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한형 2023. 9. 2. 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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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돌론/타이젬

1. 기질氣質temperament

저는 심리학에서 사람의 '감정의 경향으로 본 개인의 성질'인 기질을 정형화시켜 심리 분석의 키워드로 사용하고 있듯이, 만약 승부사 특유의 기질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라면 정형화시켜 승부와의 상관관계를 유추해 보는 것도 재미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이미 충분히 시도 되었는데 저만 모르고 있을는지도 모를 일이지만, 바둑만큼 심리적인 요소가 크게 작용하는 게임도 드물기에 꼭 헛손질만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 생각을 곧 접어야만 했습니다. 왜냐하면 승부사도 여느 사람들과 똑같은 사람인 이상, 승부기질이라는 것도 보통사람들의 기질에 '이기고 싶다'는 열망을 덧붙인 것 이상이나 이하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즉시 눈치 챘기 때문입니다. 하마터면 집사람만이 알고 있는 '나는 바보올시다'라는 일급비밀을 태연자약하게 털어놓을 뻔했습니다. 하하.

'승부기질이 있다'고 하면 흔히 '승부하는 것 자체를 좋아하는 성향이 있다'라는 의미로 쓰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만, '승부하는 것 자체를 좋아한다'는 것은 어딘가 구멍이 뚫린 듯 공허합니다.

'승부가 끝나기 전까지는 승패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런 대로 심금을 울리지만, '지든 이기든 진검승부 자체를 좋아한다''흙 파먹고 사나?'하는 의문이 먼저 떠오릅니다. 승부기질은 '이기고 싶다'는 열망을 떼어 놓고서는 절대로 성립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만약 어떤 승부사가 "승패를 떠나 좋은 기보를 남기고 싶다."라고 말한다면, '나는 한 번도 패배를 떠올려 본 적이 없다. 반드시 상대를 코피 내고 싶다'라는 속내를 대외용으로 '네다바이'친 거라고 믿어도 좋습니다.

'사람이 좋으면 승부에 약하다'는 속설의 타당성 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심리학자나 할 수 있는 일이겠습니다만, 특정한 승부사에게 '근성이 부족하다' '기가 약하다' '독기가 없다' 따위의 진단이 따라다니는 경우가 있는 걸 보면, 그 승부사가 평상시에 보여주는 성품에 의하여 '먹고 들어가는' 면이 작용하기도 하는 것이 승부인 모양입니다.

, 평소에는 멀쩡하다가도 운전대만 잡으면 헐크로 변하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평소에는 '평화지상주의자'처럼 보이다가도 바둑판 앞에 앉는 순간 냉혈한 킬러로 돌변하는 승부사가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근본적으로는, 보통사람들이 교육의 정도나 직업의 종류와 관계없이 가지고 나온 기질에 순응하며 평생을 살아가듯이, 승부라는 특수한 세계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본래 타고난 기질의 굴레를 완전히 벗어던지지는 못한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사람이 좋으면 승부에 약하다는 속설은 '그럼 사람이 악해야만 승부에 강해지는 것이냐?'하는 반론을 유발시킬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선과 악의 차원이 아니라 '승부세계의 냉혹함'을 의미하는 걸로 받아들여야 옳겠지요.

다만 승부사는 자나 깨나 승부만을 생각해야 한다는 점에서 보통사람들과는 다른 것 같습니다. 승부사가 단 한 순간이라도 승부 감각을 잃는다면 링에 올라갔을 때, 마치 체중 조절에 실패한 권투선수처럼 잽 몇 방에 그로기로 몰리게 되겠지요.

제가 이세돌이라는 승부사를 연상하였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 바로 그의 기질이었습니다.

언젠가 그는 필화의 주인공 - 개전의 정을 보여 주어야 하는 대상으로 지목된 적이 있습니다. 그는 "실력으로는 내가 최고인 것 같다." "단 한 판도 지지 않는 것이 목표다."라는 공격적인 발언을 한 적이 있고, <농심배>에서 주최 측이 납득할 수 없는 처사로 <외계인>에게 시드를 주었다고 하여 예선참가를 거부했으며, "마효춘은 일류에서 열외시켜 달라."라는 노골적인 비하 발언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완만한 곡선이 대세인 도중 속에서 그는 '직선적인'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직선적인'은 기존의 정서상 수용되기가 쉽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오만불손하다는 반응이 주류였고, '바둑 한 냥 사람 서 푼'이라는 말이 임자를 만나기라도 했다는 듯이 그의, 인격의 완성도에 회의를 품는 반응이 주류였던 것 같습니다. 그의 안티(anti)도 생겼고, 심지어 꼴도 보기 싫으니 그의 기사조차 싣지 말아 달라는 극단적인 의견까지 나왔었던 것 같습니다.

언뜻 이견을 달기 어려워 보입니다. 만약 이창호였다면 말을 바꿀 100번의 기회를 준다고 해도 그런 직격탄을 쏘는 발언은 하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누구나 그의 내공을 인정하고 그에 걸맞은 면모를 기대하고 있었으나, 오히려 그는 트러블 메이커가 되어 스스로 고행을 자초한 감이 짙습니다.

그의 '직선적인'이 원성을 사는 것은 타당한 일처럼 여겨집니다. 한데, 그렇다고 그의 기사마저도 보고 싶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은 매우 편협한 시각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그 문제는 그리 단순해 보이지도 않습니다. 적절하다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만, 시인의 경우를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독자는 대개 시인과 그 시인이 쓴 작품이 동일하다고 여기거나 동일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한 것 같습니다.

이를테면 제가 어떤 시에서 감동을 받았을 때, 저에게는 그 시를 쓴 시인도 그 시만큼이나 감동적이고 훌륭한 사람이라고 믿거나 사람이기를 바라는 마음이 충만할 거라는 뜻입니다. 그런 독자의 믿음에 부담을 느껴 평생 독자 앞에 얼굴을 내밀지 않고 잡문과 인터뷰를 비롯한 일체의 외도도 사양하고, '작가는 오로지 작품으로만 말하는 주의'를 고집하는 시인도 있는 것 같습니다. 설사 그 시인이 자신의 시 이상으로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더라도 인간적인 면모에서 파생될지 모르는 왜곡과 불협화음의 싹을 애초에 잘라 버리자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그런 은둔주의는 호랑이가 무서워 산에 나무하러 가지 못하고 동지섣달 기나긴 밤을 추위에 떨며 새우잠을 자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시를 읽은 독자는 시인을 알고 싶어 합니다. 시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시인이라는 구상적인 개념으로 확인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시는 더욱 풍부해지고 시인은 더욱 깊어지는 것입니다.

같은 논리로 바둑 팬은 기보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프로기사라는 구상적인 개념으로 확인하고 싶어 할 것입니다. 더구나 바둑은 흥행을 전제로 합니다. 독자가 없어도 시인이 존립할 수 있는가는 저도 모르는 부분이지만, 바둑 팬이 없는 프로기사는 결코 존립할 수 없다는 사실 만큼은 명확한 것 같습니다.

프로기사들의 기질과 스타일은 흥행의 중요한 요소이며 프로기사들의 신상이 해체되면 해체될수록 흥행 가능성도 커집니다. 스폰서들이 프로기사들의 인격을 저울로 달아보고 베팅하는 경우는 단 한 건도 없을 것입니다. 저는 이세돌의 기사를 자주 못 봐서 환장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그가 원성을 살수록 그의 기사는 더욱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바둑계가 대단히 보수적인 세계라고 느꼈습니다. 그건 바둑 자체가 갖는 도적인 특성도 작용을 하고, 기량과 인품에서 일가를 이룬 대가들이 상부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바둑에는 사람을 침착하고 진지하게 만드는 힘이 들어 있는 것 같습니다. 바둑계가 보수적인 것은 지극히 당연해 보입니다. 그런 보수적인 세계에서 이세돌의 '직선적인'은 충분히 오해의 여지가 있어 보입니다. 제가 '오해의 여지'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그를 두둔하려는 마음이 있어서가 아니라, 승부의 여러 요소를 종합해 생각했을 때, 별다른 거부반응 없이 그의 '직선적인'을 받아들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 이름은 막시무스 데시무스 메리디우스. 북부군 사령관이자, 펠릭스 여단의 장군. 진정한 황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충복이다. 살해당한 아들의 아버지이자, 살해당한 아내의 남편이다. 나는 반드시 복수할 것이다. 살아서 못한다면 죽어서라도."

