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성
장덕조
어떻게 걸어 집까지 왔는지도 모른다.
손바닥만한 툇마루 끝에 이고 왔던 앞치마 뭉치를 내려 놓으니 '꿀 !'하고, 외마디 돼지새끼 우는 소리가 났다.
종이는 다 떨어지고 앙상하게 형용만 남은 미닫이가 월컥월컥 열리며,
"점순이 떠났소 ? "
춘삼의 얼굴이 쓰윽 내민다.
그 말에는 대답도 않고 정순어멈은 그대로 휭하니 부엌으로 들어가더니 풍풍 독엣물을 퍼서 솥에 부었다.
눈물에 부은 눈을 남편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까닭이다.
계속하여,
"이게 웬 돼지새끼여 ?"
하는 남편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를 듣고 쿵쿵쿵 달려와 들여다보는 듯한 새끼들의 기척도 났다.
"으야 돼지다, 돼지 봐라.“
하는 큰놈의 소리.
"이봐 대가리 끝까지 구정물이 묻었네, 체 더러."
하는 작은놈.
"무쪄, 아이 무써."
하고 꼬마 소리.
그러나 점순어멈은 사뭇 벙어리가 된 듯 검불나무를 끌어당겨 솥 밑에 불을 지핀다.
어느새 내려왔는지 춘삼이의 근심스런 얼굴이 부엌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웬 돼야지여, 돼야지가? "
그의 찌푸렸던 얼굴은 완연히 공포의 표정으로 변했다. 지난 봄 일이 생각난 모양이다.
양식은 말할 것도 없고 우거지도 소나무 껍질도 씨감자까지 떨어졌을 때다.
주리다 못한 새끼들이 벌레며, 나비며,-그런 것을 잡아먹고 돌아다니는 것을 보자, 점순어멈은 환장이 됐는지, 덮어놓고 구장네 닭을 훔쳐왔다. 춘삼이가 들에서 돌아왔을 때 아내는 서슴지도 않고 자식들 입에 닭국을 퍼먹이고 있었다.
좁은 마을이라 당장에 소문은 퍼졌다.
물론 말썽이 많았다.
그때 춘삼이는 일부러 구장집까지 찾아가, 비대발괄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으나, 범행 당자인 점순어멈은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그뿐이랴. 그 후에도 그 같은 일이 몇 번인가 되풀이되었다.
원체 소심하던 춘삼이의 간은 이 아내 때문에 아주 콩알만해졌다
동리 사람 둘만 모여 선 곳에도 그는 낯을 들고 지나가지를 못했다.
그 대친 뼈가 휘도록 모든 일을 도왔다. 면소 일, 구장집 일, 작업반(作業班)의 일.
그러나 아내는 이 같은 남편을 언제나 마음속으로 경멸하고 비웃었다. 그 약하고 비굴한 성미를 발을 구르며 안타까와 하는 것이었다.
새벽부터 일손을 놓지 못한 남편이 어두워서야 기진해 들어오면 아내는 도리어 강다짐을 해 가며 소리소리 지르는 일도 있었다.
"어유, 암만 동네방네 아첨해 봐. 누가 도둑년 서방 아니라능가.“
그럴 때에도 남편은 말 한 마디 하지 않는다. 억울한 듯이 그저 한숨만 쉬었다.
그러나 이 같은 점순어멈 도벽도 오래 가지는 않았다. 보릿고개를 넘어서며 공출하고 남은 감자가 여기저기 흩어지고 새끼들의 주렸던 눈알이 바로 박히자 그의 손버릇도 씻은 듯 없어졌다.
제일 먼저 숨을 돌린 것은 춘삼이었다. -그리던 것이 하필 오늘 맏딸 점순이가 징용을 맞아 떠나간다는 오늘, 아내는 다시 환장을 했단 말인가-
춘삼이의 주름잡힌 이마 위에는 공포의 그림자가 더욱 깊어졌다.
그는 지금 방향도 알지 못하고 길 떠난 딸의 안부보다, 돼지새끼 출처가 더 급한 것이다.
아궁이를 들여다보고 앉아 불찬 지피는 점순어멈도 이 같은 남편의 잘 안다. 갑자기 남편이 가엾어졌다.
"이거 훔쳐 온 거 아니라우. 자동찻간에서 돌아오는데 방학리 고개에서 주운 거라우."
그것은 정말이었다.
점순어멈은 오늘 아침에 딸이 떠나는 것을 배웅하러 읍까지 갔다.
하긴 점순아범도 같이 갈 것이나, 두루마기도 없고 모자도 없다고 주저하는 것이 미워 싸움 끝에 어멈만이 가게 된 것이다.
손에 손에 ‘히노마루' 그린 깃발을 든 구장과 면소 사람들에게 끌리어 이 이구(二區)에서 떠나는 두 처녀는 이십릿길을 걸어 읍내까지, 거기서 다시 버스로 도청이 있는 C까지 나가야 하는 것이다.
C에서는 도내(道內)에서 결정된 처녀가 모두 함께 모여 기차로 곧 부산으로 향해 가게 되어 있었다.
읍내에서 버스를 타려는 소녀도 오륙 명이나 되었다.
배웅 나온 부모 친척들의 아우성과 ‘히노마루'를 그린 깃발과 덜거덕거리는 순사의 칼소리와-점순어멈은 딸의 손을 꼭 쥐고 버스 곁에 서 있었으나 분함인지 슬픔인지 다만 혼란한 마음으로 머리가 아찔해지며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눈이 충혈이 되고 가만 있어도 이가 득득 갈리는게 제 귀에도 들렸다. 열에 뜬 사람처럼 걷잡을래야 걷잡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저편에서 몇 번이나 눈짓을 하던 이웃 사는 옥분네가 그때 가까이 왔다.
"점순어멈은 먼첨 들어가우. "
하는 것이었다. 남 보기에도 거조가 심상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점순네는 약간 반항하는 표정이었으나 딸의 손을 한 번 꼭 쥐어 주고는 말없이 버스 옆을 비켜났다. 무슨 말을 하려고 입을 열기만 한다면 며칠 전부터 참고 참았던 폭백이 터지고야 말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는 주저하는 듯 엄지발가락이 비쭉 내민 고무신을 한참이나 바라보고 섰다가 갑자기 두어 번 발을 구르더니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놀란 딸이 어미를 부르며 따라갔으나 그는 입술을 꼭 깨문 채 그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어갔다.
방학리 언덕까지 왔을 때다. 문득 고개를 쳐드는 눈에 C로 향하여 달려가는 버스가 보였다.
더 버틸 수가 없었다.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점순아. 내 점순아."
눈물이 소나기같이 쏟아진다.
"이년아, 이년아. 그렇게도 주리더니 이제 쌀 추수 다 해 놓고 너 혼자 떠나느냐."
말라 가는 풀잎을 쥐어 뜯으며 한참이나 울었다.
버스는 산모퉁이를 돌아간다. 견딜 수가 없었다. 몸부림을 쳐 보아도 시원치가 않고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나중에는 치마를 훌렁 걷고 마렵지 않은 오줌을 쉬엄쉬엄 억지로 누었다.
