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단편소설2

39. 유자 약전

자한형 2022. 3. 6.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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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자 약전(略傳) 이제하

 

1

 

남 유자의 본명은 문자, 1942년 밀양 생() 여섯 살 때 부산으로 이사해서 거기서 S여중고교를 다녔다. 부친은 남 신주 화백이다. 남 화백은 일찍 상처하고 그때까지 초야에 묻혀 있던 정물화가로 화력 같은 것도 분명치 않고 유작들의 행방은 더구나 묘연해서, 이 나라에 이식된 양화사의 피상적인 계보조차 제대로 정리되고 기록되어 있지 않은 현금의 황폐한 문화권을 탓할 수밖에, 지금의 내 형편과 처지로서는 알아볼 도리가 막연하다. 좀 괴팍한 성격이었던 모양으로 4학년의 나이가 될 때까지 유자를 소학교에 보내지 않고, 집에서 생선 굽는 법 같은 것만 가르쳤다고 한다. 52년경부터 지방화단에 진출, 클럽전 같은 데에 띄엄띄엄 작품들을 출품하다가 54년 애매한 정치사건에 말려들어 1년간 복역, 출옥하자 화필을 꺾고 철도청의 무슨 과장 노릇인가를 1년쯤 하다가 58년 뇌일혈로 작고했다. 그러니까 순전히 유자는 여학교와 대학 과정을 부산서 왜 큰 제지업을 하던 삼촌의 힘으로 마친 셈이다.

하나밖에 없는 부친이 옥고를 치르게 되자 그녀는 자연스럽게 기식을 삼촌에게 의탁했던 모양으로, 자존심이 몹시 강해서, 삼촌네 아이들보다 하루만 공납금 같은 것이 늦어도 덤벼들어 아무나 할퀴고, 닥치는 대로 접시를 내던졌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61년 상경해서 Y여대 서양화과에 입학, 졸업과 함께 결혼에 들어갔으나 1년 뒤에 이혼, 유자라는 이름은 이혼한 남편의 성()에서 딴 개명(改名)이다. 이혼한 이유 같은 것은 확실치 않다. 그녀 자신은 '영구(永久) 불임증(不姙症)'임이 드러났기 때문에 이혼 당한 것이라고 큰소리치고 있었으나, 그후의 여러 가지 일들로 추측해보아 거짓임이 분명하다. 이혼한 다음 다음해인 689, 자신도 모르고 있던 지병인 위암으로 몰(歿) 향년 27.

 

유작으로는 한두 점의 수채 풍경화와 데생 몇 점과 '남자(男子) 입상(立像)'이라는 유화 한 폭이 있을 따름이다. 나머지 것들은 생전에 그녀 자신이 모두 없애버렸기 때문이다.

그녀의 남편이었던 유형은 부산 수산청의 착실한 관리로, 유자를 내게 보냈던 그녀의 사촌오빠 N형과는 대학 동기 동창이다. N형이 나와는 고교 동기였으니까 두루 연줄이 닿는 것인데 아무리 바로 몇 달 전의 작년 일이라고는 하나, 그녀가 숨질 마지막 순간까지 몇 번이고 상경해서 고심참담 그녀를 설득시켜보려고 부심하던, 이 세상 성실성의 표본 같은 그 얼굴을 나는 잊어버릴 수가 없다.

유자가 내 아틀리에에 온 것은 677, 그러니까 그녀 생애의 마지막 1년간을 나는 그녀 곁에서 보낸 셈이다. 그녀를 보내며 N형은 편지에서 적고 있다.

 

'내가 중학교 때 포기했던 꿈을 대신 이어줄 아이를 보내네. 자네가 맡아주어야겠어. 나로서는 그 아이를 감당할 도리가 없다. 굴뚝에서 노란 연기가 나온다고 26살이나 먹은 애가 하루종일 울어대는가 하면, 쿠데타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공연히 달리는 차에서 뛰어 내려서, 뇌수술까지 받았다네. 그 후로는 죽은 사감이 보인다고 큰소리만 뻥뻥 치지. 그 애 목을 좀 봐. 상처가 있어. 모짤튼가 뭔가 하는 원반을 한 장 사주었더니 그것이 너무 좋다고 목을 매달고 그 소동을 피웠어. 좌우간 지긋지긋한 괴짜야. 나로서는 이 이상 더,,,,,,'

이건 거짓이고 협박이고 협잡이다. 그런 지긋지긋한 아이를 N형이 하필 내게 떠맡길 하등의 이유가 언다. 역정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깨달으며 지정된 시간에 나는 역으로 나갔다,

---황갈색 준마(駿馬)의 등가죽 위에서 좁고 휜 발바닥과 오그라붙은 앙징스런 발톱들을 내 쪽으로 발딱 뒤집은 채, 유자가 긴 잠을 자고 있다. 말이 준마의 가죽이지 그것은 개가죽인지 오리가죽인지 무슨 비닐 천인지 뭔지도 모를 그런 소파다. 고물상에서 사온 이래 3년간은 내가 침대 삼아, 1년 동안은 유식한 선배들이 거기다 엉덩이를 붙이고 현대 미술론을 떠드느라, 그리고 그들을 쫓기 위해 린시더 유()로 노랑물감 범벅을 비벼대 버린 뒤로는 브러시 씻개로 사용하다가, 작품을 중단하고부터는 말라붙고 비틀어져서 찔러도 피도 안 날

그런 의잔데, 그 위에다 의외에도 뿌옇게 살이 찐 한쪽 허벅지를 척 올려놓고 그녀는 태연히 코를 골고 있는 것이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목이 옆으로 쑥 빠져서 턱 밑으로 연주창(連珠瘡)을 앓은 상처가 엿보이고, 팔은 둘 다 소파 등 너머로 내던져져 있다. 코는 장난감처럼 열렸다 닫혔다 하고, 입은 보기 좋게 미소를 띄고 약간 헤벌어져 있다. 14시간째의 수면이다. 아침 7시부터 자기 시작해서 밤 9시가 넘은 지금까지 깨지 않는다. 하는 일없이 그 소파에 멍청히 앉아서 그녀는 꼬박 이틀 밤을 새운 것이다. 예상했던 대로 N형의 편지는 거개가 과장이었다.

"이것은요."

하고, 목의 상처에 대해서 그녀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연주창을 앓았어요. 전생(前生)의 내가 목을 매단 끔찍한 죄를 지었거든요."

차에서 뛰어내려 수술을 받았다는 대복에 대해서는,

"뛰어내릴 수만 있으면 뛰어내리는 게 났죠. 그러면 뇌수술도 무섭지 않고, 죽은 사람도 볼 수가 있는 거지 뭐."

대개가 이런 식이다.

"오빠 담배 피는 입을 보고 있으면 연기가 퐁퐁 우는 듯해요"

라든가,

"하루 종일 울고 있으면 애 밴 것처럼 배가 산()만해질걸, 아마?"

하고는, 진지한 눈초리로 의기양양하게 코를 치켜들고 치다. 카는 편지를 접었다.

모짜르트에 대해서만은, 물어보지도 않았는데도 그녀는 벌에 쐰 듯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단호하게 외쳤다.

"그 사람이야! 세상을 구원할 사람은 그 사람밖에 없어요!"

그리고는 그녀는 오래도록 입을 다물었다.

 

졸음은 마치 그녀의 천성의 일부인 것처럼 보였다. 아틀리에에 처음 데리고 와서 예의 그 소파를 가리켰더니 사방을 두리번두리번하던 멍청한 그 눈길 그대로 몇 시간이고 꼼짝 않고 앉아 있어서, 그것이 그녀의 독특한 졸음 증세라는 것을 두어 수일 뒤에야 깨달은 이래, 언제든지 그런 상태다. 의자 위에 까부라져서 코를 골고 있을 때는 그 이틀이나 사홀 전부터 졸지도 않고 무슨 일을 하고 있었다는 증거다. 일이래야 옴직여서 무얼 만드는 것도 아니고 그저 꼼짝 않고 골똘한 생각에 잠기는 것이 그것인데, 그 생각의 막바지에서 피로를 감당하지 못해 그만 쓰러져 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녀가 괴상한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안 것은 훨씬 후의 일이지만, 그러니까 유자가 코를 골고 있는 것은 수면 속으로 가라앉아 가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며칠 동안이나 골똘히 꾼 꿈을 발판으로 수면을 향하여 떠오르려고 부심하는 상태인 것이다.

이것은 그녀에 대한 지나친 윤색일는지 모른다. 여자가 오랫동안 무엇을 생각한다거나 논리를 세운다거나 더구나 무의식적으로 꾼 꿈들을 정리하고 그것을 체계화할 능력이 있다고

는 나는 믿어본 적이 없다. 천성적으로 그것들과는 반대의 동물이 여자며, 고작 곗돈 계산이 지적 능력의 극점(極點)이며, 여자가 위대하게 인정을 받는 것도 바로 그런 점 때문인 것이다. 온갖 종류의 역사가 웅변으로 그것을 입증하고 있다. 더구나 조형(造形)의 세계에서는 - 몇 손가락밖에 안 되는 여류작가들 - 로랭생이거나 다 실바거나 휘니거나 최근의 마리솔이거나 그들의 작품이 - 미술사다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녀의 이런 기이한 잠버릇은 석 달이 지나자 벌써 내게는 견딜 수 없는 것으로 되었다. 바람벽 쪽으로 소파를 돌려놓았다고는 하나, 오후에는 몇몇 아이들이 데생을 하러 온다. 그 아이들은 내 밥줄이다.

