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모노세키 전쟁
시모노세키 전쟁(1) 시모노세키 포격 개시 4
분큐 3년 연(1863년) 5월 10일, 조슈번이 간몬 해협에 정박중이던 미국 상선에 포격을 가했습니다.
시모노세키 포대
페리의 외국 함선 입항에 시작된 에도막부 말기의 동란은 불평등한 조약에 개국을 단행한 막부와 거기에 반대하는 양이파의 대립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양이파는 역시 외국을 싫어했던 당대의 코우메이덴노와 결합해 '존왕양이 운동'을 펼쳐, 특히 과격하게 존왕양이를 주장하는 미토번, 사츠마번, 조슈번의 3번은 외국의 공사관에 화공을 하는 등, 실제로 외국과 불화를 일으킵니다. 만엔 원년(1860년)에는 안세이의 대 옥사(안세이의 대 옥사)라고 하는 강행 수단으로 양이파를 일소 하려고 한 이이 나오스케는사쿠라다몬 밖에서 암살되어 버렸습니다.(사쿠라다이몬 밖의 변) 막부는 어떻게든 조정과의 관계를 개선하려고, 공무합체 정책으로 제14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와 코우메이덴노의 여동생 가즈노미야를 결혼시키려 합니다. 분큐 2년(1862년) 2월에 혼례가 무사히 행해져 분큐 3년년의 3월에는 에도 막부 쇼군으로서 230년만에 상경했습니다.
그러나,코우메이덴노는 양이를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개국을 정한 막부는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일단 막부는 임시적으로 양이를 약속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날 수 없었던 조슈번은 조정을 통해 확실한 일정을 잡으려 했습니다. 그 약속의 날이 분큐 3년 5월 10일 이었습니다. 그 날의 아침 조슈번은 연안의 대포는 시모노세키 포구를 향해 배치하고, 해상에는 항해 군함을 2척, 증기 군함을 2척 배치하고, 세토내해의 해운의 요소인 시모노세키 해협을 봉쇄합니다. 이윽고 거기를 우연히 지나간 미국 상선 펜브로크호를 향해서 포격을 개시했습니다. 펜브로크호는 그대로 자취을 감추었습니다. 계속 되어 23일에는 프랑스 통보함(通報艦) 캐살호를 공격합니다. 펜브로크호 사건을 모르는 프랑스측은 대화를 하기 위해 서기관등을 상륙시킵니다만, 조슈번은 그들에게도 총격을 가해 부상시켜 버립니다.
불타오르는 캐살호
게다가 26일 네델란드 동양 함대 소속의 메듀사호가 해협에 진입했을 때에도, 그들은 차례차례로 포탄을 퍼부었습니다. 앞의 외국선에의 포격의 뉴스를 듣고 있던 네델란드였지만, 원래 에도시대부터 우호관계가 있었기에 괜찮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사망자 4에, 선체에도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계속되는 승리에 도취한 조슈였지만, 앞으로 다가올 공포를 깨달은 이도 있었으니, 그가 바로 타카스키 신사쿠(高杉晋作)입니다. 외국에서 유학했던 그는 앞으로 다가올 것을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1개월도 지나지 않아, 6월 1일 미국의 군함이 1척이 들어와 이에 대항하는 조슈의 군함 3채를 단숨에 재로 만들어 버립니다.
덴츄구미의 멸망, 요시무라 도라타로 할복
분큐 3년 연(1863년) 9월 27일, 토사번을 벗어나 떠돌이가 된 지사로, 덴추구미(天誅組)를 조직했던 요시무라 도라타로(吉村寅太郎)가 할복 했습니다.
