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지하수
지하수(地下水)-이동희
아직 어두워서 출발하는 새벽 하행열차에 건석은 일찌감치 자리를 잡았다. 지난 겨울, 졸업시험을 마치고 내려갈 때만큼 가슴이 부풀어 있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실의에 빠져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허허벌판과 같고 삭막하고 메마른 사막의 땅으로 가는 것 같지만 그의 손아귀에는 의욕적인 계획으로 꽉 차 있었다.
안개가 자욱이 끼어 한강을 건너서야 주위가 훤하였다. 영등포를 지나 넓은 평야를 지날 때 막힌 듯한 그의 가슴은 다소 트이는 것이었다
해가 덩그렇게 떠오르자 계절은 완연한 봄을 말해주었다. 그러나 아직 들판은 한랭하기만 하였다. 가끔 눈이 채 덜 녹은 보리밭에 촘촘한 싹들이 푸르름을 드러낼 뿐.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들판을 바라보고 있는 그의 뇌리에는 졸업시험을 마치고 내려가서 마지막 방학을 보낸 얼마 전의 일들이 되살아나는 것이었다.
지난 겨울, 사실상 졸업을 한 것이므로 아주 붙박일 각오를 하고 내려간 그였다. 그는 방학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나 모두들 쉬러 온 줄로만 알았다.
해마다 보내던 겨울 방학과는 현격하게 물정이 달랐다. 모든 것이 그의 당면한 현실로 부닥치는 것이었다. 그제서야 안 일이지만 땅 다섯 마지기는 동생인 용석이에게 주기로 묵계가 되어 있었다, 건석은 대학을 마쳤으니 땅이 없어도 밥을 굶지는 않으리라는 계산에서. 그래 취직해서 살 것을 생각하고 높직이 앉은 밭 한 뙈기를 집터로 작정해놓고 있을 뿐이었다.
그가 땅 다섯 마지기를 믿고 내려간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막막하게 느껴지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의 목을 조르는 것은 매일 멀건 나물 죽을 먹어야 한다는 현실이었다.
건석은 삭막한 마을의 상념에 사로잡힌 채 멍청히 창 밖의 들판을 바라보았다
한참 그러고 있는데 시선이 흐릿해지고 차창에는 멀건 나물 죽의 그릇이 그려지는 것이었다. 클로즈업된 화면처럼. 그러나 죽 그릇은 차츰차츰 작아져서는 찻잔으로 변형한다. 커피잔이다.
「자 식기 전에 들게.」
성의원은 건석의 잔도 스푼으로 휘휘 저어주며 말했다.
「이거 진짤세. 커피는 역시 진짜래야 맛이 나지.」
「네.」
건석은 멍청하니 대답했다. 그러다가 자신이 무슨 답변을 한 것인가 싶어 낯이 뻘겋게 달아올랐다. 참으로 그는 멍청했다. 한국 농촌을 근심한다고 하는 사람이 진짜 커피를 마셔야 하는 악취미를 쏘아줄 수도 있는 것인데 커피 맛도 모르는 그가 시인하고 말았다.
어제 아침이었다. 그가 성의원을 찾아갔을 때, 성의원은 방금 침대에서 잠옷 바람으로 일어나 소파에 앉아서 그를 맞아주었다.
「무척 고되시겠습니다.」
건석은 내키지 않은 말이지만 그런 인사를 했다. 성의원은 어깨가 무너앉는 듯한 기지개를 켰다.
「사실 아닌게아니라 좀 고되네. 본회의에 나가랴 농림분과위원회에 나가랴 선거구 돌아보랴. 요즘은 또 왜 그렇게 가뭄과 장마가 기록적인지 아주 몸을 쪼갤 판이야.」
건석은 괜스레 공치사를 해서 허황한 말을 듣는구나 실었다.
성의원은 대견스러운 듯이 한감 건석을 바라보는데 비서가 들어왔다. 오늘 농림위 회합에 빨리 나가셔야 한다고 비서가 일러주었다
「어, 알았어, 준비하게.」
성의원은 전화통을 .앞으로 끌어당겼다. 다이얼을 외어 돌렸다.
「저 회장 좀 바꿔줘.」
「실례지만 누구신지요?」
수화기 성능이 좋아서인지 저쪽의 말소리도 또렷또렷한 금속성이. 들렸다. 이 쪽의 신분을 묻는 것이었다.
「나 성이라는 사람인데,,,,,,」
「성 누구신지요?」
「아니 왜 이래 바쁜데, 발리 바꿔.」
「안 계십니다, 지금.」
저쪽에서 먼저 수화기를 타 놓았다.
성의원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올라서 식식거렸다. 그러나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참 왜 이렇게 버르장머리들이 없는지 한심한 노릇이야,」
그리고 건석을 바라보았다.
건석은 아까부터 그 전화가 심상치 않게 생각되었지만 그대로 함구할 수가 없었다.
