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단편소설2

31. 밤의 창변

자한형 2022. 3. 5.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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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창변(窓邊) 이제하

 

1

 

() 하나가 오토바이 뒤에 수녀 하나를 태우고 산 속으로 들어간다.

새벽 3, 전화벨이 울린다.

없어요? 없어 ? 없으면 제발 관둬, 하고 사이를 두고 악쓰는, 혹은 애걸하는 듯한 그 소리를 듣고는 있으나, 그는 채 잠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다. 머리는 깬 것 같은데 아랫도리가 말을 듣지 않는다. 어디선가 지금의 이런 상태와 흡사한 처지를 읊은 듯한 시()를 읽은 기억이 있다--- 나의 몸의 반()은 꿈속에 있고 나머지는 진흙에 잠겨 있어요. 쉬잇, 아무 말도 말아주세요---

그때는 시의 작자가 여자라고만 생각했었던 것 같은데 지금 새삼 싯귀가 떠오르고 보니 작자는 남자임이 분명하다. 말씨는 나긋나긋하게 되어 있지만, 여자는 이런 식으로 사물을 양단(兩斷)해서 생각하지는 않는다. 설사 두 토막이 난 물건이 코 앞에 디밀어져도 여자들은 어느 한쪽밖에는 움켜잡지 않는다. 욕심이 없어서가 아니다. 세계를 둘로 생각하고, 나라를 둘로 생각하고, 자신마저 둘쯤으로 생각할 수도 있어야 할 텐데 현실 감각이 단세포로 이루어져서 그런지 언제나 자신은 하나뿐이고 세계도 하나라고만 생각한다. 그러지 않을 때는 제 자식밖에 생각하지 않는다. 자기통제구조랄까 제어 능력이랄까 아무튼 그런 브레이크장치 같은 것이 근본적으로 여자에게는 없는 것이다. 여자의 본성은 보다 막무가내고, 독하고 악질적이다...... 밑도 끝도 없는 그런 상념에 짓눌리면서 이불을 들쓰고, 그는 잠 속으로 도로 기어들어 가려고 필사적으로 버둥거리기 시작한다,

그쳤구나 싶던 전화가 계속 울리고 있다.

팔을 뻗어 수화기를 잡고, 무의식적으로 벌레를 눌러 죽이듯이 그것을 들었으나, 거실 하나 건너 침실에서는 그쪽으로 같이 연결된 수화기를 아내가 벌써 귀에 대고 있다.

그가 들고 있는 수화기에서 계속되고 있는 침묵 저쪽의, 갑자기 정전(停電)이라도 된 듯한 또 하나의 침묵이 그 증거다. 아내가 그보다 늦게 수화기를 잡을 때는, 그것을 드는 소리가 분명히 들린다. 그걸 아는 아내는 언제나 빤히 들여다보듯이 그를 앞질러 간발의 차이로 전화를 받는다. 적어도 이런 전화가 한 달에 두어 번씩 정기적이다 싶게 어김없이 계속된다는 걸 깨닫고 부터서는 늘 그렇다. 그리고 그가 알고 있다는 것조차도 아내는 알고 있다. 말하자면 이불 속에 얼굴을 처박고 야웅하는 식의 숨바꼭질이다.

여보세요, 라고 갈라터진 음성으로 그가 받고, 아내는 숨을 죽인다.

, 선희야--- 하는 꺼져드는 듯한 소리가 드디어 수화기 속에서 들린다.

“---아이 못 낳는다고 너 날 찼지? 네 좆뿌리는 얼마나 오래 갈 것 같으니?"

신음 같은 깊은 한숨소리가 들지는 것 같더니 찰칵 하고 전화가 끊어진다. 어떤 때는 그런 한숨소리 없이 바로 끊어질 때도 있다.

저도 모르게 수화기를 놓고, 그는 생각에 잠긴다. 조금 전에 꾼 기괴한 꿈을 도무지 이해할 길이 없다. 꿈이 아니라 잠을 막 깨면서 비몽사몽간에 본 환각일지도 모른다. 환각이 아니라면 무슨 이미지일 것이다. 수녀를 오토바이에 태우고 중이 산으로 들어가? 얼굴 모습들은 흐릿해서 도대체 누구를 닳고 말고 할 것도 없이 석연치 않았다. 그런대로 회색 빛 장삼을 걸치고 머리통을 박박 민대질한 중 하나가 겁은 옷을 입은 어리디 어린(그렇게 느껴지는) 수녀를 등 뒤에 태우고 분명히 수풀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아라비아 숫자의 3을 엎어서 먹칠을 해놓은 듯한 거대한 산의 윤곽이며 그 때문에 더욱 선명한 그 위의 희멀건 공간이며가 아직도 뚜렷이 기억에 남아 있다.

오토바이가 무슨 색깔이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빨간색이었던 것 같지만, 이건 틀림없이 꿈을 깬 뒤에 상투적인 고정 관념이 칠해놓은 빛깔일 것이다. 그보다 꿈 전체를 괴상한 느낌의 것으로 물들이고 있는 장본인이 바로 이 요상한 소도구인 성싶은데도 그것이 무얼 말하는 건지, 무슨 상징으로 나타난 것인지 도무지 헤아릴 길이 없다.

오토바이가 보이지 않았다면 수녀도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중이 그런 매개체 없이 어떻게 산으로 수녀를 실어 나른단 말인가. 오토바이를, 가령 그렇게 단순한 매개체로만 생각하면 혹은 이렇게 될지도 모른다. 오토바이,,,,,, 운반,,,,,, 수송,,,,,, 여행,,,,, 마이카------마이카 좋아하시네, 마이카 타령이나 일삼는 쓰레기 같은 인간들, 엿이나 먹으라지. 그 오토바이는 부르릉거리는 소리조차 내지 않았던 것 같다, 꿈이나 환상에 소리 같은 것이 있을 턱이 없지만,

"소리를 들은 듯한 느낌"

같은 것조차도 없었던 것 같다. 중과 수녀를 태운 그 물건은 허공에 붕 뜬 듯이 부드럽게 그러나 미끄러지듯 재빨리 어두운 산 속으로 스며들어가 버렸다. 보이는 그대로 바보 같은 해석이라도 한다면 불교가 가톨릭을 끌고 자연 속으로 사라진다는 말이 된다. 흑은 석가가 하느님을 업고 병풍 속으로 들어가 버렸는지도 모른다. 도대체 얼토당토않고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엽기적인 색채를 띠고 있긴 하지만 화툿장의 쭉비처럼, 꿈 전체가 어딘가 그늘지고 쓸쓸하고 식물적이다.

거세된 중과 수녀가 숲을 배경으로 같이 등장하고 있으니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 그 쓸쓸한 느낌을 더 이상 침잠하지 못하도록 간신히 지탱시켜주고 있는 것이 오토바이이다. 오토바이는 맡은 역도 생김새도 몹시 익살스럽다. 그러면서도 그는 꿈을 막 깨는 순간,

"이것이 실체(實體)!"

하는 무시무시하게 실감나는 외침소리 같은 것을 어디선가 분명히 들었던 것이다,

머리맡을 더듬어서 스탠드를 찾지만 불이 켜지기 직전의 그 순간이 그는 싫다. 빛이라는 것은 너무나 속도가 빨라서, 그야말로 전광석화 같이 일시에 자신 속으로 들어오는 그 모든 현실을 일시에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느낌은 너무나 빽빽해서, 진흙탕이 아니라 굳고 있는 시멘트 속의 감각이다.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할 때면 그만큼 요즘은 뒤틀리듯이 전신이 뻐근하고 괴롭다. 나이 탓이 아니다. 늙는다고 하는 감각이 실감이라도 난다면 차라리 대처하기가 용이할지도 모른다. 이건 그게 아니라 뒷덜미를 무엇엔가 찍어 눌려서 억지로 담밑 구멍 저쪽으로 쑤셔 넣어지는 바로 그런 기분이다. 도로 눈을 감고 어둠 속을 바라보았으나, 오토바이도 그것을 탄 중도 수녀도 이미 회백질(灰白質)로 굳어서 형체도 윤곽도 분간할 수가 없다.

서재 바닥에 깔아 놓은 침구에서 모로 엎드린 채 받은 전화였으나 믿기지 않는 그 혹독한 쌍욕 때문인지, 그의 몸은 어느새 반듯하게 뒤집혀서 배처럼 천정을 향해 누워 있다. 아이의 새끼손가락 손톱보다 더 작아 보이는 거미 한 마리가 줄을 타고 급히 내려오다 허공 3분지 1쯤 되는 지점에, 딱 멈추고 있다.

침실 수화기후크를 요란하게 눌러대는 달각달각 하는 소리가 이쪽 수화기 밑에서 요란하다. 마지못해 그는 다시 수화기를 집어든다

"나 무서워 죽겠어."

라고 헐떡이는 아내 목소리가 아주 가깝게 들린다.

"그 여자 선희지?"

