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취(6권 수필집)

직장생활 7

자한형 2023. 5. 31. 13:23
728x90

직장생활 7(2014~2015)

 

 

 

2014년 새해가 밝았다. 전년도에 있었던 부실장 등 인사에서 배제된 부분으로 해서 심란해 있었던 상황이었다. M급 이동 등 후속인사에서 농촌사랑지도자 연수원 부원장으로 발령되었다. 교육원 부원장으로는 강진군지부 J부지부장이 왔다. 농촌사랑지도자 연수원에서 전입내신을 잘 내어준 덕택으로 보였다. 지난해 말에 원장과 협의를 했던 결과로 보였다. 중앙교육원 부원장으로 K지점장님이 왔다. H부원장은 인력개발부 단장으로 영전되었다. 1월의 주요교육과정으로 범농협 신규직원교육이 진행되고 있었다. 농협역사에 관한 것을 부원장이 강의하는 부분이 있었다. 안성에서 전출되는 이는 부원장과 S교수가 승진해서 광양으로 전출되었다. 소강당에서 전출을 위한 의식도 진행이 되었다. 4년간 부원장으로 근무했던 곳에서 떠나는 순간이었다. 오랫동안 근무했던 사유로 인해 전출은 확실시 되었지만 정확한 근무지는 확실한 것을 알지 못한 상황이었다. 서대문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했다. 농촌사랑지도자 연수원의 부원장은 충북본부장으로 영전했다. 그리고 K팀장이 철원군지부 부지부장으로 승진해서 영전이 되었다. 그리고 K교수가 농업경제 쪽으로 본인의 희망에 의해 전출되었다. 농촌사랑지도자 연수원으로의 전입은 부원장과 팀장 1명 그리고 교수 2명이었다. 팀장은 농협대학에 오래 근무했었던 전북에서 올라온 분이었다. 교수는 서울출신 1명과 경남출신 1명이었다. 전입을 위해 사무실에 사무용 짐을 옮겼다. 그리고 숙소에는 책장을 좀 준비해 달라고 했고 책들을 좀 비치해 놓았다. 안성에서 봉고차가 책 박스를 옮겨주었다. 휴일에 숙소에 가서 책 정리를 하기도 했다. 안성의 부원장실보다는 좁았지만 특이한 점은 세면대가 있었던 점이었다. 책상배치 등을 좀 조정해서 본격적인 업무에 들어갔다. 처음의 전입신고는 팀장이 했다. 고양의 유명한 복집에 가서 점심식사를 하는 식이었다. 본격적인 교육은 3월부터 시작될 것으로 보였다. 교육은 일반 소비자대상, 임직원대상, 농업인 등 마을지도자, 그리고 다문화가족 등이었다. 농촌사랑운동 확산과 관련된 교육을 담당하고 있었다. 주무부서는 농촌지원부였다. 실질적으로는 별도조직으로 독립적이었다. 농촌사랑운동본부와 연계되어져 있었다. 처음에는 운동본부까지 연수원에서 업무를 했었으나 이제는 농촌지원부로 이관되어져 있었다. 농촌사랑운동본부와의 연계가 끊어져 있었다. 기금관리 및 농촌사랑운동관련 내용 등은 농촌지원부의 농촌사랑운동팀에서 관여하고 있었다. 국민운동으로 시작된 농촌사랑운동이 노정부하의 전폭적인 지원 하에 출발했으나 이제는 그 동력이 많이 떨어져 있었다. 전임회장께서 의욕적으로 추진해왔던 운동이었는데 이제는 그 의미가 많이 퇴색되어져 있었다. 가장 문제가 되었던 부분은 4급 교수의 승진이었다. 2001년도 승진자가 4명이나 되었는데 2014년도에 승진이 한명도 되지 않은 것이다. 한해 한명씩 승진한다고 해도 4년이 소요될 처지였다. 연수원 창설에 참여했던 원년멤버가 있었고 그 이후 2008년에 전입해온 이가 1명 그리고 2010년 전입한 교수가 2명이었다. 나이는 2010년에 전입해 온 이들이 훨씬 나이가 많은 상황이었다. 농촌지원부와 승진경쟁을 해야 할 입장인데 외곽부서라는 취약점이 있었다. 맨 먼저 업무를 한 것은 마을을 둘러보는 것이었다. 전입팀장과 함께 이틀에 걸쳐서 출장을 가서 둘러보았다. 전입팀장과 함께 대여섯 개 마을을 돌아보았다. 연천 새둥지 마을, 강화 도래미 마을, 양평 보릿고개 마을, 가루매 마을 등이었다. 전 교수요원을 대상으로 강의시연회를 하기도 했다. 하루는 1년간의 교육실적을 되돌아보고 다시 한해의 교육계획을 브리핑하는 시간을 갖기도 했다. 부원장은 화요일마다 서대문에서 개최되는 부실장회의에 참석해서 농촌사랑지도자 연수원의 주간업무보고를 하는 셈이었다. 그리고 부회장실에서 회의가 끝나면 상무실에서 회합을 하기도 했다. 