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생존기
IMF생존기 /소망이
늘 양털같이 포근한 삶을 살 줄 알았다.
2018년 '국가 부도의 날' 영화를 보며 우리 가족이 겪은 일들이 개인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IMF 시절 많은 사람들의 슬프지만 일반적인 이야기인 것을 알고 위로를 받기도 했고, 이것을 조금 더 일찍 깨달았다면 하는 아쉬움도 함께 느꼈다. 나만의 실패와 아픔이 아닌 것을 깨닫게 될 때의 그 위로를 함께 나누고 싶어 이렇게 마음 모아 글을 작성한다. 더 나이 들기 전에 한 번은 정확히 뒤돌아 보고 기록해 두고 싶은 그 이야기를 이곳, 내가 좋아하는 브런치에 담아 본다.
아빠는 00은행 지점장이셨다. 내가 고등학생 때 아빠는 은행에서 지점장 대상 호주 연수에 다녀와 부드러운 양털카펫, 엄마의 탄생석이 박힌 목걸이 등을 사 오셨고, 캥거루, 마오리족 등 이국적인 모습이 담긴 사진을 많이 찍어 오셨다. 아빠가 현금으로 대출 하나 없이 일시불로 산 아파트 거실에는 아빠가 연습하려고 깔아 놓은 미니 골프 연습 매트, 골프채, 골프공이 있었고, 아침마다 운전기사분이 아빠를 태우러 오셨다. 난 체험학습을 가게 되면 당연히 새 옷을 사 입고 가는 것이라 생각하며 자랐다. 심지어 엄마는 내가 아침을 못 먹고 등교하면 내가 좋아하는 해물탕을 끓여 와서 살짝 주고 가셨다. (내가 살던 아파트는 학교 바로 앞이어서 걸어서 3분 정도 걸렸다는 것을 감안해도 엄마의 이 수고는 사실 엄청난 것이었는데, 나는 매우 당연하게 여겼다. 늘 그러셨으니까)
늘 이렇게 살아갈 줄 알았다. 양털같이 포근한 삶. 아빠, 엄마의 기대와 사랑, 그리고 따뜻한 돌봄을 받으며 나는 공부를 좋아하고 잘하는 딸로, 구김살 없는 착한 크리스천으로, 그렇게 해맑게 살아갔다. 반에 한 친구는 네가 너무 해맑고 착해서, 본인이 화를 내도 화로 되받아 치지 않아서 미워할 수도 없는 게 너무 짜증 난다고 쪽지를 보내기도 했다. 이게 무슨 소리지? 내가 착하다는 건가? 쪽지에 담긴 친구의 깊은 속마음을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순수했다. 고등학교 3학년 때까지~ 공부가 재미있었으니 별다른 스트레스 없이 수능 준비를 했고, 월등히 남는 점수로 서울에 있는 00대학교에 수능 특차로 장학금을 받으며 입학했다. 입학하기 전에 아빠, 엄마는 함께 서울에 가서 대학교 앞에 엄청 많이 있는 옷가게와 신발 가게를 돌아다니며 파란빛 도는 코트, 신발, 구두 등 여대생 느낌이 물씬 풍기는 옷과 신발을 사주셨고, 난 이때도 너무 당연히 받았다. 물론 "감사합니다."라는 인사는 잊지 않고 했지만, 부모라면 당연히 자녀가 대학생이 되면 이렇게 사주시는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어릴 때부터 늘 그러셨으니까~
그러나 이런 양털같이 포근한 나와 우리 가족의 삶은 1997년 국제 통화 기금(IMF) 구제 금융 사태 이후로 급변했다.
2. 100만 원으로 앞으로 살 수 있나?
어제와 비슷한 하루를 보내고 평소처럼 비슷한 대화를 엄마와 나누고 있는데 엄마가 이야기를 꺼내셨다. 아빠가 다니시는 00은행에서 지금 희망퇴직 신청을 받고 있다고, 자원해서 명예퇴직을 하면 퇴직금을 조금 더 준다고, 그런데 엄마는 그냥 아빠가 다니면 좋겠다고~ 이런 일을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 나도 엄마와 깉은 마음이었다. 그냥 희망퇴직신청서 안 쓰고 버티며 다니시다 보면 없던 일처럼 지나가지 않을까?라는 마음.
그렇게 아빠는 희망퇴직 신청을 하지 않고 계속 출근하셨고, 결국 권고사직을 당하게 되셨다. 아빠 나이 48세. 지금 내 나이와 거의 비슷한 때 아빠는 20년 정도 일하신 00은행에 더 이상 출근을 할 수 없게 되셨다. 퇴직금으로 3억 정도 받으셨던 것 같다.