- 영화 <글래디에이터(gladiator)>

<글래디에이터>는 막시무스 데시무스 메리디우스라는 가상 인물을 내세워, 그가 로마군대의 장군에서 노예 검투사로 전락하고 가족도 몰살당하지만 초인적인 의지와 검술실력으로 끝내 복수에 성공하고 만다는 '어디선가 본 듯한' 스토리의 스펙터클 액션 영화입니다.

검투사 영화의 원조는 커크 더글라스가 주연한 <스파르타쿠스(spartacus)>라 할 수 있고, <스파르타쿠스>'검노 반란'을 일으킨 스파르타쿠스의 인생 역정을 서사적으로 그렸다면, <글래디에이터>는 인생 역정이고 뭐고 없이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는 복수의 율법을 모티브로 삼아 초지일관 액션에 액션만을 거듭하는 전형적인 킬링타임용 영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칼 마르크스가 스파르타쿠스 반란을 '역사상 가장 정당했던 전쟁'이라고 평가했다는데, <자본론> 완역본을 빌릴 기회가 있었지만 불면증의 특효약으로 며칠 사용하다가 그냥 돌려주고 말았던 저로서는, 그의 역사적 평가에 대해서는 큰 흥미를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기득권을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대립은 인간에게 영원히 풀 길 없는 숙제여서 그럴는지도 모를 일이지만, 언제부턴가 저는 매너리즘에 빠져든 것 같습니다.

저는 오히려 검투사들이 보여주는 인간의 투쟁심에서 흥미를 느꼈습니다. 검투사의 투쟁심이 현대에 와서는 권투나 <발리 투드>의 격투기로 변형되어 그 뿌리를 잇고 있지만(인간의 폭력성이 끝나지 않는 이상 이와 유사한 경기는 끊임없이 계속 될 것입니다), 저는 몸으로 때우는 격투기뿐만 아니라 체스나 장기와 같은 정신적인 격투기에서도 검투사의 투쟁심은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칼 대신 체스 알을, 방패 대신 장기 알을 들었을 뿐이지 그 격렬함이나 혼신을 다하는 자세 같은 것이 꿀릴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특히 바둑은 그 선이 굵은 흐름으로 볼 때 <벤허>에 등장하는 마차 경주를 연상시킵니다. 마냥 달리기만 한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언제 곤두박질칠는지 모릅니다. 바퀴 중심에서 날카로운 창이 튀어나오는 상대 마차를 견제해야 하고, 제 때 고삐를 당기거나 풀어 주어야 합니다. 일착으로 골인 지점을 통과하지 못한다면 몸이 성해도 성한 것이 아닙니다. 찰톤 헤스톤처럼 신의 섭리를 백그라운드로 갖고 있지 못하다면 더욱 긴장하고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제가 조치훈의 "목숨을 걸고 둔다."라는 말에 리얼리티가 철철 넘친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둑의 그 승부의 격렬함을 약간이나마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푸른 하늘을 제압하는

노고지리가 자유로왔다고

부러워하던

어느 시인의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자유를 위해서

비상하여본 일이 있는

사람이면 알지

노고지리가

무엇을 보고

노래하는가를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있는가를

혁명은

왜 고독한 것인가를

혁명은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

- 김수영 <푸른 하늘을> 전문

승부사는 죽으나 사나 승부만을 생각해야 하는 고독한 직업입니다. 승부사는 승부를 할 때마다 천국과 지옥으로 갈리는 마음의 격동을 겪어야 하고, 한 순간의 승리를 위하여 오랜 시간 처절한 자신과의 싸움을 견뎌 내야 합니다. 승부 자체의 격렬함은 검투사의 '칼부림'에 견주어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을 지경이지만, 119에 도움을 청할 수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승부사는 왜 그 지독한 승부의 세계를 떠나지 못하는 것일까요? "산이 거기 있기에 산에 오른다."라는 조지 말러리의 명언이 그 답이 될 수 있지 않을는지요. <푸른 하늘을>은 자유를 위하여 투쟁하는 지상의 모든 투사에게 바쳐지는 헌사이지만, 그 투쟁이 고독하다는 점에서, 저는 '승부사에게 바쳐지는 헌사'로 쓰여도 크게 무리가 없으리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의 기질을 간략하게나마 짚어 보겠습니다.

저는 점쟁이가 아닙니다. 그리고 그와 말 한 마디 나눠 본 적도 없습니다. 그저 그에 관한 기사를 검색하고 그의 대국보를 감상한 것이 전부입니다. 그러니 '돈을 많이 벌면 부자로 살고 돈을 적게 벌면 가난뱅이로 살겠네'처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린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습니다.

그의 애칭은 <쎈돌>입니다. 그의 애칭은 그 어감부터가 직선적인 행보를 예견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는 자기 확신이 강한 것 같습니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바를 곧이곧대로 따르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는 자기감정에 충실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는 가치보다는 취향을 중시하는 것 같습니다. 그는 개성이 강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는 쇼맨십이 뛰어난 것 같습니다.

그는 휘어지기보다는 부러지는 강성 기류를 지향하는 것 같습니다. 타협이라는 말은 그의, 사전의 맨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가 결정이 빠른지 느린지는 알 수 없으나 그는 한 번 결정하고 나면 중간 점검을 하고 조심스럽게 나아가기보다는 끝이 보일 때까지 거침없이 질주하는 폭주기관차형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호 속에서 비교적 돌출적인 신호를 타전하는 무선가라고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그의 기질을 짚어 보고나서, 그의 '직선적인'이 어쩌면 그 자신을 열처리하고 담금질하기 위한 '마인드 컨트롤'과 비슷한 것이 아닐까 짐작하게 되었습니다.

기질이라는 태생적 한계와 승부세계의 냉혹함과 승부 감각의 일관성이라는 면을 고려하면, '직선적인'은 외려 그의 존재를 고수하는 그만의 독특한 모스부호라고 인정할 수도 있지 않을는지요. 그는 보이는 그대로 보고 느끼는 그대로 말하고 원하는 그대로 행동하는 '앙팡 테리블'이 아닐는지요. 그의 '직선적인'은 자신을 승부세계에서 지탱케 하는 그만의 지팡이가 될 수도 있지 않을는지요.

저는 그에게 '싸가지가 없다'고 질책하기 전에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라는 배려를 먼저 보낸다면, 그의 '직선적인'을 충분히 헤아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그처럼 파이팅 넘치는 기질의 승부사를 따로 알고 있지 못하며, 그가 단지 교만할 뿐이라면 바둑의 신이 그에게 그와 같은 천부적인 재능을 주었을 리 없을 거라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인방> 9연패에 빛나는 <평명류> 다카가와 가쿠의 좌우명은 '유수부쟁선(流水不爭先)'이라고 합니다. '흐르는 물은 앞을 다투지 않는다'라고 번역할 수 있는 이 말은, 오청원의 "바둑은 조화다."라는 말과 잘 어울리는 듯이 보입니다.

그러나 그 흐르는 물 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지 들어가 보지 않고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 흐르는 물 속에서는 혹 물결이 격렬하게 요동치고 있는 건 아닐는지요. 앞을 다투지 않고 흐르기만 해서는 결코 한 판의 바둑을 이겨낼 수 없을 테니까요. 백조가 부드럽게 유영하기 위하여 물 속에서 정신 못 차리게 물갈퀴를 흔들어 대는 것처럼. 백조가 부드럽게 유영하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다면 이창호스타일이 될 것이고, 물 속에서 정신 못 차리게 물갈퀴를 흔들어 대는 모습을 수중촬영 한다면 이세돌스타일이 되겠지요.

단 한 번 말할 기회에서 "내가 최고인 것 같다."고 말하는 것은 이세돌의 승부호흡입니다. 100번 말 바꿀 기회를 준다고 해도 "누가 최고인지 알지만 말할 수 없다. 나만 알고 있겠다."고 말하는 것은 이창호의 승부호흡입니다. 저는 이 승부호흡의 차이를 '이세돌의 불운'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이창호의 행운'이라고 생각하며, 공명정대하게 고유의 스타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경륜이 쌓이면 그의 '직선적인'도 달라질는지 모릅니다. 그는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 났으니 쾌도만이 날카로운 게 아니고 둔도도 그 이상 날카로울 수 있다는 '내공의 의미'를 깨닫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저는 그의 '직선적인'이 달라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불만이 전혀 없으며, 그저 그의 아드레날린이 펑펑 솟구치게 하는 파이팅 넘치는 승부기질만은 절대 변치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가 오랜 동안 바둑의 추를 잡고 정신 못 차리게 흔들어 댈 수 있기만을 바라고 있을 뿐입니다.

