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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단편소설2

5. 새의 초상

by 자한형 2022. 3.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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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의 초상(肖像)-윤후명

 

 

내가 그녀를 만난 것은 팔색조와 아마도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나는 분명히 팔색조를 찾아 그 작은 섬에 갔다가 그녀를 만났다. 그러나 그녀를 만나리라는 어떤 예감 같은 것은 없었다. 하기야 예감이란 한낱 쓰잘데 없는 기대나 우려에서 오는 나약한 정신의 소산이라고 볼 때, 나는 분명히 어떤 예감이나마 가졌어야 했다.

나는 그만큼 지쳐 있었고 또 허물어져 있었다. 내가 팔색조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것은 처음 뭍을 떠나 낯선 섬에 발을 들여놓았을 무렵이었다. 팔색조. 이름 그대로 몸 빛깔이 여덟 가지로 알록달록한 새라고 했다. 그러나 그 새가 이름난 것은 알록달록한 아름다움도 아름다움이지만, 워낙 희귀조라는 데 더 큰 이유가 있는 듯했다. 새에 대해서 조예도 없을 뿐만 아니라 별다른 관심도 없는 내가 처음에 건성으로 들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여름을 꼬박 그 섬에서 나기로 하고 갔던 나는 하루하루 가면 갈수록 지루해져서 무엇엔가 관심을 기울일 대상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마침내 ', 그런 게 있었지' 하는 심정으로 팔색조를 찾게 되었다.

그 섬은 우리나라 섬 가운데서 몇째쯤 가는 큰 섬으로서 조금만 안으로 들어가면 산협이 왜 깊었다. 그것은 그 점이 화산도가 아님을 알려 주는 한 특징이기도 했다. 화산도라면 커다란 분화구를 정점으로 능선이 기슭가지 길게 늘어뜨려진다. 그 기슭에 바닷물이 찰랑거린다. 그래서, 알기 쉽게 말하자면, 화산도는 커다란 따개비 모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섬은, 어렵게 말하자면, 습곡인지 융기인지 하여튼 그런 종류의 지각 운동으로 생긴 섬인 것이다. 섬 안쪽에서는 상당히 높은 곳일지라도 바다를 볼 수 없다. 따라서 섬 안쪽은 깊은 내륙의 한 부분으로 여겨질 만한 곳이 많다.

그러나 나는 그 섬의 이름을 굳이 밝히지 않기로 한다. 밝히지 않아도 알 만한 사람은 알 수 있을 것이며 또 모른다고 해서 지금 하고자 하는 이야기에 아무런 지장도 주지 않을 것이라 믿는다.

섬에 의외로 깊은 내륙 같은 곳이 많다고 했다. 그렇다면 태고의 모습을 간직하여 이른바 자연 보호가 잘 된 곳이라는 뜻이 된다. 물론 섬 안쪽은 이미 말한 대로 내륙의 오지 같아서 자연은 글자 그대로 자연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섬의 바깥쪽에 있는 한 포구야말로 섬의 안쪽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이 포구, 얼토당토않게 들떠 있으며 섣부른 도시화로 얼룩진 이 포구에 처음 발을 들여놓았을 때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내가 상상했던 그런 포구와는 거리가 멀었다, 갈매기가 끼룩끼룩 날며 섬 아낙네가 조개를 줍는, 그리고 작고 아늑한 백사장에 고깃배가 와 닿는 그런 포구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것은 내 상상력의 허구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 포구에는 갈매기도, 조개도, 그리고 고깃배도, 내가 생각했던 포구대로 있을 것은 다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내가 상상했던 포구가 아니었다. 왜 그랬던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선창 앞에서부터 줄지어 늘어서 있는 이른바 요상한 술집들 탓이었을 것이다. 그 술집들은 야단스러운 그 이름에서부터 '이곳은 예사 동네가 아닙니다'라고 말해 주고 있었다. 낮에 술집 앞을 지나노라면 하늘하늘한 얇은 천으로 된 긴 잠옷을 걸친 호스티스들이 아무 거리낌없이 문밖까지 들락거렸다. 그저 걸쳤다는 의미 뿐으로, 속살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그 잠옷 속에서 여자는 작고 까만 브래이저와 역시 작고 까만 팬티차림이었다. 포구에 대한 내 상상력은 여지없이 깨어져 버렸다. 이를테면 바닷가 모퉁이 백사장을 홀로 거닐며 알지 못할 어떤 그리움으로 눈물짓는 국민학교 분교 여선생 대신에 까만 팬티 차림의 접대부!

그리고 아예 영문자로만 씌어진 간판에서부터 은좌, 황태자, 귀빈, 성좌, 목좌, 러브, 파인트리, , 돌고래, 모두랑, 무랑루즈, 석등, 천궁회관 등등 요란한 이름의 술집들.

