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목근통신
木槿通信(목근통신) 김소운 - 일본에 보내는 편지 (1951.8.부산)
미움과 親愛(친애)의 두 眞實(진실)에서
친애하는 일본의 국민 여러분!
나는 대한 민국의 總理(총리)도 국민 대표도 아닙니다. 布衣書生(포의서생)에 지나지 않는 일 개인이 이런 前置詞(전치사)로 여러분을 부르다는 것이 혹시 외람될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나는 20 몇 년이란 긴 세월을 貴國(귀국)에서 살았읍니다.
우리 나라 말로 ‘잔뼈가 굵어지도록’ ― 20 몇 년이라면 당신네들이 終戰(종전)이라고 부르고 우리가 소위 <解放(해방)>이라고 하던 1945년까지로 마감해서 내 생애의 거의 3분의 2에 해당합니다. 그렇게 긴 세월을 나는 귀국의 雨露(우로)에 자랐읍니다.
내가 가진 변변치 못한 지식이나 교양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그 태반은 일본에서 얻어 온 것입니다.
친애란 말이 一片(일편)의 外交辭令(외교사령)은 아닙니다. 진정 여러분에게 보낼 수 있는 내 마음의 인사입니다.
나는 3, 4일 전에 어느 친구 집에서 우연히 30여 년이 지난 헌 記錄 寫眞(기록사진) 몇 장을 보았읍니다.
우리가 己未(기미) 운동이라고 부르는 이른바 1919년의 <獨立騷擾事件(독립소요사건)> 때 당신네들 손에 학살당한 그 처참한 송장들의 사진을 내가 그 날 처음 본 것은 아닙니다. 20여 년 전 東京(동경) ‘시모오찌아이’(下落合) ‘오끼노’ 선생 댁 書齋(서재)에서 본 것도 바로 이 사진이었읍니다. 그러나 나무에다 주렁주렁 목을 달아 매어 죽인 그 사진을 그 날 다시 대했을 때 내 감정은 다시 한 번 설레었읍니다.
“죽일놈들 같으니……, 이 죄값으로도 나라가 안 망할라구!”
그 때 내 입으로 복받쳐 나온 말이 이것입니다. ‘倭敵(왜적)’이니 ‘强盜日本(강도일본)’이니 하는 말로는 형용치 못 할, 더 한결 절실한 미움이 용솟음친 것을 告白(고백)합니다.
이 ‘미움’과 이 ‘친애’는 둘 다 에누리 없는 내 진실의 감정입니다. 이 서로 相反(상반)되고 모순된 두 감정을 그냥 그대로 前提(전제)해 두고 이 글 하나를 쓰자는 것입니다.
<‘선데이’ 每日(매일)> 誌(지)의 記事(기사)
이 글은 여러분이 읽지 못할 글자로 여러 분의 눈에 뜨이지 않는 한국의 신문에 실릴 것입니다. 그러나, 기필코 가까운 장래에 이 全文(전문)을 日本文(일본문)으로 옮겨 여러 분이 읽을 수 있도록 하겠읍니다. 이 약속은 반드시 이행되리라고 믿습니다.
지난해 가을 ― 정확히로는 1950년 9월 10일호 《‘선데이’ 每日(매일)》誌(지) 卷頭(권두)에 <韓國戰線(한국전선)에 從軍(종군)하여>란 좌담회 기사가 실렸던 것을 여러 분은 기억하실 것입니다. 좌담회라기 보다는 UP 통신 특파원과 ‘뉴스위이크’ 副主筆(부주필)의 對談(대담) ― 거기다 <‘선데이’ 每日(매일)>의 記者(기자) 하나가 진행을 겸해서 한자리 끼었으니, 이를테면 세 사람의 鼎談(정담)이라고 할까요. 鼎談(정담)이든 對談(대담)이든 그것은 제쳐 두고, 도대체 그 記事(기사)의 내용이란 것이 어마어마했읍니다.
기탄 없고 솔직한 점으로 보아 그 이상 바랄 수 없으리만치 한국의 약점을 찌른 名談(명담)이요, 快辯(쾌변)이었읍니다. 都市(도시)니 村落(촌락)이니 할것 없이 온통 구린내 천지란 이야기, 毒(독)‘가스’는 없어도 구린내에 코가 떨어지지 않으려면 ‘가스 마스크’가 필요하다는 이야기, 길거리에서 보는 거지며 浮浪兒(부랑아)들 이야기―, “무슨 죄를 졌길래 이런 나라를 위해서 전쟁까지 해 주어야 하느냐?” “소련을 膺懲(응징)하는 것이 이번 전쟁의 목적이라면 차라리 이런 나라는 소련에 주어 버리는 것이 더 효과적이 아니냐?” 등등, 바로 한국인의 심장에 匕首(비수)를 겨누는 言言句句(언언구구) 氣高萬丈(기고만장)한 大警句(대경구)들이었읍니다.
<구린내 나는 나라>의 出土品(출토품)
다시 한번 친애하는 일본 국민 여러분!
내가 최근에 들은 바로는 《‘선데이’ 每日(매일)》의 발행 부수는 70만에서 80만을 헤아린다는 얘기입니다. 대한민국으로는 상상치도 못할 방대한 部數(부수)입니다. 한 部(부)를 다섯 사람이 읽었다손 치더라도 4백만에 가까운 이 숫자는 거의 일본의 독서 대중의 過半數(과반수)에 해당할 것입니다. UP 특파원과 ‘뉴스위이크’ 副主筆(부주필)― 이 두 분의 외국 기자는 한국의 똥구멍을 털어서 그 赤裸裸(적나라)한 實狀(실상)을 전 일본의 방방곡곡에다 소개하고 宣傳(선전)해 주었읍니다. [後註(후주) : 《‘선데이’ 每日(매일)》의 발행부수는 지금은 백 3, 4십만부]
거기 대해서 우리들은 정히 冷汗三斗(냉한삼두)일 뿐, 一言半辭(일언반사)의 대꾸구가 있을 수 없읍니다. 하물며 이것은 우리들이 ‘歷史(역사)의 恩人(은인)’이라고 부르는 美國(미국) 언론인들의 對談(대담)입니다. 그 기사의 책임을 여러분에게 돌릴 이유도 없거니와, 그것을 여기서 追窮(추궁)하고 抗辯(항변)하자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오늘날 가졌다는 것은 ‘가난’과 ‘초라’뿐입니다. 어느 모로 따져 보아도 우리가 치켜세워서 남의 앞에 자랑할 것이 없읍니다. 일찍이 남의 나라에까지 移植(이식)되던 우리들의 文化(문화)는 이미 낡은 지 오래입니다. 그리고 그 文化(문화)의 대부분이 일본 ― 즉, 당신네들의 나라로 수출되었읍니다. 새삼스런 이야기 같습니다만 ‘우에노’(上野) 공원을 지나칠 때 여러분은 王仁(왕인) 박사의 記念碑(기념비)를 자주 보실 것입니다. 일본에 처음으로 漢文(한문) 文化(문화)를 移植(이식)한 우리 先人(선인)의 한 분입니다.
일본에 있어서 생활 문화의 기본이라고 할 茶道(다도)―, 지금도 일본의 여유층들은 비록 敗戰(패전)은 했을망정 그 茶道(다도)를 숭상함이 예와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 쓰이는 茶器(다기)들은 좀 값나고 귀한 것이라면 대개는 이 ‘구린내 나는 나라’의 出土品(출토품)들입니다.
지나간 옛 문화가 아무리 찬란했기로니 그것으로 오늘날의 우리의 처지를 糊塗(호도)할 구실은 못됩니다. ‘소로구우프’에 이런 寓話(우화)가 있읍니다.
動物(동물)들의 資格審査會(자격심사회)에서 몇 번째 차례에 거위(鵝鳥)가 나왔읍니다. 심사관이 묻습니다.
“자네 공로는 무엇인가?”
“네, 저의 8代祖(대조) 할아버지가 ‘트로이’ 전쟁 때 城(성)을 넘어오는 적병을 맨 처음 발견했지요. 그래서 하마터면 위태했던 城(성)을 구해 냈답니다. 유명한 이야기이지요.”
“그건 자네 8대조 이야기가 아닌가. 자네 공로가 무엇인가 말이야.”
“저의 공로가 무어냐고요? 제가 바로 그 8대조 할아버지의 8代孫(대손)이지요.”
“글쎄 이 사람아, ‘트로이’ 전쟁은 ‘트로이’ 전쟁이고, 자네는 대체 무엇을 했더냐 말이다.”
