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수필5

고리

자한형 2022. 9. 4. 2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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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리-조현숙

새 노트를 선물로 받았다. 책상 위에서 얌전하게 납작 엎드린 모양새가 무엇이라도 어떤 것이라도 받아 적어드리겠다는 충성의 몸짓으로 느껴진다. 아무것도 기록하지 않은 종이의 순결 앞에서 박력 넘치게 달려들어 명문장 하나 쓰지 못하고 머뭇거리다 생각의 흐름에 내 손을 맡긴다. 아무 관련성도 없는 단어들을 나열하는 동안 종이를 간질이는 연필심의 사각거리는 소리가 뜻밖의 즐거움이라면 즐거움일까. 귓속을 속살거리는 소리와 등판을 따뜻하게 덥히는 창밖의 햇볕에 까무룩 잠이 들었고 잠시 후 핸드폰 문자 알림 진동에 잠이 깼다.

노트의 첫 장에 연민으로 시작한 낙서를 진동으로 서둘러 적고는 문자를 확인했다. 장문의 문자메시지는 항공사 알림 문자였다. 더할 나위 없이 깔끔하고 의역하여 오해할 여지가 하나 없는 건조한 문장을 촘촘히 읽다가 돌연 뒷덜미가 짜릿해지는 날카로움을 느꼈다. 작년 뇌출혈로 쓰러져서 재활 중인 서울에 계신 엄마를 생각했으면서도 비행기 표의 목적지는 청주였다. 단 한 번도 표를 잘못 끊는 일이 없었다. 이해할 순 없었지만, 이해 못 할 나의 행동이 어쩌면 무의식일지도 몰랐다. 그런 인식은 표를 물리고 새로운 표를 구매해야겠다는 분주한 생각도 들지 않게 할 만큼 침착하게 했다. 머리와 마음이 이렇게 다르게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엄마에게는 명절 방문을 알리지 않았으니 예정대로 청주행 비행기를 탔다.

청주에는 엄마의 엄마가 살고 있다. 청주에서 태어나지는 않았어도 청주가 고향 같게 느껴지는 건 오로지 외할머니 때문이었다. 다른 이들의 어릴 적 이야기를 부럽게 들으며 반추해 봤어도 서정적 향수를 끌어낼 정도로 아름답지도 깔깔거리며 웃을 만큼 재미난 일이 없다. 그저 청주라는 공간은 서울에서 적응 못 한 가난한 부부가 어린 자녀를 데리고 살기 위해 정착한 인큐베이터 같은 곳이었다. 엄마라는 기댈 언덕이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엄마는 어린 나와 동생을 할머니에게 맡겼다. 열 살 여자아이는 측은과 염려가 깃든 어른들의 표정에 앙다문 미소를 지으며 다 큰 애처럼 행동했지만 끝내 불안해했다. 불안은 가벼운 도벽으로 진정되었다. 부엌 찬장 속 종지 그릇에 담긴 동전을 훔치기 시작했다.

나무로 만든 찬장 속에선 매콤 짭짤한 고추장 장아찌 냄새가 가득했다. 몰래 들어가 동전을 고르다가 느닷없이 찾아온 허기에 맨밥을 비벼 먹었다. 부뚜막에 어정쩡한 자세로 앉아서 한 숟가락 입에 넣고 재래식 부엌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손바닥만 한 창문에서 들어오는 한 줄기 빛의 궤적을 따라 부유스름하게 퍼지는 먼지의 알갱이를 응시하는 것도 좋았다. 고소한 참기름과 고추장만 있어도 행복했다. 오래도록 나오지 않는 나의 행각이 수상쩍기도 했고,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이라지만 좀도둑질은 끝까지 들통나지 않았다. 지금에야 드는 생각이지만 조그마한 잡화점을 운영하여 셈에 밝은 할머니는 동전이 줄어든 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손녀딸의 유일한 일탈을 눈감아 준 것은 자비의 마음이었다. 나는 그렇게 훔친 돈을 문방구로 가서 바로 탕진했다. 연필과 메모지 따위를 사고 노트에 글자들을 끄적거리며 회 초록빛 유년기를 보냈다. 자랑할 만한 추억보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추억만 선명하다. 그런데 나의 무의식은 왜 그곳에 가려고 했을까.

빌라 현관에 들어서니 어두컴컴한 거실 끝 주방 쪽 형광등 불이 희미하게 새어 나왔다. 배추를 넣어 끓인 된장국에 찬밥 한 덩이가 섬처럼 들어앉아 있다. 그 흰 섬이 잘게 부서져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는 동안에도 할머니는 내가 온 것을 몰랐다. 식사가 다 끝나갈 무렵 겸손하게 굽은 등을 손으로 쓸어 담을 때 내가 온 것을 아셨다. 기역으로 꺾이다 못해 디귿이 되어버리다가 종국엔 동그랗게 말아질 것 같은 등 위에 업혀서 잠들었을 아기 때의 내 모습이 스쳐갔다. 저 등에 우리 엄마도 삼촌들도 이모들도 그리고 나와 이종사촌들도 업혔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숭고한 수그림 앞에서 저절로 고개가 숙어졌다.

