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단편소설2

66. 모래 위의 집

자한형 2022. 3. 19. 2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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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 래 위 의 집  -한수산

 

1. 아버지는 오지 않았다

 

어제도 아버지는 오지 않았다. 목련(木蓮)이 지기 시작했다. 아침의 일이었다.

아버지는 오지 않았다. 그리고 아침에 그녀는 집이 비어 있다고 생각했다. 밤새 모래 위를 달려온 사람처럼 서서 그녀는 비어 있는 집을 둘러보았었다. 그리고 목련이 지고 있는 것을 보았다. 떨어지기 시작한 첫꽃이었다.

딸아이의 방에서는 아무 기척이 없었다. 벌써 일곱 시 반이다. 그녀는 오늘이 일요일이므로, 얘야 일곱 시다 하고 깨우지 않아도 된다. 다른 날은 여섯 시 반에, 얘야 일곱 시다라고 말했었다. 그리고 바지 모양의 잠옷을 입은 딸애가 목욕탕으로 들어갈 때까지. 오 분 후에도 또 십분 후에도 얘야 일곱 시다라고 외치곤 했었다. 그녀는 오늘은 그 짓을 하지 않아도 된다. 비어 있는 집의 돌쩌귀가 바람에 삐걱이듯이 딸들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을 것이다. 오늘은 일요일이다,

딸들은 네 음절(音節)로만 말한다. 그들은 늘 그렇다. 그것은 딸들과 그녀와의 사이에 놓여 있는 유일한 통로다. 그들은 그 네 음절의 다릿발이 받치고 있는 교량을 건너서 그녀에게로 온다. 그리고 그녀도그 다리를 건너서야 비로소 딸들과 만난다.

나 늦을 거야.

그것이 그 하나다. 엄마. 나 늦을 거야. 오늘 늦을 거야. 그것은 둘째 경미의 것이다. 늦을 거야. 경미는 그 네 마디의 말을 건너서만 그녀에게로 온다. 늦을 거야. 그렇게 말하며 경미는 집을 나선다. 매일. 그러므로 그녀가 그날 늦거나 늦지 않거나는 문제 밖이다, 언제나. 경미는 늦기도 하고, 늦지 않기도 한다.

엄마, 나 돈.

막내는 그렇게 말한다. 엄마 나 돈. 그것이 경혜에게서 건너오는 유일한 통로다. 그 네 마디의 말을 건너서 경혜는 오고, 그녀도 그 말을 건너서 겨우 딸에게로 간다, 아침마다 경혜는 그렇게 말하며 머리를 잘래잘래 흔든다. 경혜의 머리칼이 우수수 떨어질 듯이 흔들릴 때 그녀는 비로소, 엄마 나 돈이라는 다리 저편의 딸을 바라본다. 때로 경혜는 푸푸 입김을 불어서 이마 위의 머리칼을 밀어 올리며 말하기도 한다. 엄마, 나 돈. 그 애가 아랫입술을 내밀어 동글게 오므리고 그 속으로 입김을 불어 올려 이마로 흘러내린 머리칼이 너풀거리며 치켜 올라가는 것을 볼 때마다, 그녀는 딸과의 사이에 놓여진 그 네 마디의 징검다리를 뒤뚱거리며 건너가는 자신을 본다. 엄마, 나 돈. 그 다리는 언제나 수치(數値)에 밝고, 직선적이고, 생활에 절어 있다. 너무 미끄러워서, 너무 띄엄띄엄이라서 그녀는 언제나 익숙하게 길들여지지가 않는다.

별일 없수?

맏딸은 언제나 그렇다. 별일 없수? 전화를 걸 때도, 대문을 밀고 들어 올 때도 그녀는 언제나 그렇게 말한다. 엄마, 별일 없수? 그 네 마디의 다리는 그녀의 물음만큼이나 언제나 별일이 없다. 그것은 말이 아니라 사물(事物)이다. 느낌도 의미도 없는 습관일 뿐이다. 그녀는 자신의 발아래 와 닿는 그 다리를 보면, 선착장(船着場)에 와 닿는 배를 떠올린다.

그녀는 그 위에 뛰어오른다. 별일은 얘. 별일은 무슨 별일. 그녀는 경순이의 그 별일 없수라는 다기를 건너가, 경순이의 스물 네 명 계의 희생 번호를 들고, 온천엘 가는 그것들을 위해 애들을 맡아주기도 한다. 그 애는 남북통일이 되기를 기다린다. 언제나. 밤새 모래 위를 걸어온 사람처럼 다리를 끌며 그녀는 거실에서 부엌으로, 부엌에서 베란다를 둘러본다. 비어 있는 집이다. 아버지는 오지 않았다. 거실 창 밖으론 햇살이 소복히 쌓여 있었다. 바람에 나뭇잎이 날아와 거기 모여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긴 손가락을 뻗어서 창틀을 쓸어보았다. 손끝에는 먼지가 묻어나지 않았다. 유리는 얼룩 하나 없이 닦여 있었다. 그녀는 안방으로 들어갔다. 침구는 어제 저녁 깔아놓은 그대로다. 목단꽃 무늬가 흐드러진 이불청을 둘러싼 깃이 희디희다. 펴놓은 그대로 깔려 있는 새물 냄새나는 이부자리. 베개도 눌린 자국이 있을 리 없다. 창을 통해 들어온 햇빛이 방 한 쪽의 병풍을 비추고 있다. 갑골(胛骨)문자가 씌인 병풍이다. 화안하게 햇살을 받으며 갑자기 병풍 속의 표의문자(表意文字)와 와당(瓦當) 무늬가 꼼지락꼼지락 움직이려고 한다.

그녀는 방을 나와 욕실로 들어갔다. 문을 열자 섬뜩한 한기와 함께 끈끈하게 습기가 몸을 감싼다. 거울 속에는 그녀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밤새 갇혀 있던 수증기가 달라붙어 거울은 물을 뿌린 듯 얼룩거렸다. 새 치약과 새 치솔새로 걸어놓은 수건들, 면도기, 라임향 애프터 로션, 모든 것은 어제 그대로다. 물만이 식어 있다. 욕조에서 퍼어올라 숨이 막히게 가득하던 더운 김도 없다. 받아놓았던 물에 그녀는 손을 넣어본다. 온기를 느낄 수 없이 미적지근하게 식어 있는 물이 갑자기 어떤 표현할 수 없는 불쾌감으로 팔을 타고 전해진다. 아무도 들어가지 않았던 물인데도, 욕조의 물은 온기가 사라지면서 때가 떠 있는 것 같다. 미적지근한 물의 감촉이 속을 메슥거리게 한다.

그리고 밖으로 나와 그녀는 목련이 지는 것을 보았다.

갑자기, 이 세상에 살아 있지 않았던 것처럼. 툭 소리를 내며 하나의 열매가 떨어지듯 목련꽃은 떨어져 내려서 그녀는 하마터면 아, 하고 소리를 지를 뻔했다. 그것은 마치 한 마리의 새가 날아오르는 것 같았다, 푸득푸득 날개를 치며. 그리고--- 목련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거기 그렇게 서 있었다. 그때 여자는 문득 낙양(洛陽)이라는 말을 떠올렸다. 오래 쌓아두었던 다락 속의 한적을 꺼내 뒤적일 때, 그 색이 바랜 종이 위에 씌어 있는 글자를 무심히 아주 무심히 들여다볼 때 느껴지는 것 같은 그 말--- 낙양. 이상한 서글픔과 다시는 만날 수 없으리라는 기약도 역시 하나의 기약일 수 있다는 허무감, 그리고 추억 많은 사람의 쓸쓸한 노년, 아무도 찾아와 주지 않는 은퇴한 장군이 매일 이른 아침 쓸고 있는 뜰--- 그런 것을 늘 생각나게 했던 말. 낙양--- 이라고 중얼거리며 서서 그녀는 아직 꽃이 가득한 목련을, 꽃이 지고 나서야 잎이 피기 시작하는 목련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리곤 놀란 듯이 안으로 뛰어들어오며 그녀는 목소리를 높여서. 불렀다.

"인숙아. 인숙아."

"왜유?"

부엌에선 싱크대에 떨어지고 있는 수도물 소리가 목소리에 섞여 들려왔다. 비어 있던 집이, 벽이, 천장이, 밤새 손길이 가지 않고 깔려 있던 이부자리가, 미적지근하게 식어버린 욕조의 물이. 새 치솔이 갑자기 살아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낙양이라니,,,,,, 딸애에게 말해야겠다. 목련꽃이 지기 시작했어.

"인숙아. "

"왜유? 아줌마."

"빨리 아침 먹고 집안을 치워야겠다. 서둘러야지 언제 다 치우겠냐."

"뭘 또 치워유?"

"무어라니? 유리창도 닦아야지, 화장실도 치워야겠다. 참 이불 호청도 새로 씌워야지. , 서둘러라. 언니랑들 깨우고, 어서."

"또 청소예유?"

"또가 뭐니."

그녀는 부엌 창문을 드르륵 열어 젖혔다.

"오늘은 아버지가 오실 거다. 오늘은,,,,,, 꽃이 졌거든."

"오늘유,,,,,,"

"그래. 오늘. 준비를 해야지, 이러고들 있음 되겠니. ,,,,,, 뒤꼍도 엉망이겠구나. 거기도 말끔히 치워놓아야겠다."

그녀는 창문에서 눈길을 거두었다,

"애들을 깨워야겠구나. 오늘은 아버지가 오실 텐데."

"아줌마. 오늘은 일요일이에유."

"그래, 누가 아니라든. 오늘은 일요일이야."

그녀는 딸아이를 깨우기 위해 부엌을 나가려다 말고 인숙이를 돌아보았다. 인숙이는 거품이 가득한 싱드대 앞에서 그녀를 켜다보았다.

"넌 어쩌다가 그렇게 아랫입술이 얇으냐."

"? 아줌마는."

"아랫입술이 얇으면 일에 막힘이 많단다. 그러니,,,,,,"

"그러니깐, 되는 일이 없다 그거지유?"

"궁하게 산댄다."

인숙이는 거품 가득한 손을 들어올려 이마 위를 팔뚝으로 문질렀다. 인숙이의 손에서 묻어난 거품이 머리칼에 한 덩이 옮겨 붙었다. 부엌을 나서며 그녀는 중얼거렸다.

"입술이 뭔지나 아니? 입으로 보자면 울타리고 혀로 보자면 문이지. 한번 벌리고 한번 닫는데 따라 길흉(吉凶)이 넘나든단다. 그러니 입술은 두터워야지, 대문이 견고해야 하는 거나 꼭 같지. 입술이 너무 두터우면 그건 호색(好色)이지만."

옆집 여자가 무어라 질러대는 소리가 담을 넘어 들려왔다. 그 집 앞의 공터 벽돌공장 인부들과 아침부터 또 싸움인가보다. 늘 그렇다. 옆집 여자는 무자상(無子相)이다. 엉덩이가 좁고 배가 훌쭉한 게 키는 후리후리하다. 아이가 없을 것이라고 그녀는 첫눈에 알아보았었다. 눈 아래 와잠과 누당(淚當) 부근이 푸른 빛을 띠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 손금을 본다면 결혼선과 자녀선 첫머리의 여덟팔자형 선이 희미할 것이다. 목욕탕 앞을 지나갔다. 딸의 방문을 열며 그녀는 다른 날과 다름없이 말했다

"경미야, 일곱 시다."

그러나 딸은 깨어 있었다. 일어난 지 벌써 오래인 것 같았다. 딸아이는 덩그마니 의자에 무릎을 모으고 앉아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벌써 일어났니?" 그녀가 애써 웃자, 입술 끝으로 세 개의 주름살이 물결처첨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 더 자지 않고,,,,,,"

"일곱시 라면서?"

경미는 웃지 않았다.

"난 네가 아직 자는 줄 알았구나."

경미 방 탁상시계가 740분을 가리키고 있다. 그녀는 딸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경미는 눈썹이 버들잎 같다. 부드럽고 긴 털이다. 코는 유선형(流線型)이면서 산근(山根)에서부터 준두(準頭)에 이르기까지 곧고 바르다. 재주 있을 얼굴이다, 그녀는 딸아이가 내다보고 있는 창 밖으로 눈길을 옮겨 갔다.

"참 얘야."

그녀는 말보다도 먼저 숨가빠하며 경미를 불렀지만, 딸은 내내 창 밖을 내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오늘 목련꽃이 떨어지는 걸 보았단다. 오늘은 아버지가 오실 거야. 그녀는 그 둘 중에서 어느 말을 먼저 하려고 했던가를 잠시 잊었다.

"오늘은 아버지가 오실 거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경미가 얼굴을 들었다. 경미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갑자기 어깨를 움츠리며 중얼거렸다.

"너는 귓방울이 구슬같이 둥글게 달랐어. 넌 재주 있을 상()이지,"

경미는 대답이 없다. 경미의 잠옷 바지 위에 놓인 손끝에 칠해진 매니큐어가 지저분하게 벗겨져 있는 것을 그녀는 보았다. 경미가 말했다.

"엄마, 벌써부터 술 먹었수?"

"아니다. 얘는. 아니야, 술은,,,, "

그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세차게, 두 번 세 번. 그 고갯짓 때문에 그녀는 오늘 아침 목련꽃이 떨어졌다고 말하려던 것을 잊었다. 이번에는 그녀의 눈가에서 잔주름이 물결처럼 떠올랐다가는 사라졌다.

 

인숙이는 부엌 바닥에서 열무를 다듬고 있다. 노란색과 푸른색 두개의 플라스틱 그릇 사이를 그녀의 손은 기계처럼 오간다. 왼쪽 노란 그릇에서 집어 올려진 열무는 그녀의 손에서 빙그르르 돌려 잎이 흔들리다간 푸른 그릇으로 던져진다. 시루에서 듬뿍 집어낸 콩나물처럼 그녀의 손을 떠난 열무는 정돈된 모습이 된다. 노란 그릇 속의 열무는 다 시들고 지저분해 보이다가도 그녀의 손을 거치면 다시 푸들푸들 살아나는 것처럼 말쑥한 모습이 된다.

"나 나가요. 아마 늦을 거야."

부엌을 지나며 경미가 말했다. 그녀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물었다.

"오늘 일요일 아니니?"

"일직(日直)이에요."

경미의 대답소리는 어느새 대문간에서 들려왔다.

"늦지 말아라."

딸이 나간 것을 화인하기라도 하듯 그녀는 그제야 뒤를 돌아보았다.

"오늘은 아버지가 오실 거야, 일찍들 들어와."

말을 끝내는 것과 거의 동시에 그녀의 손은 가스 레인지 위의 붙박이장으로 뻗쳐 올라갔다. 그것은 연기를 빨아들이기 위해 밖으로 뚫어놓은, 환풍 장치가 달려있는 곳이었다, 그녀의 손이 문의 손잡이 위에서 잠깐 멈추었다. 인숙이는 짧은 스커트를 가랑이 사이로 집어넣고 앉아서 열무를 다듬고 있다. 인숙이의 머리 위로 두 개의 쌍가마가 희뿌옇게 드러나 보였다. 그녀의 손이 문을 연 환풍기의 통 사이로 연기처럼 빨려 들어갔다. 나 나가요, 늦을 거예요, 하던 경미의 목소리가 아직도 등뒤에서 남아 있다. 이제 아이들이 다 나갔다는 것을 확인하는 그녀의 눈가가 갑자기 가늘게 찢어진다. 환풍기의 연통 사이로 들어간 그녀의 손이 차갑게 만져지는 유리의 감촉을 즐기는 사이 잠시 그녀는 눈을 감았다 뜬다.

어둠 속에서도 손놀림은 익숙하다. 그녀는 한 손으로 병의 뚜껑을 벗겨낸다. 그리고 그녀는 인숙이를 등지며 돌아섰다. 환풍기 통 속에서 빠져 나온 그녀의 손에는 완강하게 소주병 하나가 잡혀져 있다. 엄지손가락 위 쪽, 병의 목이 시작되는 완만한 곡선 부근에서 투명한 액체가 찰랑거리고 있다. 그녀의 목이 뒤로 부러지듯 젖혀지는가 하자 왼손에 든 술병에서 쏟아져 나온 소주가 꿀럭꿀럭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그녀의 목이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과 동시에 손은 환풍기 통 속에 들어가 있다. 그 모든 것은 빠르고 치밀하게 박자에 맞추듯 이루어져서, 마치 구멍에 들어간 열쇠가 돌아가면서 자물쇠가 열리는 것 같다.

