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노을

인물 죽이기

자한형 2023. 2. 3.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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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

 

얼마 전에 한 홈런타자가 17경기 만에 홈런을 쳤다고 언론이 야단도 아니었다. SK의 감독이 경질되었고 OB 감독도 사퇴하는 등 어수선한 분위기에 휩싸여 있다. 롯데의 승승장구는 지칠 줄을 모르고 계속되고 있다. 야신이라 불리던 이가 물러나고 가을 야구가 기다려지는 때가 돌아왔다. 부상에서 돌아온 추신수 선수는 끝내기 홈런을 날려 대서특필되었다. 작년에는 한국프로야구에서 세계신기록이 나왔었다. 20여 년 남짓한 짧은 한

국프로야구 역사에도 세계신기록이 쏟아져 나왔다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9연속경기 홈런기록이 있었다. 혹자들은 그런 얘기를 한다. 젓가락을 사용하는 한국인의 손기술은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다고 말이다. 쇠젓가락을 쓰는 유일한 나라이기도 하다. 손과 머리를 쓰는 야구경기는 역사가 이리 짧음에도 세계적인 실력을 갖추고 있다고 할 수 있게 되었다. 얼마 전 베이징 올림픽에서는 경이적인 전승기록으로 금메달을 딴 적도 있었고, 월드 베이스볼에서는 일본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면서 세계 2위의 성적을 올리기도 했다. 세계적인 스타플레이어는 탄생시키진 못했지만 그래도 우리나라 야구는 괄목상대할만한 성장세를 이루었다. 어렸을 때의 기억을 떠올려보자면 중학생 때로 기억된다. 모교에 야구부가 있었는데 미국 중학교와의 친선경기가 있었다. 서구인들은 중학생만되었어도 거의 성인에 맞먹을 체격과 신체조건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들은

부산 지역 미군부대 내 중학교 야구부원들이었다. 신체조건이나 체력에서 월등했지만, 경기 내용 면에서는 우리의 상대가 되질 못했다. 2진 선수였는지, 훈련을 덜했는지, 혹은 취미로 했는지는 파악할 수 없었으나 아무튼 옛 속담대로 작은 고추가 맵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한 지인의 말을 들어보면 참으로 귀가 솔깃해지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홈런타자 얘기를 했다. 어떤 홈런 타자는 홈런을 치면 그렇게 얄미운 행동을 한다는 것이다. 3루 베이스를 돌면서부터 토끼처럼 깡충깡충 뛰면서 홈까지 들어온다고 한다. 그런데 또 다른 선수는 그런저런 면모없이 홈플레이트를 밟은 후 관중에 대하여 오른손을 한번 드는 것으로 세레머니를 대신한다는 것이다. 관중을 즐겁게 하려고 여러 가지 장면이 연출되고 그것이 카메라를 통해 중계된다.

그러나 상대의 처지에서 생각하면 기가 막힐 일이다. 한 번의 실투로 말미암아 홈런까지 맞았는데 그 아픔을 겪는 투수의 심정은 오죽하겠는가. 그런 투수를 약 올리기 위해 용용 죽겠지 하고 깡충깡충 뛰면서 기뻐하는 것을 보면서 투수는 얼마나 울화통이 터지고 가슴이 아프겠는가? 얼마 전 기록적인 홈런을 기록했던 한 선수는 3루에서 뒷걸음쳐 들어오는 세레머니를 선보인 적도 있었다. 일설에 의하면 모 방송과의 약속이었고 미리 사전에 설정으로 예정되어 있었다는 것이 뒤에 알려지기도 했다. 소위 문워크 세레머니라고 일컬어졌었다. 인생살이에는 명암이 엇갈릴 때가 잦다. 그렇게 홈런을 치기도 하지만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에는 삼진아웃을 당하거나 병살타를 칠 때도 있는 것이다. 햇볕이 쨍쨍하게 내리쬐는 맑은 날도 있을 수 있지만, 비가 내리는 궂은 날도 있는 것이 인생사이다. 항상 상대를 배려하고 그 아픔을 이해해 줄 수 있는 한없이 넓은 도량이 필요한 것이다.

어떤 홈런 타자로 명성이 자자했던 이는 안경을 꼈었는데 어느 날 지인의 권유로 라식수술을 받았다고 했다. 그런 연후에 안경착용에서는 해방 되었는데 문제가 생겼다고 한다. 그것은 야간에 눈이 보이질 않게 된 것이다. 대부분 경기가 야간에 치러지는데 그 로인해 이 선수의 야구인생은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는 슬픈 이야기였다. 메이저리그 투수는 피가 배어져 나오는 발을 디뎌가면서도 투구하는 눈물겨운 장면을 연출하기도 한다. 프로의 진면목을 보는 듯했다. 인생의 축소판이라는 야구경기에서도 각본없는 드라마가 시시때때로 펼쳐지는 곳이기도 하다. 각자 마음먹은 대로 이뤄지기도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최악의 상황이 발생하기도 한다. 누구든 어떤 승부든 쉽게 속단하기는 어려운 것이 스포츠의 세계이고 그 오묘한 맛에 사람들이 마력을 느끼게 되는 것이리라. 초등학교 시절부터 야구명문을 다녔던 터라 야구하면 이골이 날 정도였다. 중학교에 이어 고등학교까지 명성이 자자한 곳이었다. 불세출의 영웅이라 할 만한 선수가 나오기도 했다. 2시절에는 청룡기를 안기도 했고 한국 최고의 투수라 일컬을 만했고 어깨를 보험에 들었다는 걸로 숱한 화제를 뿌리기도 했다. 고등학교를 들어가자마자 배워야 했던 것은 야구를 위한 응원연습이었다. 두 달 정도를 연습해서 실제 야구장에서 응원하면서는 여러 가지 우여곡절을 겪었다. 라이벌 팀과의 경기에서 졌을 때 경기에 진 게 문제가 아니라 응원이 미약해서 졌다고 텅 빈 운동장에서 정신교육과 기합을 받기도 했다. 야구를 보러 가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응원으로 자신의 모교에 대한 명예를 드높이고 자존심을 세우자는 뜻 같았다. 참으로 명문이라는 것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때야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동창회에서 선배들이 야구부의 유지에 관한 비용 일체를 부담하고 있었다. 예전의 고교야구의 열기는 프로야구가 출범하기 전이었기에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던 때였다. 대통령배, 황금사자기, 봉황기, 청룡기, 화랑대기, 대봉기 등 여러 대회가 줄을 잇고 있었다. 전국대회에서 지고오면 전 야구부원들이 머리를 박박 밀기도 했다. 좁다란 운동장에는 항상 야구부원들의 연습하는 소리와 힘찬 함성과 구령이 끊이질 않았다.

한국과 일본 미국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그 역사나 연륜에 있어서는 상당한 수준 차이를 갖고 있는 것이 당시 실상이었다. 백 년 이상의 역사를 갖고 있는 미국과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리라. 메이저리그에서 혜성같이 등장해 화제를 몰고왔던 박찬호 선수의 활약상은 우리 국민에게 그 얼마나 큰 자부심을 안겨주었던가. 이제 야구는 국민 스포츠로 발돋움했고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구기종목이 된 듯하다. 지상에서 가장 슬픈날이 야구 시즌이 끝난 날이라는 우스갯소리도 있지만, 야구가 주는 묘미는 파란만장한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것에 있지 않을까 한다. 비록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 올림픽의 정식종목화 되진 못했지만, 국민의 사랑받는 스포츠로 승승장구하길 기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