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수필2

75. 면학의 서

자한형 2022. 1. 8.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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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학(勉學)의 서( 양주동(梁柱東)

 

독서(讀書)의 즐거움! 이에 대해서는 이미 동서(東西) 전배(前輩)들의 무수(無數)한 언급(言及)이 있으니, 다시 무엇을 덧붙이랴. 좀 과장(誇張)하여 말한다면, 그야말로 맹자(孟子)의 인생 삼락(人生三樂)1)에 무름지기 독서(讀書), 면학(勉學)’의 제 4 일락(第四一樂)을 추가(追加)할 것이다. 진부(陳腐)한 인문(引文)이나 만인(萬人) 주지(周知)의 평범(平凡)한 일화(逸話) 따위는 일체 그만두고, 단적(端的)으로 나의 실감(實感) 하나를 피력(披瀝)하기로 하자.

열 살 전후 때에 논어(論語)를 처음 보고, 그 첫머리에 나오는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

운운(云云)이 대 성현(大聖賢)의 글의 모두(冒頭)로 너무나 평범한 데 놀랐다.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이런 말씀이면 공자(孔子) 아닌 소중학생도 넉넉히 말함직하였었다. 첫 줄에서의 나의 실망(失望)은 그 밑의 정자(程子)2)인가의 약간 현학적(衒學的)인 주석(註釋)에 의하여 다소 그 도()를 완화(緩和)하였으나 논어의 허두(虛頭)가 너무나 평범하다는 인상(印象)은 오래 가시지 않았다. 그랬더니, 그 후 배우고, 익히고, 또 무엇을 남에게 가르친다는 생활이 어느덧 이삼십 년, 그 동안에 비록 대수로운 성취(成就)는 없었으나, 몸에 저리게 느껴지는 것은 다시금 평범한 그 말이 진리(眞理)이다.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정씨(程氏)의 주()는 워낙 군소리요, 공자의 당초(當初) 소박(素朴)한 표현(表現)이 그대로 고마운 말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현세(現世)와 같은 명리(名利)와 허화(虛華)의 와중(渦中)을 될 수 있는 한 초탈(超脫)하여, 하루에 단 몇 시, 몇 분이라도 오로지 진리와 구도(求道)에 고요히 침잠(沈潛)하는 여유(餘裕)를 가질 수 있음이, 부생 백년(浮生百年), 더구나 현대인(現代人)에게 얼마나 행복된 일인가! 하물며, 난후(亂後) 수복(收復)의 구차(苟且)한 생활 속에서 그래도 나에게 삼척 안두(三尺案頭)가 마련되어 있고, 일수(一穗)의 청등(靑燈)이 의미한 채로 빛을 내고 있으니, 얼마나 다행(多幸)한 일인가! 일전(日前) 어느 문생(門生)이 내 저서(著書)에 제자(題字)를 청하기로, 나는 공자의 이 평범하고도 고마운 말을 실감(實感)으로 서증(書贈)하였다.

독서란 즐거운 마음으로 할 것이다. 이것이 나의 지설(持說)이다. 세상에는 실제적(實際的) 목적(目的)을 가진, 실리 실득(實利實得)을 위한 독서를 주장(主張)할 이가 많겠지마는, 아무리 그것을 위한 독서라도, 기쁨 없이는 애초에 실효(實效)를 거둘 수 없다. 독서의 효과(效果)를 가지는 방법(方法)은 요컨대 그 즐거움을 양성(養成)함이다. 선천적(先天的)으로 그 즐거움에 민감(敏感)한 이야 그야말로 다생(多生)의 숙인(宿因)으로 다복(多福)한 사람이겠지만, 어렸을 적부터 독서에 재미를 붙여 그 습관(習慣)을 잘 길러 놓은 이도, 그만 못지않은 행복한 족속(族屬)이다.

독서의 즐거움은 현실파(現實派)에게나 이상가(理想家)에게나, 다 공통(共通)발견(發見)의 기쁨에 있다. 콜룸부스적인 새로운 사실(事實)과 지식(知識)의 영역(領域)의 발견도 좋고, "하늘의 무지개를 바라보면 내 가슴은 뛰노나." 식의 워어즈워드3)적인 영감(靈感), 경건(敬虔)의 발견도 좋고, 더구나 나와 같이, 에머슨4)의 말에 따라, "천재(天才)의 작품(作品)에서 내버렸던 자아(自我)를 발견함."은 더 좋은 일이다. 요컨대, 부단(不斷)의 즐거움은 맨 처음 경이감(驚異感)’에서 발원(發源)되어 진리(眞理)의 바다에 흘러가는 것이다. 주지(周知)하는 대로 채프먼5)의 호머를 처음 보았을 때에서 키이츠는 이미 우리의 느끼는 바를 대변(代辯)하였다.

그 때 나는 마치 어떤 천체(天體)의 감시자(監視者)

시계(視界) 안에 한 새 유성(遊星)의 헤엄침을 본 듯,

또는 장대(壯大)한 코르테스6)가 독수리 같은 눈으로

태평양(太平洋)을 응시(凝視)하고 모든 그의 부하(部下)들은

미친 듯 놀라 피차(彼此)에 바라보는 듯

말없이 다리엔7)의 한 봉우리를.

혹은 이미 정평(定評)있는 고전(古典)을 읽으라, 혹은 가장 새로운 세대(世代)를 호흡(呼吸)한 신서(新書)를 더 읽으라, 각인(各人)에게는 각양(各樣)의 견해(見解)와 각자(各自)의 권설(勸說)이 있다. 전자(前者)는 가로되,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

후자(後者)는 말한다.

