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한형 2024. 3. 15. 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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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

인생에서는 세 가지 선택이 있다. 직업의 선택, 배우자의 선택, 인생관의 선택이 그것이다. 사람의 일생은 출생에서 죽음까지 끊임없는 선택의 연속이다. 어떤 인생길을 갈 것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무엇을 하며 살 것인가. 무엇을 위해 일생을 바칠 것인가. 나의 생의 목적은 무엇인가. 나에게 내려진 천명은 무엇인가. 철학적으로 심오한 그런 복잡하고 어려운 것을 제쳐두고 요즘 세상은 워낙 많은 선택으로 인해 골머리를 앓고 있고 머리에 쥐가 날 정도로 복잡한 선택의 문제가 남았다. 만약 아주 오래전 시대를 거슬러 올라 간다면 원시시대나 사회나 고대의 사회 신분적으로 고착된 제약을 가진다면 선택의 기회 내지 여지가 없을 것이다. 일례를 든다면 홍길동 같은 이는 서자로 태어나 아버지를 아버지로 부르지도 못하는 억압 속에서의 삶을 살아야 했다. 그 홍길동에게 선택의 폭이란 엄청나게 좁을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래서 그는 신분의 해방을 도모했고 유토피아를 꿈꿨고 다른 세상을 구가하고 그의 꿈을 실현시켰다. 선택이란 자유의지의 산물일 것이다. 그것에는 결국 책임이 따른다. 이와 더불어 운명론 내지 숙명론이라는 것이 있다. 인간의 자유의지 내지 선택에 의해 그래도 인생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는 순간 그의 삶은 결정되어 있고 예정되어 있다는 이론이다. 인간이 제아무리 자신의 선택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거슬리고 색사를 생을 영위하고자 한다고 할지라도 결국은 본인의 선책과 무관하게 사주팔자 등에 의해 매사가 결정 지워진다는 식이다. 속된 말로 운칠기삼이라는 것이 있다. 자신의 의지로 할 수 있는 것은 열중 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운명적으로 정해져 있는 것이 70%라는 것이다. 유명한 발명가로 알려진 에디슨은 그런 명언을 남겼다. 자신의 일생에서 일의 성취는 99%의 땀과 1%의 영감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자신의 의지와 노력이 그렇게 큰 비중을 차지하고 그렇게 믿음을 갖고 일의 성취 또는 성공을 위해 노력하고 피 땀흘려 애썼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리라. 노력은 결코 배신하지 않는다는 얘기도 있다. 과연 그러한가. 아리송한 문제다. 아무리 노력하고 애쓰고 열정을 다했지만 자신이 목표한 바를 이루지 못하는 경우도 숱하다. 우리가 모든 사람이 그렇게 얘쓰고 노력하고 열정을 쏟아부어 이뤄낸 성취를 획득하고 그 과실을 맛보기도 하지만 전혀 그렇게 그 성취를 이뤄내지 못하는 이도 수많은 경우가 존재하는 셈이다. 그것은 왜일까. 노력의 부족이라고 한탄하기도 하고 하늘의 도움이 없었기에 조상님의 은덕이 없었기에 그런 성공을 이루지 못했다고 자포자기하기도 한다. 서양의 유명시인 프르스트의 가지 않은 길이라는 시도 있다. 자신이 가지 않은 길이 있었고 그로 인해 후회나 미련을 갖고 있는 것이 인간이라면 모두 그런 일말의 회한을 가지고 있으리라. 자신이 선택하지 않는 길에 관한 후회나 회합은 서택한 사람의 몫일지 모를 일이다. 삶의 과정 가운데 후회없는 삶이란 좀처럼 상상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선택의 기회란 것이 항상 열려있고 언제나 오는 것은 아니다. 선택의 기회도 시기적으로 한정되어져 있는 것이 당연지사이다. 언제까지나 선택의 기회가 제공되는 것이 아니고 일정한 시기 또는 공간 여건 상황 속에서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 그것도 우리가 무한대로 향유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속에서 자신의 만족을 느낄 만한 최적의 선택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하리라.