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비늘
비 늘 -한수산
상영 시간 중인 극장 휴게실은 텅 비어 있다, 감색 제복을 입은 판매원 여자애들이 두 셋 앉아서 떠들고 있을 뿐. 간간이 장내에서 음악 소리가 흘러나온다. 입장하는 손님들이 문글 열면 쏟아져 나왔다가 문이 닫히면 이내 사라져 버리는 소리들. 작게 토막처진 그 소리들은 텅 빈 극장 복도며 휴게실을 헤매다가 어디론가 사라진다.
맞은 편 벽에 걸려 있는 외국 배우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녀는 하나하나 눈을 맞추어 나간다. 저 남잔 군복 입은 게 멋 있드라. 이름이 뭐였드라. 저 여잔 눈이 참 커, 조그맣게 오므린 입술만 해. 저 남자 가슴의 털은 노란 색일까. 머리가 은발이잖아. 머리가 은발이면 그 털도 은빛일 거라는 생각을 하며 그녀는 터 놓은 샤쓰 앞단추 사이로 내비치는 남자의 앞가슴에 잠시 머물던 눈길을 다음 사진으로 돌린다. 저 여자는 참 크고 둥근 힙을 가졌다. 남자들은 왜 구형(求刑)에서 욕망을 느낄까.
저 남자의 콧수염을 기른 미소에서는 달콤한 냄새가 나. 키스를 할 때 간지럽지는 않을까 몰라. 글쎄, 어떨까. 나는 아직 수염을 기른 남자와 입을 맞춰보진 못했어.
사진 하나하나를 바라보다가 그녀는 사진 속에서 이미 죽어 버린 배우가 네 명이나 있음을 알아낸다. 배우들은 전부 여덟이다. 죽어 있는 반 수의 사람들, 죽은 자의 입술을 달콤하게 느끼다니.
그녀는 손을 뻗어 옆에 놓아둔 쇼울더 백을 더듬듯 잡는다. 안에 든 물건을 확인하기나 하는 것처럼.
그녀는 일어선다. 백을 어깨에 걸고 아래층으로 내려오던 그녀는 갑자기 입구의 유리문을 통해서 비쳐드는 햇살에 현기증을 느끼며 고개를 쳐는다. 투명한 가을빛이 극장 안으로 넘치고 있다.
계단의 수효를 세기라도 하듯 조심스레 아래층으로 내려온 그녀는 주머니에서 동전을 찾으며 매점으로 다가간다.
"껌 한 통 주세요.”
인조 속눈썹을 손거울에 비춰보던 점원은
"네?"
거울을 내리며 되묻는다. 그녀는 동전을 내민다.
"껌 하나 달라구요.”
점원이 내주는 껌을 받으며 그녀는 아가씨의 성형 수술한 쌍꺼풀 자국이 별로 잘된 수술이 아니라고 언뜻 생각한다. 어디 싸구려에서 했나 봐.
돌아서는 그녀의 눈길이 옆에 있는 인주빛 전화통에 붙잡힌다. 다가가서 그녀는 천천히 다이얼을 돌린다. 신호가 두 번 울리고 나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네, 업무괍니다.”
"나야."
그녀는 조그맣게 말했다.
"여기 어딘지 알아? 극장이야.”
"극장? 무슨 극장?.”
"그냥 들어왔어. 갈 데도 없고.”
"집에 있으라 그랬는데 왜 나와서 돌아다녀.”
"괜찮아. 나 아무렇지도 않아. 6시랬지?”
"5시 반쯤 그리로 나와. 돌아다니지 말고.”
"알았어.”
"자꾸 전화하지 마.”
"자꾸는 뭐 첨인데.”
"하여튼 이따가 봐.”
그녀는 돌아서서 의자에 와 앉는다. 입구와 등지고. 다섯 시 반. 시간은 길게 그녀의 앞에서 꿈틀거린다. 헤엄쳐 건너가기엔 너무 폭이 넓은 강물 같다.
그녀는 껌을 까서 씹기 시작한다. 혓바닥에 스미는 단맛이 울컥 비위를 건드려서 그녀는 뱉아 낼까 어쩔까 엉거주춤 일어서다가, 그냥 씹지, 좀 있음 가라앉을 거야, 하며 다시 자리에 앉아 버린다.
맞은 편에 다음에 상영할 영화의 선전 포스터가 커다랗게 붙어 있다. 모래 위를 걸어오고 있는 남녀가 거기 있다. 남자의 팔이 여자의 어깨를 안고 있는 뒤쪽으로 그들의 키가 점게 바다가 푸르다. 그들은 가까이 더 가까이 걸어온다.
