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생신
아버지의 생신
엊그제가 아버지의 생신이었다. 75세라는 적지 않은 나이였지만 요즘으로 치면 별로 남다르게 느껴지지 않은 형편이었다. 5년 전 칠순의 때에는 국외여행을 다녀오는 것으로 했었다. 이번에는 부산에서 음식점을 정해 가족끼리 식사하는 것으로 생신을 대신하게 되었다. 미리 예약되어 있었고 약속이 되어 있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었다. 내자가 미리 KTX를 예매해 둔 터라 별다르게 신경 쓸 일이 없었다. 일요일에 내려가 월요일에 올라오는 계획으로 짜인 대로 행하면 될 일이었다. 일요일 오전부터 준비해서 부부간에 내려가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손자라도 한 명쯤 갔으면 좋으련만 상황이 여의칠 않았다. 큰 녀석은 시험을 치러느라 고생을 하고 있는 상황이었고 작은 녀석은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시간을 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한 시간여부터 준비를 했지만, 출발은 결국 12시를 넘겼다. 출발시각이 한시로 잡혀 있었기에 서두르는 상황이 되었다. 택시를 타기로 했다. 서부 역으로 가자고 요청을 했다. 휴일의 시내 도로 상황이라 그렇게 막히지는 않았다. 30분쯤 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달랑 가방 하나씩만 들고 개찰구로 들어가 승차를 했다. 식사 때가 되었던 터라 집사람은 간식거리를 사러 매점을 다녀왔다. 고작 사온 것이 소시지랑 간식거리 그리고 물이 전부였다. 간단히 읽을거리로 책을 한 권 가지고 탔던 터라 그것을 읽는 일에 몰입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지 않아 열차는 정시에 출발했다. 휴가기가 거의 끝나는 시점이었음에도 차 속은 거의 빈자리가 없었다. 옆 좌석에는 어린 여자아이를 데리고 탄 부녀가 나란히 앉았다. 너 대살정도의 아이였지만 의젓하기가 남달랐다. 칭얼거림도 없었고 아빠와 함께하는 여행을 아주 즐기는 듯했다. 곧이어 열차가 출발했다. 가끔 커피랑 기타 통로를 왔다갔다하는 승무원이 있었지만 별도로 간식을 준비해온 터라 별도의 주문이나 필요한 것은 없었다. 첫 번째는 오송 역에 잠깐 쉬었고 다음은 대전, 대구, 울산, 정도였다. 오랜만의 방문이었다. 그것도 이렇게 KTX를 타고 단촐하게 온 것은 색달랐다. 개찰하는 상황에서 유명 연예인을 만나기도 했다. 열차에서 내리자마자 곧바로 택시 승차장으로 가서 택시를 타고 갔다. 시원한 바닷바람이 불어왔다. 오랜만에 온 탓에 낯선 도시처럼 여겨졌다. 30여년이 타향 객지에서 생활하다보니 무덤덤해져 버렸다. 미리 연락을 해두었던 터라 집에 도착하니 부모님께서 기다리고 있었다. 인사를 드리고 잠깐 쉬면서 환담을 하였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에 예약된 식사장소로 향했다. 부친을 위시한 가족들이 모두 모여 흥겨운 시간을 가졌다. 삼 형제와 여동생까지 해서 모였고 손자, 손녀도 같이 자리했다. 다들 중학생 이상이었으니 모임에 전혀 소란스러움이라든가 번잡함은 없었다. 손녀가 반에서 수석을 했다고 하는 기쁜 소식을 전하기도 하였다. 모두 장성해서 잘 살고 있는 상황이었다. 마무리할 시점에 케이크를 놓고 생신 축하곡을 부르고 제대로 된 의식이 진행되었다. 그리고 집으로 귀가했다. 막내네의 차로 여자들은 귀가했고 남자들은 걸어서 귀가했다. 한참 더울 때의 생신이라 여러 가지로 번잡스러운 것이 많았다. 아버지는 삼남이녀의 다섯 중 막내여서 여러 가지로 애로를 많이 겪었던 편이었다. 거의 형님 등은 돌아가신 상황이고 누님 두 분만 생존해 있는 형편이었다. 호기롭게 젊은 시절에 시골 생활을 청산하고 도시로 나와 갖은 고생을 다한 편이었다. 50년 정도를 생활전선에서 불철주야 노력하신 탓에 이제는 한가롭게 지낼 때가 된 셈이었다. 일에서 손을 놓으신 지도 5년이 지난 셈이었다. 한참 잘나가는 호기로움도 있었지만, 막판에는 결국 여러 가지의 애로를 다 극복하지 못한 상황이 되다보니 본인의 의지를 꺾을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일세를 풍미했다고 할 만큼 풍상을 겪었다고 할 수 있었다. 