아내는 도청을 이젠 감추려고도 않는다. 이렇게 되면 아무리 눈가림식 협상이라고는 해도 둘 사이의 그 묵약도 연극도 깨지고 만다. 여태껏 아내는 이런 식으로 선수를 쳐서 먼저 신호를 보낸 일이 없었다. 도청한 결과가 무서워서 옴쭉달싹 못할 지경이 돼도, 도청했다는 사실을 감쪽같이 시침떼고 제 방에서 그를 기다릴 줄 아는 인내심 정도는 갖고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갑자기 그런 인내심도 체면도 내팽개칠 충동이 생겼다는 것일까. 연극을 그만두자는 제의인가, 새로운 연극을 시작하자는 제안인가. 그 분간이 안 가기 때문에 속으로부터

울화통이 치밀어 오른다.

"무슨 소리야?"

하고, 버럭 그는 수화기에다 고리를 지른다.

"죽은 여자가 어떻게 전화를 해?"

"그럼 누구야?"

하고 아내도 악을 쓴다. 아내는 거의 결사적인 것 같다.

"선희가 아니면 누구란 말이야?"

"지난번에는 아무 말도 않더니 왜 이래 ?"

묵약을 아내가 깨버린 이상 할 수 없이 그도 폭로할 수밖에 도리가 없다, 맥이 빠져 그는 아무렇게나 지껄인다.

"동생이나 친구겠지."

한동안 숨을 죽이는 듯하더니 아내는 물러서지 않는다.

"동생을 알아?"

“5년 동안 같이 산 여자 동생을 몰라?"

잔인한 쾌감까지 느끼면서 될 대로 되라 하고 그가 다시 버럭 소리를 지른다.

"지금 미국에 있어."

"미국 있는 여자가 어떻게 전화를 해 ?"

"모르겠어, 나온 거겠지. 친구든지--- 끊어."

도청할 때처럼 아내가 재빨리 수화기 놓기를 기다렸으나 윽 하고 흐느끼는 소리가 대신 들린다. 입맛을 다시고 이번에도 할 수 없이 그가 먼저 수화기를 놓는다. 동생 운운한 거짓말을 눈치챈 것 같지는 않지만, 얼결에 그따위 거짓말을 내뱉게 한 아내에게 또 울화가 치밀어 오른다,

갑자기 두 배의 힘으로 찍어누르는 중압감을 느끼면서 그는 몸을 일으킨다. 아내의 거부가, 혹은 아내의 요구가 현실적인 감각으로 전달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밀어낼 힘이 그에게는 언다. 자칫 잘못 밀어냈다가는 그나마 간신히 유지되고 있는 이런 관계마저 뒤틀릴지 도 모른다. 꿈꾸는 것은 자유지만 현실은 현상유지만이라도 지탱되지 않으면 안 된다.

서재를 나서며 문을 닫자 장막 같은 어둠이 눈 앞에 드리워진다. 노려보듯이 그는 한동안 그것을 바라본다. 그리고는 느릿느릿 그는 아내 방으로 건너간다.

중간에 있는 목욕탕에 들러 손과 아래를 씻는다. 침실에는 따로 작은 화장실이 붙어 있으나 아내가 그런 유의 물소리를 가까이 듣는다는 것이 어쩐지 아직도 그는 견디기가 어렵다. 도어를 제대로 닫았다고는 해도 그러나 이런 오밤중에 침실까지 소리가 안 들릴 리가 없다. 용변을 볼 때는 그 때문에 우선 세면대의 수도꼭지를 우정 양껏 틀어놓지 않으면 안 된다.

아이들 방은 목욕탕과 서재 사이에 있다. 방문을 열고 새삼 들여다보지 않더라도 두 놈이 다 깊이 잠든 걸 그는 알고 있다. 4학년 짜리 둘째 놈은 워낙 고단해서 그렇겠지만 여덟 살박이 막내도 한번 잠에 떨어지면 세상을 모른다. 제 형 얼굴이고 뭐고 가리지 않고 걷어차면서 밤새 두어 바퀴쯤 방을 빙빙 돌면서 내쳐 잔다. 방 온도가 제대로 유지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으나 들어가 이불을 여며주고 싶어도, 불을 켤 용기가 차마 생기지를 않아 그는 단념하고 만다. 아이들 방 앞에 우두커니 멈추고 넋이 빠져 한동안 서 있을 때 비로소 그는 이 세상이라는 것의 실체(實體)가 어렴풋이 알아지는 듯한 그런 기분이다.

분명하지는 않으나 그가 믿을 수 있는 것은 이것뿐이다. 똑바로 몸을 돌리고 이번에는 급한 총무라도 있는 듯이 서슴지 않고 그는 침실로 다가간다

아내의 방은 잠겨 있는 법이 없다, 그가 노상 서재 문을 걸어 잠그고 있는 것에 정면으로 도전이라도 하듯 아내의 그것은 언제나 활짝 열려 있는 상태다. 그 느낌이 그를 무기력하게 만든다. 어쩌다 잠깐 문이 잠겨 있을 때는 생리적인 뒷처리를 한다든가 손발톱을 매만진다든가 하는 그런 때뿐이다. 아내는 손톱 다듬는 것을 남에게 보이기를 싫어한다. 딴 여자들은 그럴 것 같지도 않은데 이건 분명 아내의 미덕 중에 하나라고 할 수밖에 없다.

가운 걸친 어깨를 두 팔로 우벼싸듯이 감싸안고 눈물에 젖어서 아내는 침대에 걸터앉아 있다. 공포로 눈꼬리가 추켜져 올라가 있다.

싫으면서도 번번이 자기가 아내 방으로 끌려들고 마는 것은 결국 이 약간 추켜져 올라가는 눈꼬리 때문이 아닌가 싶을 때가 있다. 그것을 보려고 우정 아내를 성나게 할 수야 없는 노릇이지만 어쨌든 정상적인 것보다 그쪽을 자신이 더 좋아하는 것만은 확실하다. 태평한 상태일 때 아내의 눈은 반달을 엎어놓은 듯이 아래로 처진다.

"아무 말도 말아!"

무어라고 입을 떼려는 기색을 알고 그가 미리 윽박지른다. 그녀의 눈꼬리가 조금 더 위로 올라간다. 모든 절차 모든 말을 일거에 생략해 버리고 한시 빨리 종점에 도착해서 쉬고 싶다는 생각이 이럴 때면 면역도 외지 않고 늘 그를 덤벙거리게 만든다.

허리와 어깨를 오그라뜨리고 내린 두 팔로는 방어하듯이 아래를 가린 채 아내는 홱 고개를 꺾는다. 그의 몸의 상태를 감지하고 그런 진행을 바꿀 수가 없다는 것을 어쩔 수 없이 깨달은 것 같다. 이때부터 그녀는 결사적으로 그를 바라보지 않는다.

그 모습을 잃지 않으려고 눈을 감고 뺏뻣이 선 개, 그는 초조하게 그러나 천천히, 잠옷 단추를 풀기 시작한다. 런닝을 빼고, 팬티를 걷어내고, 몸을 펴면서 그는 벌거숭이가 된다. 그는 팔과 다리로 흡사 네 발 달린 동물처릴 바닥을 짚고 그 위에 엎드린다.

아내는 그러나 쉬이 움직이지 않는다. 처음에 그것은 판에 박은 듯 한 절차처럼 언제나 그렇게 진행된다. 물에 뛰어들지 못해 갈팡질팡 하는 수영 선수처럼 그녀는 망설이고, 쭈볏거리고, 딴전을 피지 못해 기를 쓴다. 보지 않더라도 그 기색은 너무나 역력하다.

"내가 왜 이런 짓을 해야 해?"

하고 드디어 아내가 때로 울면서 몸을 일으킬 때 는 죽은 듯이 엎디어 있는 그의 상태도 대개 한풀 꺾여 있을 무렵이 다

그런데 오늘은 어딘가 절차가 뒤죽박죽이다. 전화로 미리 시비를 걸고 창피하게 울음까지 보였기 때문에 아내는 혼란을 일으키고 있는 지도 모른다.

"숭해 이따위 짓"

이라든가

"언제까지 이래야 돼?"

하는 식의 말도 없이 몸을 일으킨 아내에게서 여태껏 못 느끼던 거친 기미마저 풍겨오고 있다.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나 아내는 진짜 성이 난 모양이다.

하긴 당신이라고 언제까지나 죽어지내란 법이 없지, 라고 그는 생각한다. 늙으면 죽는다는 불가항력의 사실이 모든 사람들 앞에 공평하게 놓여 있는 동안은 누가 누구를 어쩌고 말고 할 계제가 실상 있을 턱이 없다. 눈물자국 따위 씻을 생각도 않고 채찍과 콘돔을 양손에 든 채 거친 숨을 몰아쉬며 그 앞에 버티고 선 아내가 웬일인지 측은한 느낌마저 들어, 그는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시작해"

하고 그는 낮게 중얼거린다

최초의 채찍이 떨어진다. 그의 등짝은 찬물을 끼얹은 듯이 얼어붙고, 이어 단거리 선수의 걸음 같은 근육의 빠르고 미미한 저항감이 뒷머리 쪽으로 기어오르는 느낌이 온다.

