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네 문상다녀오기
친구네 문상다녀오기
한가한 오후의 나른한 시간이었다. 일상적인 일들이 이어지고 있었고 다람쥐 쳇바퀴도는 반복적인 생활이 계속되는 때였다.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친구의 부고 소식이 카톡에 올라왔다. 이리저리 고민을 했다. 친구의 장모상이었고 병원은 청주에 있는 병원장례식장이 빈소였다. 모레가 발인인데 갈 수 있는 날은 오늘 뿐이었다. 왜나하면 내일에는 다른 일정이 잡혀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곳까지 가는데 추정소요시간은 한시간 30분 가량이었다. 인근 구미에 있는 친구에게 전화를 넣었다. 다들 바쁜 사람들이라 시간내기가 쉽지 않았을 터인데 아무튼 용케도 시간을 할애해서 5시 30분에 친구의 사무실 부근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불볕더위를 연일 보도하고 있던 때여서 상을 치르는 것도 만만치 않을 것으로 여겨졌다. 물론 옛날같지 않아서 모든 것이 상조회사에서 알아서 처리를 해주니 별로 신경쓸 일이 많이 줄어들긴 했을 것이다. 차속에서 친구가 계속 부고 소식을 알리고 연락을 취해 보았으나 선 듯 문상을 오겠다고 하는 이도 별로 많지 않았다. 한시간 반정도를 달려 장례식장에 도착했다. 식장 안으로 들어서고 보니 수원에서 친구와 같이 근무하고 부고를 올린 L군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아직 문상객을 맞을 이가 오지 않았다. 그래서 일단 식사를 하고 친구네가 오면 문상하기로 했다. 한시간 쯤 지나고 났더니 대전에 있던 P박사가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왔다면서 도착을 했다. 고인은 91세라고 했다. 병원에서 돌아가신 것도 아니고 아침에 문안을 여쭙기 위해 들어갔더니 이미 운명하신 후 였단다. 가족들이 임종을 못지킨 아쉬움은 남았지만 병원신세도 지지않고 편안히 고종명하셨으니 더 바랄나위가 없을 듯했다. 얼마 후 친구내외가 도착했다. 정식으로 문상을 하고 친구들끼리 옛이야기를 나누며 정답게 시간을 보냈다. 손아래 처남이 공군사관학교에 교관으로 근무했던 덕에 청주에서 기거를 하게 되었고 장례도 이곳에서 치르게 되었다는 설명이었다. 문상객 중에는 제자인 듯한 공군현역 장교도 자리를 하고 있었다. 문상을 마치고 귀로에 올랐다. 이미 시간이 늦어져 거의 11시가 임박해 있었다. 차로 출발을 해서 P 박사를 대전에 내려주고 L군은 구미에 내려주고 교육원으로 돌아왔다. 먼저 J군에 대해서 언급해 보자. 그는 처음에는 금성사 쪽에 근무를 하다가 현대자동차에 입사를 했다. 군을 카츄사를 다녀온 덕에 영어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영국쪽에서 연구소에서 파견을 나가 2년정도를 근무하고 돌아왔다. 자식으로 아들과 딸을 두었고 10여년 전에는 울산에서 남양연구소쪽으로 근무지를 옮겨서 근무를 하고 있고 생활은 수원에서 근거지를 두고 있었다. 다이어트를 심하게 했는지 몸무게가 많이 줄어져 있었다. 이제 정년을 3년정도 남겨두고 있었다. 깔끔한 영국신사의 풍모를 느끼게 해 주었다. 이제는 나이도 제법 들었음에도 활력이 넘쳐보였다. 다음은 P박사였다. 그는 최근에 강남에 집을 사서 이사를 했단다. 큰 아들은 경인 교대 3학년에 다니고 있고 작은 아들은 경희대 치대 2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국민은행연구소에서 줄곧 근무를 하다 10여년 전에 토지공사로 자리를 옮겼고 그러면서 현재는 대전에 있는 연구소의 수석연구원으로 재직중이었다. 경제학 박사를 했으니 실력은 대단했다. 정년을 3년 정도 남겨두고 있었다. 대전에서 간혹 모임과 회합을 하고 있고 주말부부생활을 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공기업이 한창 잘 나갈 때에는 자녀 대학 학자금을 다 지원해 주었는데 어느날 갑자기 지원이 중단되는 바람에 곤욕을 치루고 있다고 했다. 그의 얘기 요지는 형님 두분이 있는데 큰형님은 아들만 둘 작은 형님은 딸만 둘이라고 했다. 자신도 아들만 둘이란다. 그래서 가만히 살펴보니 아들은 다들 부모님이 병원에 입원해 있어도 간병도 제대로 하지 않는다는 불만을 토로했다. 딸들은 지극정성임에도 불구하고 아들들은 무신경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둘째 형님네가 가장 다복해 보인다는 얘기였다. 딸네들이 부모님 용돈 다 챙겨서 보내준다는 것이다. 아들들은 부모가 병원에 입원해 있어도 한번 잠깐 눈도장만 찍고 간다는 식이다. 이제 앞으로 퇴직 후의 삶을 고민해야 할 때가 되었단다. 예사일이 아닐 듯했다. 자식들에게 신신당부한단다. 누구의 신세질 생각하지 말고 각자가 자기 삶을 책임지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충고를 했단다. 다음은 L군이다. 얼마 전에 재직 30주년을 맞이 했단다. 그래서 회사에서 해외여행비가 나왔단다. 그래서 생애 최초로 가족들이 해외여행을 다녀왔단다. 3박 5일간 태국을 다녀온 것이었다. 참 오래동안 근무를 한 것이 아닐 수 없었다. 다음은 구미의 L군이었다. 본래 태생이 추풍령이라고 했다. 그런데 친척의 권유로 부산 감천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던 것이 초등학교 시절이란다. 그래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대동중학으로 진학을 했고 고교 대학을 거쳤단다. 굴지의 대기업에 취직해서 26년을 보냈단다. 그리고 수원쪽에서 4년여를 근무를 했고 다시 구미로 내려와 지내는 상황이었다. 큰애는 취직했으니 걱정할 필요가 없었고 둘째와 셋째애를 공부시키는 것이 관건인데 향후 2-3년은 더 뒷바라지를 해야할 형편이라고 했다. 이제는 모두들 60을 앞두고 있으니 건강도 예전 같지 않은 듯했다. 인플란트를 해넣기 위해 애쓰고 있는 이도 있었고 한번씩 건강에 고비를 넘기도 했던 모양이었다.
친구의 문상을 간 덕에 친구들의 형편이나 소식을 듣게 되는 신세가 되었다. 자주 만나고 얘기하고 정담을 나우어야 하는데 세상살이가 뭔지 그렇게 바빠게 살다보니 이제는 거의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고 있음을 절실하게 느끼게 된다. 이제는 제2의 생을 준비해야할 것으로 보였다. 앞으로 친구들 모두가 항상 건강하고 멋지게 직장생활을 마무리 짓고 아름다운 제 2막도 멋지고 아름답게 펼쳐가길 간구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