"다 했니?"

몸을 돌리는 것과 동시에 그녀의 눈길이 인숙이의 쌍가마에 가 박히며 물었다. 인숙이는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허옇게 다리를 내놓은 채였다.

"무슨 김치를 또 담궈대유?"

인숙이가 고개를 들지 않고 물었다.

"아직 먹을 게 많은데. 물김치도 있구유,,,,,,"

"아버지가 오시지 않니."

인숙이는 대답이 없다. 입술을 한번 훔치고 나서 여자는 냉장고를 열었다. 냉동실에 넣어진 마른 김을 집어든 그녀는 비닐봉지 속에서 김 한 장을 꺼내고 다시 냉장고 문을 닫았다. 그녀는 까아만 김을 손수건을 접듯 접기 시작한다. 가로로 세로로 접혀지는 김은, 직사각형이 되었다가 정사각형 이 되었다가 손바닥 반만해 졌다가 장기쪽만 해졌다. 조그맣게 접혀진 마른 김이 그녀의 입 속으로 들어갔다. 입 천장에 와 닿는 마른 김을 혀를 움직여 떼어내면서, 그녀는 김을 우물거리며 인숙이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녀는 노란색 그릇에 아직 다듬지 않고 남아 있는 열무를 집어들었다.

"다들 나갔어유?"

"다라고 해야 둘이다,"

경혜가 먼저 나갔다. 그녀는 여고 2학년이다, 경혜는 언제나, 엄마 나 돈이다. 엄마, 나 돈. 그 애는 자신이 이제까지 배운 말은 그 네 마디밖에 없는 것처럼 그 말을 한다. 그게 언제쯤부터였는지 그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넌 아무래도 남자를 잘 만나야지, 중년에 과부될 염려가 있어."

그녀는 입안의 김을 마저 삼키고 나서 말했다. 인숙이가 입술을 오므리며 쳐다보았다.

"무슨 놈의 기집애가 그렇게 코밑에 감실감실 수염이 나냐."

"에이그, 아줌마두. "

"얼굴도 벌겋게 도화색(桃花色)이 나는 게 꼭 술 먹은 거 같다니까."

"그럼 과부가 돼유?

"그래. 그게 도화(桃花)살이라는 거다."

그녀는 다듬은 열무를 푸른 그릇으로 던졌다.

"나만한 나이 때는 다 그렇대유, . 얼굴이 피느라구 그렇대는데유. 아줌마두 그랬잖우, 손금에는 안 그렇다구유."

"그러니까 남자를 잘 만나야 한다지 않니. 내 말이 틀리든? 넌 귀가 내륜(內輪)이 불쑥 튀어나와 가지고 힘이 있잖으냐. 그런 사람은 고향에서 살지 못하고 객지에 나와서야 성공을 한단다. 타관에서 성공할 상()이거든."

인숙이 손에서 열무뿌리가 잘려져 나갔다.

"여자는 그럼 어떤 게 좋은데유?

"좋은 거야 많지. 첫째 머리칼은 가늘고 흑칠(黑漆) 같이 검어야지. 이마는 평평하고 잔금이 없어야 하고. 턱이 둥글고 입술이 아래 위가 똑 같으면서 눈은 은하수 같이 맑으며 뺨에 붉은 기운이 있어서도 안되지만 또한 눈 밑에 푸른 기가 있어도 안 좋지. 특히 여자는 엉덩이가 암탉 모양으로 둥글어야 하거든. 등이 둥글면 좋은 남편 만날 상이고, 허리가 길면 초년에는 고생하나 말년에는 길()하지. 여자는 볼기가 너무 커도 천할 상이고."

부엌 바닥으로 햇살이 비쳐들고 있었다. 창을 타고 넘어온 빛은 그녀의 등에 얹히며, 싱크대 밑으로 기어들려 하고 있었다. 경미는 오늘 일직이라고 했다. 무슨 놈의 학교가 일요일에 여선생한테 일직을 다 시키냐고 역정을 낼 건 없다. 딸애는 어딘가 나갈 일이 있었을 에고, 그래서 일직이라고 말해버렸으리라고 그녀는 생각한다. 그 애는 잘 될 것이다. 배꼽이 깊고 넓으며 모지고 위로 향해 있으니까. 배꼽에 살구가 하나들어 갈만하면 크게 부자가 된다고 했었다. 배꼽이 작고 뾰족이 내밀어진 사람은 요사(夭死)한다고 했었다. 몸에 흉이 하나도 없는 애가 그 애니까. 다듬던 열무를 손에 쥔 채 그녀는 멍하니 바닥에 와 깔리는 햇살을 바라본다. 뱃속이 싸아하다.

인숙이가 후닥닥 일어섰다. 그녀의 짧은 치마폭이 펄럭였다. 다듬던 열무 잎이 푸스스 떨어졌다. 그녀는 인숙이가 화장실의 문을 여는 소리를 들으며 튀듯이 일어섰다.

그녀의 손은 열쇠가 들어가듯이 조리대 위의 환풍기 통을 열었고, 정확하게 그 환기통 옆의 공간에서 소주병을 꺼내 들었다. 자물쇠가 밀려 올라오듯이, 그녀의 목이 뒤로 꺾여졌다. 꿀럭꿀럭 소주가 그녀의 목을 타고 넘어갔다. 병을 바로 하며 그녀는 목을 세웠다. 유리병 속 소주는 그녀의 가운뎃손가락 부근에서 찰랑거리고 있었다. 오늘은 소주가 이상스레 달다고 그녀는 생각한다. 화장실에서 변기의 물 트는 소리가 들리는 것과 동시에 그녀의 소주병을 든 손도 환기통 속으로 들어갔다. 빈 손이 나와 붙박이장의 여닫이문을 닫았다. 그녀는 냉장고를 열고 김 한 장을 또 꺼냈다. 똑같은 동작으로 그녀는 김을 접었다. 장기 쪽의 졸()만해진 김을 입안에 집어넣고 그녀는 열무 다듬는 그릇 앞에 앉았다.

인숙이 화장실을 나와 부엌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짧은 치마로 엉덩이를 감싸듯 하며 열무단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녀와 마주보는 자세가 되자 인숙이의 허연 허벅다리가 바로 보였다.

"기집년. 무슨 일을 그렇게 보누. 여자란 소르르륵 하고 일을 봐야지, 이건 암소 오줌 깔기듯 그냥 솰솰솰솰이네."

인숙이가 이히히, 하고 웃었다.

"무슨 놈의 웃음이 그 모양이니?"

여자는 눈가로 발그레하네 올라오는 술기운을 손등으로 닦았다

"허영 좋아하고, 재기가 없고,,,,,, 히히라니."

인숙이 또 이히히, 웃었다. 그녀는 인숙일 멀거니 바라보며 혀를 찼다.

"쯧쯧쯧--- 니가 바로 인공(人空)이다. 어째 저래 콧구멍이 뻔하게 드러나 보이는지, 중년(中年)에 고생이 많겠어,'

"아줌만."

사람에겐 십대공망(十大空亡)이 있어. 그런 사람은 무의무탁(無依無托)하지. 이마가 뾰족한 것은 천공(天空)이니 부모 덕이 없어 초년 고생을 하고. 턱이 뾰족한 것은 지공(地空)이라 만년에 재복(財福) 처자 덕이 없고 늦게 고생할 밖에. 그리고 인공인데, 네가 그 꼴로 콧구멍이 드러났구나,"

"그 다음엔 무슨 공이래유?

"사공(四空)이지, 이것아. 콧날이 끊어져서 형제 덕이 없어. 인중(人中)에 수염이 없는 게 오공(五空)인데 친구 덕이 없고 자식이 적어."

"그게 몇 공까지 나가는 데유?

"이런 미화 봤나. 십공이니까 열 가지지."

"많기두 허네유. "

"쯧쯧쯧,,,,,,육공(六空)은 얼굴이 발딱 젖혀져서 관골이 부족한 건데 그건 부모 유산이 없고 수()가 길지 못해. 칠공(七空)은 머리털이 꼽슬꼽슬하고 짧은 건데 그런 사람은 불효자가 많아. 웃사람을 공경 못하고 아랫사람하고도 친하질 못해."

"꼽슬머리에 옥니백이면 독해서 잘 산다던데유?"

"잘 살면 뭐하니, 칠공은 성질이 강하고 자식을 두되 많이 잃어. 누당(淚當)이 거무스름하고 깊은 게 팔공(八空)인데 그런 사람은 음덕(陰德)을 베풀 줄 몰라. 눈에 광채가 없는 사람이 구공(九空)이지. 그건 단명요절(短命夭折)이야. 일찍 죽고 자녀 인연이 박해."

"인제 하나 남았네유."

"그래 이것아. 십공(十空)은 뭔고 허니, 눈썹이 없는 사람이지. 육친의 덕이 없고 형제가 없어 고독한데다가, 늙어서도 의지할 곳이 없어,"

"아하."

인숙이가 입을 크게 벌리며 말했다."

시장 건너편에 거기 양로원이 있거든유. 교회 옆에유. 그럼 거기 있는 노인들은 전부 눈썹이 없겠네유."

"어디 니가 가서 들여다보거라, 눈썹이 있나 없나. 아니. 이것아. 너 지금 열무를 무얼 부러뜨리고 있는 게야?

그녀는 손을 뻗어 인숙이의 허벅 안쪽을 꼬집었다. 인숙이 불에 덴 듯이 일어섰다. 손을 털고 일어서며 그녀는 중얼거렸다.

"너는 인공이야. 중년 고생이 많을 테니 잘 알아둬, 이년아."

인숙이가 다듬기를 마친 열무를 씻고 있는 사이 그녀는 밖으로 나왔다. 조금 헛놓치는 걸음으로 화장실을 다녀 나온 그녀는 마당으로 나왔다. 어정어정 마당을 거닐던 그녀의 눈길이 목련꽃에 가서 얽혀들었다.

아침에 꽃이 떨어졌다. 청상(靑葙) 소복(素服)이 서 있는 것 같더니, 아침에 꽃이 지기 시작했다. 오늘은 아버지가 오실 거다, 얘들아. 그녀는 몸을 돌려 대문께로 다가갔다. 햇빛이, 흰 천막이 무너져 내리듯 쏟아져 왔다. 그녀는 눈을 가늘게 떴다. 눈가에 물결치듯 굵게 주름이 잡혀졌다. 그녀는 대문으로 다가가 우편함 앞에 섰다, 우편함은 비뚜름히 문이 열린 채 구멍을 벌리고 있었다. 그녀는 잠깐 뒤를 돌아보며 두리번거렸다. 그녀의 손이 우편함 속으로 들어갔다. 마술사의 검은 모자를 비집고 비둘기가 나오는 것 같았다. 우편함에서 손을 뺀 그녀에게는 술병이 들려져 있었다. 대문에 기대서서 그녀는 목을 뒤로 젖혔다. 그녀의 손아귀 안에서, YAL이라고 씌인 A자에 걸려서 찰랑이던 갈색의 술이 그녀의 목을 타고 넘어갔다. 그녀가 목을 바로 했을 때 술은 병에 씌인 L자의 아래쪽에 걸려 있었다. 우편함 안쪽으로 술을 밀어 넣고 난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안으로 들어갔다. 열무를 씻어내고 있는 인숙이에게 그녀는 말했다.

"너 그거 너무 벅벅 씻지 마라. 주물러대면 김치가 풋내가 나서 못먹는다."

"알았어유."

"그리구, 풀물 좀 쒀라. 되직하게 쑤었다가 버무릴 때 넣어야 열무김치는 맛이 한결 나느니라."

"알았어유, 그것두. "

"그리구 참, 비앙이라고 해서, 너는 오로에도 들어가는구나. 콧구멍이 빤하면 그건 오로 중에서도 빈한(貧寒)에 들어가지. 복이 없어서 못 살어. 그런데 그것 참,,,,,, 하나씩은 나쁘지만 나쁜 것을 두루 다 갖추면 그건 오히려 상()이 좋은 거래서 재복이 있거든."

여자의 눈 밑이 발그레하다. 그녀의 눈이 반들반들 빛나기 시작했다.

 

2. 사막

 

경혜는 눈을 떴다. 대합실 같다. 천장이 드높은 대합실 같다. 어디에선가 웅웅거리며 끊임없이 열차시간을 알리는 어나운서멘트가 들린다. 눈을 감았다. 눈꺼풀의 무게 위로 대합실의 천장이 내려와 앉는다. 웅웅거리는 소리는 여전하다.

"깨났어요?"

여자의 목소리가 대합실 가운데를 가르며 달려들었다. 경혜는 눈을 떴다. 커다랗게 다가와 있는 얼굴. 눈 밑에 까아만 점 하나가 보였다. 어디서 보았던가를 경혜는 생각한다. 눈앞에서, 입이 커다랗게 벌어지며 말했다.

"옮겨 드릴께요."

비로소 경혜는 그 여자가 간호원임을 안다. 세탁기에 넣으려던 옷을 한번만-. 하며 꺼내입은 것같이 가운이 후줄근했던 간호원이다. 그러나 지금 경혜의 눈에 그것이 눈부시다. 새하얗다. 오래된 추억처럼 경혜는 간호원의 눈 밑에 있는 까아만 사마귀를 쳐다보았다. 간호원이 무너지듯 크게 움직였다. 대합실 천장이 흔들렸다, 간호원이 경혜의 침대를 밀고 밖으로 나갔다.

경혜는 간호원이 미는 침대에 누워 옆방으로 옮겨졌다. 병실 같았다. 그들은 회복실이라고 부를지도 모른다. 그리고 간호원은 나갔다. 방은 어두웠다. 비로소 그녀는 혼자 남게 되었을 때 알았다. 자신의 아랫도리는 아직도 벌거벗겨져 있었다. 서늘하게 추위가 느껴져 와서 그녀는 몸을 움츠렸다. 아랫도리에 조금 통증이 왔다. 그리고 나서 경혜는 자신의 무릎 근처에 팬티가 걸쳐져 있는 것을 알았다. 간호원이, 후줄근한 가운을 입은 점박이 간호원이 그렇게 자신의 두 발에 팬티를 끼워 놓았을 것이다. 경혜는 조금씩 다리를 움직여 보았다. 두 번 세 번. 손을 뻗어 보았다.

아직 멀었다. 경혜는 조금씩 무릎을 세워서 팬티가 손끝에 닿을 때까지 같은 동작을 반복했다. 마침내 두 손에 팬티가 닿게 되었을 때, 경혜는 옷을 입으려던 것을 그만두었다.

"마찬가지야."

그녀는 낮게 내뱉었다. 경혜의 입에서 껌을 씹는 것 같은 소리가 새어 나왔다. 경혜는 문득 수술대 위에 누우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을 때를 생각했다. 핏방울이었다. 그때 경혜는 의사의 가운자라에 튀어 있는 핏방울을 보았었다. 정육점에 고기 나르는 사내들같이--- 그건 참 원시적이었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쌍방이 그랬다고.

원시적. 처음으로 그녀는 원시적이라는 말에서 조금 수치심을 느꼈다. 창피해. 세 마디면 되었다. 창피해--- 라고 중얼거리면 될 그런 잠깐의 작은 수치심이었다. 경혜는 창피해--- 라고 중얼거렸다.

의사는 손을 씻었다. 수도물 소리, 물은 줄줄거리며 나왔다. 그것은 단수(斷水) 직전의 상태 같았다. 하얀 사기 세면대 앞에서 줄줄거리는 수도물을 틀어놓고 의사는 손을 씻었었다. 경혜는 껌을 질겅거리고 있었다.

"준비하세요."

간호원은 결코 친절하지 않았다. 그녀의 존대말 속에는 오히려 경멸이 숨어 있는 것을 경혜는 느꼈다. 경혜는 무릎에 올려놓고 있던 커다란 쇼핑 백을 들었다. 그녀는 일어섰다, 그리고 물었다.

