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단편소설2

95. 흔들리는 성

자한형 2022. 3. 31. 0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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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는 성()

-최일남

 

봄이군요. 그리고 일요일입니다. 점심을 먹고 난 나는 베란다에 흔들의자를 내놓고 느긋하게 앉아서 기우뚱기우뚱, 일정한 리듬을 좇아 흥청거렸습니다. 참 좋네요. 몸이 기가 막히게 축 늘어지네요. 알맞게 따뜻한 햇볕이 온몸을 쪼속쪼속 쪼아 대서, 저절로 스르르 두 눈이 감깁니다그려.

사람들은 대개 봄이 난만하게 무르익어서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기 시작하는 봄의 한복판을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만 사실은 지금처럼 봄이 아직은 확 열리지 않고 조금은 쌀쌀하면서도 조금씩 그 냄새를 피우는 때가 더 좋은 겁니다. 왜 여자도 그렇지 않아요? 그 나름대로 남자를 안다고, 좀 바라지고 까진 처녀보다는 이제 처녀 티가 들려고 하는, 그래서 더 풋풋한 냄새가 나는 그런 또래들이 풍기는 분위기, 그게 더 좋지 않아요?

바로 지금이 그런 때예요. 밖에 나와 앉아 있기에는 다소 바람이 찬 감이 있기는 합니다만 그것이 춥다는 것을 느낄 정도의 것은 아니고, 언뜻 가녀리기는 해도 따뜻한 봄기운이 내 몸에 와 닿는 것 같습니다. 좀 유치한 대로 시적(詩的) 표현을 빌면, 봄이 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린다고나 할까요. 시멘트의 숲처럼 아파트 군()이 꽉 들어찬 이 동네에서 그런 소리를 들을 수 있다니 과장이 심하다고 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잘 마음을 가라앉히고 앉아 있으면 최소한도 그런 분위기에는 젖게 되는 겁니다요. 보세요. 저 아래 잔디밭에서 벌써 새싹들이 샛노랗게 목을 뽑고 있지 않습니까? 우선 겨우내 방안에만 갇혀 있던 아이녀석들이 한껏 몰려나와서, 자전거를 타는 놈, 그네를 타는 놈이 어울려 짹짹 노란 소리들을 지르고 있는데, 그 소리가 아파트의 벽에 메아리져 진폭(振幅)을 더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봄을 꼭 들에 나가서 찾을 필요는 없습니다. 구태여 꽃시장에 나가서 기백 원씩 주고 개나리니 버들강아지니 하는 것을 사다가 방안에 꽂았다고 해서 봄의 냄새를 맡을 수 있는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저렇게 재잘거리는 아이들의 입에서 벌써 봄은 온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아내의 얼굴에서도 벌써 그걸 느낄 수가 있습니다. 군내 나는 묵은 김치 항아리를 우려내고 조막만한 단지에 나박김치를 담가 먹는 것 같은 그런 산뜻한 분위기가 이즈막이면 젊은 아내들의 얼굴에 감돕니다.

, 등 뒤에서 바로 그런 내 아내의 발자국 소리가 들리는군요. 결혼한 지 8년째 됩니다만, 나는 언제부터인가 등을 지고서도 아내의 표정을 읽고, 소리 없는 언어를 들을 수 있습니다. 잔잔하게 웃고 있는지 잔뜩 찌푸리고 있는지 하는 것은 물론, 한 시간 뒤면 아내의 표정이 맑을 것인지 흐리고 한때 비가 올 것인지, 흐렸다 갰다 할 것인지 다 압니다. 하물며 아무리 융단 위로 사뿐사뿐 걸어온다 할지라도, 그래서 소리가 전혀 안 난다 할지라도 나는 다 압니다. 하기야 발소리가 아니라도 치렁치렁 기장이 긴 분홍색 홈웨어가 방안을 끌며 오는 소리에서 아내가 다가오고 있는 것을 알 수도 있는 일입니다만 아내는 워낙 하는 행동이 진중해서 (적어도 겉으로는) 옷이 스치는 그런 소리도 거의 내지 않습니다. 아내는 나이가 나보다 네 살이나 아래인데도 불구하고 걸음걸이 하나까지도 나보다는 의젓하고 우아해서 내가 기가 죽을 때가 많습니다. 어떤 때는 글쎄 아내가 그처럼 느릿느릿, 그러면서도 당당하게 걸어나오는 것을 볼 때에는, 엘리자베드 여왕의 그것 같기도 하고, 모나코 왕비 그레이스 켈리의 그 몸짓 같기도 하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아내가 말없이 내 옆 의자에 앉는 것 같지도 않게 조용히 앉았습니다. 이윽고 나는 곡명도 잘 모르는 고전음악이 잔잔히 방안에 안개가 기어가듯 퍼졌습니다. 아내가 내 쪽으로 오면서 미리 판을 걸어 놓은 거죠. 아내는 그런 사람입니다.

"오늘이 경칩(驚蟄)이죠? "

한참을 잠자코 있던 아내는, 느닷없이 그러나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 그렇던가. "

나는 얼결에 대답했습니다.

"이제 봄이군요. "

"글쎄 그렇게 되었군. "

"올봄엔 어디 조용한 곳에 여행이라도 한번 안 할래요? "

"왜 가야지. 그러고 보니까 작년 봄엔 아무 데도 못 갔지? 왜 그랬더라? "

"내가 몸이 좀 아팠잖아요. "

"오오라, 그랬군. "

"간다면 바닷가 쪽이 좋을 것 같아요. 산이나 들도 좋긴 하지만 그런 덴 어중이떠중이 모여서 싫어요. 당신은 어떠세요? "

"나도 그래. 해안선이 있고 나즈막한 언덕에 노란 유채(油菜)꽃이 만발한 그런 곳이 좋겠어."

"그래요. 그러고 보니 당신도 제법 멋을 아는구료. "

"이거 왜 이래. 누굴 깡통으로 아나. "

"그게 아니라 당신은 지금까지 여행을 간다는 게 기껏 닳아빠진 관광지만 골랐잖아요? 그런 덴 오히려 신경만 피곤한 거예요. "

"그렇기는 해. "

날씨가 화창하것다, 두 사람의 대화는 그럴 수 없이 흐뭇하것다, 우리 자신뿐 아니라 누가 보아도 흐뭇한 광경이었겠습니다. 지저분한 구질구질한 구석이라고는 요만큼도 없는, 깨끗하고 문명된 동네에서 그것은 봄맞이를 설계하고 있는 한 아름다운 부부도(夫婦圖)일 수도 있다고, 헤헤, 이렇게 하면 좀 아니꼬왔나요. 아무튼 적어도 그와 비슷하게는 보였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세상살이가 그렇게 간단하게만 돌아가던가요? 내가 봐도 그렇고, 남이 봐도 더할 수 없이 높은 교양이 있어 보이는 아내도 살고보니 여러 가지 구석이 있더군요. 차근차근 얘기하지요.