2. 통찰洞察insight

問余何事棲碧山 笑而不答心自閑 桃花流水杳然去 別有天地非人間

문여하사서벽산 소이부답심자한 도화유수묘연거 별유천지비인간

- 李白이백 <山中問答산중문답> 전문

프로기사들의 대국을 보면서 아무리 '대가리'를 굴려도 답이 나오지 않는 것이 '그들은 바둑판을 어떻게 그처럼 넓고 깊게 쓸 수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대세의 주도권을 뺏기지 말아야 한다'라는 말이 바둑판 전체의, 헤게모니의 중요성을 뜻한다는 것은 알지만, 정석이나 부분적인 접전 이후 대세의 주도권에 해당하는 경계를 어떻게 찾아내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이쪽에서의 접전과 저 쪽에서의 접전 그리고 그 쪽에서의 접전이 연계될 때, 그 연계 속에서 '한 보따리' 챙기는 루트를 어떻게 읽어 내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전투가 벌어졌을 때 언제 돌격하고 언제 후퇴해야 하는 것인지, 얼마나 은밀한 곳에 부비트랩을 설치하는 것인지, 그 부비트랩의 존재를 어떻게 캐치하는 것인지 그저 모든 것이 궁금하기만 할 따름입니다.

초장에 벌어진 난타전이 전판으로 확대되어 '포석도 없이 대마가 죽어 끝난다'면 그 박진감 넘치는 코스를 손에 땀 쥐며 따라갈 수도 있다 싶지만, 성동격서라든가 도남의재북이라든가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이겼다' 식의 전략 전술이 나오면 이해하기가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닙니다.

하긴 그런 노하우는 가르칠 수도 배울 수도 없는 것이겠지요. 만약 배울 수 있다면 저도 '쌍팔년도'에 고수가 되었겠지요.

저는 숙명론자는 아닙니다. 하지만 세상의 조리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숙명적인 부분이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다시 말자하면, 저는 이성과 논리를 중시하는 편이지만 무언가를 인식함에 있어서 이성과 논리를 전혀 신뢰할 수 없는 경우를 많이 보았습니다.

바둑에서 예를 찾자면, 제가 아무리 이성과 논리의 발톱을 세우고 지랄 발광을 한다손 치더라도, '절체절명의 위기에 모래알보다 작은 틈바구니로 구원의 동아줄을 끌어 올리는' 천재들의 초식을 미리 인지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경험론자도 아니지만 차라리 이성과 논리보다는 경험이 그걸 가능케 한다면 조금은 믿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런 부분은 경험으로 되는 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본질적으로 그런 부분은 천부적으로 타고나는 숙명적인 어떤 것이 아닐는지요.

'바둑판을 얼마나 넓고 깊게 쓰는가?' , '바둑판 전체를 꿰뚫어 보는 힘이 얼마나 강한가?'는 바로 '통찰'의 문제입니다.

'좌견천리(坐見千里) 명견만리(明見萬里)'라 풀어 쓸 수 있는 통찰을, 심리학에서는 '자기를 둘러싼 내적 외적 전체 구조를 새로운 시점에서 파악하는 일'로 정의하고 있으며, 그 결과로 '자아'가 강화된다고 규정짓고 있습니다. 제 귀에는 귀신 씨 나락 까먹는 소리로 들리기에, 저는 '훤히 내다본다'는 뜻으로, '빠꼼이'라는 은어로 쉽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저는 프로기사 중에서, 바둑판 전체를 꿰뚫어 보는 힘이 강하기로는 이세돌이 발군이 아닐까 짐작하고 있습니다. '약관의 나이에 무슨 통찰력이냐?' 할는지도 모를 일이고, 그의 기재가 고뇌형이 아닌 감각형이라는 점에서 납득시키기도 쉽지 않아 보입니다.

그러나 그가 바둑판의 이 쪽 저 쪽 그리고 그 쪽을 연계시켜 고리대금업자처럼 폭리를 취하는 대국과 바둑판의 1선에 이르기까지의 수읽기를 완벽하게 끝내 놓고 대마사냥에 나서는 대국, 하우스 부족으로 코피 나기 일보직전의 절박한 상황에서도 대마공격의 급소를 정확히 포착하고 '후까시'를 넣는 대국 등을 검토하고 나면 충분히 납득이 가리라 생각합니다. 굳이 이창호가 약관의 나이에 부동심의 경지에 도달했다는 예를 들먹거리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제가 전하고자 하는 것은 기보의 면밀한 검토가 아니고 대국에 얽힌 스토리입니다(기보를 면밀히 검토할 만한 깜냥이 못됩니다. 늘 이 점이 안타깝습니다).

첫 번째는 단체전(KAT시스템배)에서 홍장식과 벌인 대국이고, 두 번째는 <후지쓰배>에서 하네 나오키와 벌인 대국이고, 세 번째는 <왕위전>에서 이창호와 벌인 대국입니다. 첫 번째와 두 번째는 그가 이겼고 세 번째는 그가 졌습니다.

첫 번째. 우상귀에서 흑(이세돌)의 기착점인 소목에 백(홍장식)이 한 칸 높이 걸자 흑이 두 칸 높이 협공하는 <요도정석>이 나타났습니다. 이어 백이 눈목자로 씌우고 2선으로 뻗어 실리를 '땡기는' 경로를 밟았습니다. 여차저차 하다가 백이 봉쇄 등의 기분 나쁜 맛을 없애기 위하여, 백을 끊어 놓은 흑 한 점에 단수를 치고 흑이 잇자 중앙으로 한 칸 뛰어 나가는 코스로 일단락되었습니다. 그리고 좌상귀에서 흑이 권리행사(그 전에 축머리에 얽힌 공방이 벌어졌던 것 같습니다)처럼 보디 체크를 시작하였는데, 느닷없이 눈을 의심케 하는 대형사고가 터지더라는 스토리입니다.

힘이 잔뜩 들어간 흑이 한 건하리라 예상되는 시점이었는데, 한 건하기는커녕 외려 흑의 요석이 축으로 잡히고 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더욱 황당한 것은 축으로 잡힌 그 요석을 이세돌이 세 번 네 번 꾸불꾸불 기어 나갔다는 사실입니다. 저도 축이 되느냐 안 되느냐를 확인하는 요령 하나 만큼은 '빠꼼이'인데, 몇 번을 확인해 봐도 분명히 축이었습니다.

"축을 착각했나?" 어안이 벙벙했습니다. 한데 축을 서너 번 나간 흑이 손을 돌려 우하귀의 백이 중앙으로 한 칸 뛰어 놓은 돌 사이에 흑 돌 하나를 조용히 끼우고 나자 상황이 180도 달라졌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끝났습니다! 백의 응수를 확인한 흑은 계속해서 축을 기어 나갔고, 마침내 우하 귀의 백이 몰살당하는 '뽕밭이 변하여 푸른 바다가 되는' 바꿔치기 아닌 바꿔치기로 막을 내렸습니다.

흑의 대승이었습니다. 어느 시점에선가 그 코스를 정밀하게 참고도로 엮어주던 해설자 양재호(대단합니다!)도 이세돌의 심모원려에 혀를 차더군요. 결과만 놓고 보면 쉽고 이해 못할 바도 아니지만, 바둑판의 이쪽과 저 쪽을 그렇듯 괴상망측하게 연계시켜, '축 모르고 바둑둬도 말리지 말란 말이야 축 안다고 밤새지지 말란 말이야' 초식으로 통찰의 정수를 보여주며 승부를 낸 기보가 언제 또 나왔었던가 기억이 가물가물 합니다.

두 번째. 중반 이후 갈 길이 멀다고 느낄 즈음에 이세돌이 갑자기 살쾡이로 돌변하더니, 하네 나오키의 대마를 1선으로, 낮은 포복으로 박박 기는 수모를 감수하면서까지 노골적으로 공격하여 꿀꺽 삼켜 버리고 작별을 고하더라는 스토리입니다.

바둑을 두다가 대마가 횡사하는 것은 흔한 일이지만, 여기서는 그가 1선을 기어 넘어가 자기 돌을 살리고 상대 돌의 숨통을 끊어 놓았다는 사실이 포인트입니다.

