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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단편소설2

10. 어떤 부부

by 자한형 2022. 3.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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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떤 부 부 -유진오

 

.

한참이나 인환은 생각하다가.

별 수 없지, 무어. 처녀로 행세해 보지.

그의 입술을 치어다 보고 앉았는 희경을 건너다보고 말한다.

처녀루?

희경은 인환의 눈을 치어다 본다.

헐 수 없지 않소, 취직은 해야겠구. 거짓말 좀 허기루.

그래두―』

희경은 찬성치 않는 듯이 머무적거린다.

거리낄 거 뭐 있소. 누굴 속여서 어쩐다는 것두 아니겠구, 대체 저쪽 조건이 우습지, 미혼 여자래야 만 될 이유가 무어야?

글쎄, 그래두.

희경은 여전히 마음이 정해지지 않는 모양이다.

내 생각엔 괜찮을 것 같구먼두.

인환은 담배를 피어 물고, 내뿜었다. 생각하면 사내자식이 제 손으로 계집자식을 벌어 먹이지 못하고 계집을 취직 전선에 내세운다는 것은 몹시 부끄러운 일이다. 그러나 영구히 희경에게 매달려 먹고 살려는 것도 아니겠고 자기 취직이 결정될 때까지의 임시수단에 지나지 않는 것이요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일이 이렇게 된 이상에는 결벽을 더 부려야 하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도대체 이런 궁상에 빠진 것도 자기의 그 결벽 때문이 아닌가. 그때 그 주임이 낯을 붉히고 동에도 닿지 않는 잔소리를 할 때 직접 자기에게 관계된 일도 아니었으니 그저 한 마디만 꾹 참고 안 했더라면‥‥‥ 하고 생각하면 자기 성미면서도 새삼스레 싫증이 난다. 인환과 희경은 혼인한 후 삼 년 동안 남의 집 곁방살이나마 별 근심 없이 재미있게 해 왔다. 작년에 경주를 낳은 후로는 그들의 살림은 한층 더 오붓하게 재미가 났다. 그러던 것을 하찮은 일로 주임과 충돌하고 인환이 회사를 뛰어나온 후로는 지금 석달 째, 월급에만 매달려 살던 그들의 살림은 말이 아니었다. 인제는 전당질을 할려도 할 것이 없을 지경이었다. 그러는 동안에 누가 먼저 말을 꺼냈는지 모르게 나온 말이 인환이 취직될 때까지 희경이 대신 밥벌이를 했으면 어떨까 하는 것이었다. 희경의 취직에는 희경 자신도 상당한 흥미와 열심을 가진 듯이 보였다. 그러나 막상 일자리를 구하려 들고 보니 처음 생각하던 듯이 만만치는 않았다. 소학교 선생은 사범학교 출신이 아니라 자격도 없고 은행, 회사 하니 어디서 그렇게 자리를 대령해 놓고 오라는 것도 아니었다. 제일 손쉬운 것은 시체 유행인 카페나 바의 여급으로 들어가는 것이나 그것까지는 용기가 나지 않았다 . 그러던 끝에 나타난 것이 J그릴레지스터의 자리였다. 이것이면하고 기운이 나서 쫓아가 보니 무슨 까닭인가 여기서는 또 반드시 미혼 여자라야 한다는 것이었다.

레지스터를 구하신 대서 왔는데요.

호화로운 로비 한 편 구석 소파에 거북스레 앉아 희경은 수줍은 듯이 말을 꺼냈다 .

- 한 사람 쓰기는 쓸 텐데 - 당신이 해보실려구요?

응대하러 나온 젊은 매니저는 희경을 아래 위로 쓱 훑어보며 말한다. 한 푼 틀림없이 딱 들어맞는 양복, 한가운데를 똑바로 갈라서 양편으로 곱게 넘겨 붙인 머리, 어디로 보든지 말쑥한 근대형 신사다. 거기가 대면 옥양목 적삼에 검정 메린스 치마를 수수하게 입은 희경의 꼴은 십 년이나 이십 년이나 뒤져 보인다. 그러나 둥글게 생긴 얼굴, 총명하게 빛나는 눈, 밋밋한 체격은 조금 닦달만 하면 드물게 보는 미인이라고 매니저는 생각하였다. 그만하면 이 채용 목적에 엔간히 들어맞았다. 벌써 여러 여자가 다녀갔으나 무지 적당한 사람이 없었다. 레지스터의 일도 일이려니와 아무쪼록 곱게 생긴 여자를 그 자리에 앉혀 손님들의 흥미를 끌려는 것이 이번 채용의 목적인 까닭이다. 매니저는 주소 성명 나이 경력 같은 것을 물은 다음에 금방 채용이나 할 것 같이 근무시간이며 그 외 대우조건 같은 것을 대강 말하고 나서

헌데 물론 미혼이시겠죠?

