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문학과 인생
문학과 인생 최재서
인생오십 고개에 올라서, 그 사이 한 말이 많은 것 같지만, 돌아다보면 실오라기만한외길이 보일 둥 말 둥, 줄거리 잡아 이렇다 할 아무 일도 없다. 나는인생의 허무(虛無)와 무가치(無價値)를 느낀다. 나는 좀더 충실하고, 좀더 가치 있는 생(生)을 체험(體驗)하고 싶다. 그럴 때에 나는 베토벤의교향악(交響樂)을 듣고, 혹은 밀턴의 시(詩)를 읽고, 혹은 셰익스피어의희곡(戱曲)을 읽는다.
이글을 읽어 줄 독자는 대개 20 전의 청년들임을 나는 알고 있다. 여러분은아직 인생을 회고(回顧)할 필요는 없다. 다만 앞을 내다보며 기쁨과슬픔을 다같이 희망의 품안에 포옹(抱擁)하면서 전진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여러분이 앞으로 간혹 문학 작품을 읽어, 인생에 대해서 그 무엇을반성하게 될 때에, 이 글이 약간의 도움이 될까 해서 붓을 든다.
옛날부터 "시는 자연의 모방(模倣)"이라 일컬어 왔고, 또 "연극(演劇)은인생을 거울에 비추어 보이는 일"이라고 말해 왔다. 비교적 현대에발달한 소설에 대해서도 같은 말이 자주 되풀이된다. 그만큼, 모든 문학작품이 자연과 인생을 모방하고 반영(反映)하여, 현실의 이모저모를보여 준다.
그러나 이것은 문학의 일면이고 전면은 아니다. 어느 작품을 보아도 거기에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이 그대로 나타나 있지 않다. 마치 사진기가 풍경이나인물을 촬영(撮影)하듯이, 문학이 현실을 그대로 모사(模寫)하지는 않는다. 문학에서 현실을 모사한다는 것은 가능한 일도 아니며, 또 필요한 일도아니다. 문학의 목적은 좀더 별다른 데 있다. 그것은 자연과 인생에서소재를 선택해다가 그들의 모양을 다소 수정하고 혹은 다시 결합해서한 예술품(藝術品)을 만들어 내는 일을 목적으로 삼는다. 그 결과로나타나는 문학 작품은, 현실적이지만 현실 그 자체는 아니다. 작품 세계는현실 세계는 현실 세계와 따로 존재한다. 그렇다고 해서 독립해 있다고생각해소도 안 된다. 인생을 떠나서 예술이 독립할 수는 없다. 예술가(藝術家)는그의 소재들을 인생 체험 속에서 구해 올 뿐만 아니라, 만약 그가 진정한천재(天才)라면 그 소재들을 결합하고 조직하는 독특한 방법과 원리까지도자연에서 배워 온다. 그러니까, 예술 세계는 현실 세계를 기반(基盤)으로해서만 성립된다. 예술이 현실과 동일하지도 않고 독립되어 있지도 않다면, 그들의 관계는 무엇일까? 그것은 병립(竝立)의 관계다. 현실 세계가있고, 그 곁에 혹은 그 위에 예술 세계가 있다. 예술은 현실을 모방하고반영하면서도, 독자적(獨自的)인 원리 밑에서 자체의 세계를 창조하여독특한 목적을 수행(遂行)한다.
문학이현실을 반영하는 한도에서는 기록이지만, 새 세계를 창조하는 한도에서는예술이다. 어떤 문학 작품이나 기록면(記錄面)과 예술면(藝術面)을 가진다. 이 두 면 중에서 우열(愚劣)을 가릴 수는 없다. 기록과 예술의 두 면을구비(具備)함으로써만 작품은 완전하다. 예술적인 면은 다음 기회에보기로 하고, 여기서는 기록적(記錄的)인 면만을 말하려 한다.
문학은현실의 기록으로서 볼 때에, 작품의 가치는 그 작품을 쓴 사람 자신이얼마나 성실하게 인생을 체험했으며, 또 그 체험을 얼마나 진실하고도아름답게 표현했는가에 달려 있다. 자기 자신이 성실하게 인생을 실천해보지 못한 사람의 글이, 아무리 아름다운 문구를 늘어놓는다 할지라도다른 사람에게 감동을 주지 못할 것은 뻔한 이치(理致)다. 어려운 현실속에서 일평생 성실하게 진리를 실천해 나가는 사람은 퍽 드물다. 진실한생활 체험을 예술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은 더욱 희귀(稀貴)하다. 우리는 밀턴에게서 그런 희귀한 실례(實例)를 본다.
