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생활 회고기 2
군생활 회고기 2
1984년 때가 되어 7월1일부로 중위로 진급했다. 한층 의젖해졌다. 동기생 네명중에서 누가 가장 먼저 전출명령지를 받아 빠져 나가는가 하는 것이 관심의 초점이었다. 네명의 동기생 중 두명은 후방으로 빠지고 두명만 남았다. 만사는 순조롭게 이어졌다 8월에는 남이섬 부근의 신포리로 수영훈련을 갔다. 김일병이 막판 숙영지를 500미터 남기고 쓰러지는 바람에 오전내내 얼차려를 받고 훈련에 들어갔다.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 수영훈련이 끝나고 난 후에는 을지 포커스가 있었다. 제2소대장 이중위가 혼수상태였으나 좀 쉬고나자 괜찮아졌다. 낮동안 자고 다시 부대로 내려왔다. 9월에는 전술기지화라 해서 방호벽 작업이 있었다. 3일동안의 방호벽 작업이 장마비로 무너지자 어이가 없었다. 허탈해졌다. 양구를 들락날락 거리며 제법 돈을 썼다. 12월에는 첫 휴가를 출발했다. 첫휴가는 꿈같이 흘러갔다. 그런 다음은 201특공여단 차출이 있었고 후속인사로 이중위가 빠져나갈 차례가 왔다. 춘천에 같이 나갔다가 감당못할 사태가 일어났다. 이중위는 부대로 복귀해서 축구를 하는 도중에 쓰러지는 바람에 병원으로 후송을 갔다. 그것이 끝난 다음 타중대 병사들이 왔다. 10월에는 위관장교 전투력 측정이 있었다. 별탈없이 준비에 열중하고 있던 차에 특수전 교육파견명령이 났다. 7주간 서울 거여동의 특전사령부내의 교육사령부에서 교육을 받는 것이었다. 동기생이었던 2대대 이중위이랑 같이 출발했다. 그때 말이 ‘팔자 풀렸다‘ 였다. 모교의 정외과 출신이었던 고교동기 백중위를 만났다. 만사가 순조로왔다. 독도법과 FDX가 조금 문제였지 다른 것은 별 문제가 없었다. 사격도 18발를 맞추었다. 교육기간 중에 외출 외박은 매주말마다 꼬박꼬박 나갔다. 자주 비행기를 이용했다. 그때는 고공공포 같은 것은 일지 않았고 신기함과 자신을 심어주었다. 고교선배였던 소형을 한번 찾아갔다가 설선배를 만나기도 했다. 결혼식장이었고 박모라든가 하는 모교의 국문과 출신과 결혼해 있었다. 여유로운 시간이 많아 책을 제법 읽었다. 일본 대하소설 ’발군(拔群)‘을 읽었고 점프의 전문가들이 펼치는 고공경연 대회를 보았다. 막판에 정외과 백중위와 술을 마신 것이 말썽을 일으켰다. 무단이탈(無斷離脫)이 되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여러 장병들과 더불어 늘씬하게 중대장에게 얻어 맞았다. 정신을 가눌 수 없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게 맞으면서도 크게 대수로울 것이 없는 걸로 생각했다. 아침에 수료식이 있었다. 진술서를 쓰다가 수료식에 참석했다. 성적이 2등에서 4등으로 하락했다. 주말 시간을 이용해 집에 갔다가 부대에 복귀했다. 대대장에게 신고를 하면서 사실대로 얘기했다. 군장을 메고 1주일간 보행의 처벌이 내려졌다. 그러던 중에 두 번째 서러움이 복바쳤다. 여자와의 인연을 끊기로 했고 공부할 계획을 세웠다. 자신을 되돌아 볼 수 있는 자기만의 시간이었다. 