그러니까 그 포구를 찾아간 것부터가 잘못이라고 할 수 있었다. 어쩔 도리가 없었다. 나는 그곳에서 여름을 지나며 그곳에 관한 어떤 보고서를 작성하도록 되어 있었다. 먹고살기 위해서 맡은 일인만큼 좋으나 싫으나 여름 동안 그 포구는 내 일터였다.

포구에서 얼마를 보낸 어느 날 바는 그 섬에 딸린 한 작은 섬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이미 진력이 왜 나기 시작한 때였다.

"거길 가 보셨습니까?"

작은 섬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사람은 내가 그 섬에서 나쁜 인상만을 가지고 있다가 떠날까봐 걱정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그곳의 동백나무를 이야기했고, 그러나 지금은 동백꽃을 볼 수 있는 계절이 아니어서 유감이라고 덧붙였다.

"동백꽃이 필 때 다시 한번 와야겠군요."

나 역시 그의 뜻에 동조한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나 실은 나는 내가 동백꽃을 보러 일부러 어디로 찾아갈 만큼 동백꽃에 대하여 성의를 가지고 있지는 못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동백나무의 잎과 꽃은 내게는 색깔이 너무 짙은 것이다. 그러자 그가 이야기한 것이 팔색조였다. 여름철 철새이므로 벌써 날아와 등지를 틀었을 것이라고 그는 덧붙였다.

"하긴 팔색조가 그 섬에까지 오느냐 안 오느냐 하는 문제는 여러 사람들이 왈가왈부하고 있지만요."

더 남쪽으로 가면 팔색조가 날아와 '호오이 호오이' 하고 우는 소리를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으나 그 섬에서는 들었다는 사람과 들을 수 없었다는 사람이 반반이라는 것이었다.

"호오이 호오이 우는 것은 암놈이고 수컷은 꿔어이 꿔어이 울지만요, 암놈 소리는 꼭 숲 속에서 사람이 부르는 것 같아요. 호오이 호오이."

"새가 큰 모양이지요? "

"아뇨. 참새만 해요. "

처음에 섬에 갔을 때도 누군가가 그 새를 이야기해 준 적이 있었다. 나는 건성으로 들어 넘겼었다. 그런 것에 관심을 기울일 만큼 여유가 있지를 못했다. 그러나 그 포구의 정떨어지는 한심한 분위기가 어쩔 수 없이 내게 새로운 무엇에의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게 했다.

팔색조가 아니어도 그만이었다. 그때 팔색조가 나타난 셈이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팔색조를 어텅게 해 보겠다는 구체적인 계획은 쉽사리 세울 수가 없었다. 회귀조이므로 잡아서는 안 될 것이며, 또 내 솜씨로 잡을 방법도 없었다. 물론 내가 사진 작가쯤 된다면 흔히 신

문에 나듯이 '팔색조 사진 촬영에 성공' 따위로 소개하기 위해 카메라에 담기를 시도해 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어느 편이냐 하면 카메라와도 거리가 멀었다. 찍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찍히는 것조차 젬병이었다. 어쨌든 나는 심심풀이 삼아서라도 그 새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고 비로소 사전을 펼쳤다.

 

팔색조과에 속하는 새. 개똥지빠귀와 비슷한데 날개 길이 12-13센티 미터, 꽁지 3.5-4.3센티미터, 부리 2-3센티미터이고 배면은 녹색이고 머리는 흑다색이며 중앙에 흑색 세로줄이 있음. 꽁지 무늬는 황백색, 얼굴은 흑색, 소우복과 상미통은 청색, 가슴은 담황갈색이고 목과 복부는 백색, 하복부 이하 하미층은 선홍색임. 깊은 숲 속에 한 마리씩 살며, 곤충, 지렁이, 새우 등을 포식함. 5-7월에 4-6개의 알을 낳음. 여러 가지 빛이 잘 조화된 아름다운 철새로 남부 중국 및 대만 등지에서 여름에 한국과 일본 특히 제주도의 한라산 산림 속으로 와서 번식하고 가을에는 돌아감,

 

내가 팔색조를 찾아 그 작은 섬으로 떠난 것은 그런 지 며칠이 지나서였다. 팔색조를 록 찾겠다는 결심은 아니었다고 해야 옳다. 그 작은 섬에 팔색조가 날아와 깃든다는 데 대해서는 여러 사람들이 '왈가왈부하고' 있는 문제라고 했었다. 그러니까 팔색조를 볼 수 있다거나 아니면 울음소리라도 들을 수 있다거나 기대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굳이 팔색조를 찾아서 가는 것이라고 명분을 내세우고 싶었다. 그 섬에 팔색조가 오든 안 오든 상관이 없다. 다만 확실한 것은 내가 그 섬으로 팔색조를 찾아간다는 것이다. 그것만으로 족했다.

좁은 해안통 길을 걸어가면 어협 공판장 옆으로 도선 선착장이 있었다. 그곳에서는 그 작은 섬이 먼 바다 위에 흐릿하게 떠 있는 것을 볼 수 있기도 했다.