상무께서는 매월 일정한 날을 정해 간담회 시간을 갖기도 했다. 부서별로 돌아가면서 주관을 하기도 했다. 각 지방의 특산물이 공수되기도 했다. 1년에 두 번 정도 차례가 돌아왔다. 한번은 강남의 일식집에서 회합을 하기도 했다. 회원지원부에서 대게를 공수해와 포식을 하기도 했고 무안의 낙지, 해산물 등이 공수되기도 했다. 제주도로의 12일 행사도 계획했으나 무산되기도 했다. 처음에는 신용보증부분의 부서장이 포함되었으나 다음해에는 별도로 떨어져나가기도 했다. 통상 8시에 회의가 개최되었는데 문제는 그때까지 대기를 할 만한 곳이 별도로 없었던 부분이었다. 처음에는 회원지원부장실에서 대기를 했다가 부회장실로 올라가기도 했는데 나중에는 신용보증기획부장실에서 대기하기도 했다. 어떤 경우에는 1층의 전산관련 사무실에서 대기해 있기도 했다. 부회장이 주관한 회합도 1년에 두 차례쯤 있기도 했다. 회의가 끝나면 연수원으로 돌아와 회의내용을 원장에게 보고하기도 했다. 연간 업무보고는 부회장과 상무님에게 별도로 보고를 하기도 했다. 사업계획의 사전설명회 때에는 회원지원분과에 소속되어 연도의 사업계획을 보고하기도 했다. 통상의 사업계획 사전설명회는 중앙교육원에서 개최되었다. 연수원 내부적으로는 정기적으로 월요일에 팀장회의와 교수회의가 있었다. 팀장회의는 원장실에서 개최되었고 팀장들이 이번 주에 하게 될 업무내용에 관해 보고하고 협의를 하는 자리였다. 교수회의는 회의실에서 부원장이 주관해서 개최가 되었다. 각 팀별로 서무교수가 보고를 했다. 월례회의는 매월 초에 소강당에서 전 직원이 참석한 가운데 월별로 필요한 내용들에 관해 교육을 하기도 했고 사고예방교육이 진행되기도 했다. 필수적인 부분은 원장의 인사말씀과 생일자에 대한 선물증정 등이 있었다. 원장께서는 매월 월례조회에 참석하시기도 했다. 임원 부실장을 대상으로 한 조찬행사에도 가끔씩 희망을 하시고 참석을 하기도 했다. 고양시 관내에는 농협관련 기관이 7개쯤 있었다. 매월 한 기관씩이 주관해서 중식을 하기도 했다. 총괄은 농협대학에서 주관했다. 통상 중식을 했었고 때때로 석식을 하기도 했다. 젖소개량사업소에서는 구내식당에서 회합을 주관하면서 사업소를 전체적으로 다 기관장들에게 안내하기도 했다. 추가적으로 참여하게 된 기관에는 삼송유통센터가 참여하게 되기도 했다. 2월 중순 쯤에는 원장에 대한 전문계약직의 계약체결이 절차를 밟기도 했다. 통상적으로 계약이 결정되면 방침을 농촌지원부에서 부회장에게 결재를 받아 시행하는 형식이었다. 업적평가와 관련해서는 절대평가방식으로 평가를 받았고 평가주관은 기획실에서 하는 식이었다. 교육기간은 통상 12일 수준이었고 직원의 경우에는 23일로 되어져 있었다. 체험지도사 또는 해설사과정의 경우는 상당히 장기간으로 되어있었고 정부예산지원이 수반되는 형태였다. 소비자과정의 대표적인 것은 여성지도자과정을 각 지역별로 진행이 되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형태는 지점에서 우수고객을 대상으로 해서 농촌사랑에 동참을 유도하는 식으로 진행이 되었다. 현장으로 출장을 가서 마을을 둘러보고 농작업 등에 관한 체험을 통해 교육과정이 진행되는 식이었다. 다문화가정에 관한 교육의 경우에는 23일 과정으로 되어져 있었고 첫날은 연수원내에서 교육이 진행되었고 2일차와 3일차는 야외에서 관광, 식체험 실습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원장, 부원장이 두 분중 한분이 꼭 참여를 하는 식이었다. 대부분의 교육과정에 교수들의 특강이 포함되어져 있었고 원장, 부원장, 팀장들이 강의를 하는 형식이었다. 춘계체육행사는 푸르내 마을에서 진행이 되었고 오전에는 일손 돕기 지원시간이었고 오후시간에는 파주 심학산으로 와서 산행을 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저녁식사를 하고 해산하는 순으로 이어졌다. 추계에는 나룻배마을에서 일손 돕기를 했고 오후에는 평화누리길을 걸었다. 그리고 저녁에는 바비큐 파티가 이어졌고 각종 게임을 통한 선물증정이 있었다. 1박을 했고 다음날 오후쯤에 해산하는 순으로 진행이 되었다. 4월쯤에 세월호 사건이 있었다. 5월쯤에는 사내출자분이 나와서 그것으로 차를 교체했다. 