그때였다.
눈앞 개골창 속에서 꿀꿀하는 돼지새끼 소리가 들려왔다. 놀라 일어나니 한창 포동포동 기름살 오르려는 돼지새끼가 한 마리 대가리 끝까지 구정물을 뒤집어쓰고 애원하듯 이편을 쳐다보는 것이다. 돌아보니 저만큼 일인(日人)병정의 한 떼가 흙 파는 작업을 하고 있고 그 주위를 귀 쫑긋한 개 한 마리가 빙빙 돌고 있을 뿐 아무도 보는 사람은 없었다. 더 생각할 여유도 없다. 와락 달려들며 그대로 끌어내어 앞치마를 벗어 뒤집어씌웠다. 버둥거리는 놈을 치마끈을 졸라매기도 바쁘게 머리에 이었다.
전송을 마치고 자동찻간에서 돌아오는 마을 사람한테 들키지 않으려면 가장 빠른 걸음으로 달려와야 했던 것이다. 그는 어떻게 집까지 왔는지 모른다. 물론 돼지 임자가 누군지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분명 훔친 것은 아니다. 방학리 고개에서 돼지를 치는 집은 한 집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집에는 돼지새끼가 수십 마리나 있었고 지키는 사람도 많았다. 울타리를 빠져 나온 돼지새끼가 개골창에 처박히도록 모르고 있다는 것은 확실히 그들의 불찰이었다.
"흥, 잡년눔들. 그래도 날 도둑년이라구 하고 싶거든 제발 그러라지. 발가벗겨 장터에 끌어내다 놓구 주릿대를 앵겨 봐. 누가 눈이나 껌벅하나."
점순네는 입을 삐죽이 내밀더니 불타는 아궁이 속에다 손가락으로 코를 핑 풀었다.
"어이 잡년눔들, 난린지 뭔지는 괜히 꾸며가지구 헐벗어 주려, 어이, 어이 지긋지긋헌 고생, 갖은 고생 다 해 이제 자식꺼정 내줬으니 제놈들 배패기가 부르겠지. "
그의 울분은 그예 뼛속까지 맺히고 사무친 곳으로 찾아 들고야 만다.
"아, 그래 내가 천하지하에 무서울 게 뭐야? 응, 이렇게까지 된 내가 하늘 아래 무서울 게 그래 뭐야?"
어미 악쓰는 소리에 새끼들이 우르르 부엌으로 몰려 들어왔다.
"엄마 우리두 돼지 길러? 기를려구 엄마 사왔지?"
작은놈이 묻는다.
"돼지 길러? 사람들두 처먹을 게 없는데 돼지 멕일 게 어딨어?"
그는 젖을 파고 들려는 꼬마를 사납게 밀어 던지며 부지깽이를 꽉 짚고 벌떡 일어섰다.
"잡아먹는다. 지금 곧 잡아, 잡아먹어. "
남편은 어이없다는 듯이 이똥 누렇게 앉은 뻐드렁니를 드러낸 채 입을 헤 벌리고 서 있다.
허리까지 폭 파묻힌 앉은뱅이 솥에서는 이태 물이 끓었다. 한 손에는 뚝배기, 한 손에는 새끼를 들고 점순네는 부엌을 나왔다.
곧 새끼로 돼지 다리를 묶었다. 뒤꼍으로 돌아갈 것도 없이 울타리 옆에다 쓰러뜨렸다. 그리고는 낫을 집어다 서슴지 않고 돼지 목을 푹 찌르더니 재빠르게 뚝배기를 가져다 댄다. 낫은 점점 깊이 들어갔다.
꽥 꽥 꽥 꽥, 온 동네를 뒤엎을 듯한 고함소리가 차차 끼일 끼일 길게 끌리며, 뚝배기에는 무럭무럭 김나는 선지가 어느새 그득해졌다. 그래도 돼지는 좀처럼 지지 않는다.
긴장된 시간이 지나갔다.
점순네는 돼지 목에서 낫을 쑤욱 뽑더니 흙바닥에 두어 번 쓰윽쓰윽 문질러 풀밭에다 풀썩 던진다. 누르고 있던 무릎을 늦추자 그는 비로소 한숨을 후우 내쉬며 치맛자락을 털고 일어났다.
한덩어리가 되어 넋을 읽고 들여다보던 새끼들도 함께 숨을 흑 뿜는다.
점순네는 커다래진 눈으로 새치들을 확 둘러보더니, 아직도 목숨이 붙었는지 찢어진 목구멍을 실룩실룩 움직이는 돼지 뒷다리를 움켜 들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뜨거운 물에 굴려 털을 벗기려는 것이다.
부엌 문에는 아직도 남편이 달팽이처럼 붙어 서서 이 놀라운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점점 밤이 깊어 가는 대로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이미 치마를 벗어서 미닫이를 가린 단간방에는 돼지고기에 앞산같이 불은 배를 안고 새끼들이 이리저리 잠들어 있었다.
이불도 없이 요도 없이 다만 못통-을 뒤엎어 놓은 듯 길게 짧게 뻗치고 누운 새끼들 틈에서 춘삼이 내외는 언제까지나 화롯가에 마주앉아 있었다.
바람이 펄럭, 미닫이에 친 치맛자락을 날리고 방안 공기가 갑자기 싸늘해졌다.
"점춘이년, 워디꺼지 갔을까? "
불쑥 남편이 입을 연다.
"워디꺼지라니, 워디꺼지 갔다문 우리가 짐작이나 헐까."
점순네는 퉁명스레 대답하며 낯을 돌렸다.
"망헌년, 그년이야 이제 죽은 자식이지 어디 산 자식일까."
질화로의 화롯불은 아물아물 꺼지려 한다. 남편이 살살 불숟가락으로 검불재를 헤쳤다. 연소(燃燒) 불완전한 검정 재가 뭉게뭉게 솟아오른다.
"어이, 참 대체 당신은 헐 줄 아는 게 뭐란 말이유."
아내는 혀를 끌끌 차며 남편의 손에서 와락 부젓가락을 빼앗았다.
푹 푹 재를 파내니 샛발간 불씨가 불쑥 나온다. 엉거주춤 앉아서 후 후 불었다.
시꺼먼 재에 점점 빨간 불씨가 댕겨 가며 쪽 떨어진 화로 안이 금세 환해진다.
아무 표정도 없이 퍼져 가는 화롯불을 바라보고 앉아 있던 춘삼이의 눈에서 갑자기 한 방을 눈물이 뚝 떨어졌다.
"잘못했어, 그때 제비 뽑는달 때 끝내 못허겠다고 버티었더면 됐을걸, "
그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것이다.
아내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눈이 번들번들 빛난다.
"어이 바보, 바보. 소 잃구 외양간 고치네. 벌벌 떨며 도장 찍은 적은 원제구 찔끔찔끔 후회하는 건 원제요. 참 기맥혀."
"그래두 그땐 그렇지 못했어, 헹펜이 말이여.“
하긴 생각하면 그 원통하고 절통한 말을 어찌 다 할 것인가.
