 내일쯤이나,,,,,,"

전화를 받고서도 사장은 이렇다 할 지시는 없이 여전히 혼자 있고 싶다, 라는 소리만 했다는 것이다.

"혼자 있는 것 좋아하시네. 그렇담 밖으로 나가 버리면 될 것 아냐? 무슨 용가리 통뼈라고 독 피우고 앉아서 사람을 들들 볶지?"

그런 소리로 김 선생은 파트를 웃겼다. 김 선생의 예언대로였다. 박 교수의 아량을 받아들인다는 표시는 다음날에야, 출판부에 대해 처음으로 터뜨리는 사장의 포효라는 형식으로 나타났다.

"스리가 뭐야, 지라시가 뭐야. 세나가니 미다시니 언제가지 너희들 왜놈 말 그대로 쓸 거야? 나는 장사 때문에 그런다지만 너희는 문화를 맡은 놈들 아냐?"

월간부 쪽에서 목청껏 지르는 고함이 들려오고 무엇인지 닥치는 대로 내던지는 듯한 소리가 한동안 계속되더니 전집 파트의 문이 벌컥 열리고, 예의 가면을 뒤집어쓴 듯한 앙분한 그 얼굴이 불쑥 나타났다.

"인쇄소 쪽은 어떻게 되는 거야?"

"돌릴까 하고 방금 물어 보려던 참야. 좀 있다 편집장이 직접 그쪽으로 가 본대."

팔을 내저으면서 김 선생이 사장을 도로 몰고 나갔다. 약방의 감초 격이라고는 해도, 김 선생 맡은 역이 이때처럼 돋보인 적이 없다.

그처럼 엄청난 경비를 들이고 있는 기획이 편집위원 하나의 거취 때문에 갈팡질팡한다는 것도 이해가 안 가는 점이라고 했을 때 사장 부인은,

"그인 사람을 도무지 믿지를 못해요."

라는 말을 했었다. 고생할 때 하도 여러 번 당해놔서,,,,,,라는 것이다.

"목욕탕 물에 잠그고 들앉았을 때만큼만 사람들이 믿음을 줘도 살맛이 나겠다. 미지근한 정도라도 좋다, 이건 온통 살얼음판이니,,, 하는 소리를 입버릇처럼 가끔 해요."

……"

신뢰라는 문제가 목욕탕 물로 비유되는 것이 어쩐지 적절하면서도 델리킷한 느낌이 들어서, 믿는다는 것과 기계가 돌아간다는 것은 다른 뜻이다, 하나는 일이고 하나는 감정의 문제가 아닌가, 박 교수는 유일하게 신뢰가 가는 사람이기 때문에 편집위원이라는 추상적 명분으로 그토록 신경을 쓰는 것인가 하고 떠보았으나, 그녀는 대답을 하지 않았었다

나는 그녀의 축축한 눈길을 생각했다. 본문 인쇄가 떨어진 것은 그 사흘 뒤다.

제본소로 그것을 실어 보내면서 곧 표지와 전단광고 인쇄에 들어갔다. 광고는 대여섯 종이나 됐다. 단장 짜리가 둘, 여섯 페이지나 되는 팸플릿 형식이 하나, 서점용 혹은 벽보용의 포스터가 둘. 책에 두르는 띠니 하는 자잘한 것까지 합하면 쉬지 않고 돌려도 이틀 거리다.

표지가 떨어지고 2도 인쇄까지 끝냈는데 또 회사에서 전화가 걸려 왔다.

"중단시켜요 모두!"

이번에는 다급한 듯한 사장의 직접 전화여서 나는 어리둥절했다.

"편집위원 이름 모두 빼버려!"

……"

"한 사람이면 돼, 모두 빼요."

"벌써 2도가 떨어졌는데요."

"그런다고 뺄 수가 없나."

"돌아간 인쇄를 어떻게 합니까. 짤라낼 수도 없어요, 광고 병신 만들기 전에는."

"빌어먹을! 누가 그렇게 빨리 돌리랬어. 좀 물어보고 돌릴 수도 있었잖아?"

"거기서 통과시켜 가져 온 원곤데 무슨 말씀이세요. 폐기 처분시킵니까?"

