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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단편소설2

30. 나의 자기 진술, 당신의 심문

by 자한형 2022. 3.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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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자기 진술, 당신의 심문

에 의한 -이인성

 

새삼스레 무엇인가를 미리 권하지는 않겠다, 이 소설을 읽으려는 당신에게. 이 소설을 본격적으로 읽어나가기에 앞서 두 눈을 지긋이 감고 당신만의 속 어둠 속에 침잠해보든지 말든지, 반대로 두 눈을 부릅떠 이 책을 앞에 둔 당신 자신의 겉모습을 샅샅이 훑어보든지 말든지, 혹은 폐활량을 가득 채워 숨쉬며 갑갑한 가슴을 조금 뚫어보든지 말든지, 또 혹은 빈혈의 머릿속에 가득 핏물이 고이도록 물구나무를 서든지 말든지.... 시작부터 자유롭게, 그리하여 이 뒤를 잇는 어디를 어떻게 읽든지 당신의 마음길을 따라.... 그렇게, 모든 걸 마냥 당신 뜻대로!

.........새삼스레, 당신 뜻대로?

글곬이 이렇게 터져 버렸으니 말인데, 이 글줄기의 연원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자면, 실은, 애당초 이 소설 자체가 당신 뜻대로 씌어지기 시작했었다. 당신 뜻대로 읽혀지고 있는 지금에 앞서. 그러니까 이 소설이 바로, 당신이 나에게 오랫동안 추궁해온 그 소설이다. 그러므로 마지막까지 당신 뜻에 따라, 이 소설은 존재하게 될 것이다. 무슨 까닭인지 아직 불확실한 당신 뜻대로, 당신에 의해 내가 나를 자백하는 형식으로. 언젠가부터 당신은 나에게서 이 소설적 자술서를 받아내려 애써왔었다. 집요하게, 나로 하여금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이 지경에 이르도록.

그런데 혹시(그렇다면 필경), 당신은(나는), 그러한 당신 자신을 스스로 의식치 못하고 있을지 모르겠다(당신에 의해 씌어지는 이 소설을 실제로 쓰기는 내가 쓴다는 문제를 의식화시키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그러나), 위의 몇 줄만을 읽은 당신은(위의 몇 줄만을 쓴 나는), 그것을 어이없는 속임수로 받아들여(그것을 당신 뜻에 대한 내 뜻의 갈등으로 여겨), 당신 뜻이 내 뜻에 의해 조작되고 있음을 주장할 법도 하다(슬그머니 뒤섞어 얼버무리고 싶은 유혹을 안 받는 것은 아니다).

물론 당신은(그래도 나는), 끝내 그러한 판단을 뒤엎을 어떤 이유도 찾을 수 없을 때(이 어쩔 수 없는 갈등과 정직하게 맞설 때), 이 또한 당신 뜻대로(이것만은 내 뜻대로), 내가 공연히 자기 진술에 당신을 연루시켜 자기 합리화의 근거를 삼으려 한다고(이 자기 고백 속에는 필연적으로 당신이 함께 살아 얽혀 있노라고), 나를 이 지면의 벽 너머로 흘켜보고 꾸짖거나 남들 앞에서 비난할 자유를 가지고 있다(당신과 당신의 남들인 다른 당신들을 이 지면의 문 안에 열린 당신 뜻밖의 혼돈으로 끌어들여야겠다는 집념을 느낀다). 독자로서의 당신에게 내재된 원천적인 권리로서(작가로서의 내게 의도적으로 부여한 한 책임으로서). 하지만 역설적이게도(하지만 도리어), 그 권리의 정당한 행사는 이 소설의 끝에서 이루어져야만 하리라(내 외로운 자존심이 홀연 당신과의 관계를 더 깊이 다져줄 수도 있으리라).

!, 이제, 내 뜻을 당신 뜻으로 수락해, 당신은, 내가 억제되어 있던 괄호를 열어주는가? 일단 작가로서의 내 몫을 실천할 기회를 주기 위한? 동시에, 독자로서 계속 읽어나가기로 한 결심의 증거로서? 아마도 이게 당신과 나 사이에서 되어 가는 한 과정이겠지만, 그러나, 당신 뜻을 내 뜻으로 받아 조심스럽게 당신 배면에 괄호를 빠져 나온 나는, 불현듯, 내 뜻밖의 어떤 불길함에 휩싸인다. 아무래도 지금의 이 문장과 문장 사이, 단어와 단어 사이, 철자와 철자 사이, 자음과 모음과 받침 사이로 깔린 백지의 공간에는 예기치 못했던 늪이 숨겨져 있는 듯싶다. 모든 것을 허무 속에 삼켜 무화시키는 늪, 막 맺어져 가는 이 언어의 인연도 삽시에 지워버릴.

어쩌면 당신은, 나를 풀어줌으로써 오히려 나를 내 뜻대로 내버려둔 채, 당신 뜻대로 훌쩍 나를 떠나버리려는 게 아닐까? 텅 빈 관계없음으로, 당신과 나 사이에 단절의 늪을 깔고. 나는, 당신이 당신 뜻대로 어디서든 이 소설 읽기를 마감해 버릴 수 있음을, 그리고 그에 대해 내가 손쓸 수 있는 길이 전혀 없음을, 미처 가늠하지 못했다. 뜻만 정한다면, 당신의 끝내기는 한마디로 족하다.

"재미없군."

재미가 없다구 뭐, 재미가? , 재미가? 벌써? 하기야 이 있을 수 있는 당신의 태도를 미리 추출했다고 한들, 기껏,

"재미가 도대체 뭔 줄이나 알어?"

하고 독기를 뿜어내는 것 이외에 어쩐단 말인가. 지금, 여기서, 오로지 이런 소설에 봉착해 있는 내가. 바로 당신에 의해 몰리다 못해 적기 시작한 이 언어들마저 당신의 부재에 의해 늪가에서 부식되어버린다는 것은 참담한 일이다.

그렇지만 기어이 그렇게 된다면? 이 소설 첫머리서부터 때 이르게 닥쳐올 수도 있는 그런 파국을 어떻게 맞이할 참인가? 담담히, 비굴하지 않게, 실패를 예감하며 무대 위에 선 마술사처럼? 신통력을 잃어 싱싱하게 피어나는 장미꽃 대신 추레하게 구겨진 종이꽃이 펼쳐지리라는 걸 알면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관중을 향해 얼굴 가득 웃음을 띠는 마술사처럼, 나도 당신을 향해 손을 내밀어 보일까?