무능한 남편도 미웠지만 구장놈 면서기놈 모두 죽일 놈들이었다.
정신대(挺身隊)니 징용이니 해가지고 이편은 생사를 걸고 있는 일을 첫째 제비로 작정해 보낸다는 것도 통탄할 일이지만 그 제비라는 것조차 속을 알 수 없었다,
면소 이층에서 동네 계집애들 이름을 쓴 쪽지를 만들어 놓고 서기 중의 한 놈이 집었더니 하필 점순이와 또 하나 역시 가난한 작인(作人)의 딸인 준례가 집혔다는 것이다. 물론 아무도 그 자리에서 보았다는 사람은 없었다. 가는 곳은 일본 부산현(釜山縣). 출발은 모레.
그런 법이 어딨느냐고 머리를 풀어 헤치고 펄펄 뛰는 점순어멈과, 집안의 명예라고 입에 침이 없이 추켜올리는 순사 면소놈들 앞에서 그때 춘삼이는 할 수 없이 허락하는 도장을 눌렀던 것이다
그리고 며칠 동안 이 집안은 완전히 수라장이 되었다.
구장은 말할 것 없고 한번 들여다보는 일도 없던 주재소 순사까지 기미를 떠 보려는지 곧잘 기웃거리러 왔다.
점순네는 사뭇 실신한 사람 같았다. 밥 먹을 것도 잊고 새끼들 돌보아 줄 것도 잊어버렸다. 악을 쓰며 남편에게 대들지 않으면 골똘하게 무엇을 궁리하고 있었다, 이 억울한 사정을 호소할 도리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물론 몇 번이나 주재소와 면소를 찾아다니며 사정도 해 보고 두 손을 모아 빌어도 보았다.
그러나 모두 허사였다.
C시에는 군청도 도청도 있다. 그러나 군수나 도지사 역시 모두 한패요 같은 놈들일 것이다. 하늘 아래 아무 곳도 자기 원한을 하소할 곳 없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는 그만 정신이 아득해졌다. 게다가 출발까지의 날짜가 너무 바빴다. 이 같은 것이 모두 계획적인 그들의 수단인 줄도 모르고 혼자 허덕거리다 가슴을 쥐어뜯다, 이 가난하고 무지한 어미는 그예 오늘 딸을 빼앗기고 말았던 것이다.
"모두 팔자지. 자식두 팔자에 없는 자식이든 게지."
춘삼이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그 한숨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그의 우둔한 얼굴에는 완연히 노염의 빛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놈들두 너무 심해. 없는 놈이라고 너무들 너무들"
착하고 순한 그는 좀처럼 노하는 일이 없었지만, 한번 노염이 나면 성난 황소처럼 씨근씨근 풀어질 줄을 몰랐다
"이구(二區)에 있던 밭두 도둑놈들이 감쪽같이 속여 뺏고……"
일껀 벌겋게 피어난 화롯불을 춘삼이는 부젓가락으로 콱 콱 찔렀다.
제사공장 기지(基地)에 편입되어 송두리째 빼앗긴 그 밭 이야기만 나오면 그의 몸은 떨리고 마음은 찢어질 듯이 아프다.
기름지던 그 밭, 감자도 김장 배추도 그리 잘 되던 그 밭. C시에 있던 제사공장이 이 방학리 어귀에 소개(疏開)를 해 나온 것은 지난해 여름이었으나 그보다 앞서 오월경부터 한참 밑이 들려는 감자밭을 파 헤치고 공장과 부속 건물의 공사가 시작되었다.
물론 반대가 일어났다. 더군다나 그 밭만이 온 식구의 생명줄인 춘삼이네는 기가 막혔으나 모든 것은 울며 겨자먹기였다. 대지(垈地)와 그밖에 충분한 배상을 주겠다는 관계자의 말에 무력한 농민들은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춘삼이네 생명줄을 짓밟고 처음 보게 광대한 건물은 세워졌다, 그러나 그들이 약속하던 배상과 토지대금은 나타나지 않았다.
땅을 빼앗기고 눈이 뒤집혀 돌아다니는 농민들의 손에 쥐어진 것은 공정가격으로 따졌다는 쥐꼬리만한 땅값과 땅을 헌납의 형식으로 받았다는 감사장뿐이었다.
속임수가 뼈에 스몄다.
그러나 결국 어찌하는 수가 없었다.
이렇게 하여 춘삼이는 빈농(貧農)의 끄트머리로 아주 전락하고 말았던 것이다.
억울하고 비참한 이태(二年) 동안이었다. 그렇지만 그 이태 동안에 마을이 받은 타격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온 동네 허리 빳빳한 사람은 남녀를 물론하고 모조리 이 공장으로 끌려 들어갔다. 소학교까지 오륙학년은 휴학을 하고 이 공장 안에서 일을 해야 했다.
게다가 놀랍게 인심이 사나와졌다.
원래 넉넉한 마을이 아니매 풍부할 것은 없었지만 공장이 생기자 사람들은 서로 반목하고 서로 으르렁거렸다. 바로 이웃간에서도 음식 한 가지 갈라 먹으려 들지 않았다. 파 한 뿌리, 옥수수 한 대까지, 공장의 일인 관리인이나 그 '옥상'들에게 가져다 팔거나 그들이 풍부하게 가지고 있는 옷감과 바꾸어 왔다.
크림이 들어오고 양은 남비가 번득이었다.
돈을 가져 보지 못했던 마을 사람들의 손에 돈이 돌아다니기 시작하니 사람들의 마음은 더욱 치사하고 간악해졌다.
잔치를 해도 서로 부르는 법이 없었다.
떡을 해 먹으려면 이웃 모르게 밤중에 찌어 문을 닫고 먹었다.
그리고는 완연히 풍기가 어지러워졌다.
그러나 이 풍기를 문란케 한 시초는 마을 사람들이 아니었다. 공장을 경비한다고 흘러들어온 일인 병정의 한 떼였다. 그들은 어디서 들어왔는지, 모두 병정모자만은 쓰고 있었으나 정작 군장(軍裝)을 한 자는 몇밖에 없었다.
대개는 헝겊신에 잠방이를 걸치고 삽과 괭이를 메고 다니는 것이다. 그자들은 예사로 공장 계집애들의 손목을 잡아끌었고, 사타귀에 수건만 찬 채 길가에 나왔고, 사람들이 보는 데서도 태평천하로 오줌을 갈겼다,
어둑한 여름 저녁옷을 벗은 왜병정이 손에 자루를 들고 불쑥 앞마당에 들어와 소풍하는 젊은 아낙들을 놀라게 하는 일도 있었다. 쌀을 일어 달라는 것이다.
날이 갈수록 마을의 풍속은 해이해졌다.
무더운 저녁에는 전에 보지 못하던 '유까다'가 나오고, 듣지 못하던 이상한 일본 노래가 청년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거리에는 술집이 생기고 떡가게가 나타났다. 술집에는 분을 하얗게 바른 색시들이 나와 앉고, 계집들로 인한 싸움이 편쌈이 되어 며칠씩 계속하는 일도 있었다.