우리가 그렇게 나란히 앉아서 좋은 음악을 배음(背音)삼아 도란도란 얘기를 주고받고 있는데, 뒤에서 쿵쿵거린다고까지는 할 수 없어도 좀 무질서하게 발을 옮기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우리 어머니예요. 어머니는 노인네시니까 오히려 발걸음이 가벼워서 걷는 둥 마는 둥 해야 하는 게 상식입니다만, 촌에서 농사만 짓던 분이라 그렇지 않은가봅니다. 당신보다 너무너무 젊은 며느리는 그렇게 하늘거리게 걷는데 말입니다.

"이 아까운 것을 왜 이렇게 버린디야? 비싼 돈 주고 샀을 것인디. "

내가 힐끗 돌아보자 어머니는 애들이 먹다 남긴 바나나를 치우면서 말했습니다. 아마 그 중에 몇 입 베어먹고 남은 바나나가 섞여 있었던 모양입니다. 아내의 그 고운 이마에 내 천()자가 꼭 석 줄쯤 그어지는 것을 나는 보았습니다. 그녀는 어머니의 말이라면 우선 대개는 이런 반응부터 보입니다.

"놔두세요. 이따 옥순이더러 치우라고 하세요. "

아내가 지시하듯 말했습니다. 어머니는 그냥 그것을 치우고 계셨습니다.

"아무나 보는 사람이 치면 되지 뭘 그려. ()는 즈 큰집에 갔응게 솔찬히 있다가 올 틴디. "

아내는 더는 대꾸를 않고 눈을 아래로 깔아 공지(空地)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에게 시선을 주었습니다. 아내는 우선 어머니가 나에게로 온 후부터 어머니의 그 진한 사투리를 싫어하고 부끄러워하는 것 같았습니다. 어느 모로 보나 잘 균제(均齊)되고 세련되고 그리고 교양 있는 사람들이 사는 가정이라는 점에서 어느 한 곳 나무랄 데가 없는 마당에, 자기 식구 중에 불쑥 그런 무지(?)한 요소가 틈입(闖入)한 데 대하여 심기가 고르지 못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보통 60평에서 90평 가까이나 되는 이 딜럭스 아파트촌에서는, 도대체 우리 어머니가 쓰시는 사투리 같은 게 안 어울릴지도 모릅니다. 일하는 아이들은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모두가 매낀매낀하고 반짝반짝하고 번드르한 공간 속에서, 이따금 듣게 되는 전라도 사투리, 경상도 사투리, 충청도 사투리는 정말이지 번지수를 잘못 찾은 것처럼 이런 생활권에서 첫째 잘 어울리지도 않고 겉도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투의 원색적(原色的)인 사투리는, 식전이면 볼일을 보기 위해서 공중 변소 앞에서 '나라비'를 서고, 겨울이면 하수도가 얼어 터져서 김치가닥서껀 밥풀서껀이 언덕길에 얼어붙어 있는 판자촌 아니면 시장바닥 노가다판에서 더 어울릴지도 모릅니다.

"이놈의 아가 죽을라카나, 와 니야까 속으로 기어드노? "

한다든가,

"글쎄 누가 백 원 안 준다고 그랬남. 잔소리 말고 갖다 끓여 잡서 봐유. 둘이 먹다가 하나가 죽어도 모른대유. "

라든가,

"아따, 그 사람 두꺼비 포리 차먹듯 하네. 오뉴월 가뭄에 죽 한 그릇도 못 얻어 먹었는갑다. "

한다든가 하는 등속의 말들은 우리 동네에서는 별반 들을 수도 없고 또 들을 수 있다 한들 그만큼 겉도는 것입니다.

그런 눈치도 모르고 어머니는 당신이 평생을 익혀 오신 말을 극히 당당히 쓰시는데, 어떤 사람들의 눈에는 그게 우습게 보이는 모양입니다.

사투리 얘기가 나왔습니다만, 어찌어찌 서울에 올라와서 한밑천 잡았거나 한자리 차지한 사람들은 말씨도 서울놈 뺨쳐먹게 달라지는 사람들이 많더군요. 개중에는 그까짓 것 처음부터 개의하지 않는 사람도 있지만, 한동안 부대끼며 살다가 웬만큼 살게 된 사람들 중에는 그런 사람이 많아요. 말투나 억양은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강한 사투리가 갖고 있는 어떤 모난 부분, 즉 모서리 같은 것을 용케 둔화 내지는 마멸시켜 가지고, 고 야들하고 발딱 까진 서울 말씨를 곧잘 구사하는 사람 참 많습니다.

그건 그렇고, 사투리야 어떻든 어머니가 우리 집으로 올라오시면서부터 우리 집안의 어떤 생활의 리듬이랄까 하는 것이 다소 깨진 것은 확실합니다. 집집마다 사람 사는 꼴이 다 비슷한 것 같아도, 집집마다 돌아가는 꼴이 조금씩은 다르고 어떤 분위기랄까 특징이라는 게 있는 것이죠. 물론 이것은 하루 이틀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고, 주부면 주부, 가장이면 가장이 되어서 이루어지는 것인데, 우리 집의 경우는 다분히 아내 쪽에서 리드해 온 것이기도 합니다. 이 점 저 자신이 다소 면구스럽기는 합니다만, 내 성격이 세심하면서도 좀 대범한 데가 있어서 웬만한 일 가지고는 참견을 않다 보니까 이쯤 되었습니다. 그런데 두 달 전부터 어머니가 오시고 나서는 지금까지 유지되어 오던, 그것이 진짜든 가짜든 겉으로만의 것이든, 요즘 조금씩은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미리 말씀드려 두지만 그것은 흔히 있을 수 있는 고부간의 그런 트러블이 아니라 좀더 근원적인 의미에서의 생각의 차이에서 오는 것 같아요. 아주 말해 버리지요. 눈 딱 감고 단언을 하자면, 있는 자와 없는 자의 만남遭遇에서 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순 두메 출신으로 흙만 파먹고 살던 어머니와, 많이 배우고 원래 가진 것이 있는 아내가 같이 생활을 했을 때 무엇이 오느냐, 어찌 보면 방관자일 수도 있는 나로서는 신경이 쓰이면서도 흥미도 있는 그런 국면이 수시로 벌어졌습니다. 좀 거창하게 말하면 1970년대의 서울 복판에서 두메산골 노파와, 난다긴다하게 사는 서울의 젊은 여자가 만난 것입니다. 얘기가 많을 수밖에요.

