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국토예찬

국토 예찬(國土禮讚) / 최 남 선

우리의 국토(國土)는 그대로 우리의 역사(歷史)이며, 철학(哲學)이며, 시(詩)이며, 정신(精神)입니다. 문자(文字) 아닌 채 가장 명료(明瞭)하고 정확(正確)하고, 또 재미있는 기록(記錄)입니다. 우리 마음의 그림자와 생활의 자취는 고스란히 똑똑히 이 국토 위에 박혀서, 어떠한 풍우(風雨)라도 마멸(磨滅)시키지 못한다는 것을 나는 믿습니다.

나는 우리 역사의 한 작은 학도요, 우리 정신의 한 어설픈 탐구자(探究者)로서, 진실로 남다른 애모(愛慕)와 탄미(歎美)와 함께 무한(無限)한 궁금스러움을 이 산하 대지(山河大地)에 가지는 것입니다. 자갯돌 하나와 마른 나무 한 밑동도 말할 수 없는 감격(感激)과 흥미(興味)와 또 연상(聯想)을 자아냅니다. 이것을 조금씩 색독(色讀)이나마 하게 된 뒤부터 우리 나라가 위대(偉大)한 시의 나라, 철학의 나라임을 알게 되고 또 완전(完全), 상세(詳細)한 실물적(實物的) 오랜 역사의 소유자(所有者)임을 깨닫게 되고, 그리하여 쳐다볼수록 거룩한 우리 정신의 불기둥에 약한 시막(視膜)이 퍽 많이 아득해졌습니다.

곰팡내나는 서적(書籍)만이 이미 내 지견(知見)의 웅덩이가 아니며, 한 조각 책상만이 내 마음의 밭일 수는 없게 되었읍니다. 도리어 서적과 책상에서 불구(不具)가 된 내 소견(所見)을 진여(眞如)한 상태(狀態)로 있는 활문자(活文字), 대궤안(大軌案)에서 교정(矯正)받고 보양(補養)을 얻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통절(痛切)히 느꼈읍니다.

묵은 심신(心身)을 시원히 벗어 던지고, 자유로운 공기를 국토 여래(國土如來)의 상적토(常寂土)에서 호흡(呼吸)하리라 하는 열망(熱望)은 시시각각(時時刻刻)으로 나의 가슴을 태웠읍니다.

힘 자라는 대로, 시간이 허락(許諾)되는 대로 국토 예찬(國土禮讚)을 근수(勤修)하기는, 나로서는 진실로 숭고(崇高)한 종교적(宗敎的) 충동(衝動)에 끌린 바로서, 부득불연(不得不然)한 일입니다. 무엇보다도 큰 재미와 힘을 여기서 얻었고, 얻고, 얻을 것이니, 생활의 긴장미(緊張味)로만 해도 나의 이 수행(修行)은 오래도록 계속(繼續)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국토에 대한 나의 신앙(信仰)은 일종의 애니미즘일지도 모릅니다. 나의 보는 그것은 분명히 감정(感情)이 있으며, 웃음으로 나를 대합니다. 이르는 곳마다 꿀 같은 속삭임과 은근한 이야기와 느꺼운 하소연을 듣습니다. 그럴 때마다 나의 심장(心臟)은 최고조(最高潮)의 출렁거림을 일으키고, 실신(失神)할 지경(地境)까지 들어가기도 한두 번이 아니었읍니다. 그런 때의 나는 분명한 한 예지자(叡智者)의 몸이요, 일대 시인(一大詩人)의 마음을 가지지만, 입으로 그대로 옮기지 못하고 운율(韻律) 있는 문자로 그대로 재현(再現)ㅎ지 못할 때, 나는 의연(依然)한 일 범부(一凡夫)며, 일 박눌한(一樸訥漢)이었읍니다. 그러나, 나는 이것을 섭섭히 생각지 않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나의 작은 재주는 저 큰 운의(韻意)를 뒤슬러 놓기에는 너무도 현격(懸隔)스러운 것이니까, 워낙 애닯고 서운해 할 염치(廉恥)가 없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혹은 유적(遺蹟), 혹은 전설(傳說)에 내일을 기다리기 어려운 것도 있고, 혹은 자연의 신광(神光), 혹은 역사의 밀의(密意)에 모르는 체할 수 없어서, 변변ㅎ지 않은 대로, 간 곳마다 견문 고검(見聞考檢)의 일반(一斑)을 기록(記錄)하지 않을 수 없었읍니다. 이는 진실로 문장(文章)으로 보거나 논고(論考)로 볼 것이 아니요, 또 천 년의 숨은 자취를 헤쳤거나 만인(萬人)의 심금(心琴)을 울릴 무엇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런대로 우리 국토에 대한 뜨거운 마음이 넘쳐 나온 것이니, 내게는 휴지(休紙)로 버리기 어려운 점도 없지 아니합니다. 이러므로, 다만 한 가지 또 어슴푸레하게라도, 우리 정신(精神)의 숨었던 일면(一面)이 나타난다면, 물론 분외(分外)의 다행(多幸)입니다. 그렇진 못할지라도, 우리 청전구물(靑氈舊物)에 대한 나의 애처롭고 안타까운 정리(情理)를 담은 것이 혹시나 강호(江湖)의 동정(同情)을 산다면, 이 또한 큰 소득(所得)입니다. 아뭏든 우리 국토의 큰 정신을 노래해 내는 이의 어릿광대로 작은 끄적거림을 차차 책을 모아 갈까 합니다.