못 본 일 년 사이 손등과 피부에 저승꽃이 많이도 피었다. 그런 꽃은 아니 보고 싶어 눈시울이 붉어질 그 찰나 할머니 눈빛도 반짝 빛나 보였다. 울음기를 재빨리 숨기려 장 본 것들을 풀었다. 뭐니 뭐니 해도 명절엔 기름진 냄새가 제일 필요했다. 노른자로 부친 호박전과 대구전을 한 접시 수북하게 담으니 샛노란 태양이 집안에 들어온 듯 환하다. 사람 온기 없는 집에 기름 냄새가 낯설었는지 때마침 들어온 삼촌이 얼떨떨한 표정을 보였다. 삼촌에게서 하릴없이 거리를 배회한 듯 짙은 회색 먼지 냄새가 풍겼다. 406090대 우리 셋은 둥근 밥상에 앉아 떡국을 먹었다. 할머니의 아흔세 번째 설이 지나가고 있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것 같다고 할머니는 말했다. 밥상을 물리고 할머니와 오붓이 마주 앉은 나는 불현듯 나의 무의식이 만들어 낸 계획의 의도가 암실 속 필름처럼 서서히 드러나고 있음을 알았다. 항공권을 잘못 끊은 것이 아니었다.

다시 집안에 익숙한 어둠이 내리고 할머니와 단둘이 무릎을 맞대고 앉았다. 자정으로 가는 고요한 시간 소곤대는 소리도 크게 들리건만 못 알아듣는 게 미안한지 할머니는 종이에 글자를 적는다. 잉크가 말라버린 펜을 버리고 잘 나오는 굵은 펜을 쥐여 드리자 "손녀딸 현숙아." 하고 썼다. 그 또렷함에 코끝이 쨍 해졌고 종이에 적히 글씨에서 할머니 음성이 애잔하게 들려와 눈물이 핑 돌았다. 선명하게 잘 보이는 글씨를 쓰다가 멈춰 나를 보며 속이 다 시원하다는 표정으로 티 없이 맑게 웃는다. "넌 참 소용스러웠지." 할머니와 나는 주거니 받거니 종이에 말을 적어서 교환했다.

할머니의 낡은 보청기가 반항하듯 비명을 지르고 거실에 누워 잠을 청하는 삼촌이 크게 틀어 놓은 태극기 부대의 시위 소리가 알 수 없는 깊은 슬픔에 빠져들게 했다. 할머니는 글자 하나하나에 진심을 담아 적는 듯했다. 고맙다, 기도할게, 사랑한다. 그리고 엄마를 부탁해. 그 문장을 눈으로 읽으면서 엄마를 위해서 할머니를 만나러 온 것임을 알았다.

나에게 상처 주기를 멈추지 않는 엄마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할머니의 연결이 필요했다. 나는 어릴 때나 지금이나 엄마의 울분과 화를 받아 내주는 착한 딸이었다. 어릴 때는 어렸기에 속수무책이었고 커서는 한 여자의 일생이 안타까워서 입술을 꽉 물었다. 엄마의 얼굴에 드리운 수심을 조금씩 떼어먹으며 자란 나는 어딘가 비상탈출구 같은 곳을 찾고 있었던 거였다. 나 역시도 상처투성이인데 할머니가 내 손을 너무도 간곡하게 잡고 "엄마를 부탁해."라고 말했다. '저도 상처가 많아요'라고 말하려는데 할머니의 목소리와 손에서 무너져 버릴 것 같은 떨림이 느껴져 그만두었다.

"할머니 우리 어렸을 때요..." 이 말은 어떻게 알아들으셨을까. 할머니의 눈이 촉촉하게 빛났다. 눈물 고인 눈으로 말하는 이의 애절함에 용서 못 할 사람이 어디 있고 상처가 어떻게 덧날 수 있을까. 삶의 어느 한 시절에 우리를 왜 맡겼는지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나는 아무렴 괜찮다고 애쓰던 마음에서 진정 자유로워졌다. 할머니는 당시 어린 내가 동생의 빨래를 했던 모습이 가장 마음이 아팠다고 고백했다. 나는 기억도 없는데 말이다. 할머니의 양심은 나이가 들수록 맑디맑아져서 마음에 걸리게 했나 보다. 자신에게 못 해 준 남을 원망하고 억울한 것을 기억하며 사는 노년보다 아름다웠다. 어느 정도의 나이가 되면 지나간 일들을 회상하고 사람을 생각하며 자신이 그들에게 못 했던 것을 알게 된다면 인간은 자연스레 무엇을 하게 될까.

내가 알지 못하는 생애의 많은 조각을 조금씩 알게 되면서 묵직한 숨이 새어 나왔다. 할머니를 다급하게 찾고자 했던 나의 무의식의 근간에는 엄마를 이해하고 싶다는 의지가 있었다. 엄마에 대한 연민과 원망이 갈마드는 나를 할머니는 연민만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 주었다. 세상의 모든 존재는 존재 자체로 의미가 있다. 먹고 자고 노는 게 일인 아기들의 안일함이 부럽다지만 나는 아기만큼 순진무구함으로 기쁨을 줄 능력이 없고 다 쓴 건전지처럼 힘은 없어도 묵주를 손에 쥐고 기도하는 노인은 그 자체로 충분했다.

오래된 브라운관 TV의 푸르스름한 빛이 할머니의 얼굴 위로 어른거린다. 그 빛을 조명 삼아 노트를 펼쳤다. 두 번째 페이지에 연결이라고 적었다. 그리고 눈을 감고 잠시 머물러 있으니 할머니의 음성이 들려오는 듯하다. 엄마를 부탁해. 나는 연민으로 연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