“원, 참, 말귀도 못 알아 들으시네. 제가 바로 ‘트로이’ 전쟁에 공훈을 세운 그 거위의 8대 直孫(직손)이라니까요.”
우리는 비록 ‘구린내 나는 나라’의 족속이라고 하나 이 거위의 ‘넌센스’를 되풀이할 생각은 없습니다. 新羅(신라)니 高句麗(고구려)니 해서 죽은 아이의 나이를 헤이자는 것이 아니라 일체를 喪失(상실)한 오늘날과 그 화려하고 豐饒(풍요)하던 옛날의 문화를 한번 맞대어보는 것입니다.
서글프고도 부끄러운 회상입니다.
제 辱(욕)을 제가 하는 <바보>
《‘선데이’ 每日(매일)》의 記者(기자)가 묻습니다.
“한국의 都市(도시)나 村落(촌락)에서 약탈을 당한 그런 흔적은 없던가요.”
“글쎄요. 한국에 掠奪(약탈)을 당할 만한 무슨 재산이 애당초에 있었던가요? 그토록 貧寒(빈한)합니다. 이 나라는……”
UP 기자의 이 대답에는 ‘약탈의 對象(대상)이나 되었으면 제법이게―’ 하는 또 하나의 底意(저의)가 풍겨 있읍니다. 사실인즉 戰禍(전화)로 인해서 입은 직접 피해 외에도 한국의 국민들은 有形(유형) 無形(무형)으로 허다한 재산을 잃었읍니다. 그러나 우리가 재산이라고 하는 물자며 세간살이들은, 있는 이의 눈으로 볼 때 소꿉장난의 부스러기들로 보였을 것입니다.
약탈의 대상도 못되리만치 빈곤하다는 이 辛辣(신랄)한 비평을 그러한 의미에서 甘受(감수)합니다. 그러나 看過(간과)치 못할 또 하나의 문제가 여기 있는 것같습니다. 한국은 36년 동안을 일본이 다스리던 나라입니다. <一視同仁(일시동인)>이라던 일본의 政治(정치)가 마침내 한국을 이 빈곤에 머무르게 했다는 사실은 별로 일본의 자랑이 못 될 것입니다.
― “‘센징(鮮人)의 주택은 더럽다’고 쓰는 것보다 ‘센징의 집은 도야지 우리 같다’고 쓰는 편이 문장 표현으로는 더 효과적이다…….”
20년 전 東京(동경) 三省堂(삼성당)에서 발행된 敎科書(교과서)의 한 구절입니다. 현명하고 영리한 귀국 국민에도 제 욕을 제가 하는 이런 바보가 있었읍니다. 이런 天眞(천진)한 바보의 귀에는 掠奪(약탈)의 對象(대상)도 못된다는 외국 기자의 韓國評(한국평)이 통쾌하고, 고소했을지 모릅니다마는, 마음 있는 이는 아마 하나의 反省(반성)을 잊지 않았을 것입니다. 한국의 ‘미제라블’(悲慘)은 한국의 羞恥(수치)이기 전에 실로 일본의 非人道(비인도), 일본의 政治惡(정치악)의 ‘바로미터’였더라는 것을―.
A “한국에서 돌아 와 일본을 보니 여기는 바로 天國(천국)이야. 한국은 정말로 地獄(지옥)이지……”
B 정말이야. “戰線(전선)에서 잠드는 UN 부대들의 夜營(야영)의 꿈은 ‘뉴우요오크’나 ‘캘리포니아’가 아니거든―. ‘긴자’, ‘도오똔보리’(道頓堀), ‘아사꾸사’(淺草), ‘신쥬꾸’(新宿) ―, ‘하나코’(花子)상, ‘노부코’(信子)상의 꿈이지…….”
敗戰國(패전국)이라던 일본이 천국이요, 36年의 桎梏(질곡)에서 벗어났다는 한국이 지옥이란 것은 ‘메피스토펠레스’와 ‘파우스트’가 자리를 바꾼 것 같은 신기하고도 재미 있는 후세의 이야기거리입니다. 戰爭(전쟁)에 지면 사내란 사내는 모조리 ‘아프리카’로 끌려 가서 강제노동의 奴隸(노예)가 된다던 일본―, 그 일본은 점령군 사령부의 寬厚(관후)한 庇護(비호) 아래 문화를 재건하며 시설을 다시 회복하여 하루하루 戰前(전전)의 면모를 도로 찾아 가고 있읍니다. 거기 비할 때, 연합국의 一員(일원)이요, 당당한 승리자인 中國(중국)은 그 광대한 領土(영토)를 버리고 臺灣(대만)으로 밀려 가고, 해방의 기쁨에 꽹과리를 울리며 좋아 날뛰던 한국은 국토를 兩斷(양단)당한 채, 지난 일년 동안에는 두 번이나 首都(수도) 서울을 敵手(적수)의 유린에 맡겨야 했던 이 사실―, 冷嚴(냉엄)해야 할 역사도 알고 보니 익살맞고 짓궂은 장난꾸러기입니다.
행여나 오해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일본의 불행을 바라는 者(자)가 아닙니다. 일본의 행복을 嫉視(질시)하는 자가 아닙니다. 비록 地獄(지옥)의 代名詞(대명사)로 불리도록까지 일찌기 상상도 못한 艱難(간난)과 塗炭(도탄)을 겪고 있다고는 하나,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지녀나갈 최후의 德性(덕성) 하나를 쉽사리 잃어 버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어느 쪽이 더 狡猾(교활)?
個人(개인)에 年齡(연령)이 있는 것처럼 민족에도 민족의 年齡(연령)이 있읍니다. 젊으면 경솔하고 純眞(순진)하고, 늙으면 신중하고 교활한 것은 否定(부정)할 수 없는 生理(생리)의 약속입니다.
같은 민족끼리도 문화의 老若(노약)에 따라 이 差異(차이)는 현저합니다. 東京(동경)을 중심으로 한 關東(관동)과, 京都(경도)를 표준으로 한 ‘가미까다’(上方)의 氣質(기질)이며 地方色(지방색)을 비교해 본다면 여러분 자신이 이 사실을 수긍할 것입니다. 中國(중국)은 이미 늙은 나라입니다. 일본은 동양 三國(삼국) 중에서 가장 어리고 젊은 나라입니다. 그리고 한국은 민족의 年輪(연륜)으로 보아 바로 그 중간에 위치해 있읍니다.
일본인의 민족성은 조급하거나 眞率(진솔)한 것이 자랑입니다. ‘대[竹]를 쪼갠 것처럼 꼿꼿하다’는 형용을 여러분의 나라에서는 곧잘 씁니다.
우리는 그것을 過信(과신)했기에, 만일 일본이 敗戰(패전)한다면 군인이란 군인은 모조리 자살해 버리리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 와서 생각하면 실로 一場(일장)의 ‘넌센스’입니다. 일본이 그렇게 柔順(유순)하게 승리자 앞에 무릎을 꿇고 그의 귀염까지 받으리라고는 상상치도 못했던 일입니다.
한국은 문화에 있어서 적어도 10餘(여) 世紀(세기)를 일본에 앞선 나라입니다. 중국의 年輪(연륜)에는 미치지 못하나 일본보다는 더 장성한 나라입니다. 따라서 社交性(사교성)과 御人術(어인술)이 일본보다는 능해야 할 이치인데도 나타난 결과는 정히 그와 반대입니다.
‘오오가와’(大川周明) 박사는 戰犯者(전범자)로 在監(재감) 중에 發狂(발광)했다는 소식을 들었읍니다. 그의 氣高萬丈(기고만장)한 著述(저술) 《日本(일본) 2600年史(년사)》에 대해서 일찌기 나는 《婦人公論(부인공론)》에 글 하나를 쓰고 削除(삭제) 당한 일이 있읍니다. 그 著書(저서) 중 ‘소가’(蘇我) 氏(씨)에 論及(논급)한 대문에 조선으로부터 到來(도래)한 歸化人(귀화인)의 例(예)를 들어, 우리 민족성을 교활하고 奸惡(간악)한 最適(최적)의 표본으로 내세운 한 구절이 있읍니다. 만일 그가 發狂(발광)하지 않고 정신이 성했다면, 한 번 다시 물어보고 싶은 일입니다.― 오늘날의 일본과 한국을 서로 비교해서 과연 어느 쪽이 더 순진한 민족이더냐? 어느 쪽이 더 능란하고 교활한 민족이더냐?를……. 그러나 다행히도 그는 狂者(광자)입니다. 狂者(광자)의 權利(권리)로 그는 이 設問(설문)을 거침없이 外面(외면)할 것입니다.
