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침묵
침묵(沈黙)-한수산
모래를 날리며 바람이 불어와서 우리는 일제히 강변 쪽으로 돌아섰다. 가슴 깊숙이 머리를 처박았다. 길 밑으로는 철책이 쳐져 있었고 그 밑으로 드문드문 푸른빛이 보이는 잔디들이 먼지를 뒤집어쓴 채 덮여 있었다.
바람은 여전히 불어와 우리들의 머리칼을 날리고 옷깃을 펄럭이게 했다. 강물 위에서는 햇빛이 잘디 잘게 부서져 나가고 있었다.
먼지가 들어가지 않도록 가느다랗게 눈을 뜨면서 우리는 서로의 얼굴에서 번들거리는 음모를, 터질 듯한 기대를, 그리고 숨길 수 없이 도사리고 있는 나들이에 대한 불안을 보았다. 그러한 여러 가지 기분이 복합되어 만들어내는 감정의 밑바닥에는 습기 낀 충동들이 도사리고 있었는데 그것은 발바닥이며 겨드랑 혹은 배꼽 근처를 작은 벌레가 스멀스멀 기어다니는 것같이 우리들을 못 견디게 만들었다. 온몸의 땀구멍 하나 하나가 조여오는 것 같았다.
아파트 쪽에서 불어오고 있는 바람은 한순간 길바닥 위에서 회오리치다가 모래와 먼지들을 날리면서 쓸려가곤 했다. 하늘에는 푸른빛이 잘 갈린 칼날에서처럼 돋아나고 있었다. 아득하게 줄지어 선 아파트 위로 퍼부어지고 있는 햇빛에도 푸른빛이 머금어 있었는데, 그것은 백일을 갓 지난 동생들의 흰자위 속에서 보곤 하던 그런 휜 빛과 검은 빛이 은
은하게 배인 색깔이었다.
"버스가 온다."
7호집 아이가 소리쳤다. 수양버드나무가 길을 따라 뻗어 있는 저편 끝에서 버스가 나타났다. 우리는 갑자기 수근거리기 시작했다. 강변을 따라 뻗어 있는 길은 곧고 길었기 때문에 버스는 한동안 길 위에 가만히 서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야, 여섯 명이니까 백 오십 원이다."
"알아. 내가 삥칠 줄아냐."
"거스름 돈 잘 받으란 말야."
우리들은 저마다 바지춤을 치켜올렸다.
"아냐, 이 차를 타면 안 돼."
차가 가까이 다가왔을 때, 우리들 중의 단 하나 계집애가 말했다. 그 애는 3호집 아이였다.
"왜?"
우리는 저마다 3호집 계집애를 바라보았고 그리고 이내 조급한 마음으로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아무 거나 타자."
"안 된다니깐. 이건 시청 앞으로 빠진단 말야."
"내려서 걸어감 되잖아. 까짓 거."
"걷긴 얘, 기다렸다가 제대로 타고 가야지."
"47번이라 그랬지?"
"그래, 그걸 타고 가서 남대문시장서 내리면 돼. 그게 젤 랄라."
우리들이 저마다 떠들고 있는 사이에 버스는 털털거리며 다가와 멈추더니 예비군 하나를 내려놓았다. 우리들 옆에서 기다리던 세 사람이 차에 올랐다. 안내양은 우리들과 눈이 마주치자 화난 듯이 물었다.
"니들 안 탈 꺼니?"
우리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안내양은 가정부 누나처럼 메주볼이 나오고 뚱뚱했다. 가정부 누나를 닳은 안내양이 차 속으로 사라지자 문이 닫히고 차는 떠났다.
대개는 그랬다. 나이가 비슷한 3호나 7호의 누나들은 물론이지만 그보다 조금 나이가 만은 11호의 누나도 허리가 굵고 얼굴에 살이 찌고 서로 모이면 수근거리기를 좋아했다. 또한 누나들은 한결같이 김치거리를 다듬거나 시금치를 손질할 때는 조리대에서 일을 하지 않고 식당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쪼그려 앉기를 즐겼다. 그녀들의 짧은 치마가 들린 사이로 드러나 보이는 사타구니 안쪽은 누나들의 얼굴빛과는 달리 눈부시게 희었다, 그녀들의 앞에 앉아 터질 듯 부풀어 있는 허벅지 안쪽을 바라보자면 우리들은 한결같이 입 속이 메말라 와서, 꺼칠꺼칠해진 입 속을 혀를 굴려 적셔야 했다.
한 무더기의 시꺼먼 매연을 뿜어 놓고 뒤뚱거리며 사라져 가는 차의 꽁무니를 우리는 지친 얼굴로 바라보았다. 빈 택시 하나가 아파트 쪽에서 꺾여져 나왔다. 그때 누군가가 말했다.
"택시를 탈래, 우리?"
그것은 충동을 참아내느라 목이 타는 목소리였다. 우리들은 목소리의 주인공에게 고개를 돌렸다. 얼굴이 노르스름한 2호집 아이였다. 그 소리는 우리들의 가슴에서 뱀의 혓바닥 같은 불길을 날름거리게 했다.
"그럴까?"