3억X0.1=30,000,000원
매달 250만 원
10퍼센트 이율로만 계산해도 매달 250만 원이라는 이자가 들어온다.
아빠는 아마 1억 정도는 대학을 입학한 나와 곧 대학에 갈 고2동생을 위해, 그리고 혹시 모를 일들을 위해 쓴다 생각하고 나머지 2억으로 이자를 계산하셨겠지.
2억X0.1=20,000,000원
매달 166만 원
그중에서 100만 원으로 엄마에게 생활할 수 있냐고 물어보신 거였겠구나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본다.
엄마는 생활할 수 없다고 답했고, 아빠는 이 대답을 듣고 무엇인가를 결심하게 된다. 이 결심이 이후 우리 가족을 구렁텅이로 몰 줄 알았다면 엄마는 100만으로 어떻게든 맞춰서 살 거라고 대답하셨을 거다.
돌아보니 안타깝고 또 안타깝지만 몰랐으니까 엄마도 그렇게 대답했고, 아빠도 그렇게 구렁텅이에 첫발을 내딛으셨다.
권고사직을 당한 후, 사립대학에 들어간 나와 이제 일 년 후 대학에 들아갈 동생, 그리고 100만 원으로 살 수 없다고 말한 엄마를 위해 아빠는 돈을 벌기로 결심했다. 아빠가 자신 있는 방식으로.
3.선물투자는 선물이 아니었다.
그건 바로 '선물투자'였다.
당시엔 지금처럼 증권회사 앱도 없고, 정보도 풍성하지 않지만, 아빠는 은행에서 몇 년간 증권계 업무를 맡아하면서 큰 수익을 봤던 것을 토대로 돈을 벌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IMF시기는 주식시장도, 선물시장도 정상이 아니었다. 아무런 규칙 없이 미쳐 날뛰는 선물지수를 아빠는 평소의 성실함과 끈기로 매일 아침 엄마가 싸주시는 도시락을 들고 PC방에 출근하여 하루종일 연구했다. 그래프의 원칙을 알아내어 투자하면 최소한 월급정도의 수입을 벌 수 있다는 희망찬 마음을 가지고.
아빠는 저녁에 돌아오시면 하루종일 그래프를 보며 연구해 만든 아빠만의 규칙을 다시 복습하며 복기의 시간을 가졌다. 나와 엄마는 그런 아빠의 모습을 보며 함께 희망을 가졌다. 그러나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는 데는 그렇게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수익을 10만 원 봤다고 좋아하는 날보다 2~3배 손실을 보는 날이 더 많았고, 그런 날 아빠의 표정은 보기만 해도 마음이 무거워질 정도로 수심이 가득했다. 나와 엄마는 서서히 불안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고, 엄마는 용기를 내어 아빠를 말려도 보았지만, 그사이 선물투자로 이익과 손실을 반복해서 경험한 아빠는 이 길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며 화를 내셨다. 그렇게 우리는 서서히 선물투자의 늪으로 함께 빠져 들었다.
4. 엄마는 결국 직장암이 발병되셨다.
매일 아침 희망에 차서 도시락통을 들고 가던 아빠는 한 달, 두 달 시간이 흐르며 점점 초조해지고 예민해지셨다. 엄마는 그때 아셨던 것 같다. 이 길은 구렁텅이로 빠지는 길임을~
엄마는 여러 번 진심을 다해 간절히 말리셨지만, 이미 돈을 잃고 잃은 아빠는 이 길 외에 다른 길이 없다는 생각에 엄마의 말을 믿음 없는 말이라고 일축하며 계속 선물투자를 하셨고 총 7년을 하셨다.