"선생님."

의사가 고개를 돌렸다.

"--- 수술하실 때는 장갑을 끼세요?"

"장갑?"

". 고무장갑 말예요."

의사는 잠깐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경혜는 아랫입술을 내밀며 푸우 입김을 불어 올렸다. 그녀의 이마 위에서 머리칼이 너풀거렸다.

"이젠 그 껌이나 뱉지 그래."

의사는 그렇게 말했을 뿐이었다. 그 순간 경혜는 남자 의사를 찾길 잘 했다고 생각했다. 마흔다섯 살, 아니면 쉰 살쯤 된 여의사를 만났다면 어떨까. 그들은 장갑을 낄 것이다. 고무장갑. 김장을 버무릴 때 쓰는 것 같은 고무장갑을 그들은 낄 것이다. 경해는 딸깍딸깍 소리내어 몇 번 더 껌을 씹었었다. 창피해--- 라고 중얼거리고 났을 때 경혜는 잠깐 그 수술대를 떠올렸다. 그건 참 포즈치고는 더럽고도 흉악했다. 다리를 그따위로 들여올리다니.

의사의 가운에 튀어 있던 몇 방울의 피. 껌을 좀 뱉지 그래. 쭐쭐거리던 수도 물 소리. 길다란 두개의 형광등이 매달린 천장이 점점 아래로 내려왔다간 올라갔다. 경혜는 그 커다란 형광등이 자신의 배 위로 떨어질 것 같아서 조금 몸을 움직여 보았다. 그때 뭍이 열렸다.

얼굴이 겨우 드러나 보일 정도로 문을 열고 간호원이 안을 들여다 보았다. 경혜는 그녀를 불렀다.

"아가씨."

문이 조금 더 열렸다. 간호원이 다가왔다. 눈 밑의 검은 사마귀가 보였다.

"내 가방---"

간호원은 말없이 손을 들었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경혜의 침대 왼쪽 모서리를 가리켰다. 경혜의 눈길이 그녀의 손끝을 따라갔다. 거기에 그녀의 종이 쇼핑 백이 놓여 있었다, 경혜가 턱으로 자신의 팔을 가리켰다.

"언니, 나 이것 좀 빼줘."

간호원의 눈가에 있는 점이 잠깐 흔들렸다. 그것이 언니라는 호칭 때문이라고 경혜는 생각했다.

"? 저려?"

간호원의 입에서 자연스레 반말이 나왔다. 간호원은 경혜의 팔에 꽃힌 링겔주사기를 들여다보았다.

"빼줘, 언니."

"더 맞지 그러니."

"나갈래, 그만. "

반창고를 뜯어내는 소리를 경혜는 들었다. 간호원은 주사기를 뽑고 그녀의 키 높이에서 링겔병을 벗겨 들었다. 경혜는 천천히 몸을 움직여 상체를 일으켰다. 경혜는 팬티를 올렸다.

"언니는 애인 없어?"

"? 애 떼어본 경험이 있냐고 묻고 싶어서?"

"아니. 오늘 같은 일요일에 근무를 하니 말야."

간호원이 고개를 한옆으로 기울였다. 요트의 돛이 기우는 것 같았다.

"몇 학년이니? ."

"2학년."

"처음이니?"

경혜는 턱을 끄덕였다. 간호원이 몸을 바로 했다. 요트의 돛은 수면과 수직이 되었다.

"다음엔 더 일찍 와. 쉽게 더 빨리 하는 방법이 있으니까."

병실을 나가는 간호원의 등에다 대고 경혜는 말했다.

"단골 트자는 얘기야? 언니랑 나랑?"

간호원은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러나 그녀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녀는 한 손에 링겔병을 들고 문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혔을 때, 경혜는 종이 가방을 열었다. 그녀는 가방 속에서 초컬릿을 꺼냈다. 경혜의 손에서 바삭거리며 종이껍질이 벗겨져 나갔다.

 

하오의 햇살이 이마 위에 따갑다. 멀리 육교가 보였다, 햇살이 더욱 따갑게 느껴졌다. 경혜는 종이 가방을 옮겨 잡았다. 육교를 쳐다보자 가방이 한결 무거워지는 것 같았다. 경혜는 아랫입술을 내밀었다. 푸우 입김을 불어 올렸다. 눈썹을 덮고 있던 머리칼이 너풀거리며 올라갔다. 육교 이 쪽편으로 영화관이 바라보였다

경혜는 잠시 걸음을 멈춘다. 그녀는 동전을 던져 올렸다. 햇살을 받아 반짝이며 동전은 허공을 날아올랐다가. 경혜의 마음 바닥에 떨어졌다. 거북선이 그려져 있다, 그러나 이것은 무효다 아무 것도 정하지 않고 동전을 던졌던 것이다. 경혜는 극장과 육교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극장은 길 이 쪽편에 있다. 육교는 극장 앞에 솟아올라 있다. 거북선이 나오면 극장이다, 경혜는 자신에게 약속한다. 동전을 던져 올렸다. 햇빛 속에서 한번 돌고 난 동전이 반짝이며 떨어져 내렸다. 거북선이다. 경혜는 육교를 건너가지 않게 된 것이 다행이라 생각한다.

무림십걸. 극장 간판을 쳐다보았다. 완강하게 손을 틀어쥔 사람들이 방어 자세를 취하고 있다. 그 위로 .한 사내가 날아올라 발로 허공을 찌르는 그릴이다. 경혜는 동전의 거북선 쪽을 극장으로 택한 이유가 이 영화의 제목 때문이라는 것을 안다. 천천히 경혜는 극장매표구로 다가갔다, 돈을 들이밀었다. 매표구에서 표와 거스름돈과 손가락 세 개가 나타났다가 손가락만 사라졌다. 거스름돈을 집어 가방에 넣고, 경혜는 입장권을 들고 입구로 들어섰다. 극장 안은 어둡고 습기 찬 동굴처럼 보였다. 그 어둠이 경혜는 마음에 들었다. 입장권을 던지듯 놓고 경혜는 안으로 들어갔다. 상영시간 중인 극장 휴게실은 텅 비었다. 잠시 경혜는 안락한 기분이 되었다. 소파에 앉아 있고 싶다, 그러나 소파는 더럽고 낡았다. 그리고 너무 사람이 없다. 휴게실 오른쪽 벽에는 여자화장실이라고 써 붙여져 있다. 화살표와 여자 모습도 그려져 있다. 경혜는 패드를 갈아 차기로 하며 화살표를 따라 여자 모습을 향해 걸어 들어갔다

객석으로 들어온 경혜는 어둠이 눈에 익을 때까지 서 있었다. 화면에서는 오래오래, 끝날 것 같지 않게 싸움이 벌어졌다. ()을 든 자와 맨손인 자의 대결이다. 경혜는 쉽게 맨손인 사내가 이길 것을 안다. 영화는 그렇다, 언제나 풍부한 자가 진다, 장검(長劍)은 단검(短劍)에게 지고, 덩치 큰 자는 덩치 작은 자에게 진다. 그것이 모든 오락의 논리다. 얼굴이 잘 생기고 체격이 미끈한 자가 이긴다는 것이 거기 곁들여진다. 그래서 이런 영화는 쉽다. 쉽기 때문에 사람들이 많다. 그리고 많기 때문에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든다. 경혜도 그렇다. 싸움은 끝났다. 울컥울컥 퍼를 토해내며 봉을 든 사내가 쓰러졌다.

객석의 의자들이 눈에 들어오고 통로가 훤하게 바라보였다. 경혜는 빈 자리를 찾아 앉았다. 반 넘게 손님들이 차 있다. 또 싸움이 벌어진다, 무림십걸이라고 했으니까, 열 사람이 나와 각자 열번쯤 싸움을 벌일 것이다. 영화의 그 물량작전이 마음에 들었다. 경혜는 종이 가방에서 비스킷을 꺼냈다. 앞자리의 사람이 뒤를 돌아보았다. 부스럭거리는 종이 소리가 들렸던 모양이다. 경혜는 비스킷을 꺼내 먹기 시작했다. 입 속에서 바삭거리며 마른 과자가 부서졌다. 이번에는 이대 일의 싸움이다. 키 작은 사내가 먼저 쓰러졌다. 눈에서 펴가 흘러나오고. 쓰러진 사내는 물고기처럼 펄떡펄떡 몸을 뒤챘다. 남은 사내들은 조금 길게 싸웠다. 주인공은 발을 잘 썼다. 손은 방어용이고 그는 주로 발로 공격을 했다. 사내가 몸을 허공으로 날렸다. 고속촬영으로 찍은 화면 속을 사내의 몸은 느리게 날아갔다. 깃털 같다. 깃털은 날아가 상대의 가슴에 꽂혔다. 상대가 또한 깃털처럼 쓰러졌다. 그의 입에서도 코에서도 퍼가 뿜어져 나왔다, 경혜는 아작아작 소리내어 비스킷을 씹었다. 화면은 사랑얘기로 변한다.

피와 무술 사이를 비집고 나타난 여인은 통통하게 살이 쪄 있다. 주인공 사내는 갑자기 뼈가 흐물흐물해져서 웃고 있다. 여자가 운다. 무술영화는 사랑에도 법()이 있다. 칼 쓰는 법, 손 쓰는 법, 발 쓰는 법과 같다, 사랑을 쓰는 법이다. 무술영화의 사랑은 그래서 쉽다. 규격품이다. 경혜는 지루해진다, 경혜는 비스킷 두개를 입 속에 집어넣고 와작와작 씹어댔다. 앞사람이 또 뒤를 돌아다보았다.

강변 가요제가 있던 캠프에서 그 기타리스트를 만났을 때 경혜는 두 살 나이를 속였었다. 숲에서였다. 펼쳐놓은 비치가운은 너무 작았다. 경혜는 목덜미와 종아리에서 스적이고 있는 풀을 느꼈었다. 그리고 별을 쏘았다. 숲은 너무 고요해서 조금 무서웠다. 그 무서움이 경혜에게서 그 애의 가슴에 엎드리는 두려움을 앗아가 주었다. 별을 보았었다. 경혜의 손이 감싸고 있는 어깨 너머 하늘에 별이 떠 있었다. 별이 추상명사가 아니라는 것을 그때 경혜는 처음 알았다, 별은 정말로 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끊임없이, 누워 는 자신의 목둘레와 종아리에서 스적거리고 있는 풀의 감촉만이 기억에 남았다.

그리고 별을 보았다, 십 년. 십 년이라는 느낌이 남은 것은 집으로 돌아와서였다. 한 보따리의 빨래를 던져놓고 욕실로 들어갔을 때였다. 옷을 벗다가 경혜는 옆구리에서 까아만 점 하나를 발견했다. 손끝으로 건드려 보았다. 까아만 점은 손톱에 긁혀서 떨어졌다. 그것은 점이 아니었다. 강변에서 묻혀 가지고 온 모래였다. 거울의 자신을 바라보았다. 젖가슴이 짝짝이로 느껴졌다. 속 유두(乳頭)가 가만히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순간 경혜는 십 년--- 이라고 중얼거렸다. 십 년쯤, 가늠하기 어려운 시간이 자신에게서 지나갔다는 느낌이었다. 경혜는 십 년쯤 늙어서 돌아왔다고 생각했다. 젖가슴이 짝짝이로 보이는 이유를 경혜는 그렇게 스스로에게 해명했다. 그날 밤 경혜는 꿈 없는 잠을 잤다. 며칠 후. 잠자리에 들려다가 경혜는 불현듯 창문을 열었다. 하늘을 쳐다 보았다. 별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마찬가지야."

경혜는 중얼거리며 창문을 닫았다. 별은 역시 추상명사라고 경혜는 생각했다.

여관에는 끊임없이 자동차가 달리는 소리가 들렸다. 방에 누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동차 위에 누워 있는 것이었다. 천장은 낮았다. 주둥이가 못생긴 주전자 하나. 물 컵 하나. 찌그러진 쟁반 위에는 는적는적 뭉개지는 휴지 한 묶음이 놓여 있었다. 그때 경혜는 자신이 벗어놓은 줄무늬 스타킹이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사슬에 묶인 다리였다.

가혹한 형벌에 묶인 노예의 다리였다. 잘려진 다리, 사슬에 묶인 다리 저편으로 커다란 쇼핑백이 바라보였다. 경미가 옷가게에서 들고 온 커다란 종이봉투였다. 봉투 위로 삐죽이 내밀어진 체육복에 찍혀져 있는 학교 마크가 보였다. 경혜는 사슬에 묶인 다리가 그 봉투 속으로 들어가 체육복을 꿰지 않기를 바라며 눈을 감았다. 차츰 자동차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었다.

호텔' 나이트 클럽을 나온 것은 세시 반이었다. 밖은 추웠다. 택시는 공원 앞에서 섰다. 이 시간에 몰래 물건을 버려놓고 달아나는 차량처럼 택시는 그들을 내려놓고 멀어져갔다. 발 밑에서 낙엽이 버스럭거렸다. 멀리, 해장국집의 불빛이 내려다보였다. 벌레들은 밤에도 잠을 자미 않았다. 그때 경혜는 그것을 알았다. 벤치에는 이슬이 내려 있었다. 스커트 밑의 맨살에 차갑게 물기가 느껴졌다. 구김이 가지 않는 모직물로 된 스커트에 경혜는 감사해했다. 잠들어 있는 도시의 한 구석에서 그들은 깨어 있었다. 벌레들은 밤에도 잠을 자지 않았다. 조그맣게 말아 쥔 팬티는 그녀의 손아귀에 남김없이 들어갔다. 벤치의 이슬 때문에 경혜는 몸을 떨었다.

한 통의 비스킷을 다 먹고 났을 때, 주인공은 바닷가에 서 있었다. 주인공은 눈에 핏발이 서 있었다. 상대방은 거한(巨漢)이었다. 모래 위에서 그들의 싸움은 시작되었다. 그리고 길고도 지루한 혈투를 거쳐 싸움은 바닷물에서 끝이 났다. 상대는 엎드려서 죽었다. 핏물이 그의 처박힌 얼굴 주위로 붉게 번져나갔다. 영화가 끝났다. 느끼하게 퍼 냄새가 느껴져 왔다. 칠팔십 개의 죽음을 보았다고 경혜는 생각했다. 칠팔십 개의 죽음이 끝나자 피로 물들었던 화면은 하얗게 변했다. 경혜는 극장을 나왔다.

햇살이 쏟아졌다. 잘디잔 유리 조각이 우수수 어깨 위에 떨어지는 것 같았다. 경혜는 조금 어지러웠다.

 

문득 하나의 소리가 경혜의 발목을 붙잡았다. 걸음을 멈추었다. 경혜의 입가에 잠깐 웃음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전자오락실. 해는 이제 경혜의 등뒤를 비추고 있다.

커다란 종이 봉투를 들고 경혜는 안으로 들어갔다. 쿵쾅 쿵쾅. 자르르륵. 먹먹 똑 먹띤 똑. 우르르르 우르르르. 그 소리들을 경혜는 편안하게 듣는다. 소리들은 달려나와 경혜의 몸을 감쌌다. 안마사의 손이다. 경혜는 종이돈을 내고 동전을 바꿔 받았다. 한 움큼이다.