병사들은 소대측정에 한창 열을 올리고 있었고 특공무술 시범으로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중대장의 이취임식이 멀지 않았다는 얘기를 했다. 15일에 특공무술 시범을 보이고 20일에 중대장이 바뀌었다. 훤칠한 키에 미남얼굴이었다. 인상이 상당히 좋았다. 간부회식을 했다. 전임 중대장은 연대 정보주임으로 발탁되었다. 신년이 되어 성불령을 올라갔고 시무식 행군이 있었다. 작년에는 중대장이 열을 받아 한참동안 시끄러웠던 적이 있었다. 휴가를 일찍가게 됐다. TS훈련으로 인한 조기실시였다. 가는날 스케이트 대회가 있었다. 여자에 문제가 있었다. 새로운 사실들을 알게 되었다. 300만원정도가 문제였으나 그것보다 더 큰 것은 그 후속문제였다. 어찌보면 충분히 원조할 수 있음에도 너무 괴로워했으며 마지막 올라오는 순간에도 심하게 난감한 문제를 야기시켰다. 권이란 친구를 곤경에 빠뜨리게 한 것이다. 일처리가 될 때까지 같이 있었어야 했으나 부대 복귀 때문에 시간이 없었다. 부대로 돌아와 간부교육을 들어갔다가는 3대대 병사의 사망소식을 들었다. 온 연대가 침울해졌다. 혹한기 훈련을 나갔다.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 인사참모로 발탁되었다. 여자친구가 면회를 왔다. 두 번다시 만날 수 없을 것을 각오하고 그만 끊어야할 그런 것을 느꼈다. 여자의 불행을 어느만큼 탕감시켜주고 그 우울함을 벗어나도록 도와주어야 함에도 아무런 손도 써주지 못하는 것에서 얼굴을 들 수 없는 안타까움이 있었다. 자학(自虐)이었고 속수무책에 대한 자신의 무력감 무능력을 감당해야만 했다. 어떻게 그런 상태 실마리를 이어갈 수 있다는 말인가 한참동안을 헤멨다. TS훈련을 나갔다. 군단 예비대여서 별로 하는 일이 없었다. 본부중대장을 겸임하고 있어서 본부중대 병사들과 같이 지냈다. 연일 텐트속에서는 소일에 빠져있었다. 16중대를 격려하고 인솔하는 문제로 잠깐 나갔다 왔다. 보름동안을 씨름했다. 어떻게 할 것인가 끊을 수는 없었지만 멀리 해야만 했다. 그것이 어떠한 불행을 자초하고 어떠한 고통이 따른다고 할지라도 감내할 것은 인내해야 하는 것이다. 계속적으로 아무리 생각을 거듭해도 어떤 해결 실마리는 없었다. 단지 연락을 두절시키는 것만으로 소극적이나마 단절할 수 밖에 없었다. 5월이 되자 작전이랑, 정보, 그리고 교육장교가 발탁되었다. 월말에는 작전장교가 왔고 취약사병 전투력 측정이 25일에 있었다. 대단한 성적을 거두었다. 주간사격91% 야간사격 78%였다. 구보가 문제를 발생시켜서 대대장으로부터 기합을 받았다. 기중이는 전역을 일주일 남기고 받았으니 그 고통이야 오죽하랴 싶었다. 포복 앞으로 선착순을 시켰다. 전연대가 형편없었다. 연대장이 전장교를 집합시켜서 대갈일성(大喝一聲)이 있었다. 다음날 아침 맥주파티가 있었다. 6월에는 육본 전투지휘 검열이 있었다. 그것을 준비하느라 정신없이 바빴다. 부대장의 질타는 끊임없었다. 대대장에게 원복을 간청했다. 그러나 측정은 별 무리없이 끝났다. 그 중간에 공수훈련을 갔다왔다. 3주간의 지상후련을 마치고 훈련장까지 갔다. 광주 매산리였다. 마석우리에서 경기도 광주 매산리까지는 그렇게 귀가 따갑게 들은 탓인지 별로 그렇게 큰 고통은 없었다. 점프장에는 동기가 있었다. 점프가 없는 날에는 작업을 했다. 