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리사와 금오산에서
도리사와 금오산에서
지난 주말이었다. 서울에서 귀한 손님들이 구미교육원을 찾았다. 맨 먼저 도착한 이는 J소장이었다. 이미 농협에서 퇴직한지 3년이 지난 분이었다. 현재는 오산에 거주를 하고 있었고 순회검사역으로 5개월 정도를 남기고 있었다. 3급으로 승진해서 철원군지부에서 근무를 하다 최종적으로는 기흥에 있었던 부품센터에서 소장으로 명예퇴직을 한 분이었다. 동탄에서 SRT로 오다보니 시간이 맞지 않아 예정시간보다 2시간여를 먼저 오게 된 상황이었다. 교육원에서 차로 마중을 나가서 조우했다. 배낭을 메고 있었고 모자까지 쓴 상황이었고 간편한 복장으로 밝아보였다. 기차시간이 여의치 않아 점심식사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일단 교육원으로 모시고 왔다. 간단히 식사를 할 수 있도록 점심을 차려드렸다. 늦은 점심 시간대였기에 많이 시장하셨는지 아주 달게 식사를 하셨다. 날씨는 초여름의 전형이라 할 만큼 쾌청했고 무덥게 느껴졌다. 온 세상은 중부지방의 가뭄으로 인해 몸살을 앓고 있었다. 한 시간여가 지난 후 다시 김천구미역으로 마중을 나갔다. 오는 분들이 세 명이어서 J소장이 같이 갈 수는 없었다. 4시경에 두 분이 먼저 도착했고 곧이어 20분쯤 뒤에 G선배가 왔다. 모두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고 차를 타고 교육원으로 들어왔다. 다른 회원들도 있었지만 모두 다른 일이 있어 함께하지 못했다. 두 분은 KTX로 왔고 한 분은 SRT로 온 셈이었다. 한 분은 고양에서 살고 있었으니 무척이나 먼 여정이었으리라. G선배는 분당에서 살고 있었기에 서울역으로 가는 것은 무리였다. 수서역까지는 그래도 갈만 했으리라. 전체회원 9명 중 5명이니 과반수는 참여한 셈이었다. 20여 킬로미터를 달려 교육원에 도착해서 잠깐 휴식을 취했다. 짐을 놔두고 간편한 복장으로 길을 나섰다. 차를 타고 10여분 거리에 식사장소가 있었다. 도개농협에서 위탁해 운영되는 식당이었다. 식육매장은 별도로 있었다. 팩으로 포장된 육고기를 샀다. 등심, 안심, 갈비살 등이었다. 식당은 옆의 건물 2층에 있었다. 오후 6시경이었으니 조금 이른 시간이어서 그런지 손님이 많지는 않았다. 좌정해서 고기를 구워 먹으면서 얘기를 나눴다. 식당 한 켠의 벽에서는 표구가 하나 걸려있었다. 적혀있는 글귀는 ‘적선지가 필유여경(積善之家 必有餘慶) 적오지가 필유여앙(積惡之家 必有餘殃)이었다. 불판에 고기를 구웠고 모두들 맛있게 먹으며 얘기꽃을 피웠다. 인증샷도 찍었다.
K소장의 얘기이다. 그는 얼마 전 일본을 여행하고 왔다고 했다. 무척이나 깔끔하고 맛있는 음식들도 많이 먹었다고 했다. 사위와 딸이 살고 있는 인도네시아에도 보름정도를 머물다 오기도 했단다. 아들도 대한항공에 근무를 하고 있는데 이번에 인천공항에서 김포공항으로 근무지를 옮겼단다. 대리로 진급을 하기도 해 곧 결혼을 했으면 하는데 아직까지 할 생각이 없다고 손사래를 치고 있는 형편이라고 했다. 고양에서 사는 곳이 워낙 고층이어서 지기를 받지 못해 좀 힘들어 하고 있다고도 했다. 새롭게 잡은 직장이 잠실 쪽이어서 출퇴근 시간이 너무 많이 소요되는 것에서 애로를 겪고 있다는 하소연을 하기도 했다. 식사는 간단하게 된장국에 공깃밥으로 했다. 식사를 마친 후 커피를 한잔하고도 아직 날이 훤해 여름이 온 것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일단 늦었지만 내일 가보기로 했던 도리사에 가보기로 했다. 나는 치아관계 등으로 인해 술을 삼갔다. 20여분 차를 타고가 도리사에 도착했다. 진입로의 느티나무 길, 길옆의 호수 등에 감탄을 쏟아냈다. 길옆에 차를 세우고 사진을 찍자고도 했지만 곧바로 도리사로 올라갔다. 신라시대 최초의 절이라는 얘기와 절을 세웠던 아도화상의 얘기 등을 들려주었다.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나왔다는 부도탑 등에 관한 얘기에도 귀를 쫑긋 세우며 집중하며 들었다. 검찰총장이 나온 좋은 지기를 가진 곳이라고도 설명했는데 반신반의하기도 했다. 한 관광객은 사진촬영을 조력해주기 위해 흔쾌히 우리의 요구를 들어주기도 했다. 절 구경을 마치고서는 서대로 갔다. 