「그럴 수밖에 더 있습니까?」
「아니 그럴 수밖에 없다는 건 또 뭐야?」
성의원은 건석에게 화풀이라도 하려는 듯이 소리를 꽥 질렀다.
「이쪽 신분을 밝히지 않았으니 성의원님이 누구신지 알 수가 없지 않습니까?」
「응? 그래도 회장을 바꿔달라면 알아보는 거지!」
「못 알아보는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럴까? 하하하,,,,,, 그럴까? 하하하,,,,,,」
건석은 성의원의 너털웃음에 감정이 동조되지 못했다. 그 전화가 아무래도 꺼림칙하였다.
「우리 나라엔 되는 일도 없지만 안 되는 일도 없네. 힘이 필요하면 찾아주게. 」
성의원이 늘 하던 말이다.
그리고 얼마 전에 있었던 일---
「나의 왼팔이 되어주겠나?」
건석은 성의원의 청을 거절했었다.
「내려가야 합니다.」
그 얼마 후는 농협이나 토련에 취직을 시켜주겠다고 대학 진학의 필요성을 극구 주장할 때처럼 취직의 필요성을 침이 마르도록 내세우는 것이었고, 그는 역시 그만두고 농촌으로 들어가겠다고 했었다.
성의원은 건석의 고향인 Y군 출신으로 F당 시절부터 여당 의원직에 있는 세도파다. 재학시절부터 Y군 학우회를 도와도 주고 고향 출신 중에서 실력 있는 졸업생들은 거의 다 취직을 시켜준 위인이다. F당 때는 여당 소장파로 농림관계의 일을 한 성의원은 주로 고항의 도로 포장, 전기 가설, 수리 시설, 조림 시설 그리고 벌목 허가 등의 일을 눈부시게 하여 신망을 한 몸에 받았다. 그가 재선된 것은 말할 것도 없었고 D당 시절에도 F당의 공천으로 무칸히 삼선되었다. 요즘은 기민하게 R당으로 들어가 쟁쟁한 여당 의원으로 활약하고 있는 터다. 그 시류(時流)를 타는 민첩. 모사와 수완은 감탄할 만하였다. 그는 언제나 여당이기 때문에 젊은 학생들은 거의가 미워하고 배척했다. 그러나 성의원은 항시 그 젊은 반항이 진심으로 마음 흐뭇하다고 토로하면서 그 기백을 찬양했으며 그들에게 욕을 먹으면서도 그들의 학비를 대주고 취직을 다 거들어주었다. 건석도 여러 번 성의원과 정면충돌을 한 바 있지만 또 누구보다도 건석의 장래를 생각하는 성의원이다. 그러고 보면 건석은 이른바 <실 , 백>(실력과 백)을 겸비한 처지인 것이다. 하지만 건석은 졸업하고 취직시험도 안 쳤고 성의원을 찾아가지도 않았다.
졸업 시험을 치고 그는 묵묵히 낙향하였다. 그는 단지 농촌을 개발하고 싶었다. 무언가 침체해 있고 비참하고 억눌려 있는 듯한 농촌을 개발하고 싶었다, 그것은 오랜 숙원이었고 차츰 신념으로 굳어갔고 그의 이런 신념은 누구나 다 찬성하였다. 하지만 친구들, 뜻이 맞는 친구들도 전부 월급장이가 되길 지원하였다.
졸업식 날, 건석은 또 한번 그의 신념을 되뇌었다. 취직을 한 학생들은 자랑스레 우쭐대고 아직 취직을 못한 친구들은 풀죽어 있었다. 건석은 그들 틈에서 풀 죽지 않으려고 애를 쓰며 굳은 신념을 되씹었다. 건석은 졸업장과 우등상장을 옆에 끼고, 흥성대며 뿔뿔이 흩어져들 가는 친구들 뒤를 따라 운동장을 걸어나오면서 성의원을 찾아보고 싶어졌다. 찾아보고 내려가야 할 것 같았다.
어떻든 폐를 많이 끼친 터였다. 성의원이 등록시켜 줘 입학한 대학이었다. 성의원이 대학 진학의 필요성을 극구 주장하고 등록시켜주어 진학한 대학이었다.
그는 부정스런 성의원의 돈으로 공부를 한다는 것이 수치스러워 악착같이 공부하여 장학생이 되었고 하루속히 그 돈을 갚아야 단다고 생각하였지만 그럴 만한 여건이 그에게 갖춰지지 않은 채 졸업을 맞았다. 그리고 내려가는 마당에서 그것을 갚지는 못하더라도 자신의 변하지 않은 신념을 보여주고 가야 할 것 같았다.
그가 찾아온 것은 그저 그런 뜻에서였다. 그 외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런데 방금 전화는 아무래도 그 자신과 관련이 있는 것 같아 불안하였다. 하지만 그는 공연한 기우를 하고 있다고 자신을 나무랬다.