천소위, 유소위, 조중사가 나갔다가 왔다. 복귀할 때는 정말 참으로 힘든 길이었다. 거의 천리행군 수준이었다. 공수훈련이 끝난 후에는 권일병이란 녀석이 낙하를 잘못해서 다리가 부러져 후송을 갔다. 면목이 없었다. 여러 가지 문제들이 산적해 있었다. 7월에 특공무술 경연대회를 하고 군단 시범을 보이고 남이섬으로 수영훈련을 출발했다. 6. 24일에는 본부중대장을 정보참모에게 넘겼다. 중대장과 같이 걸었다. 사실은 별로 그렇게 할 필요는 없었으나 홀로 생각하고자 했다. 훈련기간 중에 회식을 한번 하고 병사들 안전에 유의를 했다. 특별한 사고는 없었다. 705특공부대병사들이랑 배구시합도 하고 맥주를 마시기도 했다. 부대로 돌아오는 길은 정말 힘이 들었다. 8월에는 위관장교 측정이 있었다. 심과 김이 병기 병참학교로 가버렸다. 홍중위와 김중위도 가고 말았다. 주간사격 93% 야간 68%가 나왔다. 구보는 그런대로 해냈다. 측정이 끝나고 나서는 을지포커스렌즈 훈련을 가서는 10일 동안 은둔지 구축을 하고 내려왔다. 부대와 같이 걷고 차를 타지 않았다. 9월이 되어서는 어느만큼 평정을 되찾았다. 8.18일인가에 여친이 왔다. 그것만으로 말이 필요없었다. 동생취급하던 것을 이제는 어느만큼 성숙되고 어른 대접을 해주어야 했다. 판쵸우의를 잃어버리고 그녀는 지갑을 잃어버렸다. 만오천원의 여비를 주었다. 어쩐일인지 서먹서먹하게 보내버렸다. 유격훈련이 있었고 공수훈련 체육대회가 실시되었다. 그런다음 연대 체육대회가 실시되었다. 당당히 우승했다. 대대의 저력이 있었다. 위대한 승리였다. 추첨은 엉망이었지만 그 단결력과 전투력은 대단한 결과를 가져왔다. 모든 녀석들을 안아주고 싶을 만큼 기뻤다. 곧바로 ATT를 떠났고 또한 천리행군을 떠났다. 참모였기에 리더 지프를 탔다. 박카스나 사주면서 아주 재미있게 보냈다. 그것이 끝나자 전투력 측정이니 은거지 구축이니 지휘관 교체로 인한 감찰 등 부대가 바쁘게 돌아갔다. 그리고 야간적응 훈련을 하고 하사관 측정을 하고난 다음에는 대대장의 이·취임식 전역식 등이 있었다. 대대장 생일선물을 해주고 종점집에서 한잔 했다. 야간 적응 훈련때에는 1대대에서 홍병장과 양구고개 정상을 기어올라갔다. 연말엔 빙고게임을 주관해서 치루었다. 시상용 상품을 준비하였고 병사들 회식, 간부회식, 종무식 등이 모두 순조롭게 끝이 났다. 대장의 연대회식 참석을 위해 마패양주를 꺼내느라 PX측과 한동안 불편한 관계를 형성하게 되었다. 연말인 31일에는 이중사랑 화천을 한푼없이 나갔다가 대운에서 한잔의 차를 마시고는 아마존에서 술을 마신 다음 술집 연예인에 들렀다. 그곳에서 얄궂게도 두여자를 함께 만났다. 한 여자는 다시돌아와 있었고 또다른이는 얼마후 춤을 추러 왔다. 술에 취해서는 그녀들에게 집착했으나 제대로 연결이 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시계를 맡기고 취침한 후 아침이 되어서야 공중전화 박스를 뒤져 차비를 만들어서는 차를 탔는데 차속에는 이중사가 앉아 있었다. 참으로 놀랄 일이었다. 화천의 같은 여관에서 잤음에도 만나질 못한 것이다. S-3를 만나 신년인사를 위한 준비로 화천을 다시 나가서는 갈비와 양념을 사고는 한하사를 데리고 들어왔다가 다시 나가 용호리 당구장에서 신나게 당구를 치고는 밤을 세웠다. 