공장에서 파해 돌아오는 계집애들이 방학리 숲 속에서 사내들과 노닥거린다는 소문이 들려왔을 때 춘삼이 내외는 색을 잃었다.
왜정 시초에 토지회사 동척(東拓)이 생기고 아편이 물같이 흘러들어와 조선 농민을 마취시키는 듯 방학리에 생긴 공장은 아편보다 더 두려운 그들의 습관을 이식해 왔던 것이다.
생활의 불안, 마음의 볼안, 그러나 이태 동안의 그같은 고민도 정순이가 옆에 있을 동안은 오히려 나았다.
점순네 푸념처럼 유기 뺏겨, 밭 뺏겨, 자식마저 떠나 보내고 나니 오슬한 단간방은 그냥 텅 빈 듯 잠 안 오는 눈에 비친 아내의 모양조차오늘은 유난히 늙은 것 같다.
또다시 바람이 이는지 머언 숲의 나뭇가지가 우수수 소리를 낸다.
"자까.“
분함에 떨리는 몸을 진정하려 남편이 몸을 움직였을 때다. 걸지도 않은 싸리문이 왈카닥 소리를 내더니 마당에 들어서는 기척이 났다. 계속하여 미닫이가 열리며 쳐 놓은 치맛자락이 휠렁 걷어겼다. 낮에 헤어진 옥분어멈의 새파래진 얼굴이 등잔 아래 나타난다.
“아즉 안들 잤구려. "
그의 입술은 자줏빛으로 변했고 목소리가 꺽꺽 목구멍에 걸렸다.
"왜 그류?"
방안의 두 사람은 한꺼번에 놀란 소리를 질렀다.
옥분어멈은 기어들어오듯이 방안으로 들어와 풀썩 앉으며,
"점순이가아…… "
한다.
"점순이가 ? "
"점순이가 달아났다우. "
일어서려던 점순어멈은 넋을 잃고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어떡허문 좋아. C꺼지 따라갔던 구장이 지금 막 돌아왔자는데 C시 정거장에서 점순이가 없어졌더라구 그러드래. "
옥분어멈은 입술이 떨려 더 말을 못한다.
"그걸 워떠키 알았다우? "
춘삼이의 목소리가 막혔다.
"지금 우리 옥분 오래비가 읍내에서 돌아오는데 넘어오는 구장허구 같이 왔대요. 아주 동네 망신이라구 펄펄 뛰더래."
옥분어멈은 제가 먼저 꺼이꺼이 울기 시작한다. 그리고는 저 혼자 울며 푸념이었다.
"망할년, 달아나기는 왜 달아나? 징용 피해 달아나는 녀석들 경치는 것 두 못봤는가. "
더 주고받을 말도 없었다.
이 같은 옥분네의 푸념은 동시에 춘삼의 푸념이었다. 그는 딸이 가엾고 불쌍할수록 그 사려 없는 행동이 미웠다. 그는 빈농의 아들이요, 저도 빈농이겄다.
춘삼이는 오늘날까지 저 이상의 권력자에게 반항해 본 일이 없다. 그 농노적(農奴的)인 본성은 어떠한 억압, 불합리에도 참고 체념(諦念)하는 것이다.
분한 일을 당할 때마다 극성스런 아내가 아무리 펄펄 뛰어도 그는 언제나,
"팔자지."
하고 더 여러 말을 하지 않았다.
그의 오십 생애를 억누르고 있는 어둠의 생활은 그렇게도 무겁고 깊었던 것이다. 그 대신 이편 실수는 두 손을 모아 빌어야 할 줄 알았고 묵묵히 보상을 해야 할 줄로 여겼다. 그의 매듭지고 굵은 손가락은 남에게 빌기 위해서와 일하기 위해서 생긴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 옥분네가 가지고 온 사건은 너무나 중대하고 놀라왔다, 그전처럼 빌고 돌아다니거나 사정을 해서 보상될 성질의 일이 아니었다.
그는 옥분네 푸념소리가 아니더라도 징용을 피해 달아난 사람과 그 집안이 당하는 혹형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정작 오늘 아침에 딸을 떠나 보내자 이제는 시련도 웬만히 끝났으려니 했다. 그렇던 것이 가도 가도 태산이라더니, 그는 한없는 고난의 생활을 바라보며 다만 암담할 뿐이었다.
춘삼이는 팔짱을 끼고 말없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그 고개만 잠깐 쳐든다면 곧 온 세상이 혼돈하고 뒤집혀지고 좁은 천장까지 무너져 내려올 것 같았다.
모든 것이 어둠이었다. 실망이었다. 그의 두 어깨로는 질 수 없는 무거운 짐이었다, 그는 눈을 꼭 감고 낀 팔짱 안에 더욱 고개를 파묻었다.
다시 아무도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무거운 침묵 속에 옥분어멈의 느끼는 소리가 들린다.
그러나 점순어멈은 결코 그렇지가 않았다. 놀란 가슴이 진정되자 그의 눈은 빛나기 시작했다.
그의 입가에는 점차로 웃음까지 떠돌았다.
"정말 달아나 버렸대여?"
한참 후 그는 분명한 목소리로 물었다.
남은 두 사람은 뜻하지 않고 고개를 들어 마주보았다. 너무나 의외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 정녕 잽히진 않았겠지?"
그리고는,
"다른 기집애들은 워쪘대여?"
하며 오히려 반색하는 어조로 묻는 것이다. 옥분어멈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모두 떠났대여, 찻시간이 있으닝께 점순이만 냉겨놓구."
하고 아들이 전하던 대로 대답은 했으나 갑자기 형용할 수 없는 분노가 와락 치밀어 소리를 지른다.
"글쎄 망할년, 어떻게 뒷일을 수습헐려구그랴. 그래 지가 달아나문 잽히지 배길라나베.“
"잽히든 말든 걱정 말우."
점순어멈은 기어이 흥분이 되어 부르짖었다.
"아. 이년, 아즉 조선천지에만 있거라. 다신 안보낸다, 내가 안보내."
점순어멈의 두 뺨이 푸들푸들 떨렸다.
그는 갑자기 불쑥 일어서더니 가슴을 내밀고 남편과 옥분어멈과 쓰러져 자는 자식들을 돌아보았다.
"안 보낸다 안 보내. 금옥 겉은 내 자식이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엔 다시 아무 눔도 못 데려가.“
옥분네는 놀라 그 모양을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무안한 듯 아직 눈물 지지한 제 눈을 훔쳤으나,
"암, 안 보내야지.“
하는 그 말과는 딴판으로 애매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날이 밝자 점순어멈은 곧 나들이할 차비를 차렸다. C로 가려는 것이다.
C시 골목골목 집집을 기웃거러 찾으면 달아난 딸을 만날 수 있으리라.
딸만 찾으면 그만이었다.