"거물 하나면 된다니까,,,,,, 할 수 없지 뭐. 버리고 그 대신 낼 아침 일찍 나와요. 일곱 시쯤. 같이 갈 데가 있어요. 본문 견본 몇 장 가지고,,,,,,"

"하지만 이건 경비손실이 엄청난데요. 멀정한 멀 왜

"무슨 소리야, 누구 경빈데 그렇게 말이 많소?"

쾅 하고 수화기 내던지는 소리가 들렸다

 

옥신각신하면서 옵셋에서 제판을 내리게 하고, 인쇄소를 나섰을 때는 밤이었을. 재개발지구로 철거당한 동네가 몇 대의 중장비와 함께 거대한 쓰레기의 산이 되어 앞을 가로막고 있는 그 뒤쪽으로 나는 돌아갔다. 일변 밀어 붙여놓고 다른 폭으로는 바로 정지 작업으로 들어간 그 일대는, 밤이어서 그런지 얼어붙은 적요에 휩싸여 있었다. 선사 시대의 괴물 같은 그 쓰레기 산의 윤곽 밑으로 스며들어가 용변을 보고 있는데, 앞이 막히는 듯한 느낌이 왔다. 일을 보고 나서도 그 느낌은 없어지지 않았다. 토악질 기분과도 비슷한 그것은 곧 어마어마한 정욕으로 변해 내 아랫도리를 후려쳐 왔다. 그보다 더 심한 감정의 혼란 속에서도 끓어오르지 않던 외침이 내 속에서 끓어올라왔다.

그것이 사장에게로 향한 것인지 부인에게로 가는 감정인지 아니면 박 교수에게로 향한 것인지 나는 분별을 할 수가 없었다.

시키는 대로 하마. 충성이라도 맹세하마. 좋아서 하는 일을 이런 식으로 중단시키지만 말아다오.

외침은 계속 끓어올라왔고, 으윽 으윽 하는 그 외마디 비명을 지치지도 않고 나는 계속 쓰레기더미 속에 부어넣었다.

사장이 하나면 된다고 하던 그 거물은 일계 선생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일계 조 남기 선생 - 국문학계의 태두다. 팔순이 벌써 넘어 노환으로 두문불출이었으나 아마도 종신이 가깝다는 풍문들이 돌았음인지 지난달부터 두어 군데 잡지들이 특집을 다루기 시작하고 있었는데, 사장의 머리가 그제서야 그쪽으로 돌아간 것이다.

"앞도 못 가리는 노인을 왜 이렇게 괴롭히려는지 모르겠어--- 박 교수나 사장이 같은 제자들이라 해도 그렇지. 이제야 진짜 봉을 잡았다고 머리가 돌아 버린 게 아닌가."

역시 같은 호출을 받았음인지 스팀도 아직 돌지 않는 방에 벌써 나와 덜덜 떨고 있던 김 선생이 발을 바꿔 디디며 말했다. 나는 그런 발상의 계기를 물었다.

"웃기지도 않아."

하면서 김 선생이 여성지 한 권을 들고 왔다.

"일계 선생 인터뷰 기사가 여기 있는데 말야. 이걸 본 거야. 여기 밑줄 친 부분이 보이지 ? '우리 아이들'이란 부분--- 일계 선생 자제분들은 지금 미국에서 살고 있는데 임종 때도 부르지는 않겠다는 기사야. 순 엉터리소리지. 일계 선생은 벌써 반 년째 혀가 굳어 말 한 마디 못 하셔. 그런 분이 이런 소리를 했을 리가 있나--- 측근이나 누가 중구난방으로 떠든 소릴 얽어 맞춘 거겠지. 임종에는 자식들을 절대로 부르지 않겠다,,,,,, 재미있지 않어?"

그 여성지는 얼마 전에 점쟁이들의 부적을 대형부록으로 끼어 팔아 물의를 빚었던 잡지였다. 붉은 볼펜 선으로 가느다란 밑줄이 쳐진 '우리 아이들'이란 말은 딱 한 군데 뿐으로 주위를 대강 훑어봤으나 더 이상 그런 단어는 눈에 띄지 않았다. 조작의 느낌은 고사하고라도 왜 자제들을 미국에서 부르지 않겠다는 것인지 부연 설명도 없었고, 그런 맥락도 끊겨 있었다. 아마도 글을 쓴 기자는, 대표적인 한 한글 사전의 편수자이며 수다한 대학에서 거의 생애를 보내다시피 한 선생이나 자녀들의 영광스런 이력들을 앞뒤로 채우다 지쳐서, 조미료를 친다는 기분으로 이 심술궂은 한 구절을 무의식적으로 곁들였을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따분한 기사에 그림 맞추기 같은 퀴즈를 삽입시킨 것이다. 그처럼 고고한 선비정신과 한 나라 문화의 장래만을 일념으로 살아 온 분이 '우리 아이들'만은 왜 임종의 자리에조차 이 땅에 발을 못 딛게 하려는 것인가-보는 각도에 따라서는 그런 의문도 들게 하는 기사였다,

