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수필 672 밥물 맞추기 밥물 맞추기 / 한남희 - 제1회 이천문학상 우수상 동생네서 얻어온 손바닥만 한 압력밥솥은 혼자 사는 나의 필수품이 되었다. 외할아버지 생전 쓰시던 밥그릇보다도 작은 솥이라니. 러시아에선 -나 혼자 행복하게 잘 살아요- 류의 방송 프로그램이나 광고에 벌금을 부과하는 법안을 통과했다는 뉴스를 봤다. 출생률이 1.5명인 상황에서 고삐를 틀어쥐겠다는 러시아 정부는 아마도 0.7명도 무너질 지경이라는 한국의 극심한 출생률 저하를 타산지석 삼고 있지 않나 싶다. 동생네는 정부에서 그나마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단란한 네 가족을 이루고 산다. 그 집에 이 작고 앙증맞은 솥이 해당 사항 있을 리 없다. 친정엄마가 찬밥 혐오자인 까닭으로, 끼니마다 따뜻한 밥해 먹으라며 손수 장만해주신 최소형 압력솥이었다. 동생은 두어.. 2024. 12. 29. 어느 상자로부터 어느 상자로부터 / 조은수 - 2024년 호미곶 흑구문학상 공동대상배송이 완료됐다는 문자였다. 며칠 전 온라인에서 주문한 복숭아가 도착한 것이다. 시장까지 가지 않고 내 방에 앉아 클릭 한 번으로 원하는 물건이 배달되는 일은 이제 도시인의 일상이 된 지 오래였다. 종국엔 인간을 무력하게 만들 시스템일지언정 애초에 나는 운전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재래시장이나 마트서부터 복숭아 상자를 머리에 이고 올 자신도 없었다. 이미 무력한 인간 부류인 내가 이 빈틈없이 편리한 배달 문화를 포기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클릭 한 번에 공산품도 아닌 생물이 내 집 앞에 도착했을 뿐 아니라 그 향기로 입 안에 침이 고일 때, 배달 시스템에 대한 내 경외심은 극에 달했다. 그래봐야 달콤한 복숭아 한쪽 맛볼 기대가 전부였으.. 2024. 12. 16. 후식 같은 하루 후식 같은 하루 / 남태희 직장인에게 일요일은 달콤한 후식 같다. 한 주에 닷새 근무하는 사람이야 덜하지만 일요일 하루 쉬는 사람에게는 아껴 먹는 디저트처럼 감질난다. 밀린 잠도 자야하고 미룬 집안일도 해야 한다. 집안 대소사에 참석하여 못다 한 인사들도 챙겨야 한다. 일요일 내내 평일 못지않게 나름 종종댄다. 눈을 뜨니 아침 아홉 시다. 이불 속에서 좀 더 꼼지락거리며 휴일의 평화를 즐길까 하다 벌떡 일어난다. 커다란 머그잔 가득 커피를 타고 티브이 리모컨을 무의식적으로 켰다가 끈다. 한구석에 쌓아 올려진 책과 우편물을 정리해야겠다는 강박에 마음이 바쁘다. 읽은 책들과 읽어야 할 책들, 답을 줘야하는 책을 분리한다. 봉투에 적힌 신상은 검은 매직으로 지워버린다. 몇몇 책을 책꽂이에 꽂으며 나의 글도 .. 2024. 11. 26. 달의 외출 달의 외출 / 윤혜주 그날, 시월 열사흘의 달은 청송으로 곧장 돌아가지 않았다. 일등성별의 반 이상이 얼굴을 내민 눈부신 푸른 밤을 호미곶에서 보냈다. 소슬바람이 선명한 붉은 잎가지를 흔드는 가로수 길에 눈길 주다, 또랑또랑한 풀벌레 마지막 울음에 귀 기울이다가, 다글다글 파도에 쓸려가는 몽돌의 자지러짐과 청잣비치 시거리에 다정한 미소 건네며 밤새 노닐었던 모양이다. 희붐한 새벽녘이 되어서야 내 창문을 비추며 돌아가는 길을 물었다. 도망치듯 나선 길이었다. 때론 지진 뒤의 피할 수 없는 쓰나미가 더 무서울 때가 있다. 언제 십일 남매라는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있었던가. 그 바람 또한 예고나 하고 불었던가. 이번에도 가족의 근원을 흔드는 슬픔이 거대한 쓰나미로 밀려와 덮쳤다. 넷쩨네 유학 간 .. 2024. 11. 26. 이전 1 2 3 4 ··· 18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