17세기영국의 시인 밀턴은 부유(富裕)한 집에서 태어나서 좋은 환경 속에서자랐다. 그의 아버지는 음악에 이해가 깊었기 때문에, 어린 밀턴은 줄곧음악적인 분위기 속에서 지냈다. 이것은 그가 장래에 시인이 되는 데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 모른다. 시와 음악을 결합하는 일이 그의 소년시절의 꿈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그의 문학적 소질을 이해했기 때문에그를 학교에 보내지 않고, 집에서 가정 교사의 지도(指導)로 특별히교육했다. 그는 열심히 공부했다. 열 두 살 이후로 그는 자정(子正) 전에 자 본 일이 별로 없었다. 아직 조명(照明)이 불완전하던 그 시대에어린 사람이 그렇게까지 밤늦도록 공부했다는 것은 건강에 좋았을 리가없었다. 그것은 그가 만년(晩年)에 실명(失明)하는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그러한 근면(勤勉)의 덕택으로, 그는 대학에 들어가기 전에 문학을 비롯하여철학, 천문학, 물리학 등의 학문에 상당히 깊게 들어가 있었다.
밀턴의대학 시절에는 순결(純潔)한 생활로 일관(一貫)되어 있었다. 그는 그가믿는 퓨리터니즘을 실천하고 있었다. 이 시대의 그의 생활 감정이 여러편의 시 속에 남아 있다. 대학에 들어갈 때에 밀턴은 목사(牧師)가 될예정이었지만, 대학 재학 중에 문학으로 전향(轉向)했다. 그 당시 교회들의타락(墮落)을 분개(憤慨)했다는 것도 목사 지망(志望)을 단념한 이유의하나였다. 대학을 나온 뒤에, 그의 앞에 유망(有望)한 길이 있었지만, 그는 시골에 있는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서, 독서와 시 창작으로 세월을보냈다. 그의 장래를 염려하는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그가 문학에대해서 얼마나 투철(透徹)한 신념과 열렬한 정신(精神)을 품고 있었던가를알 수 있다.
스물아홉 살 되던 해에, 밀턴은 더욱 견문(見聞)을 넓히고자 이탈리아 여행을떠났다. 그는 그 곳에서 여러 문인, 학자들과 상종(相從)했고, 또 직접이탈리아 말로 시를 발표하여 그들을 놀라게 했다. 그가, 갇히어 살던과학자 갈릴레이와 만난 것도 이 때였다. 이 여행 중에 특별히 우리의주의를 끄는 것은 그가 영국을 대표할 만한 장편 서사시(長篇敍事時)를쓰고자 결심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타소의 서사시 <예루살렘이 해방>과경쟁해 볼 생각이었다. 전기(前記)의 서사시는 16세기 말에 발표되어근세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국민시(國民詩)로서 온 유럽에 이름이 놓았었다. 밀턴도 그런 애국적인 시를 써 보고 싶었다. 그래서 주제를 영국 역사에유명한 아서왕의 전설에서 구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이탈리아 여행을 마치고 시칠리아 섬으로 떠나려 할 때, 본국에 내란이일어났다는 소식이 있어, 그는 곧 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오래 전부터왕실과 의회(議會) 사이에 계속해 오던 알력(軋轢)이 마침내 정면 충돌을일으켰다. 그 때의 심정을 밀턴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동포(同胞)가자유를 위해서 싸우고 있는데, 이렇게 쾌락을 위해서 외국에 여행하고있다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라 생각했다."
언제나양심의 명령대로 움직이는 밀턴의 면목(面目)이 여기에 여실(如實)히나타나 있다.
본국에돌아온 뒤에, 밀턴은 형세(形勢)를 살피면서 여전히 문학에 정진(精進)하고있었다. 그 때에 그의 머리를 점령했던 문제는 여전히 장편시(長篇詩)의창작이었다. 그 때의 그 포부(抱負)는 다음 말들에서 엿볼 수 있다.
"고심노력(苦心努力)하고 열심히 연구하는 일은 나의 팔자라 생각하는데, 그 위에 또 강한 천품(天稟)이 결합된다면, 후세(後世)사람들을 위해서, 만만히 죽어 없어지지 않을 작품을 쓸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이리하여, 그는 열심히 작품의 재료들을 모으고 있었다. 그 때의 계획들을 적은원고가 99편 보존(保存)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 성경(聖經)에 관한 것이 66편, 영국 역사에 관한 것이 33편이다. 마지막에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가선택되면서 실락원(失樂圓)이라는 제목이 결정된 것은 1642년이었다.
바로이 때에, 교회를 장로제(長老制)로 고쳐 종교와 정치를 철저히 민주화(民主化)하려는법안(法案)이 의회(議會)에 제출되어 국내(國內)가 물끓듯했다. 밀턴은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 팜플렛을 써 가지고 서재(書齋)에서 나왔다. 그 후 20년 동안, 그는 내란(內亂)에 직접 참가해서 투쟁했다. 여러해 연구해 오던 그는 장편시는 어찌 되었는가? 물론 포기(抛棄)되었다. 그렇게 알뜰한 그의 시였지만, 민족의 자유를 위해서는 서슴치 않고붓을 꺾는 밀턴이었다. 내란 중에 그는 크롬웰 호민관(護民官) 밑에서라틴 말 비서(秘書)로 있으면서, 국왕 찰스 1세를 단두대(斷頭臺)로보내라고 주장하는 글을 발표하여 온 유럽을 진동(震動)시켰다. 그는그의 온갖 지력(知力)과 정력(精力)을 바쳐 자유 진영을 위하여 싸웠다. 그러므로 문학에서는 멀어졌었다.