그녀는 남녀의 발자국에 맞추듯 사진에 눈을 박은 채 껌을 씹어나간다. 저 남자가 더 가까이 오면 그의 가슴팍에 물기가 남아 있는지 어떤지 봐야지, 생각하며 그녀는 사진 속 여자가 된다, 그녀가 사진 속 여자보다 빈약한 몸을 가졌듯이 그도 사진 속 남자보다 조금 더 작고 조금 더 말랐다. 그의 가슴에 물기가 남아 있다는 것도 그들과 다르다. 그리고 지금이 캄캄한 어둠 속이라는 것도,,,,,,
그녀는 남자의 혀가 귓속을 핥아내기 시작했을 때 잠시 눈을 떴다. 어둠이 한없이 큰 휘장이 되어 그녀를 가려주고 있었다. 조금씩 가빠지는 남자의 숨소리를 들으며 손을 들어 남자의 어깨와 허리를 감았다. 모래알이 손에 집혀졌다. 허리에는 더 많은 모래가 묻어 있었다. 그녀는 남자의 몸에 붙어 있는 모래알을 찾아 손바닥으로 문질러 떨어뜨려 가면서 그 한 알 한 알의 모래알 만큼씩 자신의 몸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모래가 꼭 비늘 같애. 비늘, 번득이는 비늘을 하나하나 떼어내는 거야, 살만으로 만나는 거야, 비늘이 다 떨어진 고기는 어떻게 될까. 모래 위에 올려진 고기들 말이야. 흐늘거리는 살 속으로 모래가 파고들겠지, 뜨거운 모래가 바닷바람이 습기를 품고 비릿하게 콧속으로 스며드는가 했을 때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을 다시 덮어왔다. 그리고 갑자기 하체가 끊어져 나가는 듯한 통증이 다가와서 아,,,,,, 그녀는 남자의 허리를 으스러져라 안았었다. 아. 남자의 입에서도 비명 같은 가느다란 외침이 새어나왔다. 아픔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그녀가 입 속으로 들어와 있는 그의 혀를 물었던 것이다.
입 속 가득 갈려진 혀가 들어 있는 것처럼 느껴져서 그녀는 울컥 구토를 느낀다. 입 속에 든 것을 뱉아내려고 하는 순간 그녀는 그것이 끊겨진 혀보다는 아주 작고 부드럽다는 것을 안다. 퍼뜩 그녀는 자기의 손바닥을 펴 본다. 거기 모래알이, 떨어진 비늘이 붙어 있기라도 하듯.
비린내가 울컥 그녀의 속을 뒤집어 놓는다. 토해 버리고 싶은 충동으로 여자는 의자에 앉은 채 상체를 숙이며 입을 감싼다. 오래오래. 겨우 고개를 든다. 이마에 땀이 배어난다.
그해 여름은 커다란 고기와 같았다. 검은 비늘을 번득이며 나자빠져 있던 여름. 아스팔트를 녹아 내리게 하던 무더위는 기진해 있는 고기가 토해 내는 숨결처럼 그들을 지치고 목마르게 했었다. 집으로 돌아오면 몸에서는 소금이 묻어나곤 했다. 찬물을 부으며 바라보는 젖가슴에는 유두가 말라붙은 비늘처럼 까맣게 붙어 있었다. 그리고 바다에서 돌아왔을 때, 도시는 태연했다. 아무 것도 달라질 수 없다는 덧을 모르고 새벽에 도주하는 작부처럼 이 도시의 여름을 떠났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돌아오면서 왜 이 도시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 그렇게도 낯설고 억울하게 느껴졌는가.
그때 갑자기 극장 안이 수선스러워지는가 하자 문이 열리며 사람들이 쏟아져 나온다. 이 소란 속으로 길게 부자가 울린다. 영화가 끝났구나.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 누군가를 찾으려는 것처럼 그녀는 일어선다. 그리고 그들에 묻혀서 극장을 나온다.
계단을 올라가니 닭장 같은 쇠망이 눈에 들어오고 그 건너편에 앉은 남자가 보인다. 벽에는 소지품을 주의하라는 내용의 글이 붉은 색과 검은 색으로 서툴게 쓰여 있다. 그녀는 쇠 창살 앞으로 바싹 다가간다. 마른 얼굴의 남자는 안경너머로 그를 흘깃 바라볼 뿐 다른 말이 없다.
"여기, 전당포 맞죠?”
“예.”
"뭘 좀 잡힐까 해서 왔는데요.”
남자는 또 흘깃 그녀를 쳐다본다
"뭡니까?”
“반지에요."