트릭에 걸려들었다는 느낌은 김 선생이나 나의 것이었지, 사장은 광막한 뻘밭에서 한 마리 학을 혼자 발견한 기분으로 그 단어에 빨려들었을 것이다.

꿀과 인삼주와 오동나무 상자 속에 든 도자기 하나를 싣고 차가 출발한 것은 반 시간쯤 후이다. 사장은 직접 볼보를 몰고 있었다. 성북동 산 초입에 있는 일계 선생의 우거 훨씬 저쪽 골목에다 차를 세우고, 우리들에게 짐을 안긴 채 사장은 걸었다. 매서운 바람이 몰아쳤다

그저 그런 크기의 낡은 한옥 대문을 따고 우리들을 안방으로 안내한 것은 중년의 부인이었다. 청년 하나가 뒤란 쪽에서 잠시 얼굴을 내밀다 안으로 자취를 감춰 버린 집안은 적막하기 그지없었다. 일계 선생은 이십 년도 더 전에 혼자가 된 걸로 알고 있던 터였으므로,

는 그 부인이 인척인지 단순히 시중드는 여인인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선생님, 제가 왔습니다."

북어처럼 수척한 단구의 몸이 이불에 둘둘 말린 채 간신히 눈을 뜨고 얼굴만을 이쪽으로 향하고 있는 스승 앞에 꿇어앉으며 사장이 말했다.

"제가 왔다니까요."

장은 느릿느릿 도자기를 꺼내 보였다. 그리고 무릎 걸음으로 다가가 백자의 몸 부분을 스승의 뺨에 잠깐 갖다 댔다. 김 선생이 꿀단지와 술병을 부인에게 건넨다. 사장이 이번에는 인쇄원고와 한지 한 장을 들어 보였다,

"제가 이번에 아이들을 위해 작은 일을 하나 마련했습니다. 도와주십시오."

큰 소리로 말해도 먹은 귀에는 들리지 않을 것 같았으나 이건 그림책이다, 도장을 찍어달라-그런 시늉을 사장은 했다.

"안 된다고 하십니다. "

꿀과 술을 한옆으로 밀어놓고 말없이 지키고 앉았던 부인이 냉랭한 어조로 입을 뗐다.

"돌아가세요, 목욕 시간예요."

사장이 그대로 앉아 있자 몸을 일으킨 부인이 냉큼 이부자리를 안아들었다. 일계 선생이 갓난애처럼 부인에게 안겨서 마루문 저쪽으로 사라졌다. 더 어쩔 수가 없었다.

"삵괭이 같은!"

차로 돌아오면서 사장이 씹어 뱉았다.

"식모 주제에---"

"가정부가 어째서 그렇게 도도하죠? "

아무래도 이상해서 물어 볼 수밖에 없었는데 핸들을 잡은 사장은 대답이 없었고, 침울한 어조로 김 선생이 설명을 했다.

"조 박사...., 시중드는 사람 가리기로 소문이 나 있어요. 마지막으로 갈아댄 식모가 사모님 자리를 차고 앉은 거야. 자제들이 미국에서 얼씬을 않는 것도 그 때문이겠지,,,,,,"

그렇지 않다, 그렇지 않을 것이다,,,,,,고 생각했지만, 여성지의 '우리 아이들'이란 기사가 떠올라, 차창 밖의 을씨년스런 풍경을 나는 내다보았다. 기사의 그 구절도 그럼 부인이 도맡아 나서서 지껄인 말이란 말인가 싶기도 했으나,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튿날 아침에도 비슷한 시각에 우리는 그 집 안방에 앉아 있었다.