"그러자."
"얼마나 나올까?"
엇갈리던 눈길이 7호집 아이에게 가 박혔다. 우리들이 모은 돈이 택시 탈 돈이 되겠냐고 그 눈길은 묻고 있었다. 7호집 아이가 결정했다.
"타자."
그것은 천이 찢어지는 듯한 작고 목을 누르는 목소리였다. 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우리들은 한길로 나서며 저마다 이쪽으로 오고 있는 택시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빈 택시다."
택시가 우리들 앞에 와 섰을 때, 그리고 이미 하나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려 했을 때, 맨 뒤에 서 있던 3호집 계집애가 또 말했다.
"안 돼, 여섯 명이잖아. 택신 다섯 명밖에 못 탄단 말야."
그것은 한순간 풀어졌던 긴장을 다시 일깨웠다.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7호가 운전수에게 물었다.
"아저씨, 여섯 명인데 타도 돼요?
우리들은 7호집 아이의 뒤로 우르르 몰이면서 운전수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뒤에 넷이 타면 되잖아요."
"신세계 가거든요."
운전수는 우리들을 흘끔흘끔 둘러보더니 앞문을 열면서 말했다.
"타라."
두 명이 앞자리에 앉았다. 네 명이 앉은 뒷자리는 비좁았다. 어깨와 어깨를 비버며 앉아 있자니 우리들은 손을 앞으로 묶인 듯했다. 갑자기 목이 길어진 것 같았다. 6호가 조심스쩨 말했다.
"정 말 있을까?"
"있다니까. 내가 봤단 말야. 박카스 통에 넣어서 파는 걸 봤어."
"진짜지?"
"그래. 남자였어. 병아리도 팔고 칠면조도 팔았어. 칠면조 새끼는 조금 씨꺼멓더라."
"오늘도 나왔을까, 그 장사가,,,,,"
3호집 계집아이의 조심스런 의문에 우리는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그것은 우리들 누구나가 이제까지 참아 왔던 말이었다. 미터기제서 요금이 찰카닥 올라갔다.
"하여튼 가 보는 거야."
"그래--- 없어도 할 수 없지."
"있다니까, 있었다니까."
6호집 아이의 목소리는, 칠면조 새끼는 병아리보다 색깔이 검었다고 말할 때보다는 힘이 빠져 있었다. 그는 이미 우리들의 이 나들이가 실패할 경우 책임이 자기에게 돌아갈 것이라는 사실을 조금씩 두려워하고 있었다. 뒤를 돌아보니 아파트는 벌써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이미 너무나도 멀리 와 있었다. 요금이 다시 찰카닥 올라갔다.
그 봄에 우리는 새로운 놀이를 만드는 데 지헉가고 있었다.
우리가 처음 이곳으로 이사를 왔을 때는 겨우 여섯 개의 아파트가 시멘트 냄새를 풍기며 세워져 있었다. 우리는 거의 맨 처음 입주자의 아이들이었다,
주변의 논이며 밭에서는 늦가을의 햇빛을 받으며 풀들이 타들어가고 있었는데, 배추밭에는 푸른빛보다 갈색이 더 짙어서 그것들이 곧 뽑혀져 어디론가 팔려 가리라는 걸 우리는 알 수 있었다. 멀리 끝없이 이어진 비닐하우스는 거대한 비행기의 몸통처럼 은빛으로 빛나곤 했다. 그 옆에는 커다란 똥통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똥통은 거의 풀장만 했다. 거기에서는 시내에서 퍼 온 똥들이 썩고 있었는데 탁하기는 했어도 이미 신선한 구린내를 잃어버린 똥들이었다.
아버지들은 밤에 잠자리에 들 때면 방안에 수건을 걸어 놓거나 쟁반에 물을 부어 방구석에 놓아두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물은 거의 바닥이 나 있었고 수건은 보송보송 말라 있었다.
"이놈의 시멘트가 물을 이렇게 빨아 먹으니. 애들까지 배리배리해질까봐 큰일이군."
아버지들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어느 날 아침 우리는 푸른색과 갈색이 어우러져 한없이 이어진 배추밭에 꺼멓게 흙이 드러나 있는 것을 보았다, 몇 대의 차량들이 그 주변에서 오가고 있었다. 배추가 뽑혀지면서 드러나는 땅에는 거북이 등처럼 가로 세로 줄이 쳐졌다. 그리고 얼마 후 아파트 창문을 조용히 흔들면서 벌판 너머 저 먼 어느 곳에서 우레가 치는 듯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배추밭에는 거대한 캐터필러가 나타났다. 웅덩이도 똥통도 그리고 물 펌프와 비닐하우스도 하루종일 들려오는 우fp 소리와 함께 사라져 갔다. 우리들의 놀이터가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는 게 그해 가을 우리들의 놀이였다.
우리들은 처음 이사를 왔던 때를 이따금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 배추밭에서 들쥐를 잡았었고 흙싸움을 했었다. 벌판에서 곤충채집을 하던 이야기를 했고 개구리 사냥을 하던 날의 그 미끈거리는 추억을 되새겼다.