이제 그 첫 권으로 내는 ‘심춘 순례(尋春巡禮)’는, 작년 삼월 하순(下旬)부터 수미(首尾) 50여 일간, 지리산(智異山)을 중심으로 한 순례기(巡禮記)의 전반(前半)을 이루는 것이니, 마한(馬韓) 내지 백제인(百濟人)의 정신적(精神的) 지주(支柱)였던 신악(神岳)의 여훈(餘薰)을 더듬은 것이요, 장차 해변(海邊)을 끼고 내려가는 부분을 합하여 서한(西韓)의 기록(記錄)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진인(震人)의 고신앙(古信仰)은 천(天)의 표상(表象)이라 하여 산악(山岳)으로써 그 대상(對象)을 삼았으며, 또 그들의 영장(靈場)은 뒤에 대개 불교(佛敎)에 전승(傳承)되니, 이 글이 산악 예찬(山岳禮讚), 불도량 역참(佛道場歷參)의 관(觀)을 주는 것은 이 까닭입니다.

적을 것도 많고 적을 방법도 있겠지만, 매일 적잖은 산정(山程)을 발섭(跋涉)하고 가쁜 몸이 침침한 촛불과 대하여 적는 데는 이것도 큰 노력(勞力)이었읍니다. 선재(選材)와 행문(行文)이 다 거침을 극(極)한 것은 부재(不才) 이외에도 까닭이 없지 아니합니다. 그러나, 고치자니 새로 짓는 편이 도리어 손쉽고, 새로 짓자니 그만 여가(餘暇)가 없으므로 숙소(宿所)에서 주필(走筆)하여 날마다 신문사로 우송(郵送)하였던 원고(原稿)를 그대로 배열(排列)하게 되었읍니다. 후안(厚顔)의 꾸지람은 얼마든지 받겠읍니다.

행중(行中)에 여러 가지 편의(便宜)를 주신 연로(沿路)의 여러 대방가(大方家), 특히 각 산의 법승(法僧)들에게 이 기회(機會)에 심대(甚大)한 사의(謝意)를 드립니다. 또, 남순 소편(南巡小篇)에 다소(多少)라도 보람 있는 구절(句節)이 있다면, 이는 시종 일관(始終一貫)하게 구책유액(驅策誘掖)의 노(勞)를 취해 주신 여러분의 현교(顯敎)와 암시(暗示)에서 나온 것임을 아울러 표백(表白)해 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