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원 총무팀장
교육원 총무팀장
무릇 사람이란 자신의 분수(分數)와 주제(主題)를 알아야 한다. 그때의 생각은 그랬었다. 지금 생각해도 무척이나 무모하리만큼 어려웠던 듯했고 얼떨결에 맡기는 했지만 상당히 힘겨웠던 나날이었던 것 같다. 겨우 6개월 교육원 생활을 한 초년병에게 총무팀을 맡긴다는 것은 상당한 파격이었고 이례적인 일이었다. 본래 총무팀장을 하던 분이 워낙 고참이었고 내일모래 승진을 앞두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그렇게 갑작스럽게 그 보직을 맡게 되었다. 부원장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여겨졌다. 원장은 별로 업무에 관여하고 주도하는 처지가 아니었다. 바로 정년이 코앞이었기 때문이었고 또 출신이 다른 터라 더 이상의 분란이나 변화를 원하는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40대 초반에 그렇게 중책을 맡아 업무를 수행하는 것이 가능할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였다. 2002년이었다. 2002년 중반이후에 부원장이 전출을 갔다. 이로 인해 교수부장과 부원장이 있는 체계가 되었다. 원래 총무팀을 맡고 있었던 팀장은 제2교육관의 생활지도팀으로 갔다. 상당히 죄송스러워했고 몸 둘 바를 몰라 했었던 기억이 있다. 농축협이 통합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터라 여러 가지로 불협화음(不協和音)도 많았고 갈등의 골도 깊었던 때였다. 예를 들면 그런 것이었다. 제2관은 관리가 용역에 의해 관리되는데 반해 제1관은 별정직을 중심으로 운영되는 체계였다. 또한 식당의 경우에도 제1관은 정규직에 의해 운영되었는데 비해 제2관은 계약직에 의해 운영되는 구조를 갖고 있었다. 2000년 7월에 통합이 된 후 1년여가 흘렀지만 오랜 갈등구조와 상이한 운영체계 고정관념 등은 쉽게 풀어질 성질의 내용이 아니었다. 아래층과 2층에 자리가 두개가 마련되었다. 본래 두 개 팀이었던 것을 하나로 합쳐놓은 것이었다. 원장은 정년을 앞두고 있었다. 지역본부장까지 한 상황이었지만 농협인에게는 낯설었다. 손님들이 와도 모두 인근의 종묘센터로 가기도 했다. H모씨가 교육기획팀을 맡았다. 직원교육을 하게 되기도 했고 중앙교육원에서 건물을 새로 짓느라 내려와 있기도 하였다. 학습장이라고 비닐하우스 동이 15개정도 있었는데 그것이 문제였다. 교수들이 모두들 그것에 매달렸다. L모, K모 등을 교육원 교수로 데려왔다. L모교수는 동기였는데 승진이 안 되어 무척이나 섭섭해 했다. J모님은 2관으로 옮겨가기도 하였다. 부원장이 가고나니 교수부장이 부원장으로 오셨는데 행정업무에 익숙하지 못했다. 전국 교육원을 평가하는 업적평가에서는 하위를 맴돌았다. 직원교육으로 인해 과목을 맡아 강의를 해야 했다. 미리 강의시연회를 개최해서는 엄정한 심사를 받았다. 교육원 생활에 조금은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지금까지 몰아왔던 자동차인 아반테를 처제네에 주고 RV용인 카니발로 차를 바꾸었다. 경유 차량이었고 9인승이었다. 안성을 왔다 갔다 하며 몰고 다녔다. 연말이 되어서 원장의 정년퇴임식을 개최했다. 2003년이 되었다. 새로운 원장으로 H모님이 왔다. 참으로 훌륭하신 분이었다. 부원장으로도 Y모님이 왔다. 예전에 같이 교육개혁단에 계셨던 분이었고 서로간의 예의를 지켰다. 맨 먼저 원로분들을 찾아뵈었고 안성관내 유지들을 모셔서 연회를 열었다. 모두 대단히 흡족해 하셨고 기뻐하였다. 조합장님 등 유지분들과의 관계를 개선시켰고 대내외적으로 차질 없이 일을 처리하였으며 열정적이고 의욕적으로 교육에 임했기에 귀감(龜鑑)이 되었다. 간간이 회식을 하였고 침체되었던 교육원에 활기를 불어 넣었다. 처음 와서는 건강이 좋질 않아서 병원에 입원해서 일주일을 보냈다. 어떻게 교육원을 교육의 메카로 우뚝 세울 것인가로 고민을 많이 하셔서 병이 난 듯했다. 양쪽으로 제1교육관과 제2교육관을 왔다 갔다 하면서 행사에 참석을 하였고 교육원 홍보에도 열성을 보였다. 본부로부터 예산을 확보해서는 2교육원 주변에 경계용 철망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교육원 원내를 직접 솔선수범(率先垂範)하여 몸소 빗자루를 들고 쓸기도 하였다. 회장님도 세 번 정도 방문을 왔다. Y모님이라 분이 평생을 교육원에서 근무했는데 갑자기 뇌일혈로 돌아가시게 되자 교육원에서 노제를 지내고 장지로 갔다. 즉석에서 고인을 기리는 멋진 연설을 해서 교직원들의 심금을 울리기도 했다. 영양탕을 즐겨 먹는 식도락가였다. 교수연수회를 수안보에서 하고 문경세재를 걷기도 하였다. 연도 말에 업적평가결과 1등을 차지하였다. 지도자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확실히 보여주었다. 