공사가 시작되었다. 아파트 앞으로는 끊임없이 모래며 자갈 그리고 철근을 실은 차가 오갔다. 그리고 우리들은 이제는 사라져 간 벌판에 대한 기억을 사랑하고 있는 우리들을 보았다. 비닐하우스가 있던 곳에서 불쑥불쑥 일어서기 시작한 아파트 건물은 가시가 많은 덩굴처럼 자라 올라 우리들의 시야를 가리며 말끔한 네모꼴로 하나씩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하루하루에는 알아보기 힘든 변화였다. 불타 버린 자리에 그을음에 묻힌 채 앙상하게 서 있는 벽처럼 솟아 있던 우리들 여섯 개의 아파트 건물의 원경(遠景)은 이제 찾아보기 어려웠다. 여름 햇살 속에서 독을 뿜으며 뻗어 오르는 무성한 덩굴처럼 우리들의 앞에서, 옆에서, 그리고 밑에서 새로운 집들이 세워졌기 때문이다. 어느 날 우리는 하늘을 쳐다보거나 비행기를 바라보기 위해서는 고개를 발딱 젖혀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벌판도 지평선도 사라지고 없었다.
2동과 3동 사이로 난 길에 처음으로 아스팔트가 깔렸다. 이제는 보이지 않게 된 벌판 저 끝에서 들리는 것 같은 우레 소리가 며칠이고 조용히 창문을 흔들고 나자 그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된 어느 날 우리는 5동에도 6동에도 새까맣게 덮여 있는 아스팔트를 보았다. 그것은 아파트 건물만을 남기고 모든 흙 위에 발리워지고 있었다.
사냥이 시작된 것은 그 무렵이었다. 잘 포장된 도로에서 자전거를 타는 것밖에 다른 놀이가 사라져 버렸음을 알았을 때 우리는 하나 둘 아파트의 거실을 빠져 나와 눈알을 깜박이며 놀이 사냥에 나서기 시작했다.
맨 처음 우리가 찾아낸 놀이는 손님이 되는 것이었다. 엄마들이 외출해 버리고 가정부 누나가 낮잠을 자는 빈집을 찾아내기란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우리들이 아파트 복도에서 요란스레 자전거를 타고 있노라면 엄마가 외출해 버린 집 아이는 사람에 굶주린 얼굴을 하고 뛰쳐나오거나, 문을 잡고 서서 말하곤 했다.
"들어올래? 우리 엄마 나갔어,,,,,,"
우리는 그때마다 그 아이의 눈빛이 먹이를 찾으러 수채 구멍에서 빠져 나오려고 밖의 동정을 살피는 생쥐처럼 반들거리는 것을 보았다. 우리는 디즈니랜드의 딱다구리가 나무를 쪼아대듯 그 집에서 찾아낼 수 있는 모든 신기함을 삽시간에 먹어치웠다.
귀신스럽게 생긴 골동 장이 있는 7호집엘 들어가면 붙어 있는 장식이 꼼지락거리며 움직이는 것 같았다.
"이건 뭐니?"
"낚싯대야. 우리 아버지가 일본서 갖고 온 거야."
"야, 저 항아리는 왜 저기다 올려놨니?"
"그건 이조백자야."
"아냔 마. 그건 골동품이야. 우리 집에도 있어."
3호집에는 침대를 놓고 있었다. 그 애 엄마가 집을 나가면 우리는 그 넓은 침대 위에서 코마네치 놀이를 했다. 그것은 침대 위에서 머리를 대고 한 바퀴 구르고 나서 두 팔을 좌악 펴며 꼿꼿이 서는 놀이였다. 밑에 앉은 우리는 그걸 보면서 백 점, 구십 점하고 소리쳤다. 우리는 코마네치에 싫증이 나면 침대 밑에 들어가 뒹굴기도 했다. 어둠침침한 침대 밑은 얼마나 은밀하게 우리를 감싸주었던가.
방의 모양은 같았으나 집안에 놓여 있는 것은 서로 달랐기 때문에 우리들에게는 방 하나하나가 새로운 놀이터가 되어 주었다. 우리는 1층에서 9층까지를 오르내렸고 1호에서 12호까지를 드나들었다. 가정부 누나들은 우리가 지나갈 때마다 디즈니랜드의 딱다구리가 먹어치우듯 깨뜨려 버리는 방안의 질서를 보며 소리소리 질렀다, 그때마다 우리는 조그만 목소리로 씨발년 하고 중얼거리고는 키득키득 웃었다
그 놀이에 싫증이 나기 시작한 것은 얼마가 지나서였다.
엄마들은 바람 같았다. 3호에 모였는가 하면 6호에서 목소리가 새어 나왔고 복도에서 혹은 아파트 입구에서,
"아유 진수 엄마, 있잖아요 글쎄......"
"아유 윤경 엄마, 잘 만났어요. ..."