경혜는 비어 있는 놀이판 앞에 가 앉았다. 의자가 조금 높다. 놀이판은 핑퐁이다. 동전을 넣고 버튼을 누르십시오. 동전을 넣었다. 버튼을 눌렀다. 붉고 푸르고 노란 화면이 무너지며 새롭게 정사각형의 벽돌들이 나타났다. 된 공 하나가 관의 왼쪽에서 나타나 씨름이 흐르듯 미끄러져 내려왔다. 그녀는 게임 버튼을 잡았다. 똑 딱. 똑 딱. 경혜가 조작하는 휜 판에 맞아서 횐 공은 튀어 올라 벽돌 무늬의 그림들을 부숴 나갔다. 경혜는 발가락에 힘을 준다. 긴장할 때의 그녀 버릇이다. 똑딱. 똑딱 또닥닥 똑딱. 순간 휜 공이 사라졌다. 그녀의 판이 공을 밀어 올러지 못한 것이다. 경혜는 다시 버튼을 눌렀다. 공이 나타났다. 벽돌 무늬를 향해서 그녀의 흰 라켓이 공을 밀어 올린다. 똑딱. 똑딱. 벽돌 한쪽이 무너졌다. 갑자기 공의 속도가 발라진다, 경혜의 손놀림도 빨라잔다. 그녀의 발가락이 신발바닥을 향해 꼬부라진다. 470. 그러나 경혜의 판이 공을 놓쳐버리고 만다. 경혜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가 토해냈다. 다시 버튼을 눌렀다. 빠른 속도로 휜 공이 나타난다. 휜 판에 맞아 공은 빠르게 뛰어오른다. 벽돌 무늬 한쪽이 또 무너진다. 이제 공은 더 바른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벽돌 무늬가 깨어져 나가는 것과 동시에 공의 빠르기도 비례해서 발라지는 것이다. 튀어 내려오는 공은 미처 경혜의 판이 따라가기도 전에 사라져버린다, 820. 천 점을 올려야 음악이 나온다. 그때 벽돌무의는 전부 깨어진다. 경혜가 게임 버튼을 누르기가 무섭게 공이 튀어나왔다, 또닥딱. 또닥딱. 그러나 세 번을 받지 못하고 공을 놓쳐버린다. 게임은 끝났다, 890. 전에는 버튼을 두세 번만 누르고도 천 점을 올렸었다. 경혜는 다시 동전을 넣고 게임을 시작했다. . . .. 횐 공은 느리게 움직인다. 벽돌 무늬도 느리게 깨어져나간다. 너 몇 학년이니? 간호원의 눈 밑에 나 있던 검은 사마귀. . . . 따파. 공이 사라진다. 짜증스레 경혜는 게임 버튼을 눌렀다. 다시 공이 나타났다. 기름 방울이 흐르듯 공은 미끄러져 내려왔다. 경혜는 상체를 조금씩 조금씩 흔들어가며 공을 받아낸다. 벽돌 한쪽이 쉽게 뚫린다. 공의 속도가 점점 빨라진다. 그러나 이번에는 겨우 620점을 올리고 게임은 끝난다,

손에 땀이 배어나고, 몸을 좌우로 움직이는 것이 좀 더 심해지고, 몇 번 더 동전을 집어넣고 나서야 경혜는 천 점을 올렸다. 음악이 울려나왔다. 천 점을 올리면 울려나오는 실로폰 소리. 경혜는 주변을 둘러본다. 비어 있는 게임기구를 찾던 그녀의 눈이 미사일 앞에 가 멎었다. 그녀는 의자에서 내려와 미사일 쪽으로 자리를 옮겨 앉았다.

손잡이를 잡아당기면, 게임판 밑 부분에서 미사일이 발사된다. 적기(敵機)는 판 상단에서 수없이 날아 내려온다. 콩알이 굴러 내려오듯 한다. 경혜는 미사일의 진로 위에 비행기가 걸리면 손잡이를 당긴다. 붉은 무늬를 남기며 미사일을 맞은 비행기는 판에서 사라진다. 그때마다 꾸르르르 광, 하는 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가 경혜는 마음에 든다. 그것은 죽어 있는 소리다, 새도 벌레도 바람도 그런 소리는 내지 않는다. 어떤 감정의 솜털 하나까지도 면도칼로 밀어내 버린 것 같은 소리들이다. 똑딱.똑따닥. 우르르르. . 비양. 꾸웅 비앙. 리비비비윙. 적기는 우수수 떨어져 내려온다. 미사일이 날아간다. 쇠보다 더 차갑게, 어떤 폐허보다도 더 공허하게 소리는 울린다. 몇 번째니? 간호원은 손에 링겔 병을 들고 있었다. ()이란 그런 곳은 아닐까. 마취에서 깨어났을 때, 그 침대 위에서 경혜는 고치 속에 누워있는 느낌이었다. 자유. 이상한 자유. 절대의 무력함이 가져다주는 해방감. 고치 속의 번데기가 눈을 뜨듯이 희디 횐 천장을 바라보았었다. 드높은 천장은 대합실 같았다. 불을 찾아 날아드는 나방이. 타죽어 가면서도 나방이는 불로 기어든다. 그것은 죽음이 아닌지도 모른다. 해방감. 또 다른 자유. 절대의 구속이 가지는 절대의 자유. 번데기처럼 고치 속에,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습기와 어둠, 고치 속에는 습기와 어둠의 벽이 있었다.

"마찬가지야."

경혜는 미사일의 손잡이를 당기며 중얼거렸다. 고치 족의 자유가, 무력감이 던져준 자유가, 절대의 구속이 만들어준 이상한 해방감이 고치 속의 번데기에게 말을 시켰었다, 언니는 애인 얼어? 일요일인데도 근무를 하니 말야. 간호원은 물었었다. 너 몇 번째니? 손잡이를 당겼다. 미사일은 튀어나가 적()의 탱크를 맞추었다. 꾸르르르 꽈앙. 판 위에는 번쩍이며 불빛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초인종을 눌렀다. 저녁 햇빛이 경혜의 오른쪽 볼을 비추고 있었다. 안에서 신발 끄는 소리가 들렸다.

"나야."

안에서 묻기도 전에 경혜가 먼저 대답했다. 우편함이 달려 있지 않은 다른 쪽의 대문이 열렸다. 경혜는 안으로 들어섰다. 종이봉투의 위쪽을 접어들고 경혜는 등으로 대문을 닫았다.

"일찍 왔구나. 그래 잘했다. 오늘은 아마 아버지가 오실 거야."

경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저녁 햇빛에 눈이 부셨다. 경해는 눈을 가늘게 떴다. 잠시 그렇게 섰다가 경혜는 안으로 들어갔다.

"저건 어째 저렇게 눈 꼬리에 가는 금이 많은지 몰라. 미간(眉間)이 넓어도 호색(好色)인데, 가는 금까지 있으니, 그래도 저게 손금은 좋아서. 결혼선(結婚線)이 뚜렷하니 일부종신할 거야."

경혜는 어머니가 등뒤에서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3. ()

 

멧돼지가 뛴다. 난초가 때도 없이 개화(開花)했다. 벚꽃이 만발했고 허옇게 달이 떠 있다. 목단 꽃이 그 위로 떨어진다. 시월 단풍은 가려서 잘 보이지도 않는다.

은빛 매니큐어가 손톱에서 번득이는 손이 내려와 또 하나의 단풍을 내려친다, 화투장이 경쾌한 소리를 냈다.

", 죽겠구나야. 박 여사야, 너 정말 화투 이렇게 치간?"

"한 장 내고 한 장 먹었어 얘."

"화투 못 치갔다야. 이거 정말, 풍 껍데기가 거기서 나올 게 뭐간."

펄떡거리며 멧돼지가 맞아갔다. 딸깍딸깍 패와 패가 부딪히는 소리만 울렸다. 화투패를 뒤집는 손이 수면(水面)으로 치솟는 물고기 같다.

"그렇지! 너 잘 만났다."

이쁜이의 손이 보료 위에서 팔딱이더니 난초 위에 가 꽂혔다. 도끼로 내려 패듯 그녀가 팔을 흔들자, 늘어진 젖가슴이 출렁거렸다.

"이게 무슨 화투가 이래."

똘이 엄마가 중얼거리며 주섬주섬 보료 위의 화투짝을 집어들었다.

"난 몰라. 난 안 쳤으니깐."

이쁜이의 화투 패를 기웃거리던 김 권사가 키들키들 웃었다. 판이 끝났다. 돈과 화투짝을 거칠게 밀어 내놓으며 똘이 엄마가 몸을 뒤로 뺐다.

", 쥬스 한 잔 차게 해서 가져와라. 열불 나서 화투 못 치겠다."

박 여사가 선()이다. 돈을 챙겨 보료 밑에 넣고 나서 그녀는 화투짝을 끌어 모았다. 이쁜이가 담배에 불을 붙여 물었다

"박 여사 너 오늘 손속 난다야."

고목 나무에 꽃핀 거지 뭘."

푸우푸우 담배연기를 뱉어내는 이쁜이의 넓적다리를 짚으며 경순이 전화를 끌어 당겼다. 다이얼을 돌리는 그녀의 손끝이 마치 전화통을 바각바각 긁는 것 같다. 신호가 봬 오래 울리고 나서야 저쪽에서 전화를 받았다.

"엄마유? 나야. 별일 없수?"

"별일은."

"나 재수 복 좀 봐줘. 오늘은 뭐가 안되네,"

"미친년. 미쳐두 아주 미쳤구나. 거기 어디냐?"

"친구 집이야, "

"방우구재면 왼쪽 눈썹을 본대더라."

"왼쪽 눈썹?

"그래, 이것아 방녀구재는 어미(魚尾)와 간문(奸門)을 보고."

"그게 뭔데?

"찰색이라고 하는 거지 뭐긴. 얼굴 그쪽이 홍황으로 색이 나면 길하대더라."

"뭐가 뭔지 원,,,,,,"

그때, 박 여사가 경순을 홀끔 보며 물었다.

"패 놓지 마?"

"무슨 소리야, ."

전화 저쪽에서 물었다

"뭐라구?"

"아냐, 엄마. 우리끼리 하는 소리야. 별일 없지?"

"그렇대니깐. 저녁에 들를께"?

"글쎄, 시간 봐서."

"미친년. 화투치러 다닐 새는 있구나."

"우와. 우리 엄마 귀신. 나 화투치는 건 어떻게 알았수?"

"니 목소리 들음 알지."

"그럼 끊어."

자기 자리에 놓여지는 화투짝을 흘끔거리며 전화를 끊은 경순은 방석 위로 올라와 앉으며 무릎을 세웠다.

"죽겠네 죽겠어. 연짱으로 이거 패를 어떻게 주는 거야. 나죽어, ."

경순이 자신의 패를 섞어서 남은 패 위에 올려놓으며 뒤로 물러앉았다.

"팍곽 죽으면 난 으쩌란 말이가."

"이쁜이 참 이쁜 소리만 하구 있다. 남의 사정 봐주다가 애밴다더라."

"아니, 다 죽었어, 벌써들."

이쁜이는 뚱뚱한 몸을 흔들며 꾼들을 둘러보았다.

"만만한 게 홍어좆이군."

()에 앉아, 개패를 들고도 화투를 하게 된 이쁜이가 걸게 내뱉으며 방석을 당겨 앉았다, 그녀는 훌러덩 치마를 걷어올렸다.

"난 뭐 날마다 흑싸리 껍데긴 줄 아냐. 쳐 줘. 쳐준다구.

"맞아 얘. 뭐든 먹음 배부른 거야."

죽은 경순이는 뒤로 나앉으며 다시 전화통을 붙잡았다. 바각바각, 그녀의 손톱이 다이얼을 긁어댔다.

"금지게죠? , 금지게 부동산 아니냐구? 누구? 임 사장은 없어? 그럼 전씨 바꿔 봐. 나예요 나. 사모님은 무슨 얼어죽을 사모님이야. 내꺼 그거 어떻게 됐어? 연립주택부지로 먹여 본다던 거 말야. 그래서? 이빨이 안 들어간다구? 아니, 일들을 어떻게 하는 거야. 임 사장은 자기 입으루, 저쪽 이발이 좋아서 먹일 수 있다더니 이제 와서 그런 소릴 하면 어떻게 해, 그리구. 내가 말해뒀던 건 .어떻게 됐어? . 응 그거. 그럼 그래야지. 아니지이, 지금 무슨 말씀이셔. 사 천이 문제가 아니구, 손때 안 묻은 걸로 알아보랬더니만, 농약 치고 비료 치고 그런 거 말구 손 안탄 걸루 말이지. 그럼 그럼. 평당 천삼백까지면 큰 걸로 알아봐도 된다니까. 농지(農地)증명 같은 소리허구 자빠졌네. ()도 좋다니까. 안 되겠어, 임 사장 들어오는 대로 나한테 전화 좀 하라구 그래요. 가만 있자. 오늘은 늦었으니까 매일 아침에 집으루 전화하라구. 알았지요?"

내려놓았던 수화기를 다시 든 경순이는 두어 번 전화통을 두들겨댔다. 흘끔흘끔 화투판을 넘겨다보며 그녀는 다이얼을 돌렸다. 경순이 다이얼을 돌리다 말고 김 권사의 어깨를 탁 쳤다.

", 얘 이거 안 먹구 뭘해."

"?"

"맨끝에 거."

"으응, 이거. 아이구, 큰일날 뻔했네,"

김 권사가 일송 띠끗을 빼들어 보료 위에 내리쳤다.

"아이구. 내가 김 권사 눈 먼 돈을 못 따먹고 뭘 하고 있는 거야."

"이 여사 얘, 넌 죽었음 가만히나 앉아 있어."

똘이 엄마가 내쏘았다'.

"알았어. 죽은 자는 말이 없다, 나두 안다구."

경순이 중얼거리며 다이얼을 마저 돌렸다.

", 나다. 은아 바꿔라. 에이구 우리 새끼. 벌써 학교 갔다 오셨나요? 저런 저런, 그러셨어. 엄마 지금 손님 만나고 있으니까 좀 늦을 거예요, 그래, 피아노 갔다오다가 회화학원 들르면 되잖니. , 리틀 콘테스트 나갈 거는 내가 다 준비했으니까 염려 말아요. 그으럼, 의상실 언니한테 엄마가 다 전화했지, 그래 그래. 언니 바꿔라. , 난데 호영이 태권도 갔지? 그럼, 갔다오거든 네가 닦여서 바이올린 보내라. 알았지? 그리구 나 늦을지도 모르니까 저녁들 먹이고. 그러라니깐. 과외선생 가거든 애들 만화 틀어 주다가 재우란 말이야. 내 또 전화할 테니까. 알았지?"

돌아앉은 경순은 마시다 놓은 쥬스 잔을 집어들었다. 집주인인 박 여사가 드레스 자락을 펄럭이며 말했다.

"얘가 아주 사업두 가정교육두 여기서 다 하고 있네. 화투 안 칠 거니?"

"안 치긴 왜 안쳐."

다음 판부터 경순은 내리 세판 패를 잡았다, 패를 돌리는 경순의 손이 보료 위에서 번득였다. 다섯 개의 손가락과 세 손마디가 의장대처럼 움직였다. 패들을 펼쳐본다. 이쁜이와 똘이 엄마가 죽는다. 찰싹거리며 화투짝이 부딪히는 소리뿐 말들이 없다. 뒤편에 물러 앉았던 똘이 엄마가 이쁜이에게 물었다.

"이쁜이 너 헬스를럽 나간다면서?"

"그래 얘. 늘그막에 운동이라구 할라니깐 삭신이 쑤셔서 못 살겠다."

"할만하든? 한 일주일 됐지?

"말두 마라 얘. 줄넘기 몇 번 하느라 뛰기만 해도 오줌이 질질 새드라."

화투짝을 뒤집으며 박 여사가 말했다.

"그럼 이쁜이 수술을 다시 한번 해봐."

"얘는. 그게 꿰맨다고 될 일이니."

"그럼 아주 막아버리든가."

"지랄하고 있다."

이쁜이는 남들 허리통 만한 자신의 다리를 철썩 때렸다. 김 권사가 똥광을 집어다 앞에 놓으며 말했다.

"요가를 해."

교회를 나가서 권사가 아니다. 뭐든지 남에게 권하는 게 많아서 별명이 김 권사다.

"살 빼는 덴 요가 따라갈 게 없어. 그게 젤이야."

"허긴 넌 그 몸 좀 빼야지, 나랑 어디 갈 때면 시어머니하고 나 온 줄 알까봐 겁나드라."

"우리 신랑은 그래도 아직 좋기만 하대더라."

예뻐서 이쁜이가 아니다. 뚱뚱한 체구에 걸맞지 않게 얌체 없는 짓만 골라서 하는 이쁜이, 예쁜 짓만 골라서 하고 다닌다고 해서 지어진 별명이다.

()이 몇 번 뒤바뀌고 나서 똘이 엄마가 손속이 나기 시작했다. 내리 선을 잡았다. 돈이 그녀 앞으로 모여갔다. 초인종 소리에 가정부가 인터폰을 들 때도 똘이 엄마는 패를 잡고 있었다.

