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 신의 눈초리
신의 눈초리 유주현
『소심한 성격의 ‘나(P선생)’는 우연히 중학 동창인 강인규와 만난다. 강인규는 나를 강제로 끌다시피 하여 술집으로 데려간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그는 난데없이 소설의 소재가 될 만한 기막힌 사람의 얼굴을 보여주겠다고 제의하면서, 한식에 내 고향이자 나의 형님이 살고 있는 상계동에서 만나자고 말한다. 나는 어리둥절한 채로 어정쩡한 약속을 한다. 수락산 밑 상계동이 고향인 나는 그와의 약속을 까마득히 잊고 있다가 한식이 되자 성묘를 위하여 고향 마을에 간다.
비가 오는 데도 불구하고, 형의 집 바로 옆에서 살고 있다는 강인규는 나를 기다렸다면서 마중을 나온다. 앞장서서 떠들던 그는 내가 성묘를 마치고 내려오자마자 나를 자기 집으로 데려가서 술상을 차린다. 그곳에서 나는 도립병원 정신과 의사였다가 중풍으로 반신불수가 된 채 걷기 연습을 하는 그의 부친을 본다. 반쪽 안면근육이 마비된 그의 표정은 끔찍하기 짝이 없다.
그의 부친은 마당에서 걷기 연습을 시작하기 전에 지붕의 용마루 끝 기왓장 쪽을 집념 어린 눈빛으로 쏘아보다가 마비된 왼쪽 손과 다리를 흔들며 걷기 시작한다. 나중에는 뜀박질을 하려고 하였으나 넘어지고 만다. 도움을 받지 않고 일어서려는 그의 얼굴에서 나는 절망의 눈빛을 본다. 그것은 임종 직전 죽음과 겨루는 듯한, 허탈과 실의와 분노가 뒤섞인 그런 눈초리이다.
술에 취한 강인규는 “나는 저렇게 삶에 대한 치사스러운 집착은 가지지 않겠다.”고 말하면서, 자신이 월남전에 참가해서 저질렀던 살인·강간의 대상자가 보여주었던 눈초리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그렇지만 그 어느 것도 그의 부친의 눈초리처럼 소름이 끼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 뒤 일주일이 못 되어 나는 강인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복상사가 사인이라는 이야기를 들으며 문상을 마친 나는, 마당에 내려서서 이전 그의 부친이 운동을 시작하기 전에 하던 그대로 용마루 끝 하늘을 본다. 그곳에서 나는 싸늘하고 비정한 어떤 눈초리를 본 것 같다고 느낀다.』
『아버지의 행동 변화로 죽음마저도 낭만이라 생각했던 강 군의 생각이 바뀌게 된다. 강 군은 한식날이 되어 상계동으로 가는데, 그날 따라 빗줄기가 심하게 내리고 있었다.
그런데 강 군은 그가 돌아올 길에 모래를 뿌리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행동은 너무나 급작스러워 당황하는 때가 종종 있다. 또, 그는 진달래꽃을 먹으며 원시적인 정복감을 느낀다고 했다.
그는 나를 전망이 확 트인 방으로 안내한 후 두견주를 권하며 한 인간의 처절하고 엄숙한 표정을 보여준다고 하면서 오십대 후반으로 보이는 우람한 체격을 가진 사내에게 나를 안내했다.
중풍에 걸려 몸이 한 켠으로 쏠리고 왼팔과 왼쪽 다리가 흉하게 건들거리며, 온몸을 하나의 단장에 의지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 오십대의 중풍 환자는 운동을 하면서 기와집의 용마루 끝을 쏘아보곤 했다. 그러나 나는 그 눈빛이 보는 곳은 먼 하늘이라 생각했다. 강 군은 그 눈총을 보면 미칠 것 같고, 살인자의 눈초리보다 더 무섭다고 말했다.