"배가 언제쯤 있을까요? "

배표를 판다는 곳은 구멍가게의 한쪽을 빌어 작은 철제 책상 하나를 놓은 곳이었다. 나는 '수시로 떠남'이라고 적힌 안내판을 쳐다보며 공허한 느낌이 들었다. 수시로 떠난다는 말은 경우에 따라서는 안 떠날 수도 있다는 말과 같았다

"기다려 보십시오. 인원이 차면 떠납니다, "

"인원이 차면요?"

."

"언제쯤 찰까요?"

"글쎄요. 기다려 보십시오."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중년 사내는 자기로서도 도저히 잘라 말할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듯 시종 어중간한 표정을 지었다.

"기다리다가 사람들이 없으면 어쩐답니까?"

"할 수 없지요. 그러니까 기다려 보라는 것 아닙니까?"

기다려 보라는 것만이 그가 할 수 있는 말의 전부였다. 기다리다가 허탕을 치더라도 그것은 엄연히 내 탓이지 그의 탓은 아니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어이가 없었으나 나는 뭍을 떠나온 지 여러 날이 지나면서 그것이 뱃사람들에게는 극히 보편화된 논조임을 얼마쯤 터득

하고는 있었다. 바다의 기상 변화는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것이었다. 봄철에서 여름철로 넘어오는 동안의 날씨는 특히 변덕이 심해서 걸핏하면 무슨 주의보로 뱃길을 가로막았다. 때마침 해마다 그때쯤이면 찾아드는 농무기의 안개. 여객선 앞머리마다 길게 두른 '농무기 안개 사고 예방'의 플래카드. 안개란 터무니없는 것이었다. 멀리 까지 시야가 훤히 의어 있어도 안개만 어느 정도 끼었다 하면 배들은 꼼짝을 못했다. 게다가 그 안개가 언제 걷힐지는 아무도 모르는 그야말로 오리무중의 일이었다. 그 안개를 필두로 파랑과 호우와 폭풍들.뱃사람들은 이런 것들에 늘상 부대끼며 살고 있는 것이었다. 뱃길이 막혔을 때의 섬 사람들은 마치 수인처럼 보였다. 뱃사람뿐만이 아니라 전혀 바깥으로 나갈 일이 없는 사람마저 안절부절을 못했다. 그 눈에 어린 빛은 절망의 빛에 가까웠다. 그럴 때면, 술타령하는 남정네들의 발걸음에 못지 않게 여인네들의 발걸음도 심하게 뒤뚱거리는 것만 같았다.

그 날 꼭 배를 타고 가지 않으면 안 될 무슨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이왕에 길을 나섰고 또 달리 할 일도 없었던 나는 선창가를 오락가락하며 기다려 보기로 했다. 말이 기다린다는 것이지 이제는 나중에 배가 없다고 하더라도 탓할 생각은 없었다. 내가 그 섬에 가려는 것은 팔색조와는 아무 상관도 업음을 나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팔색조가 있다고 해도 알아 볼 능력이 없을 뿐만이 아니라 '호오이' 소리나 '꿔어이' 소리를 듣는다고 해도 그것은 내게는 아무런 값어치가 없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뱃사람이 그곳에는 왜 굳이 가려고 하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팔색조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으리라. 팔색조를 내세우지 않고 그 상황에 대해서 설명하자면 사물과 인간을 향한 내 끝없는 갈증, 항상 막막하여 근원을 알 수 없는 그리움 따위부터 이야기해야만 했다. 도저히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다행히 배편이 마련되어서 막상 배에 올라탔을 때 나는 팔색조에 대해 조그만 관심도, 흥미도 느끼지 못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저 섬에 가는가. 그것은 하나의 탈출의 시도가 아닐까 하고 나는 문득 생각했다. 모든 여행은 하나의 탈출을 꿈꾸는 뜻을 지녔다. 그러나 그 꿈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꿈에 불과하다. 마침내는 보금자리를 찾아 되돌아가는 것을 전제로 한 탈출이기 때문이다. 나는 공연히 우울해진 심정으로 이런저런 생각에 가져 들어갔다. 배에는 밤낚시를 하러 가는 것으로 보이는 중년 사내 일행 세 사람과 젊은 남녀 두 쌍과 나 이렇게 모두 여덟 명의 승객이 타고 있었다. 섬에는 몇 가구의 집이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민박도 가능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나는 그때까지도 하룻밤을 묵어 올지 어쩔지를 결정짓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탈출을 꿈꾸고 배를 탔다면 그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은 그것으로써 이미 목적성을 잃은 것이었다

"이 정도면 파고가 몇 미터쯤 되나요?"

나는 무엇엔가 흥미를 나타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 일 미터쯤 되죠."