두 번 째 채찍이 떨어지고 세 번 째 채찍이 등에 떨어진다, 하지만 그의 남근(男根)은 이 정도 질타(叱咤)에는 파직 꿈쩍도 하지 않는다. 되려 한술 더 뜨듯이 번데기처럼 움츠러들며 결사적으로 작아지고만 있을 따름이다.

질타라고 하지만, 아내의 무슨 꾸지람 따위를 그는 바라고 있는 것이 아니다. 대등한 위치에 서 달라, 나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아내도 뭣도 아닌 제 삼자의 자리로 제발 돌아가 달라 - 그가 바라고 있는 것은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채찍질을 하는 처음에는, 번번이 아내는 그의 이런 심사를 전혀 알아주지 않는다. 어쩔 줄을 몰라 머뭇거리고, 상처를 낼까봐 망설이고, 따라서 그의 채근을 당하고 드디어 날아오는 채찍에도 적의(敵意) 같은 것은 들어 있지 않다. 그는 얼르고 꾸짖고, 뒤돌아보며 욕설을 퍼부었다. 아내가 그의 심사를 어렴풋이나마 헤아리게 뵌 것이 어느 때부터인지는 모르지만 그렇더라도, 시작할 때는 으레 도로아미의 자리로 되돌아와 버리고 만다. 아무튼 모든 암컷이란 생물은 그 근원적인 본능으로부터 절대로 선수(先手)만은 치지 않겠다는 식의, 약아빠진 구조로 이루어져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수컷의 적의(敵意)를 충분히 인지하고, 양해까지 구한 뒤에야 비로소 이빨을 드러내는 것이다. 육체적 갈망이 격심해서 자제력을 잃을 지경에 이르러도 그것은 마찬가지다.

그의 적의가 인내심을 포기하고 드디어 자포자기의 상태로 돌아간다. 더 이상 위축할 수 없는 페니스가 연줄이 끊어지듯 느슨해지며 반사적인 힘으로 발기한다. 힐끗 돌아보았을 때, 아내의 눈초리가 그것만 남아 번쩍이는 듯이 느껴졌다. 공포와 히스테리가 격심한 분노로 바뀌어져서 오늘은 비교적 반응이 빠른 편이다. 그는 다음 차례인, 몸을 일으키고 이쪽 상태를 과시하는 순서도 잊고 움치고 엎드린 채, 좀 더 좀 더 하고 속으로 중얼거린다. 그의 등짝에 가로 세로 난 채찍 자국이 이때서야 비로소 선열한 통증을 동반하고 되살아난다. 그것이 터져 피를 보고, 설사 아내의 혀가 그것을 핥는 한이 있더라도, 이제는 더 버틸 수도 있다는 자신감에 그는 부르르 몸을 떤다. 열기(熱氣)의 띠 속으로 한 발을 들여놓는 아내의 몸은 무슨 전자기기와도 같이 그처럼 민감하다. 여기서 멈추고 말면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불능의 상태로 떨어지고 만다는 사실을 레이다처럼 무의식적으로 포착하고 그제서야 그것 자체만의 순수한 것인 듯한 힘이 아내의 팔뚝에 가해진다. 여자의 모지락스러움이라고는 하지만, 그것은 일종 비애(悲哀)와도 같은 감정이다.

이 집을 살 때 아내는 열적은 표정으로 침실의 방음설비 같은 것을 대견해 하는 듯한 말을 보태기도 했지만, 설사 아무리 완벽한 설계와 장치의 집이라 하더라도 칠흑 같은 밤에 일어나는 울림이 밖으로 새어나지 않을 까닭이 없다.

채찍의 진동에 제일 민감하게 잠을 깨는 것은 새들이다, 이층 베란다 한 귀퉁이에 줄을 잇대어 포개어 놓은 사과 궤짝으로 만든 보금자리 주위에 한데 엉켜서 어깻죽지에 군밤이라도 파묻듯이 하고 잠들어 있던 비둘기들은 처음 한 농이 놀란 듯이 목을 빼고, 키어 이놈 저놈이 차례로 그것을 기웃거리면서 동요하기 시작한다. 보금자리 구멍에서 머리만을 내민 놈들은 동감을 표시하듯이 꾸룩거리고, 바깥에 있는 놈들은 사이를 두고 발을 바꿔 딛고 있다, 베란다 저쪽의 겹친 지붕들 너머로 운하 같은 암울한 군청(群靑) 하늘이 이제는 열 마리

이상으로 꼿꼿이 모가지를 쳐든 실루엣을 도려내듯이 선명히 그려 보이고 있다. 채찍의 울림이 계속돼도, 그러나 새들은 날아오르지 않는다. 울림이 전달될 때마다 술렁거림에도 변화가 생기지만, 무엇인가 발목을 붙잡아매고 있는 힘이 너무 끈덕져서 새들은 그것을 떨쳐낼 수가 없다. 그 중에 몇 마리는 곧 공중으로 차 오를 듯이 꽁무니 쪽을 긴장시키고 있으나, 이내 단념하고 딴 놈들처럼 발을 바꾸면서 기웃거리기를 계속하고 만다.

아랫도리에 무게 없는 저울추만 남은 듯한 기분을 짓씹으면서 그대로 그는 어느새 새들 틈에 서 있다. 그러나 손을 내밀어서 새를 만질 마음이 그는 일어나지 않는다. 곧 비상(飛翔)으로 바뀔 지경으로 동요가 심해져도 이쪽에서 움직임을 죽이고만 있으면 새들은 한밤중에는 좀처럼 날지 않는다. 지금은 새와 맞서 있는 상태라 숨소리조차 신경을 써야 하지만 어쩌다 밤중에 아무도 모르게 다가가 손바닥을 펴고 잠든 새의 어깻죽지를 다잡아 쥘 때는 동물의 잠든 감각이란 이렇게도 아둔한 것인가 싶어 아연해질 때가 있다.

어둠 속에서 주위가 다시 조용해진다. 새들은 이제 기웃거리지은 않고 있으나 경계를 늦추지 않고, 뚫어질 듯이 그를 노려본다. 교섭이 있는 날만은 아내 곁에서 자고도 싶지만, 그보다 먼저 샤워를 끝낸 아내는 지금 마치 세상 끝에 다다른 듯한 소리로 코를 골고 있다.

단추가 빠지고 머리가 헝클린 단정치 못한 모습으로 무언가 생각의 실마리를 찾으려고 그는 우두커니 베란다 바닥을 들여다본다

 

2

 

아침 식탁에는 수국(水菊)이 장식되어 있다. 맏이인 딸이 못견뎌 할 정도로 특히 좋아하는 꽃이다. 어딘가 젖은 빨래를 구겨놓은 듯 석연치 않은 느낌을 주는 것 같아서, 그는 꽃병의 식물을 자세히 들여다본다. 아래 두 놈은 벌써 정신없이 밥을 퍼먹고 있고 아내는 싱크대의 그릇을 만지고 있다.

"오늘은 종일 꽉 찼어, 강의가."

아내는 돌아보지 않고 혼잣말처럼 큰 소리로 중얼거린다. 그러니 당신 딸년 빨리 불러 내려서 밥을 먹여요.

신문을 접어두고 이층 쪽을 그는 잠깐 바라본다. 가스레인지 위의 국 남비를 살피느라 아내는 어깨를 기울이고 있다. 그 아이는 당신이 책임져야 해요 하는, 벌써 백 번 이상이나 들은 듯한 착각이 드는 무언의 아내 목소리가 쥐어치듯이 들리는 순간이다. 아내는 허리를 펴

고 그를 돌아보면서 애매한 미소를 짓는다. 책임질 정도가 아니라 전생의 무슨 연인처럼 딸의 일거수 일투족이 그는 골수에 사무쳐 있다.

세상 사람들의 통념과는 달리, 결혼 처음에 낳은 것이 딸이 아니었더라면, 그는 어디론가 도망이라도 치고 말았을 것이다. 이층을 향해 그는 외쳐보긴 하지만 웬일인지 딸의 이름이 소리가 되어 쉽사리 입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다리에 붕대가 감긴 비둘기 한 마리를 두 손으로 쥐고 이층 계단을 아이가 내려온다. 단발머리가 어깨 가까이 늘어져 흔들리고 있다, 길을 들이느라 끈을 했다가 놓친 듯한 상처투성이 새 한 마리를 딴 새들 틈에서 찾아내 가지고 딸은 며칠째 치료를 하고 있었다. 이제 날려보내도 괜찮다고 판단이 섰는지 걸음걸이가 몹시 조심스럽다. 베란다 문을 열고 놓아주면 될 것을 왜 여기가지 갖고 내려오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자, 그는 가슴이 철렁하는 느낌이다. 자신의 상식으로도 지금은 납득이 되지 않는 간밤 아내와의 그 괴상한 줄다리기를 아이는 알고 있는 것이나 아닐까, 간밤 이 층 아이 방 창문 곁에 시간여나 우두커니 서 있었던 자기를 잠깬 이 놈이 몰래 엿보기라도 하고 있었다면

"아빠, 이 새 바보야"

라고 딸이 말한다.

"내보내도 날지를 않아요."

