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한형 2023. 7. 10. 2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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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의 첫돌

자고로 사람은 관혼상제의 통과의례를 거친다. 사람의 일생은 나고 자라고 병들고 늙고 죽기도 한다. 그런데 가장 힘들고 어려운 순간이 태어나 세 살이 될 때까지가 아닌가 여겨지기도 한다. 일반 가축이나 동물들을 보면 그렇게 어렵게 삶을 시작하는 것 같지 않아 보인다. 포유류의 대부분의 동물들은 태어나자마자 활동을 시작한다. 하지만 사람은 그렇지 않다. 태어나는 순간에는 엄청난 고통 속에서 엄마의 자궁을 빠져나와 세상에 울음을 울면서 시작한다. 그런데 손자가 태어나는 것을 보니 태어나서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상태였다. 눈을 뜨고 활동을 시작하고 사지를 버둥거리고 기어 다니기 시작하고 그런 연후에 일어서서 걸어가기까지 거의 1년이 걸린다. 지난달 말에 손자의 돌잔치가 있었다. 6개월 전에 예약을 했다고 하니 돌잔치를 하는 것도 보통일이 아닌 듯하다. 우리가족과 사돈네 가족이 참석해서 8명이 참석을 한 셈이다. 주인공은 당연히 손자였다. 며느리는 하얀 드레스로 성장을 했고 아들도 깔끔한 검정색 양복에 나비넥타이를 맸다. 며느리가 보낸 돌잔치의 식순은 가족단체사진촬영, 성장동영상 감상, 인사말(아들), 생일축하노래합창, 케잌 커팅 건배 순이었다. 가장 중요한 돌잡이는 식전행사였다. 오후 늦은 시간에 전문 사진사가 와서 돌행사를 주관했다. 야외 촬영이 있었고 실내촬영이 있었다. 천지분간을 못하는 손자를 얼르고 달래가면서 사진을 촬영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손자를 집중시킬 장난감을 들고 요롱을 흔들 듯 그렇게 아이를 집중시키고 주의를 끌어서 겨우 한 차례씩 사진을 찍는 식이었다. 일반 테이블이 있는 곳에서 자연스럽게 사진촬영을 마친 후 야외촬영을 했고 최종적으로는 돌상이 차려진 테이블에서 촬영이 이루어졌다. 손자가 홀로 서기를 못하는 관계로 아들이 손자를 잡고 있고 자신은 보이지 않게 연출을 하는데 그 모든 것을 주관하는 이는 사진작가였다. 각종 포즈로 돌사진을 촬영한 셈이었다. 그리고 하이라이트는 돌잡이였다. 예전의 돌잡이 용품은 활, , 엽전, 판사봉, 청진기, 천자문 등이었다. 그런데 요즘은 많이 변모된 모양이다. 엽전대신 신사임당이 올랐다. 손자가 잡은 것은 활이었다. 두 번째 잡은 것은 청진기였다. 사진작가의 주문은 며느리에게 요청을 했다. 잡으면 좋을 것으로 희망하는 것을 손자 앞에 놔두라는 식이었다. 돌잔치가 벌어진 곳은 반얀트리 클럽앤 스파 페스타바이민구(식당)이었다. 호텔과 클럽 그리고 식당으로 세 개로 분류되었다. 식당바로 옆에는 실외수영장이 있었다. 호캉스를 즐기는 이들의 각광받는 곳으로 보였다. 그렇게 사진작가에 의해 능숙하게 주도된 돌잔치의 식전행사는 1차적으로 마무리 되었다. 다음은 본격적인 본행사였다. 먼저 손자의 1년 삶에 관한 동영상의 감상시간이 있었다. 태어나서 백일을 지나고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담은 영상으로 며느리가 심혈을 기울여 만들었다. 5분 정도의 분량으로 사진에 글자를 넣어 아주 프로페셔널하게 만든 것으로 보였다. 그리고 아들의 인사말이 있었다. 그동안 물심양면으로 태서의 육아와 성장에 애를 쓴 양가 부모와 그리고 며느리에 대한 감사의 의사를 표명한 내용이었다. 그리고 다음 식순으로 된 것은 음식을 주문해서 식사를 했다. 식사를 하기 전에 먼저 손자의 이유식을 먹였다. 손자는 무더운 날씨에 하얀 양복에 베레모 같은 모자까지 썼고 신발까지 신었으니 엄청나게 답답했을 것으로 보였다. 머리에 땀이 나 모자를 내팽겨치기도 했다. 양복을 한복으로 갈아입히는 것도 보통일이 아니었다. 일반 사진 촬영을 마친후 돌잡이를 하기 위해 한복으로 갈아입었다. 색동저고리는 아니었지만 한복저고리를 입었고 풍차바지를 입고 복건을 머리에 썼다. 무엇이든 벗어던져버리는 손자는 복건도 벗어던지기도 했지만 용케도 머리에 썼고 잘 참아냈고 무난하게 돌잔치 행사를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중간에 한차례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지만 그렇지 않은 돌잔치 중에는 짜증 내지 않고 잘 진행에 따라준 편이었다. 손자는 이유식을 먹은 후 잠을 자야 하는 시간이었는데 녀석은 아빠와 엄마가 번갈아가며 유모차를 태우고 산책을 하며 재워보려 했지만 잠을 자지는 않아 결국 품에 안고 얼르고 달래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돌 상에는 케잌이 3단으로 된 것이 놓여 있었는데 축 태서 첫돌이라고 한글로 새겨져 있었다. 돌상에는 떡 송편, 실꾸러미, 한과, 과일 등이 놓여져 있었다. 돌 상 위의 꽃은 조화로 보였고 잔치 상의 위에 장식된 꽃은 생화였다. 전치가 끝나고 생화는 다 가족별로 가져가도록 배분되었고 떡류도 포장해서 각가족 별로 가져갈 수 있도록 해줬다. 손자 돌잔치의 식사는 순차적으로 나왔다. 전복죽, 랍소더, 소고기무국과 밥상, 스테이크, 도미회, 등이 엑기스로 나왔다. 마지막 디저트는 차와 아이스크림 마크롱이 나왔다. 사돈네는 전주에서 올라와 행사에 참석하고 곧바로 KTX 하행선을 타고 귀가했다. 아내는 손자의 돌잔치 참석을 위해 반휴를 냈다. 작은아들도 귀한 시간을 냈다. 며느리의 아이디어였는지 돌잡이를 맞추는 것이 있었다. 와인잔 같은 플라스틱 컵에 번호를 넣고 그것을 8개를 만들었다. 돌잡이의 개수에 맞춘 셈이었다.. 안사돈과 내가 같은 유리잔에 번호를 넣어 첫 번째 잡은 활을 맞추지 못했고 두 번째 청진기는 아내가 맞췄다. 선물은 스타벅스 커피권이었다. 우리는 금일봉 봉투를 전했고 사돈네는 손자를 위해 돌반지, 돌팔찌, 금일봉, 등을 선물했다. 천금 같은 손자의 잉태소식을 들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제 그로부터 16개월이 지난 셈이었다. 1년동안 태서의 성장을 위해 육아를 도맡은 며느리 안사돈네에게 깊은 감사를 표한다. 아쉬운 점은 와인이라도 한 잔 하면서 건배를 해야 했는데 차를 가져갔으니 술을 마실 수 없는 부분에 아쉬움이 남았다. 유행가 가사처럼 그렇게 손자를 위해서는 무엇이든 다해주고 싶은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향후 손자가 무럭무럭 자라나 나라의 큰 동량이 되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