그 중풍 환자는 같은 운동을 반복하며 자신의 목숨을 연장하려 했고, 그것을 강 군은 생명을 연장하려는 동물적인 행동으로 보고 있으며, 웃음과 눈초리마저 미워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그의 아버지를 미워하면서도 중풍에 좋다는 진달래술을 담그기도 하는 이중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나는 그러면서 아버지의 운동을 지켜보는 강 군의 눈빛에서 또 다른 눈빛을 보았다. 그것은 살인이라도 할 듯한 무서운 눈초리였다. 강 군의 아버지는 남의 도움을 받는 것을 제일 싫어했다.
그때 우연히 강 군의 아버지가 쓰러져 버둥거렸다. 이때 그 아버지의; 눈빛은 죽음과 겨루는 눈, 허탈과 실의에 빠져 모든 의욕이 싹 까부라진 순간의 분노 섞인 눈초리였다. 그러면서 강 군은 자신이 월남전에서 겪은 베트콩의 저주 섞인 눈빛과 베트콩 여자의 애원 어린 눈빛을 생각하며, 눈을 아래로 깔았다. 그때 그의 눈빛은 폭발 직전의 증오이며 울분이었다. 그 일이 있은 후, 일주일도 되지 않아 강 군은 진달래술을 먹고 복상사(腹上死)로 한마디 말도 남기지 못하고 죽었다고 한다. 팔십까지 살겠다던 말도 잊은 듯이. 그러나 강 군의 죽음을 아버지 때문도, 진달래술 때문도 아닌, 절대자의 뜻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중풍 환자인 강 군의 아버지가 넘어졌던 지점에서 위로 하늘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나는 거기에서 아주 싸늘하고 비정한 어떤 눈초리를 분명히 본 것 같아 가슴 속에서 재채기처럼 솟구치는 경련을 지그시 누르려고 안간힘을 썼다.』
【감상】
이 작품은 외부적이며, 감각적인 것으로서가 아니라, 내부적이며, 정신적인 인간 본연의 생명을, 그리고 원시적인 인간의 순수성을 보여 준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강 군은 아버지에 대해 선과 악, 회한(悔恨), 고집, 사생관(死生觀)이 담긴 눈초리를 보며, 저주라는 생각마저 가지나, 결국은 자신이 아버지를 사랑하고 있다는 휴머니티를 독자에게 보여 준다. 유주현의 작품은 삶에 대한 회의하든지, 아니면 집념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 소설은 어떤 상황에서라도 삶을 영위해나가겠다는 사람과, 치사스러운 삶은 차라리 일찍 마무리짓겠다는 사람 사이에서 야기되는 갈등을 통하여 인간존재의 근본 물음에 대한 의문을 제시한다.
작가는 이 소설의 후기에서,
“신의 존재를 외부에서 찾으려 하는 것은 일종의 샤머니즘이다.”
라고 밝히고 있다. 이 작품은 이후 〈조선총독부〉 등의 작품으로 이어지는 작가의 시야 확대와 더불어, 다양한 관심을 지닌 인간의 본질에 대한 규명에 천착하는 시선을 보여주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인간은 살고 싶으면 삶을 택할 수도 있고, 살기 싫으면 죽음을 택할 수도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는데, <신(神)의 눈초리>에서는 그러한 자유도 부여되지 않고 오직 절대자의 의사만이 있을 뿐이다.
그것은 어떤 누구에게 허물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 누구의 뜻도 아니고, 또 스스로 원해서도 아니고, 오로지 절대자만이 알 수 있는 절대자 그의 의사라고 생각한다.
작가는 강군의 죽음을 이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 그것은 '남들이 애지중지 사랑하는 것, 아름답다는 것, 그런 걸 마구 씹어 먹는다 생각하면 원시적인 정복감 같은 것을 느낄 수 있는' '진달래 꽃술' 때문도 아니고, '원시적인 욕망과 집념으로 일그러진', 그러면서도 '어떤 한 인간의 아주 처절하고 경건한 모습을 보여 주는' '아버지' 때문도 아니다. 그는 절대자의 의사에 따라 복상사(腹上死)로 '단 한마디의 말도 남기지 않았고, 남의 인상에 남을 만한 표정이나 눈초리도 보이지 않은 채 결코 제 뜻이 아닐 죽음의 세계로 간' 것이다.