"뭐니?"

"누구 올 사람 있어?"

경순이와 이쁜이가 물었다. 김 권사는 시계를 보았다.

"중국집에서 그릇 가지러 왔대요."

"난 또 뭐 라고,,,,,,"

똘이 엄마는 중얼거리며 밖으로 나가는 가정부를 불렀다.

"아줌마, 얼만가 물어 봐. 오늘 점심은 내가 산다."

"쟤 봐. 남의 돈 가지고 자선사업은 흔자 하네."

"돈이 별 건가. 님은 타는 게 임자고 돈은 쓰는 게 임자지."

똘이 엄마는 보료 밑에서 돈을 꺼내 가정부에게 던지듯 주었다.

"이거 주고, 남는 건 아줌마 화장품 월부 값 내요. 그리고 참, 중국집 애 보고 오늘 냉채는 그거 발가락으로 만들었냐고 물어봐요. , 그것도 냉채라고."

판은 다시 계속되었다. 서편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차츰 어두워진다. 화투 패와 담배연기와 어지럽게 널려진 쥬스 잔과 점심을 먹으며 따라 마신 꼬냑 술병과 걷어붙인 치마와 허옇게 드러난 넓적다리와 발목까지 까내린 스타킹 위로 저녁햇살이 내린다.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권태가 타오르는 연기, 일상의 무료가 썩어가고 있는 냄새가 견딜 만하게 방안을 맴돈다. 조금씩 끈적거리며. 마른 흙이 부서져 내리듯 서걱거리며 안락함이 그들의 피부 위에서 마른버짐처럼 돋아난다. 적당히 잃어버린 수치심이 그녀들의 걷어올린 허벅지에 뭉실거리고, 화투짝을 돌리는 그들의 능란한 손놀림에 중년의 번번함이 서려 있다. 늘어진 아랫배 속의 지방(脂肪)에도. 한 움큼씩 잡혀지는 허릿살에도 나이보다 엄청난 무감각이 뭉실거린다. 풍요와 안락과 행복이라는 이름으로 닫아 건 그들의 금고 속에서 안일(安逸)이 썩어가는 냄새가 퍼져 나오고 있다. 그것은 은은하나 또한 무자비하다.

똘이 엄마에게서 빠져나간 선은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다, 몸이 단 똘이 엄마는 보료 밑을 들썩거렸다. 본전이 겨우 넘고 있을 뿐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앉으며 그녀는 스커트 자락을 펄럭여 다리 사이로 바람을 들여 보냈다.

"중국집 돈 주고 나니깐 끗발이 팍 물구나무서네."

"자선 사업은 아무나 하는 줄 아냐."

다음 판에선 경순이 선을 잡았다. 김 권사가 줄었다. 다시 시작된 판에서 경순은 들고 있던 두 장의 화투 중 시월 단풍을 던졌다. 그리고 뒤집은 패가 풍이다. 똘이 엄마가 자지러졌다.

"아니, 이건 또 무슨 화투야. 하필 10이 거기서 나을 게 뭐람."

"?

"아니, 나 참---, 그게 나한테 붙어야 뭐가 되는 10이라구."

"발음 좀 똑똑히 해. X이 뭐야X."

박 여사가 느끼하게 뱉어냈다. 김 권사가 이히히히 하며 웃었다, 경순이 똘이 엄마를 향해 집어다 놓은 청단 띠끗짜리 풍을 들어 보였다.

"? X이 그렇게도 억울해? 줄까? 갖다가 니 X하거라."

"거 자꾸 X, X,하지 마. 생각나. 정신 산란하구만."

박 여사가 장원(壯元)이다. 그녀가 화투를 섞으며 말했다.

"이 여사, 그 땅 말야, 요즘도 움직이긴 움직여?"

"움직일 때 사서는 벌써 늦어."

"쟤는 오로지 그저 하나 땅밖에 모르더라."

김 권사가 입술가로 번진 루즈를 닦아내며 말했다. 경순은 옷소매를 걷으며 대답했다.

"내리는 법은 없으니까."

"얘는, 땅 샀다가 폭삭한 사람 많기만 하더라. 어디니 거기? 서울 옮긴다구 해서 다락같이 올랐던데. 그때 왜 전매(轉買)하려다가 못 넘기고 집을 팔아서까지 끝 전을 댔는데, 모르긴커녕 지금 반값도 못 받는대더라.

"그건 막차 탄 사람 얘기고. 허긴 뭐 막차 한 건()도 안 탈 수야 없겠지, 내가 하는 식하곤 달라. 난 그렇겐 안 해. 그냥 사둬. 그게 어디 가냐?"

"이자도 안 나오잖니."

"원금까지 떼이는 네 꼴이야 안 나지."

패를 돌리며 박 여사가 물었다

"어때? 재미 좀 보긴 보는 거야?"

"애들만 골라서 사면 돼. 다 오른 땅이야 아무리 요지(要地)면 뭘 해. 이미 늙었는데. 두고 보는 재미가 없잖아. 젊은 것도 좋긴 좋지. 지금 한창 반짝하는데 말야. 그런 젊은 데는 돈 회전(回轉)은 빠를 수 있는데 잘못하다간 곽 물려. 그거 사람 미치는 거야 니들. 그저 애들만 골라서 푹 잠궈 두는 거야. 멀리 보는 거지 뭐. 도계(道界)에 있는 땅, 사람 손 때 안 묻은 걸로 해서 전망을 보는 거지 뭘."

"나도 생각이 있긴 한데,,,,, , 너 패 안봐?"

경순이 자기 앞의 화투를 집어들었다. 두 손에 힘을 모으고 한 장 한 장 까나갔다. 칠홍싸리 두 장, 사흑싸리 두 장이 겹쳐서 나왔다.

"앗따, 혼자 다니면 맞아 죽을까봐 짝지어서 나오나. 난 죽어. 이건 뭐 고춧가루 깻가루가 범벅 아냐."

보료 위에 화투짝을 던져놓으며 경순은 박 여사의 패를 들여다보았다. 칠 만했다.

"이 집이 오늘 왜 이래. 안 쳐도 알겠다, 누구 돈인지."

"바람잡지 마."

똘이 엄마가 내쏘았다. 경순은 뒤로 벌렁 누우며 말했다.

"박 여사, 생각 있으면 한번 같이 다녀봐. 내년엔 선거 아냐? 돈 풀릴 거야 번한데 뭘 그래. 돈은 풀려나을 테고, 땅이야 오르는 게 당연하지."

"글쎄,,,,,, 같이 다닐 거고 뭐고 있나. 이 여사 살 때 따라다니며 나도 그 옆엤 걸로 한 자락씩 붙여서 사면 되지."

"약긴 혼자 약았네. 누가 붙여준대?"

"안 붙으면 어쩔 거야. 빤쓰 벗고 덤비는데."

찰칵찰칵 화투장이 부딪혔다. 김 권사가 풍 껍데기를 보료 위에 던지며 말했다.

"야 여기 X있다. 누구야, 아까 X 찾던 사람, X가져가

"자알들 한다."

이쁜이가 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화투가 아주 안될 때, 화투가 아주 잘 될 때, 그리고 판이 끝나갈 때 하는 그녀의 버릇이다.

"누훈보라가 휘나알리이는 바아람 찬 흥남부두 에헤에."

"또 시작이다."

"모오글 노코 울어어 봤다, 찾아를 봐아았다아. 그으음순아, 어데헤에 를 가아고오."

"으싸으싸, 올라갔다 치고."

"나하만 홀로 헤매었든가아. "

"야야, 정신 사납다, 잘하는 걸로 딱 하나만 해라."

잠깐 노래가 그쳤다. 이쁜이가 팔광을 내려찍었다. 매니큐어가 번들거리는 손으로 이쁜이는 달덩이를 쓸어갔다. 똘이 엄마가 초 십끗을 던져버리며, 파닥 소리가 나게 화투장을 뒤집었다.

"흥남부둔지 영도다린지, 통일이나 왔음 쓰겠다."

경순이 벌렁 드러누워서 중얼거렸다. 천장의 벽지를 그녀는 쳐다보고 있다.

"이 여사, 아주 민족적으로 발언하셨어."

"화투로나 통일과업 성취해라."

경순의 눈이 가늘어졌다.

통일만 됐다 해봐라. 그냥 현찰로 챙겨 가지고 올라갈 거니까."

"가긴 어딜 가? 너 이산(離散)가족이냐?"

"땅 장사하러 간다, ? 금강산이고 백두산이고 호텔 들어설 만한 데는 모조리 사버린다 이 말씀이거든. 아이구, 난 그 생각만 하면 오금이 다 저리더라."

희망도 생긴 꼴대로 논다니까. 이 여사 저러다가 오줌 저리지. 빨리 화장실이나 갔다 와."

적막하게 화투장 두드리는 소리가 저력어스름이 기어드는 방 안을 감쌌다. 경순은 일어나 불을 켰다. 박 여사가 앞에 해다 놓은 화투를 들여다보며 이쁜이는 흥얼거렸다.

당시이인이 주신 선물, 뱃속에 너어코서어, 오느을도오 걸어가는 만사악의 이히몸."

막판에 가면서 이쁜이가 돈을 긁어모으기 시작했다. 성질이 팔딱팔닥 살아서 개패를 들고도 똘이 엄마는 계속 쳐댔고, 김 권사는 돈을 꺼내기 위해 두 번이나 문갑 위에 놓아둔 핸드백을 집어들었다. 본전은 따로 챙겨 넣은 경순은 보료 밑으로 손을 넣어보았다. 돈이 봬 집혀졌다. 오늘은 둘째는 되겠다. 막판으로 들어서며 집주인 박 여사가 크게 터지고 있었다.

김 권사는 똘이 엄마가 피우다가 그대로 놓은 재떨이의 담배를 신경질스레 비벼 껐다.

"생담배 좀 태우지 마라. 눈 아퍼서 어디 화투치겠어.

"성님은 괜히 야단이셔."

", 술이라도 한잔 먹어야 겠다. 먹는 게 남는 거지. 씹을 것 좀 가져오라구 그래. 거기 술병 좀 밀어줘."

", 권사님이 술을 드심 어떻게 허신대. 낼 모래면 집사도 되고 장로도 되셔야 할 분이."

"이쁜이 넌 꼭 끝판에 가서 긁어모으길 잘하더라, "

"늦게야 뭐가 되는 거 그게 바로 나 아니니. 우리 신랑도 그래. 이건 초저녁에는 꿈적도 안 하다가 새벽만 되면 슨다니까."

"? 아이구 지겨워."

 

김 권사의 차를 함께 타기로 하고 경순이는 박 여사 집을 나섰다. 밖은 어둡다. 무르익은 봄밤이 질펀하다. 둘은 차에 올랐다. 차는 헤드라이트를 켜고 골목을 천천히 빠져 나왔다, 골목길이 아니라 해도 김 권사 차의 운전수는 차를 밟지 않는다. 저속(低速)으로 저속으로. 그것이 김 권사의 운행훈이다. 차와 화투치는 속도와 빌어온 돈 갚는 것과, 그런 몇 가지를 빼고 나면 김 권사의 모든 것은 빠르다. 너무 빨라서 대학도 결혼하느라 재학 중에 중퇴했다.

단층집이 보이지 않는 골목길을 빠져 나온 차가 이차선 도로로 진입하기 위해 잠시 멈춰 섰다. 김 권사가 경순에게 얼굴을 돌렸다.

"박 여사 그 애 땅 사겠다는 거 흘려듣지 마라."

경순은 김 권사에게서 술 냄새와 이야기를 함께 듣는다. 차가 회전했다.

"사긴 살 건가?"

"퇴직금 나오는 걸 잠궈 둘라고 그런 거야."

"무슨 소리야?"

"그 애 신랑 아마 곧 옷 벗을걸. 정통한 소식통이야."

그래?"

"몇 달 쉴지. 바로 앉을진 모르지만 어디 기업체 같은 데로 옳겨 앉겠지 뭐. 그 애 신랑 보스가 아직은 힘을 쓴다니까. 그렇구 그렇게 되나봐."

차는 일차 선을 달리고 있다. 운전수는 마흔이 훨씬 넘어 보인다. 저속을 위해서는 나이가 필요한가 보다.

", 너 세종 병원 마누라 이혼한 거 아니?"

"그건 또 언제야?"

"얼마 전이야."

"왜 그랬대?"

"말 들어보니까 웃기지도 않더라."

김 권사의 목소리가 갑자기 낮아졌다. 흘깃 김 권사는 운전수를 보았다.

"그게 글쎄. 온천 한번 잘못 갔다와서 그 꼴이 났대."

"오온천?"

"가서 몸은 잘 풀었는데. 병이 걸려 온 걸 몰랐대지 뭐냐. 남편이 덜컥 옮아버렸는데 어쩌니, 바른 대로 댈 수밖에. 병원 마누라들 셋이 같이 갔다가 하나씩 물어서 그 짓을 했는데 종로의원집에서는 확인사절을 다 보냈었대."

김 권사는 목소리를 낮추며 경순 귓가에 입술을 갖다댄다.

"그게 글쎄. 세종병원 예펜네는 자기가 이혼을 당하게 되니까, 나만 죽냐 못 먹는 밥에 재나 뿌린다 해서 다 불어버렸대. 나만 했냐 다들 함께 했다. 그러니 어차피 소문은 나겠다, 세종병원은 또 내 예펜네만 몸풀고 온 줄 아냐 네놈들 마누라도 다 그랬다 하고 불며 다녔대지 뭐니."

"줄초상났구나. "

"다 그런 거지 뭐. 그 나이에 뭐 사내 없어 못 사니, 돈 없어 못 살지. 너도 조심해 이것아."

"누가 권사 아니랄까봐. 너나 고추장사 다닐 때 조심해라."

김 권사는 일년에 두어 번 매점매석(買占賣惜)을 한다. 물론 사람을 풀어놓기도 하지만, 직접 지방을 돌며 모조리 사들인다. 마늘 흉년에 밭으로 사들였다가 한탕 크게 쳤고, 지난해의 고추 사재기로도 한입 크게 먹었다. 금년에는 마늘이냐 고추냐, 아니면 건어물(乾魚物)이냐..... 어느 것을 찍느냐가 문제지, 제대로만 찍으면 실패가 없다. 공무원인 남편이 물어오는 정보가 큰 몫을 한다.

"고추장사 나가서야 그런 게 어디 눈에 들어오니, 허긴 뭐 생각이 없어서겠지만."

"그래 얘. 너 그 이사관 얘기 몰라? 마누라가 5급하고 붙어먹어서 이혼을 하는데, 마지막에 한 마디 하시는데 이러더란다. 너는 자존심도 없냐, 이사관 마누라가 그래 5급하고 붙냐, 급수만 같아도 용서를 하겠다."

"벗고 뛰는데 이사관 다르고 5급 다른가. 말이야 물건이 하지. 별놈의 자존심도 다 있다."

경순이 창 밖을 내다보았다.

"나 여기서 내려야 돼. 들렀다 갈 데가 있어."

차가 천천히 보도 쪽으로 붙어 섰다. 경순은 차에서 내렸다. 지하철 표지판이 밤 안개 속에 뿌옇다. 경순은 지하도를 내려가서 다시 계단을 올라갔다. 차도로 한 걸음 내려선 경순은 택시를 기다렸다. 지하철을 타면 가기도 쉽겠지만 경순은 그 십만 원짜리 십오만 원짜리들이 싫다, 승객들이다. 안경부터 양말까지 다 벗겨봐야, 몸에 걸친 거라곤 돈으로 따져서 십만 원 안팎의 물건들이 싫다. 싸구려 속에 섞어 놓으면 진품(眞品)도 싸구려로 보인다. 그것이 경순의 자존심이다. 밤 안개가 내리고 있다.

봄밤의 안개다. 화투패 팔광의 달처럼 자동차의 혜드라이트가 지나간다.

겨우 택시 하나가 그녀 옆에 와서 섰다. 앞자리에 남자가 앉아 있다. 합승을 하자는 얘기다. 경순은 자존심을 버린다. 서 있는 것보다는 타고 가는 것이 경순의 자존심에 조금은 덜 상처를 입힌다. 경순은 차에 올랐다.