"어디 봅시다.”
남자는 비로소 그녀의 얼굴을 바로 쳐다본다. 조그만 눈이다. 그녀는 백에서 금반지 하나를 꺼내어 창살 아래쪽에 나 있는 작은 창구로 들여민다,
남자는 반지를 받아 외형을 들여다보더니 달그락거리며 저울을 꺼내든다. 그리고 설합을 열어 안경을 찾아 쓴다. 저울에 반지를 올려놓는다. 순간, 그녀는 발끝부터 부끄럽다. 그녀 자신이 발가벗기워 져서 저울판에 올려 놓여지고 이 구석 저 구석 그의 눈에 핥아 보여지기라도 하듯.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벌리고 서 있던 다리를 오므린다. 그 반지를 마련하기에 여섯 달이 걸렸고 두 주일 후면 어머니의 생일이라는 사실이 한 순간에 그 금반지를 퍼렇게 변색시키고, 반지의 중량보다 더 무겁게 그녀의 마음에 자리했던 (딸)이라는 자랑스러움이 부끄러움으로 모습을 바꿔 버린다.
남자는 몇 번이고 저울눈을 확인하고 있다. 그녀는 창살 안 쪽을 살펴본다. 캐비닛, 달력, 월정표가 있는 작은 흑판 하나. 그런 것들을 더듬어가던 그녀의 시선이 한 쪽 구석 블라인드를 반쯤 올린 창가에 가서 멈춘다. 하얀 수반에 이름을 알 수 없는 꽃이 몇 송이 꽂혀 있다. 여기 저기 칠이 벗겨지고, 손길이 닿는 곳에는 꺼멓게 손때가 묻어 있는 벽이 만들어내는 어둠을 힘겹게 견디기라도 하듯 갈대와 함께 꽂혀 있는 몇 송이 꽃에는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무심하게 얹혀 있다.
"얼마나 쓸겁니까?"
"글쎄요. 얼마나 주시겠어요?”
"세 돈인데,,,,,, 금값이야 뻔한 거니까, 얼마나 쓰실라구?”
"많이 주시면 좋죠. 급한 일이 있어서 그래요.”
그녀는 속으로 뇌까린다. 흥정은 여자와 속성인가. 남자는 무슨 적선이라도 하는 듯한 어투로, 에또-, 에또- 를 연발하면서 금액을 말한다.
"좀 더 안돼요?
"많이 드리는 겁니다. 다른 대선 4할 주는 데도 있어요.”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서 그래요. 금방 찾아갈 텐데요, 하려다가 그녀는 입을 다문다. 전당포야 이자 먹고 사는 델 탠데 오래 두면 더 좋아할 걸.
“할 수 없죠 뭐, 그거라도 주세요.”
뭔가 딱딱하게 맺힌 것이 목을 타고 복받쳐 오르려 한파. 그 눈길이 창가의 수반에 꽂혀 있는 갈대에 가셔 머문다,
"도장 내놓으십쇼. 증명이랑.”
창구로 도장을 들여미는 손티 자기의 것이 아니게 낯설고 추악해 보여서 그녀는 얼른 손을 당겨 주머니에 찔러 넣는다.
기름 냄새가 속을 뒤집어 놓는다. 차가 회전하느라 몸을 옆으로 쏠리게 한다. 내려야겠다, 안 되겠어. 할 때는 이미 늦어 있다. 윙하는 현기증과 함께 꾸역꾸역 목을 타고 넘어오는 것이 있다. 앞좌석의 등받이에 이마를 기대며 그녀는 택시 바닥에 울컥울컥 토해낸다. 아주 많은 것을 게운 듯했으나 그녀가 쓰려오는 눈알을 비비 닦으며 눈을 떴을 때 바닥에는 노오란 물이 얼마쯤 토해져 있을 뿐이다. 혀를 빼버리고 싶도록 입안이 쓰디쓰다.
택시를 타고 가야할 곳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전당포를 나왔을 때, 밖은 너무나 밝았다. 칼날처럼 빛나는 햇빛에 맞아 사람들은 팍팍 거꾸러져 가는 것 같았고 서 있는 것은 자기 뿐이었다. 아스팔트에도 건너편 건물의 유리창에도 햇빛은 부서져 내리고 있었고 가을 볕은 유리알처럼 잘디잘게 부서지면서 그녀를 에워싸는 듯했다. 그녀는 그 유리조각들을 피해 쫓겨가면서 손을 들어 택시들 세웠었다.
"여기서 내려 주세요, 아무 데나,"
운전수는 백밀러로 그녀를 바라보며 차를 세운다, 그의 눈치를 살폈지만 아마 그는 뒷좌석에서 토해내고 있었던 그녀를 보지 못한 것 같다.