성의원은 전화통을 붙들고 다이얼을 열심히 돌렸으나 통화중이고 또 연방 전화가 왔다, 공무, 사무 할 것 없이 수화기를 놓기가 바쁘게 벨이 울렸다. 그 중에서도 성의원을 급히 서둘게 한 것은 오늘 모이기로 한 농림위원회의 주무자에게서 온 것이었다. 벌써 모두들 사 나와 있고 오늘은 특히 각하께서도 참석하기로 되어 있으니 십분 내로 도착하라는 내용을 전해 듣고 성의원은 급히 옷을 주워 입으며 급히 차를 갖다대라고 시켰다. 수십 벌이 걸려 있는 양복 중에서 잡히는 대로 골라 걸치고는 단추를 잠그고 혁대를 끼우고 넥타이를 매고, 정신 못 차리게 설쳤다.
「하, 이거 큰일났는데, 야단이군!」
성의원이 당황하여 비서를 부르고 부인을 부르고 식모를 부르고 하는데 전화
벨이 또 울렸다. 부인 황여사가 받았다.
「네, 떠나셨습니다. 곧 도착되실 거예요.」
황환여사는 수화기를 놓고 성의원의 넥타이를 바로 매주었다.
성의원은 연방 시계를 보며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뺐다 하다가 건석을 바라보곤 명함첩에서 명함을 하나 꺼냈다. 그리고 명함을 뒤집어서 몇 자 갈겨주면서 말했다.
「xx회장을 가서 만나보게!」
건석은 아까 전화가 자신의 일 때문이었다는 것을 멍청히 느끼고 굳은 표정을 하였다. 성의원은 그런 치기스런 제스처를 받아줄 시간이 없다는 듯이 급히 차에 올랐다.
황여사가 아침을 먹고 가라는 것을 뿌리치고 대문을 나온 건석은 터덜터덜 골목을 걸어나오다가 손에 쥐고 있던 명함을 들여다보았다. 무슨 글자인지 통 알아볼 수가 없었다. 한동안 바라보았을 때 건석은 그것이 -처리(處理)요망(要望)-이라 쓴 것 같다고 생각되었다. 약자라고 볼 수도 없고 초서라고 볼 수도 없는 -요(要)-자의 전후 관계로 생각해본 것이었다. 색맹(色盲) 테스트용 그림을 한번 알아차리고 난 다음부터는 쉬 알 수 있는 것처럼 그 글자는 화실히 선처(善處)요망(要望)으로 보이는 것이었다. 좌우간 그저 그렇게 생각되는 글자였다. 그는 명함 앞면을 보았다. 나라 국(國)자가 안에 든 마크가 철인으로 눌려져 있는 밑으로 고딕체로 성태수라고 씌어져 있었다. 전화 번호도 없고 주소도 적혀 있지 않았다. 마크와 고딕체 글자가 어디서 오는 것인지 곽 균형이 잡히고 권위가 있어 보였다. 아니 시퍼런 권위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 권위는 뒤에 획수가 맞지 않는 엉터리 글씨나 억지 부탁쯤 위압되고도 남는가보았다. 그리고 외국제 커피를 정당화할 수 있는가보았다. 하지만 그것은 무척 당연한 일인 것 같으면서 굉장히 비뚤어진 것 같았다.
그의 고향출신 선량, 농촌을 위해 발벗고 나선다고 하는 성의원의 위치는, 그러나 건석 자신은 더욱 비뚤어져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자제력으로 자신의 신념을 강력하게 밀고 나가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긴 겨울을 삭막한 시골에서. 당면한 자신의 현실로 시달린 그는 취직이라는 마력을 가끔 적극적으로 뿌리치지 못하고 있는 것인지 몰랐다. 겉으로는 꿋꿋한 태도였지만 속으로는 어물어물하고 있었다. 학문의 전당에서 발판을 다지고 다져서 발돋움한 자세와 굳힌 신념을 성의원의 왼팔 아니라 오른팔, 아니 성의원 자신이 된다 해도 바꿀 수 없으며 더구나 일개의 월급장이가 되어 식생활에 급급할 수는 없다는 사실, 그것은 명백
한 결론인데도.
<그런데 나는 무엇을 망설이고 있단 말인가 ?>
건석은 한동안 명함을 바라보다가 그것이 자기자신에게 선처를 요망하고 있다는 것이라 느꼈다. 명함을 손으로 와싹 움켜쥐었다.
오정때쯤 되어 차가 Y역에 닿았다. 건석이 거기서 십리나 더 걸어서 안골 그의 집에 들어서자 모두들 반가이 맞았다, 그러나 순간만 반가왔을 뿐 이내 불안에 싸였다. 한결같이 하는 인사가 어째 내려왔느냐는 것이었다. 인사조로 물어 보는 말이긴 하지만 그의 정수리를 찌르는 말이었다. 그는 억지로 웃으면서 대답해버렸다.
「어째라니요? 농사지으려고 내려왔지요.」
모두들 처음에는 웃음으로 받아주었다. 그러나 농사를 어떻게 짓느냐고 따지는 것을 잊지 않았다.