나와 아내가 베란다에 앉아 있는 동안 두 아이가 뛰어들어왔습니다. 올해 일곱 살이 되는 현이와 다섯 살이 되는 원아입니다.

"어디를 그렇게 쏘댕긴디야? 집에 붙어 있지 않고. "

어머니의 말에,

"재밌게 놀고 왔당게. "

"자전거를 타고 말여 잉? "

아이들은 즈이 할머니의 말을 흉내 내었습니다.

"그런 말 하면 못 쓴대두. "

아내가 아이들을 나무랐습니다. 아내의 말은 아이들이 어른을 놀리는 것을 나무라는 것보다는, 그런 말에 물들 것을 염려해서 하는 뜻이 담긴 것을 나는 압니다. 어머니도 이 뜻을 아는지 모르는지 쭈뼛쭈뼛하면서 자기 방쪽으로 갔습니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어머니가 올라오신 것은 두 달 전이었습니다. 그전까지는 돌아가시기 전의 아버지와 함에 산골에서 농사를 짓고 계셨습니다. 얼마 안 되는 논과 밭에서 나는 소출로 그럭저럭 4남매의 뒷갈망을 해 주었습니다. 내가 막내니까, 내 위로도 모두 결혼을 해서 사는데, 나만 대학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우골탑 신세를 지는 데 부모 재산깨나 썼었지요. 당연한 순서로 이번엔 내가 부모님의 노후를 보살펴야 할 형편이었지만, 아버지가 농토도 조금은 남아 있것다 네 신세 안 진다고, 촌사람치고는 깡다구깨나 있어서 된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따로 살아 왔습니다. 속으로는 나도 그게 낫겠다 싶어서, 말로는 내가 모시겠다고 하면서도 굳이 권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아버지가 마침내 돌아가시고 나니까 어머니가 올라오신 겁니다.

어머니가 시골 살림을 정리하고 처음 우리 집에 오셨을 때의 일을 나는 지금 잊을 수가 없습니다. 물론 우리 동기들이 다 같이 고속 버스 터미널로 마중을 나갔는데, 그들과도 헤어져서 내가 어머니를 모시고 집안에 처억 들어서니까 아내의 그 당황해 하던 모습이 우스웠습니다. 요즈음 젊은 여자들이 대개는 시어머니와 끼얹어 살기를 꺼리고 자기들 부부의 성()을 갖기를 원하는 것은 누구나 아는 이치입니다만, 아내의 그때의 놀라움이나 감정은 그런 것보다도 어머니의 차림새나 들고 온 보퉁이에서 확 풍기는 가난의 냄새 때문이었다고 보는 것이 옳겠습니다. 그 놀라는 감정을 더 파고 들어가면 자기의 살림에 축을 내는 것을 두려워하는 걱정보다는, 그 가난함이 자기의 이만큼 쌓아올린 안정된 생활과의 마주침에서 오는, 여러 가지 귀찮은 마찰이나 정신적인 곤비(困憊) 따위를 두려워해서가 아닌가 싶습니다.

짐작하시겠지만 어느 만큼 사는 사람들은, 그때부터는 살림살이 그 자체보다도 남을 더 의식해서 사는 수가 많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이웃에 대한 체면, 친척에 대한 허세, 친구에 대한 과시 같은 것이 무시 못할 요소로 그 사람의 생활 구조 속에 자리잡습니다. 그래서 못사는 사람, 생활이 처지는 사람은 애써 외면해 버리고, 그리고 교제 명단에서 털어 버리고, 수준이 맞는 사람끼리 그런 또래끼리 어울려 하나의 사회를 이루어 갑니다. 남자 사회도 그렇기는 하지만 여자 사회에서는 이런 경향이 더욱 심합니다. 여학교 때 서로 죽고 못살던 친구가 결혼해서 경제적으로 영락(零落)하게 되면 그 인연은 어느덧 끊어지고 맙니다. 그런 친구가 서적 외판원이라도 되어 어느 날 자기를 찾아오면, 얘 안 됐다, 내가 지금 가진 것이 없어서 요것밖에 못 사겠어, 하고는 그 자리에서 다시는 얘와 만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게 됩니다.

여기서 별로 벗어날 것이 없는 아내가 초라한 어머니의 행색을 보고 우선 생각한 것도 지금까지 자기 집안은 모두가 떵떵거리고 살고 있고, 그러기로 들면 웬만한 권력층에도 연줄이 안 닿는 사람이 없을 정도라고 은근히 자랑해 왔는데, 어느 날 두메산골의 촌부(村婦)가 자기 시어머니로 나타났을 때 느낄 수 있는 그런 당황을 맛보았을 것입니다.

아내가 자기 집안이 떵떵거리고 산다는 것을 코에 걸 때, 나는 마음 속으로 킥하고 웃습니다. 그야 돈이야 많지요. 하지만 아내가 애써 표현하려는 것만큼 가문이 좋다거나 내력이 있는 집안이라거나 한 것은 아닙니다. 장인은 피혁 관계 공장을 차리고 있는데 요즈음 사업이 번창해서 수출입까지 손댄다고 그래요. 그러나 그도 알고 보면 별수 없는 촌놈으로 서울에 올라와서 한 20년 엄벙대며 살다가 오늘의 행운을 잡은 겁니다. 처음에는 남의 가게 막일꾼으로 시작해서 장사에 눈썰미가 좋아 각고면려한 끝에 크게 한밑천 잡은 겁니다. 나쁘게 말하면 요새 흔한 벼락부자고 좋게 말하면 자수성가한 사람이지요. 아내는 내가 자기 아버지의 이런 내력을 생판 모르고 있는 줄 압니다, 헤헤. 그러나 나도 나이깐으론 산전수전 다 겪은 놈인데 왜 그걸 모르겠습니까. 따지고 보면 그까짓 사실대로 말한다고 해서 하나도 흉이 될 것 없는데 처가집 식구들이 극력 그걸 숨기려 들더군요. 처가집에 가서 더러 장인과 술자리를 갖는 일이 있는데 그런 때도 장인은 솔직하지 못하고 엉뚱한 얘기만 하는 것입니다.