그는 엉거주춤 일어서서 딸의 손에서 새를 옮겨 받는다. 그리고 현관문을 열고 마당으로 나간다.

"새는 아빠에게 맡겨!"

둘째놈이 소리를 지른다. 그러고 그를 따라 밖으로 나온다.

그는 새의 머리 쪽으로 입을 가져가 쉬잇 소리를 내면서 몸뚱이를 한번 세차게 흔들고는 힘껏 그것을 공중에 던진다.

떨어져 내리다가 결사적으로 날개를 펴고 푸드득거리며 날아오르는 새를 창문 너머 주방에서 아내가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손을 씻어."

하고 아내가 명령조로 말한다. 딸도 그도 고분고분 그 말에 따른다. 젓가락을 잡고 한 10초쯤 딸은 심각한 표정으로 그를 째려본다. 늘 하는 버릇이다. 그는 비로소 가슴을 쓸어 내리는 듯한 기분이다. 딸은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도 맞장구를 쳐서 딸을 노려본다. 고교 1년생인 딸은 어이없게도, 학생 소요에 옭혀 들어 교도소에 있는 어떤 대학생 녀석을 사랑하고 있다.

아내는 그 사실을 전혀 모른다. 우연히 혼자서만 알게 된 그 괴로운 사실도 몰래 괴로워하면서 어느 정도 견뎌내고 보니 의외에도 지금은 자신의 전체적인 정신상태랄까 그런 균형을 잡아주는 요소가 되고 있다. 달에 꼭 두 번씩 일요일을 통째 까먹으면서 아이는 지방에 있는 교도소로 면회를 갔다오지만, 딸의 그런 풋풋한 열정이랄까 집중력이랄까가 요즘 세상에 그게 어딘가 싶을 정도로 대견하게까지 느껴지는 것이다. 녀석이 벽 속에 갇혀 있는 동안은 아이도 평행대 위에서 떨어지지 않으리라. 요새 애들이 밖에 나가서 도대체 어느 정도 자유롭게 자신을 가눌 수가 있는지 고교생들이 드나드는 디스코클럽이란 델 한번 가보고 와서 그는 통히 자신이 서지 않았던 것이다.

930, 아이들과 아내가 바람에 휘불리듯이 학교로 가버리고 먼 인척 되는 파출부 아주머니만이 지키는 텅 빈 집안을 그도 빠져 나온다. 택시를 잡으러 내려가는 길이 두 가닥 레일이 되어 발바닥을 뒤 쪽으로 끌어당기는 것만 같다. 그만큼 그는 아랫도리가 허한 기분이다. 간밤 그는 가슴속의 그 모든 억압감과 문제들을 떠맡기듯이 통째 아내의 밑에다 쏟아 붓고 나온 것이다, ,,,

사무실에는 벌써 손님이 기다리고 있다. 첫손님이 여자일 때는 대개 그날 일진도 사납다. 이혼 문제를 엉뚱하게 잘못 듣고 왔거나 세금망에 걸린 복부인 유의 하소연이 고작 용건의 대부분이어서 그런 날은 하루 종일 이빨을 닦지 않은 듯한 기분이 따라 붙는다. 그런데 오늘 여자 손님은 의외에도 젊고 팔팔하다. 서른을 갓 넘었을까, 그쯤으로 보이는 둥글고 가무잡잡한 얼굴과 작은 몸집 전체에서 터질 듯한 탄력이 은밀히 전해져 오고 있다.

"나라에 뺏긴 땅을 도로 찾으려 하는데요."

라고 여자가 입을 연다.

"터미널 앞에 땅을 조금 갖고 있다가 76년 수용령에 걸렸어요."

'서민은행'이 서민 주택을 짓는다기에 제소를 망설였다가 상가 아파트를 짓는 꼴을 보고 지주연합체를 만들었다. 쥐꼬리만한 환불액을 공탁금으로 걸고 소송과 함께 온갖 탄원 운동을 시작했다. 시장(市長)도 건설부 장관도 만났고 전단이며 성명 광고며 단식 투쟁이며 또는 탄원서도 수 차례 관계 기관이 직접 접할 수 있도록 손을 썼다, 일심에서 패하고 항소를 했으나 최근 또 패소 판결이 내려서 공탁금 5백만 원만 달랑 남게 되었다. 그걸로 단독으로라도 다시 소송을 하려고 한다

- 조리 있는 말투로 시원시원하게 털어놓는 여자 얘기의 요지는 대개 그랬다.

"가망이 있겠어요, 선생님 ? "

"글쎄---, 거의 가망이 없겠는데? ,,,,,, 그거라도 찾아서 요긴하게 쓰지 왜 그러우?"

"그러려면 진작 찾아 샜죠. 그때 환율과 지금 것을 비교해 보세요. 해야 할 공부도 못하고 6년 동안 싸운 것을 생각하면---"

"한창 신랑감을 찾을 나이였을 텐데,,,,,, 실례지만 어떻게 땅에 다 관심이 갔소. 뚱단지 같은데?"

딸이 이런 식으로 자랄지도 모르겠다 싶어 그는 어쩐지 놀려보고 싶은 충동을 누르고, 실실 웃으며 여자를 넘겨다본다. 여자는 그러나 쉽게 거기 말려들지 않는다.

"국민이 제 땅을 쬐끔만이라도 갖고 싶다는 게 이상해요?"

어리석고 정직해 뵈는 눈초리로 짐짓 둔한 체하면서 여자도 빤히 그를 마주본다. 당돌하고 만만치가 않다.

"가망 없어. 단념해요,,,,,,"

"지금은 구정권때가 아닌데두요?"

……"

대답 안 하는 그를 힐책이라도 하듯 여자 얼굴이 갑자기 굳는다.

"젊은 애가 리더라는 걸 알고 깔봤는지 은행장이란 사람이 몰래 불러서 회유를 하더군요,,,,,, 소송을 포기하면 당신만은 손해를 안 보게 구제해주마,,,,,, 딴 지주들은 모두 나이 많은 분들이니까 어림어림 쉽게 까뭉개질 것 같았던 게죠."

"그때 은행장이 누구였소, 거 나쁜 사람이군?"

"이러지 마세요."

하고 아닌 밤에 홍두깨를 내밀듯이 여자가 몸을 일으킨다,

"선생님도 말투가 같네요. 은행장과 같은 계열이시면서......"

'계열'이란 말이 생소해 어리벙벙해 있는 사이에 여자가 까닥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문을 열고 나가버린다.

부풀어올라서 크게 한번 헐떡이듯이 오르내리던 여자 가슴의 잔상(殘像)이 그냥 눈앞에 남아 있다. 여자는 성이 났던 것이다. 제풀에 엉덩이를 들고 일어서서 망설이다가 그도 계단을 따라 내려간다. 빌딩 출입문 앞에서야 간신히 그는 잡아채듯이 여자를 불러 세운다. 평소의 그답지 않게 내장 속에서 금방 끓어올라 부글거리고 있는 이 불의의 열패감을 보상받으려고 그는 우물쭈물 여자 앞으로 다가간다.

"그런 실례의 말이 어디 있어, 같은 계열이라?,,,,,, 한번 집어넣은 땅을 시()가 도로 게워놓을 것 같소?"

"건방진 소리해서 미안해요,,,,,, 게워놓지 않는다면요? "

여자는 들어올린 손바닥으로 햇빛을 가리면서 언제 그랬더냐는 듯 평온한 얼굴이었으나 그의 질문을 다시 당돌하게 냉큼 되돌려 버린다. 말문이 막혀 그는 찬찬히 여자를 바라본다,

"공탁금마저 녹게 돼."

"염려 마세요. 소송할 생각은 없으니까요,,,,,, 한국 중산층 지식 계급의 의식 수준이 어느 정도인가 그 조사를 하고 있어요. 그 돈으루. 비용이 꽤 들어요. 데이타를 수집하고 통계를 내는 거죠. 한 백여 명 조사를 했어요. 선생님은 불가(不可)쪽이네요."

"한국에도 중산층 지식 계급이란 게 있었던가?"

"편의상의 명칭이죠. 지식은 있되 지성은 없는 계급, 돈은 있되 지식도 지성도 없는 계급이 그냥 중산층이죠. 쓰레기로 치면 가장 처치 곤란한 쓰레기가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죠. 폐품비닐 같은."

"지성이 뭔데"

"왜 이러세요? 행동하는 마음."

여자의 대답은 명쾌하다. 부신 듯이 여자를 바라보며 그는,

"이놈은 틀림없이 해방동일 것이다"

하고 깨닫는다. 해방동이거나 그 이후 세대가 아니라면 이런 식의 대답은 하지 못한다. 모든 해답을 Ox식으로밖에 풀지 못하는 세대. 얼치기 문학교수, 얼치기 철학 교수에게 번들레하고 알쏭달송하고 화려하고 속이 텅 빈 형용사밖에는 배우지 못한 세대. 60년대 초에 한창 유행하던 재치 문답과 스무 고개가 밑거름이 된 세대. 해답은 쓰되 해답의 내용은 개떡만큼도 믿지 않는 세대---

“---행동하는 마음이 지성이라? 구체적으로 어떤 거요, 그게 도대체?"