그녀는 돈을 꺼내 운전수의 등 쪽으로 내민다. 운전수가 거스름 돈을 찾는 사이 그녀는 신문지를 꺼내 자기가 토해 놓은 것들 위에 펼쳐놓고 차를 내린다.
고궁 앞이다. 입을 가셔야만 살 것 같다. 다방도 눈에 띄지 않는다. 그녀는 고궁을 향해 흐트러진 걸음걸이로 다가가 입장권을 사 가지고 안으로 들어간다. 한 손으로 입을 가린 채, 곧장 걷는다. 음료수대가 어디쯤 있는가를 알고 있는 자신이 그녀는 고맙다.
총구처럼 나와 있는 수도꼭지를 입에 물고 그녀는 물을 받아 입을 가셔댄다. 한 번. 두 번, 다시. 입에 물을 물고 그녀는 고개를 든다. 어르르르. 입 속에서 물을 굴리며 바라보이는 하늘이 높고 푸르다. 왈칵 물을 뱉아 내고 그녀는 입가를 닦는다.
아, 살 것 같다. 그녀는 겨우 눈을 들어 고궁 안을 둘러본다. 사람들이 붐비고 있다. 눈에 띄는 사람들 모두가 혼자가 아니다. 둘씩, 셋씩. 여럿이서 저들은 웃고 있다. 이 안에 혼자인 사람은 나뿐인가 보다. 여자는 천천히 안으로 걸어 들어간다.
풍선을 든 어린애가 뛰어간다. 그 모습을 보며 서 있는 어머니의 얼굴이 보인다. 젊은 여자다, 행복해요! 하는 말이 그 얼굴에서 분가루처럼 날린다. 아니다. 그렇게 보인다. 한 무리의 여학생들이 걸어온다. 까르르.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그녀들은 아주 멀리 이 쪽에서 걸어오는데도 그 웃음소리가 귀를 헤집고 들어와 뒷골을 송곳으로 찌르는가 하자 그녀는 쿡쿡 쑤시는 두통을 느끼며 미간을 찌푸린다. 그 자리에 주저 앉고 싶을 정도로 갑자기 다리에 힘이 빠진다. 그녀는 어디든 앉을 곳을 찾으려고 두리번거린다. 벤치에 혼자 앉아 있는 노인이 보인다. 그곳까지 걸어가는 동안이 참혹할이만큼 길다고 느껴질 때, 그녀는 겨우 벤치에 다다른다. 앉는다.
휜 나무를 펴 듯 조심스레 그녀는 몸을 펴서 등받이에 몸을 기댄다. 고개를 젖힌다. 그러나 그런 자세로 머리를 기대고 있기엔 벤치 등받이는 너무 낮다. 천근의 무게를 지닌 머리를 버티고 있기에는 목은 너무 가늘고 허약하게 느껴진다. 마침내는 휘어져서 이마가 앞으로 떨어질 것만 같아서 그녀는 자세를 바로 한다. 몸을 곧게 펴고 발을 가지런히 놓는다. 길게 한 번 숨을 들이마신다. 가슴이 조금 편해지는 듯싶다.
은행잎이 물들고 있다. 아직은 푸른 빛이 더 많은 나뭇잎을 그녀는 가만히 바라본다.
환각인가. 은행잎이 하나 끈에 매달려 있기라도 한 양 소리 없이 떨어진다. 땅에 떨어지는 은행잎으로 여자의 눈길이 따라간다. 눈이 가 닿는 것과 동시에 은행잎을 집어드는 손이 있다. 여자다. 집어든 손이 곁에 선 남자에게로 은행잎을 내밀며 웃는다. 그들이 발리 지나가 주기를 바라는 그녀의 마음 저편에서, 은행잎을 집어들어 그의 코끝에 대어보는 그녀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녀는 다시 나무를 쳐다본다.
그녀의 앞으로 은행잎이 또 떨어진다. 이번에는 하나가 아니다. 또 떨어진다. 꽃비가 내리는가. 떨어지는 은행잎이 빗발처럼 흩날린다. 소리 없이 내리는 그 황금의 비는 그칠 것 같지가 않다. 땅을 덮고, 벤치를 덮고, 그녀의 구두를 덮으며 떨어진 은행잎은 노오랗게 금빛의 파도를 이룬다.
아-그녀는 가느다란 비명을 울리며 고개를 든다
웬 아이 하나가 그녀의 앞에 서 있다. 호기심이 어린 눈이 새카맣다. 그녀는 손수건을 꺼내어 이마의 땀을 찍어낸다.