하고 물어 본다느니 보다도 따져보는 태도로 희경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예상치도 못하던 질문에 희경은 순간 두 볼을 붉게 물들였다. 인환과의 사이는 누구 앞에 내놔도 떳떳한 정식관계였지만 물론 미혼이시겠죠하고 묻는 데는 선뜻 아뇨. 기혼이요하고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다가 매니저의 묻는 품이 기혼이라면 채용하지 않을 것 같다. 그렇다고 또 미혼이라고 뻔뻔하게 대답할 수도 없고

왜 결혼했으면 안됩니까?

희경은 억지로 웃으며 물었다.

, 이 가게는 반드시 미혼 여자에 한해 채용 허기루 돼 있습니다.

어떻게 대답했으면 좋을는지를 몰라 그래도 머뭇거리고 있으려니까 매니저는 희경의 태도를 아직 바깥 바람을 쏘이지 않은 처녀의 수줍음으로 해석했는지

아니 무어 그 문제는 그저 한번 물어 본 것입니다. 글쎄 내 생각으로는 지금 가게 사정도 급하고 하니까 당신만 마음이 계시면 내일부터라도 와 주셨으면 좋겠는데별로 시원치는 않은 자리지만 벌써 지망자만은 한 삼십 명 됩니다만은.

매니저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뚫어지게 희경을 들여다본다 .

그러면 내일 와 뵙겠습니다.

희경은 말해 놓고 자리를 일어섰다. 인환과 상의도 해야 하겠고 무엇이라 똑똑한 대답은 할 수 없으나 어쨌든 우선 자리를 붙들어 두는 것이 상책이라 생각한 것이다. 매니저는 로비 문간까지 따라나오며 잘 생각해 보고 내일 아침에 꼭 오도록 하라고 부탁하였다. 희경은 속이 근지러운 듯하나 유쾌한 기분이 되었다. 나이 스물 두 살, 벌써 돌 지난 어린애까지 있는 자기를 처녀로 보는 것도 우스웠거니와 삼십 명이나 있다는 후보자를 다 제쳐놓고 첫 번 만난 자기를 당장에 채용하겠다는 것이 기쁘기도 하였다. 일종의 우월감을 몸 속에 느끼고 걸음도 가볍게 집으로 돌아왔다. 처음으로 레지스터 앞에 올라앉고 보니 희경은 모든 사람의 시선이 자기에게로만 집중되는 것 같아 얼굴을 돌릴 곳 조차 없었다. 세 번에 한 번 꼴은 숫자를 잘못 집기도 하였다. 매니저그는 M이라 하였다가 가끔 옆으로 와서 고되지 않느냐, 일이 어렵지 않느냐고 물어 보는 것이 몹시 고마웠다. 아무도 처음 들어온 희경에게 말을 건네는 사람은 없었건만 희경은 모든 사람을 상대로 싸움을 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밤 열시 처음으로 하루 일을 끝내고 집안 일이 궁금해 빨리 집으로 오려는데 M이 사무실에서 나오며,

『〈리에상잠깐만.

하고 불렀다. 리에(梨枝))라는 것은 가게에서 부르기로 한 희경의 이름이다. M은 희경을 레지스터 앞 소파에 갖다 앉히고 자기도 옆에 앉으면서

『〈리에상양장을 하면 어떻소?

하고 단도직입으로 말을 꺼낸다. 희경이 눈을 둥그렇게 뜨니까 M은 빙긋이 웃으면서

아니 무어, 그렇게 놀랄 것은 없구 어저께부터 난 생각한 것이지만 당신은 꼭 양장을 해야 몸매가 나겠어. 뿐 아니라 어차피 이런 데서 일을 보는 이상에는 양장을 허는 것이 편허기두 허구 경제두 되구.