나 자신을 향해서는 히죽히죽 웃음을 흘리며. 당신이 어쨌든 이토록 재미없는 소설을 일단 여기까지 읽었다는 사실을 빚어, 감동이 아닌 초라한 물음표 몇 개를 : 만약 당신이 이 순간에 이 읽기를 끊어버린다면, 그것은 적어도 이제껏 읽어온 읽기 행위에 대한 배반이 아닐까? 그건 당신이 또 다른 당신으로 옮겨가 그 당신 뜻대로 독자이기를 멈추는 것이지, 그 이전의 당신 뜻에 의해 이미 시작된 독자로서의 당신 뜻을 뜻대로 따라온 것은 아니지 않을까? 아무튼 읽는 자만이 독자니까, 독자로서 자유롭다는 말도 이 글을 자유롭게 다루고 다툴 수 있다는 의미에서지 원래 이 글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는 의미에서는 아니지 않을까? 결국 당신이 독자로서의 숙명을 선택함은, 작가로서의 숙명을 선택함으로써 당신 뜻을 내 뜻에 맞아들여 더불어 살게 하며 미움도 싸움도 함께 품어 우리 - 아뿔사, 당신의 허락 없이 이 어휘를 함부로 쓰다니-의 자식으로 잉태시키고 싶다는 내 육체적 정신을, 지금 이곳의 한 모습인 그 꼬락서니가 아무리 흉하더라도, 마찬가지 당신 뜻으로 되맞아들여, 속 뜨겁게 달아오른 서로의 침묵을 섞기까지, 정성스런 언어의 애무로 땀 흘리겠다는 결단이 아닐까? 결정적으로 당신 뜻에, 대답의 마침표를 맡기겠다....

.......결정적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힐끗 저 건너에서 여기를 훔쳐 읽지 않았더라도 잘 알고 있었겠지만, 들리지 않는 당신의 대답을 한없이 기다린다는 것은 나마저 이 소설 쓰기를 포기하겠다는 뜻과 다름없다. 그러나, 빌어먹을, 글쟁이에게 그런 자폐의 끝은 발광일 뿐이 아닌가. 그러니, 당신의 뜻이 어디로 기울러지든, 마지막 당신인 나 잣니에 대한 의무감만으로라도, 나는 내 자백을 위한 이 소설을 이어가야겠다. 아니, 과장은 말자. 나 자신인 마지막 당신이 아니더라도, 당신은 아직 있다. 앞서의 '당신'과는 다른 당신'일지 모르나, 당신이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새삼스레 지적해, 당신은 당신들이니까. 당신들은 모두 나의 당신이니까. 당신들 전체가 하나의 존재인 듯이 나는 써왔지만, 각자의 당신들 뜻대로 읽는 당신들은, 나의 '당신' 속에서, 누군가는 존재를 지우고 누군가는 존재를 이어가며 누군가는 새로이 존재를 마련한다. 그때, 그 무수한 겹쳐짐과 비껴감을 통해, 나의 '당신'은 당신들 곁에서 자신의 삶을 사는 존재처럼 움직인다. 극단적인 가정이도, 아무 당신도 읽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 소설밖에 내가 있게 하고 이 소설 속에 나를 있게 하는 당신 - 이 존재는 결코 마지막 당신인 내가 아니다 - 만으로서라도. 그렇게라도 당신은 있었고, 있고, 있을 것이다. '당신'이 모든 당신들의 수레가 되기를, 나는 은밀히 꿈꾸는 바. 확신에 차 있는 듯한 적어놓았으나, 사실 나는 이 전환점을 찾는 데 살을 갉아내는 시간을 흘려보냈다. 내 글쓰기의 시간적 양을 새겨 넣지 못하는 인쇄 양식 탓에 그저 한 줄의 빈 행간일 뿐인데, '마침표를 맡기겠다...'면서 앞 문단을 띄우고 난 오랜 후(어느 정도 자유로워진 내 표현의 이 자발적인 괄호에 삽화를 집어넣자면, 그 사이 나는 다른 아무 일도 못하고 그저 원고지 앞에 묶여 머리만 쥐어뜯으며 꼬박 아흐레를 지냈다), 더 이상 견딜 수 없던 발광의 범람 직전에, 하여튼 써야 한다는 본능적 손놀림으로, 여기서는 삭제된 욕지거리 - 그런데 그건 내가 다른 소설에서 이미 썼던 구절의 복습이었다 - 를 휘갈겨대자, 거기 거의 자동적으로 '당신'이란 어휘가 새로운 당신을 향해 튀어나왔고, 그제야 비로소, 위의 깨달음이 트여온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아직도, 위험 수위까지 차 올랐던 발광이 내 의식의 벽 너머로 출렁대고 있다. 가라앉지 않는 발광은 자꾸 의식을 탐한다. 그 발광은, 홀로 떨쳐진 자의 난폭한 충동으로, 내 욕망의 단면을 한칼에 잘라 드러내 보이고 싶어한다. 욕망의 몸통이 갈라져 욕망의 피가 분수처럼 갈래갈래 치솟도록. 그리고 그 핏줄기를 채찍으로 거머쥐고 싶어한다. 그것으로 보이지 않는 당신을 마구 후려치고 싶어한다. "네가 내 자백을 원하지 않았다구? 기억해봐, 네가 내 정체를 캐고 싶어한 적이 없단 말이냐?"하는, 다그침과 함께. 내 앞의 허공 속에 기체로 스며 있던 당신이 억억 비명을 지르며 뛰쳐나와 피멍울 터뜨리려 실토할 때까지. 실제로는, 당신이 유령처럼 내 머릿속에 뛰어들어 파란 눈을 흡뜨고 낄낄대는 것만으로도 흐늘어져 삭아버릴 무모한 채찍인데.

간신히, 나는 발광을 참고 있다. 욕망이 욕망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음을, 내 의식은, 소설을 쓰고 싶다고 해서 소설이 써지지는 않는다는 체험으로 안다. 하지만 정 그 발광이 가라앉지 않는다면, 욕망이 제 욕망의 길을 모색토록 하기 위해서라도, 차라리 그 채찍을 당신에게 건네주는 편이 낫다. 그리고 스스로 들이대야 한다. 내 등판을, 아픔을, 가슴을, 따뜻함을, 머리를, 명철함을, 눈을, 분노를, 입을, 부끄러움을, 허리를, 슬픔을, 성기를, 기쁨을, 무릎을, 절망을, 발바닥을, 희망을....

"내가 네 자백을 원했다구? 대봐, 뭣 땜에 내가 네깐 놈을 파헤쳐야지?"

하는, 당신의 고함 속에서. 내 힘으로는 삭여버릴 수 없는 채찍이르로, 그때 나는 버텨내는 수밖에 없다. 이 소설로 이어질 대답을 굽히지 않으며. 물증은 없다고, 소설은 물증을 들이대는 삶의 양식이 아니라고, 당신이 채찍보다 더 가혹한 침묵으로 나를 고문해왔다는 심증은 굳다고. 그래, 공기인 당신은 또한 내 숨결이라서, 내 가슴으로 들어와 내 안에서 들끓으며 나를 심문하곤 했음이 틀림없다. 없는 듯이, 부드러운 듯이, 때로은 다가올 행복한 포옹의 예감으로, 그러나 돌연 내 정신의 구석구석을 한꺼번에 들쑤셔대는 고통으로. 이제야 나는 내 불면과 두통과 헛구역질과 줄담배와 폭음을 이해할 것 같다. 바로 지금도, 나는 그렇게 당신을 겪고 있는 모양이다. 심장이 뛰고 호흡이 거칠어지는 증세를, 나는 자각한다. 머릿속이 웅웅거린다. 그것이 당신의 못소리가 될 것이다. 당신이 묻지 않더라도, 나는 당신에게 물음 당할 것이다.