「농사짓는 공부 다 했는데 시골로 안 오면 갈곳이 있읍니까?」
건석은 되물으며 다시 웃었다. 이번엔 아무도 따라 웃지 않았다.
그래도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내려온 데 대하여 대견스럽게 여기고 있었지만 웅석이는 사뭇 불안에 싸인 표정으로 형을 대하는 것이었다. 응석은 며칠 안 가서 대놓고 불평을 해대는 것이다.
「뭘 하러 내려오냐 말여유, 시골에서 뭘 할 게 있어유?」
그리고 아주 노골적으로 견라을 주기도 했다.
「참 성님두 답답해유. 땅 닷마지기 믿구 내려왔시유?」
건석은 듣다못해 쏘아주었다.
「염려 마라. 난 밭 한 뙈기만 가지고 살 테니까.」
그의 집터로 배당된 한 뙈기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말은 아무도 믿지 않았다.
용석의 불평은 날이 갈수록 심했다. 하지만 이미 그런 것으로 마음이 흔들리지는 않는 건석이었다. 우가 뭐라든 막무가내로 죽치고 앉았다.
곧 농번기가 되었다. 못자리를 만들고 보리는 제법 봄바람에 물결을 이루었다. 닷마지기 농사 씨나락 반뙈기만 부으면 되는 일쯤 용석이가 거뜬히 해치우고 보리밭도 두벌 세벌 말끔히 매놓아서 건석은 아예 손도 못 대게 하는 것이었다. 건석은 하는수없이 방관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가 그는 실의를 느끼지는 않았다. 늘 생각하던 객토(客土) 작업을 착수하였다. 못자리에 붙은 친둥지기부터 하기 시작했다. 좀 멀긴 하지만 그의 산에서 흙을 파서 져다가 부었다. 그것은 산성을 제거하기 위한 토양학적인 의도에서이기도 했지만 지난 겨울 아버지에게 말을 꺼냈다가 생벼락이 내렸던 선산의 일부 개간을 하기 위칸 점진적인 공세이기도 했다. 어떻든 아버지나 용석은 한사코 건석을 말렸다. 가만히 앉아 놀라는 것이었다. 말로 해서 안 들으니까 지게를 감추고 건석이 늦잠을 자게 내버려둔 채 일을 나가고 하는 것이었다. 하였지만 억지로 취직을 할 수도 없는 일이 아니냐고 생각한 나머지 체념을 하기 시작했고 마을 사람들도 동정스런 눈으로 대하는 것이었다.
그러던 것이 성의원의 편지가 오고서부터는 다시 건석을 볶아대는 것이었다.
먼저 말하던 곳이 되었으니 잡념 버리고 랄리 오라는 편지였다. 친필은 아니지만 성의원의 육성(肉聲)을 그대로 녹음해놓은 듯한 것이었다.
이젠 아버지도 순순히 놔두지 않았다.
「여태까지 가르쳐왔는데 취직이 싫다면 어쩌자는 거여? 한 구뎅이 죽자는 거냐?」
아버지는 노염과 애원이 섞인 어조로 따지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부드럽게 타이르는 것이었다.
「너도 봤으면 형편을 알 거 아니냐? 마음을 돌려봐라.」
그러다는 또 눈물을 보이기도 하고 - 하지만 건석은 끝내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며 그의 꿈을 되뇌었다. 그러나 그의 꿈이나 계획을 아버지나 어머니는 물론 용석에게나 마을사람들에게 아무리 설명을 해도 이해해주지 않았다. 그저 바보짓으로만 돌렸다.
도지사상을 받고 Y농고를 졸업한 건석에게 성의원이 학비를 대주겠다고 나섰는데도 건석이 진학을 포기하고 농사를 짓겠다고 고집하였을 때. 지게작대기로다 아랫도리를 마구 쳐서 다시는 그런 소리를 입밖에 안 내겠다는 다짐을 받고 만 아버지였다. 하지만 이제 더 어떻게 하지는 못한다.
「네깐 놈 하나 없는 셈 대면 그만이지」
하고 한숨을 쉴 뿐이었다.
이제 하나의 성인으로 대하는지 몰랐다. 건석은 가슴이 뻐근하게 아프면서 부풀어오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자신의 굳은 결심을 다시 한번 다짐하게 했다.
건석은 성의원에게 호의는 감사하나 역시 이곳에 붙박이겠다는 내용의 편지를 써서 부치기 위해 아랫말 우체국으로 갔다.
우체국에 들어가자 국장인 중식이가 반겨주었다. 농고 동창이 다 그는 잡화가게를 털어 버리고 사설 우체국을 내어 국장이 된 것이다. 길가에서 여러 번 만나 얘기는 들었지만 너무도 의젓하고 당당한 중식 이의 모습이었다.
「높은 자리 앉으니까 몰라보겠는데.」
건석이 말하자 중식은 굵직한 소리로,
「이 자린 뭐 돈주고 산 자린데. 영업이 돼야지. 하루 죙일 우표 몇 장 팔아서 밥 먹겠나?」
하고 겸손을 피운다.