배의 조수라고 짐작되는 청년이 좌우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일 미터의 파도 높이에도 배는 상당한 경사를 이루며 기울어지곤 했다. 멀리서 보면 마치 환초(環礁) 같던 섬은 가까이 갈수록 험한 바위섬의 모습을 확연히 드러냈다. 섬의 바위덩어리들은 미증유의 거대한 짐승 의 머리뼈 같았다. 군데군데 음영이 드리워진 채 바닷물에 해맑게 씻겨진 머리뼈. 그리고 그 정수리에는 주검의 머리에서도 얼마 동안 자란다고 하는 머리털처럼 쭈볏쭈볏 자라고 있는 짙은 녹색의 나무들. 어느덧 배가 엔진을 멈추는가 하더니 다시 ', , , ' 역스크루를 돌렸다. 속력을 줄여 접안하려는 것이었다.

섬은 예전에 일본군의 중대가 주둔했다고 하듯이 천연의 요새였다. 턱뼈처럼 돌출된 바위벽의 옆을 타고 섬의 위쪽으로 오르는 길은 몹시 가팔랐고, 마치 부서진 머리뼈의 일부를 복원해 놓은 듯 시멘트로 덮여 잇었다. 같이 타고 온 승객들이 서둘러 사라진 뒤 나는 어슬렁거리며 그 길을 따라 올라갔다. 벼랑 아래로 햇빛이 바닷물에 부딪쳐 눈부시게 반사되었다. 벼랑에 붙어서 산나리 꽃이 피어 있었다. '경고. 이 지역은 풍치 지구이므로 어로 행위 및 해산물 채취 행위를 금함.' 빛 바랜 경고판으로부터 갑자기 숲이 우거지면서 하늘까지 가리워진 길이 굴 속같이 뚫려 나갔다, 섬에 도착하기 전 배에서 바라다본 느낌과는 달리 숲은 울창했다. '이런 숲이라면 팔색조가 깃들만도 하군.' 나는 팔색조가 깊은 숲 속에 산다고 한 사실을 상기했다. 한참을 올라가자 대나무 숲을 지나고 드디어 동백나무 숲이 나타났다. 어느새 기울어 가는 오후의 햇빛에 그 잎사귀들은 무디게 반짝이고 있었다. 어떤 동백나무는 바오밥나무처럼 꾸불꾸불 가지를 벌리고 아름드리로 자랄 수도 있음을 나는 처음 알았다. 나는 그 나무 아래 앉아서 담배를 피워 물었다.

동백나무는 섬의 뒤쪽에도 우거져 있었다. 청동 빛을 떤 풍뎅이들이 둔중하게 날고 있는 나무와 나무 사이로 넓게 트인 바다가 내다보였다. 나는 빠끔히 뚫려 있는 샛길을 미끄러지면서 아래로 내려가 보았다. 파도가 부딪치는 곳은 바위투성이였다. 그 바위를 조심스럽게 돌아 내려가자 문득 낚시꾼들의 모습이 나타났다. 같은 배를 타고 온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이제 막 낚시바늘에 갯지렁이를 꿰어 바다에 던지고 있는 참이었다.

"여기선 고기가 많이 잡힙니까? "

나는 아는 체를 하면서 다가갔다.

"전에 왔을 땐 많이 낚았는데 두고 봐야지요."

한 사람이 이빨을 드러내며 웃음 띤 얼굴로 대답해 주었다. 나는 그들과 적당히 통성명을 하고 옆에 쭈그리고 앉았다.

"빨리 깜싱이 한 마리 낚아서 서울 분 잡숫게 해야 할 텐데."

장사를 하고 있다고 한 사내가 역시 웃으며 말했다. '깜싱이''감성돔'의 사투리였다. 그는 첫눈에 보아도 낚시에는 꽤나 이골이 나 있는 사람 같았다. 그에 따르면 낚시터에 도착해서 몇몇 곳에 종이쪽지를 구겨 던져 물이 빙빙 도는 곳을 찾는다고 했다. 그 한가운데에 낚시를 넣으면 이제는 그저 연신 건져 올리는 것만이 일이라고 했다.

"나중엔 팔이 아파서 못 건져 올립니다."

그는 그런 경험이 있음을 자랑하듯 으쓱거렸다. 그때 '' 하는 소리와 함께 앞자리의 사내가 낚싯대를 채어 올렸다. 과연 한 마리가 파닥거리며 달려 올라왔다.

"뭐꼬?"

"술비이, 술비이."

