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다른 낯설음 저너머

자한의 일상사

자한형 2023. 2. 13.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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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한의 일상사(요약분)

 

 

 

무릇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다보면 지켜야할 것이 여럿 있다. 그 중에서도 장년에 이를수록 금과옥조처럼 다가오는 것이 겸손이라고 한다. 통상적으로 지위가 높아질수록 거드름을 피우기 쉽고 안하무인으로 권위적이 되기 십상이다. 언젠가는 쓸모가 있을 것으로 여겨 항상 조금씩 모아놓았던 글들을 재편집해서 만든 것이다. 한 인간이 태어나서 자라고 대학을 가고 군 생활을 거쳐 성인이 되고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려가면서 직장생활에서 겪었던 여러 일들을 나열해 놓은 것이다. 지금까지 50여년의 삶을 그런대로 소상하고 자세하게 기록해보았다. 격동의 세월을 살아온 한 사람의 일상사로 여러 사람들이 공감하고 동조할 만한 그런 사연들이 엮여져 있다. 화자 나름대로는 솔직하고 진실하게 삶의 궤적들을 정리해 놓은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불안에 안주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어떻게 해서든, 언제든 불안한 상황에 처하게 되면 그것을 벗어나기 위해 애를 쓰고 노력하고 발버둥을 치는 것이 인지상정인 것이고 사람의 용틀임인 것이다. 제대로 된 삶을 살기 위해 열심히 진력을 다한 것을 보여주고 있으리라.

 