시종 차창으로 고개를 돌리고 곁순은 문가에 앉아 있었다. 차는 끊임 없이 섰다. 신호등마다 걸리기로 작정을 한 모양이다. 안개가 짙어지는가 보다. 운전수가 투덜댄다. 운전수, 너 하루에 얼마 벌어? 그것두 돈이니? 홍단 한번만 하면 한판에 들어오는 건데. 홍단까지 갈 것도 없지. 판쓸이 한번이면 되지.

몸을 고쳐 앉는데 경순의 눈앞을 언뜻 스치는 게 있다. 그녀는 잠깐 앞자리에 앉은 청년의 뒷모습을 본다. 다시 고개를 창 밖으로 돌렸다. 자석에 끌리듯이, 그녀의 얼굴이 서서히 돌아온다. 앞자리 청년의 어깨에 가서 경순의 눈길이 머문다. 이내 경순은 얼굴을 돌린다. 그러나 그녀의 눈은 다시 돌아와 청년의 뒷덜미에 가 얹힌다. 지방을 감싸며 부풀어오른 뱃가죽 속으로 움푹 들어간 배꼽 그 아래가 찌르르 울린다. 입 안이 메말라 온다. 설핏하게 내려 덮힌 머리칼과 줄무늬의 와이샤쓰 깃이 감싸고 있는 청년의 목덜미에서 경순의 눈길이 움직이지 않는다. 경순은 천천히 왼쪽다리를 들어 오른쪽 무릎에 올려 다리를 꼬고 앉는다. 청년의 목덜미에 가 박힌 눈길이 지글지글 끓는다. 경순은 허벅지 안쪽에 힘을 준다. 그녀의 혀가 나와 핥고 간 아랫입술을 윗니가 나와 잘근잘근 깨문다.

"기사양반."

경순이 차를 세웠다. 그녀는 거스름돈을 받지 않고 메어져라 도어를 닫았다. 차는 미등을 깜박이며 멀어져갔다.

"쌍놈 새끼."

경순은 보도로 올라서며 중얼거렸다. 비로소 그녀는 자신이 텅빈 거리에 서 있음을 알았다,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줄지어 늘어선 상점들이 철제셔터를 굳게 내리고 있다. 모두가 발전기나 보일러 부품상들이다. 그녀의 황폐한 성욕만큼이나 거리도 적막하다.

 

대문이 저만큼 다가왔을 때, 경순이 바라본 집에는 불빛이 없었다. 하나의 늪, 아니면 동굴처럼 집은 커다란 어둠의 덩어리였다. 그것은 밖의 어둠보다도 더 짙은 어둠이었다. 경순이 다가가 초인종을 눌렀다. 두 번 세 번, 초인종을 누르며 경순은 대문에 불이 켜질 때까지 기다렸다. 그 시간이 한없이 길게 느껴졌다.

현관 쪽에서 희미하게 이 새어나왔다. 그리고 대문에 불이 켜졌다.

느리게 신발 U.는 소리가 이어지고 나서 발자국소리는 대문 저쪽에 와

멎었다. 탁하게 가라앉은 음성이 들렸다.

"누구세요?"

"니나, 엄마."

"누구? 경순이니?"

"그렇다니까.""

대문이 열렸다. 불쑥 안으로 들어서며 경순이 물었다.

"별일 없지?"

그 말에는 대꾸가 없이 어머니는 대문 밖을 기웃거렸다.

"차는 안 가지고 왔어?"

"기사 오늘 노는 날이야."

경순이 현관 쪽으로 걸어갔다.

"아니, 왜 집안이 이렇게 캄캄해. 불도 안 켜고 뭐하고 있는 거유?"

"캄캄하긴."

두 사람은 안으로 들어섰다. 뒤따라오며 그녀가 말했다.

"넌 언제 봐두 밥이 붙어 보인다니까. 얼굴은 둥글어 만월(滿月) 같고, 살빛은 백옥(白玉)이지, 이마가 평평한데다 턱은 이중(二重)이고,,,,,. 양뺨에 살은 없는데 관골이 높거든."

"고맙수 고마워."

"그저 너는 입이 너무 커서 탈이지. 입 큰 여자는 내 주장을 하거든."

"입이 크면 그것두 크대며?"

경순이 낄낄 웃었다.

"애 아범은?"

"지방에 갔는데 늦어지나봐. 오겠지 뭐."

경순이 중얼거리며 부엌을 들여다보았다. 그녀는 코를 벌름거렸다. 안방문을 열어보고. 욕실을 들여다보고, 베란다 쪽을 내다보면서 경순이 술레잡기하듯 두리번거렸다.

"애들은 있수?"

모녀의 눈이 마주쳤다. 경순을 향해 그녀는 턱을 쳐들어 보였다, 제방에 있나보다. 경순은 그렇게 알아들었다. 두리번거리던 경순의 눈길이 멎었다. 술레잡기가 끝났다.

"별일 없구려."

식탁 의자를 드르륵 당겨 앉으며 경순이 말했다.

"나 술 한잔 줘."

"자고 가게?

"자긴. 가야지."

경순이 훌훌 블라우스 위에 걸친 웃옷을 벗었다. 경순은 불빛이 그늘을 만들고 있는 구석에 서 있는 여자를 흘깃 보았다. 적당한 어둠이 그녀의 얼굴을 가리고 있다.

"오늘은 뭐가 안돼. 집에 가서 파티에 갔다왔다 그럴거니까,,,,,, 술 한 잔 줘요."

"얘는. 술이 어딨니."

"없어?"

"그럼 얘. 요새 집안에 술 없다. 나도 요샌 술 안 먹어."

"그으래요?"

"그렇지 그럼. 술이 다 뭐니,,,,,,"

"."

웃음도 감탄도 어이없음도 아닌. 그 모두일 수도 있는 짧은 한마디가 경순의 입에서 새어나왔다. 어둠에 숨겨진 여자의 얼굴이 경순의 눈길을 받자 한 걸음 더 뒤로 물러섰다.

"난 술 안 먹어, 요새."

표정은 어둠에 가려지고 목소리만 들렸다. 경혜인가. 계단을 내려오는 발소리가 울렸다. 느릿느릿 층계 하나 하나를 베듯이 목조 계단을 찌걱이며 발소리는 다가왔다. 그것은 철판이 긁히는 소리 같았다.

 

4. 부드러운 죽음

 

하나 둘 불이 켜지며 거리는 빛과 어둠으로 더욱 선명해져갔다. 어둠과 함께 하루를 시작하는 업소(業所)들과 어둠과 함께 하루를 마감하는 업소들이 한눈에 바라보였다. 보도 블록 위를 사람들이 오가고 있다. 만나러 나오는 사암들과 헤어져 돌아가는 사람들. 기다리는 사람들과 끝난 사람들, 등을 보인 사람들과 앞으로 오고 있는 사람들,,,,,, 이분법(二分法)에는 끝이 없겠다는 생각을 하며 경미는 눈을 돌렸다. 빈 찻잔을 손 끝으로 밀어 내놓다가 경미는 앞에 앉은 남자의 바지 주름이 두 줄로 잡혀 있는 것을 보았다. 무릎 부분이 특히 더했다. 경미는 그런 것보다도 스스로에게 작은 위안의 지팡이가 되어 주기를 바란다. 남자는 상체를 숙여 탁자에 팔꿈치를 괴고 경미 쪽을 바라보고 있다.

그의 얼굴을 퍼해 벽으로 창 밖으로 주방의 커피포트로 헤매던 눈을 경미는 거두어들였다. 남자를 보며 경미는 물었다.

"늦었지요?"

남자의 흔들리는 시선이 다가왔다.

"그래, 늦었지. 경밀 위해서는 더욱 그렇지."

"무슨 말씀이에요?"

"더 일찍 내가 헤어져 주었어야 하는 건데. 나도 알아."

우린 늘 이래. 경미는 이제 더 포기할 것도 없는 마음속에서 한 가닥을 잡아 그것을 부러뜨린다. 할 말이 없어서 그래서 늦지 않았냐고 물었던 건데. 이 남자는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나. 날 위해선 벌써 헤어져 줘야 했다니. 경미는 손목을 들어 시계를 보았다.

"나가실래요?"

그래. 그러지."

남자가 탁자의 담배 곽을 집어들었다.

"다방에 사람이 너무 많군."

"그래야 장사가 되지요."

"그런가."

"아마 여기는 우리 같은 사람들은 오는 데가 아닌가 봐요. 우리가 젤 오래 앉아 있었던 거 같애요."

둘은 밖으로 나왔다. 어둠이, 안개가, 거리의 소음이 그들의 사이로 꾸역꾸역 몰려들었다. 경미는 남자에게로 다가서며 말했다.

"저녁이나 먹고 가요, 어디서."

"저녁? 그럴까."

둘은 내리막길을 걸었다. 사람들이 조금 뜸해졌다.

"왜 얼굴 표정이 그래요?"

"모르겠어. 내 얼굴이 어떤데?"

"야단맞으러 집에 끌려가는 애들 같애요."

"틀린 말은 아니겠지. 뭐랄까, 자꾸만 사과하고 싶어, 경미한테, 웬지는 모르겠어. 하여튼 그래. 미안하고 죄스럽고."

"나한테 뭐 잘못한 거 있으에요?

남자는 대답이 없다.

"나한테 나쁜 짓 한 거 없어요. 그런데 왜 그래요?"

"마음 속의 간음도 간음은 간음이지."

남자는 자신의 구두 끝을 바라보고 있다. 경미는 잠깐 걸음을 멈추었다. 세 번째 듣는 말이다, 이 남자의 입에서 간음이라는 말을 듣는 것은. 그리고 이 남자에게서 간음이라는 말을 들을 때는 둘 다가 늘 어떤 와중에 있었다. 그랬기에 간음이라는 말을 이 남자에게서 들을 때는 두려웠다.

"큰일나겠네요. 이러다간 내일 아침, 현대의 공자(孔子) 서울에 나타나다 하고 신문에 나겠어요."

"쉽게 말해. 분명하게. 공자 가운데 토막 같은 말은 좀 집어치우라고 말야."

이런 것 때문이다. 겨우 안아 본 것, 숫자를 헤아릴 수 있게 겨우 몇 번 입맞춤을 했던 것--- 그러고도 간음이마는 말을 거리에서 내뱉는 이런 것들 때문이다. 그래서 이 남자를 좋아했었다.

그가 처음으로 간음이라는 말을 깼을 때 경미는 아주 작고 어렸었다. 아무 것도 작고 어리지는 않았었겠지만. 경미는 그 시절의 자신이 어리고 작았다고 늘 회상했다. 그는 선배였다. 나이도 학교도 그랬다. 그러나 그의 나이나 모습을 자기 또래의 동급생으로 낮춰놓고 본다고 해도 그는 아주 다른 사람이었다. 무엇보다도 나이를 짐작할 수 없었고, 수북수북 담아서 또 꾸욱꾸욱 누른 것 같은 낮고 탁한 목소리를 이해할 수 없었고, 들쑥날쑥이라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이 무자비하게 자란 수염을 용납할 수 없었고, 여름이면 소매를 걷어올렸다가 가을이면 내려서 입고 겨울이면 그 위에 하나 더 껴입는 그의 한결같은 옷차림을 납득할 수도 없었고, 그리고 그가 가진 이론이나 행위의 정당성을 가늠하기 이전에 그가 가치 있다고 믿는 것에 바치는 그의 열정을 기이(奇異)하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다만 하나, 그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과 그 일에 대한 믿음을 말할 때 분명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그에게 압도된다는 것이었다. 논리의 옳고 그름이나, 행위의 많고 적음이 거기서는 계산되어지지 않았었다. 그것은 주술(呪術)이었다. 그리고 그 무렵 그는 간음이라는 말을 썼었다. 더러, 자유의 성감대(性感帶), 정서의 체모(體毛)니 하는 활자화된 말을 보아오기는 했지만, 그의 입으로 간음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마치 간음 당한 기분이었다. ()의 용어가 정치나 철학에서 쓰여질 수 있다는 경이로움도 그의 입에서 들었기 때문에 한결 더했다. 오도된 논리에, 조작된 여론에 간음 당하지 마라. 너희들의 젊음과 진실이 간음 당할 때 우리는 또다시 윤리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 그의 말을 들으면서. 그의 말에 간음 당하는 것 같아서 경미는 입 속으로 그가 한 말을 고쳐서 중얼거려 보았었다. 어두운 시대를 갈수록 밤길을 조심해, 처녀는 지켜져야 해. 그렇지 못할 때 우린 어떤 자에게나 몸을 맡기는 갈보가 될 수밖에 없어.

두 번째의 간음을 경미는 그의 품에 안겨서 들었다. 70년대 초반, 학원 사태 때였다. 그가 재판을 받고 나온 다음이었다. 시간마다 순간마다 널 간음하여 지냈다, 네 옷을 벗기면서 고통을 잊으려 했어. 널 수없이 간음하면서 난 널 지키려고 했던 거다.

일요일 저녁의 식당은 한산했다. 음식을 주문하고 앉아서 경미는 식탁을 내려다보았다. 투박한 엽차 잔에서 물이 식고 있었다.

"아직도 취직은 못하는 거예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벌써 몇 년인데,,,,.."

"만기가 돼야지. 그래야 복권(福券)이 돼."

음식을 먹는 것으로 해서 사람들은 얼마나 많이 위안 받고 사는가, 경미는 미지근한 엽차 잔을 손가락으로 매만졌다. 식당엘 오니 이런 이야기도 쉽게 하게 되는구나. 하긴. 예수도 최후의 만찬이라는 것을 했지.

이건 내 피요 살이요 하면서 방도 먹고 포도주도 마셨지, 예수도 이별의 의식(意識)을 음식으로 치른 거야. 신에게 드리는 제물도, 조상에 바치는 제사에도 음식을 차리는 걸 보면 하느님이나 귀신이나 다 먹는 데서 위안을 받기는 마찬가진가 봐. 하물며 인간인데.

남자의 앞에 짜장면이 놓여지고, 경미에게는 우동이 놓여졌다. 둘은 말없이 나무젓가락을 들었다. 말없이 국수를 휘저어서 말없이 먹기 시작했다.

두어 번 우동을 건져 올리다가 경미가 입 속의 음식을 삼키며 소리없이 웃었다. 남자가 국수 발을 집어 올리다 말고 그 웃음을 보았다. 그가 입술을 핥으며 말했다.

"?"

"아녜요."

경미가 고개를 저었다. 여전히 웃으며였다

"실없긴."

"무슨 생각을 했거든요."

"어떤 생각을 했는데?"

경미가 고개를 들었다.

"마지막이니, 다시는 만나지 말자니 하면서 헤어지는 마당에 국수를 먹고 있는 게 우스워서요. 국수 발처럼 오래오래 길게 잊지 말자고 먹는 거 같잖아요."

입가에 꺼멓게 짜장을 붙인 채 남자가 경미를 건너다보았다. 근가 짧게 한숨을 쉬었다.

"용서해라."

경미의 입가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말고기 같은 거 섞어서 파는 갈비 집엘 갈 걸 그랬냐봐요. 질기게도 잊혀지지 않게."

남자가 고개를 숙였다. 그는 젓가락 가득히 짜장면을 걷어올려 입에다 밀어 넣었다. 그건 식사를 하는 게 아니예요, 사료(飼料)를 집어넣는 거지. 식당에 올 때면 언제나 경미에게 그런 말을 하게 했던 버릇 그대로 남자는 꾸역꾸역 짜장면을 틀어넣고 있었다.

 

"이래서,,,,,, 어쩌자는 거야?"

남자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경미는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남자의 키가 한 뼘쯤 커지는 것 같았다.

"몰라요, 나도."

"차 태워주마, 내가."

"아녜요."

"그러면?"

"몰라, 나도 혜어진다는 실감이 들 때까진 헤어질 수가 없잖아."

"알았다. 택시를 잡을께."

"아녜요. 버스 타요."

말없이 남자가 앞서 걷기 시작했다. 그의 뒤를 따라 가며 경미는 갑자기 그가 따뜻하게 느껴졌다. 뒷모습을 보지 않는 건데,,,,,, 뒷모습을 보아선 안 되는 거였는데. 아주 큰 나무처럼 그는 걸어가고 있었다.