결과만 놓고 보면 그는 1선을 읽고 하네 나오키는 1선을 못 읽었다는 수읽기의 차이만이 남지만, 저는 그의 '1선에 대한 인식력'이 하네 나오키 보다 훨씬 뛰어난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가졌습니다. 19로에서 1로는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지만, 역설적으로 통찰이라는 면에서는 가장 보기 어려운 사각지대가 아니겠습니까?

'너네들 내 별명이 왜 쎈돌인 줄 알아? 내가 손에 짱돌을 쥐면 너넨 죽어!' 초식이라고 이름 붙이고 싶은 그의 완강함은 통찰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시전 되기 어려운 무공임에 틀림없어 보입니다. 만약 아니라면 제 손에 장을 지지지요.

세 번째. 이창호가 압도적인 실리의 우위를 점하고 있을 때, 그가 최후의 카드로 이창호의 대마사냥에 나서지만 끝내 헛심만 쓰다가 코피 나고 말더라는 간략한 스토리입니다.

그런데 이 대국에서 그는 괴기스러운 착상을 보여줍니다. 대마의 한 칸 뛴 옆구리에 찰거머리가 달라붙듯 찰싹 돌을 갖다 붙여서 공격하는 '철푸덕!' 초식이 그것입니다. 이른바 맥점이지요. 아닙니다! 저는 맥점이라는 말을 '타개의 모티브' 정도로 이해하고 있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의 '철푸덕!' 초식과 맥점은 다른 것 같습니다.

'철푸덕!' 초식은 그것이 공격의 급소로 두어진다는 점에서 맥점 보다는 디테일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는 바둑의 유불리를 떠나 '철푸덕!' 초식을 애용하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그가 바둑을 유장하게 이끌어 가는 정산형이 아니라 시시각각 몸싸움을 유발시켜 호시탐탐 '쇼부'를 노리는 전투형이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어떻든 '철푸덕!' 초식은 돌의 명자리를 예리하게 포착하는 통찰의 한 예로서 조금도 손색이 없는 것 같습니다.

바둑판의 활용과 수에 대한 인식력을 통찰이라는 말과 연결시켜 보았지만, 바둑에 통찰이라는 말을 적용시키는 건 기연가미연가 무리성이 있어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인간이 도전하고 응전하는 모든 분야는 통찰의 대상에서 제외될 수 없다는 점에서 큰 무리는 아닐 것 같습니다. 부분과 전체의 조화라는 면에서 무르익었다고 보기는 어려운 점도 있는 것 같습니다만, 저는 이세돌이 그 누구보다도 바둑판을 넓고 깊게 쓰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런 부분은 이성과 논리만으로는 커버할 수 없고, 경험으로도 채울 수 없는 숙명적으로 타고나는 부분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통찰은 완성의 개념이 아닙니다. 그것은 시행착오를 통하여 더욱 넓어지고 더욱 깊어지는 현재진행형일 것입니다. 누구나 오늘보다는 내일이 0.00001mm라도 더 '빠꼼해'질 수 있기를 희망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왜 푸른 산에 사느냐고 묻기에

그냥 웃었지

복사꽃잎 아득히 물 따라 흐르는 곳

별천지라네 인간 세상 아니라네

- 이백 <산에서 묻고 답하다> 전문(번역/흰고독)

<산에서 묻고 답하다>는 이백이 어째서 '시선'으로 불리는가를 짐작케 하는 수작으로 보입니다. 산에 살면서 스스로 '왜 산에 사는가?'라고 묻는 것은 지난 삶의 회한을 반추하고 있다는 암시일 것입니다. 그 회한은 그가 못 이룬 꿈일 수도 있고, 그가 실패한 사랑일 수도 있고, 거시적으로는 인간에게 주어지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는 대답 대신 그냥 웃습니다. 극도의 절제이지요. 그러나 저 웃음 속에는 대답 이상의 무엇이 들어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그것을 '내부의 울림'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말이 필요없는 영혼의 바이브레이션.

내부의 울림을 따라 문을 열고 들어서니 복숭아꽃잎 계곡물에 떠 흘러가는 산 속이더라는 대목은 허망하기까지 합니다. 인간 세상의 모든 것이 부질없다는 뜻일까요? 아닐 겁니다. 외려 저는 인간 세상에 대한 그의 애정편력을 역설하고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는 시인이며 학자이며 정치가이며 카사노바이며 알코올중독자였고, 평생을 무언가 찾고자 떠돈 '걸뱅이'였습니다. 그가 발견한 '인간 세상 아닌 별천지'가 단순하게 무릉도원으로 다가오지 않는 것은 인간 세상에 대한 그의, 애증의 밀도가 너무도 진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발견한 이상향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저도 그냥 웃고 맙니다. 왜냐고요? 쥐뿔도 모르니까. 저는 통찰의 절정은 <산에서 묻고 답하다>가 보여주는 웃음 같은 것이 아닐까 상상해 보았습니다.

뒷북을 치는 이야기가 되겠습니다만, 저는 한 소설가가 '바둑에 대하여' 쓴 칼럼이 <타이젬>에서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과정을 지켜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칼럼은 이세돌이 세계대회(7LG배세계기왕전)에서 이창호를 꺾고 우승한 것이 세간의 화제가 되었을 때 일간지 주말 부록에 실렸다고 합니다.

그 일간지를 구독하지 않는 저는 친구가 귀띔을 해 줘 이메일로 받아 읽었습니다. 저는 그 칼럼을 읽고 적이 놀랐습니다. '잘 나가는' 소설가가 바둑에 대하여 칼럼을 썼다는 것이 무척 신기하게 느껴졌습니다.

저는 그가 어떤 기업체에서 다년간 근무하던 중 문학에의 끓어오르는 피를 주체하지 못하고 퇴사한 후에 '폭탄이 떨어진 것 같은' 장편소설로 데뷔하여 장안의 지가를 높였던 소설가라고 알고 있습니다. 저도 그의 소설을 몇 편 읽었고 그의 문학적 역량에 감탄하고 있습니다. 그는 비평계에서도 예리한 필봉을 휘두르며 독자적인 노선을 확보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영어공용화' 논쟁에 불을 붙인 것도 혹 그가 아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는 바둑에도 조예가 깊은 것 같았습니다.

신중을 기하기 위하여 그의 칼럼을 다시 확인해 보았습니다. 그는 '바둑을 잘 두는 데는 원숙한 인품이나 세상에 대한 너른 지식이 거의 필요하지 않'으며, '계산능력, 기억력 그리고 체력이 결정적 중요성을 가진다'고 쓰고 있습니다.

이창호가 '바둑을 바라보는 패러다임을 바꾼 오청원이나 다케미야 마사키의 그것처럼 혁신적'으로 바둑계에 공헌하지는 못했지만, 그의 바둑은 '군자 바둑의 전범'으로서 '그가 앞으로도 오랫동안 세계적 고수들 가운데 하나로 활약하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고, 이세돌의 바둑이 '실은 방어적'이라고 쓰고 있습니다.

그는 '바둑을 모르고도 아무런 불편이나 부족을 느끼지 않고 평생을 보내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바둑이 '따지고 보면 사소한 놀이'이지만,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기사들은 진지한 장인 정신을 보여야한다'고 쓰고 있습니다. 이어 '"내가 하는 모든 것들은 얼마나 하찮은가. 그러나 내가 그것들을 해야 한다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가."라는 볼테르의 말이 그리 적절하게 느껴지고, "목숨을 걸고 둔다."는 조치훈의 말이 가슴깊이 들어오는 것은 바로 그런 사정 때문이다'라고 쓰고 있습니다.

그는 '바둑의 깊은 즐거움을 한번 맛본 사람들에겐 바둑은 결코 사소한 것일 수 없고, 바둑을 업으로 삼은 기사들의 자세는 어떤 상황에서도 흐트러져선 안 된다. 기사들은, 특히 고수들은, 명국들을 통해 우리에게 즐거움만이 아니라 삶에 대해 성찰할 기회도 주어야 한다'고 격려를 아끼지 않으며 칼럼을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그의 논조는 물이 흐르듯 부드러우며 무리도 없어 보입니다. <육도삼략>을 모르거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삼단논법을 몰라도 축으로 잡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고, 땅의 끝까지 가 보지 않았어도 장문을 치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계산능력과 기억력이 비상하고 천하장사인 승부사가 선뜻 떠오르지는 않지만, '계산능력, 기억력 그리고 체력이' 딸리면 바둑을 잘 두기는커녕 숟가락을 드는 것조차 힘겨울 겁니다.