- 사이,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지는.

아득하다, 이런 관계가 과연 언제나 황홀한 정사를 엮을지.

- 사이, 머릿속에 어둠이 차오는.

욕망의 성급함이 이 현실을 더욱 캄캄하게 한다. 우리는 모두 발 디디고 있는 암중모색의 언어 공간을.

- 사이, 머릿속에 마른번개가 치는.

이 소설로 한 발자국이나마 내디딜 수 있다면. 읽혀서 자백하는 나와 씌여져서 심문하는 당신이 부딪겨 일으키는 번개 빛에 흠칫 건너다 보이는 저 어둠의 먼 밖으로.

......그러나, 어떻게?

닥치는 대로! 닥치는 대로 성실하게! 당신과 나는 무수히 가능한 '당신'들과 ''들 중의 한 예일 따름이다. 당신과 나는 스스로 실험 당하는 것을, 실패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예정 속의 모든 것은 파기되어야 한다. 더 이상 주저할 필요가 없다. 그러니 당장, 당신의 소환에 응하겠다. 당신도 다시 한번 당신의 뜻을 굳혔는가? 그렇다면 나를 기다리는 당신은 어디에 있는가?

대답 없음의 함정에 거듭 빠져들지 않기 위해, 훌쩍, 나는 자진해서 이 소설 속의 허공으로 뛰어든다. 어둠의 허공 속에 어둠의 풍경이 추상적으로 펼쳐져 있다. 내 시선이 풍경 속을 주의 깊게 뒤적인다. 그러자 어느 순간, 풍경의 한 모퉁이가 부르르 떨리면서 탄식 같은 소리가 들린다. , 낮은 중얼거림이 어둠의 형상으로 드러난다. 그런데, 하나가 아니다. 컴컴한 당신의 형체가 세포분열처럼 증식한다. 중얼거림은 웅성거림이 된다. 순식간에 어둠의 군중이 내 앞에 가득 찬다. 얼굴을 확인할 수 없는 당신들이 저마다 뭐라고 말한다. 말들이 한꺼번에 뒤섞여 알아들을 수 없는 거대한 합창이 된다. 서서히, 당신들은 흉흉한 음색으로 나를 짓밟을 듯이 무리져 다가온다. 나는 뒷걸음질친다. "안돼! 왜들 이러는 거야?" 나는 넘어진다. 기체인 당신들이 한없이 나를 밟고 지나간다.

나는 점점 아른히 기진해져서 맥을 잃는다. 의식이 꺼진다. 암흑.

뒤척이는 꿈도 없이 얼마나 깊이 잠들었었나, 어둠의 바닥에 엎어져 있던 나의 옆구리를 누군가가 툭툭 차댄다. 부시시 몸을 일으켜 주위를 둘러보니, 어둠의 방인 것 같다. 형체가 분별되지 않는 기척이 뚜벅뚜벅 내 주위를 맴돈다. 당신인가?

", 시간이 됐어. 이제 말해보게."

보이지 않는 당신이 딱딱하게 말을 꺼낸다.

"무엇을?...."

하고, 얼떨떨하게 내가 되묻는다.

"너에 대해서."

"나에 대해서? 나에 대해서, ?..."

나는 여전히 막연함을 주체치 못한다.

"그럼 먼저 이렇게 시작해볼까? 넌 누구지?"

"누구라니?..."

당신의 발자국 소리가 등뒤에서 멈춘다.

"계속 이렇게 불성실한 태도로..."

하다가, 당신은 목소리를 억제하며 다시 묻는다.

"이름은?"

"이인성"

"생년월일은?"

"천구백오십삼 년 십이 월 구 일."

"출생지는?"

나는 서울이라 대답해야 좋을지 진해라 대답해야 좋을지 잠시 헛갈린다.

"그냥 쓰기는 서울이라 그러는데 진짜는 경남 진해래요. 피난중에 거기서..."

"사족은 필요 없어."

하고, 당신이 말을 저지한다. 당신에게 내 출생지는 어디일까?

"본적은?"

"서울 종로구 누상동..."

"원적은?"

"평안북도 정주군, , 무슨 면이더라.."

"됐어. 현주소는?"

"서울 강남구 도곡동..."

을 대다가, 나는 여기가 경찰서일까-하는 첫 의혹을 느낀다.

"학력은?"

"대학 졸업..."

깨름직한 기분으로, 지겹다는 기분으로, 나는 우물쭈물 완결어미를 생략한다.

직업은?"

"소설가."

"소설이 주수입원인가?"

"아니요. 하지만 제 직업은 소설갑니다."

속이려고가 아니라 내 자존심을 살리기 위해, 나는 말 뒤끝에 힘을 준다.

"뭐야?"

하고 짧게 끊어지는 반문이 돌연 긴장을 몰고 왔으나,

"!"

하며, 당신은 의외로 쉽게 추궁을 포기한다.

"좋아, 멋대로 해. 이번엔 병역 관계를 대봐."

"보충역 필."

"군별은?"

"육군."

"계급?"

"일병."

"군번?"

"구육구공칠팔삼구."

"그러면 키는?"

"젠장. 백칠십센티."

"몸무게?" "오십 킬로."

"육십 킬로?" "아니요, 오십 킬로."

"어디 아픈가?"

"아니요, 전혀."

"보이진 않지만 지독하게 말라깽인 모양이군. 그 다음, 종교는?"

"없습니다."

"취미는?"

취미? 갑자기 나는 이 문답을 비틀고 싶은 충동이 뻗힌다.

"술마시기요."

의외였는지, 당신 질문의 리듬이 멈칫한다.

", 그럼, 그 다음...., 특기는?"

"술취하기."

쿡쿡, 당신은 뜻밖의 웃음을 참는 태도가 완연하다. 때를 놓치지 않고, 내가 불쑥 속마음을 토해낸다.

"아니예요. 이게 아니지 않아요? 이런 공문서식 인적 사항을 심문하고 심문 받으려는 게 말이에요. 도대체 우리 상상력이라는 게 왜 이 모양이지요?"

무심코 '우리'를 또 내뱉은 나는 당신의 눈치를 살핀다. 당신의 묵묵부답. 갑자기, 당신은 깊은 한숨을 몰아쉰다. 그리고 다시 오랜 침묵 끝에, 훨씬 부드러워진 어조로 묻는다.

"그럼 자넨 어떤 진술 방식을 원하고 있는 거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건..."

당신은 어둠 속에서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곤혹스러움을 표현하고 있는 게 아닐까? 왠지 그런 느낌인데, 아니나다를까 당신은 그런 느낌을 토로한다.

"그러면 먼저 이걸 대답해보게. 나는 독자로서 성실하기 위해 계속 읽어오다 보니 마지못해 심문자의 역할을 떠맡은 셈인데, 그러나 내가 왜 자네를 심문해야 하는 거지?"

