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목련화 그늘에서
목련화(木蓮花) 그늘에서 -안재홍-
목련화는 남국의 식물이라 본국에서 이를 보기 어렵다. 연화(蓮花)는 꽃의 군자인 자이거니와, 그보다도 불교의 상징으로 유명하게 되었다. 심산 고대(高臺)에서 연화를 볼 수 없거니와 성개(盛開)하는 목련을 보는 데에 자못 황홀한 정감을 돋우는 바 있다.
목련은 남극의 식물이거니와, 연화도 워낙은 남국의 식물이다. 북극의 지당(池塘)에서 오히려 향(香)이 10리에 들리는 연화를 볼 수 있지마는 남국의 연꽃이 가장 풍토에 걸맞는 자이다.
채련(採蓮)하는 오희(吳姬)·월녀(越女)를 인증으로 할 것까지 없이, 난련(暖蓮)은 난국(暖國)의 소산이다. 연의 가장 흔한 자가 홍련(紅蓮)이요 백련이 적이 진귀한 자이지마는, 청련(靑蓮)에 이르러서는 연 중에 가장 일품이 자로서 범인의 얻어 볼 수 없는 바이다. 인도의 항하(恒河) 유역에 있고, 애급의 나일강 상류에서 볼 수 있다 하나 그도 또한 흔하지 않은 것이다.
옛날 이 태백이 청련거사(靑蓮居士)라고 자칭하니, 그 범품(凡品)에 초탈함을 자부함이다. 연(蓮)이 남국의 산이므로 인도에는 연이 많다. 석가여래 연으로써 고해(苦海)에 점염되지 않는 인생을 비유하니, 연이 불교를 상징하는 꽃이 된 이유이다.
불교에서 연을 존중하는 것과 같이 기독교에서는 백합을 진귀하다 한다. 들에 핀 백합꽃이 솔로몬의 영화보다도 더욱 미의 생명을 자랑한다는 것은, 기독의 산상수훈에서 예증한 바이다. 팔레스타인의 고요한 평야 허다한 백합을 산(産)하여, 그의 순백한 색태에 방렬한 향취가 저절로 사람의 정열을 끄는 바 있으니, 이 땅으로부터 일어나 인생 지상의 가치를 말하면 열정적인 기독이 예로서 백합을 든 것은 당연한 일이다. 만일 인도에 백합이 많았고, 팔레스타인에 연이 산하였더라
면 양씨(兩氏)의 예증은 전연 바뀌었을 것이다. 목련을 보다, 연을 사랑하고, 연을 설(說)하여 백합까지 말하는 것은 너무 흔한 한인한필(閑人閑筆)의 혐(嫌)이 있으니 이를 그만둔다.
「만호동면웅대몽(萬戶同眠雄大夢)」이라고 읊조린 자있다. 만호 중생 모두 꿈 속에 잠겼을 제, 올연(兀然)히 홀로 깨어 월성(月星)이 낭요(朗耀)한 고요한 밤에 거닐 때에는, 스스로 초연한 감개가 있고, 또 고독의 비애도 일으키게 된다. 거세(擧世)가 다 흐린데 나 홀로 깨끗하고, 중인이 다 취했는데 홀로 깨었다고 굴원(屈原)이 〈어부사(漁父辭)〉를 빌어서 스스로 그 고분(孤憤)한 심사를 붙였으니, 그가 필경 어복(魚腹)에 장사하고 만 것은 오로지 이 까닭이다. 고산의 영봉(靈峰) 중만(衆巒)의 위에 솟아올라 만상(萬象)을 눈 아래로 굽어봄이 스스로 잠엄 숭고한 의취(意趣)가 있겠지만, 초연히 독존(獨存)한 것에는 스스로 또 무한 적막한 비애가 있는 것이다.
석가, 기독의 제씨가 모두 인생의 최고봉에 입각하여, 구푸리어 인생을 제도하고자 일생을 노력하니, 그들에게는 대오철저(大悟徹底)한 곳에도 오히려 이 비애가 있었던 것이다. 다만 석(釋)씨의 유현심수(幽玄深邃)한 철리(哲理)가 족히 색상(色相)의 세계를 초월하여 태연히 상주불멸(常住不滅)하는 진리의 세계에 안주하니, 그이 교가 능히 천하의 안정을 구하는 번뇌한 중생들의 귀의처(歸依處)를 짓던 것도 또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인생의 고처(高處)로부터 구푸리어 중생을 구하고자 하는 곳에, 현대적인 민중과는 갈등하기 쉬운 병폐가 생기는 것이다.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의 1귀가 혜능대사(彗能大師)로 하여금 돈오(頓悟)의
기(機)를 짓게 하였고,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하처야진애(何處惹塵埃)」의 귀는 또 그의 성도(成道)의 요체(要諦)를 지었다고 하거니와, 육조정상탑(六祖頂上塔)의 배후에는 이 절귀의 주련(柱聯)이 걸려서 월하에 오히려 번듯이 보인다. 명경(明鏡)도 대(臺) 아니요, 보리(菩提)도 수(樹) 또한 없어서 허허공공하게 오직 적멸(寂滅)의 세계로만 향하는 것이 그 우주 및 인생의 운명이냐? 시드는 꽃, 지는 달, 흐르는 물, 스러지는 이슬은 모두 무상과 환상의 표상인 자이냐? 고요한 밤 깊은 산에 밝은 달, 고운 꽃이 서로 비쳐 광염(光艶)을 돋우는 곳의 황홀한 정감과 청고한 의상(意想)은, 내 오히려 일률 무한한 생명의 감격이 없을 수 없다.
인생은 짧되, 예술은 길다. 짧은 인생으로 오히려 만세에 썩지 않는 존귀한 가치를 남기려고 하는 곳에 인생의 고통이 있고, 또 엉성궂은 생명의 감격도 있는 것이다. 일체도 변환되는 무상한 비애의 가운데에서 오히려 항구하게 ? 치어 변함이 없는 대우주의 생명을 예찬하면서 영원한 정도(征途)에 나아가 인생 행로를 개척하고자 하는 곳에, 현대 청년의 바꿀 수 없는 강고한 결심이 있는 것이다.
꽃이 피어 꽃이 지고, 달이 떠서 달이 지며, 물이 가매 개울이 길고, 구름이 헤어져서 산곡(山谷)이 또 드러나니, 「굴신왕래(屈伸往來) 은현기몰(隱現起沒)」은 반드시 조화의 묘리를 추궁함을 요하랴? 먹고, 마시고, 자고, 일하는 가운데에 세정(世情)의 추이(趨移)는 어찌 또 나의 전자(專恣)할 바이냐? 두어라, 궁통영욕(窮通榮辱)은 인세(人世)의 상태(常態)요, 희노애락은 심해(心海)의 포말(泡沫)이다. 승당(僧堂)에 그늘 들었으니 잠이나 잘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