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한형 2023. 8. 27. 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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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둑의 전설 조훈현 일대기 3

세상에!”

가족들은 일제히 약속이나 한 것처럼 탄성을 터뜨렸다.

집에서 공장까지의 거리는 대략 1.5Km쯤 될까?

거리도 만만치 않지만 오는 길이 거리의 모퉁이를 몇 번이나 꺾고 블록을 휘감아 돈 다음, 대로를 건너고 복잡한 역사(驛舍) 건물을 관통하고 철도를 건너 공장의 담벼락을 끼고 반 바퀴를 돌아야 찾아올 수 있는, 어려운 길이었다.

그런데 이제 겨우 걸음마를 뗀 어린애가 천연덕스럽게 그 길을 혼자 찾아왔다니 놀랄 수밖에-

(훗날 조규상 옹이 회고하길, ‘훈현이의 머릿 속에는 천부적인 방향감각의 나침반이 들어 있는 것 같다.“ 라고 했었다. 따지고 보면 조훈현의 놀라운 복기능력도 다 그런 감각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아무튼 그 소동을 통해 막내아들의 총기(聰氣)가 범상치 않다고 여긴 조규상은 더더욱 훈현이를 슬하에 두고 금지옥엽처럼 총애하면서 또 다른 인생의 감격시대를 예감하게 된다.

조훈현과 가까운 바둑관계자들은 입을 모아 이렇게 말한다.

그가 바둑을 두지 않고 다른 길을 택했어도 크게 성공했을 것이다.”라고-

명석한 두뇌, 깔끔한 대인관계, 그리고 치열한 지적 호기심과 자유분방한 상상력 등등......

인간 조훈현은 성공인이 되기에 필요한 자산을 아주 많이 소유하고 있는 인물이다.

만약, 그의 부친 조규상이 사업가로 계속 승승장구했다면 아마 바둑황제 조훈현은 지금 이 자리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부유한 환경의 소년이 그 당시만 해도 雜技 따위로 취급받던 바둑에 몰입할 이유는 없었을 테니까.

50년대 초반-

목포의 조규상은 하는 일마다 뜻대로 풀리지 않아 암울한 장년의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2층의 마룻바닥에서 조카사위 신서중과 매일 바둑을 두는 게 유일한 낙이었다.

두 사람의 실력은 7~8급 정도.

하지만 그 시절 남도의 항구에서 그 만큼 바둑을 둘 줄 아면 고수 대접을 받았을 것이다.

신중한 성격의 조규상은 바둑 스타일도 진지한 장고파였다.

여러 판을 뚝딱 해치우거나 내기를 즐기는 쪽이 아니었으므로, 자연스럽게 맞수 조카사위와 도끼자루 썩는지 모르는 신선놀음을 즐겼다.

가족들에게 2층은 성역이었다.

올라가봤자 재미도 없었고 꾸중을 듣기 일쑤였으므로.

그런데 언젠가부터 네 살 짜리 막동이는 어른들이 바둑을 둘 때마다 계단을 기어 올라와 물끄러미 판을 내려다 보곤 했었다.

그 나이 또래의 어린이들이라면 바둑알을 건드린다거나 어른들을 귀찮게 할 법하건만 막동이 조훈현은 의외로 얌전하게 관전자의 매너를 지켰다.

고집이 유별나게 세고 활달한 편인 훈현이가 유독 바둑판 옆에서는 진지하게 앉아있는 게 대견스러워 아버지는 그 막동이에게 2층을 언제든지 출입할 수 있도록 아량을 베풀었다.

꼬마는 성냥과 담배 심부름을 기꺼이 하면서 노상 2층에 머물렀다.

그러던 어느날-

맞수끼리의 대국이 한참 점입가경으로 접어들어 난전이 전개됐을 때, 조규상은 고심을 거듭한 끝에 한 수를 놓으려고 반상 위로 손을 가져갔다.

그 순간 어린 관전객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아부지, 거기 놓으면 안돼라우!”

조규상은 네 살 짜리 막동이가 뭘 알고 그런 소리를 하나 갸우뚱했지만 이내 피식 웃어버리고 착점을 했다.

그런데 나중에 복기를 해보니 바로 그 수가 패착에 가까운 수였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러자 아버지 조규상보다도 상대였던 조카사위 신서중(조훈현의 매형)이 먼저 네 살 짜리의 훈수가 예사롭지 않았다는 걸 알아차렸다.

저 애가 혹시 수를 제대로 읽은 거 아닐까요?”

에이, 이제 겨우 네 살 짜리가 뭘 알겠어?”

어른들의 대화를 묵묵히 지켜보던 꼬마가 자존심 상한 듯 대꾸했다.

아부지, 나 바둑 둘 줄 알아라우.”

아들의 항변에 기가 막힌 아버지는 훈현이를 바둑판 앞에 앉혀놓고 흑돌을 밀어 주었다.

어디 둘 줄 아나 한 번 보자?”

생애 처음 두는 바둑의 칫수는 아홉 점.

꼬마는 거침없이 똑딱똑딱 바둑알을 반상에 내리꽂았다.

판이 진행되면서 아버지와 매형의 눈동자는 화등잔만하게 커져 갔다.

놀랍게도 어린 훈현이가 제법 그럴 듯하게 집을 지어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아직 행마가 제대로 갖춰진 실력은 아니었다.