여자가 또 빤히 그를 바라본다. 그의 저의를 깨달은 컷 같다. 여자의 입술이 묘하게 뾰죽해진다.

"행동 못하는 마음을 뒤집어 엎어 찢어 발겨 놓은 게 그거겠죠, 선생님 경우엔."

……"

뒤도 돌아보지 않고 멀어져 가는 여자를 멀거니 보고 섰다가 그는 몸을 돌리고 도로 사무실로 올라온다. 대낮에 그것도 만인이 보는 앞에서 옷을 찢어발기고 여자를 쓰러뜨려보고 싶은 난생 처음 겪는 격심한 충동 때문에 자리에 앉아서도 한동안 그는 어깨를 들먹이고 있다. 일진이 사납다는 정도가 아니라 오늘은 아예 옴이 붙어 버린 것 같다

2, 점심을 같이 한 친구를 따라 그는 병원으로 들어간다. 병원 건물은 우중충한 지하도 앞에 있고 2층 한 간을 빌어 친구는 개업을 하고 있다. 4층 창문 바로 가까이로는 고가도로가 달리고, 친구는 그의 고교 동창으로 두어 해 위의 선배다.

진찰실 안쪽의 밀실 같은 작은 서재로 앞장서 들어간 친구는 소파에 그를 앉히고 자신도 회전의자에 털썩 주저앉는다. 월남 사람들은 맨손으로 밑을 씻고 인도 사람들은 물 담긴 깡통을 왼쪽 손에 들고 다니면서 그 짓을 하지만 종이도 물도 안심이 되지 않아 비누와 샤워꼭지까지 사용한다는 자신의 습관을 친구는 피력한 적이 있다. 자신의 은밀한 사정을 그런 식으로 보답하듯이 그가 털어놓았다는 것은 아니나, 언제부터인지 친구는 그의 상담역을 자청하고 나서서 이것 저것 제나름으로 처방전 같은 것을 충고해 주고 있다.

치과가 전문이지만 육교니 지하도니 그런 볼상 사나운 것들 때문인지 병원은 언제나 한산한 느낌이고 하나뿐인 간호원도 볼 때마다 하품을 씹는 듯한 얼굴이다. 수석(壽石), 동물의 박제, 골프채, 게다가 부적(符籍)까지 액자에 끼워서 걸어놓고 등산모가 서너 개씩 바닥에 뒹굴고 있는 서재를 둘러보노라면 뭔가 잡학 사전을 대하는 것 같아서 그는 친구의 정신과의(精神科醫) 연하는 처방을 거의 믿지 않는다. 처방이 중요단 것이 아니라 얘기를 들어줄 이런 친구라도 있다는 사실에 처음부터 뿌듯한 안도를 느끼고 있는 것이다.

"우선 신수부터 보고"

하면서 친구는 검지와 중지 손가락 둘을 그 앞으로 내민다.

"골라잡게."

그 나름으로 그의 정신상태를 살피는 것이다. 손수건과 구두숟갈을 내놓을 때도 있고, 콜라와 사이다 병을 고르라고 할 때도 있다. 오늘은 흐리고 비라든가, 하루 종일 심란하게 바람 불었음, 하는 정도의 일기예보 같은 것인 모양으로 시키는 대로 하긴 하지만, 친구의 그런 진지한 태도가 마냥 웃음을 자아내는 것도 어쩔 수가 없다. 그는 서슴지 않고 친구의 중지를 잡는다. 흐음,,,,,, 하고 친구는 그가 손을 뗀 손가락을 골똘히 들여다보고 뭔가 생각하는 눈치다.

"달에 한번 정도로 그게 서지 않는다는 게 문제가 아니라"

하고 친구가 시작한다.

"내 생각에는 한번이라도 선다는 게 문제인 것 같은데?"

점심 뒤에 잠깐 방심 상태로 망설이던 끝에 정체 불명의 전화건과 간밤의 일을 실토하고 말아서, 짐짓 난처한 표정으로 그는 친구를 흘낏 바라본다.

"그럼 아주 고자라면 좋겠나?"

"컴플렉스 컴플렉스하지만 선희씨 때문이 아니야. 자네 비닐봉지에 정액 담아 가지고 와서 열 올리던 것 생각 안나? 선희씨 산소 지금 어디에 있어?"

"몰라."

하고 풀죽은 소리로 그는 고개를 젓는다.

"그 얘긴 관둬. 죽었을 때 몰라서 못 갔어. 어디 있는지 알아봤자 지금 와서 그게 뭐,,,,,,"

"협박 전화는 짚이는 데가 없어?"

"없어. 인척이나 친구가 앙심으로 그럴 수도 있지 뭐------"

되씹기 싫은 악몽을 수사관처럼 친구가 이런 식으로 갑자기 까뒤집어 보이는 것은 그의 마음속의 짐을 우선 덜어줄 요량일 것이다. 처음엔 칼날 같은 상쾌감을 느끼지 않는 것도 아니지만, 몇 번 되풀이 추궁 당하자 그것도 면역이 돼버렸다. 어이없는 책임을 되려 그에게

돌리면서 물고 늘어져서 선희가 그토록 집요하고 사나운 공세를 펴지 않았더라면 그런 추태를 친구에게까지 보였을 까닭이 없다. 생리적으로 부실하지 않다는 증명서까지 손수 떼준 의사가 이제와서 그걸 꾸짖는 건가 하고, 실감나지 않는 감정으로 막연한 웃음을 띄고 그는

친구를 바라본다.

선희씨를 자네한테서 떼 놓은 것은 이대 독자(獨子)라는 강박 관념을 노상 강요하다시피 자네에게 주입시키려 하던 부모들의 등쌀이었다. 하지만 선희씨가 자네와 정말로 궁합이 맞는 부부였다고 하면 그쯤의 등쌀이나 난소가 없다는 것 때문에 자네가 그 결단을 내릴 수가 있었겠는가, 부모를 적당히 달래고 아이라도 얻어 길렀겠지---

오늘은 '궁합'이라는 묘한 말까지 쓰면서 친구가 인정론적인 이야기를 펴고 있다. 결국 선희와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는 논리다.

"선희씨의 자살이 아니라 원인은 자네 자신이겠지, 아니면 부인이든가...... 자네 부인 박사학위 딴 게 언제지?"

왜 이러는가 하려는데 기회를 주지 않고 친구는 단호하게 말을 내뱉는다.

"부인 두들겨 패는 짓 이젠 관둬. 콘돔 따위 쓰지도 말고---"

……"

"안 되면 안 되는 대로 내버려 두는 거야. 그런다고 부인이 이혼 요구를 하나 뭐, 아들 둘에 딸 하나면 충분하지 않아?"

친구에게는 조각 공부를 하는 아들이 하나 있다. 색맹(色盲)이라는 것이 드러나서 그림을 포기하고 조각 쪽으로 옳길 때, 컬러보다 흑백 텔레비가 나을지도 몰라요--- 라고 그런 소리를 했다는 것이다. 그 얘기를 들었을 때 무엇 때문인지 그는 선회를 생각했고 갈라서지 않을 수 없었던 자신들의 배경 같은 것을 떠올렸던 것이다. 50년대 말이나 60년대를 가령 흑백 텔리비전의 화면 같은 시대라고 단정을 내리더라도, 음영이 짙다고 해서 반드시 내용들이 모두 끔찍이도 알차고 심각했다고는 할 수가 없다. 되려 그 반대였을지도 모른다. 선희와는 사소한 일로 노상 싸움이 잦았고 그걸 못 참게 파는 주위의 분위기 때문에 또 싸웠다. 그런 것을 의미 있는 내용이란다면 또 모르지만 울긋불긋한 70년대 식의 화면이 아무리 경박한 느낌을 준다 하더라도 이쪽에는 최소한의 그런 자연스러움마저 없었던 것이다. 어둡든가 밝든가 두 가지 음영만으로 그들은 왼종일 쥐어짜이고 할퀴이고 하다 못해, 결국은 아무렇게나 내던져졌던 것이다.

"이봐"

하고 친구는 결론을 내리듯이 음울하고 무거운 시선으로 지긋이 그를 바라본다.

"자네는 이제 아이들하고만 살고 싶은 거야. 정확히 말하자면 아들이 아냐. 딸하고만 살고 싶은 거지. 왠지 알아?"

……"

"딸은 아직 처녀니까."

……"

"자네나 나나,,,,,,.우린 이제 늙기 시작한 거야,,,,,,"

 

3

 

우리 같이 죽어버릴까,,,,,, 하는 용렬하기 짝이 없는 말이 처음 누구의 입에서 먼저 발설되었던지는 알 길이 언다. 만에 하나, 자신의 입에서 그 방자하고 치졸한 말이 먼저 발음되었다고 자인하더라도 포복절도할 그 비참한 정사극의 결말에 무슨 미미한 감정의 위안조차도 허용될 리는 없었으리라. 억지든 뭐든 어쨌든 의기투합 같은 것이 되었을 때, 무의식적으로 그의 머리에 떠오든 것은 키니네였다.