그러면 작가는 <신의 눈초리>에서 강군의 이러한 죽음을 독자에게 보이는 것만으로 끝내려고 했단 말인가? 얼핏 잘못 생각하면, 죽어야 할 사람은 안 죽고 여든 살까진 자신 있게 살 수 있다고 장담한, 건장한 사람이 죽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라고 착각하기 쉽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오직 그러한 것만을 보여 주는 것으로 끝난 것은 결코 아닌 것이다. 그것보다는 오히려 강군의 부친의 눈초리가 남아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면 지나친 속단이 될 것인가?
이에 먼저 강군이 자기 부친에 대해서 평한 것을 들어보기로 한다. 강군에 의하면, 자기 부친은 '인간의 선과 악, 사생관, 집념, 회한, 고집……추하기도 하고 엄숙하기도 하고, 또 소름이 끼치도록 미웁고 불쌍도 한 복합적인 표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정말 사람이 아니라, 원시적인 욕망과 집념으로 일그러진 추한 괴물'이며, '목욕탕 바닥에서 수집한 여자들의 거웃털의 이용 가치만도 못한,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너무 가식 없는 한 인간의 처절하구 엄숙한 표정'의 소유자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살아봤자 아무 쓸모도 가치도 없는 생명이요, 오히려 남에게 피해만 입히게 될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눈을 부릅뜬다고는 하지만 왼쪽은 반쯤 절려진 채 동공이 굳은 대로였고, 입은 꼭 다물었다곤 하지만 입마구리가 위로 바짝 치켜진 채 흉하게 씰그러졌으므로 걸다란 침이 그리로 줄줄 흐르고 있는' 그에게서 '인생으로서의 아무런 가능성'도 찾아볼 수 없을는지도 모른다. 또한 강군의 부친이 어이없게도 땅바닥에 쓰러졌을 때의 눈초리를 작가는 '절망의 눈초리'라 표현하면서, '쓰러졌다는 사실에 대한 절망, 운명 직전의 죽음과 겨루는 눈, 허탈과 실의(失意), 모든 의욕이 싹 까부러진 순간의 분노 섞인 눈초리'라고 보충 설명하고 있다.
분명 강군의 부친에게선 마당에서의 걷기 훈련과 팔 올리기 운동을 함으로써 점점 더 활기를 띨 것인지 어떨 것인지 전연 예측할 수가 없다. 다만 그가 팔 올리기 운동을 하던 지점에서는 틀림없이 용마루 위의 하늘을 쳐다 볼 수 있을 뿐이다. 문제는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여기에 있다.
비록 쳐다보는 그 눈초리가 처절 그것이라 하더라도, 새로 시작한다는 그 환희와 집념을 끝내 간직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허공의 '그곳엔 형체와 색깔은 있으면서 무게도, 열도, 그리고 스스로의 의지도 갖지 못한 한 점 구름이 절대자의 어떤 소명(召命)을 받은 것처럼 그 허공 어디론가로 흘러가고' 있더라도, 그리고 또한 '거기서 싸늘하고 아주 비정적(非情的)인 어떤 눈초리를 본 것 같다' 하더라도, 노려볼 수 있는 허공이 있으니까 인간 존재의 이유가 있는 것이며, 인간 생존의 가치가 있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신의 눈초리>는 외부적이며 감각적인 것으로서가 아니라, 내부적이며 정신적인 인간 본연의 생명을, 그리고 원시적인 인간의 순수성을 보여 준 작품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작품의 이곳저곳에서 보여지는 절망은 오직 절망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오, 인생에의 회의는 회의하기 위한 회의가 아니라,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회의요 절망으로 간주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이 작가의 단편집 <신의 눈초리> 후기(後記)에 '신의 존재를 외부에서 찾으려는 것은 일종의 샤머니즘이다. 그러나 그것을 내부에서 구한다면 그건 빛이며 가치이며 구원이다'라고 씌어져 있는 것만 놓고 본다 하더라도 충분히 이해할 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