「하여튼 부러운데!」
「농하지 말게! 그런데 자네 얼마나 좋은 자리를 고르느라고 그러나?」
「자릴 고르다니?」
「흥, 동네 소문이 확 깔렸는데 모를까봐. 그러지 말고 아무 자리나 우선 들어가. 여기서 삼 년만 썩으면 애 바보 되네, 바보 돼.」
「그럼 자넨 바보가 되-- 남았겠네.」
「나야 원래 바보가 아닌가?」
중식은 하하하하,,,,,, 하고 너털웃음을 웃어대는 것이었다.
「한잔 살 테니 나가세.」
그는 다시 너털거리며 웃었다.
지금 근무 시간인데 어떻게 술을 하느냐고 하자, 이까짓 데 근무시간이 어디 있냐면서 끄는 것이었다. 건석은 억지로 뿌리치고 편지를 부치는 대로 밖으로 나왔다.
이날은 마침 닷새만에 한 번 서는 장날이었다. 아직 초장이어서 한산한데 옷감전 .곡물전 ,어물전 ,과일전 등을 위시해서 자질구레한 물건들을 늘어놓고 큰 소리로 떠들어대는 것이었다. 특히 옷감장수나 어물장수 담뱃대장수 등 늙수그레한 사람들은 낯이 익었다. 농기구전엔 또 자종 재래식 보습, 쟁기, 탈곡기 .써레 .괭이 .호미 ,삽 등을 늘어놓았고 괭이와 낫을 벼리는 대장간에는 아침부터 일거리가 많았다. 그리고 그 옆에 탄탄하게 짜놓은 지게가 하나 있었는데 유난히 그의 시선을 끌었다. 얼마냐고 물어보았더니 쌀 한말 값만 달라는 것이었다. 건석은 장바닥을 이리저리 -다니다가 가축전에서 어머니를 만났다. 어머니는 닭을 세 마리 안고 와서 지금 막 흥정이 되고 있었다. 돈을 치러 받은 어머니는 마구 건석을 잡아끌며 뭘 좀 사먹으라는 것이었다. 건석이 싫다고 하자 찰떡 인절미를 사서 주머니에 넣어주는 것이었다. 건석은 한사코 뿌리치며 돈 여유 있으면 좀 달라고 했다. 어머니는 먹으면 준다고 조건을 붙였다. 건석은 하는 수 없이 받아 넣으며 인절미 두어 개를 우물딱거려 먹었다. 그러자 어머니는 백 원 짜리 댓장을 아까운 듯이 두 번 세 번 헤어보다가 꼭꼭 접어서 주었다,
「차비다, 밤차라도 올라가거라.」
건석은 가슴이 뭉클함을 느꼈지만 마음속으로는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그는 어머니를 먼저 보내고 대장간 옆으로 가서 아까 그 지게를 샀다. 만든 지가 얼마 되지 않아 하얀 빛깔의 지게였다. 그제서야 안 일이지만 지게에는 멜빵과 등태가 없이 훤한 것이어서 새끼로 멜빵을 임시로 만들어 지고 가야 했다. 그는 그것을 사 가지고 장바파을 걸어나오는데 부1L러운 생각이 들어 고개를 숙이고 빠른 걸음으로 빠져나갔다. 그러나 장마당에서 뿐만이 아니라 집에까지 가는데 서로들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허허. 이 사람아! 왜 지게 팔자를 지려고 하나!」
「그거 한 번 져 놓으면 좀 해 벗기 힘드느니!」
건석은 그런 말들을 안 듣기만은 못하였다. 사실에 있어서 참 서글픈 일인지 몰랐다. 그리고 무엇인가 부끄럽고 창피하여 낯을 들 수가 없었다. 마치 자신의 못난 행동이 야유당하고 있는 것처럼 그가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심정이었다.
그러나 그는. 아직 마음속의 굳은 결의가 조금도 해이되어 있지 않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어금니를 악물며 결의를 다짐하였다.
그러나 집에 왔을 때 사태는 아주 달라지고 말았다. 건석이 히죽히죽 웃으며 지게를 지고 들어가는데 아버지는 석고상이 된 듯 움직이지 않고 서서 보고 있는 것이었다. 낯빛이 검어지고 입이 일그러졌다.
「거기 벗어놓지 못해?」
건석은 너무도 크고 위엄 있는 아버지의 호령에 가슴이 서늘해지고 말았다.
「냉큼 벗어놓지 못하겠느냐 말여.」
아버지의 두 번째 호령이 떨어질 때 건석은 지게를 그대로 지고 버틸 수가 없었다. 마당 가운데 지 게를 내려놓고도 그는 아버지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지 못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심경 같은 것을 이야기할 수는 더구나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머뭇거렸을까 ? 지게는 사정없이 부숴졌다. 아버지의 손엔 도끼가 쥐어져 있고.
건석은 말리지도 못하였다. 도끼를 쥐고 있는 아버지가 무서워일까? 또는 서슬 퍼런 아버지의 위력 때문이었을까?