불그칙칙한 코르덴 바지에다 브래지어가 내보이는 속옷 바람으로 등을 꼬부리고 돌아누워, 진드기 붙은 망아지처럼 대낮부터 코를 고는 여자가 그들의 눈에는 어떻게 보이는 것일까, 그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벌써 한 아이가 1주일 째 나오지 않고 있다. 다른 아이를 끌어들일 기력이 인제는 없다기보다 아이들에게 나는 넌더리를 치고 있다.

월수입이 3천 원이나 줄어버린 데다 까짓 한 달에 만 원 정도면 나는 충분하지만, 그 아이슨 집주인의 먼 친척뻘 되는 선병질이다. 아틀리에를 비우라고 할지도 모른다,,,,,,

"그 코고는 것 좀 그만두지 못하겠니?"

참을 수 없어서 이렇게 말했더니,

"그럼 뭘 하라는 거예요?"

하고 되려 묻는 것이다.

나는 뒷짐을 지고 그녀 앞에서 이리저리 걸어 보였다.

"산보를 한다거나, 뜨개질을 한다거나,,,,,,"

"오빠는 뭘 해요?"

"나는 명상하지. "

"계집애들 벌거벗은 밑구멍이나 생각하면서,,,,,,"

"? ,,,,,,"

그녀는 혀를 빼물고, 그것으로 느릿느릿 입술을 핥으면서 멍청한 눈초리를 내게 던졌다.

"그 와일드한 말씀 좀 낮추지 못하겠어?"

기가 차서 나는 소리를 죽였다.

"사실이 그런 걸요."

"그럼 네 밑구멍은 어떻고?"

으악, 하고 덤벼들어서 할퀼 줄 알았는데, 그녀는 픽 웃어버린 것이다,

"저는 말야요."

하고 그녀가 말했다.

"벽이야요, 앞뒤가 모두 벽---"

재빨리 속옷셔츠를 벗어 팽개치고 브래지어를 끌러 한 손에 늘어뜨린 채, 그녀는 짜부라진 두 개의 유방을 내게 보였다.

"뒤도 보여."

도망칠 궁리를 황급히 이것저것 생각하면서, 그보다는 유방보다 엉덩이만 두드러지게 발달한 이런 기형(基形)의 원인은 도대체 무엇일까, 하고 황급히 그런 것을 생각하면서 나는 그녀의 주위를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정말예요?"

하고 눈을 반짝이면서 그녀가 말했다.

"뒤는 괜찮아요?"

"괜찮아."

하고 쓴웃음을 짓고, 셔츠를 집어 주면서 내가 말했다.

"벗지 않아도 좋아. 뒤는 꽉 균형이 잡혔어."

 

---남자 중학생용의 나일론 속셔츠를 한 손에 벗어 쥐고 여윈 어깨와 유방을 드러낸 유자가 똑바로 선 채 긴 잠을 자고 있다. 80평 정도의 넓은 공간에서는 그 모습은 너무나 깡마르고 이상해서 국기처럼 손에 쥔 그 대견한 나일론 런닝셔츠는 대번에 삭아 없어져 버린다. 고속도 촬영의 필름처럼 천천히, 그리고 그림자처럼 감쪽같이. 동그랗게 움켜쥔 손가락 틈에서 손거울 조각만한 하얀 천이 스러지는 것이 보인다. 나일론이란 무엇인가? 빛 앞에서는 아이스크림처럼 녹아 없어지는 더러운 천 조각이다.

3평의 공간 속에서는 반대로 유자의 모습은 너무 뚜렷이 드러난다. 배꼽과 허리가 전 공간을 꽉 채워버리고 그 옆으로 속셔츠의 천이 허옇게 드리워져 있다. 천 밑으로는 오디처럼 진물러 터진 검은 젖꼭지와 음모(陰毛)의 환영(幻影)---, 녹색의 오토바이가 나타나서 그것을 지우며 번개처럼 지나간다. 오토바이의 부르릉거리는 소리 뒤에는 속셔츠 한 장만이 손수건처럼 구겨져 떨어져 있을 따름이다. 손수건이란 무엇인가? 손을 닦는 더러운 수건이다.

20평의 공간 속에서는 유자의 머리도 발도 보이지 않는다. 어깨와 바지만이 남아 있을 따름이다. 그 대신 어깨 뒤로는 옛 병풍 속에서 튀어나온 듯한 소나무 한 그루가 드리워져 있다. 소나무가 없으면 유자의 머리와 발의 행방은 묘연해져서, 어디선가 선혈이라도 뚝뚝 들을 것 같다, ()이란 무엇인가? 자신만은 아직도 지조를 잃지 않고 아직도 순결하며 아직도 독야청청(獨也靑靑)--- 이라고 오늘도 내일도 자신에게 열심히 일러 듣기며, 피를 흘리며, 허공을 움켜쥐며, 욕설을 퍼부으며 무수히 죽어간 무수히 죽어가고 있는, 모든 선량한 시민들의 볼품 없는 해골 뼉다귀다.

40평의 공간에서는 유자의 모습은 뿌연 안개로 가리워져 있다. 비행기 소리가 들리고, 폭음소리가 들리고, 모습이 드러나기도 전에 유자는 감쪽같이 없어져 버린다. 비행기란 무엇인가? 날파리의 후손의 그 후손의 기계적 후손이다.

15평의 공간 속에서는 유자는 비틀거리고 있다. 국립 의대(醫大) 해부실에서 해골 뼉다귀의 표본을 한 점 그 옆에 갖다놓지 않으면 유자는 콩 먹은 오뚜기처럼 줄곧 엉엉 울며 흔들리고만 있을 것이다.

해골의 머리를 떼서 유자의 손에 얹어 준다. 유자가 조용해지며 미소 짓는다. 개가 들어와서 해골의 다리 뼉다귀 하나를 물어간다. 조각가 아코메티가 투덜거리면서 개 뒤를 따라가고 있다.

2백 평의 공간 속에서는 유자의 성기만이 드러난다. 그것은 애기의 그것처럼 너무나 작고 너무나 청결하고 너무나 당돌해서 보는 이의 눈을 멀게 하고 소름끼치게 하고 뒷걸음질을 치게 한다. 나치 병정 하나가 나타나서 그것을 수건으로 싼다. 백여 명이 넘는 장님떼들이 안마막개기를 딱딱 치면서 어느 뒷골목을 지나가고 있다.

5백 평의 공간 속에서는 유자의 부친의 얼굴만이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8백 평의 공간 속에서는 한 덩이의 빛깔이--- 자주색 도는 짙은 남색의 빛의 더미가 해파리처럼 부동하면서 넘쳐나고 있다.

1천 평의 공간 속에서는 유자의 소리만이,,,,,,,

"나는 애기를 날 수 없어요."

하는 소리만이 종()처럼 묻어온다. 그리고 아무도 믿지 않아요,,,,,

유자를 그려보고 싶다 - 라기보다 무엇을 그려보고 싶다 하는 생각이 근 2년만에 덜미를 짓누르는 것을 깨닫고,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물감과 브러시가 준비되고 설사 머릿속에 대견하게도 한 치의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하더라도, 자질이 없으면 그림은 안 되는 것이다. 내게는 자질고 능력도 의욕도 없다. 담배를 비벼 끄고 나는 일어섰다.

상경한 지 반 년이 가까워지도록 그녀는 그림에 대해서는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숨기거나 회피하거나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무관심한 것이다. 나의 닥달로, 아틀리에에 오자마자 화구(畵具)와 캔버스 몇 장을 사들고 오기는 했으나 그것들을 벽 모퉁이에 얌전히 놓아두었을 뿐 곧 까맣게 잊어버리고. 열어 본다거나 뼘을 재본다거나 하는 일이 없었다. 전문가거나 아마추어거나 대개의 경우 남의 아틀리에에 들어서면 그림에 대해서 아니면 그 비슷한 것에 대해서 한두 마디 하거나 관심이라도 보이는 시늉을 하는 것이 상식이다. 하다못해 석고를 한번 어루만져 본다거나 목탄을 하나 집어들고 먼지를 후 불어보면서

"이 아틀리에에도 세월 없군."

한다거나,,,,,, 그녀는 눈뜬 장님이 갈밭 사이를 지나듯 이즐과 이즐 사이를 목탄지와 목탄지 사이를, 기름통과 캔버스 사이를 지나다닐 따름이다.

존스를 처음 보였을 때 그녀의 반응은 냉담했다. 내가 보인 것은 그가 그린 수 매의 아메리카 국기들 중에서 오린지 빛 공간의 상단(上段)에 선연하게 부각시켜 놓은 국기다. 내가 가리키는 고심참담한 붓자국을 따라 그녀는 두리번두리번 눈길을 가져가기는 했으나 곧 멍청한 얼굴로 창 밖으로 고개를 돌린 것이다.

"존스라고,,,,,, 대단한 놈이야."

하고, 그써의 무감각에 화가 치밀어 올라서, 나는 서투른 해설을 첨가해 보았다.

"아메리카 부르조아적인 거창한 동력과 그 획일성에 반발하는 그림이야. 이것은--,- 전 국민이 무더기로 기계나 돈에 도매금으로 흡수당할 때는--- 그런 추악한 사회에서는 아무리 멍청한 바보라도 애국자가 되지 않을 수 없지--- 그러면서도 국민들은 이런 그림을 사랑하고 애긴다---, 바로 그런 점이 아메리카의 체면을 세워주는 거야. 어딘가 좀 으시대는 듯 하지, 그림이?"

"……"

"이것은 어배?"

하고 고리키를 나는 펼쳤다.

"그림 때문에 순교 당한 양반이야. 존스가 사회에 반발을 했다면 이 양반은 인간관계에 반발한 거지. 인간과 인간 사이의 그 추악한 관계를 바로잡고 재구성 해 보려고 발버둥치다 쓰러졌어. 2층에서 목을 매고 자살했거든. 독종이야."