나는 침을 꿀꺽 삼킨다.

"글쎄요, 그건 애초 당신 뜻이었는데... 하지만, 제 입으로 말하자면, 거꾸로 제 경우도 마찬가지겠는데, 이런 인식 아닐까요? 당신이 나를 드러내지 않으면 당신도 드러나지 않고, 결국 '우리'를 드러낼 수 없다는, 소설을 통해서 말이에요."

'우리'라는 어휘를 가지고, 나는 조심스럽게, 어떤 추상적 실체를 그려본 셈이다.

"어렵군, 그러니까..."

"그러니까 우선은, 작가란 삶을 이야기하는 데 있어 더 이상 전능한 신적 존재가 아니라는 뜻이지요. 즉 당신은, 작가란 자들을 당신이나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서 허둥대며 살아가는, 동등한 인간으로 파악하기 시작한 겁니다. 그렇다면 그가 어떤 사람이며 세계를 어떻게 보고 어떻게 이야기하느냐는 게 숨김없이 드러나야, 그와 참다운 의사 소통을 할 수 있지 않겠어요? 그런 의사 소통이 이루어져야, '우리'라는 집단적 얽힘이 올바르게 구성될 거고요. 물론 늘 하듯이 단순한 이야기꾼인 척 어떤 소재를 다룰 때도, 당신은 그 작자의 사람됨을 대충 추측해낼 수 있겠지요. 이른바 분석이라는 걸 통해서.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왠지 부족하다는 것이 당신의 욕구라고, 저는 풀이합니다. 모두가 제각각 자기 정당성만을 내세우는 이 미친 시대가 그걸 요청한달지, 때로는 굴욕스럽기조차 한 자기 검증과 반성이 필요해진 거지요. 예컨대 이때까지는 어떤 이야기를 독자들이 정당한 것으로 느끼게끔 꾸며온 작가들부터가, 자기가 정당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줌으로써, 이 세상의 허위를 함께 드러낸다든지... 이젠, 이 시대의 정서적 바탕을 바꿔야 합니다. 그거야말로 작가가 종사할 일이지요. 그래서 당신의 심문이 제게는 이렇게 울립니다. 네 꼴을 똑똑히 봐라, 너 자신부터 바뀌거라."

채 정리되지도 않은 생각들이 어쩌다 이리도 두서없이 쏟아져 나오게 되었는가? 대꾸하지 않는 당신에게, 내가 다시 낮게 중얼거린다.

"사실은, 겁이 납니다...."

이때, 당신이 결연하게 말을 받는다.

"일단 돌아가게. 그리고, 보다 구체적으로 자네의 속을 들여다볼 수 있도록 다시 시작해보게."

나는, 엉뚱하게,

"거기선 당신 얼굴을 볼 수 있을까요?"

묻는다. 대답 없는 당신은 이미 사라졌다.

보다 구체적으로 내 속을.... 당신 말이 옳다. 내 작품을 통해 당신이 보는 나는, 당신이 읽은 다른 작가들과 구별되는 이인성이라는 작가다. 지금 이것도 내 작품이니까, 여기서의 나는, 아무리 보편적으로 여겨지는 작가의 처지를 늘어놓을 때조차, 내 진술의 특수성에 입각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그 나다움을, 그 나다움의 한계를 보편적인 양 들먹인다면, 그게 곧 나를 은폐시키겠다는 짓이 될 것이다. 그 전에 당신이 용서하지 않을 테지만.

지금, 나는 이 소설 속에서 - 동시에 이 소설 앞에서이기도 하다-, 내 생활의 근거인 내 집의 내 방에 있다. 나는 이 구절을 쓰면서, 어서 당신이 나를 찾아주기를 기다린다. 얼굴을 보여줄 당신은 누구인가? 그런데, 갑자기 이건 또 무슨 일인가, '이인성씨?' 하는 글자가 이어 적히면서, 그게 매우 감이 먼 전화기의 목소리로 읽혀진다. '전 독잔데요. 할 말이 있어서요.' 언젠가 나는 낯모르는 당신들의 편지와 전화를 받은 적이 있다. '독자의 심문에 응한다는데, 글쎄, 당신이 이 소설을 쓰고 있는 현재와 시공을 달리해 읽고 있는 독자를 직접 심문자로서 만나려는 시도가 실현될 수 있을까요?' 예전의 당신들은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 그러나 당신들의 옛말이 지금 그렇게 고쳐져서 들린다. 당신이 심문자로 의식하는 독자란, 실제로는, 당신이 살아오는 동안 접했었고 접하고 있는-직접이건 간접이건-수많은 사람들 뒤에 그림자마냥 깔려 있는 게 아닐까요? 그리고 그 그림자 밑에 이중으로 겹쳐진 그림자인, 당신이 만나고 싶고 만나야 할 미래의 어떤 사람들이 아닐까요?

아마도 그들이 시간을 되돌리거나 앞질러서, 바로 당신의 당신인 우리를 송신기로 삼아 통신을 보내고 있을 거라는 뜻이지요.' 나는 당황한다. 방금 나는 당신을 걸어, 슬쩍 진실을 우회하려 했던 것일까? 심문의 내용은 결국 당신의 기억 속에서 뼈저리게 되새겨지는, 또 다다르고자 하는 미래가 요구하는 어떤 질문들일 테니까요. 심문은 독자가 하지만, 그걸 상상적으로 받아쓰는 건 당신임이 확실하거든요. 그러니 더 이상 도식적으로 독자를 이 소설 속에 개입시키려 하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이젠, 우리의 심문이 내재된 자기 진술서의 형태로, 고백을 시작해야 할 때가 된 거지요.' 나에게는 반박의 여지가 없다. 당신의 당신 읽기는 그대로 이어진다. '여기서 미리, 심문자의 권리로서 당신에게 진술 범위를 정해줄 필요가 있을 것 같군요. 우리는 이 소설이 잡다하고 장황한 당신의 인간사가 되지 않기를 요구합니다. 그건 이런 식의 소설과는 격이 맞지도 않을 테고요. 당신이 우리를 독자로서의 대상으로 한정시키듯, 작가로서의 당신과 결부된 삶의 문제들을 들추도록 하십시요.' '당신'에게서 빌어온 이 받아쓰기 속에 ''가 속해있지 않은 '우리'가 거리낌없이 반복되고 있음을 뒤늦게 발견한 나는 잠깐 아연해한다. '하긴 어디까지가 그 영역인지 하는 것부터 당신의 문제일 수 있겠내요. 하지만 어쩔 수 없지요. 궁극적으로 당신이 감당해야 할 문젠데. 그런 의미에서, 어떤 물음들을 없었던 것으로 치부해버리는 교묘한 묵비권에 대해 스스로 경계하기 바랍니다.'