희경이 그래도 아무 대답도 안하고 있으니까 M은 다시,

무어 내가 당신께 꼭 허라는 건 아니지만 양복을 맨들 테거든 내가 잘 아는 사람이 있으니까 내 헌테 말하면 감이며 디자인이며 값이며 잘 말해 주겠소.

하고 자리를 일어섰다.

글쎄요. 저도 생각해 보죠.

희경도 따라서 일어났다. 집으로 돌아와 희경은 곧 인환과 복장 건을 의논하였다. 매니저의 말에다 붙이어 J그릴에 있는 여자들은 전부가 양장이라는 것을 강조하였다. 아직 입어본 일 없는 양장에 대한 호기심이 강하게 가슴속에 움직이는 것이었다.

어때요. ?

며칠 후 희경은 그릴에서 돌아오자 방문을 열어 젖히고 뛰어 들어오며 아라모드의 꼭 맞는 양복에 말쑥해진 자태를 인환 앞에 나타냈다.

오늘 그릴로 가져왔는데 잘 맞는다고 모두를 그러기에 그대로 입어 버렸지요.앞으로 뒤로 모로 몇 차례 돌아서며 옷 모양을 보인다. 사실 나무랄 곳 없이 잘 맞는 양복이었다. 처음으로 양장을 하는 사람은 제 아무리 잘 꾸미고 나서도 어딘지 어색한 구석이 있는 법인데 희경은 마치 처음부터 양복을 입기 위해 태어났던 것이나 싶다. 약간 짙은 초록색 스커트, 누렇다느니 보다는 오렌지 빛에 가까운 블라우스, 가슴 위엔 붙은 새빨간 비단 장미꽃 , 인환은 이것이 삼 년이나 같이 살던 희경이던가 의심할 지경이었다.

잘 맞는군.

인환은 한 마디 대답은 했으나 어쩐지 단순하게 희경의 아름다움을 찬송할 기분은 되지 못했다 . 희경의 그 아름다움은 자기를 위해 꾸며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면 마음 한 구석이 텅 비인 것 같이 쓸쓸한 것이었다. 그러나 희경은 새로 입은 양복이 몹시 기쁜 모양이었다. 잠 자는 어린애조차 들여다보지도 않고 경대 옆으로 가 앉아 이리저리 들여다보더니 나중에는 쪽을 풀어 가지고 만적거리기 시작이다. 머리 형상을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만들어 보고 하더니 경대 서랍을 열고 헤어 핀을 꺼내 머리 끝을 두르르 말아 올려 가지고는 군데군데 찔러 넣는다. 보고 있는 동안에 요새 거리에서 가끔 눈에 띄는 새로운 머리 모양이 제법 근사하게 되어 간다.

어때요. 이런 건?

대충 손질을 끝내고 희경은 인환을 돌아보며 방긋이 웃는다.

글세.

인환이 맥빠진 대답을 하건 말건,

이게 심프손머리라나. 어때요. 이 양복에 맞겠어요?

글세.

희경의 서두는 품에 인환은 몹시 불쾌해져서,

어서 어린애 젖이나 주구려.

퉁명스레 해 붙이고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돌 지난 애를 왜 젖은 주라우. 젖은 떼기루 했길래 취직인지 무언지를 한 거 아니우.

희경은 뾰루퉁 해진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인환은 화가 치받쳤다. 여편네를 돈벌이 보내 놓고 자기는 집에서 어린애 기저귀나 빨아대는 신세가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해 본 일이 없는 노릇이었다. 그 날도 어린애는 똥오줌 합쳐 일곱 번이나 기저귀를 더럽혔다. 서투른 솜씨로 기저귀 빠는 꼴을 보다 못해 안방에 들어 있는 완이 어머니가 두 번이나 대신 빨아 주었다 . 그런데 여편네는 밤늦게 돌아와서는 옷 타령 머리 타령만 하고 앉았다니.

에잇! 내일은 일찍이 계동을 또 좀 가 보아야지.

 

계동에는 인환의 먼 촌 일가 되는 형님벌 되는 이가 살고 있다. 어느 은행 지배인 대리로 다니는 그를 인환은 벌써 십여 차나 찾아다니며 취직을 졸랐으나 여태껏 아무 소식도 없는 것이었다. 이튿날 아침, 일어나는 길로 인환은 계동을 찾아갔으나 일가 형님은,

내가 어따가 자리를 두어 두고 소개를 안 해 준단 말인가. 이렇게 성화가 나게 찾아오면 어떻게 허란 말이야?