""

하고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다시 바람맞은 얼굴이다. 자동차로 자살한 잭슨 폴록을 보여도, 멕시코의 피비린내 나는 현대 회화를 보여도, 불란서의 아름다운 그림들을 보여도 그녀는 무반응이었다.

"이놈아, 이건 어때 ?"

하고 기진맥진해져서, 베이콘의 도깨비 같은 인물화를 그녀의 코 앞에 나는 들이댔다.

"이건 자네가 그런 꼴로 멍청해서 허물허물 허물어져 가는 걸 그린 거야, 어때 재미 있지?"

"이러지 말아요."

, , 어 하고 낮게 코를 불고 반벙어리 소리를 내면서 그녀는 화집을 밀쳐냈다.

"이 그림은 재미있어요."

그녀는 무너져가는 인물의 코 부근을 손가락으로 짚었다가 얼른 뗐다.

"마치 허물어져 가는 듯해요."

이런 말투에서 나는 그녀가 예상외로 그림에 대해 많이 알거나 높은 눈을 갖고 있다는 기묘한 느낌을 받는다. 그녀의 재학시의 습작들을 나는 한번도 본 적이 없고, 미술 학교를 어떤 식으로 다니면서 어떤 방법으로 수습(修習)을 받았는지 그것도 알 수 없다. 라이벌 의식

은 의욕을 부채질하지만, 여자한테 그런 의식을 느낀다는 건 넌센스다.

"시골 집에 그림책이 많은가?"

"없어요."

"그림이란 뭐야? 넌 그림을 도대체 뭐라고, 어떤 것이라고 생낙하니?"

그녀는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나는 그림을......"

하고, 소학생같이 다리를 모으고 자동 인형처럼 입을 벌렸다.

"30년 후에 일어날 전쟁을 종이 위에 그려서--- 그것을 사람들한테 보여서--- 전쟁을 못 일어나게 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둔해서 못 알아볼 때는?"

"할 수 없지 뭐,,,,,, 캔버스를 하늘만큼 크게 만들어도, 입체 작품을 만들어도 안 되는 건 안 돼요."

"그건 네가 생각한 건가? 누가 가르쳐뒀어?"

"아버지가,,,,,,"

아하, 하고 나는 비로소 그녀의 뒤에 만만치 않은 실력자가 버티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찔끔했다.

"그랬으면 오죽 좋겠어?"

나는 머리를 흔들었다.

"아무도 10년 이상의 시대를 앞지르지 못해, 세잔 때라면 또 모르지만. 모두들 겨우 당대의 꽁무니만 좇으면서, 허덕이면서, 죽어가고 있어,,,,,,"

그림에 대해서 그녀가 내게 얘기라도 한 것은 대개 이런 정도가 고작이다. 그 후에 내가 다시 그림이야기를 하자고 그녀를 쿡쿡 찌르자,

"섹스 다음에는 명상의 시대가 와요. 사두면 한밑천 될 그림들이 우리 나라에도 있죠."

라는 말을 했다,

"이 중섭 말인가?"

"이 중섭은 벌써 값이 오르고 있죠. N씨하고, 또 그 누구더라? 말을 잘 그리는 사람,,,,,,"

"C도 좋지."

"C씨는 좋지만 어떤 것은 무나가다 시코 냄새가 좀 나는 것 같아요."

"무나가다는 어떻게 알아?"

"아버지가,,,, "

"시골에는 값진 화가들이 무더기로 묻혀 숨어 있어. 대개 자유당 때 거센 정치압력에 짓눌려 머리가 조금씩 돌아버린 사람이지. 태반이 그림을 중단하고는 있지만,,,,,, 젊은 전위돠가들은 어때? 패기만만하지 않은가,,,,,,"

"외국 꽁무니를 좇고 있어요."

"그렇지 않아. 누가 조금만 밀어주면 토박이 진짜가 그들한테서 나온단 말야,,,,,,"

내가 몹시 흥분한 것은, 어느 거창한 건설회사가 주관한 어용 화가군들의 어용 전람회장에서였다. '건설을 주제로 한 현대 회화 20인전'이라는, 보나마나 회사업적 선전의 싸구려 전람횐데, 거기 동원된 화가들 중에는 낯익은 이름도 있어서 구역질과 욕설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억지로 참으며 회장을 한 바퀴 돌던 나는, 어느 그림 앞에서 방망이로 얻어맞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걸음을 멈췄다,

대개가 케케묵은 사실적 수법의 그림들이지만 이 그림은 특히 사실적인 그림이어서, 1백 호 남짓한 화면에 빼곡 들어찬 수백 동의 건물의 창문 하나하나 변소 문 하나하나까지 다 그려져 있다. 진물들은 지렁이처럼 꼬물꼬물 기어가는 듯이도 보이고, 더러운 벌레처럼 움츠리고 경련하는 듯이도 보이고, 지네처럼 필사적으로 꿈틀거리며 도망치는 듯이도 보인다. 너무나 꼼꼼하고 너무나 세밀하고 너무나 사실적이어서 초현실풍의 효과를 내고 만 것이다. 값은 값대로 다 받아먹고 이 그림은 되려 회사측을 향하여 폭소와 똥물을 내깔기고 있다. 속이 간질간질해 오는 것을 느끼며, 나는 아틀리에로 전화를 걸고 급히 그녀를 불러냈다. 그림에 대한 그녀의 반응은 냉담하고 무관심하지만, 그 때문에 정확하고 냉철한 데가 있다.

나는 그녀의 반응이 보고 싶었다. 시침을 떼고 회장을 한 바퀴 돌면서 그녀를 인도하던 나의 예상은 들어맞았다. 예의 그림 앞에서 그녀가 숨을 깊이 들이쉰 것이다. 이마는 창백해지고 손이 무의식적으로 옷섶을 만지작거리고 있다. 히스테리컬하게 찢어지는 듯한 웃음이 그녀 입에서 터져 나오기를 나는 기다렸다.

"개자식들.,,,,, 개자식들, ,,,, 개자식들,,,,,,"

끙끙 앓는 듯한 낮은 소리의 웅얼거림과 함께 그녀는 슬그머니 그 자리에 쭈그리고 앉았다.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혀 있고, 손은 아직도 옷섶을 주물럭거리고 있다. 오전이라 한두 사람만이 서성거리고 있을 뿐 조명 시설이 엉망인 허깨비광 같은 드넓은 화랑은 텅 비어 있다

쥐어짜이는 듯한 감정이,,,,,, 쭈그리고 앉은 그녀 정수리 한복판의 흰 가리마가 둘로 셋으로 늘어나는 듯한 어지럼증이, 발바닥을 그 자리에 못박고 내 목을 썰었다. 내가 그녀를 이성(異性)으로서 느끼고 욕정에 아랫도리가 나사처럼 죄여보기는 그것이 처음이다.

 

이혼한 남편의 장거리 전화를 받는 그녀의 모습은 고집스럽고 애매하고 우스꽝스러운 데가 있어서, 보는 사람이 불안할 지경이었다. 엉거주춤 반쯤 몸을 일으킨 채 수화기에다 이마방아를 찧으며 갈팡질팡 하는 그런 형국인데, 목소리는 대번에 변질되어 있다. 즉 경상도 토

박이가 억지로 서울말 액센트를 흉내낼 때의 그 거북스러움과 같이, 여태가지 자연스럽게 쓰던 그녀의 표준어가 더듬거리며 사투리로 바뀐 것이다.

전화가 걸려온 것은 그녀가 온 지 7개월 째도 접어들 무렵인데 2월 추위로 연탄 스토브를 두 개나 피웠으나 아틀리에는 얼어붙어 있고, 그녀는 상기해 있었다.

", 아닙니더,,,,,, 왼쪽 발입니더. "

그러고는 잠시 간격을 두었다가,

"왼쪽 발입니더."

다시 한참 있다가 또,

"왼쪽 발입니더."

그런 똑같은 소리를 나중에는 나른하게 대여섯 번이나 되풀이하고 있다. 그리고는 전화가 끊어졌다

이상하기 짝이 없는 통화였으므로, 끈질기게 물어서 실토하게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가 장난 삼아 끈덕지게 추궁하자 그녀는 아직도 상기한 얼굴로 눈물까지 글썽글썽해서,

"달에 착륙하면 왼발인가, 오른발인가? 라는 거예요. "

"?"

"사람이 만약 달에 내리면 왼발부터 먼전가, 오른발부터 먼전가? 라는 거지 뭐,,,,,,"

"유형은 오른 발이라고 하던가?"

"."

"어째서?"

"죽어도 오른발이라는 거지 뭐."

나는 웃기 시작했다. 홍소(哄笑)의 충동은 스토브 주위를 돌면서 내 내장을 뒤집고 정강이를 번갈아 들어올리고, 부젓가락처럼 손바닥을 지져서, 웃어도 웃어도 성이 차지 않는 무수한 주름살들을 허공에 떠 올렸다,

"이것 봐."

하고 숨이 차 눈물을 질금거리면서 내가 말했다.

"넌 어째서 왼발이라고 했어?"

그녀는 관심 없다는 무심한 눈길을 내게 돌렸다.

"왼발이 아녜요?"

하고 유자는 되려 그렇게 묻고 있는 것이다,

 

......4명의 발가벗은 똑같은 유자가 길을 가고 있다, 길은 옛 산수화 속에 있는 그런 길, 거기서 이어진 길, 고풍한 병풍 속에서 잡아 뽑아낸 그런 길인데, 드디어 그 위에 아스팔트가 깔리고 그것마저 햇빛에 바래져서, 부여스름한 황톳빛으로 탈색된 그런 길이다.