"가아, 뭘 보니. 가라니깐.”
아이는 뛰어가 버린다. 왜 이렇게 현기증이 날까
그녀는 다시 은행나무를 쳐다본다. 바람이 없는가. 흔들리는 잎도 없다, 황금빛, 나는 왜 금빛 속에서 죽음을 느낄까. 그리고 금빛은 왜 행복이라는 이름으로 떠오를까, 내가 이제 금빛의 반지를 팔아 사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금으로 붕어를 만들며 살고 싶었어요, 전. 황금의 지느러미를 만드는 거예요. 너무나 얇아서 투명하게 보이는 그런 지느러미를 말이예요. 황금의 내장을 만들고 황금의 허파를 만들고 금빛 찬란한 비늘을 만드는 거예요. 금빛 심장에서는 조금씩 조금씩 피가 퍼져나가요. 실핏줄만이 그 투명한 금빛 사이를 헤집고 다니는 거예요. 그게 제 꿈이었어요. 보얗게 연기처럼 퍼져나가는 금빛의 그 둘레를--- 아시겠어요?
옆에 앉았던 노인이 일어난다. 그녀는 노인의 가슴에서 삼베를 접어 만든 리본을 본다. 노인이 상장(喪章)을 달다니. 함께 가지 않고 누굴 먼저 보냈을까. 노인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약간 굽은 허리, 약간 벌어진 다리, 갈색의 모자 뒤로 머리카락이 더부룩하다. 9월 하순의 햇살이 그의 목덜미를 기어오르고 있다. 노인이 단 삼베의 상장. 삼베. 삼. 삼. 삼과의 일년생 경작 식물. 원산지는 중앙 아시아. 줄기에는 털이 있고 고랑이 패어 있다. 잎은 어긋나며 잎자루는 길고 잎 몸은 손바닥 모양이며 겹잎이다. 꽃은 암수 딴 그루. 수꽃은 황록색으로 원추형. 5월에 핀다.
"부장님, 저 며칠 못 나오겠어요.”
"왜? 무슨 일이 있어?”
"고향엘 좀 다녀와야겠어요. 어머니가 편찮으시대요.”
"그래? 거 대단하신 모양이군. 그래서 미스 오 안색이 요즘 안 좋았군, 그래. 가 봐야지. 염려말고 다녀와.”
"죄송합니다.”
"죄송하긴. 참 미스 오는 아버지가 안 계신댔지?”
“네.”
"어머니가 편찮으시다는 연락이 왔음 가 봐야지. 그런데, 재교(再校) 어디까지 나갔지?”
"삼까지 나갔어요.”
"삼?”
"네. 삼과의 일년생 경작 식물.”
"삼이라, 알았어. 미스 정한테 넘기고 가도륵 해.”
"가능한대로 빨리 오겠어요.”
"그래주면 더 좋고. 뭐 그렇다고 무리하진 마=
그녀는 이렇게 앉아 있는 자신이 누구에게 들키기라도 할 것처럼 황급히 일어난다. 좀 쉬어서인가. 몸이 한결 가볍다. 그녀는 동물원 쪽으로 걸어간다. 이 자리, 이 나무들, 저 벤치가 전에는 다 자신의 것이었다고 그녀는 문득 생각한다. 뒷꼍의 모란 밭도, 늦가을의 은행잎도 그리고 볼 때마다 꼭 제과점의 케일 같다고 생각하는 횐 대리석의 미술관 건물도 그 모든 것이 이제는 남의 것이 되어버렸다는 생각에 그녀는 조금 처연해 진다. 왜 어제는 이것들이 내 것처럼 생각되었을까. 아니다. 자신을 가여워하진 말자. 불행은 거기서부터 시작되니까.
동물원에는 독수리나 부엉이 같은 날짐승들이 깎아 놓은 듯 앉아 있다. 아무리 기다려도 새들은 움직이지 않는다. 이 철망 속이 날기에는 너무 좁고 얕다는 것을 이미 알아 버린 것인가. 언제부터 이들은 그 운명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웠을까. 날지 않고 다만 앉아서 살아가는 법을. 어디선가 비위를 상하게 하는 냄새가 난다. 그녀는 다음 칸으로 걸음을 옮긴다. 원숭이들이 몇 칸 연이어 있다. 부스럼 자국 같은 원숭이의 엉덩이가 눈에 들어오자 그녀는 흠칫 고개를 돌린다.