저는 문학으로 경지에 오른 사람이나 바둑으로 경지에 오른 사람이나 알 건 다 안다고 믿고 있고, 문학에 혼을 담을 수 있다면 바둑에도 혼을 담을 수 있다고 믿고 있지만, 그건 제가 아이큐가 떨어지기 때문에 그럴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저는 이창호가 혁신 차원이 아니라 바둑의 개념을 통째로 흔들어 놓은 혁명 차원의 천재라고 믿고 있지만, 그건 제가 과대망상증 환자이기 때문에 그럴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저는 이세돌이 삼척동자도 다 아는 공격바둑이라고 쓸 예정이지만, 그건 제가 정석도 제대로 모르는 '후루쿠'이기 때문에 그럴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저는 그의 논조에서 목구멍에 걸린 가시처럼 불편한 구석이 있다고 느꼈습니다. 저는 곧 그 이유를 알았습니다.

공자도 바둑을 잡기라고 치부한 바 있지만, '유희'의 측면을 강조하였고 여운을 남겼습니다. 공자는 <논어>의 양화편에서 "사람이 왼종일 먹어조지기만 하고 머리가 텅비어 있으면 망가지기 쉽고 보기에도 딱하다. '아다리'라도 쳐라!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바둑을 두는 것이 낫다."(子曰飽食終日 無所用心 難矣哉 不有博奕者乎 爲之猶賢乎已 자왈포식종일 무소용심 난의재 불유박혁자호 위지유현호이)고 말했으니까요. 그러나 그는 '바둑을 모르고도 불편이나 부족을 느끼지 않고 평생을 보내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바둑이 '따지고 보면 사소한 놀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필요성의 시각에서 '몰라도 밥 먹고 사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기 때문에' 바둑을 사소한 놀이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논리는 자승자박이 될 것 같습니다. 이 필요성이라는 괴물은 아무 곳에나 갖다 붙이면 척척 달라붙는 '슈퍼울트라캡숑진드기'라고 할 수 있으니까요.

이를테면 문학은, '모르고도 불편이나 부족을 느끼지 않고 평생을 보내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따지고 보면 사소한 놀이'라는 그의 정의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일까요? 요한 볼프강 폰 괴테를 모르는 사람 중에 불편이나 부족을 느끼지 않고 평생을 보내는 사람은 많을까요? 적을까요? 만약 많다면 문학도 사소한 놀이가 되는 걸까요? 아니면 요한 볼프강 폰 괴테 혼자만이 십자가를 져야 하는 것일까요?

저는 인간과 함께 사는 만물 중에 필요성만 따진다면 밥과 침대 외에는 전부 쓰레기통에 처박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배 채우고 잠을 잘 수 있다면 당장 '뒈지는' 일은 없을 테니까요. 그러나 인간의 삶은 필요하지 않은 쪽에 더 할애되어 있습니다. 저는 그 이유가 인간은 그가 원하는 것을 통하여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자 하는 근본적인 인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원하느냐 원하지 않느냐'가 포인트입니다. 인간이 하는 모든 일은 원하느냐 원하지 않느냐에 따라 사소한 놀이도 될 수 있지만, 목숨을 걸고 나서야 하는 필생의 과업도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결정적인 것은, 바둑을 사소한 놀이라고 보고 있더라도 승부사에게 '바둑은 사소한 놀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모욕이라는 사실입니다. 차라리 칼을 들이대는 게 낫지요.

저는 꼭 천체를 연구하는 사람 눈에 비친 별자리만이 우주이고 가치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하는 일 중에 사소한 놀이를 비켜 갈 수 있는 항목으로 무엇이 있는지 저 같은 까막눈이 알 리 없지만, 저는 자치기를 하는 아이에게는 새끼자와 어미자가 우주이고, 문학을 하는 사람에게는 펜과 원고지가 우주이고, 밭농사를 짓는 농부에게는 밭과 호미가 우주라는 '삶의 리얼리티'를 신봉하고 있습니다.

저는 '인간은 신으로부터 자기 몫의 일을 하도록 소명을 받는다'라는 말로 압축되는 장 칼뱅의 '직업소명설', 사람이 하는 일에, 그것이 사회성과 도덕성을 획득하는 한, 가치의 척도 따위는 결코 없다는 것을 진지하게 가르치고 있다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논어>'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고 부모는 부모다워야 하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君君臣臣父父子子 군군신신부부자자)'라는 말은 <정명론>이라고 하여 공자의 심오한 정치사상을 담고 있다지만, 저는 이 역시 사람이 자기 일에 신명을 다하는 한 가치의 척도로 그 우열을 잴 수는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다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내가 하는 모든 것들은 얼마나 하찮은가. 그러나 내가 그것들을 해야 한다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가."라는 볼테르의 말에서 제가 확인한 것은 장인 정신이 아니라 삶의 리얼리티였습니다.

조치훈의 "목숨을 걸고 둔다."라는 말이 장인으로서의 자세에 대하여 피력한 것은 분명해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바둑의 격렬한 속성과 지느니 죽는다는 승부사의 강한 승부혼이 깃들어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장인 정신이 투철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사소한 놀이에 목숨을 걸 리야 없지 않겠습니까?

'바둑의 깊은 즐거움을 한번 맛본 사람들에겐 바둑은 결코 사소한 것일 수 없'다는 논리는 반전처럼 튀어나와 의아스러웠고, 제 실력으로는 독해조차 안 돼 포기했습니다. 어떻든, 본인은 바둑을 사소한 놀이로 여기고 있으면서도, 타인이 직업으로 삼고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어떤 상황에서도 흐트러지지 말 것이며 '즐거움만이 아니라 삶에 대해 성찰할' 모범답안까지 제시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제안 치고는 좀 가혹한 제안이 되지 않겠습니까?

저는 바둑을 사소한 놀이로 보는 시각에서 세상의 보다 큰 가치를 눈치 채고 있는 인텔리겐치아의 여유를 느꼈습니다. 그러나 '배운 사람이나 못 배운 사람이나 요플레를 먹을 때는 뚜껑부터 핥아먹는다'는 삶의 리얼리티를 수용하지 못한다면, 그 가치가 얼마나 큰 가치이든 자신만의 가치로 끝나고 말 위험이 있을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저에게도 금과옥조로 삼는 볼테르의 명구가 있습니다. "마니아들이 지나치게 열성을 부리는 것도 수치이지만, 지혜 있는 자들이 열의를 보이지 않는 것이야말로 큰 수치이다."라는 말이 그것입니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고뇌>가 출간되고 나서 노란 옷이 유행했고 권총 자살자가 속출했다고 합니다. 베르테르가 노란 옷을 즐겨 입었고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했기 때문이겠죠. 베르테르의 고뇌를 이해하지 못하는 한 그 증후군은 '유부녀와 불륜에 빠져 똥오줌을 못 가린 교주를 추종하는 광신도들'이 될 수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누가 뭐래도 프로기사에게는 바둑판과 바둑알이 우주입니다. 불세출의 천재들이 그렇듯이, 이세돌 역시 또래의 코흘리개들이 코 흘리는 것만으로는 부족하여 '하드'를 먹으며 침마저 흘릴 때, 이미 자신의 우주를 발견하였습니다. 그건 그의 운명입니다. 저는 그가 그의 운명과 더욱 적극적으로 '맞짱떠서' 바둑으로도 얼마든지 세상읽기가 가능하다는 진리를 입증해 주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3. 풍운風雲

바람도 죽는다.

죽어서는 오래 삭지 않는 뼈를 남긴다.

단청이 다 날아간 내소사 대웅전

앙상히 결만 남은 목재를 보라.

바람의 뼈가 허공 속에

거대한 적멸의 집 짓고 서 있다.