그러나영국의 왕실을 폐지(廢止)하고 공화국(共和國)을 만들려고 일으킨 내란은밀턴과 그의 동지들의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1660년에, 파리로 망명(亡命)했던찰스 2세가 다시 영국왕으로 영접(迎接)되어, 영국은 왕정(王政)으로복고(復古)했다. 혁명 투자들은 모두 붙잡혀서 처단(處斷)되었고, 밀턴도투옥(投獄)되었으나 목숨만은 보존되었다. 그의 문학적 재질(才質)을아깝게 생각하는 국왕이 특별히 그를 사(赦)해 준 것이다.
이때에 밀턴의 나이 50, 그의 이상(理想)과 더불어 지위와 권세를 잃고, 사면(四面)의 적(敵)들 속에서 고독과 빈궁(貧窮)에 빠졌다. 그의 가정생활(家庭生活)도 특별히 불행했다. 첫 번 결혼에 실패했고, 둘째번부인은 사망했고, 그 자신은 완전히 시력(視力)을 잃어 맹인(盲人)이되었다. 실락원에서 밀턴은 암담(暗澹)한 그 자신을,
고약한시대 험(險)한 구설(口舌)을 만나
암흑(暗黑)과 위험(危險)과 고독에둘러싸여
라고읊고 있다. <실락원>은 이런 환경 속에서 시작되었다. 이 눈먼늙은 시인이 한 구절 구술(口述)하는 것을 그의 어린 딸이 받아쓰면, 그것을 낭독시키어 틀린 데를 고치고, 이리하여 12권 장편시를 읊어나가는 장면을 참담(慘憺)하고도 엄숙하였다. 무엇이 맹목(盲目)의 시인을몰아서 시를 읊게 했던가? 그것은 그가 젊었을 때 약속했던, 만만히죽어 없어지지 않을 만한 불후(不朽)의 작품을 후세에 남기겠다는 불붙는열정(熱情)이었다.
밀턴은이 작품 속에다 그의 지식과 학문과 사상과 신념뿐만 아니라, 그의 감정, 특히 왕정 복고(王政復古) 이후에 그가 겪은 가지가지의 쓰라린 감정 ―실망과 분만(憤?), 권세에 대한 반항과, 아첨(阿諂)에 대한 멸시(蔑視), 하느님의 사명을 다하지 못한 자기 자신에 대한 반성과 회한(悔恨)― 요컨대, 그의 인생 전체를 털어 넣었다. 뿐만 아니라, 밀턴은 이 한편의 시를 쓰기 위해서 일생을 살고 싸우고 고민했다고 해도 과언이아니다. 그 결과, 실락원은 그가 예언했던 대로 불후(不朽)의 작품이되었다. 밀턴은 양서(良書)를 정의(定義)하여 "생명을 넘어 생명으로길이 전하고자, 대가(大家)의 생명 고혈(膏血)을 향약(香藥)으로 처리하여보존한 것이라 말했는데, 이 말은 그대로 그 자신의 책의 성질을 설명한다.
지식을전하는 책은 지식이 발달함에 따라서 잊혀지지만, 진실한 사상과 보편적(普遍的)인감정을 표현하는 문학은 그 생명이 영구하다. 다만, 그런 사상과 감정은밀턴의 경우에서처럼 성실하고도 열렬한 인생 체험에서만 우러나올 수있다. 러스킨은 그러한 진리를 다음과 같이 웅변적(雄辯的)으로 말하고있다.
책을쓰는 사람은 '이것을 진실하고도 유익하다' 또는 '유익하고도 아름답다'고스스로 생각하는, 말해야 할 그 무엇을 가진다. 그가 알기로는, 과거에아무도 그것을 말할 사람이 없었고 앞으로도 말할 사람이 없다. 그는그것을 분명하고도 음악적(音樂的)으로, 적어도 분명하게 말해야 할의무를 느낀다. 인생을 총결산(總決算)하는 마당에서, 그것이야말로그에게 명백한 사실이라 함을 그는 자각한다. 그것이야말로 그에게 명백한사실이라 함을 그는 자각한다. 그것이야말로 그가 이 세상에 생을 받아태양의 혜택을 입음으로 인연(因緣)해서, 천재일우(千載一遇)로 알게된 참다운 지식이며, 참다운 의견이었다 함을 자각(自覺)한다. 그는그것을 영원히 기록하고 싶다. 될 수만 있다면 바위에 새겨 두고 싶다. 이렇게 말하면서 ―'이것이 나의 최선이다. 그 나머지는 나도 남들처럼먹고 마시고 사람하고 미워했다. 나의 인생은 수증기(水蒸氣)처럼 사라지고, 이제 아무것도 없다. 그렇지만, 이것만은 나의 눈으로 보았고, 나의마음으로 알았다. 나에게서 그 무엇이 가치 있다면, 이 책이야말로 당신들이기억해 줄 만한 가치 있는 나의 일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