어제 일은 괘념치 않겠다는 듯 상냥한 얼굴을 하고 사장은 이번에도 꾸러미 하나를 김 선생더러 건네게 했는데 아마 무슨 약재인 것 같았다. 사장이 봉투 하나와 도장 받을 종이를 따로 꺼냈으나 곁의 부인이 또,

"안 된다고 하십니다."

라고 했다.

부인이 일계 선생의 안색을 살피는 모습은 독특해서 눈을 지그시 내려뜨고 곁눈으로 음미하듯이 이윽히 주의를 기울인다는 식으로, 그 짧은 동안에 가타부타하는 의사가 단번에 통해 버리는 모양이었다.

돌아가세요 하는 말이 나오기 전에, 종이와 봉투를 그대로 둔 사장이 몸을 일으켰다. 신을 레고 축담으로 내려선 사장이 뜰 한복판에 꿇어앉았다, 따라나온 김 선생이 머뭇거리다 사장 곁에 같이 꿇어앉았고, 엉거주춤 선 채 나는 진퇴양난의 처지에 빠졌다

스승의 방 쪽을 향하고 그렇게 꿇어앉아 사장은 눈을 감고 있었다.

부인이 방문을 열고 나서면서 마당으로 봉투와 종이를 던졌다. 인장을 받을 한지는 공중으로 날고 돈 다발이 비죽이 내민 봉투는 내 발 앞에 떨어졌다. 부인의 입에서 사투리가 터져 나왔다.

"해도해도 너무 한다. 우리 주인이 돈 몇 푼에 떨어질 양반으로 알았등교? 도오채 이기이 무슨 짓들이라요?"

족히 2,3분 동안이나 사장은 아랑곳 않고 그대로 앉아 있었던 것 같다. 부인이 앙분한 기색으로 뜰 쪽을 흘기듯 하면서 쾅 하고 문을 닫고 도로 들어갔다. 김 선생이 일어나 봉투와 담 밑에 떨어진 종이를 주워왔다

도오채 이기이 무슨 짓들입니까 하고 차 속에서 김 선생이 흉내를 내며 웃었으나, 핸들을 쥔 사장이 사납게 그를 노려보았다.

"김 선배님, 이게 장난인 줄 아쇼?"

장난이 아니면 무어란 말인가 하는 반격이 나오기를 기다렸으나, 우거지상으로 표정이 변한 김 선생은 차창 밖으로 고개를 돌려 버렸다

사흘째 아침에는 김 선생 대신 사장 부인이 운전대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 회사에서 출발해서 성북동 고개를 넘는 동안 어느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차에 오르면서 부인과 인사는 했으나 내 바지에 대담히 손을 갖다대던 그런 기미는 그녀의 어느 표정에도 없었다. 기묘한 것은 대문을 두드리자 이쪽인 줄 뻔히 알면서도 일계 선생댁의 그 부인이 어김없이 문을 따 주었다는 점이다.

사장 부인이 그 뒤를 따라 마루로 올라갔고, 이번에는 사장이 바로 뜰 한복판에 꿇어앉았다. 진퇴양난인 채 나는 또 엉거주춤 그 곁에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때도 족히 4,5분 동안을 그러고 있었던 것 같다. 확실한 것은, 도깨비장난 같은 그런 어처구니없는 제스처를 하고 있는 사장에게서 어딘가 집요한 의식의 느낌 같은 것이 전해져 왔다는 사실뿐이다. 가슴 쪽으로 턱을 당기고, 사장은 하명을 기다린다는 식으로 의연히 눈을 감고 있었다. 도장 받은 종이를 손에 든 사장 부인이 곧 방문을 열고 나왔다.

차를 몰면서 주인공이 눈물을 흘린다는 상황 같은 것은 영화 신에서나 본 기억이 있지만, 그 비슷한 장면이 돌아오는 길의 찻속에서 벌어졌다

"나는 안 되는데 왜 임자는 단번에 통과지?"

핸들을 움직이면서 앞을 쏘아본 채 무덤덤한 어조로 사장이 입을 뗐다,

"몇 장 넣었길래?"

사장 부인이 역이 무덤덤한 소리로 받았다.

"석 장."

"그러니까 안 되지. 나는 한 장 넣었어."

"역시 나보다는 한 수 위군. 간도 크고."

"! 계집애들은 나보다 훨씬 많으면서,,,,,,"

싸늘한 어조로 부인이 받았다. 질투인지 질투를 부추기는 소린지 그들은 제삼자가 뒤에서 듣고 있다는 것쯤 아랑곳하지 않았다.

