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마음은 어떻게 움직이는가

벌레 이야기를 읽고(영화 밀양의 원작)

자한형 2024. 10. 22.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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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레 이야기를 읽고/태의빈

- ‘의지섭리에 대한 나의 생각 -2022.07.11.

서론

이청준 작가의 책, ‘벌레 이야기를 읽게된 것은 안동대 글쓰기 모임에서 이 책을 선정했기 때문이다. 평소에 책을 잘 읽지 않을뿐더러 종교, 특히 교회와 관련된 건 드라마든 영화든 일체 관심을 두지 않았다. 왜냐하면 난 성인이 되기 전까지 교회를 꾸준히 다닌 모태신앙이었다. 그리고 현재는 교회를 다니고 있지 않는다. 우리 집안은 아직도 나를 제외한 모두가 독실한 신자이다. 그렇지만 나는 신의 존재에 대해서 잘 모르겠다. 분명 세상에 존재하는 것 같은데, 별로 이해하고 싶지 않은 존재이다. 이런 나는 종교인의 입장에서 변절자이며, 죄인일 것이다. 그렇다고 당분간 교회를 다시 다닐 생각은 없지만, 마음 한구석엔 죄책감 역시 남아있다.

때문에 그것과 관련된 생각 그 자체를 중단한 지 오래인데, 오랜만에 개신교와 관련된 책을 읽으니 마음이 정말 답답하였다. 차라리 사이비와 관련된 내용이었으면, 사이비를 욕하면서 읽었을 것인데 책을 정독해보니 사이비와 관련된 내용보다는 대체로 개신교의 현실고증을 정말 잘 반영한 것 같았다. 이 책의 등장인물 중 하나인 김집사의 말들 역시 내가 살면서 무수히 많이 들어온 말들이었으며, 이에 대한 아내의 말과 행동 또한 교회를 안 다니기 시작할 무렵의 나와 닮아 있어 많은 공감이 갔다. 그래서 지금부터 책 속의 나와 닮아 있었던 그 상황에 대해서 하나 둘 풀어나가며 내가 변절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핑계를 대 보고자 한다. 왜냐하면 그래야만 죄책감에서 비롯된 이 가슴의 답답함이 조금 가실 것 같기 때문이다.

본론1

그러기에 앞서 이 책의 내용을 개괄하여 설명해 보겠다. 먼저 사건의 비극은 부부의 아들 알암이가 실종되면서 시작된다. 부부의 두어 집 건너에서 이불집을 운영하는 김집사라는 인물은 사건이 일어나기 전부터 꾸준히 아내에게 개신교를 권유해오던 인물이었는데, 평소의 아내는 그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냈지만, 아들이 실종되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김집사와 함께 교회를 다니며 헌금을 내기 시작한다. 그러한 노력이 무색하게 아들은 실종된 지 2달 만에 변사체로 발견된다. 아내는 교회 다니는 것을 중단하고 삶의 의지를 잃은 채 실성하여 지내게 된다. 그것도 잠시, 그녀는 범인에 대한 복수심으로 삶의 의지력을 가지고 다시 일어서기 시작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범인이 잡히고, 보호당국이 범인을 보복으로부터 보호하자 그녀의 복수심은 갈피를 잃었다.

아이의 실종 사건이 일단락될 때까지도 김집사는 중간 중간 찾아와 종교를 권유해왔는데, 아니나 다를까 김집사가 또 찾아와 아이의 영혼을 위해, 애 엄마 자신의 영혼을 위해 범인에 대한 깊은 원망을 가지지 말라고 말하며 종교를 권유했다. 아내는 처음엔 귀 기울여 듣지 않다가 아이의 영혼 구원에 마음이 움직여 교회를 다시 나가게 된다. 하지만 김집사는 아내가 교회를 다니기 시작하는 데서 만족하지 않고 주님의 사랑이 임하기 위해 죄인을 용서해야 한다고 설득하기 시작했다. 아내는 처음엔 범인을 미워하는 마음만 있었지만 교회를 다니면서 신앙심이 쌓임에따라 그 범인을 불쌍히 여기고 용서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범인을 찾아가 당신을 용서했노라 말하려고 교도소를 찾아가지만, 이미 범인은 아내에게 용서받기 전부터 살인에 대한 용서를 받은 상태였다. 그가 교도소에 들어오면서부터 믿기 시작한 그의 하느님께로부터 말이다. 오히려 범인은 자신을 향한 아내의 원망과 증오를 용서하겠다고 말했다. 여기서 아내는 큰 충격을 받고 다시 아이가 죽었을 때의 직후처럼 눕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살인자는 단순히 살인자였어야만 했는데, 그는 아내가 용서하기 전부터 하느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았고, 너무나도 평안한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김집사는 이 모든게 하느님의 깊으신 섭리라고 말하며 범인을 용서 못 하는 아내를 믿음이 부족한 까닭이라고 치부하였지만, 아내는 오히려 신앙심이 쌓인 상태로 주님을 믿었기에 주님의 섭리와 인간적인 마음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절망감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하고 만다.