처음엔 살던 아파트에서 나와야 했다. 아빠가 00은행에 다니며 현금을 모아 산 아파트. 1층에 살았는데 거실 앞에 아빠가 포도나무를 심으셔서 여름이면 작지만 보랏빛의 포도가 열리던, 학교까지 걸어서 3분 거리여서 고등학교 때 나의 수면시간을 책임져 주던 고마운 아파트는 헐값에 팔렸다. 아빠는 그 돈으로 선물투자를 계속하셨고, 손실을 보셨으며 우리는 훨씬 작은 빌라로 이사를 갔다. 이미 이때즈음 아빠가 받은 퇴직금 3억은 다 손실을 봐서 사라졌고, 아빠는 카드를 최대한 많이 만들어 최대한도로 받아 까드깡을 하셔서 생긴 돈으로 계속 선물투자를 하셨다. (이 당시 신용카드를 어찌나 무분별하게 발급해 주었는지, 지금도 이 당시 신용카드를 무분별하게 발급한 것이 신용불량자를 많이 양산한 대표적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난 4년 동안 매주 과외를 3~4건 하며 나의 용돈과 우리 집의 기본 생활비 중 일부를 보탰고, 등록금을 아끼기 위해 교회 봉사하는 시간, 예배드리는 시간 외에는 공부에 매진해서 대부분의 학기에 부분 혹은 전체 장학금을 받으며 학교를 다녔다. 장학금을 못 받던 학기는 아빠가 친척 분들에게 부탁해 돈을 빌려 내주셨다. 기숙사는 더 멀리 지방에 사는 학생들에게 밀려 들어가지 못했고, 자취할 돈은 없었기에 4년간 수업이 있는 날에는 늘 왕복 4시간, 푸시맨이 밀어야 간신히 들어갈 정도의 숨 막히는 지옥철을 타고 등교를 했다. 내가 다니는 대학교는 아침 8시 교양필수과목 수업이 많아서 대학생인데 새벽 5시 30분에 일어나야 되는 날이 자주 있었다. 그리고 이때 마침 당산철교가 붕괴되고 다시 건설 중이어서 원래 전철노선보다 훨씬 돌아서 가야 했다.
과외비에서 생활비를 드리고 남은 돈은 딱 전철비와 점심 식비 정도였다. 한 번은 같은 전공 친구들끼리 모임을 하고 떡볶이를 먹으러 가자고 했는데, 떡볶이 사 먹을 몇 천 원의 여유가 없어서 다른 일이 있다고 둘러대고 집에 돌아간 적이 있다.
빚은 계속 늘고 늘어 어느덧 3억의 퇴직금을 날리고, 다시 3억 정도의 빚이 생겼다. 그것도 질이 나쁜 빛, 카드깡을 했으니 카드 회사에 진 빚이 대부분이었다.
엄마는 이렇게 계속 불나방처럼 선물투자를 빛이라 생각하고 계속하는 아빠를 더 이상 말리지 못하고 기도만 하셨다. 그러던 어느 날 화장실에 다녀온 엄마는 떨며 말씀하셨다.
"딸, 변에 피가 섞여 있어. 저번엔 그냥 그런가 했는데 계속 그러네. 병원에 가야 될 것 같아."
병원에 가니 직장암 2기 정도 됐고, 수술 후 방사선/항암치료를 받으셔야 했다. 아슬아슬하게 항문은 보존할 수 있었다.
한 번도 경험해 보지 않은 일들이 계속 밀려왔다.
아빠는 빚에 쫓기니 죽고 싶지만, 괜히 잘못 건물에서 떨어지면 죽지 않고 장애만 입어 가족을 더 힘들게 할까 봐 그러지도 못하신다고 말하셨다. 나는 정말 100만 원이라도 매달 벌어야 되겠다 생각해 4학년 때 일찍 회사에 취직했다. 벤처 붐이 일 때 아는 분이 반도체 관련 벤처를 창업해서 C/S 업무 보는 일을 맡아하며 월급을 받아 집의 생활비에 보탰고, 학교는 양해를 받아 시험 보러만 등교했다. 그러나 이 벤처 붐도 사그라들어 다닌 지 10개월 만에 회사는 문을 닫았고, 우리 집은 절박하게 빚만 많고, 생계비는 0원인 집, 그럼에도 아빠는 계속 어떻게든 돈을 빌려 선물투자를 하시고, 엄마는 직장암에 걸려 항암치료를 받는 그런 집으로 전락했다. 어떻게든 내가 돈을 벌어야만 하는 그런 상황으로 치달았다.
5. 나도 버티다 버티다 조울증에 걸렸다.
4인 가족이 밥을 먹고살기 위해서는 단돈 100만 원이라도 벌어야 했다. 아직 졸업이 일 년 남았지만 교수님들께 양해를 구해서 시험 보는 날에만 학교에 등교하기로 하고 양재동에 있는 직장에 취직했다. 내가 하고 싶은 직업인 교사와 상관없는 반도체 수출 회사의 직원으로~
그나마 전공과의 연결고리는 외국에 있는 고객들에게 영어로 이메일을 보내야 된다는 정도였다.