맥스크루즈로 바뀐 것이다. 3월에 집사람은 경기고 교감으로 발령을 받았다. 2교감으로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큰아들은 7월에 영국으로 어학연수를 떠나는 상황이 되었다. 다음해 1월쯤에 귀국을 하는 일정이었다. 작은 아들의 경우는 7월쯤에 전역을 해서 한 달쯤 휴식을 취한 후 2학년에 복학을 했다. 2014년 하반기 말엽쯤에 느닷없이 비서실장이 부원장으로 부임해왔다. 10월 중순부터 12월말까지 2개월 보름정도 근무를 하다 다시 서대문으로 전출되었다. 국정감사와 관련된 불미스러운 일로 인해 인사조치가 된 것이었다. 이로 인해 많은 유력인사들이 연수원을 찾기도 했다. 원장과 두 부원장이 심학산을 등산하기도 했다. 매일 틈나는 대로 연수원 내를 산책하기도 했다. 회합이 자주 이어지기도 했다. 2015년이 되었다. 농협대학의 총장이 L총장에서 N총장으로 바뀌었다. 연수원의 I 팀장이 급작스럽게 전출되었다. 그리고 두 팀장이 왔다. L팀장이 기획실에서 승진해서 왔고 J팀장은 연천에서 연수원으로 전입되었다. 교수는 K교수와, L교수가 승진해서 금산과 단양의 농정단정으로 전출되었다. 교수는 2명이 전입되었다. 한명은 기획실에서 K교수가 전입되었고 또 한명은 경북의 경주환경농업교육원에서 승진해서 전입된 상황이었다. 부회장도 바뀌었고 상무는 유임되었다. 회원지원부장도 바뀌었다. 회원지원 상무소관이 바뀌었다. 신용보증업무에 상무가 보임됨으로써 분리되었고 IT관련이 회원지원상무소관으로 바뀌었다. 2015년의 관건은 3.15일에 예정된 전국조합장 동시선거가 관건이었다. 전산도 양재동에서 의왕쪽으로 옮겨가는 과정 중에 있었다. 2015년의 최대 문제는 메르스 사태였다. 이로 인해 관광의 침체가 있었고 활성화되어 있는 마을도 많은 타격을 입게 되었다. 체험학습을 줄줄이 취소하는 사태가 빚어져 애로를 겪었다. 다문화의 식체험의 교육을 전담했었던 숙명여대에서 자체 사정으로 인해 식체험 교육을 못해준다는 바람에 다른 곳에서 요리실습을 하게 되었다. 2015년도 추계체육행사는 장독대 마을에서 12일로 진행이 되었다. 임진강에서 천렵을 해서 피라미튀김을 해서 먹었고 매운탕도 끓여서 먹었다. 숙소에서 취침을 했고 다음날에는 임진강변을 산책했다. 아주 절경의 경치를 즐겼고 흥겨운 시간을 가졌다. 매월 가진 상무주관 회합에서 IT부장이 특별한 음식들을 공수해와 맛있게 먹기도 했다. 회원지원부장과, 농촌지원부장이 바뀌었고 농촌사랑만 그대로인 셈이었다. 신용보증기획부장은 상무로 영전이 되었다. 그리고 업무부장은 기획부장으로 영전했다. 농촌지원부장은 인천본부장으로 영전했다. 회원지원부장은 농협홍삼의 전무로 보임되었다. 연도 말에는 이 팀장의 아들 결혼식이 있었다. 가을쯤에 원장의 아들 결혼식도 있었다. 성대하게 치러졌다. 며느리는 인천 교육청의 교육공무원이었다. 부회장의 자녀혼사가 있기도 했다. 농촌사랑에 와서 3월에 3심향을 향한 여정이란 책을 발간했다. 모두들 축하를 해 주었다. 집사람은 제2교감에서 제1교감으로 보직이 변경되었다. 동창회에서 보내주는 홋가이도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큰아들은 어학연수를 하면서 수시로 유럽여행을 다니는 식이어서 여행경비를 보내주느라 애를 먹었다. 올해1월말에 귀국해서 취업준비에 매진했다. 꼬박1년이 걸렸다. 최종 합격지는 농협손해보험이었다. 9월부터 면접에 들어갔고 최종 합격통보는 11월에 받았다. 12월부터 연수에 들어갔다. 작은 아들도 공부를 충실히 해서 장학금을 받기도 했다. 순풍에 돛을 단 듯 만사가 잘 풀려갔고 순조로웠다. 연수원에서는 2016년이 연수원 창립10주년이었기에 그에 관한 준비를 해야 했다. 연수원에 근무했던 이들에게 원고를 청탁해야 했고 여러 가지 자료를 수집해서 편집해야 했다. 16년에는 회장선거가 예정되어져 있었다. 16년에는 경주교육원의 개원도 예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