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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가 된 미국대통령 JFK를 추모하며

자한형 2022. 9. 14. 2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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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가 된 미국대통령 JFK를 추모하며

 

 

얼마 전 TV프로그램 세계 다크투어에서 투어가이드 전남대 김봉중 교수를 모시고 수많은 의혹에 휩싸여 있는 케네디의 암살에 관한 여행을 떠났다. 함께 여행에 참여한 이는 봉태규, 박나래, 장동민 등이었다. 여행지는 JFK 최후를 마친 텍사스 댈러스였다. 196311221230분 달라스 릴리플라자 공원 옆 휴스턴스트리트를 지나 엘림스트리트로 지나던 대통령부부와 텍사스주지사 내외를 태운 차량 컨버터벌에 총탄 세 발이 발사되었다. 전 세계에 생중계 되던 카프레이드 도중에 발생한 비극적 사건이었다. 첫발은 빗나갔고 두 번째 총알은 대통령의 목에 그리고 6초 후에 발사된 세 번째 총탄은 머리를 관통해 뇌에 치명상을 입혔다. 2001년의 911테러와 더불어 미국의 비극적 5대 사건에 꼽히는 사건으로 아직까지도 미국 사람들의 가슴속에 충격적이고 비운의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다. 피살된 상황은 고스란히 TV로 생중계 되었다. 대통령과 주지사 부인이 나눴던 최후의 대화내용은 이랬다. “대통령님 댈러스 사람들이 더 이상 대통령님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 못하시겠죠?” 케네디 대통령 대답으로 말한 것은 아무렴, 그렇고 말고.” 이었다. 이것이 케네디 대통령이 남긴 최후의 유언이 되었다. 그는 댈러스 일정을 브리핑 받은 후 힘든 일정이 될 것 같군이라고 어두운 전망을 하기도 했다. 피격된 대통령을 태운 차량은 곧바로 인근에 소재한 마크랜드 메모리얼 병원으로 달렸다. 소요시간은 8분 정도였다. 담당의사는 말콤 페리란 의사였다. 심폐소생술과 기관지 삽관 등을 시도했으나 병원 도착 후 20분 만에 과다출혈 등으로 사망했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대통령의 나이 향년 46세였다. 암살 사건이 일어난 후 수사진은 곧바로 범인 색출에 돌입한다. 대통령 저격 장소로 추정된 곳은 학교도서보관소 6층의 창가였다. 건물로 진입해 수색하기 위해 2층으로 수색했는데 그곳에서 경찰관은 대통령을 저격하고 2층으로 내려온 리 하비 오스왈드(24)를 만났다. “누구냐?”고 심문하는 경찰관에게 문서보관소 직원이 우리 직원이에요라고 답변하여 무사히 문서보관소 건물을 유유자적하게 빠져나간다. 그는 건물을 빠져나와 버스를 탔다가 다시 택시로 자신의 하숙집으로 가서 그곳에서 권총을 챙겨 다시 거리를 배회하던 중에 또다시 경찰관 J D 디피트에게 의심을 사자 곧바로 권총을 꺼내 총격을 가한다. 오스왈드는 순식간에 4발을 발사해 경찰관이 즉사한다. 오스왈드는 거리를 가로지른 후 인근의 영화관으로 숨는다. 그러나 곧 경찰의 추격을 받아 범행 80분 후 영화관 뒷좌석에서 체포된다. 체포당시 그는 나는 희생양일 뿐이다.” 라는 말을 남겼다. 그는 이틀 후인 1124일 댈러스 교도소에서 카운티 교도소로 이감되기 위해 이동하던 중에 댈러스의 나이트클럽 사장이던 잭 루비의 총격에 의해 갈비뼈에 총탄을 맞고 곧바로 병원으로 이송된다. 그러나 그 역시도 병원에서 사망한다. 잭 루비 또한 감옥생활을 하던 중 암으로 1967년 감옥에서 사망한다. F. 케네디 대통령의 유해는 19631125일 장례식을 거쳐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되고 그의 묘지에는 꺼지지 않는 불꽃이 설치된다. 참고로 러시아의 이르쿠츠크 주 청사 뒷편에 꺼지지 않는 영원의 불꽃(꺼지지 않는 불꽃)이 있다. 이는 세계 2차대전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장례식장에서 마지막으로 천국으로 가는 대통령을 향해 거수경례를 하던 세 살의 케네디 대통령의 아들 모습은 전 세계인의 심금을 울리기도 했다. 오스왈드는 17살이던 1956년부터 59년까지 해병대 복무하였고 복무 후 돌연 모스크바로 가서 망명을 신청한다. 당국에서는 망명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고 불허한다. 그러자 오스왈드는 손목을 그어 자살을 시도하며 자신의 진정성을 호소한다. 그러자 소련당국은 그의 망명요청을 받아들이고 소련에서의 정착 및 안주를 도와준다. 그는 소련 여자와 결혼하여 딸을 낳았고 얼마만큼 적응한 듯한 모습을 보였는데 얼마 후 1962년에 돌연 미국으로 돌아갈 것을 선언하고 미국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미국 적응에도 실패하고 일용직으로 전전한다. 암살사건 8개월 전에 우체국 소포로 저격용 총 CacanoM91/38을 구입하여 실전처럼 연습을 하고 그 총을 들고 사진을 찍기도 한다. 그는 해병대 복무시절 280M 거리에 있는 표적물에 대한 60발의 사격에서 59발을 맞추는 사격실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JFK의 암살시 거리는 73미터였다. 그리고 그가 대통령의 카퍼레이드 동선에 관해 정보를 갖게 된 것은 댈러스 신문에서 그에 관한 정보를 상세히 보도했기 때문이었다. F. 케네디가 생전에 한 말이 있다. "진실의 가장 큰 적은 거짓이 아니라 신화입니다." 또한 그는 취임 연설에서 국가가 여러분을 위해 무엇을 해 줄 것인가를 묻지 말고 국민 여러분이 국가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물어보라고 사자후를 토했었다. 암살사건 이후 미국 당국에서는 사건의 의혹과 숱한 배후를 밝히기 위해 워런 대법관을 주축으로 위원회를 꾸려 암살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해 진력했다. 워런 위원회는 최종적으로 리 하비 오스왈드의 단독범행으로 결론지었고 관련 의혹에 대해 모두 억측이라 결론을 내렸다. 이후 201721JFK 관련 정보가 공개되기도 했지만 배후 의혹이 드러난 것은 없었다. 마피아 연계설, CIA, FBI 관련설 등 온갖 의혹과 억측이 난무했지만 아무것도 제대로 밝혀진 것은 없었다.