본론2

알암이가 변사체로 발견됐을 때부터 결말이 밝지는 않을 것이라는 예상은 어렴풋이 했었지만, 책을 덮고 난 후 더욱더 불유쾌한 감정이 들었다. ‘차라리 범인이 신을 믿지 않고, 반성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더라면 아내가 이렇게 극단적인 선택은 하지 않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어쨌거나 앞서 잠시 언급했듯이 책의 내용 중 나의 상황과 닮았다고 느꼈던 부분은 크게 두 부분이 있었다.

첫 번째 부분은 개신교 신자들은(이외의 사이비 포함) 일반인들이 정말 힘들 때를 공략하여 신께 의지하도록 만든다는 점이다. 물론 작중 인물인 김집사는 신실한 신자로 아내가 힘들기 이전부터 꾸준히 종교를 권유해 왔지만, 아내가 가장 힘들 때 그 심리를 가지고 아내에게 다시 한 번 접근했다. 성경책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태복음 11:28)”,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함이라(이사야 41:10)” 이렇듯 개신교 신자는 심적으로나 물적으로나 힘들고 가난한 사람을 구원의 타깃으로 삼는다.

이 성경 구절은 아이의 실종 직후 아내에게 종교를 권하던 김집사의 말과 특히나 닮아있다. “우리 구세주 예수님 앞으로 나오세요. 그래서 그분의 사랑에 의지하도록 하세요. 주님께선 모든 힘든 이들의 무거운 짐을 함께 져주십니다.(벌레이야기 51p)”, “주님 앞으로 나오세요. 주님은 알암이 엄마처럼 근심 걱정으로 마음을 앓는 사람들과 아픔을 함께하고 그 짐을 덜어주시기 위해 사랑으로 이 땅엘 오셨던 분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주님께로 나아가 그분의 끝없는 사랑의 품속에 슬픈 영혼이 의지하도록 해야 해요.(벌레이야기 52p)”

나는 세상에 인간의 의지만으로 되지 않는 일이 분명 존재하지만, 그렇다고 눈에 보이지 않는 신이 그 문제를 해결해줄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결국 그 문제를 해결하고 이겨나가는 주체는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삶이 정말 고되고 괴로울수록 의지할 대상을 외부에서 찾게 되는 것 또한 이해가 간다. 나 역시 저 성경 구절에 위안 받으며 정말 신께 의지하며 마음을 다하던 시절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를 회상하자면 그때는 한창 예민할 고등학교 2학년 기말고사 준비 기간이었고, 절친에게 배신당하고 그녀를 중심으로 유언비어가 일파만파 퍼져나가 세상에서 가장 힘든 시기이기도 하였다. 힘든 일이 한꺼번에 닥쳐오자 사건의 해결책을 찾기보다는 세상에서 고립됐다는 생각에 강하게 빠져 구명줄을 종교에서 찾았다. 주님이 나와 함께한다는 사실을 굳게 믿었었고, 그래서 나는 혼자가 아니라고, 세상에 친구 같은 것은 필요 없다고 자기 최면을 하며 살았다. 더하여 내게 이러한 고난을 줌으로써 신을 믿게 해줬다고 신께 감사하며 살았다. 하지만 그런다고 현실의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오히려 자기 최면에 억눌려왔던 나의 진짜 마음의 외로움이 커질 뿐이었다. 결국 사건을 해결해준 건 신에게 의지하는 것이 아닌 용기를 가지고 문제에 직접 부딪히는 방법이었다. 그래서 문제가 해결되고 마음이 안정되자 신께 감사하고자 하는 마음보다는 결국 내가 해결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설상 이 마음은 사탄이 불어넣은 교만의 마음일지라도 신은 사건이 해결되기까지 눈에 보이지도 않았고, 직접 말을 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사람이 이성적이지 않을 때 파고드는 종교에 대해서 나는 대체로 부정적인 입장이다.

두 번째 부분은 섭리와 관련된 부분이다. 섭리라는 단어는 작중 김집사가 몇 번이고 언급했던 단어이다. 관련된 그의 말을 소개하고자 한다. “하느님은 전지전능. 우주 만물을 섭리하고 계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그분의 독생자이십니다.(벌레이야기53p)”, “주님의 사랑과 오묘한 섭리는 우리 인간의 지혜로는 헤아릴 수가 없어요. 이번에 알암이가 당한 일만 해도 우리 인간들의 눈에는 슬픔뿐이지만, 거기에 어떤 주님의 섭리가 임하고 계시는지도 알 수 없어요(벌레이야기 55p)”, “하느님의 깊은 섭리의 역사를 우리 인간으로는 참으로 헤아릴 수가 없다지 않았어요. 알암이의 슬프고 불행한 사고가 어머니에게 주님을 영접케 할 은총의 기회일 줄은 누가 알았겠어요