대장집에서 갈비를 먹고는 환담을 나눈 다음 오후에는 13중대장 집에서 소일하다가 당구장에서 밤을 세웠다. 그런다음 다음날 하수관 밸브 때문에 춘천에 여중사랑 함께 나갔다. 제대로 이틀을 못잔 것이었다. 신병이 쉽게 전입되어져 왔다. 7일에는 대대스케이트 대회를 하고는 17일에 연대대회가 있었고 간부교육이 있어서 두 번째로 AOP에 올라갔다 내려왔다. 이중위이랑 같이 받았던 것은 아니고 양중위와 같이 받았다. 간부교육이 끝나고 연대 스케이트 대회는 엉망이었다. 성적이 형편없이 저조했다. 대회가 끝난연 후에는 혹한기 훈련에 들어갔다. 별반의 사고없이 끝이 났다. 전투력 측정이 예정되어 있어서 그 준비에 바쁜 나날들을 보냈다. 그러나 측정은 연기되었고 1월말에는 앞니가 부러졌다. 101야전병원을 갔다왔다. 대장이 영관 간부교육을 갔다왔다. 그리고 TS통제관을 나갔다. 별반 특별히 큰 사건은 없었으나 자질구레한 사고가 있었다. 참모들은 구심점이 없었다. 야간 적응훈련이 있었고 13중대장의 교체가 있었다. 연대 인사장교로 유중위가 발탁되어 갔고 새로운 주임참모가 왔다. 대대장이 돌아오고는 구보를 실시했는데 집합이 엉망이 되어 한방 먹었다. 재물조사 기간에 체육대회를 실시하고(13중대가 우승) 비호훈련을 떠났다. 부대에 잔류했다. 사시와 군법무관 시험 응시가 엉망으로 됐기 때문에 생활도 뒤죽박죽이 되었다. 3월 19일에 강중사가 사망했고 4월 28일에는 영결식이 있었고 4월 5일에는 식목행사가 있었고 근무 평정표의 작성이 있었다. 그후에 성금전달식이 있었고 16중대장이 교체됐다. 취약사병 측정이 있었다. 5월10일에는 의무대에서 포도당을 맞았다. 3일에는 춘천 외진을 가서는 소견서를 끊었다. 17일에 후송을 출발했다. 21일에는 집엘 다녀왔고 25일에는 대대를 갔다왔다. 대우에 1차를 합격했다. 행시원서를 접수시켰는데 제대로 되었는지 모를 일이다. 과목을 확인했다. 편지를 띄웠는데 수험표가 올지 의문이다. 6월 15일까지 이곳에 있을 작정이다. 그 후 복귀해서 20일부터 29일까지 위로휴가를 면접과 시험응시를 위해 상신하고 군생활을 마감할 작정이다. 이제 남은 것은 취직이다. 또한 여러 가지 부채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PX 9만원만 해결하면 될 것이다. 별다른 문제는 없다. 치아치료가 될지 모르지만 그것은 다시 생각해야 할 문제라기보다는 처분만 기다리면 족하리라 생각된다. 가장 큰 미스는 너무 방만하게 처신했고 호인으로만 생활한 것이다. 헌신적으로 노력하고 성실하게 한 것에 회한(悔恨)이 남는 것이 아니다. 효과음이 제대로 나질 못한 것이다. 또한 자기표현을 못했으며 그냥 속으로 벙어리 냉가슴 앓듯이 속만 태운 것이다. 마지막 을 보복하듯 배신감을 극도로 보상 받을 듯이 하려하질 말고 자신을 성찰하고 자기 혁신의 계기로 삼도록 해야할 것이다. 배짱좋고 대담하게 노는 것도 중요하지만 충분히 자기 최선을 다하는 삶 가운데서 보람과 생의 의미를 찾을 수 있으리라 여겨진다. 군에서 배운 것은 철저하게 배워간다고 여기며 삶의 지혜와 인간에 대한 보다 깊은 해부를 해본 시간이었다는 것에 큰 위안을 삼으며 웅대하고 담대한 확신속에서 이후의 생활에 굳건하게 나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