‘하가꾸레’(葉隱)의 逸話(일화)
‘사무라이’(武士)가 골동품 가게에 와서 접시 하나를 만지다가 ‘값이 얼마냐?’고 묻습니다.
“네, 스무 냥입니다.”
“스무 냥이라니? 아니 이 사람아, 이게 스무 냥이란 말인가? 자넨 주인이 아닌게로군. 주인을 불러 오게, 주인을…….”
“제가 바로 주인인데요.”
“주인이라? 주인이면 접시 하나 값도 모른다? 딴소리 말고 주인을 부르게…….”
주인이라던 사람, 그 말을 듣더니 말 없이 접시를 도로 뺏아 땅바닥에 탕탕 때려 부시고는,
“자, 잘 보시우, 이래도 내가 주인이 아니란 말이오?”
일본에 보편화된 ‘고바나시’(小咄)의 하나입니다. 깨어진 접시 조각, 무색해서 얼굴이 붉어진 ’사무라이‘를 다룬 연상하면서 여러분은 이 ’고바나시‘의 痛快味(통쾌미)를 즐깁니다.
또 하나 이와 다른 ‘하가꾸레’(葉隱)의 逸話(일화)가 있읍니다.
떡장사 집 이웃에 가난한 홀아비 浪人(낭인)과 그의 어린 자식이 살았다. 어린애가 떡 가게에서 놀다 돌아간 뒤에 떡 한 접시가 없어졌다. 浪人(낭인)의 아들인 그 어린애에게 嫌疑(혐의)가 씌워졌다.
“― 아무리 가난할 망정 내 자식은 ‘사무라이’의 아들이다. 남의 가게에서 떡을 훔쳐먹다니, 그럴 리가 만무하다”
浪人(낭인)은 백방으로 변명해 보았으나 떡 장수는 종시 듣지 않고 떡 값만 내라고 조른다.
이에 浪人(낭인)은 컬을 빼어 그 자리에서 어린 자식의 배를 갈라 떡을 먹지 않았던 증거를 보인 뒤에, 그 칼로 떡 장수를 죽이고 저마저 割腹(할복) 自決(자결)해 버린다―.
이 비참한 일화는 일본 國民性(국민성)의 純一不覊(순일불기)한 표본의 하나라고 해서 칭송을 받으며, 듣는 자로 하여금 감탄과 賞讚(상찬)을 마지 않게 한 이야기입니다. 만일 이 열렬한 意氣(의기)를 용납지 못하는 민족이 있다면 당신네들은 言下(언하)에 輕侮(경모)와 멸시로 그들을 대하기에 주저치 않을 것입니다. 그 민족이 바로 이 한국입니다.
以上(이상)의 누 例話(예화)에서 우리들은 용렬한 小人(소인)의 性情(성정) ― 濟度(제도)치 못할 ‘히스테리’를 찾아낼 뿐입니다. 우리들은 이런 이야기에 불쾌를 느낄 뿐만 아니라, 이런 이야기를 自矜(자긍)하고 긍정하는 민족의 그 단순 素朴(소박)한 倫理意識(윤리의식)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이것은 20여년을 일본서 살아 온 나 같은 사람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배움직한 日本(일본)의 ‘서어비스 스피릿’
교활이니 순진이니 하는 쉬운 한 마디 말로 어느 민족성을 斷定(단정)한다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일 개인에도 서로 對立(대립)되는 兩面(양면)의 성격이 있거든, 하물며 一國(일국) 一 民族(일민족)을 일컬어 어느 한 쪽으로 규정지어 버린다는 것은 될 말이 아닙니다. 이 過誤(과오)는 이미 ‘오오까와’ 박사 犯(범)했거니와 그 前轍(전철)을 또 한번 이 글이 踏襲(답습)한다는 것도 우스운 노릇입니다.
일본이 순진하든, 한국이 교활하든, 그것은 대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결과로 보아, 한국은 그 傳統(전통)의 美(미)와 민족의 숨은 情緖(정서)를 百(백)에 하나 나타내지 못하고 외국 기자의 입으로 ‘地獄(지옥)’이란 별명을 듣도록 쯤 되었읍니다. 반대로 戰時(전시)에는 美(미)·英(영)을 ‘鬼畜(귀축)’이라고 부르던 일본이 그네들에게 도리어 ‘天國(천국)’이 되고 말았읍니다.
여기에 한국인된 우리 자신이 반성할 허다한 문제가 潛在(잠재)해 있는 것은 물론입니다. 우리는 불가피한 歷史(역사)의 불행만을 구실삼자는 것이 아닙니다. 人爲的(인위적)으로도 우리는 적지 않은 불행을 製造(제조)해 왔읍니다. 이에 대해서는 마땅히 우리 自身(자신)이 우리가 뿌린 씨를 거두어야 할 날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와는 별문제로, 敗戰國(패전국) 일본이 ‘천국’이 된 그 연유나 경로는, 우리가 알고 싶은 ― 알아 두어야 할, 또 하나의 흥미 있는 課題(과제)입니다.
西洋(서양) 주택에 중국 요리 ― 게다가 일본 아내를 거느린 사람은 세계에서 제일 가는 幸運兒(행운아)란 말이 있읍니다. 일본의 ‘서어비스 스피릿’이란 그토록 유명합니다. 이것은 우리로서도 배움직한 美德(미덕)의 하나입니다.
進駐軍(진주군)에 대해서 이 ‘서어비스 스피릿’이 얼마나 철저하게, 충실하게, 발휘되었던가는 상상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이 점에 있어서는 내 눈으로 직접 보고 들은 바가 아니나 전해 오는 소문만으로도 짐작하기에 충분했읍니다.
내가 못하는 일을 남이 하면, 으레 탈을 잡아 보고 싶고, 티를 뜯어 보고 싶은 것이 世情(세정)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일본의 이 美德(미덕)에 대해서 감히 입을 대지 못합니다. 일찌기 ‘마담 버터플라이’ 하나를 내지 못하고, ‘시모다’(下田)의 ‘오끼찌’(お吉) 하나를 가지지 못한 우리로서는 흉내를 낼래야 낼 수 없는 노릇입니다.
UN군이 지나갈 때, 입을 벌리고 황홀히 쳐다 보면서 ‘야아, 참 키도 억세게 크다’, ‘그 친구 되게 껌네’하고, 탄복을 마지 않는 것이 대한민국의 街頭(가두) 풍경입니다. 社交性(사교성)과 接待術(접대술)에 이렇게 우둔한 민족이 ‘서어비스’의 宗家(종가)라고 하는 일본 같은 나라와 地理的(지리적)으로 이웃해 있다는 것이 이를테면 우리들의 불행입니다.
하필 일본과 비교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의 社交性(사교성)은 확실히 落第(낙제)입니다. 산 설고 물 설은 萬里(만리) 異域(이역)에 와서, 더욱이나 身命(신명)을 걸고 戰野(전야)를 달리는 이들에게 한국이 지옥으로 비친다는 것도 생각해 보면 妄發(망발)은 아닙니다.
日本(일본)을 理解(이해)함에 있어서
새 歷史(역사)가 가져온 우리들의 悲劇(비극) 하나가 여기 있읍니다. 우리는 庶民(서민) 문학의 주인공인 春香(춘향)의 절개를 자랑하던 민족입니다. 倭將(왜장)의 허리를 끌어 안고 南江(남강)의 푸른 물에 잠긴 論介(논개)의 義(의)를 欽慕(흠모)하던 백성입니다. 우리들이 아끼고 위하는 이런 고귀한 정신은, 紅毛碧眼(홍모벽안)의 외국 손님들 앞에는 하나의 <빵빵 걸>의 매력에도 당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한국의 전통이나 문화를 연구하러 온 學者(학자)·藝術家(예술가)가 아닙니다. 그들이 흘린 피의 報償(보상)은 다만 승리뿐입니다. 승리 하나를 위해서 싸우고 있는 그들에게 춘향의 절개, 논개의 義(의)를 이해하라는 것이 어리석은 지나친 기대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혹시 오해를 살지 모릅니다마는, 일본의 天國說(천국설)이 <빵빵 文化(문화)> 娼婦(창부)의 ‘서어비스’에 由來(유래)한다고 결론지을 것이라면 애당초에 이런 글이 필요치 않았을 것입니다. 戰後(전후) 일본의 새 유행인 소위 ‘아프레게일’과 당신네들의 그 奉仕精神(봉사정신)의 미덕을 같은 촌수로 따지도록 그렇게 일본에 대해서 나는 沒理解(몰이해)한 사람이 아닙니다. 自畵自讚(자화자찬)격입니다마는 나는 《겐지 모노가따리》(源氏物語)를 原文(원문)으로 읽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만요오>(萬葉)>의 詩心(시심)을 <바쇼오>(芭蕉), <부손>(蕪村)의 境地(경지)를 나 딴에는 이해한다는 者(자)입니다. 그 점에 있어서는 일본을 天國(천국)이라고 하는 어느 외국 기자, 어느 進駐(진주) 군인에 뒤떨어질 배 아닙니다. 잘한 일인지 못한 일인지 그 決算(결산)은 별문제로 하고, 나는 내 지난 半生(반생)의 ‘에네르기’를 기울여, 일본을 알고, 일본에 배우고, 일본의 그릇된 傲慢(오만)과 自尊(자존) 앞에 내 향토의 文化(문화)와 전통의 美(미)를 誇示(과시)함으로써 任務(임무) 삼던 자입니다. 일본이 지닌 ‘惡(악)’을 한국의 어느 애국자 못지 않게 나는 잘 알고 있읍니다. 동시에 일본의 ‘善(선)’을 헤아림에 있어서도 누구에게 뒤떨어 지지 않는다고 自負(자부)하는 者(자)입니다.