하는 소리를 우리는 들을 수 있었다. 염색 물감을 떨어뜨린 것처럼 우 리들의 집은 서로 비슷비슷해지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바뀐 것은 커튼이었다. 우리는 집집마다 비슷한 모양에 비슷한 색깔의 커튼이 드리워지는 것을 나중에는 하품을 하며 쳐다보았다. 한 집에서 욕조를 고치고 나면 어느새 다른 곳에서 욕조공사가 시작되었다. 9호집에서 붙박이장을 만들어 붙이자 1호에도 3호에도 그와 똑같은 모습의 장이 생겨났다. 엄마들까지 닮아가고 있었다. 처음 머리칼을 자른 것은 3호와 7호 엄마였는데 다음 날 우리는 12호 엄마가 그와 똑같은 머리 모양을 한 걸 보았다. 고리 모양의 줄무늬가 있는 실크 블라우스가 엄마들의 제복처럼 입혀지더니 나중에는 꽃무늬의 화려한 홈드레스가 아파트 층계와 복도를 덮기 시작했다.
목욕탕 욕조에 물을 받아 놓고 종이배를 띄우는 것으로, 우리는 한동안 텔레비 프로가 나을 때까지의 시간을 견디어 갔다. 기러나 그것마저도 5호집 아이가 전화 요금 고지서로 배를 만들어 가지고 나타남으로써 끝장이 났다. 전화요금 고지서로 만들어진 종이배는 물이 잘 스며들지 않는 종이배였지만, 우리는 그 배의 주인이 그날 저녁 매를 맞으며 아파트 복도로 쫓겨나는 것을 보아야 맸다.
가장 오랜 동안 우리들에게 즐거움을 준 건 7호집이었다.
"야, 우리 집에 똥꼬 사진 있다. 남자 여자 똥꼬."
그는 조금 자랑스러워하면서 그러나 무엇인가 많이 두려워하는 몸짓을 숨기지 못하며 어느 날 중얼거렸다. 우리는 7호집 아이의 뒤를 따라 그 집으로 기어들었다. 사진 책은 7호집 아이의 엄마 아빠가 쓰는 방의 보루네오 장식장 맨아래 빼닫이에 들어 있었다, 그것은 미국 여자와 남자들이었다. 우리는 처음에는 히히거리며 그것을 바라보다가 어쩐 일인지 나중에는 성난 얼굴이 되었다.
"목욕할 때 같다."
6호 아이가 말했다. 우리는 그것이 목욕하는 사진이라고 믿고 싶어했다. 그러나 아무리 미국사람들이라 해도 그들이 나무숲이나 침대 위에서 목욕을 하고 있다고 스스로에게 믿게 할 수는 없었다.
"레스링 하는 거 같다."
11호 아이가 말했다, 우리는 그것이 레슬링하는 것이라고 믿고 싶었지만,
"아냔 마. 남자 여자가 레슬링 하니? 봤어?"
하며 7호 아이가 손가락으로 찔렀기 때문에 우리는 결국 그렇게 믿고 싶은 생각을 버렸다. 우리는 그 미국 여자의 아무리 보아도 우리 엄마들 것보다 너무나 커서 무더워 보이는 젖통을 보았고 발가벗은 긴 다리와 그 사이의 머리칼을 보았다. 그리곤 똥꼬를 손가락으로 찌르면서 히죽거렸다. 그 미국 사람 중의 한 남자에게서 우리는 문득 주일날 교회 안에서 바라보는 한 벌거벗은 남자를 떠올렸다. 그러나 사진 속의 남자는 교회 안에서 언제나 묶여 있는 남자보다는 많이 살쪄 있었다. 그리고 굴러 떨어질 듯한 천마저 감고 있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되자 갑자기 우리는 교회 안의 그 마른 남자에게 부끄러웠다.
그후 우리는 7호집 엄마가 시내에 나가기를 기다렸다가 숨가쁘게 그 집 초인종을 눌렀다.
"똥꼬 책 보자,,,,,,"
우리가 그 애에게 말했을 때마다 7호 아이는 자기 엄마가 이미 외출해 버리고 없는데도 누군가가 우리를 보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꼭 뒤를 돌아다보곤 했다. 우리들은 그림 속의 커다란 젖가슴과 긴 다리와 그 다리 사이에 난 머리칼과 모래언덕처럼 솟아 있는 엉덩이를 보고 있자면 언제나 목이 말랐다. 비로소 실파를 다늠는 가정부 누나가 신문지를 깔고 식당바닥에 앉아 있을 때 그 희뿌연 허벅지 안쪽을 들여다보며 왜 입안이 메마르곤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우리는 그 그림들을 연필로 마구 그어대고 싶은 충동으로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병아리 장수가 아파트 단지에 나타난 것은 모래가 날리는 바람 속으로 아지랭이가 송글거리던 봄날이었다. 낡은 잠바를 걸치고 고무신을 신은 병아리 장수는 커다란 통속에 하나 가득 병아리를 담아 가지고 나타났다. 그 통은 수십 개의 실로폰을 두들겨 대는 소리가 나는 악기와 같았다.
우리들은 병아리를 샀다. 손 안에 한 웅큼으로 잡히는 그 노오란 생명체는 반들거리는 장판 방에서 곧잘 미끄러졌고 뒤뚱거리며 양탄자 위로 올라가서는 앞으로 뛰어나갈 듯한 자세를 취하면서 순간적으로 물똥을 싸갈겼다. 그 동작은 황홀할 정도로 빨랐다.