졸업을 하고, 두 번째 월급을 타 가지고 그의 방에 찾아갔을 때 그는 집에 없었다. 자취방의 문에는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다. 비틀면 그대로 열릴 것만 같은 작고 녹슨 자물쇠였다. 까닭 없이 마음이 편안했다. 닫혀져 있는 문이 어쩐지 그와 세상과의 사이에 열려 있는 관계를 말해 주는 것 같았다.

부엌문은 그냥 열렸다. 석유 스토브와 때가 끼지 않고 잘 닦여서 반들거리는 식기들이 거기 있었다. 밥공기는 차곡차곡 포개져 있었고, 수저통 옆에는 행주가 줄에 널려서 마르고 있었다. 그를 이해할 수 있을 하나의 통로를 보는 느낌이었다. 정갈한 부엌살림이 바로 그의 많은 무질서를 지탱해 주는 숨겨진 질서라는 생각도 들었다. 부엌바닥에는 먹어치운 빈 소주병들이 벽을 따라 일렬로 세워져서 기역()자를 만들고 있었다. 그를 만나지 않고 갈 수 있는 다행스러움으로, 그의 숨겨진 질서를 남몰래 훔쳐 본 행복감에서 후우후우 웃으며 경미는 되돌아 나왔었다. 그리고 골목 입구에 있는 쌀가게에 들러, 다섯 말의 쌀을 그의 집으로 배달시켰다.

그후, 그가 하는 일을 옆에서 지켜보며 경미는 그에게 두 번 돈을 주었었다. 후에 (자금)이라는 말로 불리우게 된 돈이었다. 한번은 월급에서였고, 다른 한번은 붓고 있던 적금을 헐어서였다. 그 적금은 음향 기기 마란츠나 JBL을 갖고 싶다는 생각에서 들었던 것이었다. 그가 노래라고는 음정도 맞지 않게 유행가 몇 곡을 가사나 겨우 외어 부를 줄 아는 음치라는 것을 알았을 때 경미는 투자를 잘못했다고 생각했었다. 음악은커녕 선언문 같은 것이나 목소리를 드높여 읽어대는 데다 투자를 했던 것이다.

복역(服役)을 마치고 나왔을 때, 남자는 면회를 오지 않은 경미가 조금은 서운했던 모양이었다. 자기 감정을 말하는 데는 여간 서툴지 않고, 또 그런 일이 흔하지도 않은 그가 아직 짧은 머리칼을 쓸며 말했었다.

"면회는 올 줄 알았지."

그때 경미는 그가 왜. 면회는--- 이라고 말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면회는 올 줄 알았다는 어조(語調)는 면회보다도 더한 짓을 할 수로 있으리라 기대했다는 예상을 담고 있었다. 공판정에서만 그를 보았을 뿐 경미는 면회를 가지 않았었다. 교도소의 어디에도 부엌은 없으리라는 생각에서였다. 그의 무질서와 혼란을 지켜주는 의미로서의 부엌이, 먹고 난 빈 소주병이 벽을 따라 일렬로 도열해 있는 그런 부엌이 그곳의 어디에도 없을 것 같았다. 아주 큰 나무처럼, 언제나 뒷모습뿐인 사람으로서 그가 남아 있기를 경미는 원했다. 그것은 도피가 아니었다. 결코 소극적인 것도 아니었다. 면회를 하러 찾아가는 사이에 그에게서 그를 이해할 수 있는 어떤 다른 통로를 가지게 되기를 경미는 원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믿음이 옳았다고 경미는 확인할 수 있었다.

그와 같은 사건으로 연루되었던 후배나 친구 중에서 결혼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상대는 그 동안 열심히 면회를 갔던 여자들이었다. 이전부터 가까운 사이였던 남녀도 있었지만 오히려 면회를 와 주는 사이에 사랑과 필요를 느낀 사이들도 있었다. 그들과 달리 예외일 수 있었던 자신이 경미는 다행스러웠다. 그것은 사랑의 문제가 아니었다. 경미에게 그것은 상대를 이해하는 각도의 문제였다. 어떤 물체도 그것을 바라보는 자리, 놓여 있는 상태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물며 그것은 정()과 한()의 문제였다,

대학을 나온 사람은 꼭 월급쟁이가 되어야 한다는 논리는 있을 수 없지만 그와 같은 처지의 남자는 회사라는 직장을 가질 수 없다는 율법은 있었다. 그것이 그가 미워했던 바로 그 사회의 대답이었다. 결국 남자는 신발장수가 되었다. 그때까지 그는 많은 신발을 떨어뜨리며 몇 가지의 일을 벌였지만 모두가 실패였다. 실패로 끝났다- 는 말은 맞았다. 실패에는 끝이 있지만 성공에는 끝이 없기 때문이다. 적어도 끝난 성공 뒤에는 영광이라는 것이라도 따라오기 마련이었다.

시골의 오일장을 돌며 그는 신발을 팔았다. 한 사회의 구조를 귀납적(歸納的)으로 인식하고 그것을 스스로 육화(肉化)시키기 위하여 --- 라고 말하며 남자는 떠났다.

(인카네이션)이라고 그가 영어로 말했던 그 육화 작업, 경미는 그것에 서린 불길함을 알지 못했다. 서울에서 신발을 떼어다가 시골 장터를 따라다니며 파는 일을 하면서 남자는 경미에게 더욱 큰 나무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신발만을 팔지는 않았다. 남자는 닷새섹 돌아가며 시골장을 돌다가, 여자에게 애를 배게 했고, 살림을 차렸고, 아들을 낳았고, 그러고 나서 혼인 신고를 했다. 그는 귀납적으로 육화되어 갔던 것이다.

"내려. 다 왔어. 저기야."

남자가 먼저 일어서며 말했다. 버스를 내린 그를 따라 경미는 길을 건너갔다. 밤 안개가 짙어지고 있었다. 창마다에서 빛나는 불빛이 꽃가루를 뿌려놓은 듯이 아우성치고 있는 동네를 경미는 쳐다보았다.

여름이면 해마다 어김없이 초롱을 들고 물을 받기 위해 급수차 앞에 줄을 서야 할 게 분명한 그곳은 고지대 무허가 주택지였다. 낮에 이곳에 왔다면. 저 불빛이 새어나오는 창마다에 적의(敵意)의 눈빛이 번득이고 있다고 생각했을 게 분명한 산동네였지만, 지금은 밤 안개에 싸여서 어디에도 남루한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들의 무덤처럼. 불빛만이 있을 뿐 적요했다.

좁고 구불거리는 골목을, 가파르고 울퉁거리는 길을 경미는 따라 올라갔다. 그리고 작은 빈터가 나왔다. 앞서 가던 남자가 걸음을 멈추었다.

경미가 따라와 서는 것을 기다렸다가 남자가 말했다

"저기야. 창문이 하나 보이지? 그 집이야."

한 남자가 드높던 이상을 육화(肉化)시킨 곳, 현실의 자리, 파아랗게 형광등 불빛이 어려 있는 창문을 경미는 눈을 깜박이며 바라보았다.

", 이제 돌아가."

남자가 담배에 불을 붙였다.

"차 태워 줄께, 내려가자."

경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남자의 집 창문에서 눈길을 돌렸다, 어딘가에서 애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경미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불빛 하나하나를 세기라도 하듯이 밤 안개 속에 감싸인 산동네를 바라보았다.

자동차의 헤드라이트가 번득이고 있는 저 아래쪽과 경미가 서 있는 곳 사이에 안개에 가려진 어두운 공간이 있었다. 이 산동네로 오르는 경사 급한 언덕이었다. 그 공간 속에서 출렁이는 어둠을 이제 어떻게 건너갈 것인가를 경미는 생각했다. 무엇인가를 여기다 버리고 가야만 할 것 같았다. 남자가 피우던 담뱃불을 어둠 속으로 던졌다. 불을 단 꽁초는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갔다. 그때 경미가 낮게 중얼거렸다.

"그랬었지요. 생각나요--- 등피를 닦고 있었지요. 시골학교에서 여선생을 하던,,,,,, 그때 말예요."

찾아온 남자가, 사람의 몸에서 나오는 분비물이 그렇게 많은 더러움과 냄새를 뿜어낼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던 그때, 경미는 시골 중학교에 있었다. 해가 떨어져 가는 운동장 저 끝에 포플라 나무 긴 그늘을 밟고 우두커니 서 있던 남자는 그날도 아주 큰 나무 같았다.

한눈에 경미는 남자가 찾아온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숨을 곳을 찾아서 그는 많이 헤매다닌 게 역력했다. 씻지 못한 얼굴에서는 땀이 말라붙어 허옇게 소금이 일고 있었다. 아무 것도 묻지 않고, 경미는 그를 자신의 하숙집으로 데리고 갔었다. 방으로 들어선 경미가 안으로 들어오라고 했을 때 그는 신발을 벗다 말고 머뭇거렸다.

"들어오세요."

"발이 너무 더러워서."

"발뿐이 아닐 거 아녜요."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겠어요. 하여튼 들어오셔야죠."

방으로 들어선 그는 악취의 덩어리였다. 그의 옷차림을 너무 오래 보아왔었기에, 여전하구나 하는 생각에서 무심히 지나쳤던 경미는 비로소 그가 노숙(露宿)까지 한 것을 알아 볼 수 있었다. 인간이 네 발을 가진 짐승이었다면 아무도 인간을 울에 넣어 기르려고 하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어떤 가축도 그렇게 심한 냄새를 피우지는 않을 태니까.

양품점으로 나가 그의 옷을 사며, 경미는 크다는 말밖에 할 수가 없었다.

"남자 속옷 좀 주시겠어요?

"사이즈 얼마로 즈릴까요?

"글쎄요. 큰 게 좋겠지요."

"얼마나 큰 걸로요?

"아주 큰 게 좋겠죠."

"그럼 라아지로 드릴까요?

혼자 방을 쓰는 동료 여교사에게로 가 경미는 잠을 잤다. 남자는 경미 하숙에서 자고 먹었다. 첫날 학교엘 갔다가 돌아와 보니, 남자는 펌프가 있는 우물가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인기척에 놀라며 그가 돌아다 보았다

"뭐예요?

경미도 놀라면서, 그의 손에 들려진 등피를 보았다. 비누칠을 해서 말끔하게 닦여진 등피를 그는 들고 있었다. 그가 눈을 껌벅이며 말했다.

"아무리 입김을 불어서 닦아도 깨끗해지지 않아서, "

"미안해요. 제가 닦음 되는데 그러셨어요."

, 이 남자는 여기서 또 부엌을 하나 만드는구나. 경미가 이해하는 정갈했던 부엌은 그 남자의 축()이었다. 경미의 볼이 붉어지는데 남자가 말했다.

"뭐 할 일이 있어야지."

남자가 와서 닷새가 되던 날, 경미는 그에게 안겼다. 자신의 키가 그의 턱밑에 들어간다는 것도 그날 알았다. 다음날 경미는 그에게 입술을 주었다. 경미는 일주일이 되는 날 그와 함께 자게 될 거라는 예상을 했다. 그러나 경미가 입술을 준 다음날, () 도금을 한 것 같은 달빛 속을 걸어가 경미가 동료교사의 방에서 자고 난 그 다음날. 남자는 그를 찾아온 사람들에게 잡혀갔다. 신발장사를 나서기 일년 반 전의 일이었다.

안개가 더욱 짙어지며, 먼 차도의 불빛들을 가려가고 있었다. 경미는 등뒤로 다가오는 남자의 발소리를 들었다. 낮은 목소리로, 안개에 젖어 가는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경미가 속삭였다.

"그랬어요, 등피를 닦고 있었지요. 참 큰 나무 같았어요. 그때도 그랬어요."

밤 안개가 짙다. 골목 끝에선 외등이 부옇게 바라보였다. 경미는 걸음을 멈추고, 안개 저편에 솟아 있는 집을 바라보았다. 거실 쪽에서 불빛이 새로 나오고 있었다. 집에 누가 왔나 보다, 경미는 생각했다. 거실에 불이 켜지는 일은 없었다. 거의 늦은 밤 이렇게 돌아을 때에 집은 언제나 어둠의 덩어리였다. 그것은 그냥 캄캄했었다.

천천히 경미는 걸었다. 안개가 발목에 걸려 흐느적거렸다. 집으로 향하던 경미의 발걸음이 왼쪽으로 꺾어들었다. 그곳은 벽돌공장이 있는 빈터였다. 집 뒤편으로 난 경미의 방에서 바라보면 벽돌공장의 인부들 얼굴까지도 그대로 드러나 보이던 곳이었다.

드넓은 빈터에는 언제나 가득히 모래와 새로 찍어낸 시멘트 블록과 실어 내가기 위해서 쌓아놓은 벽돌들이 쌓여 있었다. 끊임없이 철거덕거리는 기계를 돌려가면서 인부들은 일을 했다. 움막 같은 숙소를 지어놓고 인부들 몇은 거기서 살고 있었다. 짙은 푸른 빛깔 비닐을 씌운 천막집이었다.

학교가 쉬는 일요일이면 경미는 그들의 일하는 모습을 오래오래 바라보는 시간이 많았다. 인부들은 자동인형처럼 움직였다. 모래와 시멘트를 섞는 사람, 블록을 찍어내는 틀을 움직이는 사람, 그리고 나머지는 네모진 판에 찍혀져 나오는 블록을 나르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똑같은 행위를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리고 다음날도 반복하고 있었다. 지난 주일과 똑같은 행위를 다음주에도 또 반복하고 있었다. 계절이 바뀌어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한결같은 작업복을 입고, 때묻은 얼굴의 땀을 훔쳐가며 같은 일을 반복했다. 벽돌들은 끊임없이 새로 찍어 내지고 또 실려나가곤 했겠지만 경미의 방에서 바라본 작업장은 변함없는 일정한 행위만을 반복하고 있을 뿐이었다. 한낮이면 그들은 웃통을 벗었다. 오래 햇빛에 그을어서 짙은 갈색이 된 몸통에 땀을 번들거리며 그들은 일을 했다. 땀에 젖어가는 그들의 몸통에 햇빛이 녹아 흐르는 것을 바라보며 그때 경미는 어쩌면 저들은 지금 자신이 태엽을 감아주면 움직이는 인형일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했었다. 그들의 벗은 몸은 조금도 그것이 사람의 피부라는 생각이 늘지 않았고 또한 야만적이지도 않았다.

그 자동인형들이 화려한 변신을 한 것은 비가 내리던 날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삐걱이기 시작하는 그들의 기계소리가 그날은 들리지 않았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작업장은 텅 비어 있었다. 쌓아 놓은 블록더미 위에도, 모래에도, 바둑판같이 줄을 맞춰서 그들이 말리기 위해 내놓은 벽돌 위에도 빗발이 가득했다. 그들의 숙소, 푸른 천막도 빗속에서 한결 짙은 색깔을 띠고 있었다. 비닐우산을 들고 한 사내가 멍하니 서서 벽돌더미에 떨어지는 빗발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때, 비닐천막 안에서 한 남자가 나왔다, 이제는 얼굴까지 알아볼 수 있는 그는 인부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그는 이제 자동인형이 아니었다, 햇빛에 녹자 흐르는 땀을 번들거리며 끊임없이 같은 동작을 반복하던 그 행위의 노예들이 아니었다. 그는 하얀 바지에 분홍빛 샤쓰를 소매를 걷어 입고 있었다. 길게 나부끼는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그가 우산을 쓴 사내에게 손을 들어 인사를 하고 있는 모습을 경미는 놀라운 부화(孵化)를 지켜보듯 바라보고 있었다, 횐 바지와 핑크 빛 샤쓰로 된 날개를 나부끼며 그는 빗속을 날아서 벽돌공장을 빠져나갔다. 그 동안의 그 오랜 행위의 일정한 반복은 저 비오는 날의 부화, 그 화려한 출분(出奔)을 위해 있었던 것이라고 믿으며 경미는 가슴이 뛰어 무어라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벽돌공장의 빈터에도 안개가 휘몰리고 있었다. 경미는 쌓여 있는 벽돌더미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불꺼진 자신의 방 창이 바라보였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모든 소리는 안개의 벽에 차단된 것같았다, 오래오래 경미는 미동도 없이 앉아 있었다.

