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산 전도사의 변
출산 전도사'의 변(辯)/김별아
부모 사랑조차 의심했던 나
아이 낳아 기르며 완전히 바뀌어
'가정의 달' 끝머리 소심한 고백
부디 당신도 이 행복 누리기를
내가 ‘사랑’을 믿기 시작한 것은, 아이를 낳은 후부터였다. 효성스럽지 않았던 나는 부모의 사랑조차 의심하며 불퉁댔다. 감정과 욕망이 빚어내는 순간의 신기루, 연인과의 사랑에 회의했다. 그런 시큰둥이가 일말의 의심과 회의 없이 사랑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게 된 것은 아이를 낳아 기르면서부터였다.
아이 볼래 밭맬래 물으면 호미 들고 나선다더니, 이것은 다른 차원의 중노동이었다. 온몸의 마디마디 아프지 않은 곳이 없고 잠은 늘 부족했다. 사회 활동은 제한받고 기존의 관계는 단절되었다. 생존을 건 전투와도 같은 육아에서 전우애를 쌓지 못한 배우자와는 불화했다. 출산 전과 이후의 삶 사이에는 빙하가 갈라져서 생긴 크레바스만큼 깊고 가파른 틈이 생긴 듯했다. 하루아침에 달라진 삶에 당황하는 것도 잠시, 단 한순간도 자력으로 살아내지 못 하는 핏덩이를 살리기 위해 가진 에너지 전부를 짜내어야 했다.
나는 있는 힘껏 사랑했다. 아이를 위해서라면 어떤 간난고초도 견딜 수 있을 듯했고 사랑에 목숨을 건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게 되었다. 종족 보존의 본능일지 모른다. 자식을 분신(分身)으로 비유하는 바와 같이 자기애의 발현일 수도 있다. 어쨌거나 아이를 기르며 느낀 완전한 충만과 일체감은 난생처음 경험하는 감정이었다. 이것이 사랑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런데 그 ‘사랑’의 내용이 익히 알려진 내리사랑과 모성애 따위가 전부는 아니었다. 희생은 보상 없는 일방통행이다. 돌려받기를 바라지 않고 바치는 일이다. 하지만 사랑의 퍼즐은 일방이 아니라 또 다른 기억의 조각을 더해야 완성된다. 그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성장 과정에서 잊어버리거나 잃어버린, 부모에 대한 아이의 압도적인 사랑이다.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한 거의 모든 아이들이 부모를 열렬히 사랑한다. 물론 그 또한 감정이나 생각이라기보다는 생존 본능에 가까울 것이다. 동물과 인간의 어린 생명들이 보호와 돌봄을 받기 위해 귀여운 신체적 특징으로 무장한다는 ‘베이비 스키마(Baby schema)’ 이론과 같은 맥락에서 말이다.
그럼에도 의심 없는 사랑은 치유다. 어떤 이는 예순이 다 되어서야 자기 삶의 발전을 가로막은 것이 어릴 적의 미해결 욕구들이었음을 깨달았다고 한다. 스스로 알을 깨고 세계로 나아가는 데 물질적·정서적 결핍이 차꼬가 되어 발목을 잡은 게다. 어려서부터 까닭을 알 수 없는 허무와 타나토스의 충동을 강하게 느껴왔던 나는, 아이를 기르며 비로소 애정 결핍을 해소하고 삶이라는 지상 명령에 복종했다. 절대적인 사랑을 받으며 사랑의 절대성을 믿게 되었다. 부족한 인간이기에 완벽하게 좋은 엄마는 될 수 없었고, 평범한 욕심으로 아이에게 실망하고 때로 사납게 으르렁대기도 했다. 하지만 분명한 하나는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행여 놓칠세라 내 손을 홈켜잡았던 고사리손의 사랑을 끝내 의심치 않으리라는 사실이다.
조선일보의 한 칼럼에서 얼결에 ‘출산 전도사’로 불린 뒤로 내내 부끄러웠다. 건강과 여건이 허락지 않은 탓이지만 서넛도 아닌 달랑 하나를 낳아 기른 주제에 그런 이름은 가당찮았다. 백약이 무효인 저출생 시대에 불임과 멸절을 택한 젊은 세대에게 감히 전하여 인도할 진리 같은 것도 없다. 다만 ‘가족의 달’인 5월이 저무는 마당에, 내 삶에서 아이를 낳아 기른 것만큼 의미 있고 중요한 일은 없었다고 조심히 고백하고 싶다. 아이는 내가 30년 동안 쓴 어떤 작품보다도 소중한 작품이며, 나는 그를 통해 사랑을 배우고 새롭게 거듭났다. ‘출산 전도사’로 불린 김에 주제넘게 한마디만 더 하자면, 나는 애국이나 사회적 책무 같은 거창한 말을 하지 않으련다. 다만 이토록 누추하고 시시한 ‘행복’을 당신도 누릴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마음을 잃은 아이들 / 김별아
방관자이자 공범이
될 수밖에 없었던
나머지 아이들의
존재가 더 슬프다
아들아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였다. 목욕을 돕다가 아이의 손바닥이 발갛게 부푼 것을 발견했다. 잘못을 저질러 선생님께 회초리로 맞았단다. 엄마가 가진 체벌에 대한 트라우마 때문에 순간적으로 이성을 잃을 뻔했지만 아이 스스로 잘못했다니 정황부터 알아보기로 했다.