다음 칸에 희고 긴 날개를 가진 새가 있다. 이게 뭐드라. 그녀는 머리 위에 걸린 표지판을 본다. 공작이었구나. 날개가 별로 회지도 못하고 우아하지도 않은 모습이다. 몰락한 왕가의 후손 같다. 공작은 그 긴 꼬리를 땅에 끌며 어슬렁거린다. 날개가 많이 부러져 있다.
갇혀 있는 모든 것이 자기와 같다는 생각을 하며 그녀는 동물원 앞을 떠난다. 글쎄, 모르겠다. 왜 이런 생각이 드는지. 저 때묻고 초라한 것들과 제 마음의 무엇이 닮아 보이는지.
왈칵 다방의 소음이 그녀를 잡는다. 잘못 들어왔어. 다른 델 갈까 봐. 다시 나가려다가 그녀는 그냥 안쪽으로 들어간다.
"나 커피 줘요.”
레지가 내주는 자리에 신문을 보고 있는 남자와 합석하며 여자는 차를 시킨다. 다리를 꼬고 앉으며 시계를 본다. 좀 전에 보았을 때보다 겨우 십 여분을 지났다.
미스 김, 전화. 어서 오세요, 들어가세요, 자리 있어요. 야, 그때 고고장에서 만난 애 있지. 머리 짧은 애 말야. 그 기집애 나만보면 실실 쪼개고 그러드라. 요즘 죽겠어요, 장사 안돼서, 돈이 돌아야 뭘 해 먹죠. 어머 얘가 작은 애예요, 아주, 잘 생겼네요, 엄마 닳았나 봐요. 너 뭐 먹을래, 반숙 먹을래. 박 양, 요새 애인 생겼나, 점점 이뻐져. 얼마? 만팔천 원. 얘 너무 비싸게 샀다 얘, 이까짓 게 뭐가 만팔천 원씩이나 가니.
여자는 주위의 소음 속에서 빠져나가려고 이곳 저곳으로 눈을 돌리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소음을 즐기는 심정이 된다. 다방이 붕 떠오르는 것 같다. 레지가 가져 온 코오피를 내려다본다. 코오피 대신 엽차를 조금 마신다. 코오피 마심 또 속 뒤집힐지 몰라 앞에 앉아 신문을 보고 있는 남자의 시선이 무릎에 느껴진다. 그녀는 꼬았던 다리를 가지런히 모은다. 공중전화가 눈에 들어온다. 비어 있는 공중전화가 통화를 하고 싶은 충동을 일으킨다. 공중전화통 옆으로 어느 외국 항공사의 선전용 포스터가 걸려 있다. 밑에는 꽃이 만발해 있는데 안개에 가려진 산의 정상은 푸른빛을 떤 눈에 덮혀 있다. 그림을 바라보다가 여자는 문뜩 생각한다. 참, 그랑 산에 갔다가, 저 눈빛 같은 하늘을 본 적이 있지.
텐트 속을 빠져 나오니 이미 밖은 다 밝아 있었다. 콧속을 아리게 하며 신선한 공기가 스며들어 왔다. 파커를 몸에 두르고 그녀는 계곡을 내려다 보았다. 안개가 산기슭에서부터 퍼어 올라오고 있었다. 산밑은 안개에 가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발자국 소리에 놀란 새가 하늘로 올랐다. 차갑게 개인 하늘을 새는 날아올라 점점 작아져서 그리곤 보이지 않게 되었다. 하늘은 청아한 푸른빛이었다. 가슴에 물이 드는 것 같았다. 안개 속으로 그가 버어너에 물을 길어 가지고 올라오고 있었다. 우린 사랑했나 몰라. 그랬나 봐. 저녁에 헤어질 때면 블라우스 뒷단추가 하나씩 튿어져 있곤 했으니까. 목의 입술자국 때문에 회사를 하루 쉬기도 했으니까.
엽찻잔을 들었다 놓았다 한 자리에 물기가 남아서 다탁 위에는 몇 개의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다. 식어 있는 코오퍼 잔이 암울하게 어두워오는 가슴을 비춰 준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선다. 차 값을 치르고 밖으로 나온다.
맞은 편 빌딩에 맞아 부서지고 있는 저녁 햇살이 눈을 아프게 한다. 저녁 빛이 창마다 번들거린다. 건물의 창문 하나하나가 안돼, 하며 내미는 손바닥 같다. 거부하는 손짓들이 줄지어 서 있는 것 같다.
그녀는 고개를 젖는다. 아무 것도 아냐. 그냥, 조금 죽었다가 깨어나면 되는 걸 꺼야. 잠을 자면 돼, 아픈 거야 참지. 그런데, 그 생각만 하면 왜 아랫도리가 얼어붙는 것처럼 무서울까.
