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

와인 축제 이야기

자한형 2024. 10. 21.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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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 축제 이야기(1)/이철형

인간이 동물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다를 수 있겠지만, 그 중 인간은 축제를 즐긴다는 것도 색다른 차이점의 하나라 할 것이다.

축제 하면 거창하게 생각하겠지만, 잔치도 규모가 작은 축제라 볼 수 있는 만큼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다양한 축제 속에 사는 셈이다. 심지어는 한 사회의 문명화와 선진화 정도를 축제 수와 규모, 그리고 그것의 격조를 척도로 삼아 평가하기도 한다.

역사적으로 원시 농경 사회에서 봄의 풍요 기원제나 가을의 추수 감사제에서 유래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축제는 그 공동체의 단합, 종교, 문화 활동들과 밀접한 관계를 띄며 다양하게 발전했다.

고대 국가가 등장하면서부터는 전쟁에서의 승리나 왕의 탄생을 기념하는 형태도 생겨났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예술이나 먹거리를 주제로 관광자원화하기 위해 일부러 축제를 고안해내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축제를 의미하는 영어 단어 페스티발(Festival)의 어원은 피스트(Feast)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피스트는 연회, 향연이라는 의미로 여러 이유로 다수가 모여서 음식을 함께 나누는 것이다.

여기에는 술은 필수였다.

따라서 가장 오랫동안 인류 역사와 함께 한 와인은 빠질 수 없는 축제의 중요한 구성 요소였다. 와인 그 자체 혹은 와인의 신인 디오니소스를 숭배하는 종교적 문화적 축제도 생겨났다. 때문에 디오니소스는는 축제의 신이라고까지 불리게 되었다.

성경에도 나오지 않는가? 예수의 공생애 시작이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든 기적에서 시작하여, 최후의 만찬에는 포도주를 예수의 피로 기억하라고 하며 마신 것으로 마감된다. 그렇기에 오늘날까지 와인을 마시는 것은 기독교에서 성찬 예식으로 남아 있다.

마침 축제의 계절 5월이니 축제의 기원과 그리스의 고대 와인 축제에 대해 알아보자.

축제의 기원

기록상으로 보면 BC 3000년 경 이집트에서 최초의 왕조가 시작될 때 풍요의 신, 그리고 사자(死者)들의 세계를 지배하는 신이자 부활의 신으로서 이집트 최초의 왕이 된 오시리스(Osiris)를 기리는 축제가 가장 오래된 축제이고 이것이 가장 오랫동안 지속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멀리는 BC 6,000년 경부터 오시리스의 신화와 그를 숭배하는 의식이 축제를 겸해서 내려오다가 정식으로 자리를 잡은 것이 BC 3,000년 경으로 추측한다.

이 축제는 이집트 최초의 왕조가 시작된 BC 3,150년 이전에 시작하여 로마에 의해 이집트의 마지막 왕조가 멸망하는 BC 323년까지 지속되었다고 하니 대략 3000년 가까이 지속된 축제인 셈이다.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디오니소스 축제

이집트의 오시리스 전설이 그리스로 넘어와서 그리스 문명과 융합되면서 디오니소스 신화가 탄생하였다고 보는 것이 학자들의 주류 이론이다. 사실상 오시리스와 디오니소스를 하나로 보는 것이다.

즉 이집트의 오시리스 축제가 그리스로 전파되면서 그리스 아테네에는 풍요의 신이면서 축제의 신인 디오니소스를 기리는 축제 네 가지가 생겨났다는 것이다.

연중 개최되는 시간 순서대로 보면 12월과 1월 사이에 개최되는 시골 디오니시아 축제’, 1월과 2월 사이에 개최되는 레나이아’, 2월과 3월 사이에 개최되는 안테스테리아’, 3월과 4월 사이에 개최되는 가장 규모가 크고 화려했다는 도시 디오니시아 축제가 그것인데, 결국 한겨울부터 봄까지 4회의 축제가 거의 매월 한 달 간격으로 있었다는 것이다. 이 네 축제를 좀 더 알아보자.

시골 디오니시아 축제(Rural Dionysia)’는 고대 아테네와 테베의 국경지대인 엘레우테라에(Eleutherae) 지역의 마을에서 동지를 전후한 12월부터 1월 사이에 개최되었다고 한다. 이 축제는 포도나무의 번성을 기원하는 것으로 시기적으로는 와인 양조가 다 끝나고 숙성 단계에 있을 때이다.