고기는 낚시바늘을 의외로 깊이 삼키고 있었다. 아가리를 벌리고 낚싯줄을 세게 잡아당겼는데도 쉽사리 빠지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가차없이 칼을 집어 아가리로부터 몸통을 가르고 낚시를 꺼냈다. '술비이'의 정확한 발음은 '술뱅이'였다. 비단고기라고도 하고 용치라고도 한다고 했다. 갓 잡아 올렸을 때의 비단고기는 이름대로 빛깔이 고왔다. 거의 말짱한 채로 두어도 일단 잡힌 놈은 금방 죽으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맛도 훨씬 떨어진다고 했다. 첫 고기를 잡은 뒤 불과 몇 분이 지나지 않아 세 마리의 비단고기가 잇달아 올라왔다. 그와 함께 장사꾼 사내가 돌아앉아 익숙한 솜씨로 회를 뜨기 시작했다. 나는 만약에 기회가 오면 나도 저렇게 해 보리라 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바라보았다. 이곳에 생선회 뜨는 방법을 배우러 왔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어느새 시간이 상당히 흘러 있었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선 것은 비단고기를 비롯해서 노래미, 볼락 같은 생선을 맛보고 나서였다. 그때 마침 베도라치라는 물고기가 올라왔는데 단검만한 길이의 뱀장어를 닮은 이 거무튀튀한 물고기는 남의 것을 빌린 것처럼 쭈글쭈글하고 헐렁한 껍질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나는 그 흉측한 몰골이 끔찍해서 급히 일어났다,

"뱃시간이 급하군요. 먹다 보니 너무 늦었어요. "

나는 감사하다는 표시로 허리를 약간 굽혔다. 사실 뱃시간은 아직 조금은 여유가 있는 듯했으나, 앉아 있다가 저 흉측한 물고기의 살을 먹게 되는 변을 당해서는 도저히 견딜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서둘러 왔던 길을 되돌아왔다. 섬을 떠날 것인가, 하루를 묵어 갈 것인 가에 대해 나는 여전히 결정하지 못한 채 무심코 선착장까지 걸음을 옮겨 놓았다. 낚시꾼들에게서 회에 곁들여 얻어먹은 술이 적당히 올라 있었다. 선착장에 이른 나는 간단한 음료수와 술을 파는 가게의 노인에게 배가 언제쯤 오느냐고 물었다.

오늘은 없습니다. 저기,,,,,,갔입니다. "

노인이 턱으로 바다를 가리켰다. 저쪽 히끗히끗 이는 물결을 헤쳐 나가는 작은 배가 있었다.

"틀렸군요. 빨리 온다고 왔는데."

나는 낙망한 듯 말했다. 그러나 노인의 말을 들어 본즉, 비록 내가 섬을 떠날 의지를 가지고 선착장으로 왔다고 하더라도, 내 쪽에서 늦은 것은 아니었다. 갑자기 파도가 높아지기 시작하여 배가 예정보다 좀 빠르게 떠나가고 말았다는 것이었다.

"하 참 낭패로군요."

나는 멀어져 가는 배를 바라보며 어이없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물론 나는 조금도 낭패를 했다거나 어이없는 심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내 의지로 그렇게 결정하지 않아도 좋게 된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었다.

"민박을 하셔야 하겠네요."

우두커니 서 있는 나를 위로하듯 노인이 말했다.

"민박을요? "

"쭉 올라가다가 첫 번째 집에 들르십시오. 제 집입니다요."

노인은 돌멩이로 굴과 소라 껍데기를 깨어 살을 꺼내면서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일은 이미 그렇게 되도록 되어 있는 것이었다.

"그러지요."

나는 허망한 꼴이 되었다는 투로 긴 나무걸상에 걸터앉아 소주 한 병과 안주 한 접시를 시켰다, 노인이 소라를 깨는 동안 멀리 보이던 도선은 어느덧 시야에서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내가 그 여자를 만난 것은 처음 섬에 와서 담배를 피워 물었던 그 동백나무 아래에서였다. 나는 어둠이 깔린 무렵에야 길을 다시 올라갔고, 민박할 집도 정하지 않은 채 동백나무 아래 멍하니 앉아 숨을 돌리고 있었다. 바로 그때 그녀가 내게로 다가왔던 것이다. 내게로 다가왔다기보다는 그 동백나무 아래로 다가왔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었다. 그 동백나무의 위용에 비추어 내 인간의 몰골은 내가 생각해도 초췌했다. 모든 인간은 자연 앞에서는 남루한 것이겠지만, 그때의 나는 더 한층 그랬다고 하는 표현이 가능하리라. 게다가 날은 이미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나는 그 섬에 내가 문득 와 있다는 것이 공연히 서글퍼져서 유배지에 온 죄수라도 되는 양 고개를 숙이고 무슨 생각엔가 젖어 있었다. 팔색조의 울음소리라도 생각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여기 사시는 분인가요? "

어느 틈에 다가왔는지 몰랐다. 저녁 어스름 속에서는 지나치게 맑은 목소리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순간 그것이 왜 팔색조의 울음소리를 연상시켰을까.

"아뇨. 배를 놓쳤지요."

나는 아까처럼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 ."

그녀는 말하면서 알겠다는 듯이 약간 고개를 숙였다. 여기 사는 사람이냐는 물음은 그녀가 그 섬사람이 아니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녀 역시 배를 놓친 사람이라고 짐작되었다.

"댁은?"

나는 던지듯 물었다.

"글쎄요."

그녀는 잠시 말꼬리를 흐리면서 모호한 웃음을 지어 보이다가 수월하게 털어놓았다.