하고 도리어 화를 냈다. 뒤통수를 치고 은행으로 가는 형님을 도중까지 따라가다가 안국동 네거리서 갈려 집으로 돌아와 보니 안마루에서 완이 어머니가 경주를 안고 왔다 갔다 한다. 인환을 보자,

애 어머니가 나간 후 어떻게 혼자 우는지.

하면서 어린애를 내준다.

미안합니다.

어린애를 받아 들고 뜰 아랫방 문을 들어서는데 어린애는 푸지직 하고 똥을 싼다. 방 안을 보니 희경이 아침을 먹고 치장을 하고 나간 뒤가 어수선하다. 버럭 화가 치밀어 올라왔다. 똥 싼 기저귀를 갈아 채고 싶지도 않아 어린애를 거칠게 방바닥에 내굴려 버렸다. 내버려두고 앉았노라니 뱃속에서 쭈루룩 소리가 난다.

.

입맛을 한 번 다시고는 방 구석에 밀어 붙여 놓은 밥상을 잡아당겼다. 희경이 먹고 나간 아침 밥상. 인환의 밥만은 고스란히 덮인 채로 있다. 인환은 숟갈질을 할 욕심이 들지 않았으나 기저귀 갈아 채는 것보다는 밥 먹는 것이 나았다. 희경이 첫 월급 타는 날, 인환은 이상스럽게 맘이 불편한 것을 이불을 쓰고 누워 기다리고 있노라니 희경은 보통 때보다 좀 늦게 집으로 돌아왔다. 손에는 무엇인지 뭉치뭉치 싼 것을 들었다.

경주야, 경주 경주.

희경은 들뜬 소리로 방 문을 열자 어린애 이름을 부른다. 무엇이 그리 기쁘냐고 나무라는 듯이 인환은 상을 찌푸리고 눈을 가늘게 떴다. 희경은 잠깐 인환을 보고는 경주 옆으로 가서 빙글빙글 웃으며 어린애 자는 얼굴을 들여다본다.

경주야, 인형 사왔다. .

희경은 가지고 온 꾸러미를 풀르고 새빨간 옷을 입힌 인형과 셀룰로이드 딸랭이를 꺼내 자는 어린애 머리맡에 놓아주었다. 인형은 경주 백일 때부터 인환더러 사다 달라던 것이나 여유가 없어 사다 주지 못하던 것이다. 희경은 한참이나 자는 애를 들여다보다 한번 더 빙긋이 웃고 나서 돌아앉아 나머지 꾸러미를 풀르기 시작하였다. 양파가 몇 개, 뀌미가 한 토막, 그리고 인환의 양말 한 켤레, 세수 비누가 한 장. 희경은 사 온 것들을 주섬주섬 방구석으로 치워 놓고

전동 장에를 좀 들렀더니.

혼잣말 같이 늦어진 변명을 하고 잠자코 옷을 갈아입기 시작하였다. 보고 있는 동안에 인환은 가슴이 뜨거워 올라 왔다. 혼자라도 화를 내고 마음을 끓이던 것이 어째 부끄러웠다. 희경은 누구를 위해 고된 일을 하고 있는 것인가. 양파, 고기, 양말, 딸랭이이것이 반 달치 첫 월급 탄 처음 가이모노인 것이다. 자기는 희경이 양장을 하거나 심프손머리를 하거나 관대한 마음으로 보고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자리옷으로 갈아입은 희경이 이불 속으로 들어온다. 인환은 가슴을 떨며 사랑하는 아내를 맞아들였다. 이튿날부터 인환은 쓸데없는 결벽을 죽이고 힘 자라는 데까지 집안 일을 돌보았다.

 

취직운동 때문에 나가 다니는 외에는 집에서 방을 치운다, 빨래를 한다, 기저귀를 빤다, 양말을 꿰맨다, 부지런히 일을 했다. 희경으로서는 그런 것이 미안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지만 아침 아홉시 반이면 집을 나서서 밤 열시 반이나 되어야 집에 돌아오는 그로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아침 일찍이 밥짓는 것만이 그로서는 최대의 노력이었다. 날이 감을 따라 인환은 부엌데기 모양으로 꼴이 초라해 갔다. 그러나 희경은 이와 반대로 맑은 물로 닦음질이나 하는 것 같이 나날이 깨끗해 갔다. 어린애를 난 후 약간 바스려졌던 얼굴은 도로 윤태가 나고 손톱눈이 일고 깎이던 손가락은 백어 같이 미끈해 갔다.