경남 의령 시골에서 가난한 농부의 장남으로 태어나 네 살 때 부모님을 따라 부산으로 내려오게 된다. 척박한 생활환경 속에서 빈한한 생활이 이어졌지만 부모님의 극진한 보살핌과 기대를 한 몸에 받아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한 덕에 정상적인 정규 교육과정을 밟게 되었다. 초등학교를 거쳐 중학교, 고등학교를 타율적으로 정해진 대로 가게 되었지만 아무튼 명문고를 다니게 되었다. 중학시절부터 3년간은 기독교에 몰입하기도 했다. 한참 그 속에서 여러 가지를 경험하게 되었고 기독교란 세계를 조금은 이해하고 종교라는 부분에 대해 체험까지 하게 되었다. 서구사회의 기초라는 것에 호기심이 동했을 수도 있었으리라. 어려움이 있는 시련 속에서 극복도 종교 활동으로 인해 얼마만큼 안정될 수는 있었다. 본래대로의 제 실력으로 갔었다면 용이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인간의 완성이 유전과 환경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는다면 환경은 그런대로 최적의 조건과 상황을 부여받았다고 할 수 있었다. 집에서 학교까지는 먼 거리의 통학이었지만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중고교를 다닐 수 있었고 그 명문의 명성에 걸맞은 실력과 자격을 갖추기 위해 절치부심했었다. 대학도 지방이었지만 국립대를 운 좋게 합격할 수 있었고 최선을 다해 공부하고 실력을 연마할 수 있는 터전이 되었다. 비록 시국이 하수상하여 여러 가지로 복잡한 학교생활이었지만 그럭저럭 졸업은 할 수 있었다. 덧붙여 얘기하면 그런 중에도 교직과목을 이수해서 자격증도 하나 취득할 수 있었다. 군복무를 위해 응시한 학사장교 시험도 통과되어 입대를 했다. 오랜 기간의 교육기간을 거쳐 민간인에서 장교로의 탈바꿈을 이룰 수 있었다. 3개월간의 교육훈련을 받고 빛나는 계급장을 단 순간에는 세상천지에 부러울 것이 없었다. 강원도 산골의 자대로 배치를 받아 산 넘어 산이라는 인생길의 고비를 실감할 수 있었다. “비 온 뒤에 땅이 더 굳는다는 속담처럼 고생 끝에는 항상 낙이 있었다. 자대배치후 소대장생활을 1년한 후에는 일약 인사참모로 오르고 나니 그렇게 험난했던 고생길이 봄날의 순풍으로 변해버렸다. 전역을 하고나서는 일자리를 구해야 했다. 이곳저곳을 기웃거렸다. 그러다가 최후에 정착이 된 곳이 농협이었다. 처음 발령지는 경상남도 통영군지부라는 곳이었다. 28세의 청년은 청운의 꿈을 안고 직장생활을 시작하였다. 부산과 통영을 오가며 하루하루 직장생활을 영위해 갔다. 다음은 결혼이 문제였다. 여러 번 선을 보기도 했으나 결국은 알고 지내던 교사와 결혼을 하게 되었다. 군 시절부터 알고 지냈던 처자였다. 아주 당차고 똑 부러질 정도로 강인한 인상을 주었다. 고흥의 두원 중학교에 근무한 여교사였다. 주말 부부의 시작이 그렇게 시발점이 되었다. 87년도 봄에 부산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방학이라는 것이 그래도 가뭄의 단비 같은 것이었고 그런대로 짧지만 달콤한 나날이었다. 아이가 곧이어 태어났고 키우는 것은 시댁 부모님의 몫이었다. 2년간의 직장생활 후 서울로 발령을 받게 되었다. 세 가족은 각각 세 곳에서 살게 된 것이다. 서울, 부산, 고흥 참으로 고단한 삶이었다. 서울에서 고흥을 가면 장장 8시간이 걸렸다. 서울에서 순천까지 가고 그리고 또 고흥으로 가서 두원으로 가야 만날 수 있었다. 한 달에 한 번 정도였다. 승진시험이 임박해 시간을 별도로 낼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3년간의 신혼생활이 얼마나 속 빈 강정처럼 허망했는지 우리 부부는 느낄 수 있었다. 1990년이 되어 집사람이 서울로 발령을 받았는데 하필이면 본인이 얼마 후 제주도로 발령을 받게 된 것이다. 집사람은 눈물로 일주일을 보내야만 했다. 그러나 어떻게 달리 방법이 없었다. 6월에 발령을 받았는데 집사람을 계속 설득해 결국 9월에 육아휴직을 하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처음으로 제주에서 6개월을 꿈결같이 함께 살았다. 그런 후 서울에서 다시 합류가 되었다. 그리고 아이도 같이 살게 되었다. 1995년에는 처형의 중개로 중고 자동차를 하나 장만했다. 두 아이와 돌아다니려면 차가 있어야 했다. 이사도 몇 번을 하였다. 본부근무는 일반자재를 취급하는 자재팀에서 3, 그리고 농기계 팀에서 5년 다시 자재팀에서 1년을 근무했었다. 9년여 세월이 지나고 승진을 할 때가 되었다. 서강대에 농협유통MBA 과정에 입교해서 6개월간 교육을 받았다. 20명의 교육생과 함께 동고동락하는 중에 총무를 맡아 애를 먹었다. 그리고 안성교육원으로 발령을 받아 26개월을 근무하였다. 6개월은 교육진행팀장이었고 2년간은 총무팀장을 역임했다. 다시 또 주말부부생활이 이어졌다. 서울과 안성을 오가는 생활이었다. 교육원 생활이라는 것을 처음 접하면서 여러 가지로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고 그러면서 업무를 익혀나갔다. 어떤 때에는 업적이 최하위를 기록하기도 했고 또 다음에는 최고의 위치를 점하기도 하였다. 중간에 차를 FV용으로 바꾸기도 했다. 2000년부터 2003년까지 4년 동안 아들 2명의 자전거타기를 지원하기도 했다. 아이들은 어렵고 힘든 과정이었지만 잘 참아 주었고 그 훈련과정을 무난하게 소화해내어 자랑스러웠고 대견했다. 부모로서 아이들의 뒷바라지를 위해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하였다. 다음으로 근무하게 된 곳은 예금자보호기금사무국이란 곳이었다. 2년은 송무팀장이었고 4년은 기금관리팀장으로 6년을 근무하였다. 2005년도에는 금연을 시작해 성공을 하기도 했다. 그런 다음 다시 또 안성교육원으로 두 번째 근무를 하게 되었다. 이곳은 이제는 또 다른 환경으로 변모되어 있었다. 팀장 때와는 또 다른 느낌과 기분으로 생활을 해나가고 있다. 이제는 집도 마련하였고 차도 제법 근사한 것으로 준비되어 있다. 아들 2명도 다 대학생이 되었다. 큰애는 경제학을 전공하여 열심히 스펙을 쌓고 향후를 대비해 진력을 다하는 모습이다. 작은애는 이제 2학년으로 아직은 천방지축 철이 좀 더 들어야 할 것 같다. 집사람도 2008년부터 전문직 시험에 합격해서 교육청에서 장학사로 근무를 하고 있다. 2009년도에는 네 식구가 모두 제각각의 근거지에서 생활하기도 했었다. 작은 애는 충주에 있었고 큰애는 군복무 중이다. 이제는 어느 정도 안정화단계에 접어들었다고 여겨지고는 있으나 아직도 남아있는 생의 여정에서 어떤 일이 어떻게 벌어질 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 않은가. 얼마전 결혼 25주년을 지냈다. 그리고 반추해보니 8년간이 주말부부였으니 3분의 1이 떨어져 산셈이었다. 그런속에서도 나름대로의 부부간의 정분을 쌓고 산 듯하다. 2011년에는 글을 여러 편 써보기도 했다. 여러 문예지에 공모를 했고 당선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수필집 푸른 노을이라는 책을 출간하기도 하였다. 참으로 장구한 세월을 살아온 듯하다. 파란만장한 여정이었고 앞으로의 남은 생활도 계속 이어나가야 할 것이다. 이제는 거의 생의 70%가 지나간 듯하다. 삶의 길목에서 한번 되돌아보고 정리해본 내 삶의 내역이다. 자랑스러운 것도 아니고 뽐내거나 자랑거리로서가 아니라 그냥 대한민국의 한 필부의 궤적이라고 여기면 될 것이다. 중간 중간에 그 당시에 해당하는 단문들을 삽입해서 좀더 세밀하고 적절하게 그 치열하고 열심히 살았고 고민하고 갈등했던 모습들을 묘사해 보고자 했다. 아직도 우리가족은 셋은 같이 살고 있지만 가장은 주말에만 만날 수 있는 처지에 빠져 있다. 열심히 정직하게 진실되게 살고자 하고 다른 이들에게 피해 입히지 않고 순리를 쫒아 살고자 하는 자세로 살아가고 있다. 정신없이 바쁘게만 살아온 시간이었다. 이제는 보다 찬찬히 생을 관조해가며 올곧게 살아가려는 삶의 자세가 필요한 때가 아닌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