"빌어먹을! 그 쌍놈의 여편네가 선생님을 팔아먹고 있어,,,,,,"

스승이 매물로 내 놓인 게 사실이라면 그것을 산 사람이야 누구든 상관이 없다는 투로 사장이 내뱉았다. 백 미러로 가 있는 내 눈길을 그제야 의식했음인지 흘낏 그쪽을 향한 사장의 시선에서 눈물이 번쩍했다. 한 장이니 석 장이니 하는 것은 십만이나 백만을 가리키는 단위였던 모양이다.

침묵이 왔다. 이들 부부간의 냉기류나 나의 처지가 불을 보듯이 분명해진 것도 그때다. 그 거리감은 강철보다 견고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말고 할 도리도 이미 없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제본이 끝나 케이스에 들어간 책이 출고가 되기까지에는 다시 한 달이나 유예가 생겼다. S사의 비슷한 전집이 한 발 앞서 벌써 나와 있었던 것이다. 50권 짜리의 이 전집에는 다행히 서넛 외에는 이쪽의 만화가 이름이 끼여 있지 않았다. 그 한 달 사이에 두어 군데 일간지에서 왜색 만화를 개탄하고 매도하는 5단 특집 기사가 거의 동시에 터졌다. 그 기사의 배후에 사장이 관여하고 있었는지 어쨌는지는 알 바가 없다. 어쨌든 왜색의 본보기로 기사에 들어간 몇 개의 컷이 S사 전집에서 발췌가 된 것이었음은 분명하다.

일계 조 남기 박사 최후의 감수(監修) - 그런 대문짝만한 캡션과 함께 첫 세트 전질 케이스의 앞뒤와, 띠와, 팸플릿 전단광고에 어마어마하게 확대된 일계 선생의 낙관용 도장이 주홍색으로 찍혀 책의 출고가 시작되고, 일간지 두 군데에 사이를 두고 전면 광고가 나갔다.

그 광고에도 2색쇄의 일계 선생 인장이 클로즈업 된 것은 물론이다. 문안에는 선생이 왜 만천하 어린이들을 위해 이 전집의 마지막 감수를 하지 않을 수 없었는가 하는 그럴 듯한 사연이 사진과 함께 들어 있었다. 원고 작성자가 김 선생이었는지 누구였는지는 알 수 없다.

엄연히 생존해 있는 사람을 두고 최후니 뭐니 하는 파렴치는 고사하고라도, 매도 기사가 있었던 뒤끝이라 판매 전망에도 상당한 영향이 있을 것 같았으나, 사장이 노린 것도 바로 그 타이밍이었을지 모른다.

말하자면 이판사판의 모험을 강행한 것이다. 먹혀들면 전면적으로든지 망할 테면 아주 망해 버려라 하는 식이다. 그런 무모한 모험이 박 교수에 대한 경쟁 심리에서 기인한 것이었든, 아이들을 위한 충정에서 나온 것이었든 아무튼 그 어마어마한 광고비와 제작비를 감안하면 어차피 결판은 날 것이었다.

내가 마지막 사표를 쓴 것은 그 무렵이다. 여성지 인수의 전 단계로 (슈후노 도모)(슈후세이카쓰)니 하는 일본 잡지들이 트럭으로 실려 들어오고, 사장이 예의 그 올해의 '빈 봉투 상'을 타게 돼 경사가 겹쳤다고 출판부는 들뜨고 어수선한 분위기에 쌓여 있었다. 왜 관두려 하는가고 사장도 이번에는 묻지 않았다. 그도 나도 서로 너무 많이 알아 버린 것이다. 내 표정에서 전염됐는지 사장의 얼굴도 걷잡을 수 없이 권태로운 그것으로 삽시간에 변했다.

자료들을 훑고 서점을 뒤지고 하면서 며칠이나 걸려서 짠 2세트, 3세트까지의 만화가 인선을 대충 정리해 참고 삼으라고 김 선생에게 넘긴 뒤, 나은 사를 나섰다, 넉 달 남짓 되는 동안에 거기서 내가 맡은 역은 무엇이었을까. 나의 그것이 단순히 빈 자리를 메꾼다는 역에

서 만약 조금이라도 벗어난 것이었다면, 사장이 전부를 거기 걸었다고 큰소리치던 그 '양심'에 잠깐 보증을 섰던 셈이었을까.