어째서 하필 그 구닥다리 같은 약이 그 순간 철석같이 염두에 늘어붙어 버렸는지 지금 생각해도 어이가 없지만, 아마도 그 무렵에는 벌써 사라지고 없던 학질이라는 병에나 쓰이던 누렇고 굵디 굵은 그 알약을 다량으로 복용해야만 비로소 치사량에 이른다는 사실에 교활한 그의 자의식이 일말의 희망을 걸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추위로 전신을 수축시킨 채 통금 가까운 시각에 단간방을 나서서 그는 약을 구하려고 헤맸다. 앙분한 감정의 찌꺼기로서가 아니라면 처음부터 아예 죽을 생각이 털끝만큼도 없었던 그는, 그 때문에 더욱 비참한 심사에 빠졌다. 헤매면 헤맬수록 자신이 수습할 도리 없는 어릿광대가 되어 가는 것을 깨닫고 어느 약방 앞에서 그는 걸음을 멈췄다.

"저것 주쇼,"

비타민제의 무슨 보약이라는 비슷한 생김새의 병 하나를 받아들고 나오자 그는 손톱으로 표면의 레텔을 발기발기 찢기 시작했다.

"키니네야"

하며 그가 손바닥에 수북이 쏟아준 알약들을 선희는 두말없이 입 속에 털어 넣고 꿀꺽하고 물로 삼켜버렸다. 그가 그녀를 진정으로 미워하고, 어떤 희생을 치르고라도 떨쳐 버려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한 동기가 있었다면, 아마 이 일이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녀가 그 낱알들을 비타민제로 알고 삼켰든 순수한 독으로 믿고 집어 삼켰든, 거기에는 일종 황폐하고 위악적인 연극의 냄새가 스며 있었다. 주저 없이 칼을 내려칠 수 있는 것은 극()의 흐름을 따라가는 배우거나 초인에게나 가능한 일이다, 퍼머한 머리가 잘못됐다고 하루 종일 앙앙불락할 수 있는 여자가 어떻게 하루 아침에 초인으로 돌변할 수가 있다는 것일까.

"히힛, 그건 비타민이라구,,,,,,"

하는 계면쩍은 그의 해명에

"이 쓰 레기 같은 자식,,.,,,"

이라고 입 속에서 힘껏 모아져서 날아와 철썩 그의 얼굴을 적시던, 그 모멸 섞인 타액 따위는 차라리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는 자신에게로 향한 그녀의 다함없는 적개심을 그제야 구체적으로 감지하고 전율했다.

그녀가 죽음을 결행한 것은 헤어지고 난 이태 뒤의 일이긴 했지만, 그것도 엄연히 그런 적개심의 연장선상에서 일어났던 사실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아이를 못 낳는다는 생리적 사실이 그 감정을 더욱 극악한 것으로 가열시켰을 것이다. 새 아내가 임신을 할 때마다 그는 치유가 한 달씩이나 걸리는 지독한 악질의 눈병에 걸리곤 했다. 새를 기른다거나 꽃을 가꾼다거나 자잘한 그런 일상적인 일에도, 세상을 온통 시뻘겋게 물들이는 듯한 병든 눈알 같은 그녀의 적개심은 문득 문득 나타났다. 난초가 시든다, 큰맘 먹고 비싸게 들여놓은 향나무가 마른다 - 는 것은 물론 관리 소홀이 그 원인이었지만 때로 방심한 채 까맣게 잊어버리고 그것을 소홀히 하게 하는 심사에 문제가 있다.

문조(文鳥)라는 새 한 쌍이 분명한 원인도 없이 죽었을 때, 부리만이 붉고 전신이 통째 쌔하얀, 나동그라진 그 몸뚱이에서 그는 언뜻 그녀의 그림자를 보았다. 카나리아거나, 앵무거나, 하다못해 수퉁맞은 구관조에 이르러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놈아"

하고, 가르친 일도 없는 말을 끝으로,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하면서 시들시들 그 새는 죽어 갔다. 짝을 구할 도리가 없어 외톨로 방치해 둔 것이 원인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장 속의 생물을 보고 좋아하는 따위 '몰염치하고 졸렬한' 악취미가 그런 결과의 원인이 아닐까 보냐고, 아내는 기회 있을 때마다 그에게 퉁을 주었지만, 아무 것도 아닌 일에 억지로 집요하게 선희를 결부시키려 하는 자신의 아집을 비로소 깨닫고, 그는 나른한 기분에 빠졌다.

완상용 새에서 비둘기 쪽으로 관심이 옮겨간 것은 전혀 우연한 동기에서였으나 자연스럽다면 자연스러운 그 이행을 아내 말마따나 '몰염치하게' 설명하지 못할 것도 없다, 똥개를 기르는 심정이라면 우습지만 아무튼 그 비슷한, 될 대로 되라는 식의, 해방감에 대한 갈망이 십분 작용하고 있었음에는 틀림이 없다.

칠면조라도 다시 한번 길러볼까,,,,,, 하던 무렵에, 길 잃은 비둘기 새끼 두 마리가 그의 집으로 날아들었다. 이웃집 지붕 끝에서 곧장 날려다 베란다로 떨어진 모양이었는데 한 짜리는 심한 상처를 입고 있었다. 그는 주저 않고 그 불우한 놈을 대야 물에 담가 질식시킨 다 음, 나머지 놈을 난간에 붙들어맸다. 중상을 입은 새는 전문가가 아닌 담에야 가망이 없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으나, '전문가가 되지 못한'것에 대한 절망적인 감정이 더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다른 짝을 구해 주면 되지 않는가.

조류 상점을 헤매면서 그는, 방금 죽인 놈이나 남겨놓고 온 놈의 암수 구분조차 못하고 있는 자신에 울화통이 치미는 심사로, 비슷한 크기의 몸집이나마 찾으려고 부심했다. 사과궤짝에 구멍을 뚫어 얼치기 보금자리를 만들고 새로 사온 놈마저 끈으로 묶은 다음 그는 그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상점에서는 가장 싸구려 으로 팔리는 그런 종류의 새의 앞날이 마치 자신의 전 생애의 전망과 직결이라도 된 듯이,

그 두 놈이 동거할 수 있게 되는 데에는 달포가 더 걸렸다. 대략 일주일쯤이면 묶었던 끈을 풀어도 보금자리에 충분히 적응한다는 상점 주인의 장담과는 달리, 그는 통히 자신이 서지 않았던 것이다. 기를 쓰고 궤짝구멍에서 나오려는 놈들을 기를 쓰고 도로 넣어주는 데 일주일, 그 무모함을 깨닫고 지쳐 나가 떨어져 모이만을 뿌려주고 방치하기를 열흘, 몇 차례에 걸쳐 조금씩 끈을 늘여준 새들이 날기를 포기하고 음울하고 기괴한 걸음걸이로 기기만을 일삼을 즈음에도 그는 베란다 한구석에 몸을 숨기듯이 하고 죽치고 앉아서, 그것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족쇄를 술어주어도 새들이 드디어 날아가지 않게 되었을 때, 안도감이 아니라 왠지 그는 절망을 느꼈다. 그 길들여져 가는 과정이 자신의 힘으로서가 아니라 분명치는 않지만 어쩐지 새라는 생물자체의 질서 속에서만 이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깨달은 것이다. 진작 풀어 주었더라면 그것들은 물론 날아가 버렸을 것이다. 자기나 묶어 두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그것들은 여기서 정착하게 된 셈이지만 달아났더라도, 다른 데서 똑같은 과정으로 (인위적인 힘 언이도) 그들은 보금자리를 쳤을 게 아닌가, '거기가' 아닌 '여기'라는 말이 도대체 무슨 뜻을 지닌다는 말인가.

의심이 가시지 않은 채로 그는 두 번 째 한 쌍을 들여와서 이번에는 일주일만에 끈을 풀었다. 예상했던 대로였다. 먼저 정착했던 놈들을 깨닫고 일단 '거기'가 보금자리 칠 근거가 된다는 것을 알자 그들은 곧 거기 합류했다. 세 번 째 쌍은 사흘만에 해방을 시켰다. 새들이 불어났다. 어떤 놈은 새끼를 치고 어떤 놈은 딴 데서 제 짝을 묻혀왔다. 힘센 놈에 묻어 날아가 버리는 놈도 있고, 서너 마리가 한꺼번에 이주를 해오는 경우도 있었다. 유리창에 잘못 부딪쳐 가슴을 상한 새나 병들어 졸기 시작한 새를 그는 주저 없이 물에 담갔다. 옥상과 베란다가 새들의 똥으로 뒤덮였다.

조류(鳥類)에 대한 흥미를 완전히 그가 잃어버리는 데에는 2년이 걸렸지만, 그 동안 식구는 50여 마리로 불어나 있었다. 새들은 흡사 유랑민의 생태와 습성을 고스란히 닮아 있었고, 그러니까 한국적이었고, 조선인만큼이나 어리석었으며, 그러므로 자신과는 전혀 별개의 존재라는 것을 그는 알았다. 그것은 눈에 안 띄게 조금씩, 혹은 마비 되듯이, 그동안 자신의 생리에 이상이 생겨 있다는 것을 비로소 그가 깨달았다는 뜻도 된다. 그는 고자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자네 용변 뒤엔 똥구멍을 물로 씻는다고 했지?"