日本(일본)의 ‘善’(선)을 두고
벌써 15년이 지난 옛날 이야기입니다. 그때 나는 서울을 떠나 東京(동경)으로 여행 중이었읍니다.
어느 날 宿所(숙소)인 東京(동경) 鐵道(철도) ‘호텔’에 전화가 걸려 왔읍니다.
“여기는 東京驛(동경역)입니다. 아무개 씨입니까?”
東京驛(동경역)에서 내게 전화가 걸려 올 까닭이 없읍니다. 이름이 비슷한 딴 사람에게 온 전화를 혹시나 잘못 받지 않았나? 하면서 나는 그 다음 말을 기다렸읍니다.
“다름이 아니라 당신께 갈 電報(전보) 한 장이 잘못 배달되어서 이리로 와 있읍니다. 여기 저기 알아 보느라 時間(시간)이 걸렸읍니다만 이제야 겨우 거기 滯在(체재)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고 전화를 드리는 겁니다. 벌써 전보 온 자가 두 시간이나 지났는데요…….”
추측컨대 ‘동경 스테이션 호텔’이러고 한 것을 ‘호텔’ 두 字(자)기 빠져 이런 착오가 생긴 모양입니다. 미안한데다 전보라니 궁금하기도 해서,
“수고를 끼쳤읍니다……. 그런데 電文(전문)이 무언지오. 이왕이면 좀 읽어 보아 주실 수 없는지요?” 하고 물었읍니다.
“그러지요. 읽어 드리겠읍니다.”
저 쪽 목소리는 그러면서도 약간 주저하는 기색입니다. 3, 4초 사이를 두고는 다시 한 번 공손한 그러면서도 어려워하는 어조로,
“지금 읽어드리겠읍니다. 그런데요, 전보 내용이 좀 섭섭합니다만 부디 傷心(상심)치 마시구요…….”
서울을 떠날 때 어린놈이 猩紅熱(성홍열)로 앓는 것을 入院(입원)시키고 온 바로 直後(직후)입니다.
直感(직감)으로 전보의 내용을 나는 알아 차렸읍니다.
“괜찮습니다. 염려말고 읽어 보아 주십시오.”
태연하게 대답은 하면서도 그때 내 목소리는 아마 약간 떨렸을 것입니다.
電文(전문)은 역시 내 직감에 어긋나지 않았읍니다. 어린 목숨이 숨을 거두었다는 기별이었읍니다.
10년이 가도 15년이 지나도록, 나는 그날의 그 철도 직원의 목소리를 잊지 못합니다. ‘남의 불행’, ‘남의 슬픔’을 바로 내 것으로 換算(환산)할 수 있는 그 眞情(진정), 그 良識(양식)이야말로, 내가 목숨을 걸어서 내 향토, 내 조국에 옮기고 싶은 부러운 美德(미덕)의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해서 나는 감히 일본의 ‘善(선)’을 안다고 自處(자처)합니다.
태평양 전쟁이 끝나던 바로 그 해 이른 봄, 달 없는 어두운 밤길을 나는 ‘나까노’(中野)의 어느 친구댁을 찾아 갔다가 돌아 오던 길입니다. 燈火管制(등화관제) 중이라 지척을 분별하기 어려운데다가 비가 개인 뒤라서 길이 몹시 질었읍니다.
“물구덩이를 밟지 않아야 하겠는데……."
나는 어느 길 모퉁이에 서서 잠시 발을 멈추고 망설였읍니다. 그 때 저 쪽에서 오는 등불 하나가 눈에 띄었읍니다. 여인네들이 두서넛 무슨 이야기를 지껄이면서 내가 서 있는 쪽으로 걸어옵니다.
‘저 등불이 지나가기 전에 물구덩이 있는 데를 보아 두리라.’ ― 그런 생각으로 기다리다가 그 등불이 내 옆을 지나치기 전에 나는 재빠르게 발을 앞으로 내놓았읍니다.
거의 2, 30보 ― 딴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빠른 걸음을 옮겨 겨우 큰 길에 나왔읍니다. 그리고는 짐짓 뒤를 돌아보았읍니다. 어렴풋이나마 길이 보이던 것이 이상해서‥‥.
내가 망설이고 섰던 그 地點(지점)에 위로 치켜 든 등불이 그냥 머물러 있었읍니다. 내가 물 괸 땅을 다 지나도록까지 길을 비쳐 주고 있었던 것을 그제야 알았읍니다.
눈물겨운 마음으로 나는 그 순간에, 내 향토의 어느 밤거리에서도 이런 ‘인인애’(隣人愛)의 촌경(寸景)을 다시 한 번 볼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해 보았읍니다. 그리고 또 하나 가슴에 치받쳐 오른 것은 ‘나라는 敗(패)할지나 이 人情(인정)이 아까워라’ 하는 애처롭고 哀切(애절)한 생각이었읍니다.
年前(연전)에 나는 어느 글 속에 이 얘기를 쓴 일이 있읍니다. 이런 글을 씀으로 해서 내가 내 祖上(조상)에 죄를 진 것이 된다면 주저없이 나는 그 죄를 달게 받겠읍니다.
‘自由魂’(자유혼)이란 그 한 마디
일본의 ‘善’(선)에 대해서 내게 직접 관련이 있는 두어 가지 例(예)를 말씀했읍니다. ‘그까짓 것쯤으로……’ 하고 여러분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실지 모릅니다마는, 이것이야말로 여러 분이 子孫代代(자손대대)로 물려 가야 할 보배입니다. 그것이 高度(고도)의 문화 정신에서 우러나온 것이거나 아니거나, 일상 생활의 지극히 평범한 倫理(윤리)가 여기까지 이르렀다는 것은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읍니다.
동양의 道義(도의)는 남의 ‘善’(선)을 稱頌(칭송)하되 남의 ‘惡’(악)을 나타내지 말라고 했읍니다. 이 글의 목적이 일본의 ‘惡’(악)을 지적하거나 규탄하는 데 있지 않은 것을 이미 여러분은 아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善’(선)의 반면에 있는 또 하나의 ‘惡’(악)을 헤아리지 않고는 이 글의 條理(조리)가 서지 않습니다.
序頭(서두)에서 말씀했거니와 나는 過半生(과반생) 20년을 여러분의 나라에서 지냈읍니다. 여러분의 착한 것, 잘한 것을 아는 그 比例(비례)로, 여러분의 그릇된 面(면), 잘못된 面(면)을 보아 왔읍니다. 그러나 그것을 일일이 들어서 여기다 벌려 놓으려는 것이 아닙니다.
일본의 <政治惡(정치악)>은 이미 全世界(전세계)가 아는 바입니다. 이른바 <東京 裁判(동경재판)>은 國際道義(국제도의)의 이름 아래 그 일부를 수행했읍니다. 사실은 그러한 罪狀(죄상) ― 법정에서 論議(논의)되고 追窮(추궁)하던 그러한 몇몇 조목의 罪名(죄명)은, 40년의 긴 세월에 우리 민족이 겪어 온 입으로 형언할 수 없는 가지가지의 屈辱(굴욕)에 비해서 너무나 輕(경)하고 적은 것이었읍니다. 정복자의 권세 앞에 阿附(아부) 追從(추종)하던 몇몇 顯官(현관) 名士(명사)를 제외하고는, 3천萬(만)의 어느 누구가 被害者(피해자) 아니었다고 할 것입니까?
