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수필 674 절창과 절규 사이 절창과 절규 사이 / 김원순 - 2025년 고동주 문학상 대상 천산만학이 활활 탄다. 천지가 단풍 불길이다. 등성마루를 타고온 산꼬대가 불길을 더욱 부추긴다. 사방팔방 튀는 불똥이 이곳 남창南窓까지 날아와 불꽃을 터뜨린다. 저수지 물을 다 퍼올려도 끌 수가 없다. 생애 가장 눈부시고 농염한 때, 절정이며 절창이다. 오롯이 물들 때와 날 때, 담담히 머물 때와 떠날 때를 아는 단풍이 지른 불길이다. 지금은 단풍물을 한껏 길어올려야 할 때. 물의 씨앗을 찾아 돌무지나 막장도 파고든다. 돌부리, 나무 뿌리에 걸려 넘어지고 부러져도 개의치 않는다. 절정을 향한 일념으로 목숨까지 내놓은 뿌리가 토해낸 각혈이며 혈루다.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품었던 거짓, 무시, 비난의 화살에 터져버린 내 심장 빛깔이다. 그래서.. 2025. 7. 3. 멍석 멍석 / 황진숙 - 제15회 천강문학상 대상 가을로 온 작물들이 멍석에 부려졌다. 알싸한 태양초로 거듭나기 위해 고추가 제 속으로 햇살을 굴린다. 상수리는 한 자밤의 바람에 몸을 맡긴 채 부피를 줄인다. 짓찧어져 가루가 될지언정 쌉싸래한 맛을 남기고자 껍질을 떠나보낼 준비 중이다. 거둬들인 낱알들은 밀고 당기는 고무래질에 엎치락뒤치락 말라간다. 네모반듯한 두부로 세상을 물컹하게 읽고 아삭한 콩나물로 식탁을 장악하려는 콩들이 뒤섞여 소란스럽기까지 하다. 여물고 나서도 물기를 내놓으며 단단해져야 된바람에도 성할 터이다. 저들이 짓무르지 않도록 멍석이 볕살을 당기고 바람을 불러들인다. 엎어지고 뒹굴며 맘껏 널브러지도록 바닥에 묵묵히 깔려있다. 더러는 곳간으로 들이지 못한 곡식을 덮는 이불자락으로 밤새 한뎃잠을.. 2025. 5. 17. 밥물 맞추기 밥물 맞추기 / 한남희 - 제1회 이천문학상 우수상 동생네서 얻어온 손바닥만 한 압력밥솥은 혼자 사는 나의 필수품이 되었다. 외할아버지 생전 쓰시던 밥그릇보다도 작은 솥이라니. 러시아에선 -나 혼자 행복하게 잘 살아요- 류의 방송 프로그램이나 광고에 벌금을 부과하는 법안을 통과했다는 뉴스를 봤다. 출생률이 1.5명인 상황에서 고삐를 틀어쥐겠다는 러시아 정부는 아마도 0.7명도 무너질 지경이라는 한국의 극심한 출생률 저하를 타산지석 삼고 있지 않나 싶다. 동생네는 정부에서 그나마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단란한 네 가족을 이루고 산다. 그 집에 이 작고 앙증맞은 솥이 해당 사항 있을 리 없다. 친정엄마가 찬밥 혐오자인 까닭으로, 끼니마다 따뜻한 밥해 먹으라며 손수 장만해주신 최소형 압력솥이었다. 동생은 두어.. 2024. 12. 29. 어느 상자로부터 어느 상자로부터 / 조은수 - 2024년 호미곶 흑구문학상 공동대상배송이 완료됐다는 문자였다. 며칠 전 온라인에서 주문한 복숭아가 도착한 것이다. 시장까지 가지 않고 내 방에 앉아 클릭 한 번으로 원하는 물건이 배달되는 일은 이제 도시인의 일상이 된 지 오래였다. 종국엔 인간을 무력하게 만들 시스템일지언정 애초에 나는 운전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재래시장이나 마트서부터 복숭아 상자를 머리에 이고 올 자신도 없었다. 이미 무력한 인간 부류인 내가 이 빈틈없이 편리한 배달 문화를 포기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클릭 한 번에 공산품도 아닌 생물이 내 집 앞에 도착했을 뿐 아니라 그 향기로 입 안에 침이 고일 때, 배달 시스템에 대한 내 경외심은 극에 달했다. 그래봐야 달콤한 복숭아 한쪽 맛볼 기대가 전부였으.. 2024. 12. 16. 이전 1 2 3 4 ··· 19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