나는 찔끔한다. 그 함정을 내가 명백히 피해가겠노라고 확언할 수 있을까? 암담한 기분으로 고개를 설레설레 휘저어보는데, 뒤늦게 당신의 말이 덧붙여진다. '이걸 빠뜨려서는 안 됩니다. 작가로서의 당신이 당신에 대해 무얼 숨기려 해왔는지.'정말이지, 어쩌다가 이 지경의 이런 소설에 이르렀을까? 이것도 과연 이 시대의 한 사랑법인가? 대답은 지금 이곳에 없다. 대답은 그 언젠가 그 어느 곳에 있을 것이다.

독자로서의 당신은 이미 저 침묵의 자리로 되돌아갔는가, 작가로서의 나는 아직 작가로서의 나에 대해 무엇부터 진술을 시작해야 하는지 조차 가늠지 못하고 있는데? 그런데, 무슨? 작가로서의 내가 작가로서의 나에 대해? 작가로서의 나? 문득, 당신이 한정시킨 내 진술의 범위에 물음표를 낳는다. 나여, 너는 과연 작가인가? 나여, 작가로서의 너와 작가가 아닌 네가 따로 있는가?

작가로서의 나? 나는 내가 작가라고 믿어왔다. 그러나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작가는 아니었다. 나는 내 삶이 어느 정도 성숙해진 이후, 그 언젠가부터 작가가 되었다. 그런데 무엇이 나를 작가로 만들었으며, 또한 무엇이 나를 작가로 보장해주는지 알지 못한다. 내가 작가가 된 것은 아마도 문학에의 무의식적 열망과 의식적 결단이 결합된 결과일 것이다. 그렇지만 그게 언제 어데게 초래되었는지 자백할 근거가 없다. 공식적으로 나는 한 문학지에 작품이 발표되면서 그 문학지의 수준을 인정하는 사람들에 의해 작가로 인정되기 시작했다. 스물일곱 살 때였다. 나는 쓰고 싶었고 썼다.

그렇게 나를 작가로 만들어준 그 작품은 그러나 3년 전부터 씌어졌고, 그 최초의 단서가 되는 메모들은 6년 전부터 마련되었다. 6년 전 스물한두 살 무렵, 나는 오로지 한 사람의 당신'을 위해 연애시를 썼었고, 가능한 한 많은 독자를 기대하며 소설과 희곡을 써서 내가 속한 작은 공동체 - 학교 말이다 - 내의 문화 매체에 발표했었다. 똑같이 쓰고 싶었고 썼던 그때는 내가 작가로 존재한 것이었을까 아니었을까? 그러면 내가 첫 소설을 썼던 열여섯 살 때는? 그때는 더 요란스럽게 나는 작가가 되겠노라고 떠벌리고 다녔는데, 결심만은 확고했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지금의 나 스스로가 그 수작을 그리 신뢰할 수 없는 이유는? 혹시, 내가 작가가 된 것은 내가 한 개인으로 독립해 가는 과정에서 다른 가능성들이 사라져갔기 때문일까? 커오면서, 나는 정치를 하고 싶지 않았고 군인이 되고 싶지 않았으며 법관도 외교관도 공무원도 회사원도 싫었다. 나는 화가가 될 능력을 갖고 있지 못했고, 음악가도 배우도 될 자질이 없었다. 그래서 어쩌다 보니 남는 것으로서의 작가? 아무래도 물음의 고리가 잘못 얽혔나보다. 여태껏 나는 '작가'를 단순히 한 직업으로 지칭해왔었던가? 그와 관련하여 부득이, '작가'는 내 생활의 경제적 근거가 아님을 떠올려야만 하겠다. 내 밥벌이 일은 따로 있다. 얄궂은 오기로, 터무니없게 그것을 부업이라 치부해왔지만 말이다(지금에 밝혀졌는데, 작가로서의 나는 그 '부업'을 지독히도 숨기고 싶어했다).

작가로서의 나? 그렇다면 이건 다분히 심정적으로 설정된, 작가로서의 내가 아닌 나의 대립항인가? 작가는 창작하는 사람이다, 고로 창작할 때의 나는 작가다, 그러나 창작하지 않을 때의 나는 다른 나다? 이 명제는 틀리 것 같기도 하고 맞는 것 같기도 하다. 소설을 쓴다고 해서, 그때 내가 다른 세상에 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사이에도 나는 밥을 먹고 배설을 하고 섹스를 하고 친구를 만나고 신문을 읽고 직장에서 주어진 일을 하며, 그 모든 것들이 내 소설의 소재가 된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살아가는 과정 속에서 느끼고 사유한 것들을 쓴다. 그런 의미에서, 위의 분리는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생활만으로 충족되지 않는 무엇인가를 향해 소설을 쓴다. 나는 삶이 바뀌기를 꿈꾸며 소설을 쓴다. 습관적으로 꾸벅 고개를 숙이는 사람에게 침을 뱉고 싶어서, 또 반대로 감각적으로 혐오하는 사람을 친구로 만들고 싶어서. 이런 의미에서, 소설을 쓰는 나는 그저 생활에 묶여 있는 나와 다르다. 그러니까..., 아니, 이제 보니, 정작 중요한 문제는 따로 있는 듯싶다. 문제의 핵심은 그러니까, 작가로서의 나라는 겉모습이 아니라, 작가로서의 나와 작가가 아닌 내가 내 전체 속에서 화해롭지 못하다는 점이 아닐까? 둘의 대립은 사실 너무도 팽팽해, 서로 만만치가 않다. 나는 이 세상을 싸그리 뒤집어버려야 한다는 듯이 언어의 음모를 꾸미다가도, 어느새 매우 소중한 일을 처리하듯 위에서 시키는 대로 직장의 승진 절차를 밟으며 혹시나 그 동안 잘못한 일이 없었던가 걱정하고 나서, 다시 후회의 언어로 탄식한다. 바뀌어야 한다는데, 바뀌지 않는다. 나부터. 그 내 안에서, 그러나 바뀌어야 한다는 욕망 또한 바뀌지 않으므로, 작가로서의 나와 작가가 아닌 나의 균열은 커져 온 것일 터이다. 그런데, 생각을 키우는 과정에서, 문제가 점점 더 어려워진다. 생활인으로서의 나는 생활을 통해 이 세상과 이 세상 속의 삶을 바꾸고자 원하지 않을까?

'작가로서의 나'를 가정할 수 없는 사람들을 상기해보며? , 독자로서의 당신들과 비교해보면?....

독자여, 먼저 이 사실을 분명히 하겠다. 작가로의 내가 무엇보다도 지워버리고자 했던 것은 작가가 아닌 나의 모습이었다. 내 부모의 아들로서의 나, 내 자식의 아버지로서의 나, 내 아내의 남편으로서의 나, 내 스승의 제자로서의, 내 친구의 친구로서의 나...., 월급장이 나, 예비군에서 민방위에 이르는 나, 물건값을 흥정하는 나, 버스나 택시 승객인 나, 술집 손님으로 거드름피우는 나, 다른 작가의 독자가 되어 엿보는 나.... 그 모든 것이 내 소설 속에 스며 작가로서의 나를 구성한다는 사실을, 나는 굳이 의식치 않으려 했다. 나는 내가 작가여야 한다는 당위론적 위치에만 너무 매달렸고 시달렸다. 나는 내가 원고지 앞에만 앉아 있기를 바랐으며, 또 다른 내가 되기를 게을리 했다. 더 많은 내가 됨으로써 오히려 내가 성숙해지고 그것을 통해 보다 근본적으로 내가 바뀔 수 있다는 가능성을 도외시했다. 바뀐다는 것이 곧 다른 내가 된다는 것임을 모른 척했다. 작가가 아닌 다른 내가 되려고 애씀에도 불구하고 숙명처럼 작가로 되돌아와 또 다른 작가로서의 내가 될 때 비로소 내가 지금의 나를 뛰어넘은 작가가 될 수 있다는 논리를, 나는 기피해 왔던 것이다. ? 지금의 나를 버리기 아까와서? 지금의 나는 어떻길래?