그 길이 완만한 파고(波高)처럼 꾸불거리며 횡단하다 정지해 있고, 그 위를 아무 것도 모르는 4명의 유자가 열심히 걷고 있다. 주위의 풍경은 천연색 사진처럼 선명하고 울긋불긋하고 조잡하다. 꾀꼬리마저 운다. 그리고 그 꾀꼬리가 풍경 한복판을,,,,,,, 기류(氣流) 같은 노랑

색의 줄을 꽁무니로 그으며 날아간다. 새는 풍경 속에 정착하지 못한다. 풍경이 철저하게 평면(平面)이기 때문이다. 풍경의 원색들이 갑자기 변색하기 시작한다. 빨강은 자주색으로, 노랑은 갈색으로, 파랑은 군청(群靑)색으로, 그리고 하양은 잿빛으로, 품위를 갖추기 위해서 세계 중의 고통 당하는 사람들의 심성(心性)을 위로하기 위해서. 보이지 않는 거대한 짐승의 식성(食性)에 아첨하기 위해서.

그것도 모르고 4명의 유자는 여전히 재개재개 열심히 걷고 있다. 맨앞의 유자는 알몸뚱이의 등에 정체불명의 상자를 메고 있다. 두 번째 유자는 횐 기() 를 손에 쥐고 있다. 세번째 유자는 그물을 어깨에 메었다.

네 번째 유자는 검은 박쥐우산을 받쳐 쓰고 있다. 4명의 유자는 그것만 옥같이 발달한 튀어나온 엉덩이를 흔들면서 종종 걸음을 친다. 베이지 색의 크고 둥근 달이 천천히 떠오른다. 달은 오른쪽 동산에서 떠서 서쪽 구릉으로 서서히 넘어가기도 전에 풍경 한복판에서 가뭇없이 스러진다. 4명의 유자가 깜짝 놀란 듯이 똑같이 걸음을 멈춘다. 첫 번째 유자가 갑자기 공중으로 떠오른다. 그녀는 등에 멘 정체불명의 상자를 흔들며 달이 스러진 곳까지 곡선을 그으며 날아가서, 거기서 정지한다. 그리고는 태아(胎兒)처럼 허리를 꼬부린다. 두 번째 유자는 길을 잃고 갈팡질팡하다 돌아서서 기를 높이 추켜든다.

세 번째 유자는 그물을 넓게 멀리멀리 펼쳐 던지고 총탄세례를 받은 듯이 쓰러져서, 곤충처럼 경련한다. 네 번째 유자는 보이지 않는다. 그녀는 땅에 살을 박고 옴짝도 않는 박쥐우산 뒤에 숨어 있는 것도 아니고, 어디로 도망쳐버린 것도 아니다. 그저 보이지 않는다. 어디선가 거대한 짐승의 포효(咆哮)하는 소리가 들린다. 풍경이 텅 빈다

 

50--- 유자를 화폭에 담으려면 F 50호의 캔버스뿐이다. 그 이하도 그 이상도 안 된다--- 이런 결정을 내리고 나는, 그녀가 사놓고 거들떠보지도 않은 캔버스 있는 데로 걸어갔다. 결정은 고정 관념이다. 선택이 어려울 따름이지 일단 그것만 결정되면, 그 다음은 힘껏 밀어붙이고 덤벼들어서 그 고정 관념을 파괴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내 캔버스는 그러나 몇 달이 지나도록 이즐 위에서 텅 빈 채 있었다

 

"오빠는 친구가 없어요?"

어느 날 처음으로 그녀는 힐난하듯 그렇게 내게 물어왔다,

"다 떨어져 나갔어."

"많았는데?"

"그럼, 별별 녀석들이 다 있었지."

"어째서요?"

"내가 허덕이지 않고 죽어가는 시늉을 하지 않고 자기들처럼 비굴하지 않으니까."

"아쭈요,,,,,, 어째서 그렇게만 생각해요?"

그녀는 손가락을 입에 물고 재미있다는, 조롱 섞인 눈으로 눈웃음을 살살 치고 있다. 이런 때는 그녀가 나보다 건강해 빈다.

"사실이 그런걸."

하고, 내가 말했다.

"그렇지 않으면 관계가 성립 안 되는 시대야, 지금은. 비명을 내가 지르면 또 몰려들겠지, 도와주겠다는 구실로--- 사실은 목을 물어뜯으려고 오면서."

"모르겠어요."

안색이 변하고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연애는 몇 번이나 해봤어요?"

"세 번,"

"어떤 여자?"

"하나는 수세식변소 달린 아파트가 소원인 여자였어. 좋은 점도 많았지만 막판은 언제나 수세식변소야. 변소로밖에 들어갈 수 없는 여자지. 하나는 기회만 있으면 다른 남자하고 자보고 싶어 안달이 난 여자였고."

"부정(不貞)했어요?"

"부정할 용기라도 있으면 다행이었지. 괜히 그러거든. 그리고는 외국 배우 7,8명을 머릿속에 끌어안고 뒤로 넘어진단 말야. 날 언제나 알랭 들롱쯤으로 생각하고 있었거든, 집안 자랑이나 하면서--- 하나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짬뽕,,,,,,, 그 중간치야."

", 영화에 미친 여자였군요?"

하고 그녀가 손뼉을 딱 쳤다.

"버렸어요?"

"버리고 말고가 없어. 만나자마자 서로 필사적으로 도망치려고 버둥거렸으니까,,,,,,"

"그럼 나는 네 번째 여자가 되는군요."

하고 그녀가 눈을 내리깔았다.

"?"

하고 내가 말했다.

"누가 너 따위하고 연애를 하겠대?"

"오빠."

하고 골똘히 나를 바라보면서 그녀가 말했다

"절 따먹고 걷어차 버리세요."

"?"

"절 따먹고,,,, "

손바닥을 들어올려 나는 기계적으로 그녀의 뺨을 때리기 시작했다. 횡포한 충동은 따귀를 맞는 소리가 점점 선명해질수록, 그녀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질수록 점점 배가되고, 손은 가속도적으로 힘차졌다.

그녀는 곤두박질을 치고 코피를 흘리면서 한쪽으로 피해갔다. 내가 피를 막아주려고 다가가자 그녀는 동물과도 같은 표정으로 무의식적으로 팔을 내휘두르며 나를 막아내는 시늉을 했다.

"저는 헤었어요!"

하고 숨찬, 낮은 소리로 피를 막으면서 그녀가 외쳤다.

"열 대, 열 두대!--- "

언제까지 내가 이런 쓰레기 같은 도시에서 도망치지 못할 줄 아느냐, 이런 변소 같은 도시에서 이런 똥개 같은 도시에서, 텔레비 앞에서, 극장 속에서, 싸구려 주간지 틈에서, 멍청해서 도매금에 넘어 가기 전에 ,,,,, 개가 되어 팔려가기 전에,,,,,, 제주도든 울릉도든 탐라국이든, 숨쉴 땅을,,,,,, 뚫을 구멍을,,,,,, 발 붙일 장소를,,, 그런 나라를 찾아내지 못할 줄 아느냐, ,,, 언제까지--,---도대체 언제가지 이런 계집애 밑구멍 같은 지옥에 처박혀만 있을 줄로 아느냐,,,,,, 소러 없는 아우성이 내장으로부터 어지럽게 끓어 올라와, 절망해서, 나는 소파에 주저앉았다.

"오빠."

하고 그늘 속에서 유자가 말했다.

"이젠 됐어, 이젠 우리 깨끗해졌어요."

그녀의 말투는 그러니까 따귀를 한번 맞기 위해서, 코와 입술이 엉망으로 터져 라디오 드라마에나 나옴직한 진부한 그런 칼을 한마디 내뱉기 위해서 여태껏 7개월 동안이나 참고 기다렸는다는 그런 투였다, 그리고는 캔버스를 향해 그녀는 돌아섰고, 딴 세계를 향해, 전혀 다른 공간을 향해 어려운 여행길에 그녀는 천천히 들어섰다

 

2

 

여기 삼아 한두 시간씩 한 사나흘만 화필을 잡아본 사람이면, 국산 영화거나 어용 문학상 수상 소설에 나오는 화가처럼 그런 식으로는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다는 것을 곧 감득(感得)하게 된다. 그런 데서는 그것이 상징적인 수법이든 무슨 개지랄의 수법이든 간에 캔버스와 화가는 일체가 되어 피투성이의 물골로 뒹굴고 심각하게 폼까지 재는 것이지만, 실제의 화가는 캔버스에 오줌을 깔기고는 배꼽을 까고 샌드위치거나 짜장면을 맥빠지게 먹고 있을 따름이며, 내일 죽는다는 예정이 구두 뒷굽처럼 화실해도, 우선 대변부터 보고 보는 것이다,

그런 데서는 화가가 투우-럼 맹렬하게 캔버스를 주시하는 것이지만, 실제의 화가는 화포(畵布)를 얼른 비켜 간다. 그는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도망쳤으면 쳤지, 공간을 대상으로는 하지 않는다. 시인이 시를, 농부가 밭을, 마누라가 남편을, 정객이 독재를, 치질이 항문을 대상으로 하지 않는 것처럼.

화가는 고통하지 않고 긴통을 깔고 앉을 따름이며, 그가 싸우는 대상은 공간이거나 자신의 내부가 아니라 캔버스 앞에 재빨리 커튼처럼 내리 드리워지는 어떤 무기력감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화가는 화포 앞에서 곧 돌아서며, 남의 다리를 긁으며, 벼룩을 잡으며, 수음을 하며, 자전거를 타고 달리며 그린다. 그것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돌발하는 교통사고다. 설사 그 화가가 어리석어 빠져서 일곱 낮 일곱 밤을 식음을 전폐하고 캔버스만 어루만지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림은 거기에는 없다, 그것은 분뇨 수거차 속에 있고, 맹장 속에 콩팥처럼 끼어 어디론가 실려가고 있다. 설사 그 일곱 낮 일곱 밤의 도로(徒勞)가 비상(飛翔)하는 손가락 하나를 비상하는 손가락 꼭 그것으로 뽑아낼 수 있었다고 하더라도.