갑자기 불빛 하나가 안개와 어둠 속에서 경미의 얼굴에 쏟아졌다. 플래시 불빛이었다. 경미의 눈이 커다랗게 떠진 채 얼어붙었다. 불빛이 한 번 흔들리면서 모래를 밟는 발자국 소리가 한 걸음 두 걸음 다가왔다. 그리고 불이 꺼졌다.

경미는 앞에 서 있는 사람을 쳐다보았다. 그것은 어둠으로 빚어낸 동체(胴體)였다. 사내가 한 걸음 다가서며 플래시를 켰다가 껐다, 잠깐 어둠 속에서 떠올랐다가 사라지는 사내의 구두를 경미는 보았다.

어둠의 동체가 움직였다. 사내의 팔이 나와 경미의 어깨에 얹혀졌다. 경미는 미동도 없이 앓아 있었다, 사내의 손이 경미의 목덜미를 어루만졌다. 사내의 또 다른 손이 나와 블라우스 앞자락을 헤집으며 젖가슴을 움켜잡았다. 경미는 그에게서 마늘 냄새를 맡았다.

 

5. 밤에서 밤으로

 

"입술이 위로 들리고 이가 밖으로 튀어나온 사람은 재앙이 많아. 늙어 죽도록 바쁘기만 하고 실속 없이 다리만 아플 뿐이지. 그러니 부귀가 한 평생 따라오질 않고, 성사와 실패가 또한 많아 되는 일이 없어. 어쩌다 살림을 장만해도 다 허사라. 뜨거운 햇빛 속에 서리가 녹듯 하지."

"웬 안개가 이렇게 심하담,"

"그래도. 남자가 하정이 짧고 상정이 길게 생기면 필시 고관이 되어 임금을 모시게 되거든."

"엄마. 요새 세상에 임금이 어딨어."

경혜가 텔레비젼을 바카보며 말했다. 윤씨는 천천히 일어섰다. 경혜가 텔레비젼의 볼륨을 높였다. 경순이 물었다.

"인숙이 얘는 자는 거야?"

"그렇나 보다."

"그러니 살을 거느리지, 기집애."

"이십대에 몸에 살이 너무 많으면 그건 죽을 날 받아놓은 거나 같댄다. 이십지상비면 정사라."

윤씨는 부엌으로 걸어갔다. 환기통 속의 소주는 이미 바닥이 난 지 오래였다. 윤씨는 드르륵 소리가 나게 부엌문을 닫았다. 큰 키를 구부정하게 구부리며 그녀는 부엌 구석에 세워진 쌀통의 뚜껑을 열었다. 쌀통 속을 휘젓는 그녀의 손에서 하얗게 겨가 묻은 술병이 들려져 나왔다. 흘끔 뒤를 돌아보고 닫힌 부엌문을 눈으로 확인하며 윤씨는 술병을 땄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병의 윗부분에 금을 그었다. 고개가 젖혀지고 그녀는 술을 들어붓는다. 고개를 바로 했을 때, 윤씨의 손에 들린 술병에는 정확하게 그녀가 손가락으로 그었던 금 부분에서 술이 찰랑거리고 있다. 윤씨의 얼굴에 번들거리며 웃음이 떠올랐다간 사라져갔다. 병은 다시 쌀통 속으로 들어가고 윤씨는 수도 물을 틀어 쏟아지는 물줄기에 겨가 묻은 손을 들이밀었다.

경미가 방을 나와 창가에 있는 의자에 가 앉았다. 등받이가 높은 흔들이 의자다. 커튼을 치지 않은 유리문이 창 밖의 어둠으로 해서 거울처럼 거실을 비쳐주고 있다. 윤씨가 들어서다가 경미를 보고 중얼거렸다.

"일찍 좀 오지 그랬니."

경미가 고개를 돌렸다. ? 경미는 눈으로 물었다.

"오늘은 아버지가 오실 게다,"

경미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경혜도 경순도 말이 없다. 경미가 말했다.

"소리 좀 줄일 수 없니?"

경혜가 말없이 텔레비젼의 소리를 줄였다. 윤씨는 공연히 손을 비비고 앉아 있다.

"눈알 튀어나올라. 안주이출이면 악인연이랜다. 살림을 도맡아하면 논밭을 팔아먹어."

"코가 튀어나오면?"

화면을 지켜보며, 경혜가 등뒤의 윤씨에게 말했다,

"코뼈가 나오면 반음이고. 굽어들었으면 복음이지. 반음이면 멸방하고 복음이면 눈물 마를 날이 없댄다. 문장(文章)이 되어 십 년을 지내도 벼슬길이 열리질 않아."

"배꼽이 튀어나오면?

"배꼽이야 육부(六腑)를 거느리는 문인데 뱃속에 들어가 있어야지. 배꼽이 튀어나오면 그건 사람이 천한 거지."

"뭐 또 튀어나을 거 없나?"

윤씨가 입맛을 다셨다. 어둠 속을 내다볼 뿐 경미는 움직이지 않는다

경혜가 말했다.

"돈 좀 있수?"

"내가 무슨 돈이 있니."

경순이 펄쩍 뛴다.

"누가 언니보고 물었나. 엄마 말이야."

"난 또,,,,, 난 돈 없다. 내가 무슨 돈 있는 사람인 줄 아니,"

"언닌, 돈 뒀다 뭘 하려구 그래?"

"얘좀 봐. 돈이 인격이야 얘, 양반이 따로 있는 줄 아니, 돈 있으면 양반이다."

"언니 그럼 쌍년이구나."

"뭐라구?"

"돈 없다면서, 언니."

말해놓고 나서 경혜는 고개를 발딱 젖혀 주먹으로 턱을 괸다. 윤씨가 물었다.

"돈은 뭘 하게?"

"쓸려구."

"넌 돈 쓰고 살 생각은 마라. 팔다리에 살이 없으면 궁한 걸 면치 못 해."

"엄마 앞으로 마늘 먹지 마."

경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뭐라구?"

경미는 대답이 없다. 경순이 불쑥 말했다.

"남북통일이나 좀 빨리 안되나."

"땅 장사 하게?"

그래. "

"마찬가지야."

경혜가 종알댔다.

"마찬가지는 얘. 터가 넓어도 어디냐."

"그때라고 세금 없어지겠어?"

"허긴 얘,,,,,"

"언니는 천당 갈 표가 나온대두 그걸 프리미엄 붙여서 팔 거야, 그치?"

"대문이 안 걸렸나?"

중얼거리며. 윤씨가 구부정하게 일어섰다.

"무슨 덜컹거리는 소리 나는 거 같지 않니?"

"아뇨."

"못 들었어."

경미는 말이 없다. 윤씨는 거실을 나왔다.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선 그녀는 엄청난 안개에 흠칫 걸음을 멈췄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안개 속을 윤씨는 더듬더듬 걸어서 대문 앞에까지 갔다. 그녀의 손이 우편함을 더듬어 잡았다. 갈색의 양주가 병 밑으로 조금 남아 있다, 윤씨는 술병을 들어 아끼듯 한모금 마셨다. 고개를 젖힌 그녀의 눈에 담벽 위의 외등이 뿌옇게 들어왔다. 부르르 몸을 떨며 윤씨는 또 한 모금을 마셨다.

안으로 들어온 윤씨는 경순이와 경혜가 앉은 등뒤 쪽에 팔베개를 하고 모로 누웠다. 경미가 흔들의자를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난 무용가가 되려고 했지."

윤씨가 손바닥으로 입술을 닦으며 말했다.

"왜 하필 무용가야? 다리가 길어서?"

"아니다, 그런데--- 그만 다리를 앓았지 뭐니. 다리는 안 되니까 그럼 손으로 하자, 그래서 그 다음엔 피아니스트가 되려구 했지. 그랬는데 손가락이 짧아서 안 된다더구나."

경미의 흔들의자가 갑자기 움직이기 시작했다. 경미는 앞뒤로 흔들리는 의자에 몸을 묻고 중얼거렸다.

"오늘밤은 참 좋군. 저 안개를 좀 봐."

윤씨도 경해도 경순이도 멍하니 경미를 쳐다보았다.

"--- 밤이 참 좋아."

"눈 뜨고 졸고 있으신가,"

경혜가 말하며 고개를 돌렸다. 경순이 목소리를 높였다.

"얘는 얘, 밤이 뭐가 좋니 좋긴."

"밤이 없었으면 어땠을까."

경미의 의자는 조금 천천히 흔들렸다.

"마찬가지야."

경순이 말했다.

"없으면 뭐가 어떻니, 좋기만 하직. 자고 싶으면 커텐 치고 자면 되고. 도둑놈 새끼들 없어지고. 전기세는, 또 얼마나 드는지 아니 얘. 이게 뭐니. 밤만 되면 깜깜하고 칩칩하고."

경미가 말했다.

". 얼마나 그윽한지. 부드럽고, 깊고, 한없고."

탤레비젼을 끄며 경혜가 조잘댔다.

", 살기 싫어."

"내일을 끔지게엘 나가서 한번 다시 알아보고 전()이든 임()이든 산다고 해야겠다. 에이그 세상은 이빨만 튼튼하면 돼. 먹고 보는 거야. 지가 안 씹고 어쩔 거야."

"저게 무슨 소리냐?"

"엄만, 지하철 가는 소리잖아.

"소리가 왜 저렇니?"

"안개 때문이겠지. ."

"밤은,,,,,, 먼 곳도 가까이 오게 하고, 잃어버린 것도 되돌려주고, 남아 있는 사람도 떠나게 하고---"

", 넌 운명선을 보면 중년에 조심해야겠드라."

"손금 말유?"

"그래. 운명선이 처음엔 있다가 떨어지고 감정선 부근에서 새로 뚜렷하단 말이야. 또 태양선은 긴데, 보조선이 역시 감정선 부근에서 생기지 않았니. 게다가 화성평원에 잔금이 많잖니. 넌 초년엔 잘살다가 중년에 실패하고 오십 전후 되면 다시 성공할 수상(手相)이란다."

"하여튼, 오래 살기만 함 되겠네, 그럼."

경순이 일어섰다.

", 갈래."

윤씨가 따라 일어섰다. 경혜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잘 가, 언니,"

경미가 말했다.

", 안 나가."

윤씨와 경순은 밖으로 나왔다. 짙은 안개 속을 헤치고 대문 앞에 나와 서며 윤씨가 말했다.

"아버지는, 늦게라도 오실 거야, 그러실 거야."

경순은 대답이 없다. 윤씨의 얼굴을, 안개 속을 날아가 비추고 있는 잿빛과 보랏빛이 뒤엉킨 윤씨의 얼굴을 잠깐 바라보다가 경순이 몸을 돌렸다. 대문이 닫히고 경순은 발소리도 없이 사라졌다. 집이 땅 밑으로 기우뚱거리며 빠져 들어가다가 출렁거리는 안개 위로 솟아오른다. 윤씨는 우편함 속으로 손을 들이밀어 술병을 꺼냈다. 바닥을 겨우 적시고 있는 술을 그녀는 주둥이를 핥아가며 마셨다.

거실로 돌아온 윤씨는 집안에 있는 여섯 사람을 보았다. 서 있는 자신과, 길게 엎드린 경혜와 흔들의자에서 꼼짝도 않고 있는 경미, 그리고 그들 셋을 비춰주고 있는 거실 유리문의 그림자 셋.

경혜가 일어섰다. 유리문에서도 경혜가 움직였다. 그녀는 방엘 들렀다 나와 화장실로 갔다. 문을 잠그고 경혜는 세면대의 수도를 틀었다. 몸을 구부리고 그녀는 피묻은 패드를 뽑아 변기에 버렸다. 새것을 갈아차고 나서 경혜는 변기의 꼭지를 눌렀다. 붉게 번지던 핏물이 휘돌다가 쓸려 내려갔다. 변기 속은 다시 하얗게. 투명해졌다. 거실로 돌아온 경혜가 말했다.

"."

경미는 의자에 앉아 등을 보이고 있을 뿐이다. 유리문에 비쳐진 경미가 경혜를 바라보고 있다. 윤씨가 말했다.

"아버지 오시면 깨워 줄께. 아버지는 늦게 오실 지도 모르지."

"괜찮아."

?"

"다 마찬가지야. "

경혜가 방으로 들어갔다. 경혜와 유리문 속의 경혜가 사라졌다. 윤씨가 갑자기 일어서며,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코를 흠흠거렸다.

"이게 무슨 냄새냐. , 너는 무슨 냄새 못 맡겠니?"

"아니."

"맞아. 이거 까스가 새나 보다. 부엌에서 까스가 새는 냄새야."

윤씨는 부엌으로 갔다. 문을 닫고 돌아서서 그녀는 쌀통을 열었다. 손목까지 쌀겨가 묻은 손이 허옇게 쌀겨를 뒤집어쓴 술병을 꺼냈다. 고개를 젖히고 술을 들어붓던 그녀가 한번 비틀거렸다. 병 뚜겅을 닫으며 윤씨는 벽에 기대섰다.

"오늘은 너무 일찍부터 마셨어. 너무 일찍 시작하면 너무 많이 마신단 말야. 그러면 취해. 과음이 된단 말야. 내일은,,,,,, 내일은 진로로 시작해서 진로로 끝내야지. 맞아, 섞어도 안 좋거든. 그저,,,,,, 오전에는 진로의 진자까지만 마셔야지. 로자 부근까지 갔다간 과음이 된다구."

윤씨는 부엌을 나왔다, 그녀는 거실로 오며 정원의 외등을 켰다. 안개가 가득 찬 정원이 희뿌옇게 되었다

거실로 돌아온 윤씨에게 경미가 물었다.

"밖이 왜 저래요?"

"불을 켰다."

경미가 몸을 돌려 윤씨를 쳐다보았다. 윤씨가 말했다.

", 넌 모르지. 목련이 지고 있단다."

"새요?"

"난 아침에 그걸 보았어. 꽃이 지는 걸 보았단다."

"새냐니까?

"뭐라구?"

"개스가 새냐니까요? 부엌에서 말예요."

", 아니. 아니야."

경미가 몸을 바로 했다. 그녀 뒤로 다가온 윤씨는 희뿌연 유리문 밖을 내다보았다. 안개뿐, 목련은 보이지 않았다.

"너희들은 아무도 믿지 않는구나."

"뭘요?"

"아버지는 오실 거야. 아버지는 늦어도 오시니까. 벌써 저기 와 계실 지도 모르지. 초인종이 울리고, 그리고 대문 흔드는 소리가 들리겠지. 아버지는 언제나 그 둘다를 하시니까. 초인종이랑, 대문 흔드는 거랑."

경미가 일어섰다.

"엄마."

"?

"엄마는 목련이 필 때부터 아버지가 오실 거라고 했어."

"그래. 그러니 오실 거야."

이제 들려올 초인종소리에 귀를 기울이듯 윤씨는 안개 속을 바라보았다. 유령처럼 백목련은 안개 속에 떠 있었다. 그러나 윤씨는 보지 못한다.

경미가 일어섰다.

"오늘이야, 오늘은 오실 거야."

"열두 시가 넘었어요."

"그래, 오늘."

"그건 어제예요."

"오늘 오신다니까."

"조금 전엔 7일이었어요. 그리고 이젠 8일이에요. 어제라니까요."

"누가 아니라니, 오늘이라니까. 오늘은 오신다니까. 얘는, 내가 술 취한 줄 아니."

경미는 윤씨의 얼굴을 오래오래 바라보고 서 있었다.

"오늘 오실 거야. 아버지는 늦게라도 오시니까, 들어가 자렴. 아버지가 오시면 깨워줄께."

경미는 돌아섰다. 윤씨는 등뒤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었다. 안개 가득한 어둠 속에서 목련꽃이 하나 떨어진다. 나비가 내려앉듯이. 떨어지던 목련꽃이 다른 꽃송이를 건드린다. 힘없이 밑둥이 부러지며 다른 꽃도 떨어진다. 이제 안개는 움직이지 않는다.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