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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다듬이

자한형 2021. 12. 13.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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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듬이 정진권

요 얼마 전에 이사를 한 일이 있다. 그대 나는 다듬잇돌을 들어다 실으면서 잠시 어린 시절을 생각했다. 나는 어려서 다듬이질 하는 것을 많이 보았다. 풀 먹인 흰 빨래가 꼽꼽해지면, 다듬잇돌에 맞게 네모로 접어놓고 방망이질을 했다. 빨래가 너무 마르면 입으로 물을 뿜어서 다시 꼽꼽하게 한 뒤에 다듬이질을 했다. 나는 이따금 바가지로 찬물 심부름도 했다. 다듬이질은 혼자서도 하고 둘이 마주앉아 하기도 했다. 혼자 하는 소리는 좀 둔탁한 느낌이었지만, 맞다듬이질을 할 때의 그 소리는 경쾌하고도 청랑한 것이었다.

휘영청 달이 밝은 가을밤에 혼자 뒷간에 앉아 있자면, 마을은 온통 그 경쾌하고 청랑한 다듬이 소리투성이었다. 소년은 그 다듬이 소리에 취했다가 달 한 번 쳐다보고, 그리고 갑자기 생각난 듯이 아랫배에다 힘을 주었다. 그러다가 뒷간을 나와 보면, 환히 불 밝은 아랫방 문에 맞다듬이질하는 그림자가 보였다. 그때 사립문 뒤에 세워 놓은 수숫대의 마른 잎사귀가 우수수 소리를 내기도 했다. 어디선가 컹컹 개 짖는 소리도 들려왔다.

다듬이질을 하다가 밤이 이슥해지면, 감 껍질 말린 것을 내다 놓고 주근주근 먹었다. 도토리묵이나 메밀묵으로 밤참을 하는 일도 있었다. 그러면 소년은 배 아픈 핑계로 홍시나 곶감을 졸랐었다. 홍시나 곶감을 먹으면 설사도 그친다고 했다.

다듬잇돌은 여름에도 차가웠다. 그래서 어린 시절의 어느 날, 나는 그 서늘한 다듬잇돌을 베고 누운 일이 있다. 그때 어머니가 이걸 보시고는 깜짝 놀라 일으켜 앉히셨다.

"다듬잇돌을 베고 누우면 입이 돌아간다. 알았니?"

그 후 나는 한 번도 그걸 벤 일이 없다. 찬 것을 베고 누우면 안면 신경이 마비될 수도 있다는 말은 내가 다 커서 들은 것이다. 다듬잇돌을 보면, 그때 어머니가 놀라시던 그 모습도 문득 떠오를 때가 있다.

다듬이 방망이를 보아도, 또 생각나는 것이 하나 있다. 중학교 3학년 때 우리는 산골로 피란을 갔었다. 그런데 그 이듬해에 호열자가 돌아서 온 동네에 울음소리가 끊일 날이 없었다. 그때 세 살이던 내 아우도 그 무서운 병에 걸리고 말았다. 어머니는 이 아이를 안고 하루 스물네 시간씩 한 주일을 견디셨다. 온몸에 마마 같은 것이 마치 팥을 삶아 뿌린 듯이 돋아서 방바닥에 누일 수가 없었다. 얼굴도 눈코를 분간할 수 없고, 입 안도 다 터져서 쌀 한 톨 넣을 수가 없었다. 그때 나는 어머니가 시키시는 대로 국수를 만들었다. 우선 밀가루를 개고, 그것을 다듬이 방망이로 얇게 밀어서 가늘게 썰어다가 끓이는 것이다. 그러면 어머니는 한 가닥씩 아우의 입에 넣어 주셨다. 자다가 문득 깨서 일어나 보면, 어머니는 그 애를 안고 말없이 들여다보고 계셨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눈, 가장 간절한 기원이 담긴 그런 눈이었다. , 우리 어머니의 그 애절한 기구(祈求)가 하늘에 사무쳤음인가, 내 아우는 마침내 살아났다. 그 애가 결혼식을 마치고 신혼여행을 떠날 때, 나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어머니의 그 눈을 생각했다. 그 애의 콧잔등에는 지금도 마마 자국이 몇 개 흩어져 있었다. 하지만 그 애는 그 자국에 어린 슬픈 사연을 모를 것이다. 아니, 이 글을 쓰는 나 자신인들 무엇을 안다하랴.(

이제 다듬잇돌은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 바야흐로 지금은 물에 빨아서 다리지도 않고 입는 옷의 시대인 것이다. 그래서 내 아내는 그것으로 북어나 두들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