유자가 그림을 그리는 방법은 그녀답게 몽롱해서, 그 때문에 오히려 새로와 보였다. 그녀는 온갖 종류의 테크닉과 재료들을 전혀 모르거나 일체 무시하는 듯이 보였고, 심지어 브러시와 캔버스까지 없애 버렸다. 그것들을 없앤다는 것을 자신에게 일러 듣긴다는 듯이 혹은 내게 알린다는 듯이 -이런 점으로는 그녀는 몹시 여자답다-그녀는 어떤 날 짝은 의식을 거행하고 그것들을 불태웠다. 인적이 없는 언덕바지 움푹 꺼진 곳에서 이른봄 햇살을 받으며 기름 묻힌 브러시와 캔버스장들이 벌벌 타고 있는 꼴을 본다는 것은 딴은 을씨년스럽소 황량하기까지 한 기분이 들어서, 나는 입맛을 다셨다,

"이젠 머리 틀어올리고 좋은 사람한테 시집이나 가지 그래?"

좀 과장스러운 그녀의 의식을 이렇게 빈정거리자, 그녀는 멍한 눈길을 내 쪽으로 돌리고 오랫동안 말이 없다가,

"이제부터 시작이에요."

미간을 찌푸리고, 되려 성을 낸 것이다.

"뭘루 그림을 그리지?"

"오빠!"

하고 다가와서 그녀는 내 옷섶을 잡고 흔들기 시작했다.

"나는 그릴 수 있어요."

그리고는 외면한 채 다시,

"예수도 그림을 그렸거든."

하는 말을 하고 있다.

그녀의 이런 집념과 확신과 오만은, 그것이 일견 기이해 보이는 그녀 특유의 화재(畵材))들을 선택할 때도 어김이 없었다. 지물점과 구멍가게와 화방엘 들러 창호지와 달걀과 몇 종의 물감을 그녀는 갔던 것인데, 그것들을 선택하는 방법이 꽤 까다로웠다. 지물점 주인은 몇

대째나 그 업을 이어온 양반이었던지 그녀의 이런 태도에 짜증도 내지 않고, 그 종류의 종이들은 모두 끌어내서 일일이 결을 비쳐 보이며 오히려 그녀와 장시간 맞장구를 치며 히히덕거리고 있었다. 충격을 받았다 - 라기보다 나중에는 화가 치밀어 올라서, 예상하지 않았던 유자의 그런 일면을 보고 나는 안절부절못했다, 그녀가 지향하고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고풍(古風)한 세계 - 나와는 정반대로 과거의 세계, 회고(懷古)의 세계 - 그런 것임을 어렴풋이 직감했기 때문이다.

달걀을 고르거나 물감을 선택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가장 비싼 외제 물감으로부터 뿌연 국산 물감에 이르기까지, 그녀는 일일이 어떤 확신을 가지고 하나하나 이름을 댔다. 그녀가 고른 것은 청색(靑色) 계통의 대여섯 종의 물감인데, 이를테면 '흘바인 에머랄드 그린 하나, 쿠사카베 프러시안 블루 둘, 루벤스 울트라 마린 하나,,,,,,' 하는 식이다.

노른자위를 없앤 달걀의 점액을 기름과 함께 유리병 속에 넣고 그녀는 물감을 혼합해서 푼 다음, 그것을 오래오래 휘저었다. 그리고는 창호지에다 손가락으로 그녀는 그림을 그렸다. 그녀가 처음 그린 것은 물고기 형상의 어떤 추상적인 포럼, 그것을 사각(四角)의 툭진 선() 속에 가두었다가, 불에 덴 듯이 창호지와 함께 모두 없애 버렸다.

모노크롬에 대해서, 그리고 인간의 손가락의 효용성에 대해서 새삼 왈가왈부할 것까지도 없다. 폰타나거나 이브 클라인이거나 거슬러 올라가서 앙리 미쇼거나 로스코거나 삼 프란시스거나 - 비록 그늘이 화포 위에 몇 가지 채색을 더 가미해보건, 정규의 브러시나 그 대신의 송곳, 나이프 등으로 캔버스를 찢어발겨 보건간에--- 동양적인 정신의 어떤 정밀감에 도달하려고 발버둥치는 그 모든 작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녀 역시 어떤 한 개의 소실점을 향해 자신의 전부를 집중시키고, 그것으로 자신의 소멸을 면해 보려고 애쓰고 있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그녀는 창호지로 대변되는 어떤 세계 - 부자건 가난뱅이건 그것으로 문을 해 단 모든 가가호호들을 대변해서, 그들이 창호지를 통해 내다보고 두려워하는 바깥 세계에다 무당처럼 부적(符籍)을 써 붙이려고 하고 있었던 것이다. 기법의 면에서는 그녀의 이런 방법은 멋과 풍류와 낭랑한 소일(消日)을 드높이 구가하는 동양화의 모필(毛筆)을 철저하게 묵살하고 있다. 그녀는 모필이 얼마나 무책임하고 위험한 것인가를 지레 짐작하고, 몸을 도사리고 그것을 경계하고 있었던 것 같다. 생살에 꽂힌 나이프를 잡아당기듯 그녀는 물감범벅이 된 뻑뻑한 손가락을 힘들게 창호지 위로 잡아당겼다.

지상에 발을 붙이고 있는 모든 생물들-이라고나 한다면, 가령 들판에 한 마리의 사슴이거나 암사자거나 뿔 달린 장끼 한 마리가 땅을 파며 죽어갈 때는, 10리 사방에서 온갖 종류의 짐승들이 그것을 보려고 모여든다.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인물들이 그 무렵부터 갑자

기 내 아틀리에에 들이닥치기 시작한 현상을 나는 이렇게 밖에 설명할 도리가 없다. 그런 점만으로도 그녀는 행복해 보였다. 내가 죽으면 - 가령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해 객사라도 하게 되면 시골에서 홀로 늙고 있는 과수 누이에게 시체가 인도되기까지에는 1주일이 더 걸릴 것이다. 어떤 종류의 신분증명서도 나는 갖고 있지 않다. 그 동안에 시체는 썩고 부옇게 떠서,,,,,, 이런 공포가 나를 휩싸고 그녀가 점점 생기를 더해갈수록 나는 점점 의기소침하고 맥빠지고 허약해져갔다.

아호(雅號)를 자칭 풍당(風堂) 이라고 하는 친구가 - 그는 동양화를 하는 내 동료지만 - 갑자기 거의 매일 아틀리에에 들려 우리들 앞에서 지전을 헤어 보이고 있다. 서른 다섯도 못 넘긴 친구가 벌써 배 앞부분이 미어질 듯이 튀어나오고, 들어오자마자

"내 오늘 얼마 벌었는지 좀봐."

하면서 5백 원 권 다발을 꺼내 한 장 한 장 침칠을 하면서 헤기 시작하는 것인데 조롱하려고 그러는 것도 아니고, 천성이 소박하고 우직해서 그런 형태로 발전하고 만 것이다. 두 번 세 번 헨 것을 안호주머니에 집어넣고 다시 다른 다발을 꺼내서 이번에는 백 원 권을 그런 식으로 헤고 있다, 눈은 가늘게 번쩍이고 입은 웃음을 띠고 있다. 견딜 수 없어서,

"임마. 그림은 언제 그려?"

하면,

"? 2백 호 짜리를 또 하나 끝냈는데?"

하고 되려 묻는다.

"크다고 모두 그림인가? 뭘루 그림을 그리지?"

"물감으로 그리지, 뭘루 그려? 이제 두고 봐, 곰팡이를 부식시켜 5액 호 짜리를 대여섯 개,,,,,, !"

섬세하고 고운 산수화가 그의 장긴데, 그것으로 얼간이 고관이나 학부형들의 주머니를 울궈내고, 장차는 곰팡이를 화지 위에 부식시켜 대작을 내겠다고 자신만만하고 있다.

내 울화통을 터뜨린 것은 그런 그를 대하는 그녀의 태도가 시종 웃음으로 일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라기보다 어느 날, 그런 식으로 동료들에게 지나치게 으스대다 얻어터진 그가 일사불란 곧장 그녀 앞으로 달려왔기 때문이다, 풍당 선생은 명동의 어느 술집에서 먹은 것을 게울 정도로 실컷 얻어맞았던 모양으로 - 고지식한 성격의 환쟁이들 사이에서는 주먹다짐은 항다반사다 - 피투성이가 되어 차도 타지 않고 달음박질쳐 30리가 넘는 길을 헐레벌떡 아쁠리에로 달려왔다.

"세모잽이 씨팔 네모잽이 모란 같은 것이,,,,,, 나는 얻어터졌어요,"

그런 괴상한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뛰어들어와서는 그녀가 코를 골고 있는 소파 앞에 푹 고꾸라진 것이다. 그리고는 움직이지 않았다.