「지겔 지려면 썩 나가서, 내 눈에 안 보이게 져라.」
아버지는 목멘 소리로 말했다. 어릴 적엔 자신의 아랫도리를 사정없이 때리던 아버지가 이제 자신의 몸엔 손을 대지 못하고 지게 같은 것에다 직성을 푸는 아버지를 생각하자 가슴이 뭉클하였다.
동네사람들이 많이 모였다. 담 너머로도 많은 사람들이 목을 내밀고 구경스럽게 바라보는 것이었다.
건석은 무언가 서러워 쓰러져 울려고 뒤란으로 돌아갔다. 뒷담 너머에는 동네 아낙네들이 하얗게 몰려 넘어다보고 있었다. 그는 그날 저녁 중식이한테 가서 술을 실컷 마셨다.
봄은 절량의 계절이었다. 절량은 빈농들에 있어서 매년 닥쳐오는 홍역이었다.
봄날 그들에게 제일 부러운 것은 혁대를 끌러놓고 양껏 밥을 먹는 것이었다. 쌀 , 보리를 가릴 것이 없었다. 언제나느끼는 것이지만 이들에게 일년 동안의 양식 저축만 된다면 절량이고 이농이고 없을 일인데. 일년의 저축-그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건석의 집만 해도 닷마지기에 일곱 식구가 매달려 해마다 절량기가 되면 허덕허덕하는 것이었다. 하루에 밥을 두끼 하면 야단을 내는 아버지였다. 죽이라는 것이 그저 묵 나물과 쌀을 좀 띄워놓았거나 밀가루나 감자가루 수제비를 좀 띄워 놓은 정도인데 물론 어릴적부터 먹어온 것이었다.
그 나른한 봄날, 건석은 객토 작업을 하느라고 거의 매일을 보냈다. 상당한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지만 용석이나 아버지는 조금도 거들어주지 않았다.
그냥 제가 지쳐버리기를 바라는 듯이. 아닌게아니라 처음엔 드러눕기까지 했다. 몸걱누운 그에게는 하얀 이밥을 해주었다.
긴 절량기 다음엔 한발이 또 이마의 주름들을 펴지 못하게 하였다.
들판이 원망스런 폭양 아래 시들어가고 있었다. 작년에는 사십 년래의 대한(大旱)으로, 재작년엔 또 칠십 년래의 장마로 혹심한 피해를 입은 터여서 이번 가뭄은 시작부터 기진맥진이었다.
한발이 시작되면서부터 건석은 지하수 개발을 서둘게 되었다. 땅 속 지하수대(地下水帶))까지 파서 물줄기를 사방에서 끌어와 펌핑하는. 이것은 위에서도 많은 장려를 하고 있는 터이지만 적잖은 자금과 지하의 조건이 갖추어져야 했다.
건석은 들판 여러 곳의 지하수대를 파서 수량(水量)을 확인하고 적극 발벗고 나선 것이다. 면에 가서 지하수개발을 건의해보았더니 농협에 가 보랬다. 거기선 또 토련에 가 보랬다. 토련 출장소에서는 예산이 없다고 했다. 저수지 확장 공사 자금 때문에 다른 곳에 쓸 돈은 조금도 없다는 것이었다. 건석은 저수지 확장 공사는 이렇게 가문 금년에 혜택을 입을 수 없지 않느냐고 따지면서 금년을 구제하는 예산으로 바꾸자고 따진 끝에 결재를 올려본다고 올렸다. 건석은 결재가 내려오길 기다리는 동안 여러 군데 펌핑 지역을 재조사하곤 했다,
하루 볕이 무섭게 타들어 가는 들판엔 두세 군데서 양수기로 물을 퍼 올리고 있었다.
건석은 들판을 쏘다니며 콸콸 쏟아져 올라오는 물을 흐뭇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는 기괴한 말을 들었다. 양수기로 퍼 올린 물이 논배미로 흘러들어 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던 마을 사람들은 한결같이 R당을 찍어줘야 한다고 얘=했다.
「암 R당을 찍어야 하고 말고. 태수를 찍어줘야 해.」
토실 양반이 장죽을 허리에서 배며 말했다.
「공게 어디 있나? 할미떡도 커야 사먹느니.」
어리둥절한 건석은 여기에 이렇게 전기가 끌어당겨지고 시멘트 배급, 백회기와 배급을 받고 길이 시원스럽게 닦이고, 덩그런 철근 콘크리트의 교량이 놓여진 것이 다 태수 덕이 아니냐는 이야기를 듣고야 말뜻을 이해하였다.
「P당을 찍어주면 올 것도 못 오지.」
「주다가도 뺏는다는걸!」
저마다 한마디씩 뇌까렸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이렇게 논두룩에서 정치 얘기가 나을 줄은 미처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그러니까 이 양수기는 성의원의 덕으로 오게 된 것이고 태수 의원은 R당이라는 이야기였다,
「저놈의 양수긴 밤낮 고치다 볼일 다 본단 말여!」
저쪽에 있는 양수기는 전번 차점으로 떨어진 P당의 박기철이가 사준 것이라고 했다.