“우리 반에 ○○이라고 있는데, 걔가 좀 엉뚱해서 아이들한테 놀림을 당하거든. 그걸 선생님이 아시고 ○○이를 괴롭히는 데 가담한 사람은 다 나오라고 해서 나도 나가서 맞았어.”
자식 겉 낳지 속은 못 낳는다더니, 내 아들이 ‘왕따’의 가해자가 되었단 말인가? 화나고 놀라서 네가 정말 ○○이를 괴롭혔냐고 따져 물으니 아이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대답했다.
“내가 직접 놀리진 않았지만… 다른 아이들이 놀리는 걸 그냥 구경했어. 그러니까 나도 ○○이를 괴롭히는 데 가담한 거잖아.”
현명한 엄마가 되는 길은 멀고도 험해라! 나는 또다시 말문이 막혔다. 아이들은 오직 경험을 통해 가치와 선악과 우열의 구분법을 학습한다. 그러하기에 최초의 교사, 엄마로 대표되는 양육자의 태도가 중요하다. 아이가 흙을 만지면 어떤 엄마는 단박에 “지지!”라고 외치며 사납게 손을 낚아챈다. 그럴 때 아이에게 흙과 땅은 더러운 것으로 인식되기 마련이다. 놀이터를 오염시키는 애완동물이나 야생동물의 배설물과 기생충, 각종 유해 세균을 걱정하는 마음은 알겠지만, 애초에 흙을 ‘지지’로 학습한 아이에게 자연에 대한 호기심과 생명의 소중함을 가르치기는 힘들 수밖에 없다. 사람 사이의 일은 더욱 어렵고 복잡하다. 나는 혼란스럽고 불편한 채로 아이의 솔직한 고백을 칭찬하고 방관의 태도를 꾸짖었다. 최소한 너는 구경만 했으니 아무 죄도 없다고 말할 수는 없었으므로.
피해자를 구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가해자를 격리해야 한다는 원성이 들끓는다. 하지만 상처 입고 상처 입힌 아이들은 사건의 당사자만이 아니다. 그토록 끔찍한 잔혹극이 교실 한구석에서 버젓이 펼쳐지는데도 침묵하는 방관자이자 공범이 될 수밖에 없었던 나머지 아이들의 존재가 어쩌면 더 무섭고 슬프다. 때로 가해자의 등 뒤에서 잔인한 쾌감을 즐기다가 돌아서 불의를 외면하고 폭력에 복종했다는 굴욕감에 괴로워하며, 아이들은 점차 마음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마음과, 비겁을 떨치고 용기를 내어 그것을 표현하는 마음의 힘을.
나쁜 아이들이 갑자기 많이 태어난 것이 아니다. 나쁜 세상이 아이들을 점점 망가뜨리고 있을 뿐이다. 지금 아이들은 비명을 지르고 있다. 살려달라고 아우성치고 있다. 함께 백두대간 종주를 했던 길벗 중 어느 중학교의 ‘학주’(학생주임)인 교사가 있었다.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때면 그녀는 시르죽은 얼굴로 도망치듯 산에 왔다. 집에서 부모에게 쪼이고 학원에서 압박당한 아이들이 스트레스와 분노를 학교에서 터뜨리는 바람에 평소보다 사건·사고가 서너배 이상 일어난다는 것이었다. 친구를 때리고 물건을 훔치고 유리창을 깨면서 발버둥질해야만 배겨낼 수 있는 압박 속에서 아이들의 일탈은 가학적이자 피학적일 수밖에 없다.
“아이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어디까지 껴안고 어디부터 내쳐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요.”
아이들이 아프다. 세상이 아프다. 아이들이 마음을 잃었다. 세상이 텅 비었다. 아프고 텅 빈 그들을 징계하고 훈시해봤자 별반 소용없다. 아이들은 부모의 말이 아니라 뒷모습을 보고 배운다는 말이 새삼스럽다. 아이들이 잔인하고 가혹해질수록 어른들이 만든 이 잘난 세상의 편견과 냉담과 이기심이 명징해질 뿐이다. 눈시울이 화끈하고 뒤통수가 뜨끔하다.