- 김영석 <바람의 뼈> 전문

제가 이세돌의 수식어로 '풍운'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그의 바둑 스타일 못지않게 그가 풍기는 분위기에서도 선명한 어떤 것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승부하는 스타일만이 덕목이 되는 것이 아니라 승부사가 풍기는 분위기도 훌륭한 덕목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바람과 구름을 뜻하는 풍운은 그 어감은 비록 무협지 풍이지만, '풍운을 타고나다'에서처럼 '영웅호걸들이 세상에 두각을 나타내는 좋은 기운'이라는 뜻과 '풍운이 감돌다'에서처럼 '세상에 큰 변이 일어날 듯한 어지러운 형세나 기운'이라는 뜻으로 쓰이는 결코 가볍지만은 않은 단어입니다. 저는 그의, 바둑의 분위기는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질 것만 같은 조짐'으로 묘사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관운장은 마량하고 바둑을 두고

화타는 관운장의 팔에 스민

독을 뽑는다

관운장은 돌을 놓고 한잔하고

화타는 살을 헤쳐내고

뼈를 본다 푸르딩딩한 뼈, 독이 번진 뼈

화타는 독을 제거하고

관운장은 돌을 놓고 한잔한다

아 이젠 팔이 가볍구나

- 이탄 <구름> 일부

그가 다른 기사들과 확연히 구분되는 것은 그의 바둑이 '호전적'이라는 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호전적이라는 점에 있어서는 <전신> 조훈현을 빼놓을 수 없지만, 이세돌이 더 사납고 더 격렬하다는 점에서 차이가 나는 것 같습니다. 그는 한 판의 바둑을 그려 나감에 있어서 '호전성'이라는 칼라의 물감을 가장 잡기 쉬운 위치에 두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는 바둑의 본질이 쌈질에 있다고 믿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그가 길고 오래가는 정산바둑에도 일가견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의 진면목은,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기묘한 수법으로 사지를 탈출한다든지, 도저히 공격 대상이 아니라고 여겨질 때 상상을 초월하는 수법으로 대마의 숨통을 끊어 놓는다든지,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가 절실한 시점에서도 과감하게 맞받아친다든지, 순류보다는 역류할 때 잘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의 바둑은 전운이 감도는 전쟁터를 방불케 합니다.

바람도 정말 죽는지, 그렇다면 지금 제 앞을 지나가는 바람이 어느 가문의 몇 대 손인지 알 수는 없지만, 그의 바둑은 전쟁이 지나간 벌판 위에서, '허공 속에' '거대한' 열반의 '''짓고 서 있''바람의 뼈'를 연상시키며(내소사 대웅전의 달랑 남은 뼈대를, 허공 속에 지은 열반의 집으로 연결시킨 시인의 상상력이 놀랍기만 합니다), 관운장이 전장에서 입은 팔의 상처를 치료하고 팔베게 삼은 구름을 연상시킵니다.

그의 호전성은 '공격 지향'으로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공격 바둑의 대명사로는 예내위와 유창혁을 들 수 있지만, 그의 공격은 예내위의 '막가파식'보다는 세련되고, 유창혁의 유연함보다는 '날이 섰다'는 점에서 차이가 나는 것 같습니다. 날이 섰다라는 뜻은, 찔리면 피가 날 것 같은 '날카로움'인지, 베이면 피가 날 것 같은 '예리함'인지 구별하기 어렵지만, 굳이 구별할 필요가 없다면 둘 다 써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는 본능적인 킬러형인 것 같습니다. 그에게 공격의 의사가 없다 하더라도 판이 돌아가는 낌새가 본능을 일깨운다면, 그는 언제라도 발톱을 일으켜 세울 만반의 준비를 갖춘 한 마리의 야수로 보입니다. 공격이냐 수성이냐의 갈림길에서 공격을 선호하게 되는 것은 인지상정일 것입니다. 그러나 수성에 비하여 공격은 몇 배의 에너지를 필요로 합니다. 대마불사의 교훈처럼, 공격은 언제나 헛심만 쓰다 알거지가 되고 말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알거지가 되고 말 위험성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는 수읽기에서 독보적인 경지를 구축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일류끼리의, 수읽기의 깊이에는 차이가 거의 없다는 게 정설이지만, 빠르고 정확하다는 점에서 그는 일군인 것 같습니다. 실제로 저는 이창호와 유창혁이 결정적인 수읽기에서 밀려 그에게 코피 나는 대국을 TV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수읽기가 빠르고 정확하다는 것은 그의 공격적인 성향에 동기를 부여하는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는 '실전적'입니다. '실전적'이라는 것은 한국바둑의 고유 영역으로서, <잡초류> 서봉수에 의하여 그 위력이 입증된 바 있고, 지금은 모든 승부사가 너나없이 추구하여 사조화 되다시피 하였습니다. '모양이고 뭐고 없이 원하는 것만 얻어내면 되는 주의'라고나 할까요. 그런데, 그의 '실전적'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실전적'과는 좀 다른 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는 기본적으로 실리를 선호하는 것 같습니다. 한데 그의 실리취향은 상대에게 세력을 허용하고 집을 가져오는 경우나, '너는 앞다리 먹고 나는 뒷다리 먹고'의 경우처럼 '주거니 받거니'의 형태에만 머물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는 자기 돌의 퇴로를 스스로 차단하면서까지 실리를 '잇빠이 땡겨' 놓고, '너만 굶어 뒈져라'하는 극단적인 형태도 불사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예를 들면, 상대의 영향권에 뛰어들었을 때, 2선은 대개 안전장치가 되기 마련입니다. 넘겨주면 안 되겠느냐고 2선의 어딘가에 놓는 한 수가 선수로 들어 두 집 내고 사는데 보험으로 작용한다는 뜻입니다. 물론 차단당하고 나면 미리 확보해 놓은 다른 쪽의 실리는 '허벌창' 나겠지만, 뛰어든 돌의 안전이 우선이라면 감수해야 할 일이고, 그리하여 다시 균형이 맞춰지게 되는 것이 보통일 것입니다. 2선에 한 수를 두지 않고 살 수 있다 하더라도 그 보험은 자체로 남겨놓고 싶어 하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봐야겠지요.

그러나 그는 그런 상황에서 외려 반대쪽의 2선을 가차 없이 젖혀 잇는 '실전적'을 보여 준 적이 있습니다. 자신의 보험을 스스로 없애며 실리로는 따라올 수 없게 멀리 도망가 놓고 돌의 사활에 승부를 거는 '배 째라' 작전인 것입니다. 차단당하여 다른 쪽 포장마차가 다 찢어져도 어차피 하우스 부족으로 코피 난다거나, 반대쪽에서 젖혀 이어도 뛰어든 돌의 안전이 확실하다면 또 모를 일이지만, 어느 쪽도 비관적이거나 낙관적이지 않은 상황에서 그가 보여준 필살기는 '실전적'이라고 생각하기에는 지나친 '똥배짱'으로 보였습니다.

그처럼 분위기를 험악하게 만들어 놓고 떼굴떼굴 구르기 시작하는 것을 본 해설자가 경악을 금치 못하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저는 그의 '실전적'에는 뭔가 그만의 기질이 들어 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는 공격의 급소를 포착하는 기술이 비상한 것 같습니다. 그는 한 칸 뛴 돌의 옆구리라든가, 날일자의 끊기는 자리라든가, 완벽하게 연결되지 않은 불각의 급소에 '철푸덕!' 돌을 갖다 붙여 공략하곤 합니다. 일류들의 대국에서 갖다 붙이는 수를 구경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그의 '철푸덕!' 초식은 '포착하기가 쉽지 않다'는 평가를 받는 것 같습니다.

그는 공격의 혈을 짚는 재능을 타고 난 것처럼 보입니다. 그의 재능은 그의 바둑을 공격적으로 만드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그가 전설 속에서만 나오는 '쌍립도 끊어 먹는' 비기를 조만간 재현해 내리라는 믿음을 버리지 않고 있습니다.

그는 용수철 같은 반탄력의 소유자입니다. 그는 불리한 상황에서조차도 물러나지 않고 되치기를 시도합니다. 나아갈 자리와 물러날 자리를 아는 것은 병법의 시작이자 끝인데, 그는 병법이라는 말은 들어본 적도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한 번 물러나면 두 번 물러나야 되고, 두 번 물러나면 세 번 물러나야 되고, 그런 식으로 자꾸 후진기어를 넣다 보면 승리의 길이 어디론가 사라져 다시는 나타나지 않게 된다는 승부의 속성을 그가 깨닫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는 불리할수록 더욱 춤을 추고 힘을 내서 맞받아칩니다. 그는 한 판의 바둑에서 꼭 한 번은 판을 도떼기시장으로 만들고 넘어가야 직성이 풀리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의 공격능력은 누구나 납득할 수 있는 부분이지만, 저는 그의 본령은 타개에서도 잘 드러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타개는 궁지에 몰린 상황을 벗어난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수세적이라고 보아야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수세적이 아닌 공격적인 타개를 지향하는 것 같습니다. 그의 타개 솜씨는 '타개의 사카다'라 불렸던 전성기의 <면도날> 사카다 에이오를 연상시키지만, 보다 '공격적인 타개'라는 점에서 다른 것 같습니다.