戰爭挑發(전쟁도발), 集團虐殺(집단학살)에서만 일본의 죄악이 시작된 것은 아닙니다. 나는 내가 어려서 자란 鎭海(진해) 軍港(군항)에서 守備隊(수비대)의 一下士官(일하사관) 앞에 불손했다는 이유로 길가던 良民(양민) 하나가 打殺(타살)당한 것을 압니다. 이름없는 村夫(촌부) 한 사람이 일본에 恨(한)을 품고 죽었다고 하면 그것은 적은 일이므로 해서 죄가 아니라 할 것입니까? 하물며 마을 하나가 아니요, 13道(도) 방방곡곡이며, 하물며 어느 하루가 아니요, 半世紀(반세기)의 긴 세월에 걸쳐서입니다.
나라 없으므로 해서 억울하게 죽고, 혹은 그 生涯(생애)를 진창에 파묻어 버린 그런 내 同族(동족)들의 告發狀(고발장)을 만일에 일일이 受理(수리)했다고 한다면, 그 서류의 무더기는 일본의 議事堂(의사당) 하나를 다 비워서 충당해도 부족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일본의 惡(악)>을 여기다가 또 한 번 들추자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貴國(귀국)에서 10數卷(수권)의 著書(저서)를 내고, 貴國(귀국)의 문화인, 예술인들 사이에 약간의 知己(지기)를 가진 사람입니다. 그 중에는 莫逆(막역)이라고 할 信友(신우)가 있고, 恩誼(은의)를 입은 스승이 있었읍니다.
그러한 나로서도 ‘도오꾜오’의 留置場(유치장) 풍속이 몸에 저리도록 배었읍니다. 내 履歷書(이력서), 내 自敍傳(자서전)의 가장 상세한 資料(자료)는 東京(동경) 경시청에 보관된 서류 以上(이상)이 없을 것입니다. 關東大震災(관동대진재)에 불타버린 30년 전 하숙집 번지까지도 거기는 밝혀져 있읍니다.
그러나 그러한 私怨(사원)을 치켜 들어서 오늘날의 일본에 舊債(구채)를 받으려는 것도 아닙니다.
20여년 전에 ‘도오꾜오’에서 본 <벤허>라는 영화의 한 장면을 나는 잊지 못합니다. ‘로마’에 사로잡힌 유대인 청년 하나가 쇠사슬에 발목을 얽매인 채 수백명의 노예들과 같이 북소리에 맞추어 戰艦(전함)에서 노를 젓고 있읍니다. 사령관의 눈이 그 청년의 노려 보는 눈과 마주쳤읍니다.
“너는 여기 온 지 얼마나 되었나?”
사령관이 묻자 ‘벤허’는 배앝아 내듯 대답합니다.
“네 놈의 달력으로는 2年(년)이다마는, 내 달력으로는 2백년이다!”
사령관은 물끄러미 ‘벤허’를 내려다 보다가 곁에 섰던 副官(부관)에게 명령합니다.
“저 놈을 쇠사슬에서 풀어 주어라. 저 놈은 奴隸(노예)가 아니다. <自由魂(자유혼)>을 가지 놈이다.”
내 自身(자신)을 ‘벤허’의 位置(위치)에 두고 몇 백번 몇 천번 마음 속으로 되풀이하던 그 한 마디―, 온 세계를 다 잃어도 그 한 마디만은 잃지 않으려던 <自由魂(자유혼)>.
그 쇠사슬이 풀리고, 그 자유가 다시 돌아 왔다고 합니다. 이제는 문서를 뒤지지 않겠읍니다. 치부해 두었던 미움과 원한을 오늘로 모조리 불살라 버리고, 이 通信(통신)이 여러분에게 전달하려고 하는 본래의 뜻으로 話題(화제)를 돌이키겠읍니다.
日本(일본)의 <惡(악)>
‘우에노’(上野)나 ‘히비야’(日比谷) 같은 公園지대(공원지대)에 가면 쇠고리를 엮어서 줄을 두른 데가 자주 눈에 뜨입니다. 銅像(동상) 주위에, 잔디밭 가에, 혹은 연못과 길 사이에-.
그리고 그 쇠고리를 이은 나지막한 기둥들은 대개 鐵柱(철주)에다 ‘시멘트’를 입힌 것입니다. 그냥 ‘시멘트’를 입힌 것이 아니요, 거기다 솜씨를 부려서, 빛깔은 ‘시멘트’인데도 모양은 흡사 나무같이 만들어 놓았읍니다. 가지를 잘라낸 자국이 있고, 나무껍질도 그냥 붙어 있고, 게다가 年輪(연륜)까지 그려져 있읍니다.
주택지에서 흔히 보는 것은 푸른 대[竹]를 나란히 세워서 만든 울타리입니다. 그러나 그중에 진짜 대를 쓴 것은 열에 하나가 드물고, 대개는 ‘부리끼’(함석)에다 ‘페인트’로 그린 대[竹]의 모형들입니다.
雅趣(아취)란, 생활의 전통에서. 그 문화의 蓄積(축적)에서, 허구한 세월을 거쳐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마치 그것은 돌에 서린 石衣(석의)와 같고, 쇠그릇에 앉은 녹[錆]과도 같습니다. 人爲的(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까닭이 없으련만 그것을 人爲(인위)로 능히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여러 분들의 국민성입니다. 雅趣(아취)에다 實用(실용)까지 겸했으니 이렇게 편리할 수가 없읍니다. ‘시멘트’로 만든 나무기둥, ‘부리끼’로 된 대 울타리는 확실히 진짜보다도 堅牢(견뢰)하고 오래갈 것입니다.
내가 지적하려는 것은 일본의 政治惡(정치악)이나 무슨 私怨(사원)이 아니요, 실로 일상 생활에서 보는 이러한 사소한 <거짓>들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아마 의식치 못할 이 작은 문제들 속에 기실은 일본을 그르칠 중대한 禍因(화인)이 숨어 있읍니다. 모르는 이는 이것을 일본의 재간이라 하고 용한 꾀라 하여 賞讚(상찬)하리다마는, 그러나 어느 모로 따져 보아도 틀림 없는 이것은 僞造(위조)요 假作(가작)이요, <지름길>입니다.
‘조선 명산 人蔘(인삼) 엿’이란 것을 혹시 여러분은 선물로 받으신 일이 없는지요? 이 나라에 살던 일본인들 손으로 만들어진 이 商品(상품)은 ‘카스텔라’ 상자 같은 函(함)에 넣어서 전에는 人蔘(인삼) 그림이 그려져 있읍니다. 내가 말하려는 것은 그 내용이나 성분이 아닙니다. 인삼이 들었건 안들었건 그것은 論外(논외)입니다. 箱子(상자)를 열면 5분의 4는 칸을 질러 빈채이고, 정작 人蔘(인삼)엿이란 것은 아주 얇다랗게 위로 한 줄이 놓여 있을 뿐입니다.
主(주)로 旅行者(여행자)를 고객으로 삼는 이런 類(류)의 상품은 되도록 容量(용량)을 적게 줄여서 짐이 되지 않게 하는 것이 친절한 도리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상식을 逆行(역행)해서 도리어 實質(실질)의 4배나 되는 큰 상자가 여기 쓰입니다. 그 이유는 누구보다도 여러 분 자신이 잘 압니다. 제가 보낸 ‘오미야게’(선물)가 한 바퀴 돌려서 또 한번 제 손에 돌아왔더란 이야기가 있읍니다. 그토록 이런 상품은 손에서 손으로 ‘릴레이’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때 重視(중시)되는 것은 實質(실질)보다도 거죽입니다. ‘미쓰꼬시’(三越)의 包裝紙(포장지), ‘도라야’(虎屋)의 상자를, 내용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구구한 작은 이야기들입니다. 그러나 옛날부터 原子時代(원자시대)란 오늘날까지, 엿이라면 길게 뽑아 가루를 쳐서 낱개를 가락으로 팔거나, 크게 한덩이로 뭉쳐서 칼끝으로 떼어 팔 줄밖에 모르는 우리들 한국인으로서는, 이것은 어마어마한 詐術(사술)이요, 弄奸(농간)입니다. 이런 사술이 의심없이 통용되는 일본이란 나라에 대해서 우리는 敬意(경의)를 표할 도리가 없읍니다.