"이 섬엘 자주 오는 편인데 저도 오늘은 실수를 했군요. 파도가 늘 말썽이에요. 배가 없으면 꼼짝없이 사로잡히니까요."

"사로잡힌다---"

나는 그 말에 언뜻 놀랐다. 섬에서 뱃길이 막히면 언제나 갇힌다고만 생각해 왔던 나였다. 갇힘과 사로잡힘은 본원적으로 다른 것이다. 짐승이 함정에 빠질 때 그것은 갇힘이 아니라 사로잡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가까운 섬에 오는 것도 모험이에요. 어쩌면 이렇게 사로잡힐 기회들 스스로 엿보는 거니까요. 이렇게 한번쯤 사로잡혔다 풀려나면 오랜 동안--- 오랜 동안--- 괜찮아요."

그녀의 말뜻을 나는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았다.

"괜찮다니요?"

나는 뭔가 홀린 느낌으로 어리숙하게 물었다. 나는 내 정신이 왜 이렇게 갑자기 혼미한 지경에 빠지고 있는지 안타까웠다.

"말하자면 정신 건강 같은 거라고나 할까요. 삶의 의욕이 생겨요. 물론 자기로서는 최선을 다해야지요. 그리고 나서 돌아갈 수 없게 되어 사로잡히는 꼴이 되면,,,-, 그렇지만 이런 기회가 좀처럼 없어요. 안 그렇겠어요?"

나는, 그녀가 나 역시 그녀처럼 '사로잡히는 꼴'이 되었음을 즐거워하고 있다고 느꼈다. 즐거워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위로하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렇지 않고서야 처음 보는 남자에게 그토록 술술 이야기를 꺼낼 까닭이 없었다. 어쨌든 그녀의 말대로 나도 사로잡힌 몸이었다. 비록 묵어 갈 것인지 그냥 갈 것인지 망설였다고는 할지라도 나도 최선을 다했다고 여겨졌다. 나는 비로소 그녀의 모습을 자세히 훑어보았다. 이십대의 후반쯤 되어 보였다. 여자 나이를 가늠하는 데 서툴렀지만 따는 그렇게 어림했다. 아직은 완전히 어두워지지 않은 동백나무 그늘 아래 마치 옛 구리 거울 속에서처럼 떠올라 있는 그 흐린 얼굴.

"그런데 왜 여기 앉아 계셨던 거예요?"

그녀가 낮은 바위에 걸터앉으면서 물었다. 그녀가 핸드백에서 담배를 꺼낸 것은 그때였다. 그와 함께 나는 '당신 기다리고 있었소' 하는 투로 농담을 던지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팔색조를 아십니까?"

도대체 터무니없는 되물음이었다. 그녀 역시 무슨 뚱딴지 같은 말이냐는 듯 어리둥절해서 나를 바라보았다.

"팔색조라뇨?"

"전 그 새가 이 섬에 있는지 확인하려고 왔거든요. 아십니까?"

나는 한없이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팔색조를 모르는 듯 해서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몰라요. 전 새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어요. 그 새를 찾아서 어떻게 하려는 건가요? 말려서 박제를 만들 건가요?"

", 박제,,,"

나는 뜻밖의 말에 입을 다물었다. 그런 방법이 있었다. 그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나는 생각 속에서 떨쳐 버리려고 했었다, 왜였을까. 만약에 그 새를 어떻게든 잡을 수만 있다면 박제를 해서 내 방에 놓아두고자 한 욕망이 있던 때문이 아니었을까. 나는 정신이 거듭 혼미해짐을 느꼈다.

"그래서 그 새를 찾으셨어요?"

그녀가 자신의 말이 좀 지나쳤다 싶었는지 부드럽게 물었다.

"아뇨. 아직은,,,,, "

나는 얼버무렸다.

"그렇담 왜 돌아가실라고 하셨어요?"

"어쩐지 틀렸다 하는 생각이 들었지요. 이곳에는 그런 새가 오질 않는다,,,,,,"

꾸며낸 말이 나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나는 팔색조는 아예 생각조차 없었었다.

"좀 성급한 판단은 아닌가요?"

"그렇진 않은 것 같습니다. 여긴 환경이 그 새가 오기에 적당치 않습니다."

나는 새의 생태에 대해 많은 연구를 했고 또 조예가 깊은 사람이기라도 한 양 단호하게 말했다. 어떻게 되어서 그런 상황에 이르렀는지 나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자 나야말로 꼼짝없이 사로잡혀 버린 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가슴이 답답하여 공연히 목을 빼고 머리를 좌우로 휘둘러보기도 했지만 답답함은 시간이 갈수록 급격히 가중되어 왔다.