이 축제는 바구니, 빵 혹은 시리얼로 만든 죽, 기타 제물, 물 항아리, 와인 항아리를 가진 소녀들이 순서대로 서서 퍼레이드를 펼친 후 디오니소스에게 제사를 지내고, 12~50명의 합창단이 디오니소스를 숭배하는 합창과 춤 공연을 하는 순서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일부 마을에서는 나중에 생겨난 도시 디오니시아 축제에서 행해졌던 연극 공연도 포함하는 것으로 발전했다.

그레이트 디오니시아(the Great Dionysia)라고도 불리우는 도시 디오니시아 축제(City Dionysia)BC 6세기에 피시스트라투스(Pisistratus)라는 독재자 시절에 생겨났다. 시골 디오니시아 축제 3개월 후인 춘분을 전후한 3월과 4월 사이에 개최되었다.

이 축제는 겨울이 끝난 것을 기념하고 그 해의 풍작을 기원하는 행사였는데 전체적인 진행은 시골 디오니시아 축제와 유사하였다.

이 축제는 모든 아테네 시민, 거주하는 외국인들, 각 도시에서 방문한 대표들과 방문객들이 참여한 가운데 총 6일 동안 진행되었다.

첫날은 행진으로 시작하는데 디오니소스 상이 제일 앞에 서고 그 다음에 생식과 풍요의 상징으로 남근 상징을 한 장대와 남근들을 실은 카트가 뒤를 잇고 시골 축제와 마찬가지로 각종 공물을 든 소녀들과 화려한 의상의 합창단들이 이 뒤를 따라서 디오시소스 극장까지 행진한 후 거기서 황소를 제물 삼아 제사를 지내고 그 다음날부터 연극이 공연되었다고 한다.

축제에 술이 없을 수 없으니 첫 번째 행진 다음의 두 번째 행진은 와인을 맘껏 마신 사람들이 온 거리를 단체로 행진하는 형태로 진행되었다고 한다. 퍼레이드 다음날부터 3일의 연극 경연과 2일의 합창 경연이 이어졌다.

사티로스극.

연극 경연은 BC 534년경에 이 도시 축제를 처음 만들었을 때는 비극만이 도입되었는데 3명의 시인에 의한 3개의 비극이 공연되고 같은 작가에 의해 풍자와 익살풍의 사티로스극(Satyr Play)이 공연되었다.

비극 공연 후에 슬픔에 젖은 사람들을 익살과 풍자극으로 웃기면서 마무리 짓는 것이었으니 병 주고 약주는 시스템이라고 볼 수 있다. 결과적으로는 감정의 균형을 이루어주는 식으로 마무리한 셈이다.

이 비극 경연은 추첨으로 선발된 심사관들이 평가하여 최우수 작가에게는 디오니소스의 상징인 염소를 선물로 주었다고 한다.

비극(tradgy)이라는 단어의 어원이 바로 이 염소의 노래(goat song)라는 데서 유래했다고 하니 연극과 디오니소스 축제는 인연이 깊다. 그리고 BC 486년에 도입된 희극은 5명의 작가가 경연을 했다.

합창 경연은 연극 공연 다음 날부터 이루어졌는데 합창은 주신인 디오니소스를 찬양하는 노래들로 구성되었고 춤과 노래가 함께 어우러진 공연이었다.

레나이아 축제 장면의 화병 그림.

이보다 규모가 작게 두 디오니시아 축제 사이인 1월과 2월 사이에 개최된 레나이아(Lenaia)라는 축제가 있었는데 이 축제는 지역민과 거주 외국인들만이 참여하는, 소규모 행사로 횃불을 든 사람들이 앞서고 그 뒤를 와인을 마시면서 흥청거리는 사람들이 행진하는 것과 디오니소스에게 바치는 제사, 그리고 5개의 희극과 2개의 비극 경연으로 구성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레나이아는 앞에서 이야기한 디오니시아와는 달리 BC 442년에 희극이 먼저 도입되고 10년 후인 BC 432년에 비극이 도입되었다고 한다.

안테스테리아(Anthesteria)2월과 3월 대보름 이전에 3일 동안 개최되었다. 이것은 봄의 시작과 전년도에 만든 와인이 잘 숙성된 것을 축하하는 축제였다고 한다. 이 축제 기간 동안에는 겨울 동안 먹는 것이 금지되었던 농산물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첫째 날에는 새로운 와인을 담고 있는 항아리를 열어서 디오니소스에게 헌주하고 노예들까지 참여한 가운데 함께 마셨고 온 집안을 봄의 꽃들로 장식하였다.