‘오미야게’에 관련한 이야기가 또 하나 있읍니다.
‘에노시마’(江の島)는 이름난 景勝地(경승지)입니다. 바로 지척인 ‘기미꾸라’(鐮倉)에, 나는 終戰(종전) 직전까지 몇해를 살았읍니다. 손님들을 동반해서 자주 ‘에누시마’에 갔읍니다.
작은 섬 하나을 縱貫(종관)해서 거기는 온통 名産品(명산품) 가게의 行列(행렬)입니다. 젊은 여인들이 가게 앞에 서서 지나가는 손님을 불러 들이는 소리가 진종일 그치지 않습니다.
가게마다 파는 상품은 비슷비슷합니다. 조개 껍질로 만든 人形(인형)이 있읍니다. 복어를 배를 불려서 만든 초롱[提燈]이 있읍니다. 石膏(석고)에다 모래를 뿌린 ‘후지’산[富士山]이 있읍니다. 그밖에 형형색색의 깜찍한 상품들은 아마 百(백)으로 헤이고도 남을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에노시마’에만 한한 것이 아니요, ‘이카오’[伊香保]니, ‘닛꼬오’[日光]니, ‘아따미’[熱海]니 하는 遊覽地(유람지)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광경입니다.
機智(기지)와 着想(착상)의 妙(묘)가 가히 탄복할 만합니다. 복어가 변해서 초롱이 된다는 것은 奇想天外(기상천외)입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나는 한 번씩 ‘에노시마’를 다녀올 때마다 <걸리버 여행기>의 小人國(소인국)을 구경하고 온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렇게 그 상품들을 옹졸하고 구차합니다. 인간의 지혜를 써먹는 허다한 길중에도 아마 가장 矮小(왜소)하고 拙劣(졸렬)한 例(예)가 이 ‘오미야게’들일 것입니다.
日本文化(일본문화)의 土壤(토양)은……
문화란 天來(천래)의 것이 아닙니다. 交流(교류)와 回轉(회전)을 반복한 나머지에 그 토양에 적합한 種子(종자)가 그 適應(적응)된 조건 아래서 싹을 트고 자라서, 마침내 한 나라의 문화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면 표면에 나타난 생활 문화에서 거꾸로 찾아 들어가 그 토양의 成分(성분)을 판단할 수도 있을 이치입니다.
毫厘(호리)의 假借(가차)를 허용치 않은 지극히 섬세하고 신경질적인 것이 일본 문화의 특질입니다. ‘가부끼’(歌舞伎)며 ‘노오 교오겡’(能狂言), ‘분라꾸’(文樂)의 ‘닝교오 시바이’(人形芝居)같은 무대 예술을 위시해서, 바둑, 將棋(장기)며, 심지어는 한 접시의 요리, 한 잔의 茶(차)에 이르기까지 이 법도는 엄격히 지켜져 왔읍니다. 소위 名人氣質(명인기질)이란, 이 문화 정신에 한결같이 충실한 尊奉者(존봉자), 혹은 繼承者(계승자)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일본이란 토양은 정녕 良心的(양심적)이고 小乘的(소승적)이라야 할 이치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일본 문화의 存在 理由(존재이유)가 서지 않습니다.
일본 문화가 外來人(외래인)의 눈에 好奇(호기)와 관심을 끄는 이유가 여기 있읍니다. 동시에 작은 거짓, 구구한 道義(도의)가 결함이 문화 정신의 墮落(타락)으로 指摘(지적)되는 원인도 또한 이 ‘小乘的(소승적)인 문화 특질’에 연유합니다.
나무 토막으로 가장한 ‘시멘트’ 기둥, 푸른 대[竹]로 눈을 속인 ‘부리끼’ 울타리가 일본인의 생활면에 등장한 것은 그리 오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옛날에 없던 이것이 明治期(명치기) 이후의 新風俗(신풍속)이라면 그렇게 年代(연대)를 국한해도 좋습니다. 그러나 體質(체질)이 가냘프고 腺病質(선병질)인 일본 문화 그 자체 속에 墮落(타락)과 腐敗(부패)의 素因(소인)이 잠재해 있다고 보는 것은 나 하나의 獨斷(독단)은 아닐 것입니다.
눈을 감고, ‘가미요’(神代) 이래 2천여년을 일본이 걸어온 路程(노정)을 두고 생각해 봅니다.
歷史書(역사서)를 펴지 않아도 走馬燈(주마등)처럼 머리 속을 지나가는 그것은 一連(일련)의 다채로운 畫幅(화폭)입니다. 外來(외래) 文物(문물)의 수입에 餘念(여념)이 없던 ‘아스카’(飛鳥), ‘나라’(奈良)를 비롯해서, 中世(중세) 일본 ― ‘헤이안’(平安), ‘가마구라’(鎌倉), ‘무로마지’(室町)에서 ‘겐로꾸’(元祿)에 이르는 多端多事(다단다사)한 문화의 起伏(기복)―, 대륙에 준 것은 없으되 ‘아시아’ 대륙의 文物(문물)은 활발히 일본으로 흘러 들어 오고, 體質(체질)에 맞지 않는 문화는 韓半島(한반도)란 媒介體(매개체)를 경유함으로써 그 消化不良症(소화불량증)을 未然(미연)에 방지했읍니다. 中華(중화) 大陸(대륙)이 일본 문화의 어머니라면, 韓半島(한반도)는 알뜰한 無償(무상)의 乳母(유모)였읍니다 (우리는 그 代價(대가)를 바란 일이 없었길래―). 그러한 恩誼(은의)에 대해서 일본이 보답한 것이 무엇인지― 三韓(삼한) 征伐(정벌)이라 하고 文祿役(문록역)(임진란)이라 하여 여러분이 歷史(역사)의 자랑거리로 삼던 이야기들이 바로 그것입니다. 倭寇(왜구)가 韓半島(한반도)를 席捲(석권)하고, 도처에서 양떼 같은 어진 백성들이 무찔러 죽었으되, 불행히도 그 때 이 나라에는 原子彈(원자탄)이 없었읍니다. 그것은 우리들의 不幸(불행)이기보다 歷史(역사)의 傲慢(오만)이 助長(조장)된 의미에서 틀림없는 당신네들 自身(자신)의 불행이었읍니다.
<받는 民族(민족)>에서 <주는 民族(민족)>으로
明治維新(명치유신) 이후에 새 문화가 물밀 듯 밀려 들어 와, 일본은 淸日(청일)·露日(노일)의 戰役(전역)을 거쳐 어느 새 세계의 列强(열강)과 어깨를 겨누게 되었읍니다. 英(영)·佛(불)·美(미)·獨(독)은 일본에 걸음걸이를 가르쳐 준 媬母(보모)요, 敎師(교사)들이었읍니다. 일체의 新文化(신문화)는 이들 선진 국가의 ‘루우트’를 통해서 섭취되었읍니다. 심지어는 전쟁에서 패배한 露國(노국)의 문화까지 받아 들여, ‘하세가와’(長谷川二葉亭), ‘노보루’(昇曙夢), ‘요네까와’(米川正夫)들 露文學者(노문학자)까지 輩出(배출)했으나, 일본 문화의 한 토막이 ‘노서아’로 옮겨진 일은 없었읍니다.
人類(인류)를 兩分(양분)해서 <주는 者(자)>와 <받는 者(자)>로 구별한다면, 일본은 의심없이 그 後者(후자)입니다. 남의 문화를 빌려오면 어느 새 손쉽게 제것을 만들어 버리는 妙術(묘술)―, 그 재간은 가히 경탄할 만합니다. 그러나 마침내 남에게 나누어줄 아무 것도 일본은 가진 일이 없었읍니다.
태평양 전쟁에서 설사 일본이 이겼다손 치더라도, 일본은 또 하나 문화가 마련하는 勝敗(승패)에 있어서 여지 없이 그 실력을 폭로했을 것입니다. ‘야마또 다마시이’(大和魂) ― 神道(신도) ‘이께바나’(生花) ― ‘차노유’(茶道) ― ‘우끼요에’(浮世繪) ― ‘다다미’(疊) ― 그리고 무엇, 무엇 ―, 일본이 誇示(과시)하고 自矜(자긍)하는 그 어느 것을 들추어보아도 남의 민족에 營養(영양)을 줄 ‘칼로리’는 아무데도 없었읍니다.