"아무래도 뭘 좀 마셔야겠군요. "

나는 그녀에게 기다리라는 시늉을 하고 가게를 찾아 나섰다. 그녀는 도대체 어떤 여자일까. 가늠할 수가 없었다. 단지 파도 때문에 배를 놓친 여자로서 무료한 시간을 때우기 위해 내 옆으로 온 여자? 그런 것만은 아닐 것이라고 여겨졌다. 그렇다면? 수수께끼였다. 나는 내

생각의 공간이 허공과 같이 팅 비어 가고 있음을 느꼈다. 이것이 현실인 것마저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녀의 존재뿐만이 아니라 내가 그 섬에 와 있다는 사실조차도 가공의 사실처럼 느껴졌다. 어떻게 된 일이냐고 나는 머리를 갸우뚱거리면서 몇 병의 음료수와 술과 비닐봉지에 든 대구포 등을 사들고 동백나무 아래로 돌아갔다.

그로부터 그 날 밤 일어난 일을 곧이곧대로 옮겨 적을 용기도 없으려니와 기억 자체도 도통 흐릿하기만 하다. 우선 구리 거울 속에 떠오른 얼굴처럼 희미한 그녀의 얼굴부터가 머리에 또렷이 떠오르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쓰잘데 없이 팔색조 이야기를 꺼냈고 박제이야기를 한 뒤부터는 그녀와 나 사이에 이렇다하게 뚜렷이 오간 이야기조차 없었다. 다만 서로 권하며 술을 마신 것밖에는. 나는 나무들을 스쳐 가는 바람소리를 간간히 들었고 그 바람소리가 그녀와 나의 속삭이는 소리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그리고 모든 일이 희미하고, 희미하고, 끝없이 희미했다. 그녀가 동백나무 아래 나타났을 때, 그때부터 섬 전체가, 아니, 세상 전체가 몽혼된 것이나 아니었는지.

나는 그 날 밤 어느 순간 속에서 박제의 새와 인간의 말로 사랑을 속삭이고 있었다. 개가 널 잡아 박제로 만들었지. 넌 썩지 않고 영원히 그 모습으로 날 사랑하게 될 거야.' ', , 당신은 어리석어요. 당신은 내게 사로잡힌 몸이에요.' 나는 새의 딱딱한 부리에 입을 맞추었다. '새도 혓바닥이 있던가? '남잔 다 바보예요. 혓바닥 없는 새가 어디 있겠어요. , 보세요 밀렵꾼 선생님.' 박제의 새가 차고 딱딱한 부리를 들이밀었다. '당신은 날 박제로라도 해서 갖고 싶으신가요? 그건 안 될 말이에요. 오늘밤만 우리는 서로의 것이에요. 우리는 최선을 다하고도 이 섬을 빠져나가지 못한 거예요. 사로잡힌 꼴이지요. 파도가 늘 말썽이에요. 하지만 내일이면 우린 모두 자유로운 몸이 될 거예요.' 꿈이었던가, 생시였던가, 내가 껴안았던 그 뜨거운 몸이 박제된 새의 몸뚱이였던가---

다음날 그녀는 굳이 같은 배를 타고 나가지 않겠다고 고집했다. 나 역시 무엇엔가 고즈넉해져서, 아침이건만 그 노인에게 다시 안주 한 접시와 소주 한 병을 시켜 놓고 그녀를 먼저 보냈다. 노인이 돌멩이로 소라를 가는 동안 떠나가는 도선 위에서 그녀가 한번인가 손을 흔들었다.

나는 포구로 돌아와서야 그녀의 신상에 대해서 아무것도 파악하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에 새삼스럽게 놀랐다. 그럴 만한 시간은 충분히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아둘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니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날 밤의 일만으로 그녀와의 관계를 단절할 특별한 까닭도 없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담담히 그녀를 보냈었다.

돌이켜볼수록 안타까운 노릇이었다. 아마 그렇게 만났듯이 손쉽게, 필연적으로 다시 만나게 되리라고 여겼음에 틀림없었던 듯했다. 그뒤 나는 그 섬에 대한 보고서고 뭐고 다 뒷전으로 밀어둔 채 혹시 어디선가 그녀를 만날 수 있을까 하여 거의 매일같이 돌아다녔다. 그 작은 섬에도 몇 번 갔었다. 그러나 그녀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런 채 여름은 지나가고 있었다. 여름이 가고 떠날 날이 성큼 다가오고 있었으나 나는 그녀를 찾는 일을 그만둘 수가 없었다. 날이 가면 갈수록 그녀의 모습은 희미해져 갔고, 그에 따라 나는

거의 미칠 지경이 되어 그녀를 찾아다녔다. '여자 때문에 미치다니, 세상에 별 녀석이 다 있군' 하고 스스로를 매도하면서도 실제로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런 어느 날이었다. 마침 며칠 전에 돈이 바닥이 나서 집에서 부친 우편환을 환금하기 위해 우체국에 들른 나는 그만 그 자리에 얼어붙듯 서 버리고 말았다. 그녀가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창구에 붙어서서 마악 일을 마친 다음인 듯했다, 나는 피가 거꾸로 흐르는 느낌이었다. 숨이 꽉 막히고 온몸에 경련이 일었다. 섬에서와 달리 옷차림이 집에서 입는 그대로 수수한 것이었을 뿐 그녀가 확실했다. 나는 정신을 가다듬고, 돌아서 나오는 그녀에게로 가까이 갔다.