우리는 며칠 동안 병아리와 함께 지냈다. 벌거벗은 사람들을 보러 가기 위해 7호집 엄마가 외출하기를 침을 삼켜 기다리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나 사흘째부터 우리들의 살아 있는 장난감은 약속이나 되어 있는 것처럼 죽어갔다. 자고 나면 그놈들은 다리를 힘차게 뒤로 뻗고 고함치듯 입을 크게 벌린 채 눈을 감고 있었다. 눈을 감고 있지만 않았더라도 우리는 가장 동적인 자세를 하고 있는 그 다리와 입 때문에 병아리가 죽었다고는 생각지 못했으리라.
남은 것들 중에서 또 한 마리가 죽은 것은 밤이었다. 몸의 털을 뜯기고 살점이 드문드문 떨어져나간 채 눈알이 없어진 모습으로 발견된 그놈을 보고 6호 엄마는 말했다.
"쥐가 파 먹었구나. 에이 끔찍해라."
또 하나가 죽은 것은 오후였다. 화투를 치느라 3호집에 모였던 엄마들이 점심으로 시켜다 먹고 난 중국음식 그릇에 빠져서 그놈은 죽었다. 빈 그릇에 누군가가 물을 부어 현관에 내놓았었는데 거기 뛰어들었던 병아리는 경사진 그 그릇을 넘어 나오지 못하고 허우적거리다 죽어버렸던 것이다.
마지막 두 마리가 남았을 때 내기를 건 것은 5층 7호집 아이였다.
"누구께 멀리 날아가나 내기하자."
그 도전은 즉각 우리들을 열광시켰다. 이미 병아리가 죽어 버린 우리들의 압력 때문에 7호집 아이의 도전을 받은 10호집 아이는 이 대전을 피할 수가 도저히 없었다. 7호와 10호는 병아리를 날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하늘로 던져 올려진 그들은 겨우 다리와 날개를 두어 번 버둥거리다간 땅바닥에 쑤셔 박혔다.
"더 높은 데서 날리면 날아갈지도 몰라."
"아직 날진 못한단 말야."
"해 봐. 해 봐. 해 봐라."
우리는 두 패로 갈라져서 제각각 병아리에게 승부를 걸기 시작했다. 이미 병아리를 잃어버린 우리들에게는 그 경기를 충동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못 가진 자는 아무 것도 가지지 못했다는 그것만으로도 가진 자에게 무엇이든 요구달 수 있었다. 그전 못 가진 자가 단연 다수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병아리 주인을 앞세우고 5층까지 올라갔다. 창 저 너머로는 저녁 무렵의 잘 익은 태양이 핏빛으로 걸려 있었다. 창 밖으로 손을 내밀고 둘은 병아리를 날려보냈다. 순간 우리들은 와아 함성을 올리며 계단을 뛰어내리기 시작했다. 웃음소리와 발소리가 복도 저쪽 끝으로 부서져 갔다. 계단을 뛰어내려온 우리들은 목이 타서 침을 삼켰다. 아파트 수위는 무슨 일이라도 났는가 눈이 둥그래져서 우리들을 바라보았다.
두 마리의 병아리는 우리들의 바램과는 아랑곳없이 한 발 정도의 간격으로 나란히 널브러져 있었다. 갑자기 우리들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쓰러져 있는 그들을 우리는 둘러섰다. 불어오는 바람이 미동도 없이 누워 있는 병아리의 그 짧은 털을 몇 가닥씩 흩날렸다.
그때였다.
"살았다."
하는 고함 소리가 길고 긴 침묵을 깨고 찢어져 나왔다. 우리는 7호 아이의 병아리 쪽으로 우르르 눈길을 모았다. 7호 아이의 병아리가 그 노오란 발가락을 기지개 켜듯 꼿꼿이 뻗으며 바르르 떨었다. 순간 10호 병아리를 둘러싼 쪽에서도 함성이 터져 나왔다.
"살았다. 우리 것도 살았다."
7호 쪽에 둘러섰던 우리들은 10호께로 몰려들었다. 10호는 다리를 몇 번 실룩거리더니 조용해졌다. 조금이라도 그들이 오래 버티라고 발을 구르면서 박수를 치면서 그리고 살았다 살았다를 외치면서 우리는 몇 번을 더 7호와 10호 사이를 뛰어다녔다. 7호가 더 늦게 눈을 감았다. 우리는 그의 조그만 핏빛 눈알이 밑에서부터 올라온 눈꺼풀에 조용히 감겨드는 것을 보았다. 갑자기 오줌이 마려웠다.
우리는 한결같이 화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기름이 다한 불꽃을 바라보는 심정으로 이제는 움직일 생각을 않고 있는 두 마리의 병아리를 내려다보며 우리는 말이 없었다. 그때, 누군가가 말했다.
"병아리를 사러 가자."
그 말은 소리 없이 그러나 한꺼번에 우리들의 가슴으로 타들어왔다. 그렇지만 어디서 병아리를 산단 말인가.
"신세계 앞에서 봤다. 박카스 통에 넣어 팔더라. 우리 엄마랑 택시 기다리다가 봤어. 거기 감 있을 꺼야."