"이봐, 자네도 좀 호프를 가지라구. 샐러리맨? 좋다 이거야. 그러나 언젠가는 그 회사에서라도 파워를 가질 만한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야 돼. 그런 면에서라면 내가 좀 뒤를 대 주어도 좋아. "

"어디 그렇게 맘대로 되나요. "

", 이런 답답한 사람 봤나. 그러니까 자넨 만년 과장이지. 머니 이스 파워란 말 못 들었나? 하기야 젊은 사람이 너무 돈을 바쳐도 안 되기는 해. 하지만 이 코리아에서는 그걸 무시하고는 안 돼. "

장인은 말끝마다 토막 영어를 섞어 가면서 말했습니다. 출세에 필요하다면 뒤라도 대 주겠다는 말은 고마운 말이기는 해도, 요컨대 장인은 돈은 어느 정도 벌어 놓았으므로 남은 문제는 자식이든, 사위이든, 한자리 해 주었으면 하는 원망(願望)이 있어서 하는 말임이 분명합니다. 자기 자신은 이미 그런 계제가 못 되므로 자기 권속이나 피붙이 중에서 어떤 권세 있는 자리를 차지하기를 바라는 심정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장인은 이조때처럼 벼슬도 돈으로 사 둘 수만 있다면 서슴지 않을 사람입니다. 민주주의니 뭐니 해서 세상이 많이 달라지기는 했어도 어느 구석엔가는 조금도 변하지 않은 옛날 그대로인 대목이 많습니다.

하기야 이렇게 말하는 나 자신도 그런 면에 전혀 관심이 없는 놈이 아니죠. 지금 이만한 집을 지니고 사는 것도 따지고 보면 다 처가덕이죠. 아내는 배운 사람이라 그런 걸 내놓고 내색을 하지 않지만 아무래도 내가 매사에 기가 꺾일 것은 사실입니다.

지금의 아내와 맺어진 것은 참 우스운 계기에서였습니다. 누구든 결혼을 무슨 원칙이나 목표 같은 걸 세워놓고 한다거나 하는 사람은 드물겠지만, 나만 해도 퍽 우연히 사귀게 되었습니다. 대학 때였어요. 흔한 일로 친구 몇 명이 어울려 그 수만큼 여학생과 함에 청평인가, 어디 그 근처로 놀러간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여자 일행 중의 하나에 지금 아내가 있었는데, 나는 아내를 점찍어 가지고 순진한 촌놈 행세를 하면서 사실 또 촌놈 특유의 뚝심으로 끈질기게 쳐들어갔습니다. 아내는 지금도 그렇지만 그 무렵에도 여간해서는 마음을 주지 않더군요. 만날 한다는 소리가 그래요.

"결혼도 중요하지만 그 과정이 중요한 것 아니겠어요. 난 미스터 김처럼 그렇게 무지막하게 대들면 오히려 물러나는 성미예요. "

"사랑에도 무슨 유예가 필요합니까? "

"그렇지만…… "

"그렇지만 뭡니까? 감이 떨어지기만 기다리고 죽치고 앉아만 있으라는 말씀이십니까? "

"그게 아니라요, 숨돌릴 틈을 주어야지요. 안 그래요? "

"그럼 내가 숨쉴 구멍도 터놓지 않고 어디를 졸라맸습니까? "

내가 정열에 못 이기는 젊은이나 되는 것처럼 마구 다그치니까 지금의 아내는 그때 기가 막히다는 듯이 웃더군요.

"그게 아니래두요. 결혼을 혼자 하는 건가요? 내 맘이라는 것도 있지 않아요? "

물론 이런 대화를 주고받은 건 학교를 졸업한 후의 일이고, 나는 그때까지도 당기는 끈을 늦추지 않고 잡아당겼습니다. 분명히 말해 두지만 그때 나는 미스 윤네 집이 그렇게 부자였기 때문에 그런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당연한 얘기로 그녀의 집이 굉장히 부자라는 사실에 은근히 끌린 것도 사실이기는 하지만, 전적으로 그 이유 때문에만은 아니었다는 거죠. 그 무렵만 해도 나에게는 아직까지도 결혼의 순수성이랄까 하는 것에 대한 믿음 같은 것이 있었던 것입니다. 요즈음도 그렇지만 그 무렵에도 정략 결혼이랄까 하는 따위, 주로 처가에서 반대 급부를 받겠다는 오죽지 못한 생각을 가진 치들이 있기는 했습니다만, 내 경우는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고 믿고 싶습니다. 내가 왜 이 대목을 강조하느냐 하면 결혼 생활 8년에 나도 어지간히 세속에 물들고, 쪼다가 다 되어 가는 편이기는 합니다만 그래도 한때는 안 그랬다는, 그만한 나이의 청년들이 갖게 마련인 패기 같은 것, 그런 꼬투리가 조금은 남아 있었다는 얘기를 하고 싶어서 그럽니다.

아무려나 미스 윤은 여간해서 함락이 안 됩니다. 지금 생각하면 내 인물 됨됨이가 시원찮았다기보다도, 워낙 배경이라고는 눈 씻고 찾으려야 어림 서푼어치도 없는 깡 촌놈이 되어서 그랬던 것이 아닌가 하는 어림이 가기도 하는데, 요즈막 아내의 됨됨이를 살펴보고 있노라면 어느 정도 그런 추측이 들어맞지 않았나 싶어요. 그러다가 나의 이런 꼴을 옆에서 보고 있던 선배나 친구녀석들이 그저 제일 좋은 수는 눈 딱 감고 일을 저질러 놓고 보라고 충동질인지 충곤지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나 이제나 남자 친구녀석들 충고라는 건 늘 이지경입니다. 일단 일을 저질러 놓고 나면 제가 어디를 가겠느냐는 거죠. 방법치고는 어느 면 원시적이기도 하고, 어느 면 직효가 있는 것 같기도 한, 말하자면 일종의 쇼크 요법이겠는데, 어떻게 생각하면 미상불 그럴 듯한 것이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가장 고전적인 방법이라 할 수 있는데, 이래 가지고 내 사람을 만든 다음에 어쩔 것인가 하는 회의가 뒤따르기는 해도, 남자 일반이 가지고 있는 소유욕을 달성시키고, 여자의 막막한 체념이 일치해서 어줍게나마 목적을 이루는 대목이 바로 이 방법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꼭 그래서는 아니었지만, 나는 어느 날 기어코 미스 윤과 일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이런 일이란 대개 다음 두 가지 경우로 요약됩니다. 하나는 이런 일로 해서 문제가 가속도적으로 해결되는 수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았다면 잘 풀려나갈 것을 바로 그 방법을 쓴 때문에 잘 가다가 일을 뒤틀리고 마는 수가 있는 거죠. 그런데 다행히도 미스 윤과의 관계는 전자의 경우에 속했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 이런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을 형편이 못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누구나 그렇듯 나도 결혼 초기에는 여러 가지 설계가 많았습니다. 내가 자라 온 과정을 생각해서라도 결혼만 하면 금방 너무나 타산적인 시정인(市井人)으로 곤두박질하는 선배들과는 달리 조금은 나 자신의 의식의 개발을 위해서, 조금은 사회를 의식하면서 자각 있게 살려고 했습니다. 정확히 여섯 시 반만 되면 딩동댕 문을 따고 들어가서, 저녁 먹고 텔레비전의 채널이나 이리저리 돌리다가, 시간 되면 그짓 하고, 아침이면 또 아내와 바이바이 하는, 그런 흐느적거리는 상태에는 결코 함몰(陷沒)하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했었습니다. 물론 그것이 사람이 사는 생활의 도식(圖式)이기는 합니다만 그런 가운데서도 뭔가 우리 나름의, 좀 개성 있는 생활, 탄력 있는 일상(日常)을 가지리라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래 봤자 내가 무슨 용가리 통뼈라고 특출하게 행동하겠다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런 생각마저도 없었다면 무슨 새로운 출발이겠습니까.

