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수필5

모래 한 알

자한형 2022. 9. 18. 22:44
728x90

모래 한 알-문혜영

모래 한 알이 말을 걸어왔다. 어제도 말을 걸어왔는데, 귀찮아서 그냥 무시했더니 오늘 똑같은 방법으로 또 말을 걸어왔다. 다만 어제 말 걸어온 그 녀석이 아니고 틀림없이 다른 녀석이다.

저녁 6시가 되면 산책에 나선다. 동네길 어디든 산책로지만 난, 백두고개 지나 대안천이 흐르는 숭안동까지 다녀오는 코스를 즐긴다. 4km 구간을 짧은 보폭으로 한 바퀴 돌면 6천 보가 된다. 시골 어디나 그렇지만, 여기도 인적이 드물어 가장 편한 차림을 한다. 마스크도 목에 걸치기만 하면 된다. 운동화는 답답해서 여름철에는 가장 편한 통굽 샌들을 신는다.

어제, 그 샌들 틈새로 모래 한 알이 튕겨 올라와 발바닥을 찔렸다. 모래 알을 털어내려고 발을 흔들어보다가 뒤뚱거렸지만 소용없었다. 가던 걸음을 멈추고 샌들을 벗어 모래알을 정중하게 털어 보냈다. 아냐, 너랑 동행할 수 없어.

그런데 오늘, 산자락 허물어 새로 길을 낸 똑같은 지점에서 또 모래알 하나가 튕겨 올라와 맨발바닥을 찔렀다. 자동반사적으로 또 발을 흔들고 뒤뚱거렸지만, 역시 꼼짝도 하지 않는다. 할 수 없이 멈춰 서서 샌들을 벗었다. 이번엔 털어 보내지 않고 나를 찌른 녀석을 손바닥에 올리고 말을 걸어보았다.

"? 어쩌고 싶은 건데?"

참 제멋대로 생긴 녀석이다. 다듬어진 구석은 하나도 없고 삐쭉삐쭉 모가 나 있다. 겨우 콩알만 한 몸으로 저보다 몇백 배 무거운 나를 찌르고 가던 길을 멈추게 하다니.... 이건 분명 말을 걸어온 거다. 무언의 몸짓으로.

요즘 수필집을 내려고 밤낮으로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 "나를 키워낸 건 내가 헤엄쳐온 시간이란 강물"이라면서, "물고기를 키워내듯 그 강물이 결을 만들어 나를 키웠다" 하며, 몇 달 동안 그 강물 헤집기로 시간을 보냈다. 잔물결 일렁이던 여울에서도 서성거리고, 나를 곤두박질치게 했던 두 번의 협곡도 진저리 치며 불러왔다. 그 거친 세월 동안 나를 지탱하게 했던, 그래서 오늘의 나를 있게 한 가족과 문단 인연을 고마움과 그리움으로 불러냈다. 더 늦기 전에 살아온 날들에 대한 흔적을 또박또박 기록해야겠다는 생각에 잠겨 지냈다.

그렇게 지내는 동안 할 일을 제대로 한다는 생각에 참 뿌듯했다. 좀처럼 풀리지 않던 글들이 연줄연줄 이어져 나옴에 스스로 놀라고 대견했다. 갈 길을 똑바로 가고 있다는 확신 같은 것도 있어서 요즘 내 정신은 그 어느 때보다도 투명하다.

그런데, 문득 모래알 하나가 끼어들었다. 맨발바닥을 콕콕 찌르면서 나를 멈추게 한 뒤 말을 걸어왔다.

"길은 잘 가고 있는가? 혹여 놓친 건 없는가?"

스스로 길을 잘 가고 있다고 착각하는 순간 나 자신을 잃는 경우가 생긴다. 자만심으로 중심을 잃기 때문일 것이다. 나 역시 너무 ''에 빠져 있었던 건 아닌지. 온통 세상을 나로 가득 채우고, 나를 주축으로 우주도 운행하는 듯 오로지 ''에 함몰되어 있었던 듯하다. 그렇게 몰두하며 열정을 사른 이번 봄여름은 내 생애 어느 해 계절보다 뜨겁고 행복했다. 그러나 어느새 선선한 가을이다. 팽창의 열기를 다스릴 시간!

고맙게 말을 걸어준 모래알을 들여다본다. 울퉁불퉁 못생긴 녀석, 지구상에서 가장 그 수가 많은 건 모래알이라 한다. 얼마나 많은지 서구의 과학자들이 재미 삼아 추산해 본 바에 따르면 7,000,000,000,000,000,000,000개 정도라는 얘기가 있다. 굳이 숫자 개념으로 헤아리자면 1조에 70억을 곱한 수라니 어디 셀 수나 있겠는가. 하늘의 별만큼 많은 모래알. 그런데 하늘의 별처럼 모래알도 다 제각각 존재한다. 부서지고 깨어져도 절대 존재성을 잃지 않으면서, 모래알은 스스로 하나의 우주가 되어 지금까지 존재해왔다. 지구뿐 아니라 어느 별에서 든 가장 오래도록.

나 역시 수많은 모래알 중 하나일 뿐, 결코 다를 바 없다. 특별할 게 하나도 없는 존재. , 이쯤에서 나도 다시 모래알 하나로 돌아와야겠다. 제자리로 사뿐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