숨이 막힐 것 같은 탁한 정적이 - 그녀가 무슨 앓는 소리를 내며 부시시 일어나는 것을 보는 내 눈 앞을 가로막았다. 그녀의 손이 훌쩍 훌쩍 울기 시작한 풍당 선생의 불그스름한 목으로 뻗치고 - 그것을 채 보기도 전에 나는 밖으로 나갔다. 아무리 잘 봐야 내 눈에는 황폐하고 그로테스펀한 것으로밖에는 안 보이는 그런 풍경에서, 나는 그녀를 좀더 이해하고 그녀의 죽음을 좀더 빨리 예견이라도 했어야 했을 것이다. 깊은 밤 형광등 불빛 아래서 얼굴이 엉망으로 터진 배불뚝이 고운 산수화 앞에 여자가 있는 대로의 섹스를 다 드러낼 때는, 그것으로 벌써 모든 것이 끝장이다 - 이런 막연한 생각을 하면서 나는 이를 깨물고 밖에 서서 기다렸다. 나의 예상대로 조만간에 숨결이 어디에 걸린 듯한 그녀의 비명이 들려오고, 풍당 선생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다시 뛰어들어가자 그녀는 예의 소파 위에 까무라친 듯이 넘어져 있고, 전신으로 勃起한 풍당 선생이 그 주위를 돌면서 짐승처럼 갈팡질팡하고 있다. 모든 것이 너무나 명약관화했다. 풍당 선생은 그다운 방법으로 그녀를 사모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아무리 무의식적으로 - 라고 하더라도 그때 자리를 피해주고 도망친 것은, 풍당의 이런 현장을 잡아내고, 그를 쫓고 그것을 구실로 그녀를 좀더 내 시야 속에 잡아두려고 그랬던 것인지도 모른다. 전신을 완전히 방기(放棄)한 듯이 하고 어떤 일점(一點)을 향해 제작에 몰입해 가는 그녀를 감당할 자신이 내게는 없었다. 그녀의 손가락은 점점 확실해지고, 더욱 정확해졌으며, 그와 비례해서 나는 점점 몽롱해 지고, 풀죽고, 애매해졌다. 이런 것은, 내가 어설프게 완성한 그림을 될 수 있는 대로 어디다 - 이 세상에다 보관해 주려고 애쓰고 있는 반면에 그녀는 완성된 작품을 미련도 없이 하나하나 없애 버리고 있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그녀는 한 작품을 완성하면, 다음 작품에 들어가기 전에 반드시 그것을 없애 버렸다. 마치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남겨놓은 작품에 자신의 손가락 하나가 남아 붙어서, 그것이 밤새도록 창호지를 쑤시고 악몽을 들추고, 고는 코를 움켜쥔다는 듯이. 그렇다고는 하나 객관적으로는 그녀의 작품의 위치는 도대체 어느 정도나 되는 것인가? 벌써 한 세대 전의 유물인 엥 포르멜니 잔재(殘在)로만 밖에 안 보이는, 일견 우스꽝스럽고 기괴한 청색의 상자들을 그녀는 끝없이 창호지에다 쌓아올려 가기만 하고 있다. 그리고는 누가 볼세라 그것을 곧 불태워 버린다. 세상에서 걸작이라고 아낌받는 모든 명화들을 향하여, 거기 황홀한 눈길들을 던지고 입을 떡 벌리고 있는 모든 선남선녀들을 향하여, 당신들은 허무맹랑한 꿈을 꾸 고 있다. 당신들이 보고 있는 것은 한줌의 더러운 진흙막지며, 개부스럼이며, 속임수며, 잿부스러기에 불과하다, 어떤가? 이 스러져가는 불꽃더미를 좀 보란 듯이,,,,,, 이런 태도는 나를 조롱하고 자존심을 쑤시고 내 의식을 전전긍긍하게 만들었다.

유형이 그 무렵 상경하지 않았더라면 육체적으로 몹시 허약해진 그녀의 허점을 노려 어떤

교활한 공격을 내가 또 그녀에게 가했을지 상상이 되지를 않는다.

유형은 역에 내리는 즉시 아틀리에로 달려왔던 모양으로. 무슨 못올 데를 들어온 듯이 화실 구석을 서성거리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뭘 좀 먹어야 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괜찮다고 안 그랬습니꺼?"

"글쎄, 그런 몸으로는 어떻게 좀 지탱을 해내겠어요?"

"글쎄,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고 말 안 했읍니꺼 ?"

유형은 유형대로 표준어를 쓰려고 기를 쓰고 있고, 그녀는 그녀대로 사투리를 쓰려고 애를 쓰고 있다. 둘 다 따로따로 다른 바람벽을 아래위로 훑으면서 남의 말하듯 그러고만 있는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이들의 사이는 서로 극진히 아끼고 위하는 부부들간의 그 거북살스런 애정 - 이혼을 했다고는 하나 아직도 신혼여행 중인 그런 애정 - 으로 단단히 연결되어 있다. 그런 것을 느끼고 나는 질투를 느꼈다. 유형은 그런 투의 권유만 되풀이하다 외면한 채 저녁 차로 내려갔다. 그리고는 며칠 뒤에 다시 올라왔다. 또 그 거북살스런 음식 타령만 어릿거리며 하다 내려갔고, 다시 며칠 뒤에 올라왔다.

"웬만하면 유자씨하고 다시 새 생활을 하시지요. "

옆쉐서 보기에도 딱하고 감질나서, 유형과 마주앉은 술자리에서 내가 이렇게 권유를 해보았으나,

"유자 말입니꺼? 우리는 안 됩니더."

유형은 웬일인지 머리를 꼬고 탁자만 내려다본 채 단호하게 그렇게 말했다.

"무슨 오해라도 있는 게 아닙니까?"

"오해는 없습니더. 그렇지만 그 사람하고는 안 됩니더. 그 사람은 귀신한테 씌웠습니더."

"그림 그리는 일 말입니까?"

", 그 때문만 아닙니더. 그 사람은 씌웠습니더."

"유형까지 그런 식으로 이해를 못하시면 어떻게 합니까?"

그는 K대 경영학과 출신이다, 이해를 못할 리가 없다. 무슨 엉뚱한 오해가, 그들 사이에 있는 것 같다. 그러자 유형은 더욱 외면한 채.

"우리는 안 됩니더. 우리는 안 됩니더."

소리를 되풀이하면서,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유형의 그런 태도를 전하고 패가 설득을 시키려고 하자 유자는,

"그럴 거예요."

하고, 의외로 심상한 대답을 하고 있다.

"저는 영구 불임증이거든요."

"?"

"골반도 형편없고 난소도 없어요."

"의사한테 가봤어?"

"가보나마나,"

몹시 중요한 일을 이런 식으로 내던지듯 말할 때의 유자는, 여태까지의 멍하던 표정이 일시에 사라지고 되려 총명한 소학생 같은 얼굴이 된다. 유형이, 귀신한테 씌웠다고 말하는 것은 바로 그녀의 이런 점이 아닐까? 생각했던 대로 유형은 그녀의 불임증에 대해서 무엇에 찔린 듯이 펄쩍뛰며, 부인했다.

"자기 손으로 애를 떼놓고!...,."

"유자씨가 임신한 일이 있어요?"

"애기를 갖자마자 곧 떼 버렸읍니더. 내한테는 물어보지도 않고,

……"

괴이한 광기(狂氣)마저 느껴지는 그들의 끝없는 숨바꼭질과 미로(迷路)에 개입하기를 나는 단념했다.

소파에 까부라져서 코를 고는 대신 주머니 돈을 털어 그것으로 갈 수 있는 데까지 버스나 기차로 달려서, 그 내린 곳의 목욕탕에 들어가 세 시간이고 여섯 시간이고 잠을 자는 버릇이 그녀에게 붙은 것은 이 무렵부터다,

,,,,,,만개(滿開)한 거대한 한 떨기 모란 앞에 나부(懶婦) 하나가 돌아앉아 있다. 나부는 유자라고 왜도 좋고, 시골 누이라고 해도 좋고, 내가 옛날에 거리에서 얼핏 보며 치나친 그 어떤 여자라고 해도 좋고, 하룻저녁 몸을 산 창녀라고 해도 좋다.

나부의 머리 위 두 치쯤엔 지붕 하나가 떠 있다. 그것은 덕수궁의 용마루라고 해도 좋고, 어느 부잣집 본채의 기왓골이라고 해도 좋고, 시골의 쓰러져 가는 폐가(廢家) 지붕머리라고 해도 좋다. 잡초들이 자라다 만 채 낫으로 잘린 듯이 기와 틈틈이 박혀 있다.

나부 앞5-전방(前方)에 옛 임금이 한 명 서 있다. 그는 세종대왕이라고 해도 좋고, 폭군 연산이라고 해도 좋고, 혹은 먼 고구려의 어느 이름 없는 임금이라고 해도 좋고, 두 명이라도 괜찮고 세 명이라도 좋다.

나부와 임금 사이를 자전거를 끌며 찬 사나이가 지나간다. 혹은 둘이 지나간다. 그는 나라고 해도 좋고, 유형이라고 해도 좋고, 풍당 선생이거나 어느 걸인이거나, 혹은 죽은 유자의 아버지거나, 혹은 아무개가 아니라도 좋다.