그랬는데, 어럽쇼! 그게 아니더군요. 처음 한 1, 2년은 짐작하다시피 눈 깜작할 사이에, 가 버리는지도 모르게 세월이 후딱 지났습니다. 신혼 생활의 재미, 뭐 그런 것에 빠졌다기보다도 뭔지 모를 그 달착지근하고 나긋나긋한 분위기에 젖다 보니까 그렇게 되더군요. 그러면서도 당초의 마음가짐 같은 것 그것은 버리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2, 3년째 되면서부터는 나도 모르게 서서히 흐물흐물한 생활의 구멍 속으로 빠져 들어갔습니다.

사무실에서 하는 일은 그렇다 치고, 집에 돌아오면 책 한 줄 읽는 게 뭡니까? 우선 냉장고에서 콜라를 한 병 꺼내서 단숨에 들이켜고는 목욕탕으로 들어갑니다. 들어가서 느긋한 기분으로 콧노래를 부릅니다. 그런 때 아내가 빠꼼히 문을 열고 말합니다.

"물이 좀 차지 않아요? "

"아냐, 마침 좋아. "

"오늘 저녁은 뭐가 좋겠어요? "

"아무거나. "

"햄벅스테이크를 한번 만들어 보려는데 그것 어때요? "

"그거 좋지. "

"오늘 집에서 전화가 왔는데 모레가 어머님 생신이래요. "

"그래? "

"그날 저녁에 모두 모여서 파티를 연다니까 그날 일찍 집에 들어왔다가 나하고 같이 가요. 알았죠? "

"알았어. "

목욕탕에서 나오면 아내가 걸쳐 주는 가운을 입고, 소파에 푹 파묻혀서 식전주(食前酒)로 마티니 한 잔을 손에 듭니다. 텔레비전에서는 젊은 여가수가 엉덩이를 흔들며 간드러지게 노래를 하고 있습니다. , 그 느긋함이라니. 비록 처가덕에 하는 호강이기는 합니다만, 그러고 보니 세상의 구질구질한 사건이나 일들이 아닌말로 피안(彼岸)의 불이나 나와는 인연이 없는 딴 세상 일처럼 보이더군요. 예나 지금이나 우리 사회에는 얼마나 까탈이 많고 말썽이 많습니까. 그러나 그런 것들이 내게 있어서는 저 발 밑으로 보이더라니까요. 도무지 그런 일들에 신경 쓰기가 귀찮기도 하고, 한편으론 누가 나의 이런 생활을 깨뜨릴까봐 은근히 겁도 나고 그렇데요.

그리고 내가 학생 시절이나 그 전후를 통해서 그토록 고생한 것도 모두 오늘의 이 안일(安逸)을 얻기 위해서였다는 자위가 생깁니다. 고생 많이 했느냐구요? 말 마십쇼. 누구 말마따나 안 해 본 게 없습니다. 가정 교사 같은 건 약과구요, 노점상, 행상, 심지어 어떤 때는 노동판도 기웃거렸습니다. 물론 이런 것들을 장기간씩 한 것은 아니고 임시임시 한 것이긴 하지만 참 여러 가지 했습니다. 아내와 교제할 때는 이런 내색을 하지 않고 그저 머리 좋고 똑똑한 학생인 척만 했습니다. 아닌게아니라 좀 쑥스러운 얘기기는 해도, 제가 생각해도 머리 하나만은 괜찮은 편인 것 같습니다. 한 번만 떨어지고 두 번째에는 행정 고시에 거뜬히 합격했으니까요.

말하자면 나는 이 머리 하나 좀 괜찮은 것 가지고 부자집 딸을 얻은 셈인데, 아내도 차츰 내 바닥을 알고 나서는 다소 실망하는 눈치였습니다만, 알아봤자 이제 어쩔 것이냐 싶었던지 그때부터는 차츰 나를 그 대단치 않은 벼락부자 사회의 일환으로 일종의 사육(飼育)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까지도 내 몸에 배어 있던 촌놈 냄새를 털어 내고 닦아 내고 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건방지게 때가 그때까지 지니고 있던 그런 따분한 연줄, 가령 그 또래의 친구나, 동기간 친척 나부랑이들과도 되도록 인연을 끊도록 작용했습니다. 우스운 것은 내 스스로 그러지 말자고 속으로 다짐하면서도 큰 저항 없이 아내의 손길에 끌려갔습니다. 우선 그런 사회나 생활이 편해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아내는 어느 편이냐 하면 좀 찬 여잡니다. 그만그만한 수준의 사람들이나 친구들과는 더할 수 없이 다정하게 굴다가도 경제적으로 신분상으로 별 볼일 없다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매몰차게 싹 등을 돌립니다. 집에서 일하는 옥순이가 글쎄 어느 땐가 기어가는 목소리로 겨우겨우, 아주머니 월급 좀 2천 원만 올려 주세요, 하니까는 뭐라고 뭐라고 따따부따하더니 결국 5백 원을 올려 주더군요. 언젠가는 또 스팀 들어오는 파이프가 고장이 나서 관리 사무소 수리공이 멍키스패너 같은 걸 들고 온 적이 있습니다. 청년은 고장이 의외로 까다로왔던지 땀을 뻘뻘 흘리며 고치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 수고하는 모습이 보기에 안 되어서 주스나 한 잔 타주라고 그랬더니 뭐라고 한 줄 아세요.

"저런 사람들 그러면 버릇돼서 안 돼요. 당신은 그런 일 참견마세요."

하더군요. 그래 놓고는 언뜻 자기도 주스 생각이 났던지 부엌으로 들어가 자기만 주스 원액(原液)에 물을 부어서 한 컵 시원히 들이켜더군요.