6호집 아이였다.
박카스 통에 병아리를 한 마리씩 넣어 가지고 우리는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를 탔다.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충동을 참아 가면서 우리는 가슴팍에 병아리가 든 통을 힘차게 부여안았다
"그게 뭔고?"
할머니 하나가 저마다 가슴팍에 안고 있는 통을 보면서 신기한 듯 물었다. 우리는 서로서로 소리 없이 눈을 마주쳤다. 그리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대답했다.
"병아리예요."
"병아리--- ? 녀석들, 그게 어디서 났누?"
"샀어요."
"신세계 앞에서요."
"삼십 원섹이에요."
할머니는 우리들 중 한 아이의 통을 들여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뭐할 꺼고? 키워서 알 내 먹을라고?"
우리는 아무 말 없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7호집 아이가 퉁명스레 내뱉았다.
"할머닌 먹는 거 밖에 몰라요?"
그 말에, 우리는 하던 짓을 들킬 뻔한 아이들처럼 참았던 한숨을 길게 토해 냈다.
"고 녀석. 그럼 키워서 알을 내지 않음 이 락은 걸 잡아먹을래?"
"이런 걸 누가 먹어요."
7호가 여전히 퉁명스레 대꾸했다. 그때 3호집 아이가 종알거렸다.
"할머니, 우린 병아리랑 놀아요. 친구한단 말예요."
아이고 똑똑한 것. 그런 얼굴로 할머니는 머리라도 쓰다듬을 듯이 3호집 아이를 보았고 시선을 옮겨 우리들 하나하나를 돌러보았다. 우리는 비로소 사슬에서 풀려난 듯 낄낄 웃었다. 회득회득 웃기도 했다, 우리는 서로의 옆구리를 쿡쿡 찔러가면서 점점 크게 웃어대기 시작했다. 안내양 누나가 우리를 돌아보고, 좌석의 어른들이,
"녀석들."
하고 중얼거릴 때도 우리는 그칠 줄 모르는 웃음을 낄낄거리고 있었다.
버스는 시내를 벗어나자 사람이 많이 내려서, 속이 쿨렁쿨렁해진 자루처럼 흔들리면서 아파트를 향해 달려갔다. 벌판 속에 우뚝우뚝 선 아파트가 눈에 들어왔을 때, 우리는 그 주변에 커다란 똥통이 있었고 배추밭이 끝간 데 없이 펼쳐져 있었고 그리고 조그만 도랑을 따라 물이 흐르는 저편에 비닐하우스가 하얗게 있었다는 사실을 잠깐 생각했다. 아파트가 가까워 오자 우리는 벌써부터 이 나들이가 마련해 준 흥분과 잠시 후에 있을 우리들의 경기를 생각하며 저마다 가슴을 두근거렸다,
제각각 병아리가 든 통을 옆구리에 끼고 우리는 아파트 입구로 걸어 들어갔다. 식품점 앞을 지나갈 때 7층 5호 아줌마가 고개를 내밀고 물었다.
"느이들 어디 갔다 오냐?"
"시내요."
10호 아이가 큰 소리로 대답했을 때 우리는 약속이나 한 것처럼,
"야, 이 색기야."
하고 조그맣게 소리쳤다. 그 소리는 6호 아줌마에게는 들리지 않을 만큼 작았다. 우리는 재빨리 식품점 앞을 지나갔는데 등 뒤로 들리는 6호 아줌마의 목소리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아니--- 쟤들이 무얼 하는 거야. 무슨 통을 하나씩 가지고---?"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우리는 재빨리 박카스 통을 가슴팍으로 숨기며 더욱 걸음을 빨리 했다, 7동 가까이 왔을 때 주리는 거의 뛰다시피 걷고 있었다. 7동을 돌아 조그만 공터에 다다랐을 때, 우리는 아파트 뒷벽에 몸을 붙이며 가쁜 숨을 토해냈다.
우리는 거기 쪼그리고 앉아 박카스 통을 열었다. 더러 똥을 싸 놓은 놈도 있었지만 그들은 우리가 그것들을 살 때와 다름없이 종이 바닥에서 이리저리 미끄러지며 삐약거리고 있었다. 가슴을 두근거리며 우리는 그 보드라운 털과 손가락 사이에 말랑말랑하게 만져지는 한 웅큼의 살덩이를 집어 올렸다. 주먹 속에 들어간 병아리는 머리를 밖으로 내 놓고 노란 주둥이를 벌름거리며 울어댔다. 그때마다 노르스름한 혓바닥이 주둥이 사이로 비져 나왔다.
그때, 우리들의 머리 위로 푸드득거리며 한 무더기의 흙덩이가 떨어져 내렸다. 우리는 너무나 놀라서 턱을 가슴팍에 쑤셔 박았다.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것은 한 떼의 비둘기였다. 비둘기들은 우리들의 머리 위를 날아 아파트 현장사무소 쪽으로 날아갔다.
겨우 숨을 돌렸을 때, 놀라는 바람에 손을 움켜쥐었으므로 우리들의 손아귀에서는 병아리가 목을 캑캑거리며 머리를 흔들고 있었다. 7호집 아이가 말했다.