"---, 안텅하십니까?"

내가 앞에 멈춰 서자 그제서야 그녀도 나를 쳐다보았다, 구리 거울 속에 떠오른 것 같은 얼굴--- 시선이 잠시 당황하듯 비껴갔는가--- 그러나 내가 앞에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얼굴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 얼굴은 오히려 무슨 영문인지 빨리 말해 보라는 지극히 사무적인 얼굴이었다.

", 절 모르시겠습니까?"

당황한 것은 나였다. 그녀가 나를 몰라볼 리가 만무했다. 혹시 내가 잘못 본 것인지도 모르지만 그럴 리도 만무했다.

"누구시죠?"

그녀는 차갑게 잘라 말했다.

"--- 팔색조,,,,"

"?"

그녀의 차가운 눈길이 내 얼굴을 스쳐갔다.

"저는,,,,,, ,,,,,, 섬에서,,,,,"

나는 더듬거렸다.

"무슨 말씀이신지 도대체 모를 말씀이네요."

"섬에서,,,,,, 파도가--- 배를 놓쳐서---"

등줄기에 진땀이 흘렀다.

"사람을 잘못 보신 모양이군요. "

"아닙니다.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틀림없습니다. "

나는 단호히 말하면서도 허둥대고 있었다. 그녀가 과연 섬에서의 그 여자가 틀림없다면 이토록 시치미를 뗄 수 없으리라 싶기도 했다. 나는 머리를 흔들었다. 그와 함께 그녀는 경멸하는 투로 내게 마지막 시선을 던지고 옆으로 움직여 나갔다.

"틀림없습니다. 당신이 틀림없습니다. 그 뒤 나는 그 섬에서 팔색조를 찾았습니다!"

나는 그때처럼 팔색조 운운의 거짓말을 꾸며대 소리쳤다. 그 말에는 그녀도 동요의 빛을 나타냈다. 아주 미세한 동요였다. 그러나 나는 결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틀림없는 그녀였다. 순간, 그렇다면 그녀가 나를 모르는 체하는 것에는 어떤 까닭이 있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아무큰 건 제가 모르는 일이에요."

그녀는 여전히 시치미를 떼고 말했다.

", 그렇군요."

나는 더 이상 무슨 말을 하더라도 그녀로 하여금 나를 아는 사람이라고 말하게 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가벼운 목례를 그녀에게 던졌다. 그러나 그 목례조차고 그녀는 휙 뿌리치다시피 하고 바깥으로 나가 버렸다. 나는 아연한 채 그런 그녀의 뒷모습만 우두커니 쳐다보았다. 그런 일을 마지막으로 섬에서 지난 여름은 막을 내렸다.

그렇다, 혹시 내 눈이 틀렸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지금도 우체국에서의 그녀와 섬에서의 그녀가 동일인임을 믿는다. 그녀는, 섬에서의 암시처럼 그 날 하룻밤만 우리들의 것으로 남겨 놓았던 것이다. 그녀가 나를 몰라 본 체한 것이 아니라 진실로 몰라보았다고 하더라도 그녀를 탓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녀의 섬에서의 행동은 결코 일상의 행동이 아니었다. 그것은 사로잡힌 몸으로서 새로이 자유롭고 자 하는 몸부림이었다. 그것을 모르고 나는 일상의 그녀를 찾아 헤맸던 것이다. 내가 그녀를 찾아 헤맨 것은 그녀를 내 박제로 하려던 데 지나지 않았다. 사랑 가운데는 한 순간에 스쳐 지나감으로써 더 영원한 사랑도 있을 것이었다. 그녀가 택한 그런 방법을 나는 어리석게 모르고 있었다. 그리하여 내 귓전에 영원히 '호오이 호오이' 부르고 있을 그 소리를 없애 버린 것이었다. ,,,,,,그래서 이제 누군가 내게 그 섬에 팔색조가 오는가 안 오는가 묻는다면 다음과 같이 되물을 수밖에 없음을 밝혀두고자 한다.

그 섬에 팔색조가 깃드는가, 안 깃드는가.

그대의 마음이 영원히 그 새가 우는 소리를 듣고자 원하는가, 그렇지 않은가,,,,,,

 

 

 

 

 

지은이 : 윤후명(尹厚明: 1946- )

 

강원도 강릉 출생. 연세대 철학과 졸업. 1967<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 {빙하의 새}가 당선되어 시인으로 등단하고 1979<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산역(山役)}이 당선되어 소설가로 등단. 그는 시적 분위기의 독특한 묘사를 바탕으로 인간의 참삶이 어떻게 존재하는가를 현실과 환상의 교직으로 보여 주는 작가이다.

주요 작품으로는 시집 {명궁(名弓)}과 소설 {부활하는 새}, {}, {누란의 사랑}, {원숭이는 없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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