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철학적 명제가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렇게 생각하고 존재하는 기본적인 부분의 핵심적인 것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하고 존재 목적에 부합하는 최선의 좋은 선택을 해나가고 그 선택된 부분에 관해 후회 없는 선택이 되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몰입해서 성공을 이뤄나가야 하리라. 유명한 말 중에 그런 얘기가 있다. 생각한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는 식이다. 주체적으로 주인의식의 갖고 자기 삶을 살아야 한다는 얘기도 있다. 언제사 인생에서의 주체는 자기 자신인 셈이다. 이런 예화가 있다. 20세기 초엽의 일이었다. 한 여자 수영선수가 있었다. 그녀에게 주어진 도전 과제는 LA근처의 섬 카탈리나 섬까지 수영해서 도착하는 것이었다. 바다의 높은 파도와 급물살을 극복하고 이겨내야 하는 고난도의 도전이었다. 그녀는 도전을 받아들였고 충분한 연습과 훈련을 통해 자신의 몸상태를 최선의 상태로 만들어 도전에 나섰다. 그 도전이 갖는 의미는 자신의 명예욕 또는 성취욕 그런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다. 말 그대로 자신과의 싸움이었고 그것을 이겨내고 인간의 한계를 새롭게 하는 극한의 도전이었던 셈이다. 드디어 결전의 날이 왔고 그녀는 도전에 나섰다. 물론 배가 뒤를 따르고 있었고 방송매체에서는 그녀의 도전을 생중계로 방송하고 있는 형국이었다. 그렇게 시도된 도전은 결국 마지막 단계에서 불과 1.5Km를 앞두고 포기하고 마는 상황을 맞는다. 원인은 목표점이었던 카탈리나의 목표지점이 짙은 안개로 인해 자욱하게 낀 인개로 희뿌옇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목표가 보이지 않으니 그녀는 절망했고 도전을 이어갈 의지를 상실한 채 도전을 포기하기에 이른 것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올림픽에 있어서도 최고의 선수가 도전을 하던 과정에서 그 도전과제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하고 도전을 포기하는 일들이 왕왕 벌어지기도 한다. 그런데 기적적으로 그 수영 여자선수는 다시 도전에 나선다. 그리고 지난번과 똑같이 그렇게 목표지점은 안개에 휩싸여 있었다. 과연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이번에는 달랐다. 이번에도 저번처럼 그렇게 안개가 자욱한 상태였고 카탈리나섬의 목표지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그녀는 이번에는 목표지점까지의 수영을 완벽하게 해냈다. 그리고 도전과제를 성취해내는 쾌거를 이뤄낸다. 그 이후 그녀는 메스컴의 찬사를 받았고 인간승리의 대명사가 되었다. 영화 벤자민의 시계는 거꾸로 간다에 나오는 부분의 한 장면에 여자 수영 선수의 도버해협 도전 얘기가 나온다. 그리고 그녀는 그 도전에서 실패한다. 어떻게 그녀는 역경을 이겨내고 보이지 않는 목표점 카타리나 섬의 목표지에 도달할 수 있었을까. 그 비결은 이랬다. 이번에도 보이지 않는 목표점에 암담해졌다. 그러나 그녀는 머릿속으로 그 카탈리나 섬의 목표지를 그렸다. 그리고 상상의 목표점을 향해 끊임없는 영법을 이어간 것이 주효했던 것이다. 목표점은 보이지 않았지만 마음속에 목표점을 정하고 그렇게 그곳을 향해 질주해갈 수 있었던 것이다. 인생에 있어서도 그렇게 지향점이나 목표점이 보이지가 않을 때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보이지 않는 것이 장애가 되지는 않는 것이다. 극복하지 못할 한계가 아닌 셈이다. 상상속의 목적지를 정하고 그곳에 이르면 되고 정복하면 된다는 것이다. 인생은 문제를 해결해나는 과정이라고도 한다. 인생은 무거운 짐을 지고 길을 가는 것이라고도 했다. 항상 곤궁한 때를 기억하라고도 했다. 문제의 핵심은 선택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선택을 통해 성취를 이루고 완성품을 만들어가는 것인지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