원 나이보다 확실히 세 살은 젊어 보였다. 인제는 아무 데다 내놓고 처녀요 해도 의심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거기다가 몸단장하는 기교도 나날이 늘어갔다. 처음에는 좀 어색하던 심프손머리도 차츰차츰 머리를 잘라 올린 까닭에 인제는 아주 제격이다. 얌전하게 가지런히 났던 눈썹은 어느 결에 높게 꼬리를 들어 올라가다가 급작스레 떨어지는 유행형으로 변했다. 눈 두덕과 눈 꼬리에 자칫 비치는 다갈색 아이샤도우. 눈 아래 광대뼈로부터 귀 밑까지 아련하게 꼬리를 끄는 자연색 연지. 입술을 붉게 야드르르하게 물들이는 루즈. 이런 것들은 옛날 아담하던 희경의 얼굴을 변해 아주 딴 사람 같은 요염한 근대식 미인으로 바꿔 놓았다. 변한 희경이 변하기 전 희경보다 더 곱고 더 마음을 끄는 것은 아무리 부정할래야 할 수 없었다.

 

희경의 변화를 따라 인환의 기쁨과 우울이 정비례해 늘어갔다. 희경이 고와 가는데 정비례해 그에 대한 인환의 애착도 늘어갔다. 그러나 그 미모가 가게에서 여러 손님들의 감상의 대상이 되는가 생각하면 암만해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우울은 그 다음 순간에는 희경에 대한 애착을 한층 채찍질 할 뿐이었다. 희경이 돌아오면 인환은 으레히 찌푸린 얼굴로 대했다. 그러나 삼십 분 뒤 희경이 자리 속으로 들어오면은 그 찌푸린 얼굴은 그대로 무슨 복수나 하는 것 같은 거치른 애무로 변했다. 이 기쁨과 우울, 사랑과 미움의 모순된 감정에 인환의 마음은 날마다 지글지글 끓는 것이다. 가게에서는 모든 사람이 희경의 환심을 사려는 듯 일부러 친절하게 굴었다. 매니저의 M은 처음이나 다름없이 여전히 친절했다. 마유미라는 클럽에 있는 여자가

여봐 리에상, 괜히 정신차려. 매니저가 저래뵈두 그 방면에는 상습이라나.하고 일부러 귀띔을 해 주었으나 희경으로서는 친절하게는 해 줄망정 아직까지 수상스런 눈치를 보인 일은 없는 M에게 별로 불쾌한 감정을 가질 이유도 없었다. 날마다 오후 한시만 되면 눈이 부시게 말쑥하게 차린 신사가 와서 해태 한 갑을 사 가지고는-〈J그릴에서는 레지스터가 담배를 팔게 되어 있었다레지스터 바로 앞에 있는 소파에 앉아 삼십 분 이상 어떤 때는 한 시간 가량이나 담배를 피웠다. 여봐 리에상저 손님 남작의 집 맏아들이래.