삶과 상처의 후배들에게 / 김별아
허용되어 마땅한
지적 탐욕과 체험
진짜 세상공부는
이제부터 시작
동쪽 변방에 자리한 고향으로 가는 마지막 고개에서는 항상 멀미가 난다. 이제는 아흔아홉 구비 구절양장 대신 산을 뻥뻥 뚫어낸 일직선의 대로를 따라가는 길인데도 그렇다. 나고 자란 사오싱(소흥)을 배경으로 숱한 명작들을 쓰고도 때로 “신이 노하여 홍수로 쓸어가 버려도 좋다”고 저주를 퍼붓던 루쉰처럼, 고향에 대한 애증은 끝없이 탈출을 꿈꾸었던 이단자의 숙명일까. 흔들리는 추억 속에 그리움과 환멸감이 뒤엉켜 어지럽다.
이번 귀향길이 더욱 어수선한 것은 이십여년 전의 나를 만나러 가기 때문이었다. 전교조 지회가 주최한 강연회에서 내가 만날 이들은 일주일 전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치른 수험생들. 해방감과 허탈감, 그 모순된 감정의 경계쯤에 있을 그들에게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까. 꼭 그들 나이였을 때의 내 모습을 생각하면 할 말이 없을 듯, 무수히 많을 듯도 싶었다.
나는 그곳에서 이른바 ‘명문’ 학교를 졸업했다. 하지만 스스로 자부하는 명문이 아닌 남이 부여한 명문의 타이틀을 얻기 위해 우리는 청소년기를 온통 저당 잡혀야 했다. 끝없는 시험과 교실 앞 복도에 게시된 1등부터 꼴등까지의 이름이 빼곡히 적힌 두루마리, 몽둥이찜질과 단체기합과 수치심을 자극하는 욕설, 평균 점수가 떨어졌다는 이유로 흙바닥에 한 시간 동안 꿇어앉았다 일어났을 때 벌목된 나무처럼 쿵쿵 쓰러지던 친구들을 나는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한다. 성적이 오르는 만큼 맷집과 반항심은 비례하여 떠나올 때쯤엔 뒤돌아보기조차 싫을 지경이었다. 그토록 오랫동안 고교 비평준화 지역으로 남았던 고향에 내후년부터 평준화가 시작된다고 한다. ‘명문’ 학교의 일부 동문들이 그 결정에 반대한다는 말도 들리지만, 나는 후배를 성적의 높낮이로 구분해 차별할 생각이 없다. 사회 진화의 어떤 단계에서는 경쟁을 통한 엘리트주의가 효력을 발휘할지 모르지만 그보다는 서열화를 통해 잃는 것들이 훨씬 많다. 적어도 후배들은 나처럼 학교와 교사와 교육 자체에 트라우마를 가진 ‘성공적인 실패작’으로 자라지는 않을 것이 아닌가.
강연장에서 만난 아이들은 예상대로 예뻤다. 아니, 아이들은 언제나 예쁘다. 언젠가 나도 그들처럼 예뻤는지는 모르지만, 분명코 그들이 속내에 감춘 만큼 불안하고 혼란스러웠다. 그해 겨울, 나는 대학입시를 일주일 앞두고 가출했다. 갖은 우여곡절 끝에 시험을 치르고 운 좋게 합격통지서를 받아들긴 했으나, 친구들이 미팅을 하고 운전면허학원에 등록할 때 도시 외곽의 벽촌을 도는 시내버스 안내양으로 취직했다. 가출을 하기에는 타이밍이 좋지 않았고 ‘알바’치고는 생뚱맞기 이를 데 없었다. 하지만 선거 관련 뉴스 앞에서 아버지와 밥상을 던지며 싸웠다고 해서 ‘정치적인’ 가출이라 할 수도, 큰 뜻을 품고 ‘브나로드’ 운동을 벌이고자 아르바이트를 감행했다고도 할 수 없다. 돌이켜 곱씹어보건대 열아홉살의 내가 저지른 돌발적인 사건들은 오직 경쟁과 억압 속에 잃어버린 나를 알고, 나를 찾기 위한 필사적인 몸부림이었다.
상처만큼만 넓어지는 세상 속으로 이제 막 첫발을 내딛는 후배들에게, 나는 인생의 선배로서 감히 조언한다. 여태껏 받아들고 한숨짓던 성적표의 등수 따위는 깨끗이 잊어버리길. 지금은 믿지 못하겠지만 정말로 행복은 성적순일 수 없다(언젠가 차라리 행복이 성적순이었으면 좋겠다고 칭얼댔던 헛똑똑이 선배의 말이니 믿을 만하다). 진짜 공부-세상 공부, 사람 공부, 인생 공부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허용되어 마땅한 지적 허영과 권장되어 마땅한 체험에 대한 탐욕으로 한껏 들썽들썽 걸신스럽게 공부해야 한다. 부디 그 큰 배움터에서 용맹 정진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