누구보다도 나 자신에게 작가로서의 나를 부각시키려 전념한 것은, 어쩌면 작가가 아닌 내가 위기 없는 삶을 사는 데 너무 능란하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나는 주어진 생활에 너무 익숙하다. 이것도 언젠가는 익숙해지겠지만, 내 생애를 너무 잘 아는 부모와의 관계를 제외하면. 나는 딸에게 적당히 장난감을 사주고 환심을 구한다. 나는 아내와 적당히 영화 구경을 즐기며 부부애를 다진다. 나는 친구들과 적당히 세상사를 비판하며 지식인다움을 과시한다. 나는 스승들에게 적당한 야단맞음으로써 제자의 구실을 한다. 나는 웃분들께 적당히 예의를 차리며 고민을 털어놓아 호감을 받는다. 나는 택시 운전사의 짜증을 적당히 위로하고, 식당 종업원에게 적당히 다정하게 대하면서도 적당히 신경질을 내, 그리고 이웃에 적당히 깍듯해, 사회인의 도리를 지킨다. 나는 나를 도와준 사람을 적당히 대접하며, 급히 필요한 경우엔 적당히 봉투를 건네주면서, 적응력을 확인한다. 나는 나를 미워하는 적대자들에게조차, 도저히 참지 못하면 화를 낼 수 있다는 내 면모를 보여줄 필요가 없는 한, 그의 가시 돋친 말을 적당히 경청하며 내 겸손과 교양을 전한다. 내가 그럴 만한 여건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웬만해서는 그 여건이 무너지지 않을 것이며, 그 여건을 잘 써먹으면, 절대 그런 내색을 안 보였지만, 더 안전하게 살 수 있다는 은근한 확신과 욕심 때문에?

실제로 나는 내 안전한 삶을 위해 너무도 치밀하다. 나는 그런 생활의 포기를 설득하는 명분에 대해 포기할 수 없는 명분을 계산한다. 그 치밀한 계산에 의해, 내가 독립해야 할 나이에 도달했을 때, 나는 내 안락한 미래에 대해 주저했었다. 계산상 나는 내 고민을 토로했고, 내가 계산했던 조언을 구한 뒤에야, 세상일이 다 내 뜻 같지 않다는 듯 안락함을 선택했다. 그러니까 안락함을 선택할 구실로 가정을 꾸리기 위해, 나는 3년 동안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만났던 연애조차 계산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지금도 나는 안락함에 대해 회의하는 내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계산으로, 폭음을 한다. 계산에 의해 감당하기 힘들어 보일 정도로 외상값을 쌓아가며, 계산에 의해 취하고 주정하고 자학하고 울고 욕하고 싸운다. 돌이킬 수 없는 일이므로 이렇게 진술해야 한다는 내 지금의 심정도 그렇다면 계산된 것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돌이켜보면, 나에게는 불행이 없었다. 철들기 전에 억지로 공부해야 했던 고생과 철들고 나서 스스로 문학에 얽매여 소설 쓰기의 의무에 시달린 고생 외에는. 나도 당신들처럼 아버지의 정자와 어머니의 난자가 만나 삶의 씨앗이 되었다. 어머니의 뱃속에서 열 달을 지내고-고상한 시체소리로, 아무래도 그 시절이 참 행복했었던 것 같다-, 나는 밖으로 나와 이인성이라 이름 붙여졌다. 그래서 유적 존재로서의 인간에 속한 단순한 생명체였던 나는 이인성이라는 개별체로 자라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나는 확률이 반인 행운을 잡았다. 내가 성장해온 환경은 전혀 불행하지 않았다. 또는 불행의 체험을 차단 당했다. 나에게는 가난과 불화가 없었다. 또는 내 삶이 가난하지 않고 불화롭지 않다고 인식되도록 느낌을 조정 받았다. 실제로 내 성장 배경이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스무 살이 넘은 후에 비로소 깨닫게 되었지만, 어쨌거나 적어도 나에게는 불행의 의식이 심어지지 않은 게 분명하다. 나는 줄곧 주어진 삶의 틀 안에서 편안했던 것이다. 가령, 머리가 커진 반항기에, 나는 일부러 어머니가 보도록 어머니가 죽었으면 좋겠다는 일기를 쓰고, 몇 끼씩 굶고 대들고 말썽을 피웠으나, 집을 뛰쳐나가지는 않았었다. 그 벌로 대학에 떨어져 참회의 재수 생활을 했을 뿐이다.

내일의 의지를 위한 경험으로서. 대학의 시우에서도, 중간쯤 서 있던 나는 잡혀가지 않을 정도로 내 젊음을 발산했다. 추억을 위한 경험으로서. 그러면서도 왜 체중은 자구 빠져갔는지, 나는 군복무 마저 보충역으로 출퇴근하며 치르는 행운을 누렸다. 특이한 소설소재를 위한 경험으로서. 그러고 보면, 그 모든 것은 지금의 나에 이르도록 치밀하게 예정되어 순조롭게 실행된 각본 속에 곱게 자리 잡고 있는 셈이다. 불행이 없는 나!

불행이 없는 나를 감추기 위해, 나는 작가로서의 나로 나를 덮어씌우고 싶었던 것인가? 그렇다면 우선, 불행이 없다는 것을 감춰야 할 까닭이 어디 있었을까? , 이 친구야, 지식인이라는 게 고뇌를 팔아먹고 사는 거 아냐? 먹고사는 것만으로는 모자라서 좀더 고차원적으로 명성을 벌기 위해? 다시 계산되는 미래의 각본 속의 일부로서? 불행 없이도 잘 사는 내 삶의 장식으로서? 그러나 왜 하필 소설인가? 고뇌하는 내 모습이야 얼마든지 다른 방식으로도 수식할 수 있을 텐데. , , 그거야 문학 그러면 뭔가 더 그러듯하잖아? 문학이 더 그럴 듯하다? 하기야, 나도 어느 땐가는 문학에 대한 막연한 동경으로 작가라는 존재 방식을 흉내냈었지. 하지만, 그건 직접 써본 사람이면 안다. 허구한 날들을 낮이고 밤이고 계속 원고지와 싸우는 것이 어떤 일인지를. 그럴 거라면 시인을 자칭하는 편이 낫지. 맙소사, 나는 또 나를 과장하려 드는가? 그래도 그건 말하겠다. 이 진술의 진실성 여부는 당신의 판단에 맡기며. 나는, 작가로서의 내가 다른 나를 숨기려 한 것이 일종의 허위의식임을 자인하겠다. 그러나 뒤집어, 그 다른 내가 작가로서의 나를 완전히 누르지 못하고 있는 데서, 뭔가 내 속에 더 캐내야 할 꼬투리가 박혀 있다고 느껴진다. 그것이 뭔지는 나도 아직 모르겠으되.