<天國(천국) 일본>을 부러워하기 전에 우리는 진심으로 憂慮(우려)를 마지 않습니다. 敗戰(패전)은 일본에 있어서 天惠(천혜)의 機會(기회)였읍니다. 일체의 허장 상세를 揚棄(양기)하고 벌거숭이의 새 紀元(기원)을 創造(창조)할 絶好(절호)의 ‘찬스’였읍니다. 받는 민족에서 주는 민족으로―, 模倣(모방)의 민족에서 創意(창의)의 민족으로―, 背信(배신)과 오만의 민족에서 謙虛(겸허)와 성실의 민족으로―, 蘇生(소생)하고 再出發(재출발)할 起點(기점)이 실로 여기 있었읍니다.
쉽사리 天國(천국)이 되지 말기를 충심으로 바라는 바입니다. 敗戰(패전)의 沈痛(침통)한 체험― 그 체험만이 믿을 수 있는 일본의 새로운 재산입니다.
敗戰國(패전국) 일본이 外來(외래) 문화를 迎合(영합)하기에 얼마나 汲汲(급급)한지는 상상키 어렵지 않습니다. 거기 대해서는 귀동냥한 이야기 하나를 여러분에게 도로 돌려드리면 족할까 합니다.
동경 ‘마루노우찌’(丸の內) 일대는 불과 5, 6십년 전까지도 갈대가 무성한 濕地帶(습지대)였읍니다. ‘海上(해상) 빌딩’을 지은 ‘쥬우죠오’(中條) 工學士(공학사)(作家 中條百合子의 父親)는 이 지대의 특수성을 고려하서 地盤 工事(지반공사)에 특별한 留意(유의)를 했다고 합니다. 또 하나 그 근처에 큰 ‘빌딩’ 공사를 담당한 어는 건축가는 일부러 미국까지 가서 3년 동안이나 고층 건물의 壓力(압력)에 견딜 벽돌(煉瓦)을 연구하고 돌아 왔읍니다.
‘뉴우요오크’ 아닌 東京(동경)에 關東大震災(관동대진재)가 일어났을 때, 海上(해상) ‘빌딩’은 地盤(지반) 전체가 배[船]처럼 흔들렸으나 건물은 傷(상)치 않았고, 美國(미국)서 배워 온 또 하나의 ‘빌딩’은 대단한 피해를 입어 거의 새로 짓다시피 大修理(대수리)를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새 것은 찾으면 興(흥)하고 옛 것을 따르면 衰(쇠)한다는 것은 歷史(역사)가 일러주는 敎訓(교훈)입니다. 그러나 그 새 것을 어떻게 맞아 들이느냐?에, 문제는 달려 있읍니다.
世界(세계)의 日本(일본)이기 전에
“네가 말하는 새 것이란 대체 어떤 것이냐? 내일이면 없어지는 것―, 또 다른 새것이 나오면 그 앞에서는 헌 것이 되어 버리는 것―, 그것이 너희들이 말하는 새 것이냐?”
작년에 映畫化(영화화)되었다는 ‘오사라기’(大佛次郞)씨의 원작 ‘무나까따 시마이’(宗方姉妹=‘아사히’신문 연재) 중에 이런 臺詞(대사)가 있었읍니다. ‘아방게일’(戰前派)인 그 언니가 ‘아프레게일’(前後派) 동생에게 하는 말입니다. 나는 그 소설을 읽은 일이 없고, 하물며 영화를 본 것도 아닙니다마는, 이 臺詞(대사) 하나로도 戰後(전후)에 兩立(양립)된 두 생활 정신의 摩擦(마찰)과 苦憫(고민)을 엿볼 수 있읍니다.
외국인이 칭송하는 일본―, 한국 戰線에서 싸우고 있는 UN군병사들이 꿈에 본다는 일본―, 그 好意와 憧憬이 진실 일본의 德(덕)과 善(선)에 대한 代價(대가)로 지불된 것이라면 그 이상의 다행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점에 있어서 역간의 懷疑(회의)가 없지 않습니다. 만일 이것이 일본이란 體質(체질)에 留意(유의)함이 없이 마구 맞아 들인 새 것과의 親和(친화) 野合(야합)에서 생겨난 結果(결과)라면 이 摩天樓(마천루)는 지극히 위험합니다. 地震(지진)에 흔들이지 않더라도 언젠가 한번은 무너져 버릴 砂上(사상)의 樓閣(누각)입니다.
“―며칠 전 新聞社(신문사) 친구 하나가 술이 한 잔 돼서 ‘신쥬꾸’(新宿) 역을 나오다가 ‘노리꼬시’(乘越)로 改札口(개찰구)에 붙들렸다. 惡意(악의) 아닌 것을 百方 陳辯(백방진변)했으나 듣기는 커녕 ‘이 자식! 신쥬꾸역을 몰라 봤더냐’고 추상같은 호령―. 신문사 친구, 홧김에 좀 골려 주려고 마침 포켙 속에 들었던 <美大(미대) ‘리이그’ 開幕(개막), ‘세네타스’ 先勝(선승)> 이란 英文(영문) ‘타이프’로 찍은 UP 전보를 기고만장한 國鐵(국철) ‘맨’의 코끝에 내밀었더니, 별안간에 顔面(안면) 蒼白(창백), 平身 低頭(평신저두)로 한 번만 용서하하라고 백배 사죄. 以後(이후)로 이 친구, 술 한 잔 할때면 英文(영문)으로 찍은 ‘타이프’ 문서를 반드시 가지고 다니기로 했다나……. 그것이 약광고거나 미국제 ‘드라이 아이스’의 선전문이서거나 간에 효과는 百發 百中(백발백중). 그야 國鐵(국철) 종업원이나 警官(경관)뿐이아니라 이 現象(현상)은 일본 전국 도처에서 目睹(목도)하는 풍경이지마는…….”
작년 6월호 《文藝春秋(문예춘추)》의 6호 기사에서 引用(인용)한 한 구절입니다. 이런 기사가 활자로 실려졌다는 것이 벌써 거기 대한 反省(반성)과 批判(비판)을 의미하는 것이리다마는, 事大主義(사대주의)를 한국의 전매 특허로 아는 일본에도 ‘긴[長] 것에는 감겨라’는 卑屈(비굴)이 <생활 哲學(철학)>이 있었다는 것을 이 6호가 기사가 여실이 立證(입증)해 줍니다.
이 철학은 揚棄(양기)되어야 하겠읍니다. 새 것은 활발히 받아 들리되, 일본 문화의 고유한 特質(특질)은 어디까지나 살려 나가야 할 것입니다. 일본이 능히 인류에 寄與(기여)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일본이 그 문화의 個性(개성)을 維持(유지)할 수 있느냐 없느냐와 一致(일치)되는 課題(과제)입니다.
年前(연전)에 신문의 통신 기사를 통해 ‘구매’(久米正雄)씨가 일본을 美國(미국)의 一州(일주)로 만들고, 星條旗(성조기)에 별 하나를 더 加(가)하자고 提案(제안)했다는 소식을 들었읍니다. 간단한 기사 하나로는 그 眞意(진의)를 알기 어려우나, 이것이 만일 사실이라면, 그리고 정치와 문화의 連關性(연관성)을 우리가 否定(부정)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일본의 <義務 抛棄(의무포기)>요, <夜間 逃走(야간도주)>입니다.
《文藝春秋(문예춘추)》의 금년 5월호에 흥미 있는 글 하나가 실려 있읍니다. ‘아메리카의 남편과 일본의 남편’이란 제목입니다. 행주치마를 두르고 부엌에서 그릇을 씻는 ‘아메리카’의 남편을 어느 英字(영자) 신문의 일본인 主筆(주필)이 諷刺(풍자)한 데서부터 시작된 甲論乙駁(갑론을박)의 왁자지껄한 是非(시비) 곡절記(기)입니다.
내 자신 부엌에서 접시를 씻을 勇氣(용기)는 없읍니다. 일본의 대다수 남성이 역시 그러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접시를 씻지 않는 대신에 아내에 대한 애정과 성실은 다른 방법으로 표시하겠읍니다. 시내가 행주치마를 두르고 부엌에 서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동양인의 羞恥(수치)일 리 만무합니다.
이 작은 話題(화제) 하나로도 동양과 사양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生理(생리)의 距離(거리)를 설명하기에는 充分(충분)합니다. 일본은 <世界(세계)의 日本(일본)>이기 전에, 먼저 <東洋(동양)의 日本(일본)>, <일본의 일본>이라야 하겠읍니다. 지나친 發言(발언)입니다마는 이것은 이웃된 者(자)로서의 간곡한 忠告(충고)요, 희망입니다.