이제는 모든 현역에서 은퇴하시고 종친회의 산악회의 회장으로만 낙으로 삼고 있었다. 오래한 회장 탓에 순금으로 된 감사패로 증정 받아서 집 문갑위에 올려 놓고 있었다. 60년대 초에 혈혈단신 시골에서 내려와 자수성가의 표본으로 여겨지기도 했었지만 말년에는 결국 모든 것을 접고 은인자중하는 상태에 접어들게 되었다.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던 오늘날 아버지 세대의 전형이라 할 만 하였다. 삼남일녀의 자식들을 반듯하게 교육시키고 제대로 성장시킨 부분에 대해서는 다들 칭송이 자자하였다. 요즘에는 아침에 택견을 배우러 다니신다고 했다. 한시간 정도를 가서 택견을 하고 오면 3시간 가량이 소요된다고 하였다. 손자들의 재롱을 보던 때도 지나고 이제는 뒷방 늙은이가 다 된 듯해 보여 아쉬움이 일었다. 건강하신 모습을 보니 안심이 되었다. 20여 평의 아파트에서 뒤풀이하고 생일에 관한 공식적인 자리는 끝이 난 셈이 되었다. 다음날이 되었다. 두 내외는 아침을 먹고 부모님과 작별을 고하고 귀로에 올랐다. 씁쓸함이 남았다. 더욱더 심도 있는 얘기를 나누어야 했고 정감있는 교감을 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아쉬움만 남았다. 부산 역으로 가는 길에는 오래전의 정취가 만감을 교차시켰다. 출발시간보다 1시간이나 일찍 나와 역에 도착했다. 그렇게 빨리 나올 필요는 없지 않았나 했지만 요즘의 교통 상황하에서는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굳이 만류하는데도 불구하고 집 앞까지 나와 배웅하는 것에서 안타까움이 일었다. 아버지의 그 우렁찼었던 호기와 자부심이 사라졌음에 서글픔이 남았고 아버지의 위엄이 그리워지기도 했었다. 건강이 악화되어 한 때 어려움을 겪기도 했었고 지금도 난청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음에 안쓰러움이 더해지기도 했다. 역에서는 휴대전화기의 충전을 시키느라 30분 정도가 소요되었다. 충전도 반만 충전이 되었다. 서울로 올라오는 귀로는 한적한 상황이었다. 어머니가 준비해 둔 것을 싸오느라 짐이 한 가방이었다. 여러 가지 음식과 음료 등이었다. 가방의 무게가 거의 10키로그램은 될 듯하였다. 무거운 짐을 챙겨오느라 낑낑 된 탓인지 곧바로 차에 타자마자 곯아떨어졌다. KTX에서의 방송은 계속 태풍 소식에 비예보 등이 주류를 이루었다. 도착할 때쯤이 되다 보니 습관적으로 눈이 떠졌다. 곧 여의도의 6.3빌딩이 보였고 안내방송이 이어졌다. 이제 곧 서울에 도착한다는 안내였다. 참으로 세상이 좋아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2시간40분에 정확히 도착을 한 것이었다. 서울역에 내려서는 곧장 집으로 돌아왔다. 평온한 일상 속에서의 대사를 치른 것이었다. 아이들이 동행하지 않아 제대로의 여행이 되지 못했지만, 그런대로 무난한 일정이었던 듯했다, 매년 내려가는 연례행사의 일정이었지만 지난해에는 막내가 없었던 탓에 이번에는 새롭게 느껴졌다. 막내는 지난해에 가족과 함께 애리조나에 가서 연수를 일년간 받았다. 전문의로 입지를 굳혀가고 있는 입장이었는데 좀더 선진화된 기법을 배울 요량으로 갔었던 연수였다. 아버지는 좀더 있다갔으면 하는 눈치였지만 빠르게 일상으로 복귀해야 했기에 떠나올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도 이젠 연로해져서 어떤 활력있는 모습을 기대하기는 어려웠지만, 그런대로 자기의 삶을 가꾸어가고 노력하는 모습에서 색다른 이면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형제자매들도 부지런히 각자의 인생을 구가하고 있었다. 이제는 장년에 이르런 상황에서 나름의 역할을 해 나가고 있는 듯했다. 안타까움은 있었다. 이번에 같이 동참하지 못한 제수씨 등 가족들에게는 위로의 말씀을 전하고 싶어졌다. 오죽했으면 하는 마음으로 용서하고 이해하고 싶어졌다. 구리빛깔의 혈색에도 기꺼이 참석한 동생에게 더없이 감사함을 느꼈고 고마웠었다. 이젠 마무리 지워야 할 생이 남은 아버지에게 애틋함이 새롭게 샘솟았다. 모쪼록 만수무강하시고 세세 연연 평안한 생활이 영위되시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