둘째 날은 와인 마시는 날로 무리를 지어 지인들의 집을 찾아다니며 마시기도 하고 조상들의 무덤에 헌주하기도 했다.

또한 이 날에는 와인 빨리 마시기 대회가 열렸는데 우승자에게는 담쟁이 덩굴로 만든 화관과 와인을 가득 담은 와인 가죽백를 상으로 주었다. 이 대회 참가자가 3살 이상의 아이부터 성인 남성까지였다고 하니 놀랍다.

3살짜리 아이도 참여할 수 있게 한 것은 포도나무를 심고 3년째부터 포도를 수확할 수 있는 것에 의미를 둔 것으로 해석해볼 수 있다.

그리고 성인용의 경우 대회의 토기 항아리(주전자)의 용량이 약 2.8리터이었는데 오늘날 750ml 기준으로 와인 약 3.7병에 해당되니 대략 더블 매그넘(3리터) 병 사이즈가 되는 셈이다.

오늘날로 보면 와인 4병 빨리 마시기 대회였던 셈이다.

그리고 둘째 날에는 디오니소스와 아테네의 고대 여왕인 바실린나(Basilinna)와의 합방을 상징화하여 축제 최고 집정관(Archon basileus)과 그의 부인(basilinna)이 디오니소스의 성소에서 합방을 했다고 한다. 그 취지는 그 해 풍작을 기원하기 위한 것이었다.

삼일 째는 항아리(단지:pot)의 날이자 사자(死者)들을 추모하는 날로 온 가족이 몇 가지 곡물로 만든 죽을 해가 지기 전에 함께 먹고 사후 영혼들을 지하세계로 인도한다는 에르메스 신과 사자들에게 과일이나 콩요리로 제사를 드리며 악령을 쫓는 의식도 거행했다.

축제 기간 동안에 죽은 영혼들이 지하세계에서 나와서 사람들과 함께 다닌다고 믿었던 당시 아테네인들은 이런 의식을 통해 죽은 영혼들과 작별을 고했다고 한다.

이 축제기간 동안에는 공식적인 연극 공연은 없었지만 다음 달의 축제를 위한 리허설 공연이 열렸고 동시에 그 공연을 위한 배우를 선발하기도 했다고 한다.

오늘날 퍼레이드나 비극과 희극, 그리고 익살 풍자극이 바로 디오니소스 축제에 기원을 두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이 축제 발달사에서 비극이 먼저 공연되고 한참 뒤에야 희극이 도입되었다는 점이다.

슬픔이나 고통이 인간을 정신적으로 더 성숙시키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생존이나 발전을 위해, 통상 평온한 시기에나 가능한 웃음보다는 고난의 시기를 기억하라는 의미였을까? 흔히들 말하는 잘 나갈 때 어려운 때를 대비하라는 범사회적 의식 교육의 일환이었을까?

어쨌거나 한 개인에게는 희로애락이라는 감정의 균형은 매우 중요하다.

깊은 자기 성찰과 사유를 바탕으로 긍정적이고 밝은 에너지로 삶을 이어가야 그 공동체 사회도 밝고 발전으로 될 수 있을 테니 비극에서 시작하여 풍자극을 거쳐 희극으로 마무리되는 축제의 과정은 오늘날 우리의 개인의 삶과 사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축제의 계절이자 계절의 여왕이라는 5. 가벼운 마음으로 축제를 즐기면서 좋아하는 와인 한 잔 음미하는 것도 찬란한 5월을 보내는 좋은 방법 중의 하나이리라.

와인 축제 이야기(2)

로마 시대 축제

그리스의 전기 작가 플루타르코스(AD 46~120)현명한 사람들에게는 매일이 축제다!’ 라고 했고 이를 이어받아 미국의 시인 에머슨(1803~1882)삶은 축제다, 단 현명한 사람들에게만!’이라고 했다.

축제의 기원과 그리스 축제에 관한 지난 칼럼에 이어 이번에는 로마시대로 가보자.

로마시대에는 바카날리아(Bacchanalia)라는 축제가 있었다. 바로 그리스의 디오니소스의 로마신에 해당하는 바쿠스에 대한 숭배 의례를 통해 그를 기리는 축제였다.

엄밀히는 종교 축제였는데 속을 들여다보면 종교를 핑계 삼아 당시 사람들이 맘 놓고 즐기자는 방향으로 발전했다는 생각이 든다. 여기에 참가한 신도들은 와인을 마시고 황홀한 상태에서 광적으로 노래도 하고 춤도 추고 행진도 했었다고 할 정도니까

이 바카날리아는 어떻게 로마에서 생겨났을까? 그 전파와 확산과 부침의 과정을 살펴보자.