서로의 共同利害(공동이해)에 있어서
《朝鮮詩集(조선시집)》을 읽고 한국이 그리워서 찾아 왔다는 密航(밀항) 청년 하나를 나는 그 책의 著者(저자)인 책임으로 만난 일이 있읍니다. ‘도마배지’(苦米地) 장관의 조카되는 이 청년의 인상은 순실하고 좋았읍니다. 한국의 경찰에서는 그를 國際(국제) ‘스파이’ 被疑者(피의자)로 대접했으나 내가 보는 바로는 한갓 善良(선량)한 ‘로맨티스트’였읍니다. 경찰의 오해도 풀려서 月餘(월여) 後(후)에 그는 일본으로 다시 돌아 갔읍니다.
《도오꾜오 아사히(東京朝日)》의 社會面(사회면)에 그의 歸國談(귀국담)이 커다랗게 실렸고, 그 대부분이 나와의 대화를 전한 것이었읍니다. 誤傳(오전)이 약간 있어서 한국의 ‘고십 메이커’들에게 일시 話題(화제)를 제공했읍니다.
‘도마배지’ 군에게 내가 한 말의 要旨(요지)와 그 錯誤點(착오점)은 대개 이러합니다.
A, 한국에서 일본으로 密航(밀항)해 간 사람이 수만 명은 넘을 것이니 그 答禮(답례)로 한두 사람 일본인이 왔다고 해서 야단법석할 것은 없고, 내가 爲政者(위정자)라면 國賓(국빈) 대접을 했을건데― 이것은 농담.
B, 그대는 일본이 싫어서 한국으로 왔다고 하나 한국의 어느 모를 일본보다 낫(優)다고 보았는지. 일본이나 한국이나 문화는 다 같이 混沌 狀態(혼돈상태)에 있어 마치 濁流(탁류)같으나, 그래도 일본 문화는 체로 거른 濁流(탁류)요, 한국 문화는 거르지도 못한 진짜 濁流(탁류)라고 한 것, 이것이 《東京 朝日(동경조일)》의 記事(기사)에는 文化(문화)란 의미를 떠나 한국과 일본의 比較論(비교론)이 되었고,
C, 한국에서 지금 제일 아쉬운 것은 정치나 경제의 기술적 貧困(빈곤)보다 먼저 良心(양심)과 눈물과 創意(창의)의 源泉(원천)인 <詩精神(시정신)>이라고 한 것이, 記者(기자)의 붓끝으로 ‘한국인의 念願(염원)은 위대한 詩人(시인)됨에 있다’고 전해져서, 한국이 대단한 <예술의 나라>가 되고, 따라서 제2, 제3의 ‘도마배지’군을 만들 위험스런 기사가 되었고,
D, 동양의 運命(운명)을 동양인된 우리가 회피할 도리는 없으니, 지금은 半世紀(반세기)의 정치적 감정으로 韓·日(한·일)의 文化 交流(문화교류)가 暗礁(암초)에 얹혀 있으나, 不遠(불원)한 將來(장래)에 서로의 公同(공동) 利害(이해)에 있어서 提携(제휴)하고 협력할 날이 반듯시 있으리라는 이야기가, 한국의 速成(속성) 애국자들 눈에는 정치적인 親日派(친일파)의 辯(변)으로 해석되었던 등등입니다.
‘도마배지’ 군을 만난 것은 3년 전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나는 이 意見(의견)과 희망을 버리지 못합니다. ‘도마배지’ 군 같은 순실한 청년을 통해서 일본의 젊은 世代(세대) ― <영 제너레이션>에 期待(기대)함이 큰 것을 전하고 싶습니다.
‘내 어머니는 <레프라>일지도 모릅니다’
이제는 이 장황한 편지에 결말을 지어야 하겠읍니다. 일본에 대해서 너무 아는 체한 것이 부끄럽습니다마는, 그러나 하고 싶은 얘기를 이것으로 다한 것은 아닙니다. 願(원)컨대 여러분들과 자리를 같이해서 한국과 일본이 지닌 이 久遠(구원)의 宿命(숙명)에 대해서, 좀더 활발하게, 좀더 솔직하게, 胸襟(흉금)을 토로하고 싶습니다. 그런 기회가 아직도 내게는 허락되지 않았읍니다.
구원의 숙명 ― 진실로 그렇습니다. 미우나 고우나 이것은 숙명적인 因緣(인연)입니다. 과거의 數千年(수천년)이 그러했고, 다가올 數萬年(수만년)이 또한 그러할 것입니다. 個人(개인)의 이웃은 떠나 버리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민족의 이웃, 국가의 이웃은 떠나 버릴 수 없고, 땅덩이를 실어서 이사할 수도 없읍니다.
한국이 오늘날 當面(당면)하고 있는 고난과 悲痛(비통)을 이미 여러분은 아실 것입니다.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최대한의 쓰라림과 불행을 우리는 이미 겪어온 것 같습니다. 여기 대해서는 아름다운 말, 豪氣(호기)스런 壯談(장담)으로 외면(外面)을 糊塗(호도)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최후로 한 마디 말을 덧붙여야 하겠읍니다.
우리는 逆境(역경)에 있어서 强(강)한 민족이었읍니다. 新羅(신라)의 옛날은 모르거니와 高麗(고려)의 문화, 李朝(이조)의 學藝(학예)가 한가지로 苦難(고난)의 어둠 속에서 더 한층 빛났다는 것이 우리들의 자랑입니다.
우리의 過誤(과오) ― 나날이 우리 스스로가 불행을 자승(自乘)해 가고 있는 이 현실을 否定(부정)치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 하나의 攝理(섭리)를 믿는 者(자)입니다. 사나운 바람, 매운 서리[霜]를 견디고, 땅속에 잠겼던 한 톨의 보리알이 움을 틉니다. 이것이 민족의 地熱(지열)입니다. 만일 이 地熱(지열)이 없었던들, 우리는 몇 世紀(세기) 前(전)의 어느 國難(국난)에서 벌써 滅(멸)해 버렸을 민족입니다.
‘가미가제’(神風)의 奇蹟(기적)을 바라는, 이것은 神話(신화)가 아닙니다. 침략치 않고, 저주할 줄 모르는 어진 백성이, 汚辱(오욕)과 艱難(간난)에 견디어 내는 하나의 抗毒素(항독소)입니다.
일전에 친한 美國人(미국인) 한 분이 내게 이런 말을 했읍니다.
“‘미스터’ 김! 그대가 만일 한국이 아니고 미국이나 ‘프랑스’에 태어났던들, 몇 배, 몇십배로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었으련마는……."
“천만의 말씀.” 그 때 내 입으로 나온 대답입니다.
“내 어머니는 ‘레프라’(문둥이)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나는 우리 어머니를 ‘클레오파트라’와 바꾸지 않겠읍니다.”
“오오 그러리라!”
그는 자못 심각하고 침통한 표정으로 내 손을 쥐었읍니다. 그러나 이 말을 그날 내가 처음 한 것은 아닙니다.
1939년 11월호 《婦人公論(부인공론)》에 <보오노 하나>(박꽃)란 수필 하나가 실려 있읍니다. 鄕土(향토)에 대한 내 愛情(애정)과 信仰(신앙)을 고백한 글입니다.
‘향토는 내 宗敎(종교)였다.’ 거기 쓴 이 한 마디 말은 목숨이 다할 날까지 내 가슴에 지닐, 괴로우나 그러나 모면치 못할 十字架(십자가)입니다.
문둥이의 조국! 그러나 내게 있어서는 어느 極樂淨土(극락정토)보다도 더 그리운 어머니의 품입니다.
‘가마꾸라’(鎌倉) ‘하세’(長谷)의 내 살던 집에 무궁화 한 그루가 있었읍니다. 수필집 이름은 <木槿(목근)의 뜰>이라 지었다가 그 책은 마침내 나오지 못한 채, 終戰(종전)되던 해 2월, 손가방 하나를 들고 故國(고국)으로 돌아왔읍니다. 그리고 6년이 지났읍니다.
陸軍(육군)의 비밀 공장 基地(기지)로 들어 가 그 집이 헐리웠다는 소식을 내가 떠난 月餘後(월여후)에 들었읍니다. 내 살던 집은 없어지고, 뜰에 섰던 무궁화도 지금은 아마 피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흰 꽃 모습은 언제나 눈만 감으면 내 앞에 있읍니다.
여러분에게 보내는 이 편지에 <木槿通信(목근통신)>이라고 이름지은 쑥스러운 哀傷(애상)을 웃어 줍시사 하고 이 글을 끝맺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