하고, 좀전에 헤어진 병원 친구한테서 온 전화에다 대고 느닷없이 불쑥 그는 묻는다.

"씻는 거와 그냥 두는게 무슨 차이가 있단 말야?"

친구는 일방적으로 훈계조의 얘기만 늘어놓은 게 미안했던지 위로 삼아 다시 전화를 한 모양으로, 뚱딴지 같은 그의 역습을 당하자, 말을 더듬고 있다. 아까 받은 충고를 기분 좋게 되돌려주는 심사로, '똥구멍'이란 말을 기세 좋게 두세 번 더 써먹을 수 없을까 하고 그는 숨을 죽인다.

"어 그건 선택 나름이지"

하고, 친구의 어조가 조금씩 다시 분명해 진다.

"피장파장이지 뭐 따지기로 든다면 난 씻는 쪽이 좋거든."

"?"

"개운하니까----모두들 밑 따위는 더러워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나까지 그러란 거야? 그래서 씻기로 한 거야. 아니...... 자네? 뭣 땜에 갑자기 이러는 거야?"

 

4

 

심포지엄은 4시부터 시작된다. '통일 자료 수집회 '라는 동인 형식의 작은 단체가 주최가 되고 있는 이 강연회는 말깨나 하는 인사들을 불러다 주로 의견 교환이나 듣는 그런 성격을 띠고 활동도 그 정도에 국한되고 있지만 성격이 성격이니만큼 사소한 말 한마디에도 신경을 쓰지 않으면 안 된다. 젊은 대학교수들이 멤버인 이런 단체를 당국이 인가해준 것만 해도 대견할 지경이다. 거기로 막 나서려는데 딸이 전화를 해준다.

"아빠, 힘내요."

제 에미도 연사로 같이 나오고 있다는 걸 어떻게 알고 아이가 격려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에미보다 말을 더 잘해 보라는 것인지, 단순히 기운을 잃지 말라는 뜻인지 알 수가 없다.

"..,,,, 군것질 함부로 카면 안 된다, "

하는 말로 전화를 끊었으나 그 순간 교도소에 있다는 대학생 녀석의 얼굴이 떠올라 왔다. 아이의 일기장 책갈피에서 떨어지는 것을 줏어 올렸던 것인데 눈을 똑바로 뜨고 어딘가 찌푸린 듯한 오기의 표정을 정면으로 향하고 있는 선명한 스냅사진이다. 나무 그림자 같은 것이 사진의 얼굴 배경에 어려 있는 듯했으나 요새 아이들의 이런 식 표정이나 그런 표정을 좋아하는 딸의 심사가 도무지 그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 닳을 대로 닳은 외국가수의 표정이나 포즈와 하나도 다를 것이 없어 보이는 것이다. 텔리비전용 낯짝이요 표정이다. 체 게바라의 실물 사진을 보고 표정이 신선하다고 느낀 적이 있지만, 저항 운운하는 녀석들의 표정이라면 최소한 그 정도의 소탈감만이라도 전해 주어야 마땅할 게 아닌가.

청중은 대략 2백여 명쯤으로 돼 보였다. 미리 와 있던 아내는 몇 사람 건너 의자에서 미소를 보내고 아는 척을 했다, 흰색과 엷은 옥색의 한복 치마저고리를 입고 있다. 아침에 강연 메모를 챙겨줄 때는 몰랐는데 가방에다 옷을 우겨 넣고 간 것 같지는 않고, 아마 학교에

노상 비치해 두고 있던 것을 꺼내 입고 온 것 같다. 낯익은 몇 사람과 일일이 목례를 하고 자리에 앉자 그는 왠지 불편하고 초조한 생각에 몰리기 시작해서 고개를 숙여버린다. 마룻바닥을 내려다보았으나 장내의 웅성거림도 물을 끼얹는 듯한 정숙함도 이따금 들리는 기침소리도 먼 딴 나라의 일처럼 물러나서 흐릿해지고 그 자신은 어느 황폐한 바닷가 개펄에서 불어닥치는 바람에 사정없이 휘몰리는 듯한 그런 기분이다. 연사들은 얘기를 하고 있으나 그는 듣지 않는다. 박수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고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피기도 해보았으나 눈에 들어오는 것이 없다. 아니 있다. 맨 앞줄 다음 열 중간쯤의 의자에 팔짱을 끼듯한 자세로 오두마니 앉아 있는 낯익은 얼굴 모습을 발견하자 그는 이것 때문이었구나, 하고 깨닫는다.

아내가 연단으로 올라간다. 아내는 통일의 실체를 인체(人體)에다 비유하고, 분단을 왼쪽 팔과 오른쪽 팔의 분리로 비유하고 온갖 장애요 인을 신진 대사의 불순에다 비유하고, 그리고 열강들의 외세와 간섭을 병자를 길바닥에 방치하고도 태연한 무마비한 행인(行人)들에 비유한다. 진부하다. 오늘 주제는 통일문제의 그 모든 제약을 상쇄시킬 수 있는, 그것이 안 되면 상쇄시킬 수 있다는 기분이라도 드는 구체적이고 디테일한 방법 같은 것을 제시하는 데 있다. 아무짝에도 쓸데 없는 맹장 하나 때문에 통일이 불가하다는 추상적 논리로는 그 아무 것도 전달할 수가 없다. 그는 자신도 제어할 수가 없는 비웃음을 얼굴 가득히 띄고 지금 자신의 제동 장치가 속 어딘가에서 고장나고 있다는 직감에 전전긍긍하면서 입을 비쭉이듯이 아내를 바라본다. 그가 연단으로 올라간다.

"한국에는 겨울이 없습니다"

하고 그는 시작한다.

"계절적인 겨울은 있을지 몰라도 우리가 흔히 정신의 상황을 말할 때 곧잘 비유적으로 들먹이는 그 '얼어붙은 겨울'은 없습니다. 겨울이란 겨울은 모두 이북에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까지 말해 놓고 위험하다 싶어 그는 메모지를 내려다보며 덧붙인다.

"이건 H.D미넬리라는 사람의 (한국의 사계(四季))라는 글에 나오는 한 귀절입니다---"

그는 정신을 가다듬고 방금 얼결에 임기응변으로 만들어 주워섬긴 H.D,미텔리라는 사람의 글이란 것을 추궁 받지 않을까 겁을 먹기 시작한다. 서두의 논리를 되돌려서 없었던 논리로 만들어 보려고 그는 이것저것 급하게 예증(例證)을 찾는다. 그리고는 폭탄 같은 선언을 앞당길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얻는다.

"통일을 저해하는 가장 큰 요인은--- 하고 그는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내 뱉는다.

"통일을 운운하는 사람들이 실은 털끝만큼도 통일해야겠다는 생각이 없다는 데에 있습니다---"

청중 속의 어느 부분에서 술렁거림이 일어나고 있다고 그는 느낀다. 그러나 눈여겨본즉 청중들은 그저 조총하기만 하고 웃음마저 띄고 있는 작자도 있어서, 자신의 폭탄이 불발이었다는 것을 그는 깨닫는다. 안간힘을 쓰면서 그는 재삼 메모지를 들여다본다. 그리고 다시 한번 논리를 되돌리려고 온갖 단어를 불러모으고 온갖 가능성을 급하게 끌어다 점검한다. 갑자기 그의 아랫도리에서 거대하고 어머어마한 폭발이 일어난다. 그는 진작부터 그것을 예감하고 있었으나 사람의 정욕이란 그 유무(有無)가 이렇게도 사물의 모습을 판이하게 변형시킬 수도 있는가 싫어 두 손으로 연단을 짚고 후들후들 다리를 떤다. 그는 말문을 여는 방법을 잊고, 연단 아래쪽의 둘째 열 가운데 오두마니 앉은 예의 아침의 그 여자를 뚫어져라 내려다본다. 여자도 가무잡잡한 얼굴 그대로 조롱하듯이 똑바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다. 이런 사태까지 미리 계산에 넣고 계획대로 여자는 이곳에 왔던 것이다!----

"통일 운운할 자격이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는 사람을 통틀어 4만 명으로 잡아 봅시다."

그는 사나운 충동에 부대끼면서 혼신의 힘으로, 소용돌이치는 말을 눌러서 밖으로 밀어낸다.

"김 일성을 비롯해서 지금 떠들고 있는 나 자신까지, 그 잘난 놈들 4만 명이---"

목줄기가 수탉의 그것처럼 뻗는 것을 느끼면서 그는 마른침을 삼키려고 애를 쓴다.

"4만 명이 옘병이 들어,,,,,,"

허덕이면서 그는 외친다.

"한날 한시에 뒈질 때,,,,,, 저절로 통일이 이룩됩니다! ."

겁에 질려 ''이란 말을 발음할 때 강연회장 한쪽 모서리가 서서히, 그러나 급박하게 붕괴하는 것을 보고 그는 크게 눈을 뜬다, 그는 비틀비틀 연단을 내려온다. 청중들은 그의 걸음걸이를 따라 머리들을 틀면서 그제야 웅성거리기 시작한다.