미지근한 물에 잠겨 있는 정도로만 사람을 믿을 수 있어도--- 하던 사장 부인의 말이 불현듯 생각나, 눈앞의 그 목욕탕으로 내가 끌려들었던 것은 아니다. 만화가 인선은 초상집을 몇 군데나 들른 듯한 피로감을 찌꺼기처럼 내 속에 남겨놓고 있었다.

언젠가 사장 부인과 저녁을 같이 했던 같은 건물 안에 있는 그 사우나탕은, 저녁 무렵이었는데도 보기보다 한산했다. 보통 공중탕의 다섯 배 정도 비싼 값을 하느라 그런 곳의 탈의실은 대개 내무반 같은 침상 위에 잠잘 수 있는 매트리스와 홑이불이 깔려 있게 마련이다.

"오비 원 케노비! 오비 원 케노비!"

탕에서 나와 이불을 들쓰고 시간여를 정신없이 곯아떨어졌던 성싶은데, 갑자기 그런 외침소리가 들리고 퉁탕거리는 발자국 소리와 함께 복도 쪽 문이 열리면서 전자총을 든 아이 하나가 탈의실로 들어섰다. 가운 위로 얼굴은 열 살 정도나 먹어 보였지만, 첫눈에도 과잉 영양으로 이상비대증이 된 아이였다. 씨름꾼 같은 몸을 한 아이가 탈의실을 한 바퀴 휘젓고 눈을 두리번거렸다.

"다스 베이따가 온다, 오비 원 케노비! 레이아 공주는 어딨어?"

전자총을 난사하면서 아이가 침상 발치에 쪼그리고 몸을 숨겼다.

"루크! 루크!"

하는 소리가 복도에서 들려 왔다.

"레이아 공주는 안전해, 한솔로를 불러라!"

탈의실 안으로 가까워진 소리가 영락없어, 급히 나는 홑이불을 머 리 위까지 들썼다. 사장은 들어서면서 아이와 한바탕 총격전을 벌였다. 두서넛 누워 있던 손님이 그 기세에 눌려 아무도 항의를 못했다.

옷장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부스럭거리는 봉지와 쩝쩝거리는 소리들이 들려 왔다. 아이가 과자를 꺼내먹는 모양이었다. 오비 원 케노비는 공상과학 영화 (스타워즈)에 나오는 정의의 기사이다. 은하 제국의 악의 화신인 다스 베이따와 광선검 대결을 벌이며, 초능력으로 위기에 처한 주인공 루크와 레이아 공주를 그때마다 구해낸다. 한솔로는 우주 밀수업자. 영화는 1편밖에 들어오지 않았지만 (제국의 역습)이니 (돌아온 제다이)니 하는 2, 3편의 영화 스토리가 이미 만화화돼 소개가 됐다. 정신력 하나로 엄청난 자력 빔도 무기력하게 만들 수 있는 오비 원 케노비. 제다이의 그 장로 기사가 사장이라면 레이아 공주 역은 사장 부인이 맡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옷장 모서리에 잘못 부딪쳤는지 아이가 에-하고 찡얼거리더니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사장이 아이를 얼르면서 데리고 나가는 기척을 느끼고 급히 일어나 나는 옷을 입었다. 그들이 떠들던 침상에는 과자봉지니 만화책들이 흩어져 있었다

미심쩍은 기분으로 허리띠를 매며 가까이 갔다가 거기 엎어져 있는 (만화 삼국지)를 나는 집어들었다. 무심히 책장을 넘겨 가는 곳에 붉은 줄을 세 겹 네 겹으로 둘러 놓은 것이 눈에 들어왔다.

삼고초려(三顧草廬) - 이른바 현덕이 제갈공명을 전쟁에 끌어내기 위해 세 번이나 그의 우거를 찾는 장면이다. 무수한 작은 동그라미로 표현된 눈 내리는 배경이 어딘가 낯익다 싶어, 공명이 잠든 방을 향해 뜰에 읍하고 선 장비, 현덕, 관우의 뒷모습을 재삼 나는 들여다 보았다. 껑충한 키의 김 선생과 관우의 모습이 겹쳤다. 허리띠를 잡은 채 나는 웃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