지난 여름 친정엘 다니러 내려왔던 서울댁 말을 들으면 서울은 아직도 징용이니 정신대니 하는 소리가 이 시골만큼은 심하지 않다 한다. 설령 심하다 하더라도 원체 대처라 쌀표만 빼고 처박혀 있으면 그 지긋지긋한 성화를 면할 수도 있을 것이라 했다. 점순어멈은 그것을 생각하는 것이다.
C에서 서울까지 물론 기차를 타려는 것이 아니다. 딸을 찾아 데리고 가는 길이면 북으로 일백 팔십 리 서울길은 육로로도 완연했다. 그러나 이 같은 점순어멈의 계획도 구경은 허사였다. 버스를 타려고 나선 읍내 정류장에서 그는 더 기막힌 소식을 들었다.
점순이는 어젯밤 늦게 C에서 순사 손에 잡혀 오늘 아침차로 벌써 이 읍내 주재소까지 이송되어 와 있다는 것이다.
"다른 애들이 죄다 떠나 버렸으니 혼자 뒤쫓아 보낼 수도 없고 다음 차례꺼지 데려다 가둬둔대요."
그 말을 전하는 버스 운전수는 예사롭게 말했으나 점순어멈은 하늘이 노래질 뿐이었다.
그는 곧 주재소로 달려가 딸을 만나 보고 싶었다. 고러나 면소로 주재소로 다니며 울고 호소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허무한 일이던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못난 년, 못난 년, 하룻밤도 못 지내서 잡히고 말았어.”
그는 슬프디슬픈 눈으로 우뚝한 주재소 지붕을 한번 쳐다보고 발길을 돌렸다.
그러나 당최 걸음이 걸려지지 않는다. 마음이 무거웠다. 기를 쓰고 빠져 나오려면 더욱 깊이 빠져 들어가는 진흙구덩이 같은 생활이 슬펐다.
방학리 고개까지 왔을 때는 더 발을 떼어 놓을 수가 없었다. 그는 어저께와 다른 슬픔을 안고 숲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마른 풀밭을 골라 고요히 주저앉았다. 쓸쓸하고 외로왔다. 어저께의 괴로움을 송곳으로 찌르는 따가운 슬픔이라면, 오늘의 그것은 명주실로 목을 죄는 그러한 슬픔이었다.
그는 무릎을 안고 나무 등걸에 기대어 앉아 눈물 빛나는 눈으로 헛되이 먼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눈에 들어오는 것은 없다. 마음에 떠오르는 아무 생각도 없었다. 얼마나 긴 시간을 그러고 있었는지 모른다. 드디어 황혼이 숲을 덮기 시작했다.
구름이 붉게 물들고 푸르던 하늘에도 붉은 빛이 스쳐나갔다. 나무와 나뭇가지 사이로 바라보이는 옅은 산맥도 어느새 가죽빛이었다. 그러나 그의 눈에는 종내 눈물이 마르지 않고 그 마음도 한결같이 공허했다. 그 공허한 마음을 안고 점순어멈은 숲 속에서 이대로 밤을 밝히고 싶었다. 주재소 유치장에 앉아 이 밤을 밝힐 그 딸처럼.
"아아 불쌍한 내 새끼들!"
점순어멈이 무릎을 안고 있던 손을 풀어 아픈 머리를 짚었을 때였다.
고요하던 숲 속에 많은 사람들의 발소리와 이야깃소리가 흘러 들어왔다. 점순어멈은 한 손으로 이마를 짚은 채 고개를 기웃거려 그편을 바라보았다.
작업을 마치고 돌아가는 듯한 일본병정들의 한 떼였다. 옆에 선 자는 총을 메고 사슬에 맨 개를 몰고 있었다. 뒤에 행렬을 짓고 따라오는 자들은 모두 괭이와 삽을 메고 있었다. 갑자기 앞에 선 자가 뒤를 돌아보며 무어라 지껄이더니 즐겁게 웃었다. 그리고는 곧 엎디어 개 목에 맨 사슬을 푸는 것이다.
앗 ! 점순어멈은 손가락으로 땅을 할퀴었다.
주인의 손을 떠난 사나운 개는 점순어멈의 옆을 빠져나가 쏜살같이 돼지 치는 집 울타리를 향해 달려갔던 것이다. 놈들이 장난을 하는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길 잘든 개를 시켜 돼지를 훔쳐 오라는 것인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석연(釋然)했다. 어저께 개울에 빠졌던 돼지새끼도 이 개한테 쫓겼던 성싶었다.
점순어멈은 어느새 벌떡 일어서 있었다. 두 손을 들고 소리를 지르며 개가 달려간 방향을 향하여 따라가고 있었다.
그러나 점순어멈이 돼지 치는 집 가까이 왔을 때 이리같이 사나운 개는 벌써 돼지 울타리와 울타리 사이를 뛰어오르며 으르렁대고 있었다. 놀란 돼지들의 비명과 포효성이 저녁빛 속에 처참했다. 손에 막대기를 든 사람들이 아우성을 치며 달려나왔다. 그러나 때는 늦었다.
이리 같은 개가 네 발을 쳐들고 다시 한번 높이 뛰었다. 그러자 놀라운 광경이 나타났던 것이다.
보(洑)가 터진 홍수처럼 돼지 울타리를 넘어뜨리고 나온 돼지 떼가 밀치며 부딪치며 아우성치며 우레 같이 돌진해 나왔다.
무서운 기세였다. 그 앞에는 노한 세퍼드도 없었다. 음흉한 일본병(日本兵)도 보이지 않았다.
손에 손에 막대기를 든 사람들도 그저 망연할 뿐이었다.
다만 어미, 새끼, 수십 마리의 돼지 떼는 검은 한덩어리가 되어 풀을 무찌르고 점순어멈을 떼밀치고 도도한 대하(大河)처럼 범람해 나온 것이다.
- 아아 누가 돼지를 우둔한 짐승이라 했던고. 약한 짐승이라 했던고- 점순어멈은 밀려 쓰러진 채로 경이의 눈을 들어 그 모양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어저께 그렇게도 쉽사리 자기 손에 잡혀 죽은 돼지새끼를 생각했다.
'같은 짐승이면서도 한번은 내게 지고 한번은 내게 이기고 - 어찌된 셈일까?'
갑자기 떠오른 이같은 의문은 점순어멈의 가슴을 뜨끔하게 찔렀다. 그는 얼른 일어나서 머리를 쓰다듬었다.
‘ - 어찌된 셈일까? '
갑자기 번개같이 떠오르는 생각이 점순어멈의 머릿속을 비췄었다.
힘이다. 그것은 힘이었다. 많은 것이 한데 뭉친, 그렇다, 약하나마 많은 것이 한데 굳게 뭉친 단결의 힘이었다. 그의 얼굴에는 핏기가 뻗쳤다.
점순어멈은 여태 젖어 있던 공허한 의식에서 확연히 깨어나며 마음껏 큰 소리로 부르짖고 싶었다.
"울고 빌며 다닐 때 누가 불쌍타고 하더냐."
그는 목에 핏대를 세우며 목청껏 외쳤다.
"제 힘으로 살아야 한다.“
먼 산울림이 야트막한 저녁 하늘을 지나 되돌아왔다.