바겐세일을 알리는 커다란 선전판 밑을 그녀는 걷는다. 백화점 앞이다. 대매출. 나에게는 무엇이든 팔게 없을까. 내 몸, 고객이 있어야 상품이 되지, 이거야 값을 매길 수도 없는 건데. 내 옷, 내 구두. 기성복으로 감싼 젊음. 기성품 같은 내 처녀.
어깨에 맨 백이 조금씩 무거워진다. 그녀는 백을 내려 줄을 손목에 감아 쥔다. 더 무겁지만 그냥 걷는다. 횐 빛이 언뜻 지나간다. 돌아본다.
화방이다. 석고상이 하얗게 창에 진열되어 있다. 마리아 상이 눈에 뜨인다. 고개를 처든 얼굴, 몰래 수태한 여자의 얼굴, 난 언제 봐도 마리아는 예수의 어머니 같지가 않아. 하나도 닮지 않은 어머니와 아들. 마리아는 그의 애인 같애. 사련(邪戀)을 하는 정부 같애. 그녀는 문득, 종교에서는 어딘가 정욕의 냄새가 나, 하고 뇌까린다. 신앙에서 난 왜 발가벗기우고 싶은 욕정을 느낄까. 성경은 피의 냄새로 시작되지. 가장 큰 속죄는 언제나 피에 의해서만 씻어진다면,,,,,. 피로써 씻는 죄. 피로써 짓는 죄. 나는 지금 죄를 지으려 하는 걸까. 씻으려 하는 걸까. 죽지는 않겠지. 그래, 죽기야 할라고. 설마. 설마.
그녀는 시계를 본다. 차를 타기에도 걷기에도 둘 다 적당치 못한 자리에 그녀가 서 있음을 시계는 가르쳐 준다. 그와 만나기로 한 다방과는 반대 쪽으로 걷고 있는 그녀 자신도.
그녀는 멍하니 서 있다. 구두 뒷축이라도 부러져서 이제 그를 만나 해야 할 일을 한 순간 만이라도 피하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을 가지고 그녀는 버스에 오른다. 내려야 할 곳을 지나쳐 왔는데도 그녀는 그냥 앉아 있다. 다리를 지나고 차는 강을 끼고 달린다, 떨어져 가는 잔광이 차창을 통해 들어와 그녀의 발목 위를 기어오를 때, 그녀는 일어선다. 거기서 내리는 손님은 그녀뿐이다.
강바람이 불어온다. 차량들이 곧게 뻗은 길을 질주해 갈 뿐, 사람들의 모습은 찾아볼 수도 없다. 강바람이 머리칼을 흩날리며 지나간다. 수양버드나무 밑을 천천히 걸어서 그녀는 강이 한눈에 바라다 보이는 곳까지 온다. 저녁놀이 부옇게 안개 낀 듯한 하늘가에서 타오르고 있었지만 검고 탁한 강물에는 아무 색깔도 비쳐 보이지 않는다. 결코 흐르고 있는 것 같아 보이지 않는 물결을 내려다보며 그녀는 오래오래 서 있다. 엄마. 하고 그녀는 조그맣게 부른다. 고개를 숙이니 먼지 낀 구두콧등 위로 눈물이 한 방을 떨어진다. 그 자국을 내려다보며 그녀는 움직이지 않는다. 빗을 꺼내 그녀가 머리를 빗기 시작했을 때, 하늘에는 이미 놀이 사라지고 마구 칼질해 놓은 듯한 구름이 어둠에 묻혀 간다,
"안색이 안 좋아. 어디 아파?”
"아노. 괜찮아요.”
"낮엔 뭘 했어. 혼자.”
"그냥,,,,,, 있었어요.”
"지금 어디서 오는 길이야?”
"강에 나갔었어요.”
"왜?”
남자는 말끝을 낮게 하며 묻는다.
"빠져 죽을려구?”
"놀을 봤어요. 바람도 쏘이고.”
"놀이 라니?”
"저녁놀 말예요.”
"뭐하는 짓이야. 지금 그러고 다니면 어떡해.”
"그럼. 뭘 해요.”
"하여튼, 노을 같은 걸 보는 따위는 안 하는 거야. 그게 뭐야.”
"안 될 것도 없잖아요. 놀이야 언제나 있는 건데.”
"그만둬. 이제 와서 우리가 왜 또 싸워야 해. 맘 크게 먹어. 몇 달 안 되었기 때문에 5분, 아니 한 10분이면 끝난대.”
"누가 그래요? 의사가요? 다른 병원에 가 봤어요?”
"아니 내 친구가, 경험 있는 놈이 있는데 그러더군.”