"생동(生動)하는 세대(世代)를 호흡(呼吸)하라."

그러나, 아무래도 한편으로만 기울어질 수 없는 일이요, 또 그럴 필요도 없다. 지식인(知識人)으로서 동서(東西)의 대표적(代表的)인 고전은 필경(畢竟) 섭렵(涉獵)하여야 할 터이요, 문화인(文化人)으로서 초현대적(超現代的)인 교양(敎養)에 일보(一步)라도 낙오(落伍)될 수는 없다. 문제는 각자의 취미(趣味)와 성격(性格)과 목적과 교양에 의한 비율(比率)뿐인데, 그것 역시 강요(强要)하거나 일률(一律)로 규정(規定)할 것은 못 된다. 누구는 고칠 현삼제(古七現三制)’를 취하는 버릇이 있으나, 그것도 오히려 치우친 생각이요, 중용(中庸)이 좋다고나 할까?

다독(多讀)이냐 정독(精讀)이냐가 또한 물음의 대상(對象)이 된다. ‘남아수독오거서(男兒須讀五車書)’는 전자의 주장(主張)이나, ‘박이부정(博而不精)’이 그 통폐(通弊), ‘안광(眼光)이 지배(紙背)를 철().’이 후자의 지론(持論)이로되, ‘나무를 보고 숲을 보지 못함.’이 또한 그 약점(弱點)이다. 아뭏든, 독서의 목적이 모래를 헤쳐 금을 캐어 냄.’에 있다면, 필경(畢竟) ‘()’()’을 겸()하지 않을 수 없으니, 이것 역시 평범(平凡)하나마 박이정(博而精)’ 석 자를 표어(標語)로 삼아야 하겠다. ‘()’()’은 차라리 변증법적(辨證法的)으로 통일(統一)되어야 할 것 아니, 우리는 양자(兩者)의 개념(槪念)을 궁극적(窮極的)으로 초극(超克)하여야 할 것이다. 송인(宋人)8)의 다음 싯구는 면학(勉學)에 대해서도 그대로 알맞은 경계(境界)이다.

벌판 다한 곳이 청산인데, [平蕪盡處是靑山]

행인은 다시 청산 밖에 있네. [行人更在靑山外]

나는 이 글에서 독서의 즐거움을 종시(終始) 역설(力說)하여 왔거니와, 그 즐거움의 흐름은 왕양(汪洋)한 심충(深衷)의 바다에 도달(到達)하기 전에, 우선 기구(崎嶇), 간난(艱難), 칠전팔도(七顚八倒)의 괴로움의 협곡(峽谷)을 수없이 경과(經過)함을 요함이 무론(毋論)이다. 깊디깊은 진리의 탐구(探究)나 구도적(求道的)인 독서는 말할 것도 없겠으나, 심상(尋常)한 학습(學習)에서도 서늘한 즐거움은 항시 애씀의 땀을 씻은 뒤에 배가(倍加)된다. 비근(卑近)한 일례(一例), 요새는 그래도 스승도 많고 서적(書籍)도 흔하여 면학의 초보적(初步的)인 애로(隘路)는 적으니, 학생 제군(學生諸君)은 나의 소년 시절(少年時節)보다는 덜 애쓴다고 본다. 나는 어렸을 때에 그야말로 한적(漢籍) 수백 권을 모조리 남에게서 빌어다가 철야(徹夜), 종일(終日) 베껴서 읽었고, 한문(漢文)은 워낙 무사독학(無師獨學), 수학(數學)조차도 혼자 애써서 깨쳤다. 그 괴로움이 얼마나 하였을까마는, 독서, 연진(硏眞)의 취미(趣味)와 즐거움은 그 속에서 터득(攄得), 양성되었음을 솔직(率直)이 고백(告白)한다.

끝으로 소화 일편(笑話一片) 내가 십 이삼 세 때이니, 거금(距今) 오십 년 전 일이다. 영어(英語)를 독학(獨學)하는데, 그 즐거움이야말로 한문만 일과(日課)로 삼던 나에게는 카알라일9)의 이른바 새로운 하늘과 땅(new heaven and earth)’이었다. 그런데, 그 독학서(獨學書) 문법 설명(文法說明)‘3인칭 단수(三人稱單數)’란 말의 뜻을 나는 몰라, ‘독서백편 의자현(讀書百遍義自見)’이란 고언(古諺)만 믿고, 밤낮 며칠을 그 항목(項目)만 자꾸 염독(念讀)하였으나, 종시 의자현(義自見)’이 안 되어, 마침내 어느 겨울날 이른 아침, 눈길 30리를 걸어 읍내(邑內)에 들어가 보통 학교(普通學校) 교장을 찾아 물어 보았으나, 그분 역시 모르겠노라 한다. 다행히 젊은 신임 교원(新任敎員)에게 그 말뜻을 설명(說明) 받아 알았을 때의 그 기쁨이란! 나는 그 날, 왕복(往復) 60리의 피곤(疲困)한 몸으로 집으로 돌아와, 하도 기뻐서 저녁도 안 먹고 밤새도록 책상에 마주 앉아, 적어 가지고 온 그 말뜻의 메모를 독서하였다. 가로되,

"내가 1인칭(一人稱), 너는 2인칭(二人稱), 나와 너 외엔 우수마발(牛溲馬渤)이 다 3인칭야(三人稱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