"택시비랑 병아리 값 내고 삼백 이십 월 남았어."
우리는 서로가 거두어 냈던 돈을 되돌려 받았다. 한 아이가 말했다.
"자, 이제부터 누구께 오래 가나 시합하기다."
"그래, 아주 옥상에 가서 떨어뜨리자."
"그렇지만, 비슷비슷하게 생겼는데 어느 게 누구 건지 어떻게 아니,,,"
우리는 잠시 머뭇거렸다. 털 위에 이름을 쓸 수는 없는 일이었다.
"칠을 하자. 날개나 발목에 칠을 하면 섞여도 금방 알아낼 수 있어."
"그래6동으로 가자. "
우리는 박카스 통을 버리고 힘을 주면 터질 것만 같은 병아리를 조심스레 잡고서 6동으로 걸어갔다. 창을 타고 들어온 저녁 햇빛이 깔려 있는 계단을 우리는 올라갔다.
"우리 집에 싸인펜이 있어."
3호집 아이가 입술을 조그맣게 오물거리면서 속삭였다. 그리곤 병아리를 우리들에게 내밀었다. 병아리를 맡기고 3호 아이는 싸인펜을 가지러 뛰어갔다. 우리는 자꾸만 침을 삼켰다. 싸인펜을 가지고 3호집 아이가 나왔다. 그것을 받아들며 7호집 아이가 말했다.
"난 오른쪽 다리다."
그는 자기 병아리의 오른쪽 다리에 싸인펜으로 시커멓게 칠을 했다. 그가 건네주는 싸인펜을 받아들면서 5호집 아이가 말했다.
"내 껀 날개에다 표시할 께. 오른쪽 날개야."
"그럼 난 왼쪽 날개다."
"내 껀 배때기다."
목에다 시커멓게 띠를 두르는 것을 마지막으로 병아리의 표시가 끝났다, 우리는 저마다 칠한 자리가 지워지지 않도록 조심스레 병아리를 손아귀에 움켜쥐었다. 이제 모든 준비는 끝났다. 우리는 서로의 눈에서 그것을 확인했다. 계단을 뛰어오르기 시작했다.
옥상 문은 견고한 철제문이었다. 우리는 어깨를 대고 가만히 문을 밀었다. 금속이 시멘트 바닥에 긁히는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면서 서서히 문이 열렸다. 그 소리는 아파트 계단을 따라 저 밑으로 내려갔다. 옥상으로 나섰을 때 우리는 바람에 불려 날려갈 것만 같아서 깊이 허리를 구부리고 턱을 앞으로 내밀었다. 웃옷 사이로 바람이 들어가서 우리들은 곱추와 같았다. 옥상 난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을 때 우리는 갑자기 어지러워져서 뒤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먹은 음식을 토할 것처럼 속이 메슥거렸다. 어지러움을 참느라 노랗게 된 얼굴로 바람은 사정없이 불어와 우리의 볼따귀를 때리고 머리칼을 한주먹씩 흐트러 뜨렸다. 옥상 난간을 나란히 잡고 선 우리들은 되도록 밑을 내려다보지 않으려고 애쓰며 건너편 8동의 바둑판 같은 창문을 바라보았다. 8동 건물을 바라보자니 우리들이 너무 높이 올라왔으므로 병아리들은 멀리멀리 날아가 버릴 것만 같았다. 다시 밑을 내려다보니 이제 병아리들이 날아가 버림으로써 경기가 이투어지지 않는다 해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하나 둘 셋 하면 날리기다."
우리는 서로 입을 모아, 발바닥이 허공에 떠 있는 듯한 무서움을 이기기 위해 큰 소리로 외쳤다.
"하낫 둘 셋."
몇 개의 돌멩이처럼 병아리는 허공으로 던져졌다. 우리는 제가끔 달리고 있었다. 걸어 올라오던 사람들은 앞으로 고꾸라질 듯한 자세로 달려 내려오는 우리들을 보자 걸음을 멈추곤 했는데 그렇게 서 있는 사람에게 누군가가 부딪쳐 시장 바구니가 구르는 소리가 뒤쪽에서 울렸다.
"무슨 짓들이야! 저런저런--- 애들도 극성은."
밑으로 내려온 우리들은 숨을 헐떡거리며 병아리가 떨어졌을 시멘트 바닥을 뒤지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에 널브러져 있는 병아리를 우리는 쉽게 찾아냈다.
"이건 벌써 죽었다. 날개에 칠을 한 건 누구 꺼니?
"야, 이건 머리가 깨졌는데. 목에 시꺼멓게 칠을 한 건 누구 꺼야?
아직도 가쁜 숨을 쉬느라 어깨를 들썩거리며 우리는 저마다 실망에 가득 차서 중얼거렸다. 잠시 전까지 우리들의 손아귀에서 따스하게 꼬물거리던 병아리들은 하나같이 길게 기지개를 켜거나 혹은 허공으로 뛰어오르려고 했던 것처럼 다리를 곧게 뻗고 죽어 있었다. 너무나 빨리 끝나 버린 경기에의 실망을 숨가쁘게 헐떡이며 토해내고 있을 때 누군가가 놀라움에 넘쳐서 소리쳤다.