아도화상이 손가락으로 황악산 아래의 직지사(直旨寺)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던 서대를 설명 들으며 확 트인 낙동강을 바라보며 여행의 진미를 만끽했다. 이제는 어스름해지고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서둘러 절을 빠져나오며 교육원으로 향했다. 교육원에 도착해서 간단히 맥주를 한잔씩 하면서 얘기를 했다. 오랜만에 동양화를 한번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도 했지만 도구가 없으니 방법이 없었다. 9시에는 뉴스를 보면서 세상사는 얘기를 늘어놓기도 했다. 11시쯤에는 모두들 각자의 침대로 자리를 옮겼다. 하루의 일정이 끝났다. 다음날 아침이 밝았다. 일요일이어서 살짝 걱정이 되었다. 제대로 아침식사를 하는 식당을 찾을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다 같이 나가서 식사를 하고 다음 일정을 하는 것도 번거로울 듯했다. 일단 차를 끌고 가서 식당을 찾았다. 다행히 다정식당이 문을 막 열었다. 7시였으니 식당을 연 것도 신기할 정도였다. 순댓국 3인분과 공깃밥 5개 그리고 안뽕 한 접시를 주문했다. 20여분이 지나고 음식을 포장해서 교육원으로 돌아왔다. 손님들은 모두들 교육원을 둘러보았고 일부는 테니스장에서 테니스를 치기도 했다. 하필 다들 핸드폰을 두고 간 상황이라 연락을 할 수도 없었다. 순댓국을 끓여 내놓았다. 모두들 시원하고 얼큰한 순댓국에 국그릇의 바닥이 보일 정도로 맛나게 아침식사를 했다. 설거지를 마치고 다음 목적지를 향해 출발했다. 직지사나 박대통령의 생가 등도 얘기되었으나 금오산으로 최종 확정이 되었다. 소요시간은 30분가량이었다. 입구에 일행을 내려주었고 다시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합류했다. 금오산 입구의 호수에 대해서도 감탄을 연발했다. 메타세콰이어가 줄지어 늘어선 길을 올라갔다. 입구에서 케이블카 타는 곳까지는 30미터 정도였다. 매점에서는 공갈빵, 단팥빵 등을 팔고 있었다. 단팥빵을 좀 샀다. 그리고 나눠서 먹었다. 케이블카는 5분정도 타는 것이었다. 케이블카에서 내리자마자 마주한 곳은 해운사라는 절이었다. 기념촬영을 몇 장 찍고는 일부는 대혜폭포로 향해 올라갔고 G선배는 얼마 전 다리를 다친 탓에 올라가지 않고 그곳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대혜폭포에는 등산객들로 붐볐다. 문제는 폭포에 물이 거의 없었다. 가뭄 탓도 있었겠지만 어쨌든 폭포의 절경을 제대로 느껴보지 못한 안타까움이 있었다. 박대통령시절 자연보호운동의 발상지였다는 설명에 고개를 끄덕거리기도 했다. 다시 케이블카를 타고 아래로 내려왔다. 주차장까지 걸어 내려오는 길에는 간간이 등산객들을 만나기도 했다. 주차장 입구에는 길재 선생의 회고가(懷古歌)가 표석에 조각이 되어져 있었다. 시조의 글월은 옛 학창시절을 떠올리게 했다.
오백 년 도읍지(都邑地)를 필마(匹馬)로 돌아드니,
산천(山川)은 의구(依舊)하되 인걸(人傑)은 간 데 없다.
어즈버, 태평연월(太平烟月)이 꿈이런가 하노라.
회고가는 목은 이색, 원천석, 야은 길재 선생의 회고가가 있다. 고려시대의 태평성대를 다시 한번 회고하는 내용으로 표현되어 있었다. 길재 선생은 대표적인 고려시대의 3은 중 한분이었다. 3은 포은, 목은, 야은을 일컬었다. 포은은 정몽주요, 목은은 이색, 야은은 길재를 얘기한다. 옆에는 채미정도 예쁘게 자리하고 있었다. G선배는 자신의 조상이라고 자부심이 대단했다. 기필코 사진을 찍고 가겠다는 의지가 강했다. 다음은 중식을 위해 인근 식당가 중에 자리 잡은 감나무집으로 갔다. 능이버섯전골을 시켰다. 생탁이라는 막걸리도 한잔씩 했다. 무척이나 만족한 여행이었다고 소회를 털어놓기도 했다. 식사를 마치고 이제는 김천구미역에서 KTX, SRT를 타고 돌아갈 시간이었다. 모두 귀한 시간을 내주셔서 구미를 방문했는데 제대로 즐거움을 만끽했던 좋은 시간으로 기억되었으면 할 뿐이다. 이제는 모두들 인생의 뒤안길에서 돌아와 장년을 보내고 계시는 분들이다. 손자를 보신 분들도 있을 정도이니 세상의 희로애락, 생사고락을 다하신 관록과 여유가 묻어났다. 행복하고 건강한 여생을 보내시길 기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