예전 군지부장시절의 농민회 간부들이 감사패와 고로쇠 물을 들고 왔었다. 정말 반갑고 고마운 일이었다. 대학원과정을 새로 등록하셔서 박사과정을 밟았다. 운동을 무척 좋아하였다. 주말에도 댁에 가질 않고 사택에서 지내기도 하였다. 관사로 팀장 등을 초대해 환담을 나누거나 술자리를 갖기도 하였다. 한 달에 한번정도씩은 관내 사무소장간의 모임을 하기도 하였다. 한번은 회장님이 오셨는데 곧바로 올라가게 되어 식사시간이 없었다. 도시락을 준비해줘 한 치의 차질이 없도록 배려하였다. 합병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는데 중앙회 방침에 배치되게 집단 행동을 하고자 하는 조합장님들이 교육원을 사용하게 해달라고 요청을 하러오자 이를 잘 설득해서는 돌려보냈다. 테니스도 곧잘 하였다. 부원장의 아들이 입원하자 병문안을 가기도 하였다. 한번은 고향에 수행해 내려간 적이 있는데 점심식사 후에 놀이가 벌어져 저녁까지 늦어진 적도 있었다. 부지런하였고 철두철미하게 일처리를 했다. 고향근처에 땅을 사두기도 하였다. 고향에는 부친이 홀로 생활하고 있어 그것이 가장 큰 걱정이었다. ‘건강나라’라는 사우나가 있었는데 그곳에 같이가기도 하였다. 여름에는 영양탕을 회식으로 먹기도 하였다. 교수들이 여가시간을 활용해서 운동하는 것 등을 장려하였다. 원장님들의 모임에도 참석하기도 했다. 업무를 처리함에 있어서 청렴했다. 또한 표창이나 해외연수 등에 항상 공정하고자 하였고 정확하게 공사를 분별하였다. 사모님은 강원도 횡성분이었는데 항상 사택에만 있었고 교육원에 누가 되지 않도록 조신하게 행동하였다. 인력개발부 또는 회원지원부 직원을 초청해서는 행사를 치루기도 했다. 1박2일 일정을 잡아 편안히 쉬었다가 충분히 휴식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모든 교수들은 의욕적이고 역동적으로 움직여주었고 활기가 넘쳤다. 상호금융MBA를 2교육관에서 하였다. 그것으로 인하여 해외연수기회가 있었다. 교수들의 컴퓨터 역량강화를 위해 컴퓨터 교육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추어탕, 해장국, 매운탕 등도 좋아하였다. 스카이 라이프를 설치해서는 그것으로 TV시청을 즐겼다. “비단옷을 입고 밤길을 가서는 안 된다”(錦衣夜行) 라고 하였다. 한번은 모 지역에 갔는데 여러 사람이 많이 모인 자리에서 생색은 지역본부가 다 내고 계산은 교육원에서 하게 되어 무척이나 기분나빠 한 적도 있었다. 인맥관리(人脈管理)에 철저하였고 비서실까지 근무한 적이 있었기에 인간관계에는 일가견이 있었다. 외부에 특강도 자주하였고 출타도 잦았다. 일주일에 2-3일정도 사모님이 왔다가 가기도 하였다. 공과 사를 분명히 하였고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가을쯤에는 교수요원의 해외연수기회가 주어졌다. 내가 해당이 되어 일본을 일주일간 다녀오는 기회를 가졌다. 각 교육원 교수요원과 함께 갔다 왔다. 교육제도 농산물 유통시설 등을 둘러보았고 일본의 실체를 파악하는 등 여러 가지 견문을 넓혔다. 골프를 시작해서 레이크힐스 나인홀에서 머리를 올렸다. 본부에서의 손님이 무척이나 많이 왔다. 상무 등 임원님 뿐만 아니라 대표회장 등 엄청나게 왔다. 교육 평가회에 참석하기도 하였다. 가끔씩은 외식을 하기도 하였고 한우촌이나 매운탕집, 영양탕집 등을 돌아다니기도 하였다. 여름에는 별식으로 회식을 하기도 하였고 화기애애하고 활기찬 분위기 속에서의 조직생활이 이어졌다. 연도 말에 갑작스럽게 예금자보호기금사무국장으로 발령이 나버렸다. 전혀 준비가 없었는데 인사이동이 된 것이다. 영전이라 할 만 하였다. 업적을 1위에 올려놓았다. 내신으로 추천을 올려주었다. J팀장은 승진을 하였다. 고향으로 갔다. 원장이 떠나고 도라지회라고 모임을 만들었다. 1년에 두어 차례 모임을 갖고 우의를 다졌다. 처음에 와 빈 땅에 도라지를 심으라고 해서 온통 도라지로 교육원 곳곳을 도라지 천국을 만들었던 연유로 회이름이 도라지회가 되었다. 2관에는 울타리를 쳐서는 함부로 교육원을 빠져나가지 못하게 만들었다. 상호금융MBA교육과정을 신설해서 성공적으로 전문인력을 양성하는 업적을 쌓았다. 한번은 계약직으로 일하던 이가 눈 속에 쓰러져 있던 것을 발견해 숙소로 옮기기도 하였다. 여러 인맥을 갖고 있었기에 훌륭하신 분들을 모셔서 강의를 듣기도 하였다. 황수관 박사, 엄길청 교수 등도 다녀갔다. H모원장이 경북 칠곡군지부장을 하시다가 원장으로 오시게 되어 직접 칠곡까지 내려가서 모셔왔다. 얼마 후에는 발령이 나서 예보사무국으로 가게 되었다. 3년만의 귀경이었다. 2년간 총무팀장으로 근무를 했다. 처음 일년은 여러 가지로 실수도 많았지만 그후 일년은 혼신의 노력을 다한 일년이었고 힘든부분도 많았지만 보람된 나날이었던 듯했다. 교육원 총무팀장으로서의 보직은 참으로 많이 답답하고 힘들기도 하였지만 막상 떠나고 보니 좋은 추억이었고 소중한 시간이었음을 절감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