불행하게도-하하, 불행하게도라고?-, 나는 내 생애에 처음으로 발음한 완전한 단어는 '열쇠'라든가 ''이라든가 하는, 문학적 재능의 징후를 보여주는 말이 아니라, 그저 '엄마'였다. 내 언어 습득은 그리 빠른 편이 아니었고, 다른 누구나와 비슷비슷하게 철자법을 익혔다. 만 여섯 살에서 열한 살까지, 나는 국어시간의 과제와 방학숙제로 나온 일기와 일선 장병에게 보내는 위문편지나 썼을 뿐이다. 열서너 살 시절, 내 뜻대로 썼던 일기는 부모의 가슴을 아프게 하기 위해서였다. 열대여섯 살 때, 나는 처음으로 시나 소설을 습작했지만, 그건 단순히 나를 과시하기 위해 여기저기서 읽은 것을 적당히 베낀 것이었고, 단순히 내 나쁜 성적의 이유를 부풀려 공부벌레들을 비웃기 위해서였다. 그러고 보면, 그런 이야기들은 사실 내게 문학이 그다지 절실하지 않았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내게 문학은, 그 이후로 모호하게, 문학에 대한 자신도 의욕도 없어지고 내가 무엇을 해야 좋을지 막막해져서 그저 헤매고 다닐 스무 살 전후 언젠가 슬며시 기어 들어왔다. 어느 날, 나는 나도 모르게 뭔가를 자꾸 끄적이는 나를 발견했다. 내 머릿속에는 허공 속을 부유하는 먼지 같은, 이해할 수 없이 자욱한 말들이 웅성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서의 초점은 그 모호함이다. 그 후로 나는 문학에 대한 명료한 인식을 획득하려고 노력했고, 그 인식은 되풀이 수정되어왔지만, 내가 내 손으로 소설을 써야 한다는 모호한 충동은 선명하게 자각되지 않았다. 나는 이미 당신에게 내 치밀한 각본의 수치스런 수행을 고백했다. 어떻게 보면, 이제 한 단계의 각본은 끝났다. 나는, "나도 한때 소설을 썼었지."하고 헛몸짓을 보일 증거로 소설집까지 이미 간행했다. 그러니 이제, 지금까지의 각본이 한 부분으로 편입될 새로운 각본이 또 필요한 시기가 되었다. 이때 이 각본을 더욱 극적으로 만들려 치면, 나는 내 가면으로서의 작가를 다른 형태로 화려하게 변신시키는 일이 필수적이다. 가령 내가 전공한 영역을 더 파고들어 연극 연출가로 변신할 수도 있으리라. 그는 문학의 한계를 깨우치는 순간 과감히 작가로서의 자신을 버렸다, 그는 개인 대신 공동체를 택했으며 집단 예술로서의 연극으로 뛰어들었다...., 말해놓고 나니까, 연극에 대한 내 관심도 꽤 오랜 것이어서, 내가 정말 그렇게 되는 건 아닐까 하는 복선 같은 의심이 든다. 특히 나같이 음흉한 사람은 미래를 함부로 예언하는 법이 아니다. 제 도끼에 발등을 찍히기 쉬울테니. 불구하고와따), 지금의 나로서는(와 자꾸 이런다요), 발악하듯 지금도 이 소설을 쓰고 있는 나로서는(워매 징한 거), 여전히 쓰지 않으면 발광할 것 같은 나를 그 각본 속에서 어떻게 설득력 있게 처리해야 좋을지 참말 모르겠다(참말 그라요 잉?). 아주 조심스레 말을 꺼내는 바, 그럴 때면, 작가로서의 내가 작가가 아닌 나의 가면이 아니라, 작가가 아닌 내가 작가로서의 나의 가면이 아닐까 되뇌이게 되는 것이다.

그런 몽상은 쉽게 비약한다. 나는 어둠 속의 당신의 심문 중에, 내 직업이 소설가라고 고집한 적이 있다. 물론 나는 소설 쓰기가 밥벌이까지를 감당하는 작가로서의 나를 지향하며 그런 말을 한 건 아니었다. 영감이란 애당초 고갈될 것조차 갖고 있지 않을 뿐 아니라, 광부가 노동하듯 캄캄한 머릿속에서 말을 캐내고 또 일일이 다듬어야 하는 정도의 어눌한 글솜씨를 가진 나는, 그 속도야 양에 있어서 전혀 그럴 만한 수준에 미치지 못함을 스스로 잘 안다. 그런 의미와는 달리, 내 몽상은 속삭인다. 그때 그 고집은 하나의 역설이 아닐까? 교환 가치에 의하지 않는 그 무상의 작업에 더 의미를 두겠다는. 이때까지와는 완전히 반대로, 생활의 계략인 일상이나 밑 심연 속에 진실된 내가 있다는. 일상의 나를 적셔 허물지도 못하면서 가슴속 깊이 패인 우물처럼. 한번도 상상해보지 못했는데, 어느 날 드디어 그 작가로서의 내가 일상의 나를 이겨낸다면 어떻게 될까? 전적으로 작가로서의 나만 사는 꼴, 작가로서의 내가 곧 일상의 나인 꼴, 웃고 울고 걷고 말하는 것이 그냥 글쓰기가 되는 꼴, 아무런 구애도 받지 않고 쓰고 싶은 것만 쓰는데 글쓰기가 동시에 밥벌이를 행해주는 꼴.... 희한한 공상이다. 그리고 그건 필시 모순된 전제의 소산이다. 나는 걸어가는 행위를 글쓰는 행위와 동시에 행할 수 없다. 글쓰기는 삶쓰기이나 삶 속의 독립된 자기 시간을 요구하는 행위이다. 더구나 그 공상의 세계는 유토피아적이다. 그런데 지금처럼 현실의 그늘 속에서 갈증을 적셔주는 우물이 문학이라면서, 그늘 없는 유토피아에 존재하는 '작가로서의 나'라니. 하면, 작가로서의 나는 필연적으로 작가가 아닌 나를 상정하는 것? 하면, 나는 내 안에 화해시킬 수 없는 두 적을 끝까지 맞물려 데리고 사는 것?