<요시무라 도라타로>
텐포우 8년(1837년), 토사에서 촌장의 아이로 태어난 요시무라 도라타로는 아버지의 뒤를 잇는 것과 동시에, 학문이나 검술에 매진 하는 날들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검술의 스승인 다케치 한페이타(武市半平太)의 영향으로 서서히, 양이 사상으로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이윽고 24세 때, 한페이타가 결성한 토사 킨노우도우(勤皇党)에 참가 합니다. 다음 해, 한페이타의 하인이던 구사카 겐즈이(久坂玄瑞)와 만나, 그 사상에 감화 되어 토사번을 벗어나 떠돌이가 되는 것을 결의해, 사카모토 료마와 함께 번을 벗어나 떠돌게 됩니다. 그는 드디어 지사로서 활동하기 시작했지만, 분큐 2년(1862년) 4월 23일에 일어난 데라다야 사건(데라다야 사건)에 관여하고 있었다고 여겨져 체포되어, 토사에 호송되어 투옥되어 버립니다.
그 후, 죄가 용서되어 다음해인 분큐 3년년의 2월에는, 다시 교토로 되돌아갑니다. 정확히 같은 무렵, 상경하고 있던 제14 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가, '오는 5월 10일 양이를 결행한다'고 해, 존왕양이파는 사기가 오르게 됩니다. 한편 도라타로도 메이지덴노의 외가쪽 친척 나카야마 타다미츠(中山忠光)와 알게 된 일을 계기로, 양이파 지사들과과의 연관관계가 강해지게 됩니다. 하지만 정작 5월 10일 양이파의 대표격인 조슈번이 간몬 해협을 통과하는 외국선으로 향해 포격을 개시한 시모노세키 전쟁이 발발했습니다.(시모노세키 전쟁) 이윽고 8월 13일 이번에는 쿠루메(久留米)의 지사 마키 이즈미노카미 야스오미(真木和泉守保臣) 등의 획책에 의해, 산조 사네토미(三条実美)등 양이파의 공경에게서 코우메이덴노의 행차가 발표됩니다. 이것의 목적은 당대의 덴노인 코우메이덴노가 다이와에 있는 초대 진무 덴노의 능에 참배해, 양이친정(攘夷親征)1을 맹세한다는 것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도라타로는 비젠의 후지모토 데츠세키(藤本鉄石), 미카와의 마츠모토 케이도우(松本奎堂)와 함께,나카야마 타다미츠를 대장으로 해, 덴노 행차보다 선행해 다이와로 가기 위해 덴추구미를 결성해, 14일에 교토를 출진했습니다. 3일 후의 8월 17일에는 야마토국 고죠대관소를(五条代官所) 습격해 대관 스즈키 겐나이(鈴木源内)와 5명을 살해해, 그 기세로 사쿠라이지(桜井寺)에 본진을 두어, 대관이 지배하던 토지를 덴노 직할의 영지로 하는 일을 발표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덴츄구미의 변입니다. 토벌 막부의 기치를 올린 것입니다.
<덴쥬구미>
하지만, 불과 하루에 사태는 급변해 버립니다. 다음날 8월 18일의 정변이 일어납니다. 존왕양이파에 반대하는 나카가와노 미야(中川宮) 아사히고 친왕(朝彦親王)을 중심으로 하는 공무합체파의 문신들이, 아이즈번, 사츠마번과 결탁해, 양이파를 중앙 정계에서 일소 하는 쿠데타를 결행했습니다. 산조 사네토미 등 양이파의 공경과 조슈번은 교토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이에 정치적인 후원자를 잃어 버린 덴쥬구미, 애초에 양이파에서도 급진적인 덴쥬구미의 행동은 좋게 보여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완전히 고립된 덴츄구미에게 막부의 토벌군이 파견됩니다.
이에 대항하기 위해, 이전부터 존왕양이파의 주민들이 대부분 사는 토츠가와로 피해 거기서, 1,000명 뿐인 군사를 모아 대립하는 야마토의 타카토리성(高取城)을 공격하게 됩니다. 이 전투에서 대패 당해, 도라타로는, 요시노군 와시카구치로 피합니다. 9월에 들어가, 덴쥬구미의 간판이었던 나카야마 다다미츠에게 역적의 조(逆賊の詔)가 발표되기에 이르자, 덴쥬구미는 괴멸 상태가 됩니다. 분큐 3년 연(1863년) 9월 27일, 숨어 있던 것을 기슈, 히코네, 아이즈번의 군사에게 발각되어 총격을 받아서 중상을 입은 그는 할복했습니다.