건석은 농촌이 마치 어떤 마수에게 먹혀 들어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는 마을 사람들의 중얼거리는 소리를 뒤로 하고 터벅터벅 먼지 이는 논둑 길을 걸었다. 그는 고장난 양수기 앞에서 발을 멈췄다. 그는 한참 고치고 있는 양수기를 바라보다가 이건 누가 사준 거냐고 물었다. 박기철이가 사준 거라고 했다. 그는 또 한 군델 갔다. 한결같이 잘 아는 마을 사람들이었다. 거기는 성태수가 사준 것이었다. 그는 한동안 물을 바라보다가 국민학교 동창인 친구의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저씬 그럼 R당이신가요?」
친구의 아버지는 안색이 푸르락붉으락하였다. 건석은 공연히 그런 멍청한 질문을 했다고 생각하는데 그가 깜짝 놀랄 정도로 너털웃음을 웃으며 말하였다
「허허허---- 농군이 당은 무슨 당인가? 허허허,,,,,,」
건석도 따라 웃을 수밖에 없었다.
「허허허 ,,,,,,」
그는 자리를 떴다. 허허허-,,,,, 허허허,,,,,, 그는 허탈한 웃음을 흘리며 둑을 =었다. 둑을 걷다가 그는 바닥이 난 저수지에 벼를 이앙한 것을 발견했다. 늘 이무기가 나온다던 저수지는 바싹 졸아붙어 바닥에 깔려 있었다. 그리고 거기다 중말 칠성이네가 이앙을 한 것이었다, 건석이 한참 지켜보고 섰자, 너댓 위인 칠성이는 말했다.
「두판치는 거지. 난 비가 안 와야 살겠네. 허허허,,,,,,」
「허허허 ,,,,,,」
그는 다시 따라 웃으며 둑을 걸었다.
들판은 활활 타고 있었다. 조금 흘러내리는 물을 양수기 몇으로 퍼내긴 하지 만 그 수원(水源)은 이미 말랐고, 그나마도 혜택을 입지 못한 곳에는 벼가 타들어 갔다. 모두들 작년에 속은 터여서 금년엔 비를 기다리지 않고 흉년 타령만 했다.
그는 이날 오후 토련 출장소로 갔다. 벌써 달포도 더 되는데 이날도 감감소식이었다.
사흘이 멀다고 들르지만 처음이나 똑같은 이야기였다. 결재가 내려오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도무지 얘기가 아니었다. 지금 숨이 막히는 판인데 내년에 준공될 공사를 착수한다는 것은 요령부득의 일이었다.
건석은 이날은 들어서면서 언성을 높였다.
「아니, 도대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어떻게 이 가뭄을 극복해야 될 것이 아니냐-그는 소장에게 따졌다. 여기서들도 건석이 이기적인 목적에서 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가상히 여기긴 하지만 속수무책이었다. 요즘은 결재가 내려오지 않았다는 것으로 입막음을 할 뿐이었다. 그러면서 얼마 전부터는 소규모로 자작해보라고 했다.
「전혀, 결재 가망이 없을까요?」
「글쎄요. 기 다려봐야지요.」
이런 대답에 건석은 화가 치올랐다. 달포나 되풀이되는 똑같은 대답이었다.
「제가 한번 올라가 볼까요?」
「어딜요?」
「위로 말이에요.」
위란 도(道)를 말하는 것이다.
「맘대로 해보시오.」
그러며 소장은 회전의자를 빙그르르 돌려 외면하는 것이었다. 건석은 그냥 나오기가 뭣해서 한마디 더 했다.
「혹시 서류가 중간에서 잘못된 건 아닐까요?」
그러자 소장은 눈에 노기를 잔뜩 넣어서 쏘아보는 것이었다.
「잘못되다니요?」
「분실됐다든가?」
「아니 뭐 여기 바지저고리들만 앉아 있는 줄 아시오?」
「---」
「참 나, 어디 한번 속시원하게 올라가 보시오.」
건석은 멍청히 소장을 바라보았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소장은 건석을 동정스럽게 바라보더니 회전의자를 건석 쪽으로 돌리는 것이었다.
「성의원에게 부탁을 드려보세요. 그게 빠를 겁니다.」
작은 소리로 말했다.
「성의원을요?」
건척은 그가 성의원을 잘 안다는 데 대한 줄로만 그그러나 소장은 저수지 확장공사는 성의원의 압력으로 추진된다는 의외의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작년에도 저수지 늑장보다는 준설을 하려 했는데 확장하도록 성의원이 누르는 것이라고. 그러니 딱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안된다는 투로 이 야기하는 소장이었다. 그리곤 담배를 꺼내 피우면서 연기를 뿜어대었다.
건석은 그 사실을 심각히 따져 재차 확인하였다. 그리고 조용히 물었다.