어디서 듣고 왔는지 벌써 마유미는 그 해태 사는 손님의 정체를 알아 가지고 와서 귀띔을 해 준다. 그러나 그렇다고 또 희경으로서는 그에게 악감도 호감도 가질 이유는 없는 것이었다이런 종류의 것을 일일이 적으려면 한이 없을 만하다. 그러나 어쨌든 희경으로서는 여러 사람이 자기에게 호의를 보여 주고 남다른 관심을 가져 주는 것이 결코 불쾌하지는 않았다. 그는 조롱에 갇혔던 새가 푸른 하늘로 날아올라간 듯이 유쾌하게 명랑하게 일을 해 나갈 수 있었다. 누구에게나 웃는 낯을 보이고 사근사근하게 말대답을 하였다. J그릴의 제도는 음식값은 원 값 이외에 서비스료로 일 할을 더 받게 되어 있고 그 돈은 보이나 여급이 받아다가 레지스터로 전하게 되어 있는데 손님 중에는 계산서를 가지고 일부러 레지스터로 가서 돈을 치르고 일 원이나 이 원을 희경에게 주는 사람도 있었다. 도로 내주면 솔직하게 도로 받아 넣고 가는 사람도 있었으나 대개는 , 하며 어름어름 억지로 밀어 붙이려고 한다. 기가 막혀 웃으면 돈을 주어 좋아하는 것으로 알고 점점 더 추근추근히 군다. 대개는 어떻게 해서들지 끝끝내 도로 돌려보내고 마는 것이었으나 언젠가 한 번 M정에서 중매점 C라는 손님이 와서 슬그머니 십 원 한 장을 내밀었을 때에는 희경은 가슴이 뜨끔하는 것을 느꼈다. 곧 도로 평정을 회복하고 웃으며 돈을 받지는 않았으나 희경으로서는 처음 경험하는 무서운 유혹이었다. 어느날 오후, 네 시쯤 되어 손님들이 좀 빠진 덕에 숨을 돌리고 회계를 맞춰 보고 있는데 마유미가 빙글빙글 웃으며 무엇인지 네모진 상자를 들고 오더니,

리에상. 미쓰고시서 선사.

하고 희경의 코 밑으로 내민다.

?

마유미의 얼굴을 쳐다보니까 마유미는 부러워하는 듯 빈정거리는 듯,

흥 한턱 쓰지. 왜 공연히 시치미를 떼는 게야. 자 이거 미쓰시서 온 선사란 말이지. 그런 줄 몰랐더니 리에상두 상당허구먼. ‥‥‥』

무슨 영문을 몰라 상자를 받아 놓으니까 마유미

.

무슨 뜻인지 한 눈을 째긋해 보이고 자기 자리로 나가 버렸다. 가슴이 두근두근하다. 우선 봉투를 떼고 보니 다음과 같은 글발이 적혔다. 별안간 실례합니다. 변변치 못한 것을 보내 드리오니 웃고 받아 주소서. 당신을 내가 좋아한다는 것을 표명하는 이외에 별 뜻 없사오니 그리 아시옵. S읽어 가며 희경은 공연이 얼굴이 확확 달았다. S‥‥‥ S가 누굴까. 그릴에 오는 이 손님 저 손님을 생각해 보았으나 S라는 이니셜을 가진 손님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러나 어쨌든 자기는 남편 있는 여자다.

다른 남자로부터의 이런 선물은 받을 것이 아니다. 그러나 어떻게 하면 돌려보낼 것인가. 물건과 편지를 가지고 온 메신저는 벌써 가버렸다 한다. 희경은 하루 종씰 가슴이 울렁거렸다. S라는 사람이 밤에 집 가는 길에 따라오면 어쩔까. 지독한 부랑자, 유괴마, 폭력‥‥ 공상은 공상을 낳아 끝이 없다. 열시에 일을 끝내고 어떻게 해야 좋을는지 망설이고 있는데 마침 마유미가 와서 같이 가자고 한다. 낮에 받은 물건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의논했더니 마유미는 깔깔 웃으며 무엇을 근심하느냐, 제 좋아 보내는 것이니 받아 두면 고만이요 정 싫으면 자기를 달라 한다.

그럴 수야.희경은 생각하다가 물건과 편지를 다 가지고 집으로 가서 인환과 의논하는 것이 제일 상책이라 생각하였다.

그래두 댕기긴 허는 게로군.

마유미가 놀리는 것도 변명도 하지 않고 희경은 물건을 든 채 마유미와 함께 그릴을 나왔다. 언뜻 보니 길 건너편 가로등 밑에 중절모를 쓴 청년이 한 사람 주춤하고 이편으로 한 발을 내놓는 것이 보인다. 저것이 S라는 사람인가. 희경은 마음이 섬쩍지근하였다. 스물 두서넛 밖에 안 되 보이는 청년이다. 얼굴은 본 일 있는 듯도 했지만 누군지 생각은 나지 않았다. 마음의 동요를 감추고 시치미를 뚝 떼고 걸어오다가 돌아다보니 청년은 여태 아까 그 자리에 꼼짝도 안하고 서서 이편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 숨이 좀 휘이 돌았으나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는 않는다. 도중에서 마유미와 헤진 뒤로는 그 사람이 뒤를 쫓아오는 것이나 싶어 여러 번 뒤를 돌아다보았으나 아무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집까지 걸음을 빨리 해 와서 대문을 닫고 비로소 희경은 마음을 놓았다. 가장 솔직한 마음으로 모든 것을 인환에게 이야기하려고 한 것이나 인환은 그것을 그렇게 알아줄까.