吉野山 風に乱るる もみじ葉は
요시노산에 바람에 이지러지는 단풍잎은
我が打つ太刀の 血煙と見よ
우리가 찬 태도에 튀긴 피라 봐주게
존왕양이파 일소되다, 8월 18일의 정변
분큐 3년 연(1863년) 8월 18일, 사츠마, 아이즈의 양번이, 존왕양이파의 문신을 교토로부터 추방한 8월 18일의 정변이 발발했습니다.
그 페리 내항 이래 막부의 소극적인 외교로인해, 양이파는 덴노에 기대를 가져, 존왕양이파라고 하는 파벌이 됩니다. 한편, 사바쿠파(佐幕派)의 대표격인 다이로우인 이이 나오스케는 그런 존왕양이파를 어렵게 탄압하는 안세이의 대 옥사(안세이의 대 옥사)를 결행합니다. 하지만 그 이이 나오스케가 사쿠라다몬 밖의 변(사쿠라다몬의 변)에 의해서 암살되어 막부의 권위는 쇠퇴해 버렸습니다. 거기서 막부는 조정과 합해 관계를 수복하는 것과 동시에 존왕양이파를 억압해 국내를 하나로 정리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공무합체'입니다. 그 상징으로 행해진 것이 제14 대장군 도쿠가와 이에모치와 코우메이덴노의 여동생 가즈노미야의 결혼이었습니다. 이이 나오스케의 뒤를 이어 그 결혼을 성공시킨 안도 노부마사는 사카시타몬 외의 변으로 실각해 버립니다.(사카시타몬의 변)
<교토를 떠나는 존왕양이파의 사람들>
그 후, 공무합체의 정책을 계승한 사츠마 번주의 아버지 시마즈 히사미츠가 존왕양이파를 일소 하려고 움직이기 시작해 에도에서 막부 개혁을 요구합니다. 정사총재(政事総裁)인 마츠다이라 요시나가(松平慶永)가, 장군 후견직에 도쿠가와 요시노부(徳川慶喜)가 교토 수호직에 아이즈번의 마츠다이라 가타모리(松平容保)가 임명됩니다. 당시에는 조정 내에서도, 존왕양이파와 공무합체파로 나누어져 있어, 그 존왕양이파의 산조 사네토미(三条実美)등이 조슈번과 접촉해, 분큐 3년(1863년) 5월 10일에, 양이를 실행하도록 주장해, 각 번에 명령을 내렸습니다. 당연히 그들은 교토 근처에 잠복해 재기를 꾀합니다. 이 존왕양이파의 탐색을 하던 것이, 교토 수호직 마츠당라 가타모리의 부하가 된, 신선조였습니다. 이때부터 신선조는 전성기를 맞게 됩니다.
신선조에 의해 이케다야 사건 발발
겐지 원년(1864년) 6월 5일, 신선조가 교토의 여관 이케다야에 모인 존왕양이파 지사를 급습한 이케다야 사건이 있었습니다.
당시 일본은 존왕양이(尊王攘夷)나 공무합체(公武合体)로 두 동강이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조정 내에서도 역시 둘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공무합체파인 나카가와노미야 아사히코 친왕(中川宮朝彦親王)은 공무합체파인 아이즈번, 사츠마번과 협력해, 존왕양이파의 공경 산조 사네토미(三条実美) 등 7명을 고쇼에서 내쫓아, 교토에서의 퇴거를 명합니다. 이것이 8월 18일의 정변으로 불리는 쿠데타입니다.(8월 18일의 정변) 교토에 있을 곳이 없어진 사네토미 등은 존왕양이파의 조슈번을 의지해 교토에서 탈출합니다. 이것으로 정치의 중심으로부터 존왕양이파가 일소 된 것입니다.하지만 이대로 끝날 리도 없습니다. 존왕양이파의 지사들은 교토의 시가나 근교에 몸을 숨겨 만회의 기회를 노리게 됩니다. 이런 과격파의 지사들의 탐색, 단속을 한 것이 신선조입니다.