에트루리아 지역 (로마 바로 위쪽(짙은 녹색)에서 시작하여 그보다 더 위와 아래쪽(옅은 녹색)과 코르시카섬까지 확산)

고대 그리스의 디오니소스 숭배 의식과 그 관련 종교가 BC 200년 경에 그리스의 식민지였던 남부 이탈리아와 로마 북쪽의 에트루리아(오늘날의 토스카나, 움부리아, 라찌오 지역)의 두 경로를 통해 로마에 전해진다.

바카날리아는 로마 남쪽의 캄파니아 출신인 바쿠스 신전의 한 여사제(Paculla Annias)에 의해 로마의 티베르강 하류 아벤티노 언덕(Abentine Hill) 기슭의 삼림 지역에 비밀리에 도입되는데 이곳에는 디오니소스 관련 신화 중 디오니소스의 어머니인 세멜레(로마에서는 스티물라(Stimula)라고 불렀다고 함.)의 성소가 있었다.

그런데 이 지역은 평민 거주지역이자 다민족이 거주하는 지역이었고 로마의 토착신으로서 와인과 풍요의 신이자 평민과 자유의 수호신인 리베르 파터(Liber Parter)의 성전이 있는 곳이기도 했다. 처음 도입되었을 당시에 바카날리아는 이 지역에서는 낮에만, 그것도 여성들만을 대상으로 1년에 단지 3일만 의식이 거행되었다고 한다.

반면 로마 북쪽의 에트루리아 지역에서는 남자와 여자가 모두 참여하는, 와인과 제사와 점술과 축제가 결합된 형태로 이 축제가 진행되었다고 하는데 이것이 앞서 언급한 로마의 평민과 다민족 지역의 종교축제와 결합하면서 한 달에 5, 밤에 의식을 행하고 남녀노소는 물론 모든 계층의 사람들에게 개방하는 형태로 발전하였다.

이렇게 되자 이 제사와 축제행사가 성 폭력과 성 문란 사태를 야기하게 되었고 입교자가 이 의식에 반대하거나 거부하는 경우 배교자로 몰아서 제거하는 사태로까지 전개되었다.

오늘날로 보면 사이비 종교화되어 사회 규범과 미풍양속을 해치는 의식 행위까지 하게 된 셈이다. 이것은 당시 로마의 사회규범에도 어긋나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로마의 상류층과 귀족층까지 이 문화가 전파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것이 사회적 문제로 공식화된 것은 당시에 이곳에 초기에 입교했다가 탈퇴했던 한 창녀(Hispala Faecenia)가 배신에 대한 징계를 두려워한 나머지 이런 사실들을 당시 로마 집정관(Postumius)에게 고발하면서부터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집정관이 사회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관련자 약 7,000명을 색출, 체포하여 그들 대부분을 처형하였는데 이런 사실은 로마 역사학자인 리비(Livy)(BC64/59 ~ AD 12/17)의 기록을 통해 전해졌다.

티투스 리비우스 (Livy).

그런데 사실 그는 BC 1세기경의 사람이라서 실제 바카날리아가 로마에 도입되고 융성했던 시기와는 약 200년이라는 차이가 있어 후세의 학자들이 그의 기술 내용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여하튼 흥미로운 것은 그 집정관은 BC 186년에, 문제가 된 이 축제를 완전히 금지시킨 것이 아니라 일부 규제를 통한 개혁을 도모하였다는 것이다.

바카날리아의 규모와 조직, 사제 제도 등을 통제하는 법을 원로원에서 제정하고 이를 어길 시에는 사형에 처한다는 엄벌규정까지 두었는데 그 규제의 내용은 기존의 숭배 장소와 지부 등은 해체시키고 모임별로 남자 2명에 여자 3명만이 모인 집회이되 그것도 사전에 원로원의 승인을 얻어야 하고 남자가 바쿠스의 사제직을 맡는 것을 금지시키는 식이었다.