"제 힘으로 살아야 한다."
이날 저녁 옥분어멈 집에는 동네 마누라들이 대부분 모여들었다. 점순어멈의 청으로 점순이를 데리러 갈 의논을 하자는 것이다. 애국반이요, 반상회요, 해서 모이는 것은 그래도 제법 훈련이 되어 있었다.
점순이가 달아나다 붙잡혀 왔다는 것은 벌써 마을 안에 소문이 퍼져 있기 때문에 호기심 많은 축이 제일 먼저 찾아왔다. 흉 잘보고 욕 잘하는 사람들도 찾아왔다.
"날이 추워지니 이거라두 꿰어야."
하며 노닥노닥 깁던 버선을 들고 온 사람도 있었다.
그래도 오지 않은 사람은 몇 번이든지 부르러 갔다.
역시 좁은 집이라 방에서 넘쳐난 사람들은 마루에 화롯불을 끼고 앉아 있었다. 자기의 집에는 낮에 두 건이나 순사가 다녀갔다는 말을 듣자 점순어멈은 일부러 제 집을 피하여 제일 친한 이웃인 이 집을 택한 것이었다.
"점순이두 가엾지만 점순어머이가 아주 미치게 됐어유. 참 불쌍해유."
사람들이 대강 모이자 옥분어멈이 먼저 우는 소리를 했다.
"보낼 제는 헐수없이 보냈지만 그게 글쎄 읍내 주재소꺼정 와서 있다니께 말만 들어두 사람 환장헐 노릇 아니겠에유."
"암 왜 안 그래."
음담(淫談) 잘하기로 유명한 복돌할멈이 담뱃불 붙이던 입을 오물거리며 대꾸를 한다.
"지집 생각나는 사내 맘허구 자식 생각나는 에미 맘 허구야 모두 마찬가지지"
여기저기서 웃음소리가 일어났다. 그 웃음소리가 그들의 사이를 막고 있던 장벽을 무너뜨렸다.
"어떻게 했으문 좋겠어유."
참다못해 점순어멈이 나 앉았다.
"구장님헌테 말해서 빼내 오는 수밖에 없겄지."
심술궂게 생긴 중년 여인이 빡빡 얽은 얼굴을 쳐들며 말했다.
"그렇잖어. 어떡허다니 우리가 어떡허여. 점순네가 진작 구장댁엘 가서 사정을 해 봐야지.“
"싫소.“
점순네는 무릎을 세우며 눈을 흘겼다.
"구장도 면장도 다 귀찮소. 그 사람네들 원제 우리 사정 들어 주었읍디까?“
그리고는 뱃속에서 짜내는 듯 처량한 목소리로 부르짖는 것이다.
"오늘은 남의 일이지만 내일은 곧 내게 닥쳐올 일이 아니유. 부디 남의 일이라 생각들 말구 들어 주시유.“
그 소리가 가장 깊이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웃음소리가 멈췄다. 세상에 자식 없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오늘은 남의 일이지만 미구에 자기들 위에도 닥쳐올 시련이었다.
"옳아, 옳아."
하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갑자기 진지한 표정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눈을 모으고 목소리를 가다듬어 의논을 하는 것이다.
다소의 호기심과 남의 불행을 기뻐하는 심리로 따라왔던 사람들의 마음도 동정과 진정한 근심으로 찼다.
"아무튼 점순이를 찾아와야지. 뒷일은 지어미가 어떻게 하든. 그렇지 않소?“
"암 다 자란 지집애를…… "
한번 마음이 내키기만 하면 빈농(貧農)의 아낙들은 무슨 일에든지 줄기차고 적극적이었다.
"어떻게 찾아와?"
사내같이 건장한 삼봉이네는 묻는다.
"어째긴, 우리 모두 몰려가서 야료를 쳐 볼까."
복돌할멈이 팔을 걷어 보였다.
"야료를 쳐서 안되거든 달겨들어 그까짓 순사놈들 XX를 잡아 낚아 버리지."
"XX를 잡아 대으기꺼지 누가 가만히들 있다등가베."
"그러니 사생결단 아냐. "
삼봉할멈이 소리를 질렀다, 그들은 모두 떡을 할 때 대문을 걸고 먹던 일을 잊은 것 갔았다. 동네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서로 반목하고 아옹거리던 일도 잊어버렸다. 그리고 그것은 이 마을에 공장이 들어온 후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이같은 광경을 바라보며 점순네는 뜨거운 눈물이 스며올라 눈시울이 무거웠다.
이상한 일이었다.
낮에 방학리 고개에서 본 돼지 떼의 돌격은 그로 하여금 진정한 생활, 참다운 힘이란 것을 생각하게 해주었다. 인간의 생활이란 무엇이며, 옳음이란 또한 어떤 것이며, 장님의 눈 같은 그 어둠의 생활 속에도 아직 한 줄기 광명의 길이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여태 경험하지 못한 희열에 가슴이 꽉 ! 막히고 말았던 것이다.
사십 년, 자기 자신의 의사를 잃은 채 억압에서 억압으로 질곡의 생애를 보내 온 그에게 이같은 발견은 결코 예삿일이 아니었다. 놀라운 비약이요, 두 손을 모으고 우러러보는 여명의 빛이었던 것이다.
그는 집에 돌아오는 길로 벌벌 떨고 있는 남편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옥분네게 부탁하여 이 회합을 열었다. 점순어멈은 결코 개울에 빠져서 애원하는 눈으로 쳐다보던 그 돼지새끼가 되고 싶지 않았다.
약한 자, 빌붙으려는 자는 죽음을 당한다. 그러나 돌진하는 자, 힘을 발휘하는 자는 승리하지 않더냐.
-그는 다시 과거를 되풀이하지 않으려 한다.
새 생활, 새 희망의 빛에 비추어 볼 때 그의 모든 과거는 어둠이요, 굴욕이요, 주림이요, 모든 무지(無知)였다.
제 힘으로 살자. 이기며 살아가자. 이같은 점순어멈의 새로운 의욕은 막연하나마 그대로 좌중에 반영되고 말았다. 그들에게는 아무 지도자도 없었다. 통계능력도 없었다. 그러나 과부 설움도 과부가 안다. 짓눌리고 짓눌린 고무공처럼 반발하지 않고는 못배길 공통된 환경이 그들을 단결하데 했던 것이다.
공출, 보국대, 징용, 감금, 나날이 심해가는 그 면면한 원한을 그들은 생각한다.
해방 직전 한국은 휘발유였다. 인화하는 사람만 있으면 누구나 비상한 힘으로 폭발한 것이었다.
"죽더라도 악이나 한번 쓰고 죽자."
누가 이렇게 말한다.
"죽기는 왜. 살아두 떳떳허게 살지."
점순어멈이 들이댔다. 그것은 몇 달 전까지도 닭도둑이라고 몰리던 그 점순네가 아니었다. 그는 이미 깊은 이념과 큰 자각을 가진 선동자였다.
"죽긴 왜, 우리는 살 테니 복통 터지거든 그놈들 저희나 죽으라지."