섭리가 도대체 뭐길래...’ 김집사의 구절을 읽을 때마다 나는 이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섭리라는 단어는 내가 실제로 교회를 다니며 목사님으로부터, 그리고 교회의 집사인 우리 부모님으로부터 수없이 들어온 단어이다. 교회를 다니다보면 다음과 같은 키워드를 많이 듣는다. ‘섭리’, ‘고난’, ‘주인되신 예수님…․ 쉽게 말하자면 전지전능하고 모든 걸 아시는 예수님은 주인이고 우리는 그의 충실한 종이기 때문에 그의 말씀과 섭리를 따라야만 하고, 주님이 내리는 고난 역시 오묘한 섭리 가운데 존재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모든게 신의 섭리 속에 있다면 악이라는 걸 만든 것도 신의 섭리에 있을까? 왜 악을 만들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중세의 교부철학자인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미 수천년 전에 내놓았었다. 그는 악의 존재를 부정한다. 그에 따르면 신은 전지·전능·전선이기 때문에 신의 계획 속에서는 질서와 조화만 있을 뿐 악이란 절대 존재할 수 없다.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적인 악은 신이 자신의 형상을 인간과 공유하기 위해 부여한 자유의지에 대해 인간이 이를 잘못 행사함으로써 일어난 결과이다. 즉 인간이 신의 은총인 의지의 자유를 남용하여 자연적인 인간의 본성을 왜곡할 때 악이 생겨나는 것이다. 때문에 인간이 선을 회복하게 되면 악은 자연스럽게 사라진다.

하지만 나의 의문은 여전히 남아있다. 과연 자유의지라는 게 진실로 존재할까? 라는 생각 때문이다. 인간의 속마음과 과거는 물론 미래까지도 아시는 전지전능하신 주님이신데, 인간이 악을 행하는 걸 예측하지 못할 수 없을 것 같다. 만약 인간이 악을 행하고 회개를 통해 절대자와 가까워지게 하려는 것이 주님의 목적이라면, 인간이 악을 행하는 것조차도 신의 섭리에 속하는 게 이론적으로는 더 맞을 것 같다. 하지만 나의 가정이 옳다면, 모든 것은 신의 섭리에 속할 뿐 결국 자기 자신을 원인으로 하는 자유의지는 없게 되는 것이다. 왜 인간을 너무도 사랑하는 신이 악을 만들어 인간을 괴롭게 만드는 것일까? 물론 이것이 단지 아집일 뿐일 수도 있지만, 여기에 대한 답을 아직도 찾지 못했다.

여하튼 섭리에 대한 나의 생각은 대체로 부정적이다. 더군다나 개신교는 금욕주의를 주장하는데 인간이 욕구를 느끼게 만든 것 역시 신이 아닌가? 섭리를 인간의 지혜로 온전히 이해하지 못 한다지만, 그렇다면 죽어서야 이해하게 된다는 것인가? 현재 살아가는 건 하늘의 나라에서가 아닌 이 땅 위에서인데 말이다.

결론

글을 마치며 왜 책 제목이 벌레 이야기일까? 의문이 들었다. 책 내용 어디에도 벌레라는 단어를 직접적으로 언급한 곳은 없었다. 그래서 벌레라는 건 은유적인 표현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벌레가 아내를 말하는 건 아니었을까 조심스럽게 추측해본다. 예를들어 누구나 한 번쯤 개미를 장난삼아 밟아 죽이던 어린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개미는 단지 매일 최선을 다하면 살아갔을 뿐이지만, 어느날 우연히 인간의 눈에 띄어 죽는다. 개미의 입장에선 거대한 인간은 자신을 죽일수도 살릴수도 있는 신과 같은 존재일 것이다. 그런데 그 신에 의해 죽는다면 그것이 개미의 운명인 것이다. 개미의 생사는 인간에게 달렸지, 자신의 의지만으로 밟혀 죽을 운명이자 섭리를 거스를 수는 없다. 때문에 밟혀 죽을 운명의 개미는 감히 인간을 원망해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그것이 섭리이기 때문이다. 아내에게 있어서 주님이란 존재는 권병을 지닌 존재였을 것이고, 아내는 개미와 같은 벌레와 다를게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제목이 벌레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하지만 난 이 이야기 속의 아내처럼 벌레와 같은 삶이 아니라, 마키아벨리의 비르투를 발휘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비르투란 운명에 대항하려는 의지를 뜻한다. 그래서 비르투를 발휘한다는 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운명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그것을 최소화시키는 것을 말한다. 예를들어 강이 범람하는 것은 인간의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은 제방 시설을 갖춰 그 피해를 최소화할 수는 있다. 신이 실지 존재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신에 나의 모든 걸 의지하면서 주어진 운명대로만 살고 싶진 않다. 그래서 운명의 절반이 운명의 여신의 손에 있다면 나머지 절반은 인간이 비르투를 키움으로써 스스로 통제할 수 있다고 믿은 마키아벨리처럼 나 역시 나의 운명의 주체가 되어 살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