케네디 대통령은 피살되기 전날 만찬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이 다음 역사의 심판대 앞에 설 때 다음 네 가지 질문을 받게 될 것이다. 첫째 당신은 참으로 용감한 사람이었는가? 둘째 당신은 참으로 훌륭한 판단력이 있었는가? 셋째 당신은 참으로 성실한 사람이었는가? 넷째 당신은 참으로 헌신하는 사람이었는가? 우리는 이 네 가지 질문에 긍정적인 답변을 할 수 있도록 지금 이 순간에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야 한다. F.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사건을 다룬 영화로 JFK가 있다. 짐 게리슨이란 검사의 활약을 그린 것으로 그는 암살범의 배후인물로 남부지역 실업가 클레이 쇼를 기소한다. 그는 미국의 쿠바 침공을 위해 군수물자를 쿠바침공추진단체에 제공하기도 했다. 그의 주장은 적어도 사격은 세 곳에서 이뤄졌고 동시다발적으로 사격이 이뤄졌다고 주장한다. 또한 여러 배후설에 관한 부분도 파헤치기 위해 고군분투했고 정부의 정보기관 고위직인 X라는 인물에 의해 제보를 받기도 하지만 제대로 기소를 했지만 배심원 평결에서는 유죄를 받아내지 못하고 만다. 69년에 기소했지만 무죄로 결론이 나버린 것이다.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다.