"살았다. 살았어. 이것 봐. 움직인다."
우리는 우르르 그쪽으로 달려갔다. 발목에 칠을 한 6호 아이의 것이었다. 우리는 가장 오래 살아 남았으므로 해서 갈채를 받아야 할 그 우승자의 작은 몸을 빙 둘러쌌다. 그의 다리는 수영을 할 때처럼 곧게 그리고 서서히 뒤로 뻗어나갔다. 그리곤 발가락 마디마디가 길게 펼쳐졌다. 그의 입이 커다랗게 찢어질 듯 열리는 것을 우리는 보았다. 이미 눈은 감고 있었다. 끝없이 벌어지던 입이 한 순간에 멎더니 움찔하는 몸부림과 함께 조금 다물어졌다. 그리고 아무 것도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그때까지 참았던 숨을 길게 토해내며 우리들이 허리를 펴기 시작했을 때였다.
"피다."
하는 가느다란 외침이 누구에게선지 새어나왔다. 찢어져라 벌어진 병아리의 그 작은 입에서 흘러나온 피가 뾰족한 혓바닥을 적시며 주둥이에서 맺혔다. 우리는 고개를 들었다. 힘없이 팔을 늘어뜨리며 10호 아이가 말했다.
"너무 높이 을라갔었나 봐."
"그래. 옥상은 너무 높아. 다 죽어 버렸잖아.
“7층쯤에서 했어야 하는 걸."
"아냐. 5층에서 했어야 돼, 어제처럼."
"내일 다시 하자."
"그래, 내일은 2층에서 날리자. 여러 번 하게."
게임의 결과에 대해 아쉬워하며 우리는 손을 비볐다. 그것은 저금통을 찢어서까지 해치운 우리의 수고에 비해 너무나도 간단하게 끝나 버렸던 것이다. 그때였다. 우리들의 뒤에서 주춤거리고 서 있던 3호집 아이가 우리들과는 전연 다른 정확하고도 활기찬 목소리로 말했다.
"난 그만 두겠어."
3호 아이는 두 손을 주머니에 찌르고 있었다. 우리는 이 반역자를 바라보고 그리고 나서 그가 우리들 사이의 단 하나 계집애라는 사실에 안도의 숨을 내뿜었다.
"좋아. 관둬. "
"야, 계집앤 꺼져 버려. 너 같은 건 끼워 주지도 않아."
병아리가 안겨 준 실망에 증오까지를 처발라서 우리는 3호집 아이에게 던지기 시작했다. 입술을 종긋거리던 계집애는 그러나 우리의 박해와는 무관한 얼굴로 가만히 주머니에 찔렀던 손을 빼내었다. 거기엔 황금빛 털을 한 병아리가 갑자기 환한 곳으로 나오자 눈이 부신 듯 고개를 흔들며 쥐어져 있었다. 그녀의 이 예기치 않았던 반란에 우리는 할 말을 잃고 서 있었다.
"난 이걸 기를 테다. 우리 집에는 새장이 있거든. 우리 아빠가 사온 거야. "
계집애는 종알거리곤 우리들 앞을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발딱 세우고 걸어나갔다. 우리는 계집애의 뒷모습을 따라 고개를 돌려갔다. 불어오는 저녁바람에 머리칼이 나풀거리는 계집애의 어깨에 는 저녁 햇살이 깃털처럼 얹혀 있었다. 우리들의 머리 위로 한 무더기의 흙덩이가 떨어져 내리듯 비둘기 때가 날아 올라갔다. 그때였다. 누가 먼저였는지 모른다. 우리는 눈빛을 번들거리며 계집애를 향해 뛰어갔고 그녀의 머리채를 나꿔챘다. 우리들은 계집애의 팔을 비틀어 잡았고 그 손에서 병아리를 빼앗으려고 했다. 계집애의 몸이 나뒹구는 것과 함께 손에서 떨어져나간 병아리는 뒤뚱거리며 몸을 일으키더니 그 작은 날개를 하늘 높이 쳐들며 뛰어 달아나기 시작했다. 우리들에게는 이재 계집애가 문제가 아니었다. 우리는 새로운 사냥감을 보았고 그 뒤뚱거리며 달아나는 병아리를 쫓아서 달려갔다.
계집애가 악을 쓰며 울어대는 울음소리도 들려오지 알았다. 우리는 다만 이제는 누구도 가지지 못한 그 노오란 한 덩이의 움직이는 털에게 갑자기 온갖 적의를 번득이며 누가 먼저일 것도 없이 발길질을 쏟아 붓기 시작했다.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알았다. 계집애가 악을 쓰는 울부짖음도, 우리들의 날뛰는 모습을 보고 달려오며 질러 대는 6동 아주머니의 목소리도, 무슨 일인가 싶어 이쪽을 기웃거리며 걸어오는 수위 아저씨의 말도 들려오지 알았다. 이미 배가 터져 버린 한 마리의 병아리를 향해 우리는 끊임없이 밭길질을 계속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