그러나 꼬마는 처음 두어본 바둑인데도 집이 많으면 이긴다는 바둑의 이치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날부터 2층의 풍경은 확 달라졌다.

맞수들의 대결에 꼬마 관전자가 붙은 게 아니고 아버지와 매형이 교대로 신통한 꼬마와 대국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어린 훈현이는 어른들이 한참 바둑을 두다가 오후 늦은 시각이면 항상 자기만 놔두고 어디론가 자리를 옮긴다는 사실을 알고 소외감을 느끼게 된다.

알고보니 어른들의 2차 집결지는 역전의 유달기원.

퇴근 시간이 되면 목포의 바둑강자들이 자연스럽게 모이는 기원이 아버지와 매형의 또 다른 사랑방이었던 것이다.

아부지, 나도 기원에 데려가 주씨요.”

기원이 어떤 곳인지도 모르면서 꼬마는 아버지가 가는 곳에 꼭 따라가고 싶었다.

허허, 그 놈 참! 좋다. 네가 아홉 점으로 나를 이기는 날 기원에 데려가주마.”

아버지는 마지 못해 그런 조건을 내걸었다.

아들이 비록 천재적인 재능을 발하고는 있지만 기원에 데려가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 곳은 내기바둑으로 충혈된 기객들의 피로와 더불어 담배연기가 자욱한 곳 아닌가.

그래서 결코 불가능한 조건이다 싶은 내기를 걸었는데 어이없게도 며칠이 가기도 전에 그는 아들로부터 충격적인 패배를 당하고 만다.

아 글세 이 놈이, 설렁설렁 집이나 지어대던 철부지가 아홉 점의 기착점 프리미엄을 십분 활용해 너무나 간단하게 승리를 닦아버리는 게 아닌가.

이제 기원에 데리고 가준다는 약속은 꼼짝없이 이행해야 할 판인데, 그렇다고 칙칙한 어른들의 사랑방에 이 어린애를 데리고 가긴 좀 찜찜하고......

그런 갈등을 겪고 있을 때 목포여고 수학교사로 재직하고 있던 집안의 조카 박승곤이 찾아와 조규상의 판단을 도와주게 된다.

고모부, 기원에 데리고 가 봅시다. 훈현이는 보통 아이가 아닙니다. 비록 아홉 점이지만 7급을 이겼잖습니까? 게다가 동아일보에 게재되는 국수전 기보까지 주르르 외우는 걸 보세요. 전문가한테 훈현이의 진가를 한 번 감별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해서 꼬마 조훈현은 바둑을 구경한 지 한 달도 채 안된 시점에서 기원과 인연을 맺게 된다.

어떤 철학자가 예술을 규정하길 예술은 그 사람의 인생만큼 나간다.”라고 말했다.

연륜(年輪)이 그 만큼 예술을 깊이 있게 만든다는 뜻이리라.

그렇다면 바둑은 어떠할까?

바둑 역시 인생의 부피와 비례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

그러나 우리는 가끔씩 출현하는 바둑천재들 때문에 극심한 혼란을 겪고 만다.

신동 이창호의 존재 때문에 얼마나 많은 기사들이 바둑의 불가해한 속성을 탄식하며 절망했던가?

적어도 일정한 판 수()를 경험한 뒤에 깨우칠 수 있는 기리(棋理)를 소년은 너무나 쉽고 빠르게 터득하고 말았으며 가공할 파워로 고단자들을 밀어버렸다.

4기 동양증권배 결승전에서 이창호와 만난 조치훈.

조훈현 선배는 제자 이창호를 좀더 혼냈어야 한다.”

그는 임전소감을 그 한 마디로 표현했다.

이창호가 아무리 세다한들 아직은 멀었다는 자신감과 함께, 제자에게 너무 쉽게 정상을 내주고 만 조훈현을 은근히 책망하는 촌철살인의 발언이었다.

그 말을 듣고 조훈현은 빙그레 미소로 답했다.

아마도 그는 조치훈에게 이런 말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게 말야. 하지만 자네도 한 번 겪어보게. 창호의 완력이 만만치 않을 거야. 비록 내가 가르친 제자이긴 해도 이미 창호는 나름대로 바둑의 길을 터득한 아이거든. 치훈이 자네도 바짝 긴장해야 할 걸세.”

아니나다를까 결승 5번기는 이창호의 싹쓸이 3연승으로 간단하게 끝이 나고 말았고-

혼신의 힘을 다했는데도 허무하게 패퇴하고 만 조치훈은 설레설레 고개를 젓고 현해탄을 건너가야 했다.

천재의 전형을 보여주며 일본기계를 평정한 조치훈은 그 때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아무튼 어린 나이에 너무 쉽게 바둑의 길을 깨우친 천재들이 우리 바둑사에 드문드문 출현하곤 하는데-

그 첫 번째 타자가 바로 조훈현임을 그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목포의 유달기원

50년대 목포에서는 거의 유일한 바둑사랑방이 바로 역전에 위치한 유달기원이었다.

부친 조규상과의 내기바둑(?)에서 승리한 조훈현은 약속대로 사촌매형 박승곤과 아버지의 손을 잡고 생전 처음 기원에 발을 내딛었다.

만으로 다섯 살 무렵이었다.

기원에서 바둑을 두던 손님들은 왠 꼬마인가 싶어 힐끔거렸다.

목포고 수학교사이자 서울대 출신의 엘리트 박승곤이 원장에게 꼬마를 소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