조금 전에 옥순이의 월급을 천 5백 원이나 깎아서 5백 원만 올려 주었다고 했습니다만, 바로 그 전날에도 아내는 친구들과 어울려 노름을 벌여서 만 원 가까이 딴 것을 나는 압니다. 아내 친구들은 심심하면 어울려 섰다판을 벌입니다. 장소를 옮겨가면서 하는데 보통 판돈이 천 원 안팎은 되나 봐요. 그들은 노름을 하면서 실컷 먹고 지껄이고 그럽니다. 그 날은 토요일이었는데 집에 왔더니 한패가 몰려 앉아서 그 짓들을 하고 있더군요. 아내는 내가 왔는데도 나를 옆방으로 쑤셔 넣고는 친구들더러 그냥 괜찮다고 계속하자고 그러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방음 장치가 잘 된 고급 아파트이긴 해도 그들의 왁자한 소리는 다 들렸습니다.

그들의 화제는 무궁무진했는데, 이상하게도 사회적인 문제나 정치에 가까운 문제, 그런 것들은 하나도 없더군요. 배우 얘기, 먹는 얘기, 친구 얘기, 참 화제도 많데요. 그런데 대학깨나 나왔다는 그들의 대화 속에서 나는 요상한 것을 발견하고 혼자 히히 웃었습니다. 예를 들면 말 속에 영어 단자가 나오는데 ㄱ과 ㅋ의 발음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 등이 그중의 하나입니다. 기타는 꼭 키타라고 그러고, 쟝 갸방을 쟝 캬방으로, 클라크 게이블을 케이불로, 레스토랑을 트랑이 라고 하는 따위였읍니다.

"얘 요즘 테레비에서 키타 메고 나와서 노래하는 머슴애 있지? 고것 참 깜찍하드라. "

", 한번 연애하고 싶어?"

"어머머 얘가, 그렇다는 얘기지 머."

"늬네들 을지로에 새로 생긴 레스트랑 가 봤니? 스데끼 솜씨가 기가 막히드라. "

"레스트랑이고 뭐고 여행이나 한번 나갔으면 해. 근데 우리 그이가 당최 틈이 나야 말이지."

", 요새는 왜 그렇게 시시한 영화만 들어오니? 배우도 그래. 그전에 보던 그 크라크 케이불처럼 시큰둥한 배우는 인젠 볼 수 없드라."

"크라크 케이불이고 할애비고 장땡 나왔다, 장땡. 어쩔 테냐."

"얘얘, 좋겠다, 좋겠어. 다 갖다 먹어라."

", 시시하다. 우리 점이나 치러 갈까?"

"그럴까?"

"그래, 그게 좋겠다."

이윽고 그들은 네댓 명이 화투판을 치우고 우 몰려나갔습니다. 아내는 날더러 옥순이가 시장보러 갔으니 오거든 미리 저녁 먹으라고 해 놓고는 그들을 뒤따랐습니다. 나가다가 아내는 신문 값을 받으러 온 소년과 마주쳤습니다.

", 너 잘 왔다. 근데 얘. 어떤 집에선 450원에 본다더라 얘, 근데 넌 꼬박꼬박 6백 원씩 받아가니?"

"그렇게 안 돼요."

"뭐가 그렇게 안 돼, 다들 그러는데."

"그건 총무하고 말씀하셔야 해요."

"얘가? 그럼 총무를 데리고 와. 아무튼 지금은 없으니까 나중에 와."

아내는 핑하니 친구들 뒤를 따라 사라졌습니다. 아내는 노름이나 점을 좋아할 뿐 아니라 고사를 지내기도 좋아합니다. 대개 한 달에 한 번씩 고사를 치르는데, 그때는 장모가 와서 빕니다. 아마 장사를 하는 처가에서는 옛날부터 내려온 풍습인 것 같은데, 그것을 사위에게까지 물려 준 셈입니다. 시루떡이나 돼지머리, 뭐 그런 등속의 제찬을 차려 놓고 장모가 두 손을 크게 올렸다 내렸다 하면서 비는 것입니다.

"대왕님 대왕님, 서울 ×동 김씨 문중 굽어살피시와 그저 운수대통하고 무병무탈하게 해 주사……"

격식이나 제대로 갖추었는지 모르겠으나 아무튼 이런 식으로 비는 것입니다. , 대명천 이 밝은 세상에 이 문명된 동네에서, 이 무슨 당찮은 의식인지요. 그러나 더 이해를 못할 것은 이런 고사가 끝나면 금방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선선한 얼굴로 슈베르트나 그와 비슷한 이름의 음악가들의 명곡 나부랑이를 트는 아내의 마음입니다. 일면 의젓하고 교양 있어 보이기도 하고 일면 형편없는 무식꾼 같기도 한 아내를 놓고 나는 그 해답을 못 얻을 때가 많습니다.

어떻든 이런 속에서도 나는 차츰 아내의 생활 방식 쪽으로 순치(馴致)되어, 평온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더러는 오장 육부가 뒤틀리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것만 참으면 나의 생활은 그런대로 평온하고 어떤 리듬을 타고 흘러갔습니다. 내 어줍잖은 속물 정신이나 적어도 겉으로는 무사 안온한 생활 속으로 애써 파장(波長)을 맞추려 했다는 게 옳은 해석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어머니는 이럴 무렵에 올라오셨습니다. 어머니는 처음엔 완전히 얼어 있었습니다. 불공스런 표현을 빌면 촌닭 장에 나온 것처럼 어리둥절해 했습니다. 지금까지 자기가 살아온 것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환경 속으로 들어왔으니까 의당 그럴 법도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어떻든 손아래 사람인 며느리 앞에서도 제대로 고개를 쳐들지 못하고 매사에 쭈뼛쭈뼛 뒷걸음질을 치는 것 같았습니다. 보통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그러는 것 같은 말투를 한 번도 못 보았습니다. 완전히 앞뒤가 뒤바뀐 느낌이었습니다. 더러는,

', 애들을 그렇게 기르는 것 아니다. 그러면 버릇이 나빠져 못써. '라고 할 수도 있는 일이고,

', 글피가 아범 생일날이다. 알고 있지? 핑계삼아 시루떡이나 한번 해 먹자. 아범이 어려서는 무척 시루떡을 좋아했느니라. ' 한다든가 하면 좋겠습니다. 도무지 그런 일이 없이 어느 편이냐 하면 슬슬 눈치만 보는 것 같은 형편이었습니다. 대개 없는 사람이 있는 사람 앞에서 속으로는 그렇지 않으면서도 겉으로는 야코가 죽어 가지고 미싯미싯 뒷걸음질을 치는 수가 있는데, 바로 우리 어머니한테서 그런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보통 볼 수 있는 고부간의 트러블 따위, 자잘고롬한 다툼질은 없어서 내가 염려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아 한결 마음은 편했습니다마는, 어머니가 그처럼 구석으로만 기어드는 형용을 보는 것도 나로서는 괴로운 일이었습니다. 대놓고는 말을 못 해도 나는 속으로는, 어머니 힘을 내세요 힘을, 하고 외치고 싶은 때가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올라오신 지도 어느덧 다섯 달 가까이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처음보다는 많이 주위 환경에 익숙해진 것 같았습니다. 차츰 전기 세탁기나 전기 밥솥 등속을 조작할 줄은 몰라도 그 요령은 터득해 갔습니다.