이는 이미 오랜 세월에 걸쳐 민간에서 인습처럼 정착된 것을 지나치게 억누를 경우 지하세계로 들어가서 더 큰 사회 문제를 야기시킬 수도 있을 것 같으니 이것을 오히려 양지로 끌어내서 건전한 방향으로 유도하려고 했던 것이 아닌가라고 풀이해 볼 수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당시 상황이 정치적으로 한니발이 알프스를 넘어 로마 근처까지 쳐들어왔던 2차 포에니 전쟁(BC 218~203)을 통해 심한 위기 상황을 겪은 후라서 땅에 떨어진 지배세력(원로원)의 권위를 되찾고자 원로원이 로마와 그 동맹국들에 대해 시민과 종교에 대한 결정권을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그렇게 한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또 다른 해석은 이 축제가 원래 여성들 위주로 진행되었던 바 가부장적인 로마의 가족 제도의 규범에 어긋났기 때문에 규제를 했다는 것과 이 축제에 노예와 가난한 사람들까지 참여하게 되어 혁명 세력화하는 것을 당시 집권층이 두려워했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다.

여하튼 이렇게 규제를 받게 되어 변경된 축제는 나중에는 리베랄리아(Liberalia) 축제로 통합된 것으로 학자들은 추정한다.

바쿠스, 리베르, 디오니소스는 로마 후기 공화정(BC 133년 이후)에서는 동일 신으로 추앙되었고 이들에 대한 신비스런 숭배와 의례는 로마의 초기 황제 시대(BC 27~AD 284)까지도 지속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축제는 로마 식민지까지 널리 퍼져나가서 AD 400년경 아우구스티누스 시대에는 카니발과 같은 거리 행진 형태로 변형되어 남게 되었다고 한다.

리베랄리아(Liberalia)는 리베르(Liber)라는, 로마 토착 신화에 나오는 번식과 성장을 주관하는 전원의 신과 그의 부인인 리베라(Libera)라는 신에게 봉헌하는 축제인데 매년 317일에 개최되었다.

토가.

이 축제는 당시 15,6(14세라는 설도 있다)의 소년들이 어릴 때부터 악으로부터 보호해준다고 하여 목에 두르고 있던 부적을 떼고 어른들이 입는 토가를 입는 성인식을 겸하는 성격도 띄었다.

이 축제는 행진, 제사, 야한 노래들과 나무에 디오스소스 가면들을 걸어두는 등의 행사로 구성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리베르는 자유로운 아버지라는 의미의 리베르 파터(Liber Pater)라고도 하는데 케레스(데미테르), 리베라(페르세포네)와 함께 아벤티노 언덕의 세 신중의 하나로 평민들의 수호신이었다.

이 리베르라는 로마 신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그리스의 디오니소스와 동일한 신이고 리베르의 별칭이, 우리에게 익숙한 와인의 신인 바쿠스인 것이다.

자유를 주는 신이니 축제에는 빠질 수 없는 와인을 마시고 근심 걱정에서 자유로워진다는 것을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겠다.

이런 평민의 신과 대비되는 것이 로마의 카피톨리노 언덕의 세 신인 유피테르(제우스), 유노(헤라), 아테나(미네르바)로 이들은 귀족들의 수호신이었다. 로마시대에 귀족들이 섬기는 신과 일반 평민들이 섬기는 신이 따로 있었다는 것도 흥미롭다.

이 바카날리아 등의 축제에 관한 내용들은 벽화나 석관의 부조 등으로 남아 있는데 이것이 르네상스 시대 이후에는 미술계에서는 야외 풍경을 배경으로 사람들이 흥청망청 거리며 반라 혹은 전라의 모습으로 파티를 하는 장면들로 묘사되어 나타난다.

이런 장면을 그린 화가로는 티치아노, 루벤스 등이 있다. 결국 바카날리아의 의식과 이야기가 미술 작품으로 승화된 것이다.

(Pan) 조각상 앞에서의 바카날리아 니콜라스 푸생작 (Bacchanal before a Statue of Pan, 16311633)

안드로스 사람들의 바카날리아 티치아오 베첼리오 작 (The Bacchanal of the Andrii 1523~26, 유화)

인생에서 축제는 중요하다. 개인적, 사회적 에너지 충전의 근원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쾌락 그것도 사회의 집단적 유흥도 좋으나 개인적, 사회적 건전성의 한계선을 넘지 않는 선을 유지한다는 것이 어렵고 그 건전성의 기준도 시대마다 조금씩 달라진다는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축제의 사회적 건전성의 경계선은 어디까지 일까?

오늘날에는 과거 로마시대처럼 건전한 사회적 규범을 무너뜨릴 정도로 무어라 마셔라 하면서 흥청망청대는 식의 바카날리아는 아니지만 유쾌하게 놀고 즐기는 개념의 축제 명칭으로 바카날리아가 여전히 활용되고 있기는 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