닭 우는 소리가 들리고 공간을 꽉 뒤덮은 안개가 서서히 벗겨진다. 희미한 것은 더욱 희미하게, 붉은 것은 더욱 붉게, 그리고 옴짝 않는 것은 더욱 옴짝 않게 ,,, ,

 

내가 작품에 대한 이루지 못할 허황한 꿈만 꾸고 있는 동안에, 그녀는 벌써 길을 떠났다. 이틀이고 사흘이고 주머니 돈이 자라는 데가지, 돈이 떨어지면 굶거나 아무나 붙들고 통사정을 하면서 수원이건, 강릉이건, 대구건, 어느 시골 역이건, 혹은 밀양이건, 여수건, 유자가 안 가본 곳은 없다. 그녀는 몽롱한눈으로 차창에 기대고 졸면서 끝없이 흔들려 가서는, 그 내린 곳에서 곧바로 목욕탕을 찾는다, 그리고는 발가벗은 몸을 그 속에 내던지고 긴 잠을 잔다. 공동탕 속에는 온갖 종류의 여자들이 허리를 꼬고, 혹은 꼬부라진, 혹은 엉거주춤 꿇어 앉아서 낄낄거리며 때를 씻고 있다. ()만한 배를 탕에 잠그고 물장난을 치는 미련한 여자도 있다. 그들은 기이한 듯이, 상대는 가늘고 하체는 특히 발달한 작고 미끈한 공룡(恐龍) 새끼 같은 이런 여자를 보고, 어째서 이렇게 여린 피부를 가진 여자가 때는 씻지 않고 코만 골고 있을까, 하고 그것을 몹시 이상해 하면서 머리를 기웃거린다, 그러는 새에 그녀들은 겨드랑이마저 깨끗이 씻었으므로, 일어나서 하릴없이 밖으로 나간다. 둘이 나가고 셋이 나간다. 그리고 하나가 다시 들어오고 다른 여인 둘이 또다시 들어온다. 그 동안에도 그녀는 깨지 못하고 있다. 물 그릇을 베개삼아 고요히 뻗어 있을 따름이다. 코고는 소리가 점점 약해져 간다------

그 동안에 내 아틀리에에는 이름 모를 중이 하나 찾아온다. 그는 속초 쪽에서 유자를 만나 잠깐 얘기를 해보고, 상경했던 길에 그녀를 한번 더 보고 가려고 왔다고 말한다. 그 중이 이렇게 묻는다.

"이런 그림은 무엇 때문에 그리오?"

나는 대답할 바를 몰라 쩔쩔맨다. 선문선답에 나는 익숙해져 있지 않다. 중머리가 계속 도도한 눈초리를 하고 있으므로 얼김에,

"똥을 누는 거나 마찬가지지요."

하고 배짱을 퉁겨보았더니, 입술을 약간 들썩하면서 박제(剝製) 이빨 한 개를 내 보이고는, 의연히 도도한 눈초리다.

"망원경을 바로 대고 세상을 볼 수 없을 때는 어떻게 합니까?"

"망원경을 버리시오."

"거꾸로 대고 보면 안 됩니까?"

"그런 생각을 버리시오."

"세상이 벌집처럼 칸막이가 져서, 그렇게 외에는 보는 방법이 없어도?"

"어째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오? 무엇 때문에 세상을 보려고 하오?"

 

죽기 몇 달 전에 유자가 몇 마디씩 수작을 붙여본, 그래서 그녀의 죽음의 냄새를 맡고 아틀리에에 몰려온 사람들은 대개 이런 투의 인물들이었다, 그 중에는 보도 듣도 못하던 깡패 같은 녀석도 있고, 여행길에 그녀가 빌린 몇 백 원 돈을 받으러 온 사람도 있고 40을 넘은 기자 타입의 여자도 있다. 그 여자는 아틀리에에 들어오자마자, 복제화와 원화(原畵) 사이에는 굉장한 차이가 있다는 것을 역설하기 시작했다. 자기가 해외여행을 많이 했다는 것을 자랑하려고 그러는 것 같은 눈치도 아니고 무슨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지도 않은데, 오직 그 얘기만 늘어놓고 있다.

"거야."

하고 내가 말했다.

"엄청난 차이가 있을 건 틀림없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모사(模寫)꾼들이 굶어죽게 되지 않아요? 원화보다 복제가 더 나은 화가들도 있는 것 같아요. 미로나 클레 같은 화가들은,,,,, 어때요? 그런지 어떤지?...."

그녀는 그렇지 않다고 소리를 지르고는, 제풀에 성을 내기 시작했다.

이런 인물들 중에서 유자가 어느 날 나를 끌고 가서 소개를 시켜준 어느 작은 시골 성당의 신부(神父)가 깊은 인상을 내게 주었다. 소개라고 해야 멀리 숨어서 성당문 밖에 서성거리는 어떤 인물을 손가락질하면서,

"저 사람이 신부."

라고 가르쳐준 데 불과하지만, 내가 충격을 받은 것은 그렇게 말하는 유자의 손가락이 덜덜 떨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신부의 눈썹과 신부 앞으로부터 우리 쪽으로 난 길 좌우에 무수히 촘촘히 갖가지 꽃들이 들이박힌 화단 때문이었다. 신부의 눈썹은 얼굴 한복판에 마디 그것밖에 없는 듯이 푸른색으로 드러나서, 그것이 억새풀처럼 바람에 불리우고 있는 듯이 보였고 화단의 꽃 빛깔들과 묘한 밸런스를 이루고 깜짝 놀랄 만큼 청결해 보였다. 유자가 멀리 신부를 바라보는 눈초리에서 심상치 않은 열기 같은 것을 느끼고, 나는 고독감에 빠졌다. 그녀는 손톱을 깨물고 낭패한 듯이 고개를 숙인 채, 지루할 정도로 침묵했다. 그리고는 우리는 돌아서서 버스정류장 쪽으로 걷기 시작했던 것인데, 그 중도에서,

"구두가 걸어다니는 것이 보여요."

하고 그녀가 띄엄띄엄 꿈이야기를 시작한 것이다.

"모자가 흔들흔들 가고 있어요."

라든가

"소매가 올라갔다 내려왔어요."

한다든가

"바지가 앞뒤로 왔다갔다 하누만. 참 우스워요."

하고는 웃음을 터뜨리는 것으로, 그녀의 꿈은 대개 의류거나 인간의 몸에 부착된 액세서리들로 국한되어 있었다, 예를 들면

"핸드백이 뒷걸음질치네."

"반지가 떴어." 하는 식이다. 어떤 때는

"트럭이 달리네. 집이 무너지는 것 같아요."

하고, 아무 얘깃거리도 안 되는 범상한 사실을 몹시 힘들어하며 얘기할 때도 있다. 이런 꿈은 말할 것도 없이 그녀의 눈에 보이는 것을 그대로 얘기하는 것이다. 그녀의 눈에는, 혹은 의식의 눈에는, 인간의 근육이거나 사지(四肢)거나 얼굴과 육체가 떨어져 나가고 없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그런 것을 보지 않으려 들고, 보이더래도 지워버리고 얘기를 않는다. 그녀는 이를테면 투명 인간을 보듯이 사람들을 보기 시작한 것이다. 아이들이 공상 모험 소설에 몰두하듯이 지치지도 않고, 그녀는 며칠 동안 끈질기게 열의와 진지성을 가지고 이런 비슷비슷한 사실을 얘기했다. 금방 조금 전에 한 똑같은 이야기를 다시 시작하면서, 그녀는 그것을 까맣게 잊고 있는 듯했다. 마치 그렇게 하지 않으면 수억만 개의 바지와 소매 투성이와 단추와 모자들로만 구성된 어떤 숭고한 왕국(王國)을 새로 세울 수가 없다는 듯이.

그녀의 육체와 정신의 곤핍(困乏)이 비로소 절감돼서 어떤 외경스런 공포와 충동적인 본능으로 반무의식적으로 끌고 들어간 안경점에서, 그녀의 피로의 농도가 증명되었다. 유자의 시력은 0.1이하로 내려가 있었다. 나의 거칠은 협박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발버둥을 치듯이 막무가내로 안경 쓰기들 거부했다.

"나도 그렇게 보이냐? 나도 바지와 구두밖에 안 남아 보여?"

한쪽 심장을 없애버린 듯한 허탈감을 은밀히 맛보면서 내가 이렇게 확인을 하려 들자, 그녀는 밤거리의 건물들과 불빛들을 두리번거리던 눈으로,

"오빠는 제가 잘 알고 있으니까."

하고 지친 아이처럼 웃음을 보이고 있다. 무엇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일까?

그녀가 오랫동안 혼자서만 만끽하던 꿈을 드디어 입 밖에 내서 얘기했다는 것은, 그 생생하던 꿈이 생기를 잃고 바지와 소매구멍만 남았다는 의미밖에 되지 않는다. 그녀는 여태껏 팽팽하게 대치해서 그것으로 자신의 힘과 생명력을 측정하고 자부하던 어떤 내용물이 허물어지자, 내 쪽으로 돌아선 것이다. 그것은 말할 나위도 없이 인간에 관한 꿈, 인간의 육체의 빛과 그 은밀한 꿀에 관한 꿈, 그 측량할 수 없는 우물의 깊이와 부피에 관한 꿈이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엉덩이와 엉덩이들을 서로 연결한 채 목은 목대로 힘껏 빼돌려 서로 물고 뜯는 인간들에 대한 나의 조잡하고 품격 없는 악몽과 그녀의 그 청결한 꿈이, 도대체 어디가 얼마만큼이나 다르다는 것일까.,., .

드디어 그녀가 절망해서, 비명을 지르는 날이 왔다. 굴러다니던 외국잡지 나부랑이를 무심코 들추던 그녀는 얀 포스(Jan Voss)의 그림 한 장을 붙들고

"이 망할 자식이---"

하면서 머리를 움켜쌌다. 작품에 관한 한 유자에게는 거짓이 없다. 그녀는 잡지를 팽개쳤다가 다시 들고 보고, 다시 팽개쳤다가 또 주워들었다.

"이 망할 양반이...... 나보다 먼저 그려더렸어 ,,,,"

말은 그렇게 쉽게 내뱉았으나 그녀의 절망감은 치명적인 듯했다. 그녀는 초점 잃은 눈을 다시 잡지로 가져갔으나, 그것을 보는 것 같지도 않았다.

얀 포스는 1936년생의, 독일의 젊은 화가로 팝 아트계통의 신진이다. 만화풍의 터치로 동화조의 이야기를 화면에 깔면서 그것을 사람들의 단절된 의식을 점철, 풍자하는 것이 특징적인 화풍인데, 그녀가 들고 본 것은 (순간의 환희)라는 1964년도 작품이다.