"오메, 참 신통하기도 하다. 어쩌면 이렇게 사람보다도 빨래를 잘 한디야? 이것 하나 사는 데 돈이 얼매나 든댜?"

세탁기 앞에서 넋을 잃고 감탄하기도 했습니다.

"얼래, 사람 가늠보다 낫네. 저 혼자 알아서 밥이 다 되면 전기가 가노만. 참 존 시상도 있었고만."

전기 밥솥을 이리저리 쓰다듬으면서 무척 희한해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어머니를 아내는 차디차게 쳐다보았습니다.

어머니가 오시면서 또 한 가지 달라진 것은, 어머니가 끈이 되어 주변의 그런그런 우리 쪽 친척들이 줄레줄레 꾀어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대개는 어머니를 뵈러 온다는 명분이었는데 어머니는 그런 그들 앞에서 한편으론 자랑스러운 기색을 보이기도 나고, 한편으론 아내에게 미안한 눈치도 보이고 그랬습니다.

"성님은 아들이 그렇게 성공해서 얼매나 좋겠소."

". 지가 고생해서 밥술이나 먹게 되었는갑만."

어머니는 내 형편이 처가 쪽 힘으로 이렇게 된 줄 뻔히 짐작하면서도 친척들 앞에서는 그런 내색을 하지 않았습니다.

아내는 그래도 어머니는 시어머니니까 참는다 치고, 우리 집에 이처럼 격에 안 어울리는 엉뚱한 손님들이 드나드는 것을 몹시 싫어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머니가 오시기 전까지는 우리 집을 찾아오는 사람들은 모두 그럴 듯하고 맞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더라도 꼭 빈손으로는 오는 법이 없고 미제 깡통이다 사탕이다 뭐다 해서 잔뜩 사 가지고 와서는 얌전히 앉아 도란도란 얘기를 하다 가는데, 어머니의 일가붙이들은 처음에는 아내의 찬바람에 주눅이 들어 말도 제대로 못하다가도 아내가 잠깐 자리라도 비우면, 시골 사람 특유의 그 독 깨지는 소리로 막 떠들고 웃고 그랬습니다. 거기까지는 괜찮은데, 식당이나 침실까지 몰려와서 무슨 구경거리나 되는 것처럼 이것저것 가구를 만져 보기도 하고, 입을 헤벌레 벌려 놀라기도 하고, 눈을 화들짝 치떠서 감탄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는 꼭꼭 그 살림의 값을 물어 보기도 하고 그러면서 또 입을 비쭉거리기도 했습니다. 우스운 것은 옥순이년이 이런 사람들의 거동을 아주 못마땅하게 경멸하면서 대하는 일이었습니다. 모두 저와 비슷한 처지의 사람인데도 말입니다. 아내가 오면 이런 일들을 일일이 까바쳤습니다.

어머니는 이런 손님들이 오면 그래도 얼굴에 희색이 돌며 얘기도 하고 그랬는데, 그들도 찾아오지 않고 하는 날은 방안에 죽치고 앉았다가, 베란다를 나갔다가 하면서 무료함을 삭이지를 못했습니다. 어쩌다가 아이들에게 말을 붙이지만 녀석들은 그런 어머니에게 대번에 핀잔만 주는 것이었습니다.

". 너 먹는 것이 무슨 사탕이냐? 너무 단 것 많이 먹으면 이빨이 삭는다는디."

"할머닌 몰라. 이건 말야, 이빨이 좋아지는 사탕이랑게. 히히."

"시상에 그런 사탕도 있다냐?"

"그렇당게."

이처럼 어머니는 많은 시간이 갔는데도 완전히 외딴 섬처럼 우리집 생활에 어울리지를 못했습니다. 철저히 혼자 겉도는 느낌이었는데, 그것은 반드시 식구들이 어머니를 받아들이는 태세가 덜 되어서 그런 것만은 아니고, 더 많이는 어머니 자신이 살아온 너무 동뜬 세월로 하여 쉽게 끼어들지를 못한다고 보는 것이 온당할 법도 합니다.

가령 오늘 저녁만 해도 그렇습니다. 아이들의 요청으로 저녁은 오므라이스를 만들었는데 어머니는, 이것이 머시다냐 하면서 한두 입 떠넣더니 금방 이맛살을 찌푸렸습니다.

"아이고, 무신 밥이 요로케 시고 지름지다냐. "

하시더니 속이 메슥거리는지 화장실 쪽으로 건너갔습니다. 그걸 본 아이들이 히히히 웃었습니다.

"촌 할머니, 촌 할머니. 오므라이스를 못 먹는데. "

"히히, 이걸 먹으니까 배가 아픈가봐, 히히. "

어머니는 끝내 식은 밥을 갖다가 김치하고만 자시는 것이었습니다. 언젠가는 또 우유를 한 컵 마시더니 대뜸 설사를 한 후로는 다시 우유를 거들떠 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항상 한다는 소리가 그랬습니다.

"느그 집 음식은 왜 이렇게 달고 시고 느글느글하다냐. "

그래서 상추 같은 걸 사다 드리면 또 투정입니다.

"무신 놈의 상추가 요렇게 함박만 하디야. 싱겁기만 하고. "

어머니는 아마 이런 대 시골서 먹던 재래종 상추를 생각하는 모양인데, 그러고 보면 어머니는 때때로 그런 등속의 나물을 찾는 때가 있습니다.

"지금쯤 돈나물이 한창일 틴디. 그걸 고추장에 무쳐 먹으면 개운한디. "

또는 이런 말도 합니다.