그는 타개의 방향을 설정하는 단계에서부터 독특한 감각을 보여줍니다. 그는 백병전이 벌어지기 전에 응수타진으로 상대의 의중을 떠보는 수법에 능한 것 같습니다.

그 응수타진은 '나는 이쪽만 먹을 테니 나머지 집은 너 다 먹어라'처럼 바꿔치기를 제안하는 것이거나, '나는 반 토막만 살아갈 테니 나머지 반 토막은 너 먹어라'처럼 타협을 제안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상대의 반응여부에 따라 갈 길을 정하자는 뜻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의 응수타진은 상대로 하여금 결정을 내리도록 소스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타개에 도움이 되는 원군을 배치하고자 하는 '도둑놈 심보'가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상대는 그의 제안을 거부합니다.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면 코피 날 게 뻔한 모양입니다. 도리 없이 '죽느냐 사느냐'의 필사적인 접전이 벌어집니다. 그 무렵 그의 응수타진의 진가가 드러납니다. 그가 미리 응수타진 해 놓은 돌들은 '꼭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요석으로 둔갑하여 토출용궁에 결정적으로 기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그런 케이스를 몇 번 본 적이 있습니다. 그 뒤로는 저도 대마가 몰릴 것 같으면 미리 아무 곳이나 쿡쿡 찔러놓는 나쁜 버릇을 갖게 되었습니다. 왜 나쁜 버릇이라고 이야기하느냐고요? 저의 경우는 미리 찔러놓은 돌까지 다 죽였으니까요.

타개를 할 때 열린 공간이 보이면 뛰어 나가는 것이 일반적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좁은 공간에서의 몸싸움에 더 주력하는 것 같습니다. 그는 시원하게 뛰어 나가면 무난해 보이는 상황에서도, 고개가 뒤로 젖혀지지 않기라도 하는 것처럼 아래만 쳐다보고 몸싸움에 집중합니다.

상대가 도망가라고 길을 열어주어도 그는 막무가내입니다. 좁디좁은 곳에서 '이단 젖히고' '뒤로 돌리고' '패로 버티고' 온갖 수를 동원하여 자체 해결을 시도하는 그의 운신술은 놀랍습니다. 주로 공격의 맥점으로 사용되던 '철푸덕!' 초식이 이번에는 타개의 맥점으로 사용됩니다.

저는 그것을 그가 돌의 탄력을 읽는데 자신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공격을 잘 하는 사람이 타개도 잘 한다'라는 말은 공격을 뒤집으면 타개가 된다는 뜻 일 것입니다. 그는 타고난 공격능력을 통하여, 때로는 뛰어 나가는 것이 더 빨리 죽는 코스일 수도 있다는 사실과 더불어, 뛰어 나가 완만하게 쫓기는 것보다는 좁은 곳에서 난타전을 벌이는 쪽이 되치기에는 훨씬 유리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음이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그는 공격에 대한 확신이 뚜렷한 대표적인 승부사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는 수가 보이는 자리에서는 주저 없이 수를 결행하며, 불리한 상황에 처하더라도 참고 기다리기보다는 '누가 뒈지나 보자'고 되치기를 시도합니다.

그는 기세에 관한 한 결코 양보를 모르는 것 같습니다. 심지어 그는 타개를 하면서도 끊임없이 공격을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의 공격적 성향은 전운이 감도는 전쟁터에 서있는 듯한 불안과 롤러코스터를 탄 듯한 흥분을 동시에 유발시키며 관전의 재미를 최대치로 끌어 올립니다.

바둑의 스타일은 그 승부사의 실험정신과 내공의 깊이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것이지만, 그의 공격은 근원적이고 본질적이어서, 그가 달라진다고 하더라도 어느 날 갑자기 수비형으로 돌변하는 것처럼 파격적인 변모를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싶습니다.

새는 산 속을 날며

그 날개가 산에 닿지 않는다

- 이성선 <> 전문

그는 기복이 심한 편인 것 같습니다. '세계대회 우승 이후 일시적으로 목표를 잃었다'라는 진단이 그럴싸해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그의 스타일이 조금씩 읽히기 시작한 게 아닐까 하는 의구심도 생깁니다.

그와 대국하는 기사들은, 그가 어느 순간에 발톱을 일으켜 세운 한 마리의 야수로 돌변할는지 모른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않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의 전천후 공습 능력은, 상대로 하여금 더욱 안전을 추구하게 하고 난전에 말리지 않게 하며, 알기 쉬운 코스로 판을 좁혀 가는 작전을 세우도록 독려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홀로 세운 작전으로 바둑 한 판의 스무고개를 다 넘을 수는 없는 일이지만, 그가 '도 아니면 모' 식으로 대마를 잡으러 가는 상황이 벌어진다면, 십중팔구 홀로 세운 작전이 성과를 거둔 것이라고 보아야 옳겠지요.

그가 포석에서 유장하게 판을 짜지 않는다고 하여 이상감각이라는 진단도 나오는 것 같습니다. 실리에 민감한 나머지 대세를 외면하여 사서 고생한다는 진단도 나오는 것 같습니다. 지나치게 공격에 집착하고 급하다는 진단도 나오는 것 같습니다. 엷다는 진단도 같은 맥락인 것 같습니다. 그가 형세불명의 바둑을 불리하다고 생각하여 자폭하거나 연득없이 던져 주변인을 경악시키는 사태가 가끔 벌어지는 것을 보면, 그는 기분에 치우치는 경향도 있는 것 같습니다. 시쳇말로 김이 새 버리면 더 이상 무엇인가를 할 의욕이 안 난다고나 할까요. 일각에서는 '공부를 게을리 한다' 'TV출연의 외도가 지나치다'라는 우려의 목소리도 들리는 것 같습니다.

저는 전체적으로 '운영의 묘가 떨어진다'고 지목되는 그의 약점은, 냉철하기보다는 영감의 영향을 먼저 받는 감각형 천재의 특징에 부합하는 것이며, 시간이 지나면 자생적으로 해결될 문제라고 보고 있습니다만, 기복이라는 이름으로 그의 발목을 잡는다는 점에서 서둘러 그 자신의 면밀한 검토가 따라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는 아주 짧습니다. 그러나 시가 짧다고 메시지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이 시보다도 더 짧은 시를 알고 있습니다. 시인은 기억나지 않지만, 제목이 <>이며 '너무 길었다'가 전문입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을 놓고 논문을 썼다는 황당한 설화가 전해 내려오고 있으니, 시의 메시지는 받아들이는 사람 '꼴리는 대로'가 아닐까 싶습니다. 저는 <>가 그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인용하였습니다.

이세돌처럼 독특한 스타일의 파이터는 두 번 다시 등장하기 어려울는지도 모릅니다. 혹시 이창호와는 반대의 방향으로 바둑의 신이 떨어뜨린 화두가 아닐는지요. 저는 이창호가 순류로써 바둑의 본질에 다가간다면, 역류로써 바둑의 본질에 다가가는 것은 그의 몫이 될 거라고 짐작하고 있습니다.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천둥 번개를 동반한 먹구름이 반상으로 밀려들고 있습니다. 반상에 집을 지은 모든 사람들에게 풍운의 주역이 묻고 있습니다.

"댁의 지붕은 안전하십니까?"

4. 영화 이야기

오늘은 러셀 크로우라는 영화배우가 날을 잡은 모양입니다. 저는 그가 주연한 <뷰티풀 마인드 a beautiful mind>라는 영화를 가지고 ''을 마무리하려고 하니까요.

<뷰티풀 마인드>는 게임이론(theory of games)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1994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미국의 수학자 존 포브스 내쉬 주니어의 생애를 그린 영화입니다. 실비아 네이사의, 동명의 전기(우리나라에서는 <아름다운 정신>으로 출간되었습니다)를 토대로 만들어졌고, 아카데미에서 몇 개의 상을 받았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존 포브스 내쉬 주니어에 관해서는 눈 뜬 봉사나 다름없습니다. 전기도 읽지 못하였고, 게임이론에 대해서도 레스터 서로의 <제로섬사회(zero sum society)>를 읽고 제로섬게임(zero sum game)의 의미만 좀 이해하게 되었을 뿐, 게임이론 전체에 대해서는 빨래집게 놓고 알파벳 'A'자도 모르는 수준이니까요.