손가락만한 익살스런 인물들이 화면에 확 깔려 있다. 대부분이 그리다 만 듯한 그런 인물, 그리긴 그려도 어떻게 뒤죽박죽이 돼버린 인물들뿐이다. 기린인지 돼지인지도 모를 동물이 있고 발이 셋 달린 여자가 있고, 제자리 걸음만 치는 소년, 사타구니가 종()처럼 변한 뚱보, 자빠져 웃는 말, 코가 엿가락처럼 늘어난 그런 사람도 있다. 서투른 윤무(輪舞)를 추는 눈곱만한 아이들도 보이고, 통조림 따개에 휘말린 여자를 요리하는 나이프와 포크도 보인다. 그리고는 허리가 끊어진 그 모든 자잘한 의식들이, 보는 사람의 코를 간질이고 내장의 기쁨을 쿡쿡 찌른다.

"어째서 이 작자가 네 그킴과 같다는 거지?"

"나는 이 사람 껍데기일 따름예요."

"그렇지 않아, 이 작자가 네 껍데기라면 또 몰라도,,,, 동양과 서양을 구별도 하지 못해?"

"나는,"

하고, 바닥을 내려다본 채 그녀가 말했다,

"이런 것을 가두려고만 했어요. "

"그런 것이 동양이야. 네 식으로 얘기하면 모든 그림들이 다 똑같아."

"그렇지 않아요"

하고 성난 어조로 그녀가 말했다"

"똑같지 않아요."

그녀는 아마도 어줍잖은 어떤 한 장의 그림과 자기를 연결시키고 그것으로 자신을 재삼 확인해보려고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녀의 고민은 그러나 너무 심각했고 고통은 너무 참혹했다. 그녀는 며칠 동안을 이를 가는 시늉으로 궁지에 몰린 토끼처럼 전전긍긍하면서 수척해갔다, 그리고는 소파 위에 길게 쓰러졌다.

불을 켜지 않은 화실 가운데 길게 넘어진 그녀의 모습은 물고기 같이도, 선박 같이도, 때로는 푸대자루 같이도 보였다.

"오빠, 병이 나면 어떻게 하면 되지?"

"약을 먹고 의사한테 보이지."

"약도 의사도 듣지 않으면?"

"그 병을 물고 늘어지는 수밖에 없어."

이런 대답이 그녀에게는 대체 얼마만한 실감을 가지고 들렸을까. 그녀는 다시 일어나자 이번에는 얀 포스를 대상으로 창호지와 싸우기 시작했다. 그녀의 방법은 말할 것도 없이 그의 그림을 뜯어서 벽에 붙여 놓고, 거기다 전 의식을 집중, 긴장시켜서 그림을 해체(解體)하고 재구성하는 그런 테크닉이다. 그녀는 화면 중의 인물 하나를 끌어내서 그것을 창호지 쪽에다 밀어붙이고 덤벼들어서 손가락으로 요리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림의 멱을 물어뜯고, 걷어차고, 비볐다. 그리고는 다시 쓰러졌다.

 

가운을 입으면 모든 것이 호사스러워 보인다. 입원실도 병도 약도 심지어 가운을 입은 그녀 자체까지도 호사스런 기분 위에 둥실 떠 보여서, 그것을 보는 내가 무슨 수술을 받은 듯한 착각이 들고 이윽고는, 일생 동안 아마 한번도 맹장수술조차 받아보지 못한 채 죽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막연하고 호사스런 생각에까지 이르게 되고 마는 것이다. 내가 그의 얘기를 유자에게 한 것은 아마 이런 기분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것 봐"

하고 내가 말했다.

"상관한테 대들다가 배트를 50대나 맞고도 훨훨 날아다니는 놈이 있었어."

"오빠한테도 그런 친구가 있었어 ? "

"그놈 뿐이야, 내한테는. 물래 비장해 놓고 있었지. 군대시절의 친구는 그 한 놈이면 충분해."

"아아쭈.,,., 몰랐네. 그 사람 얘기해주세요."

"50대만 맞은 게 아니지. 총검으로 찔리고 개머리판으로 닥달을 받아도 시종 훨훨 날아다녔거든."

그녀는 침대 홑이불 자락 밖으로 예쁘게 얌전히 팔을 포개놓고 있다, 나는 얘기하기 시작했다. 그에 대해서, 그의 싸움에 대해서 싸워도 끝나지 않는 모든 청춘들의 싸움에 대해서 그리고 그의 긍지와 믿음에 대해서 이튿날도 다음날도 나는 그의 얘기만 했다. 내가 너무

그를 추켜 올리기만 하니까 그녀는 화를 내고,

"너무 추켜 올리지 말아요, 실감 안 나니까. 그 사람은 지금 뭘 해요?"

"너무 날아다니기만 하니까 나라에서 유리상자 속에 가둬버렸어."

"나처럼 병원?"

나는 끄덕였다.

"한번 봤으면 좋겠네. 내가 안 만나본 사람은 없어요. 그 사람은 대체 누구예요?"

나는 머리를 숙이고 그것을 말할까 어쩔까를 망설였다. 얘기가 어쩐지 너무 깊이 들어간 듯찬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그놈은 시인이야"

하고 아직도 망설이면서, 내가 말했다.

"별로 유명하지는 않지만, ,,,, 그런 점이 오히려 더 낫지."

""

하고 졸음 속으로 끌려 을어가면서 그녀가 말했다.

"시인."

청량리 정신병원을 찾아가는 내 발걸음은 내가 스스로 파놓은 내부(內部)의 흙투성이 쪽마당을 향하여 사정없이 갈팡질팡하고, 허청거리고 비틀거렸다, 모든 것이 이미 뒤집혀져 있었다. 그녀에게 입을 연 순간부터, 모든 것이 이미 거꾸로 서 있고 거꾸로 달리고 있다.

설사 그 벽 속에 한 개의 기적이 마련되어 있고 한 개의 구멍이 이미 뚫려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예정되어 있었던 것뿐인 것이다. 담당의사가, 그는 이미 정상적인 인간이 되어 반 년 전에 퇴원했고 그의 주소는 이렇다고 지나치게 친절하게 약도를 적어줄 때도, 나는 그것을 느끼고 몸을 움츠렸다. 그리고 어쩔 수 없는 힘에 떠밀려, 온몸에 종기가 돋아나는 듯한 기분으로 그에게 엽서를 썼다

그가 우리를 찾아온 것은, 유자가 입원한 지 달포가 거진 되어갈 무렵이다. 그래서 그런지 그녀는 경과도 좋아 보여, 우리는 병원의 상설 다과점에서 주스류와 커피를 마시고, 음담패설을 하고, 히히덕거렸다. 유자가 소개를 받은 그를 곯리는 방법은 묘해서, 그것이 또 나를 불안하게 했다.

"선생님 발을 꼭 한번만 밟아봤으면."

하고 모든 것이 신기한 듯이 그녀는 얼굴까지 붉히고 그런 말을 했던 것인데,

"얼마든지."

하고, 그가 발을 내밀자,

"발이 참 상큼해요."

하고, 그런 표현을 쓴 것이다. 이런 표현은 오랫동안 그녀 옆에서 그녀의 표현 한계를 잘 알고 있던 나로서는 기상천외한 것으로 느껴졌다. 그는 소년처럼 얼굴을 붉히고, 기금을 받게 됐으며 곧 시집(詩集)이 나온다고 말머리를 돌렸다. 그리고는 급한 볼일이 있어 가야겠다고 일어섰다. 착오는 이미 마련되어 있었고, 그가 거기 걸려든 것뿐이다. 우리가 과자와 찻값은

이미 랬다고 손을 흔들자, 그는 카운터 위에다 백 원 짜리 한 장을 꺼내 놓고,

"아니, 내 것은 내가 해결하겠어."

하고 돌아서서 묘하게 웃어 보인 것이다. 이런 것을 착오라고 할 수가 있을까

밤에 유자는 다시 내게 그의 얘기를 해달라고 졸랐다, 나는 내키지 않는 기분으로 다시 한번 그의 얘기를 늘어놓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의 시와 용기에 대해서, 그의 자부와 믿음에 대해서, 그리고 그의 끝나지 않는 싸움에 대해서, 모든 청춘들의 끝나지 않는 싸움에 대해서,

"지섭씨."

하고 처음으로 내 이름을 부르더니, 그녀는 갑자기 뛰어 일어나 내 가슴을 잡아뜯고, 쾅쾅 두들기고, 드디어 거기 매달려 훌쩍거리고 울기 시작했다.

"저것이 근대화예요? 저것이 5개년 계획 ?---,,, 내 것 내가 해결했습니다 하는 저것이? ,,,,,,"

그녀가 정치 이야기를 입 밖에 내고 그 때문에 눈물까지 보인 것은 그것이 처음이다.

줄이 끊어져 무거운 상자가 떨어져 가듯이 급속도로 그 속으로 떨어져 간 유자의 병()에 대해서 그리고 나를 포함해서,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그 모든 인간들에 대해서 나는 기억조차 하기가 싫다.

의사는 진단하고 당사자는 죽을 따름이다. 그리고 병은 모든 사람들이 합께 부른다. 질식하지 않으려면 함께 미쳐야만 하는 그런 쪽으로 온갖 인간들의 머리는 자연스럽게 회전한다. 그런 와중에서 한숨 돌리려고 쭈그리고 앉은 창() 저쪽으로, 하학 시간인지 교문이 미어져라 몰려나오는 기백 명의 단발머리 여학생들이 일제히 입들을 벌리고, 고구마 튀김들을 아귀아귀 먹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