"친구한테 내 얘길 했어요?”
"미쳤어? 잠시 후, 그녀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미안해요. 다 제 잘못이예요. 정말 미안해요.”
"누구 잘못도 아냐. 온수가 사나웠을 뿐야. 둘, 다 재수가 없으려니까 이렇게 꾄 거야. 오늘 정 기분이 내키지 않으면 그만 둬. 다음에 하지 뭐. 아직 석 달도 안 됐잖아.”
"불쌍해요.”
"누가?”
둘은 서로를 바라본다. 서로의 눈빛에서 그게 누구인가를 확인하려는 듯.
"큰일 날 소리하고 있어. 불쌍한 건 우리들이라구.”
"무서워요. 무서워서 죽겠어요.”
"괜찮아. 무서울 거 하나도 없어. 그런 거 하는 여자들이 하나 둘인가. 그저 비늘 하나 떼어내는 것 같은 거야. 그럼 되는 거야.”
아, 비늘. 그녀는 고개를 꺾는다. 남자가 담배를 비벼 끈다. 엽찻잔을 들어 마신다. 그러나 물이 없다. 탁자에 잔을 내려놓으며 남자는 레지를 찾아 카운터 쪽을 바라본다.
"이걸 마셔요.”
그녀가 고개를 숙인 채 엽찻잔을 그에게 밀어보낸다,
"아냐. 됐어.”
"나 싫죠?”
남자는 미간을 찡그리며 고개를 젓는다.
"솔직해도 돼요. 지금의 이런 나 싫을 거예요.”
"좋고, 싫고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 남들도 다 이래. 이렇게 살아. 남들 같은 거--- 통속이라는 거 얼마나 편안하고 쉬운 자린 줄 몰라? 그렇게 살면 되잖아.”
남자는 공허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다시 담배를 퍼워 문다.
"또 담배예요? 그만 피우세요.”
"정말 왜 그래. 죽는 것도 아니잖아.”
"그래요 ,,,,,, 죽는 것도 아니겠죠.”
"싸우지 말자, 왜 우리끼리 싸우니.”
그녀는 고개를 들어 다방을 둘러본다. 실내의 이곳 저곳을 하나하나 확인하는 얼굴로.
"이 다방은 왜 이렇게 지하실 같아요. 어둡기만 하고.”
"아무렴 어때, 내 것도 아닌데.”
"그런 투로 말하지 말아요. 오늘만은.”
그녀는 일어선다.
"나가요.”
"어딜?”
"어더긴 어디예요.”
"괜찮겠어? 잘 수 있겠어?”
그녀는 고개를 끄덕인다. 천천히 남자가 일어나며 웃는 얼굴로 그녀의 팔을 잡는다.
그녀는, 웃고 있는 남자의 입이 조그마한 균열이 되어 점점 커져가면서 허물어지기 시작하는 것을 본다. 금간 벽이 무너져 내리며 그 얼굴 뒤에서 출렁이고 있는 허망함이 캄캄하게 다가온다. 오늘 하루 종일 그녀를 에워싸던 것들, 소음과 먼지와 때묻은 거리에서 낡고 시들어 가면서 그녀를 향해 아니다, 라고 거부의 손짓을 했던 그 많은 것들이 그의 얼굴과 함께 나란히 그녀를 향해 도열해 있다.
남자가 차 값을 치르는 사이 여자는 먼저 다방을 나온다. 우린 아마 살아남을 거예요. 우리들이 공유했던 것마저 찢어서 서로의 것으로 만들어 가면서라도 우리들 각자는 아마 살아 남을 거예요. 비늘이 다 벗겨진 채 모래 위에 내동댕이쳐진 물고기처럼 입을 벌름거리면서라도 그러나 우리는 살아 낼 거예요.
밖으로 나온 그녀는 코우트 주머니에 손을 쩌른 채 서 있다.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남자는 문득 응원가 한 구절을 떠올린다. 싸워서 이겨라, 우리의 용사야. 그러나 그라운드에 서 있던 동료 선수들보다 그녀는 훨씬 가까이에 서 있고 훨씬 초라하다. 거리에는 어둠이 깔린다. 쇼우왼도우의 불빛이 흐늘거리는 거리를 걸어서 별로 크지 않은 3층 건물이 바라보이는 곳을 왔을 때, 그녀는 걸음을 멈춘다. 남자가 그녀를 바라본다.
"왜?”
"아뇨 아무 것도 아녜요. 들어가요.”
걸음을 옮기며 여자는 입 속으로 뇌었다. 그래. 비늘을 하나 떼어내는 것 같을지도 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