그 소리는 횃불처럼 사람들의 가슴을 비추었다.
모두 힘을 느끼고 광명을 느끼었다. 흥분이 된 가난한 여인들은 그대로 주재소를 찾아가 점순이를 찾아 오자고들 떠들었다. 내실까지 기다릴 것도 없이 달도 있고 하니 이 밤길을 걸어 읍내로 몰려가자고 주장하는 적극파도 있었다. 여기저기서 큰소리가 나고 신이 난 여인들의 얼굴이 어두운 등잔 아래 붉게 타올랐다.
결국은 내일 백주에 떼를 지어 나가다가 제지를 당하든지 하는 것보다 오늘 밤 안으로 읍내에 도착되어 있다가 내일 아침 일찍 주재소로 몰려가자는 의견에 합의를 보았다. 모두 털고들 일어서서 신을 신었다.
"그놈 나까무랑가 하는 놈 그놈 XX는 내가 잡아낚아야…… "
삼봉이네 말에,
"무슨 원한이 있길래. 왜놈 서방질 할려다 낭패 본 게로구먼."
복돌할멈이 입에 거품을 몰고 턱을 까불어 보였다. 새로 웃음이 터지고 모두들 마음이 즐거웠다.
괜히 큰소리를 질러 기세를 올리는 사람도 있었다.
아무도 빠지겠다고는 하지 않았다.
남편의 성미가 호랑이 같아 평소 숨도 맘대로 못쉬는 느티나뭇집 마누라까지 오늘만은 영감이 코딱지 같았다. 제일 젊은 원선네가 잠깐,
"아이들 자능가 보구 왔으면!"
했다가 기승한 복돌할멈에게,
"에 화냥년의 계집, 정녕 너 아이들 보구 올려구 그러나, 서방놈 못 잊어서 사타귀 만져 보구 올려구 그러지."
하는 호통을 듣고 귀밑까지 빨개져서 낯을 가리었을 뿐 쌀쌀한 바람에도 춥다는 사람조차 없었다.
드디어 여인들의 한 떼는 웃으며 지껄이며 팔을 휘두르며 방학리 고개를 향해 몰려가기 시작했다.
급보를 들은 동네 남자들이 모두 눈이 둥그래서 뛰어왔으나 아무도 제지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다만 이마 앞에 손을 대고 어슴푸레한 달빛 아래를 흘러가는 이 놀라운 힘의 집합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것은 자식을 찾으러 가는 어미들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한 사람의 딸을 찾으러 가는 한 사람의 어미가 아니었다. 모든 자식 - 부당하게 빼앗긴 그들의 모든 자식들을 탈환하러 가는 많은 어미들의 떼였던 것이다
이튿날 이른 새벽 왁자한 사람 기척에 문을 열고 내다보았던 주재소 순사는 정문 앞 층층대 위에 콩강정처럼 뭉쳐 앉은 초라한 여인의 한 떼를 보았다.
그들은 새벽 추위를 덜기 위해서인지 서로 팔을 꼭 끼고 몸을 맞대고 있었던 것이다. 순사 모양이 얼씬하자,
"점순이 내놔 주시유, 점순이 내놔요."
하고 그들은 일제히 소리를 질렀다. 사람들 틈에' 끼어서 끄덱끄덱 졸고 있던 여인들도 놀라 눈을 비비고 악을 쓰기 시작했다.
"점순이 내놔, 다 큰 계집애를 왜 가둬 놓구 내놓지 않는 거야."
젊은 순사는 어쩔 줄을 몰랐다. 그는 순사 근무 삼 년에 이같이 두렴성 없는 계집들을 처음 보았다. 수로도 이삼십 명이 넘을 성싶었다. 게다가 불면과 흥분으로 번들번들 눈들이 이상한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결국은 개미 떼같이 무력한 계집들이려니 했다. 그래서 일부러 절걱절걱 칼자루를 올리며 목소리를 높였다.
"저리 가, 저리 가. 떠들면 안돼."
그러자 계집들은 꼼짝도 하지 않는다.
"저리 가지 못해. 이 안에 자는 사람들두 있고 헌데 떠들면 못써“ 해도,
"모두 붙잡아다 가둬 놀 테야."
해도 여인들은 역시 들은 체도 하지 않는다. 다만 일제히 목소리를 가다듬어 점순이를 내놓으라고 소리만 질렀다.
젊은 순사는 눈살을 찌푸리고 새삼스레 사람들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이를 아드득 갈고 있는 할멈의 얼굴에서도, 혹은 두 손을 불끈 쥐고 있는 젊은 여인들의 표정에서도 그들의 두꺼운 가슴속에는 팽창한 증오감이 뒤끓고 있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는 드디어 화가 벌컥 났다. 달려들어 맨 앞에 선 - 가장 만만해 보이는 노파의 멱살을 잡아 끌었다. 그러자 어깨를 걷고 팔짱을 서로 끼고 있던 양 옆의 여인들이 팔을 낀 채 함께 달려 들어왔다.
"네 이놈, 너는 어미도 할미도 없니?"
하는 소리가 뒷줄에 선 사내같이 건강한 여편네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순사는 낯이 빨개졌다. 눈매가 올라갔다. 먼저 붙잡았던 팔을 놓고 그 멱살을 잡았다. 그러자 또,
"소리만 지르지 말구 달려들어 XX를 낚아 주구랴."
하는 소리가 그 옆에서 났다.
"XX이 뵈야 붙잡지."
하는 소리가 옆에서 또 불그러졌다.
"안뵈거든 눈깔을 잡아 뺘렴. "
이같은 소리도 들린다.
순사는 칼자루에 손을 대었다. 그러나 상대자가 무지한 빈농의 아낙들인 것을 깨닫자 칼을 뺄 수도 없었다. 그는 주재소 안을 향해 무어라 소리를 질렀다. 샤쓰만 입은 자, 모자만 쓴 자가 서넛이나 뛰어나왔다. 그리고는 닥치는 대로 휘어잡아 주재소 안으로 잡아들였다.
그러나 아무도 달아나지 않는다. 달아나기는커녕 초라한 여자들은 끌기도 전에 제 발로 어정어정 걸어 주재소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하여 그들은 일제히 증오와 경멸의 표정을 나타낸 채 제 맘대로 의자에도 걸터앉고 시멘트 바닥에도 쭈그리고 앉았다. 순사들은 더욱 화가 나서 펄펄 뛰었다.' 드디어 그들은 손을 들어 한 여인의 뺨을 갈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들은 골치를 흔들며 귀를 막지 않을 수 없었다. 맞은 여인이 있는 목청을 다하 여 꺼이꺼이 울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들은 아우성을 치며 점순이를 내놓으라고 부르짖고 있었다. 게다가 소문은 의외로 빨리 퍼져 가는 법이다. 주재소 밖에는 어느새 횐 옷을 입은 구경꾼들이 겹겹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몇 번이나 대야에 물을 떠다 뿌렸으나 그럴 때마다 한번 헤어졌던 구경꾼은 삽시에 몇 배가 되어 되달려 왔다.