<데라다야>
8월 18일의 정변으로의 활약으로, 로시구미에서 신선조로 이름을 바꾸고 세리자와 카모(芹沢鴨)를 배제해, 콘도 이사미(近藤勇) 아래 굳건하게 모인 신선조였지만, 탈주자도 많은데다 군기가 제대로 서지 않았기에, 아직도 교토의 사람들이 보면 위험하기 짝이 없는 료닌의 집단에 불과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신선조의 이미지를 변화시킨 것이 이케다야 사건입니다. 겐지 원년(1864년) 6월 5일 이 해의 4월 무렵부터, 교토에는 몇 사람이나의 조슈 사람들이 파고 들어, 은밀히 테러의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소문이 흘러 들고 있었기에, 날마다 단속에 임하고 있던 신선조는 이 날의 아침에, 평소부터 주시하고 있던 시죠 코바시(四条小橋)의 고물상 마스야(桝屋)의 수색을 실시해, 수상한 편지나 무기를 발견합니다.
마스야의 주인 키에몬(喜右衛門)과 후루타카 슌타로우(古高俊太郎)를 잡고 미부(壬生)의 톤쇼(屯所)1에서 조사헤, 교토에의 방화나 덴노 탈취등의 테러 계획을 자백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요즘에는 지어진 이야기라는 것이 정설입니다. 사실은 그냥 어떠한 모임이 있다는 것만 안 채로 거리를 수색했던 것 같습니다. 아무튼 불과 34명의 인원수로 그들은 음모의 본산지를 찾아냈습니다. 일단 아즈번의 부하로 있기에, 교토 수호직에 보고하고 명령을 기다립니다만, 번주인 마츠다이라 가타모리가 병 중이여서 명령을 내리지 않았기에, 중신들이 원한을 사는 것을 두려워해 명령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오후 8시가 되도록, 소식이 없는 것에 인내심의 한계를 느낀 콘도는 히지가타 도시죠(土方歳三)에게 24명의 대사를 맡겨 기온 방면의 탐색으로 향하게 하고, 스스로는 오키타 소지(沖田総司), 토도 헤이스케(藤堂平助), 하라다 사노스케(原田左之助), 나가쿠라 신파치(永倉新八)등 10명과 함께, 카모가와의 서쪽의 시죠에서 기야마치 대로를 탐색합니다. 이윽고, 산죠 코바시의 근처에 도착했을 때 숙소 이케다야의 앞에 '한 글자에 세 개의 별(一文字に三つ星)'의 제등이 내걸어 있는 것을 찾아내 뭔가 냄새를 맡았는지 출입구와 뒷문에 각각 3명씩으로 굳혀 콘도가 소리치며, 문을 발로 차고 들어가자 이케다야의 주인이 무엇인가 큰 소리로 외치고 있는 것을 들었습니다.
데라다야 사건 발발
이것으로 과격파 지사의 잠복을 확신한 콘도는 재빠르게, 오키타와 함께 계단을 뛰어 올라, 이미 사방등이 꺼져 어두워진 2층의 다다미방에 돌입합니다. 안에는 20명 남짓의 지사들이 있었습니다. 즉석에서 한 사람을 벤 오키타는 몇 명을 더 베나, 지병인 결핵이 도져 퇴각합니다. 한편, 완전무장한 콘도에게 저항할 수 없었던 지사들은 뒷마당으로 뛰어 내려 부상당한 이가 부지기수였습니다. 하지만 적은 여려명, 격렬한 전투도 1층으로 옮겨져 분투해 토도가 부상당하자 콘도와 나가쿠라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이때 등장한 것이 히지가타 도시죠가 이끄는 대사들이었습니다. 결국, 신선조의 피해는 사상자 3명인데 비해 지사측은 14명 그곳에는 조슈번, 구마모토번의 중진들이 있었습니다.