벤처기업이 부흥했다가 점점 쇠퇴할 때여서 출근한 후로 한 달 한 달이 지날 때마다 일거리가 줄어들었지만, 우리 집에는 나의 월급이 너무나 절대적으로 필요했기에 월급이 안 나올 때까지, 쫓겨날 때까지 버티자는 마음으로 일이 좋으나 싫으나 버텼고, 결국 10개월 만에 회사가 문을 닫아 나와야 했다.
그 후로 대학 졸업을 한 후, 영어 유치원에서 영어 수업을 했다. 열악한 환경이어서 수업이 끝나면 아이들이 사용한 화장실 청소까지도 교사인 나의 몫이었다. 몇 달을 일하다가 어린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은 나에게 잘 맞지 않는 것을 깨닫고 기간제 교사로 중학교에 지원을 했고, 합격하여 영어 유치원 일을 그만두었다. 그래도 이때 여러 명의 원어민 교사들과 교무실에서 대화할 일이 많아서 영어가 늘었다. 불행 중 감사한 일 찾기!
기간제 교사로 일 년 이상 근무하는 경우도 많지만, 나는 여름방학 때에는 교회 수련회, 해외단기선교 등을 참석하고 싶어 단기로 근무하는 학교를 찾았고 그렇기에 중학교1학년부터 고등학교 3학년까지 다양한 학생들을 만나 가르쳤고, 지역도 수원, 안산, 평택 등 경기도 여기저기를 버스로, 기차로, 전철로 다녔다.
이렇게 일하며 번 돈에서 내 용돈만 제하고 엄마를 드렸고, 엄마는 그 돈을 또 쪼개고 쪼개 생활비를 하셨다. 아빠는 여전히 내가 번 돈의 일부, 그리고 빛을 낸 돈으로 계속 선물투자를 하셨다.
2002년 겨울, 내가 너무나 가고 싶어 하던 사립 00 학교에 드디어 일 년 영어 기간제 교사 자리가 났다. 너무나 간절히 원하며 기도했기에 공고를 보는 순간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이제 나도 내 꿈을 향해 걸어갈 수 있구나! 간절한 마음으로 필요한 서류를 준비하고 자기소개서를 작성하여 우편으로 보냈고, 1차 서류합격 통지를 받았으며, 2차 면접 통과를 해서 2003년 3월부터 기간제 교사로 근무할 수 있게 되었다.
너무나 꿈에 그리던 자리. 꿈을 이뤄도 끝이 아니란 것을 그때는 몰랐다. 몰랐기에 너무 힘들었다.
분명 내가 간절히 바라던 자리에 왔는데 똑똑한 고등학생들을 이른 아침(0교시가 그때는 있었다. 아침 7시 40분부터 수업 시작)부터 가르치는 것도, 나이차이도 얼마 안 나고 카리스마도 없는 내가 짓궂은 남학생들에게 놀림당하는 것도 여린 내 마음이 감당하기 어려웠다. 수업준비하기도 벅찬데, 그 수업을 제대로 교실에서 실현하기도 어렵고, 맡은 업무도 어렵고~ 처음으로 시험문제를 내야 하는 기간에는 학교에서 자정이 넘어 퇴근하기도 했다.
학교에 적응하기도 힘든데 아빠는 내가 취직해서 이제 대출이 조금 더 수월해진 것을 활용하셨다. 학교가 조금 빨리 끝나는 어느 날 아빠는 나를 데리고 00 머니에 가셨다. 거기서 고금리의 대출을 나의 명의로 받으셨다. 매달 받는 월급에서도 용돈 조금을 빼고 생활비로 다 드려 돈 버는 맛이 없는데, 수업과 업무는 버겁고, 심지어 아빠는 내 이름으로 빚을 내셔서 선물투자를 하시니 정말 너무 삶이 재미없고 지쳤다.
그때즈음 좋아하는 사람이 생겨 몇 달 사귀었는데, 배려 없이 차갑게 그에게서 차였다.
내가 너무나 간절히 바라던 학교에 취직했는데, 이런 상황이 되니 학교를 그만 다니고 싶었다.
그렇지만 엄마의 직장암 치료를 위해 나의 건강보험증이 필요하고, 우리 가족이 살아가기 위해 내 월급이 필요하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속에 우울을 버티다 버티다 몸의 진이 다 타버려 결국 조울증에 걸리고 말았다. 이후로 난 조울증을 3년 동안 겪으며 과한 흥분 상태와 죽는 것이 차라리 편할 것 같은 상태를 오가는 극도의 스트레스와 괴로움 속에 살아갔다. 모든 짐을 나의 작은 어깨에 짊어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