주임이 달려왔다. 그는 제일 먼저 주재소 주위가 군중으로 휩싸여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손을 댈 수 없이 떠들어대는 여인들의 아우성을 들었다.
그의 혈색 좋은 뺨이 일층 붉게 피었다. 콧구멍에 기어들듯 조금 남긴 수염이 떨린다.
그러나 그는 가장 노련한 너구리였다. 급한 가운데서도 타산이 머리에 떠올랐다. 그는 멀지 않아 영전되어 이 읍내를 떠날 사람이다. 그가 이렇게 영전을 하는 것은 면민들의 황민화운동(皇民化運動)에 이바지하여 공적이 심히 큰 때문이었다. 그리고 자기 자신도 당당히 면내의 무사고와 지도의 철저를 얼마나 자랑하고 있었던가.
그러한 것을 - 면내에 더구나 가난하고 무력한 방학리 빈민들 속에 이같은 불온분자가 있다는 것은 그의 빛나는 업적을 얼마나 감쇄하는 것인지 모른다. 아니 송두리째 뒤엎어 놓은 사건이 될는지도 알 수 없었다.
아무튼 상사가 알게 된다면 큰일 날 일이었다. 무엇보다 소문이 나기 전에 무마해야 했다.
그는 분노에 떨리는 손을 호주머니 속에 집어넣고 주재소 안으로 걸어 들어 갔다.
"고라 고라, 무신 일이야. 또돌몬 안되, 안되."
그는 일부러 태연한 체 하품을 하고 기지개를 켰다.
"무신 일이야 무신?"
점순어멈이 야수(野獸)와 같이 뛰어나왔다.
"우리 점순이 도루 내보내 주셔유 우리 점순이…….“
"나니 ? 조무순이."
주임은 잠깐 생각하는 체하더니,
"오, 조무순이. 아레, 아즉도 여기 있나."
그리고 바깥 군중들이 들을 수 있도록 소리를 높여,
"아레와 간신다요(기특해), 나쁜 놈 꾀임에 빠져서 그랬지, 진정으로 국가에 진력하려는 좋은 아이야."
그는 그 옆에 죄송한 듯이 서 있는 순사에게 턱짓을 해 보이는 것이었다.
"다시데 야레(내놔 줘)"
소음이 그치고 환성이 일어났다. 이내 안으로 통하는 문이 덜컥 열리며 점순이가 나타났다. 그의 얼굴은 창백하고 새로 입혀 보낸 옷도 몹시 구겨졌다.
점순이도 오늘 새벽 유치장의 두꺼운 시멘트 벽을 격하여 사람들의 아우성소리를 들었다. 그리하여 막연하나마 누가 저를 위하여 떠들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처음 그는 아마 공장에서 사람들이 일을 시키기 위해 데리러 왔는가 싶었다. 성을 내면 황소같이 무서워지는 아비의 모습도 떠올랐다. 그러나 막상 순사에게 이끌려 나왔을 때 그는 그곳에 한 사람도 남자들의 그림자를 볼 수가 없었다. 물론 아비도 와 있지 않다.
그곳에 있는 것은 오직 마을의 어미들이었다. 새끼를 빼앗긴 맹수같이 주먹을 부르쥐고 서 있는 수많은 어미의 볕에 그을은 시커먼 얼굴들이었다.
"아, 엄마! "
점순이는 그만 말문이 막혀 어미의 치맛자락에 엎어지며 어이어이 울었다
"점순아. 점순아. "
어미도 딸의 등에 고개를 비비며 울었다.
모두 코를 훌쩍거렸다.
그들은 서로 말리려고 손을 내밀었다가는 제가 먼저 목이 메어 버리는 것이었다. 이윽고 점순이 모녀를 가운데 옹위한 여인의 한 떼는 주재소를 떠났다.
그들이 떠난 뒤, 화가 머리끝까지 뻗쳐 있던 코밑수염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애꿎은 순사들에게 분풀이를 한 것은 알 필요도 없다. 다만 그들은 '이겼다'는 의식과 자기네의 힘이 의외로 크고 강했던 것을 생각하며 더욱 신이 나고 자신이 생기는 것이었다.
"그봐. 공장이 들어올 때두 안그래. 그놈의 사내들한테만 맡겨 놓지 말구 말야, 아, 우리가 이렇게 발벗고 나섰더라면 꼼짝 못했지 뭐야."
곰보할멈이 삼봉이네 어깨에 기대며 뽐내면,
"참 우리 동넨 사내라구 변변헌 게 하나두 없어. 망헌 녀석들 아랫도리에 시컴은 건 대체 뭐 허느라구 차고 있는지."
고린장인 느티나뭇집 마누라도 서슬이 시퍼렇다.
방학리 고개 밑까지 왔을 때 비로소 햇살이 비치기 시작했다. 그것은 크고 둥글고 희망에 찬 아침해였다.
그들은 그 빛 속에서 고개 위에 옹기종기 서 있는 남자들의 그림자를 보았다. 아내와 어미들을 내보낸 동리 남자들이 걱정이 되어 마중을 나온 것이었다.
물론 소문은 미리 듣고 있었으나 그들은 제 눈으로 보기 전엔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정말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방학리의 여인들은 결국 소심한 그들의 아낙이요, 노예의 노예였던 것이다.
돼지같이 무지하고 배운 것 없는 그들의 여인이 그 같은 힘을 발휘하여 주재소를 습격하고 너구리 같은 주임을 항복시켰다고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드디어 안개가 걷히고 여인의 한 떼가 활짝 핀 햇빛 속에 나타났다,
“망헌 것들, 고얀은 일을 꾸며서 극성들을 부리지”
한 사람이 말하면,
“글쎄 원 뼈다구들이나 성해서 오는지”
다른 한 사람 역시 느린 어조로 대답한다. (자세 보니 그것은 꼬마를 업은 춘삼이었다. )
그러나 가까와 오는 여인들의 무리는 그들의 의구를 물리치고 그야말로 충천하는 기세였다.
언덕 위의 그림자가 누구들인가를 알아보았을 때 맨 앞에 선 여인이 두 손을 흔들며 무어라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모든 여인들은 일제히 손을 흔들며 함성을 울린다, 햇빛이 정면으로 그들의 빛나는 얼굴을 비추었다.
"어어이 어어이.“
"이겼다네 이겼어. "
그들의 부르짖음은 밀려오는 조수와 같이 점점 커지며 높아지며 방학리 골짜기에 메아리를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장덕조(張德祚: 1915- ? )
경북 경산 출생. 배화여고 졸업. 이화여전 영문과 수학. 1932년 단편 <저회(低徊)>를 <제1선지>(<개벽사> 발행)에 발표하여 등단. <대구 매일신보>, <대한일보> 문화부장 역임. 그는 가난한 삶의 밑바닥 속에서 인간과 인간애를 잃지 않는 삶의 이야기를 주로 다루어 온 작가이다.
주요 작품으로는, <은하수>, <광풍>, <벽오동 심은 뜻은>, <원색지대>, <격랑>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