조슈번의 상경, 긴몬의 변 발발
겐지 원년(1864년) 7월 19일, 8월 18일의 정변으로 내려진 처분의 철회를 요구해, 조슈번이 고쇼로 밀려 들었기 때문에, 사츠마번이나 아이즈번과 교전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긴몬의 변(禁門の変)입니다.
키지마 마타베에
페리의 내항의 압력에 개국을 한 막부와 어디까지나 양이를 결행하고 싶은 조정과, 존왕양이론의 선봉을 선 것이 조슈번입니다. 조정 내의 양이파의 신뢰를 받아 고쇼에도 세력을 폈던 조슈번이었지만, 8월 18일의 정변으로 사태는 일변합니다.(8월 18일의 정변) 공무합체파의 공경에 의한 쿠데타에 의해, 양이파인 산조 사네토미와 함께, 조슈번은 고쇼에서 내쫓아져 정계에서도 일소 되어 버렸습니다. 그런 상황을 타개하려고, 은밀하게 공무합체파의 중심 인물의 암살 계획을 짠 조슈였지만, 그 비밀회의의 자리에서 신선조에게 들통이나 좌절하고 맙니다.(이케다야 사건)
8월 18일의 정변의 처분에 불만을 가진 조슈는 그 처분의 철회를 요구해, 무장해서 상경했습니다. 이 상경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것이, 키지마 마타베에(来島又兵衛)이라고 하는 인물입니다. 분카 14년(1817년)에 조슈에서 태어난 그는 에도에서 검술을 배운 후, 다이켄시야쿠(大検使役) 등을 역임하며 순조로운 출세의 길을 달리고 있었습니다. 신음류를 이어 받아, 승마술에도 뛰어난 무용을 가진 사람이면서 사무직에도 능통했습니다. 원래 일본의 개항기를 이끈 지사들은 대부분 20대의 젊은이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서 당시 40대 후반이었던 그는 '라이오우(来翁)'라고 불렸다고 할 만큼 나이 차이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정열로 가득찬 그는 반대하는 이들은 버려두고, 자신에게 동조하는 이들을 이끌어 상경했습니다.
긴몬의 변
이렇게 해서 겐지 원년(1864년) 7월 19일 교토의 북서 텐류지(天龍寺)에 진을 친 쿠니시 시나노(国司信濃), 남서의 덴노산(天王山)에 진을 치는 마츠다 우에몬노스케(益田右衛門介), 남쪽은 후시미의 조슈번저에 진을 친 후쿠하라 에치고(福原越後)로 조슈번은 세 방면에서, 고쇼를 목표로 합니다. 마타바에가 인솔하는 유격대는 쿠니시 부대와 함께 텐류지에서 출격했습니다. 이들은 맨 먼저 고쇼로 진군합니다. 이 전투가 '긴몬의 변'으로 불리는 것은, 그곳에서 제일의 격전이 일어났기 때문에입니다. 이 '긴몬(금문)'이 평상시는 거의 열리는 것이 없었던 고쇼의 서쪽의 문 하마구리 고몬(蛤御門)에서 일어났기에, 하마구리고몬의 변이라고도 불립니다.
궁궐로 진군한 조슈 병이었지만, 한층 더 북측의 이누이몬(乾門)을 지키고 있던 사츠마 번이 구원으로 달려와 전세는 단번에 역전되어 버립니다. 형세가 불리한걸 알면서도 지휘를 했지만, 그 무렵 사츠마번의 카와지요시토시(川路利良)가 발한 총탄이 그의 가슴을 관철합니다. 낙마한 그는 자신의 최후를 깨달고 나무 그늘 밑에서 할복해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시모노세키 전쟁(3) 시모노세키의 전후 처리
겐지 원년(1864년) 8월 8일 시코쿠 연합 함대의 공격에 의해, 시모노세키에 있던 조슈번의 포대가 괴멸 되어, 시모노세키 전쟁이 종료했습니다.