"왜 그런 짓을 해요!"

회장 바깥까지 따라 나온 아내가 찌푸린, 힐책하는 듯한 얼굴을 바싹 그의 얼굴 가까이 들이대고 내쏘듯이 속삭인다.

"이 일을 어쩌죠?"

그는 멀거니 아내를 바라보고, 당신은 왜 채찍질을 해야 그게 서죠? 하는 말로 그것을 착각해 듣는다

"모르겠어"

하고 애매한 소리로 그가 중얼거린다.

"그만한 일로 끝장이 날 것 같아?"

 

5

 

630, 풀죽은 걸음이 된 그가 다시 병원으로 들어간다. 이번에는 친구의 병원이 아니다. 종합병원 영안실에 마련된 빈소를 찾아온 것이다.

백포(白布)에 덮인 관 앞에 드리운 휘장 이쪽에서 그는 향을 사루고, 두 번 절하고 그리고 뒤로 물러난다. 수많은 촛불에 둘러싸인 이관의 임자는 어느 원로 영화 감독이다,

마흔 일곱 살을 먹는 동안 좋든 싫든 만들어져 온 교우범위 속에 영화 감독이 하나 끼어있다는 건 스스로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긴 하지만 따져 올라가면 그만한 인연이 있다. 70년대 초, 강사로 나가고 있던 어느 대학 뒷산 기슭에서 그는 이 영화 감독을 만났던 것이다.

"여편네가 이 학교에 깔려 있소"

하고 사팔뜨기 같은 금이 간 표정을 하고 영화감독은 처음 보는 그쪽으로 수척한 몸을 떨면서 다가왔다.

"육이오 때 총살당한 여편네가,,,,,,"

괴뢰군들이 무더기로 죽여서 흩어놓은 시신을 찾아 이 학교 뒷산에 묻었는데 이장 공고를 알지 못하고 이제서야 와보니, 아내가 어디 있는지를 모르겠다는 것이 다.

"그렇지 않을 거예요, 어디 딴 데루, 옮겨다 묻어드렸겠죠"

해보았으나 영화감독은 고개를 흔들고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연고자 없는 시체는 구덩이를 파헤치고 무더기로 쓸어 넣는다, 그 장소가 여기쯤인 것 같다고 감독은 신관 건물 아래쪽의 무너난 황토의 단면을 자꾸만 눈여겨 보았던 것이다.

이 원로 감독은 생전에 네 명의 부인을 거느리고 살았다. 아들 하나를 낳아서 지금 일본에서 살고 있는 일본인 부인까지 합치면 다섯 명인 셈이다. 총살 당한 부인에게서 네 명의 아들딸이 그리고 만년의 부인한테서 딸 둘을 두었다. 그 부인들과 자제들이 빈소에 같이들 읍하고 서 있다. 미국에 있는 큰딸은 오지 못했으나 이름을 달고 대신 화환이 놓여 있다.

자식을 낳지 못한 두 부인 중의 하나는 어깨가 넓고 눈썹이 짙고 키가 팔 척 같은 기생 출신의 여장부다. 이 부인만이 소복차림이고 나머지 두 부인은 검은 옷이다. 만년의 부인에게서 난 딸 둘이 교복차림으로 헐떡이며 늦게 들어와서 마지막 아버지의 얼굴을 보려고 관 앞으로 다가들자, 기생 출신의 부인은 그 큰 몸으로 두 팔을 벋으며 관 위에 엎드린다. 남편의 얼굴을 보여 주지 않겠다는 철벽 같은 바리케이드다. 중학교와 고교에 다니는 두 딸은 동그란 눈을 부릅뜨고 그녀에게 쏘아 부친다.

"어머니가 뭔데 아빠를 못 보게 해요?"

여장부의 몸이 허물어진다. 그녀는 소복 차림의 덩치를 관 옆으로 미끄러뜨리고 꺼이꺼이 울면서 뒷걸음치듯 물러난다.

영안실에서 나온 그가 집으로 전화를 건다. 구경이나 한 꼴밖에 아니지만 그래도 주검 가까이 있었다는 사실이 그의 본능을 자극하고, 예감을 수상하게 만든다. 아니나 다를까, 딸아이의 훌쩍거리는 소리가 수화기 속에서 대답으로 먼저 들린다.

다 부셔놨어"

하고 딸아이가 말한다.

"다 부셔왔단 말야. 비둘기 집...... 미친 듯이 뛰어 올라가더니 엄마가 궤짝들을 죄 마당에 내던지는 거야. 태우라고 아우성이 나서 할 수 없이 파이어했지 뭐야, 옆집 쓰레기 밭에..... 지금 비둘기들 우두커니 죄 나와 서서 푸드득거리고 야단났어. 들어와요 아빠, 빨리."

훌쩍거리는 소리와는 달리 고자질하는 딸아이의 목소리가 노랫가락을 닮아 있다는 것을 느끼고 그는 쓴웃음을 짓는다. 아내의 히스테리가 드디어 방 밖으로 한 걸음 전진을 한 모양이다. 심포지엄에서 당한 망신으로 치자면 당연한 반응이다. 하지만 집들을 다 부숴놓다니 50여 명이나 되는 아이들이 갑자기 한꺼번에 생겨버린 듯한 기분이다. 들이닥친 이 식솔들을 누가 먹여 살려---번쩍 정신이 드는 심사로 화난 기분이 돼보려고 그는 안간힘을 쓴다. 곧 들어가마--- 하고 전화를 끊었으나, 반대방향 쪽으로 그는 걷기 시작한다,

8. D호텔 사우나탕의 드넓은 홀에서 그는 때를 씻고 있다. 하루 종일 쌓인 그 모든 먼지와 찌꺼기를 털어 버리려고 그는 샤워 밑으로 몇 번이고 들어가고, 다시 나와 쭈그리고 앉아서 비누와 수건이 닳아져라 하고 미진한 데를 문댄다.

휴게실 소파에서 땀을 들이고 있던 그는 보이를 따라 맛사지실의 좁고 어두운 복도로 들어간다.

"미스 황을 불러 줘, 지금 비었어?"

"어느 미스 황 말예요?

"황 승연."

007시리즈의 어느 영화에 소련 비밀경찰의 여자 요원이 제임스 본드 곁으로 시침을 떼고 다가와 갑자기 편자 끼운 주먹으로 그 배를 후려치는 장면이 있다, 미스 황은 생김새도 몸집도 흡사 그 여자 요원을 닮다 있다. 흉내뿐인 조그만 욕조와 병원용 베드 하나가 달랑 놓인 사각형의 작고 어두운 맛사지실에서 처음 미스 황에게 어깻죽지를 붙잡혔을 때 그는 뼈가 부러지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았다. 그만큼 그녀의 손가락은 억세고 시원하다. 지금 그 미스 황이 브래지어와 팬티만의 무표정한 얼굴로 들어와 가운을 벗기고 그의 알몸을 베드에 엎드리게 한다, 그리고는 냉큼 무릎으로 그 위에 올라탄다. 여전한 완력, 여전한 솜씨다.

서비스는 싫어?"

하고 억양 없는 소리로 그녀가 묻는다. 그는 고개를 흔든다. 그 추한 짓을 여태껏 그는 단 한번도 허락한 적이 없다. 비로소 뼈의 관절들이 제대로 끼워 맞춰진 듯한 어리둥절한 기분으로 일어나 앉아 끌어당긴 가운의 작은 주머니를 뒤져 그는 돈을 치른다.

"이번엔 더 지독한 욕을 해줘,"

그는 미스 황을 똑바로 바라보고, 그리고 덧붙인다.

나 선희야, 하는 첫 말 잊지 말고---"

왜 이런 짓 계속해요? 다음 전화는 누가 받는데?"

"내가 받아."

그녀의 질문을 막으려고 그는 살벌한 얼굴로 짤게 대답하고 입을 다문다.

"이것, 십만 원 짜리 수표 아냐?"

갑자기 그녀가 펴든 종이를 들여다보며 작은 외마디 비명소리를 낸다. 그리고 미처 피할 틈도 없었다. 그녀는 달려들어 그를 다시 쓰러뜨리고, 그의 몸에 찰싹 달라붙어 우우우 하는 짐승 같은 헛 신음과 헛 숨소리를 연발하면서 혀로 그를 핥기 시작한다. 아무리 사지를 허우적거려도 그녀의 손아귀를 그는 벗어날 수가 언다. 들짐승에게 항문을 핥기는 실감이 오자 그의 전신은 삽시간에 한 개의 송곳이 되어 공중으로 뻗쳐오른다. 개처럼 신음하고 울면서 그는 적을 죽여보려고 침대를 후벼판다.

목을 꺾이고, 허리를 뒤집혀 개구리처럼 두 다리를 쳐든 자세로, 밀실의 들창 너머, 혀를 물고 홍소(哄笑)하면서 나는 이렇게 죽었어 하듯이 밧줄에 매달려 거꾸로 내려오는 선회의 모습을 그는 너무도 분명히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