동에 안 닿는 의심을 품고 마음을 괴롭히지나 않을까. 그러나 이왕 멱에 다다른 일이라 지금 어찌할 도리는 없다. 희경은 마음을 정하고 방문을 열었다. 인환은 책상 머리에 앉아 무슨 책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얼굴 빛이 몹시 좋지 못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희경을 흘깃 쳐다보는 눈은 독을 품은 듯이 심상치 않다. 희경은 평상 때면 이러저러한 일이라고 태연하게 말을 꺼냈을 것이나 인환의 태도에 눌려 말을 꺼낼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잠자코 상자와 편지를 인환에게 내밀고 돌아서서 옷을 갈아 입기 시작하였다.

뭐야?

인환이 쳐다본다.

그 편질 보시구려.

웃으며 하려는 말이 도리어 떨려 나왔다. 인환은 상자 위에 놓인 편지를 들고 속을 꺼내 내리 읽는 모양이다. 옷을 갈아입고 돌아서니 인환의 얼굴에는 침통한 빛까지 떠돌고 있다.

S라는 게 누구야?

누군지 나도 몰라요!

웃는 얼굴을 만들려 해도 공연히 얼굴이 뻣뻣해 안 웃어진다.

모르다니.

글쎄 그렇기에 우습지요. 가게에 오는 손님에두 S라는 이는 아는 이가 없구. 어떻게 했으면 좋을는지를 몰라 당신허구 의논을 해 볼려는 거요.

인환은 한참이나 잠자코 있더니

모르는 사람이면 왜 S라고만 쓸 리가 있나.

아까보다 좀 부드러운 목소리나 그래도 어조는 심상치 않다.

글쌔 그렇기에 더 우습지요. S라는 사람은 당최.

원 별 놈두 다.

인환은 손에 들었던 편지를 방바닥에다 내던졌다. 그제서야 성이 풀린 낯이었으나 아직도 깊은 오뇌의 그림자는 사라지지 않았다. 한참이나 또 잠자코 있다가,

그래 물건은 무엇이오.

뭔지 몰라요. 안 펴봤으니‥‥‥‥』

펴보오.

당신이 펴보오. 그래서 가지고 온 것이니.

인환은 잠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더니 상자를 끌어내려 끈을 끄르고 종이를 펴기 시작하였다. 무엇이 나오는 것인가 희경은 공연히 마음이 졸렸다. 종이를 다 끄르고 상자 뚜껑을 여니 속에는 이리저리 찌그러진 서양과자가 서른 개 가량 그득하게 들어있다. 인환은 잠자코 도로 뚜껑을 덮어 희경 편으로 내밀었다. 희경은 속에서 나온 것이 서양과자라 마음이 놓이며 웃음이라도 터져 나올 듯하였다. 그것이 만일 값나가는 비싼 물건 이었더면 어떻게 할 뻔했을까. 인환은 그래도 쉽사리 자기를 신용해 주었을 것인가. 잠자던 어린애가 삐하고 운다. 희경은 기저귀를 갈아 채우고 뚜덕뚜덕해 다시 재웠다. 그러는 동안에 인환은 자리 속으로 들어가 잠이 들었는지 안 들었는지 상을 찌푸린 채 눈을 감고 있다.

 

일어나 불을 끄려고 하다가 보니 책상에 놓인 책에 무엇인지 붉은 줄을 잔뜩 그어 놓은 것이 보인다. 아까까지 인환이 읽고 있던 책이다. 들어보니 文學倫理라고 제목한 앙드레지드라는 사람의 책이다. 붉은 줄을 그어20 놓은 대목은, 아무리 큰 죄악이라도 때와 경우에 따라서는 자기는범할 수 없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아직 하나도 없었다라는 괴테의 말이었다. 희경은 잠깐 생각해 보았으나 어째서 인환이 그 곳에 붉은 줄을 쳐 놓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作者附記이 소설은 痴情과 합해서 한 소설이 되는 것인데 따로 발표하게 되는 필요상 끝을 조금 뜯어 고치어 억지로 독립 시켰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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