카에이 6년(1853년)의 페리의 내항으로, 미일 화친 조약을 체결시킨 막부와 그런 막부에 불만을 가지는 양이파는 당대의 코우메이덴노와 결합해 '존왕양이파'가 됩니다. 그 존왕양이파의 대표격이 바로 조슈번이었습니다. 그런 조슈번이 분큐 3년년(1863년)의 5월에, 간몬 해협에 정박 중이던 미국 상선에 포격한 것을 시작으로(시모노세키 전쟁 발발), 해협을 지나는 외국선에 차례차례로 발포하고, 그에 대한 보복으로 미국, 영국, 프랑스, 네델란드의 4개국의 연합 함대가 시모노세키를 습격합니다. 이를 '시모노세키 전쟁'이라고 부릅니다.
겐지 원년(1864년) 8월 8일의 이 날, 시코쿠 연합 함대에 완전히 패배한 조슈번은 포대가 괴멸되어 시모노세키 전쟁은 끝나게 됩니다. 하지만 전쟁은 끝났어도 그 전후처리가 남아있었습니다. 상대는 외국입니다. 아무리 용감한 자라 해도 외국인들과 교섭을 하고 싶어하진 않았습니다. 결국 당시 감옥에 갇혀있던 타카스키 신사쿠(高杉晋作)입니다. 영국측의 통역인 아네스트 사토에 의하면 '그는 큰 무늬가 그려진 의복에, 검은 에보시(烏帽子)1을 써 당당히 영국 군함에 탑승해 가로의 아들 시시도 쿄우마(宍戸刑馬)라 자칭했다. 그 모습은 마왕과 같이 오연(傲然)해 어느쪽이 승자인지 모를 정도였다.'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건 그냥 립서비스인지 아니면 허세였는지, 조건은 굉장히 조슈번에 불리하게 교섭이 되었습니다.
타카스키 신사쿠
1, 간몬 해협의 외국선의 통행의 자유
2, 석탄, 음식, 물등의 항해 필수품의 매각
3, 악천후시의 선원의 상륙 허가
4, 포대의 철거
5, 배상금 300만 달러의 지불
하지만 잘한 점도 몇 개 있었습니다.'막부의 명령에 따랐을 뿐'이므로, 배상금은 조슈번이 아닌 막부에 받으라 했습니다. 또한, 시모노세키 바다에 있는 히코도(彦島)를 조차하고 싶다'라고 하는 요구에 관해서는 일본의 신화 시대부터의 일본의 역사에 대해 말하기 시작해 끝없이 이야기해 상대가 아연하고 있는 동안에 애매하게 끝나버리고 있었습니다.배상금을 막부에 받으라고는 했습니다만, 실제로는 지불능력이 없었다는 것이 맞는 듯 합니다. 사실 300만 달러라는 거액은 막부도 지불할 수 없었습니다. 영국 공사 올 콕이 일부러 지불 능력이 없을 정도의 고액을 요구해, 개항을 시키려 한 것입니다.
이 요구대로 개항하려면 효고나 시모노세키를 개항시켜야 합니다만, 효고는 덴노가 있는 교토에 가깝기 때문에 안 되고, 외국과 전쟁한 직후로, 게다가 불과 1개월전에 하마구리고몬의 변(긴몬의 변)으로 막부와 갈등관계에 있는 조슈번 내의 시모노세키도 적합하지 않았던 것이지요. 이 배상금 문제가 막부를 무너트리는 원인 중 하나가 됩니다. 그렇기에 배상금은 메이지 신정부가 계승하게 됩니다만, 그런 메이지 정부도 그 지불에 고생합니다. 시모노세키와 동시기에 일어났던 사츠에이센쇼 전쟁의 배상금도 사츠마번이 막부에 요구했었기에, 이것 역시 막부를 무너뜨리는 경제적 부담이 되었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