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취(6권 수필집)

누님의 고희연

자한형 2023. 5. 16. 2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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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님의 고희연

 

 

 

지난 주말이었다. 누님의 고희연이 있었다. 부산에서 부모님께서 올라오셨다. 군포의 애스톤 하우스라는 곳에서 저녁6시에 개최가 된다는 통보가 왔다. 부모님께서 455분에 광명역에 도착한다고 했다. 우리도 4시쯤 집에서 출발을 했다. 그런데 강남순환로로 들어가는 곳에서 길을 잘못 들었다. 역방향으로 간 것이다. 차를 돌리려고 사당쪽을 보니 엄청난 정체여서 양재로 나가기로 했다. 그런데 비가 오는 날이고 11월 마지막 주말인 탓에 도로의 정체는 극에 달했다. 터널 안은 거의 주차장 수준이었다. 급하게 부모님께 통화를 해서 택시로 목적지를 찾아가는 것이 좋겠다고 얘기를 했다. 마침 형님네 내외가 같이 있으셔서 한결 나았다. 우산도 없어 비를 다 맞으신 모양이었다. 우리도 급하게 유턴을 해서 목적지에 도착하니 30분이 지났다. 한창 연회가 진행되고 있었고 분위기도 고조되고 있었다. 거의 100석 남짓한 자리가 입추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꽉 찼다. 좌석이 부족한 관계로 관계자들이 다른 곳의 탁자와 의자를 가져와 배치하기도 했다. 우리 부부는 마침 입장하는 동생내외와 합석을 했다. 지방에서 올라온 사촌동생이었다. 집사람이 음식들을 날라 오는 동안 좌석을 지켰다. 주인공인 누님내외의 입장이 있었고 가족들의 입장이 이어졌다. 내외빈에 대한 소개얘기도 있었다. 얼마 전 대전 고검장에서 퇴임하고 변호사로 개업한 조 변호사가 있었다. 그리고 국민일보 편집국장을 역임하셨던 분도 오셨다. 기타 목사님 각종 친목계 모임의 회장님 등이 소개되었다. 우리내외도 짤막한 소개가 있었다. 담안회의 회원님들도 각자 도착시간이 달라 이곳저곳에 뿔뿔이 흩어져 앉았다. 다들 궂은 날씨여서 찾아오는 데 애로를 겪었고 우여곡절 끝에 연회장에 모여드는 형편이었다. 사촌형님, 누님 등도 늦게야 연회장에 들어오셨다. 큰아들 만훈이가 파란만장했던 누님의 일생을 들려주었다.

누님은 22녀의 장녀로 태어나 귀한 몸으로 대접을 받으며 자라났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모시고 살았던 부모님 밑에서 성장했다. 귀한 몸으로 털끝하나 건드리는 날에는 할아버지의 호통에 혼줄이 났다. 선생님들도 누님에게 꾸중을 하거나 하면 할아버지가 가셔서 선생님들을 혼내셨다고 하니 할아버지의 손녀사랑은 유별났다. 누님의 강단은 할아버지의 위엄을 그대로 물려받으신 듯했다. 불호령을 내리셨던 할아버지의 기를 그대로 이어 받은 것이다. 어린 나이에 대구로 가서 기숙사에서 생활하면서 산업전선에 뛰어들었다. 그러던 와중에 혼처가 있어 선을 봐서 현재의 자형을 만났다. 내가 중학교 2학년쯤이었던 듯했다. 73년경이었다. 신혼살림은 부산의 동래쪽에 차렸다. 자형이 럭키금성이라는 곳에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때 그 시절의 삶은 모두가 그랬듯이 빠듯한 살림이었던 터여서 누님은 조그만 가게를 했다. 여러 가지 일용품을 파는 곳이었는데 바로 앞에 일성공업사라는 공장이 있어 장사가 꽤 잘 되었다. 아이를 키우랴 장사하랴 언제나 바쁘게 사셨고 힘들게 생활하면서도 열심히 노력하셨던 모습이 눈에 선했다. 그렇게 장사를 해서 모은 돈으로 울산에 땅을 샀다. 그렇게 5년쯤 지난 때에 서울로 상경을 했다. 자형의 결심이 대단했다. 대부분의 친척들이 부산, 마산, 진주 등지에 있는 상태에서 혈혈단신으로 가족들과 함께 상경을 한다는 것이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인데 과감히 상경을 하신 것이다. 아들, , 아들이 줄지어 태어났다. 막내는 서울에서 태어났다. 처음 생활은 화곡동 쪽이었다. 연탄보일러 형식의 연립주택이었다. 자형의 월급으로 5식구가 빠듯하게 생활해나가는 형편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서초동2층 양옥집의 2층에 전세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파트를 분양받아 입주를 했다. 평촌의 한양APT였다. 막내 정규가 초등학교 시절에 목욕물에 발을 데어 화상을 입었다. 수차례 수술을 받고 처치를 받는 일이 있었다. 90년대쯤에 정규는 집사람에게서 수학 과외를 받으러 집에 오기도 했었다. 자식 셋을 다 대학까지 공부를 시켰다. 자형은 LG에서 나와서 중소업체의 임원으로 몇 년간 지내시다가 2000년쯤에 창업을 하셨다. 그리고 집도 평촌에서 산본으로 이사를 하셨다. 그러던 와중에 자형과 누님이 암 선고를 받으셨다. 두 분 다 어려운 고비를 넘기고 건강을 회복하셨다. 큰아들과 작은 아들도 결혼시키고 이제는 손자, 손녀까지 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되었다. 서울에서 이사를 하신 것이 19번이라고 하니 그 고초는 이루 말할 수 없었으리라. 워낙 뛰어난 노래, 춤 솜씨를 가진 분이라 항상 끼가 넘치고 활력이 넘치는 삶을 사신 듯하다. 당신이 즐겨 부르시는 권주가도 일품이었다. 국악 가락에 맞춘 전통 한국무용도 멋들어지게 추셨다. 관객들의 환호가 이어졌다. 내빈들의 덕담이 있었고 공식행사가 끝난 후에는 여흥이 이어졌다. 전문 소리꾼들의 민요가 있었다. 그리고 내빈들의 노래도 덧붙여졌다. 마지막에는 누님의 여자의 일생이 있었다. 고희연이 끝나고 기념품으로 타월이 배부되기도 했다. 늦은 시간이었기에 부산에 가시지 말고 서울에서 하루를 유하고 가라고 간곡히 권고를 했지만 사촌누님, 사촌형님은 결국 광명역으로 가셔서 부산행 KTX에 오르고 말았다. 우리 부부는 부모님을 모시고 집으로 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평온했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비는 그쳤고 도로는 뻥 뚫려있었다. 우리 집안의 친가나 외가를 불문하고 누님은 서울로 가신 최초의 사람이었다. 그 힘든 70년대 말부터 일가친척도 없는 서울에서 소위 말하는 자수성가하신 자형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지원하시고 내조를 아끼지 않았던 덕에 오늘의 성공을 이룰 수 있었다. 자형은 현재 LG전자의 납품업체인 주식회사 나라테크를 운영하고 있다. 계속 성장하고 있는 회사를 운영하신지도 10여년이 되었다. 고희연을 맞은 누님네 가족들이 모두 항상 건강하시고 행복한 나날을 보내시길 기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