「그럼 성의원만 승낙하면 된다는 얘긴가요?」
「그렇다니까요.」
건석은 그날 저녁 중식을 집으로 찾아가 만났다. 중식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자 당연한 일이 아니냐고 반문하였다. 내년에 선거를 하지 않느냐고. 그뿐이 아니었다.
「벌써 자넨 성의원의 라이벌일세.」
건석은 어이가 없었다.
「농담은 집어치우게. 」
「농담이 아니야. 자넨 자네 일을 하는 것이 아니고 마을 일을 하고 있지 않은가?」
논리의 비약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난 정치과 출신이 아니야.」
「흥, 국회의원들이 다 정치과 출신인가? 어디.」
건석은 한참 그의 내심을 설명하였다.
건석은 성의원에게 당장 뛰어가고 싶었지만 그럴 형편도 못되어 장문의 편지를 썼다. 이 숨막히는 실정을 소상히 보고하고 그 대책 강구에 대한 의견을 격하게 쓴 내용이었다. 그러나 그 편지를 받고 온 것인지 사흘인가 뒤에 성의원이 내려왔다. 건석은 지체없이 성의원의 별장으로 달려갔다.
성의원은 여기서도 진짜 커피로 건석을 맞아주었다. 건석은 침착성을 잃지 않는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도무지 참을 수 없었다. 성의원을 뚫어져라고 바라보았다. 성의원도 외면하지 않았다.
「지금 농토가 활활 타고 있습니다.」
건석은 그런 이유가 당신에게 있다는 투로 말했다.
「보았네, 양수기를 내려보낸다고 내려보내는데 뭐 요구대로 당할 수야 있어야지.」
「지금은 양수기로 퍼 올릴 물이 없습니다. 」
건석은 사뭇 성의원을 노려보았다.
「왜 그런 눈을 하고 있나?」
성의원은 알 수 없다는 듯이, 그리고 인자스러운 듯이 말했다. 건석은 분연히 말했다.
「성의원님은 저수지 확장 공사를 강행하려 하십니까?」
「강행이라기보다 좀 서둘고 있네만.」
「그 공사를 좀 늦추실 수 없겠습니까?」
「건 또 왜?」
성의원은 이제 화를 섞어 말하는 것이었다.
「지금 당장 벼가 타들어 가는데 저수지 공사가 급하지 않습니다. 지하수를 개발하면 우선 가뭄은 좀 면할 수 있는데 금년을 구제하고 확장공사를 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금년 안으로 그 공사를 끝내야 하네.」
「꼭 금년까지라야 되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
「난 그렇게 약속했어.」
「누구에게요?」
「Y군민들에게.」
건석은 번번이 이렇게 멍청하였다. 내년이 임기이고 임기 안에 저수지 확장 공사를 하겠다고 약속했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건석의 뇌리에도 몇 가지 생각들이 한꺼번에 스쳐갔다. 건석은 성의원을 뚫어져라고 쳐다보았다.
「많은 사람들이 나를 지지하고 또 지원하지만 또 적잖이 나를 헐뜯고 잘못되기를 원하고 있는데 자네는 어느편인가?」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제가 그런 이야길 하러 온 줄 아십니까?」
「상관 있지.」
건석은 이제 안타까운 듯이 성의원을 바라보았다.
「난들 선거구를 해칠 일을 왜 하겠나? 난 누구보다도 나의 출신구인 이 Y를 생각하고 있네. 알겠나?」
「그렇다면 약속보다도 그 정상이 중요할 텐데요?」
「자넨 정말 마을을 위해서인가?」
「그게 의심스러우십니까?」
「그 실증을 보여주겠나?」
「실증을요? 어떻게 말입니까?」
「그것을 내 사업으로 해주겠나? 내가 자금을 댈 테니.」
말을 마치고 성의원은 건석의 표정을 살폈다. 그것은 마치 결투를 하다가 상대방의 거동을 기민하게 바라보고 있는 듯한 몸짓이었다. 건석은 그런 성의원을 또 놓치지 않고 파보았다. 저주심에서라기보다 성의원의 진심 여부를 알기 위해서였다, 그러는데 성의원이 다그쳐 물어왔다.
「어떻게 하겠나?」
건석은 또 한동안 성의원을 파보다가 결연히 말했다.
「그렇게 하지요.」
성의원은 쉽게 승낙하는 건석의 따가운 시선을 겸연쩍은 듯이 외면하다가 빙
긋이 웃음을 머금는 것이었다.
「고맙네.」
건석은 눈을 내리 감았다.
이번 일로 얼마만큼 목을 축일지 모르지만 그가 농촌에 붙박일 하나의 소지를 마련하게 될 것 같았다.
성의원의 계산, 그것은 참으로 야박스러웠지만 따지고 보면 중식의 말처럼 당연한 일인지 몰랐다. 그리고 그것을 상관할 바는 아닌 것이었다. 만일 오해를 사게 된대도 화해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있지 않은가? 건석은 그런 생각들을 되 뇌이며 성의원의 별장을 물러 나왔다.
지하수 공사는 곧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