그러니까 저는 <뷰티풀 마인드>에서 존 포브스 내쉬 주니어가 왜 그렇게 특별하게 그려졌는지, 특별할 것도 없어 보이는데 왜 그렇게 난리법석을 떨었는지 의아하게 생각하는 까막눈이다 그런 말씀입니다. 기실 영화 자체도 제 눈에는 애들 헤엄치는 수준으로 보였지만 말입니다.

할리우드영화가 인생의 신산각고를 다루지 않고, 입맛에 맞는 부분만을 잘라 갖은 양념으로 먹음직스럽게 버무린다는 것은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지만, <뷰티풀 마인드>는 존 포브스 내쉬 주니어가 어찌하여 천재적인 수학자이고 수학자로서 그는 어느 자리에 위치하고 있는가를 그린 것이 아니라, 그의 핸디캡 - 그가 정신분열증에 걸려 평생 고생하고 살았다는 처절한 개인사에 흡혈귀처럼 달라붙어 필름을 빨아먹은 '허접한' 영화라는 것이 저의 소감입니다.

집사람이 옆에서 흠뻑 심취했기에 졸아 가며 끝까지 장단을 맞춰 줬지만, 펜타곤의 사주를 받고 암호해독전문가로 암약한 것이 정신분열증의 제 증상 중의 하나인 망상이었다는 설정에서는 웃겨 죽는 줄 알았습니다. 천재적수학능력과 천재적암호해독능력을 동일 선상에 올려놓는다면 지나가는 개도 웃을 일이 아니겠습니까?

전기를 읽지 못했기에 정말 그런 스토리가 존재하는지 알 수 없지만, 아직도 냉전의 망령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며, 자신들만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진 듯한, 한심한 작태를 참고 보기란 여간 곤혹스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반전 좋아하는 것도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이더군요. 할리우드 영화는 반전에 '맛이 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 반전이 바둑의 역전처럼, 영혼의 '골을 때리는' 것이라면 얼마든지 환영이지만, 알맹이는 전혀 없이 단지 뒤집기만을 위한 뒤집기라면 인생에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저는 <뷰티풀 마인드>를 보고 눈만 버렸습니다. 서둘러 이소룡의 명화 <정무문>을 보고 시력을 회복하지 못했더라면, 아들놈 동화책 읽어 주는 데도 큰 곤란을 겪을 뻔했습니다.

그렇지만 <뷰티풀 마인드>가 훌륭한 영화라고 생각하시는 분은 저의 의견을 싹 무시해도 좋습니다. 어차피 제가 전하고자 하는 것이 영화의 질은 아니었으니까요. 제가 <뷰티풀 마인드>를 물고 늘어진 것은 이 영화에 친숙한 소품이 하나 나왔기 때문입니다. 영화를 보신 분들은 눈치 채셨겠지만, 바둑이 그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설명 드리자면, 존 포브스 내쉬 주니어가 프린스턴 대학 대학원 수학과에 진학하여 라이벌을 한 명 만나게 되는데(<아마데우스>의 안토니오 살리에리를 연상시키면 될 것 같습니다. '하늘이시여! 어찌 마효춘을 낳고 또 이창호를 낳으셨나이까?' 식의 구도는 너무 우려먹어서 거의 너덜너덜한 지경까지 왔습니다. 식상도 이 정도면 십이지장궤양 수준입니다), 그 라이벌이 교정에서 바둑을 둘 때, 존 포브스 내쉬 주니어가 '얼빵하게' 다가가더니 마치 '이적의 수'를 발견하기라도 한 것처럼 라이벌의 상대편 쪽으로 '겐세이'를 낍니다.

처음에는 라이벌이 '아작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존 포브스 내쉬 주니어가 되치기를 당해 200집이 넘는 대마를 합동장례식장으로 보내고 끝납니다. 알고 보니 존 포브스 내쉬 주니어는 '축도 모르는' 얼간이였던 것입니다. 그러자 잔뜩 '쪽팔려' 귀가 빨개진 존 포브스 내쉬 주니어가 갑자기 판을 둘러엎는 통에, 창졸지간 그 일대가 아수라장으로 변하고 말았다는 스토리입니다.

저도 영화라면 사족을 못 쓰는 편이지만, 할리우드 영화 속에 바둑이 등장하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했습니다. 명불허전! 과연 존 포브스 내쉬 주니어다웠습니다.

영화 속에 등장한 바둑의 묘사는 무협영화를 보는 것처럼 현란한 것 같았습니다. 존 포브스 내쉬 주니어의 기력이 어느 경지인지는 모르지만, 이적의 수를 0.28초 만에 구사한 것처럼 보이고, 라이벌의 기력이 어느 경지인지는 더욱 모르지만, 0.31초 만에 그 수가 이적의 수를 빙자한 '떡수'라는 사실을 알아내고 되치기를 시도하더군요. 그런 수준이라면 한국 바둑계가 100년 대계를 위하여 조속히 초빙해야 하는 것이 아닐는지 모르겠습니다.

한데 이상한 것은, 그들의 착수하는 손길이 오른손잡이가 왼손으로 글씨를 쓰는 것처럼 어설퍼 보였고, 그들의 수를 나눈 대국보도 고수의 그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게 엉성해 보였다는 사실입니다. 돌이 포도송이처럼 뭉쳐 있고 흑백의 구분이 선명하지 않은 것이, 혹시 '알까기'를 하던 중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심을 떨쳐 버리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과장한 감이 있지만, 저의 결론은 '그들은 바둑의 바자도 모르고 있다'였습니다. '알까기'라고 쳐도 그렇지, 돌통의 돌을 몽땅 올려놓고 '알까기'하는 경우는 난생 처음 보았습니다.

짐작하건대, <뷰티풀 마인드>의 감독은 바둑을 인텔리겐치아를 증명하는 현학적인 소품으로 등장시킨 것 같습니다.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천재이므로 보통 사람들과는 뭔가 다른 에피소드를 끼워 넣어야 하는 데, 컴퓨터에게 코피 난 체스 가지고는 안 되니까, 바둑이 체스와는 비교가 안 되게 난이도가 높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을 테니까, 각색자가 바둑 클럽에서 18급으로 입문하고 보니 ', 이거 장난이 아니네!'라고 느꼈을 테니까.....

그러나 그 고증이 너무나 엉망이어서 '알까기'라고 쳐도 리얼리티가 살아나지 못한다는 점은 생각조차 못하고, 오직 존 포브스 내쉬 주니어의 천재성을 업그레이드시키고자 하는 일념 하나로 바둑을 등장시키게 되었던 것이 아닐까 라는 것이 저의 추론입니다.

론 하워드 감독은 좋은 기회를 놓쳤습니다. <타이젬>의 슈퍼스타 <우정과>를 섭외하여 바둑의 고증을 철저히 했더라면, 적어도 그 장면에서만큼은 존 포브스 내쉬 주니어가 천재라는 사실을 입증시키고 영화의 완성도도 높일 수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할리우드 영화가 다루는 동양은, 그것이 사상이든 문화든 대부분 왜곡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인종 간의 격차도 없고 문화 간의 격차도 없다'는 진리의 기반을 여지없이 무너뜨립니다. 이소룡은 일찍이 할리우드 영화의 노란 싹수를 한 인터뷰에서 설파한 적이 있습니다.

"서양인이 만드는 영화 속 중국무술의 이미지는 매우 왜곡되어 있다. 파라마운트사나 워너브라더스사는 나에게 중국인 양아치 역을 하도록 요구해 왔다. 할리우드 영화는 서양인이 중국 무도인을 코피 내는 것으로 만들어지고 있다. 나는 그것에 대해 매우 화가 났었다."

할리우드 영화가 동양을 늘 '먹다 남은 떡'으로 취급해 왔다는 사실에 비추어, <뷰티풀 마인드>에서 바둑이 존 포브스 내쉬 주니어의 천재성을 증명하는 소품으로 등장하였다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냉정히 생각하면 그것은 그들의 한계를 드러내는 '똥수'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동양의 작은 나라에서는 전 인구의 20%가 바둑을 두며, 바둑의 도에 인생을 건 사람들이 널려 있으며, 약관의 나이에 부동심의 경지에 도달한 천재와 통찰력의 경지에 도달한 천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그들이 과연 알기나 할까요? 알 수 없겠지요. 알고 싶지도 않겠지요. 알아도 별 볼 일 없겠지요. 그리고 그것은 곧 그들의 불행일 터이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