"느그 집은 씨라구국 같은 건 안 끓이냐? "

우리 집에서는 애당초 먹지 않는 그런 것들을 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참 이상한 구석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머니의 그런 밑도 끝도 없는 말에서 나는 불쑥 어렸을 때의 그 친숙한 미각(味覺)들이 되살아나고, 그 연장선상(延長線上)에 잃어버린 고향이 서서히 떠올랐습니다. 그것은 마치 어떤 조건반사(條件反射) 같은 형식으로 나의 지금까지 숨겨지고 닫혀 있던 구석을 열게 하는 구실을 했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어렸을 때 겪은 일이나 다져진 미각을 오래 못 잊다가 어느 날 갑자기 그것이 떠오르면 그것과 연관되는 여러 가지 일들까지 함께 연상하는 버릇이 있지 않습니까? 내 경우가 바로 그랬습니다.

처음에도 얘기했지만 나는 원래가 형편없는 촌놈이었습니다. 어쩌다가 서울바닥에서 구르고 부대끼는 동안데, 그리고 도시물에 세련되고 어쩌면 어수룩한 구석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닳고 닳은 여자와 결혼해서 그런 촌놈의 때를 거의 벗기는 했습니다만 근본이야 어디 가겠습니까. 다만 내 현재의 생활이 이렇게 안온하고 평온하다 보니까 이제는 누가 내 생활을 빼앗아 갈까봐 선머슴 불알 움켜쥐듯 그것만 잔뜩 감싸쥐고 오늘이 어제 같고 어제가 오늘 같은 허허한 생활을 오히려 사랑해 왔습니다. 사람이 한번 그런 늪에 빠지니까 그런 상태를 누가 훼방놓을까 겁이 나고 조금이라도 누가 성가시게 한다거나 옆에서 큰 소리만 쳐도 외면하고 싶어지더군요. 요컨대 나와 상관 없는 것은 알 필요가 없다는, 그래서 자기 구멍 속으로만 자꾸자꾸 움츠러들게 되더군요. 아내는 그게 나보다 더 철저합니다. 신문을 보더라도 무슨 살인 사건이니 데모니 하는 살벌한 기사에는 눈도 돌리지 않고 기껏 연재 소설이나 텔레비전 프로를 보고 나면 휙 던지고 맙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언뜻 내뱉는 그런 하찮은 말에서 나는 불현듯 지금까지 내가 오랫동안 잊고 살아오던 것이랄지, 내 뼈가 굳은 고향 마을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지게 지고 나무하던 생각, 콩서리 해먹던 생각, 맨된장에 보리밥 찍어 먹던 생각, 개울에서 미역감던 생가, 구장네 딸 순이 생각, 비만 오면 나타나던 미친년 생각들이 났습니다. 아울러 갑자기 호박떡이 먹고 싶고, 풀떼죽이 먹고 싶고, 밀전병 같은 것이 먹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나는 어느 날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오늘은 풀떼죽 한번 해 먹지. "

그 말이 떨어지자 옆에서 듣고 있던 어머니가 좋아라고 내 말을 거들었습니다.

"그려. 오래 안 먹응게 먹고 싶고만. "

"어머니, 할 줄 아시죠? "

"그걸 말이라고 허냐? 눈 감고도 쑤것다. "

"아니 풀떼죽이 뭔데요? "

아내가 모자끼리 잘도 죽이 맞는다는 식으로 좀 어눌하게 말했습니다.

"그런 게 있다구. 어머니한테 맡기면 돼. "

그러나 그걸 쑤자면, 팥은 사 오면 된다 치고, 우선 주재료가 되는 늙은 호박 말린 것을 구할 수가 없어서 내 제의는 그냥 묵살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또 아내가 끝내 시큰둥하게 받아들여서 재료가 있다 한들 안될지도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나는 차츰 어머니와 고향 이야기도 나누었습니다.

"그 왜 우리 앞집에 살던 용철이네는 어떻게 되었죠? "

"? 용철이? 글씨 저지난 해에 식구들이 몽땅 서울로 안 왔간디? 딸이 불렀어야. 어디 산다고 그러드라? 퍽 고생한다고 하던디. 지금은 어떻게 사는지 모르것다. 거기도 힘을 좀 잡어야 할 것인디. "

"순이네는요? "

"순이? 그 집은 살게 되었다. 아들이 머시라더라 월남인가 어디를 댕겨온 뒤로 도야지를 길렀어야. 그것을 한 배 두 배 늘리더니 요새는 한 이십 마리 되는가 몰라. 아조 힘 잡았지. "

", 잘했군요. "

"잘하고말고야. 원체 사람들이 고진이랑게. 순이 아버지라는 사람이 법 없이도 살 사람 아니간디? "

어머니는 이런 유의 화제만 나오면 신바람이 나서 얘기를 했습니다. 그런 옆에서 아내는 손톱을 열심히 갈고 닦고 있었습니다. 이런 날 아내는 잠자리 속에서 말했습니다.

"저 양반이 오신 다음부터 집안 분위기가 좀 눅눅해졌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

나는 마음속으로, 흥 눅눅한 것 좋아하네, 하면서 한대 쥐어박기라도 하고 싶은 생각이었으나, 오랫동안 길들여진 나약한 마음이 그걸 막았습니다.

"시골양반이라 분간을 못해서 그런 걸 어떡해. 우리가 이해해야지. "

짐짓 태연함을 가장하고 말했습니다.

, 아내의 말마따나 무광택 장롱처럼 반들반들하고 천정에 높이 달린 화사한 샨데리아처런 그렇게 일단은 번드르한 우리들의 생활에 어머니가 몰고 온 그런 건건 찝질한 분위기가 어떻게 조화를 이루어 갈 것인지 나는 모릅니다. 그러나 나 자신은 바로 그런 어머니로 해서 오랫동안 외면하고 살아왔던 흙냄새 같은 것, 그리고 좀 크게 얘기하면 애써 잊고 살던 이 시대의 한 부분 같은 것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이대로 가다가 어느 때 아내가 너무 깝죽댄다 싶으면 그리고 그 날 내가 얼근히 술이라도 취했다면 나는 아내의 볼이라도 쥐어 박으며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 ×년아, 좀 솔직하게 살자. "

죽었다 깨나도 내가 그렇게는 못할 것이라고요? 헤헤, 또 압니까?

 

 

 

최일남(崔一男: 1932- )

 

전북 전주 출생. 서울대 국문과 졸업. 1953<문예>[쑥 이야기]가 추천되어 등단. <동아일보> 논설위원, 단국대 강사 역임. 그는 현실에 기저한 인간의 본연적 자세에 천착하여 해방 전후와 50년대의 역사적 격동을 살아온 변두리 인물들의 생생한 초상을 묘파하는 세태 소설 작가로 평가되고 있다.

주요 작품으로는 [흔들리는 섬], [홰치는 소리], [동행], [춘자의 사계], [춤추는 버마재비], [흐르는 북]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