JFK는 누구인가. 내년이면 그가 죽은 지 60주년이 된다. 19175월 아일랜드계 미국인 조제프 케네디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조제프는 성공한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과 같은 인물이었다. 루즈벨트 대통령을 지원했던 그는 1930년대 후반 주영대사로 활약을 펼치기도 했다. 매사추세츠 브룩클린에서 출생했다. 처음 간 대학은 프린스턴이었으나 아버지의 권고로 하버드에 입학해 수학했다. 학창시절 렘 빌링스란 친구와 유럽 그랜드 투어를 다녀오기도 한다. 가난했던 빌링스의 여비는 조제프의 몫이었다. 친구를 배려해 존은 싸구려 숙소에서 지내기를 자처했다고도 한다. 속설에 의하면 그는 그곳에서 유럽의 박물관, 성당 등 유명 관관명소를 다 둘러보았다. 그리고 그는 그곳에서 히틀러를 알게 되었다. 또한 그의 학부시절 논문으로 영국은 왜 잠자고 있는가란 것을 썼다. 40년 그것은 책자로 발행되기도 했다. 물론 그의 논문에 도움을 준 것은 부친이 주영대사라는 것이 큰 도움을 주었다. 어떤 이는 그가 향후 일어날 제2차 세계대전을 예언하기도 했다고 한다. 1941년 그는 신체검사를 받고 군에 입대한다. 신체검사에서는 불합격 판정을 받지만 아버지 조제프의 도움을 받아 해병으로 입영한다. 그리고 그는 최전선으로 배치되어 복무한다. 대통령 후보시절 라이벌이었던 닉슨과 대비되는 부분이기도 했다. 그는 배가 침몰하는 상황에서 부하들과 6킬로미터를 헤엄쳐 탈출을 했고 다시 또 4킬로미터를 더 수영해서 사지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훈장을 받기도 해 전쟁영웅으로 급부상한다. 1945년 전역 후 신문기자로 첫발을 내디뎠으나 2년 후 하원의원을 시작으로 정계에 데뷔한다. 두 차례의 하원의원 그리고 다시 두 차례의 상원으로 당선되었고 이후 부통령후보로 나섰으나 아쉽게도 낙선한다. 그 후 다시 민주당 대통령후보로 경선에 나서 후보로 당선되고 최종적으로 35대 대통령으로 임명된다. TV토론에서 닉슨을 압도했다고 해서 화제를 낳기도 했다. 1953년에 용기 있는 사람들이란 책을 저술해서 언론사에서 수여되는 권위 있는 상인 퓰리쳐상을 받기도 했고 그해 9월 기자출신 재클린 리 보비에와 결혼하기도 한다. 그는 언제나 밝고 활기찼으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진취적인 성공모델의 표본으로 급부상한다. 수많은 염문설을 뿌리기도 했지만 그는 그칠 게 없었다. 목표를 향해 질주하는 정상을 향해 도약하는 기린아 그 자체였다. 당시 남성들이 즐겨 썼던 중절모를 배제했고 깔끔한 인상에 귀티 나는 얼굴은 모든 이의 존경과 사랑을 받기에 충분했다. 건강상의 문제가 그의 출세가도에 발목을 잡기도 했지만 항상 모든 역경을 이겨내고 고난을 극복하고 정상의 리더십을 발휘하기도 했다. 뉴 프론티어 정신을 고취시키기 위해 노력했고 세계 최강의 미국을 건설하기 위해 애썼다. 쿠바위기를 성공적으로 해결했고 60년대가 가기 전에 달에 착륙하겠다는 원대한 비젼을 제시하기도 했다. 후세사람들에 의해 1969년 미국에서는 달에 인간의 족적을 남기기도 한다. 대통령에 당선된 후 자신의 동생이었던 로버트 케네디를 법무장관에 기용하기도 했다. 대통령 재임시절 만났던 어린 소년 빌 클린턴은 이후 대통령이 되었고 한국의 반기문은 이후 UN 사무총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또한 포레스트 검프도 베트남 전쟁의 영웅으로 케네디 대통령과 만나기도 했다. 정상에 오르기 위해서는 최고의 순간에 노출될 필요가 있다는 얘기가 속설로 전해진다. 어린 시절 정상의 젊은 지도자를 만난 이들은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더욱 노력하고 발전적으로 성장했고 목표와 희망을 품고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진력한다는 것이다. 케네디가의 교육법에 관한 내용으로 유명한 것은 1등을 해야 된다는 철칙이 있었다. 2등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뜻이다. 최고만이 살아남는다는 것이다. JFK는 최초의 아일랜드계 출신 미국 최초의 대통령이었다. 그리고 가톨릭 신자로서도 유일했다. 청교도의 나라 미국에서 가톨릭 신자인 대통령이 나왔다는 것도 이례적인 부분이다. 미국 워싱턴포스트지 기자는 만약 셰익스피어가 살았다면 반드시 케네디가의 불행을 주제로 책을 썼을 것이라고 말했다. 케네디가에 일어나는 잇따른 불행을 보면서 운명의 조화 같은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그가 남긴 업적과 역사적 가치는 아직도 많은 이들의 가슴 속에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자유와 평등 등 인류가 추구해야 할 가치와 진선미의 추구를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쳤던 최고의 정치인 중의 한 분이었다. 신화가 되어버린 대통령 JFK를 추모하며 우리는 다시 한 번 그의 안타까운 죽음을 애도하고 그를 추억하며 리더로서의 훌륭했던 정신과 뜻을 기릴 필요가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