이 순간, 내 귀에는, 내가 황당한 요설로 초점을 흐린다는, 어떤 당신들의 빗발치는 비난이 따갑게 꽂힌다. 정직한 척하더니 어느 틈에.... 어느 틈에, 나는 내 의식이 다스리지 못하는 몽상을 털어놓았다. 내친 김에, 나는, 그 적들이 서로 헤어질 수도 없고 싸우지 않을 수도 없을 때, 그 싸움을 사랑 싸움으로 접붙일 수는 없을까?-로 이어진 요설까지 해벌리겠다. 나중에 더 독하게 당하더라도, 내가 규명하지 못하는 속마음이라고 진술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소설을 써오면서 얻은, 양보할 수 없는 내 깨달음 중의 하나는, 소설에는 계산하려 해도 계산되지 않는 내가 나도 모르게 씌어진다는 사실이다.

들어보라. 이 소설이 써지지 않아 허우적대던 어느 날, 나는 그냥 방바닥에 엎어져 잠이 들었는데, 아주 희귀한 꿈을 꾸었다. 결혼하기 전까지 내가 20여 년을 살던 옛집은 입구가 터널처럼 뚫린 높은 축대 위에 세워져 있다. 꿈속에서, 나는 그 축대 앞에 서 있었다. 그러다가 축대 위를 올려다보면 나는 소스라쳤다. 담쟁이가 가득 얽힌 축대에 어마어마한 달팽이가 보라 빛 껍질을 빛내며 달라붙어 있었던 것이다. 비 온 다음날의 말게 개인 아침인 듯 햇살이 푸른 담쟁이와 그 안에 담긴 달팽이 껍질에 영롱하게 어리고 있었다. 나는, "신기하지도 하지, 저럴 수가..."하고 중얼거리며 잠을 깼다.

꿈에 뜻이 있다면, 그건 무슨 뜻이었을까? 내 어떤 무의식의 재현일까? 나는 해석하지 못한 채 그 꿈을 간직하고 있다. 드물게 꾸는 천연색 꿈이었고, 뭔가 의미가 들어 있는 것만 같아서. 그렇듯 내 글 속에도 내가 모른 내가 스며들 수 있으리라, 스며들 수밖에 없으리라. 나는, 그 내 모습을 당신이 해석해주기 바라고 있다. 더 철저하게 내가 드러나도록. 하지만 지극히 조심하기를. 나도 무의식이니 정신분석이니에 대해 귀동냥해 들은 게 있다. 그러니 진짜 내 무의식이 조작된 무의식을 어떻게 장치해놓을지 모를 일이니까(위의 꿈만은 정말 꿈꾼 대로다).

내가 모르는 것은, 그런, 한꺼풀을 긁어내도 언제나 더 깊이 패이는 내 무의식만이 아니다. 내가 모른 것은 내 밖에 더 많다. 바로 당신에 대해서는, 나는 당신의 의식조차 모른다. '당신'이라 불리는 당신들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며, 얼마나 다른 사람들인지 모른다. 당신들이 얼마나 달라서 얼마나 다르게 생각하며 얼마나 다르게 살고 있는지를 모른다. 당신들에게 불행이 있는지 없는지, 있다면 어떤 불행들인지 모른다. 당신들의 살림살이를, 당신들의 삶의 역사를, 당신들의 꿈을 모른다. 당신들도 당신들 자신이, 당신들이 살고 있는 세상이 바뀌길 바라는지 어쩐지를 모른다.

나는 모른다, 그런데도 왜 내가 당신들을 '당신'이라 마주 부르게 되었는지. 처음엔, 나는 나를 읽는 당신들이 있는지조차 몰랐다. 나는 쓰는 것이 읽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했었다. 그게 아니라면 필요하지 않았었다. 나는 또 그 당신들이 나와 함께 살아왔고 살고 있고 살 것이라는 명백한 사실을 몰랐었다. 나는 오로지 나 홀로 작가였다. 그러다가 언제부터였을까, 는 당신들의 소리를 듣게 되었다.

나는 모른다, 왜 내가 당신이라 불러도 당신이 될 수 없는 수많은 그들을 의식하게 되었는지. 처음엔, 나는 나를 읽지 않는 그들이 그들대로 펀펀히 살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었다. 또 다른 그들은 코앞의 밥과 잠에 당장 급급해 읽는 일에 틈을 낸다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 깨닫지 못했었다. 또는 깨달을 필요가 없었다. 나는 또 그들이 나와 함께 살아왔고 살고 있고 살 것이라는 명백한 사실을 몰랐었다. 나는 오로지 나 홀로 사람이었다. 그러다가 언제부터였을까, 나는 그들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결국 나는 모른다, 왜 당신들과 그들이 내 소설 쓰기에 관여하는 것을 허용케 되었는지. 불행이 없었던 나는 관계다운 관계의 경험이 없었다. 나는 내 뜻대로 밀착하거나 무심했으며, 존경하거나 경멸했다. 상대방이 원하지 않는다면 미련 없이 관계를 끊었다. 관계의 어려움은 기껏해야 내 뜻을 위해 내 뜻에 의해 겪은 부모와 친구와 애인과의 갈등이 고작이었다. 관계 속에서 고통이 없었으므로, 내 모든 관계는 적당한 역할을 주고받는 것으로 족했다. 동생은 '동생'이었고, 선생은 선생'이었으며, 노래 잘 부르는 친구는 '카수'였고, 시쓰는 친구는 '시인'이었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소설을 통해 당신들과 그들을 만나려 하게 되었을까? 내가 당신들과 그들을 만나려 했다기보다, 당신들과 그들이 나를 만나려 했다는 게 옳을지 모르겠다. 그렇다 해도, 하여간 이제 나는 내 뜻대로 타인들을 회피해버리지는 못한다. 실제로는 그럴 마음이 없으면서 머리로만 그러는 짓이 아니냐고? 그럴지는 모른다. 하지만 머리로나마 그렇게 된 이유를, 나는 스스로 이해해보고 싶은 것이다. 머리로 받은 교육과 머리로 읽은 책들이 서서히 인식으로 굳어서? 나일 뿐이 나를 쓰려던 소설 속에서, 쓰다 보니 내가 나인 것은 어떤 관계 속에서라는 진실을 거꾸로 터득해서? 체험이 적어 작은 체험에도 민감하기 때문에 부딪칠 수 있었던 어떤 계기를 통해서? 어른이 되어 어쩔 수 없이 사회 생활을 겪으며 내 삶의 각본을 짜는 과정에서? 내 이기적인 삶을 구현하기 위해서라도 이 세상이 온통 바뀌어야 하겠기에, 할 수 없이 그 속의 남들을 생각하게 되었는지도.... 아무래도모르겠다.

머릿속이 캄캄한 게, 혹시 뭔가가 이 자백을 방해하는 건 아닌지. 다만 한 가지, 타인들도, 문학처럼, 회심의 전환점을 통해 내 존재를 바꿔준 것이 아니라, 서서히 조용히 내 마음의 공간 속으로 스며들어와 자리잡게 되었다는 짐작이 들뿐이다.

그래서 나는 또한 모른다, 나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당신들이 나와 함께 무엇을 하고자 하며 시선을 비킨 그들이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지. 그러나 이제, 나는, 때때로, 그 시선들 사이에 흐르는 무엇인가를, 몸으로, 느낀다. 나날의 예사로운 생활 속에서 어는 날, 날씬한 스키가 얹힌 자가용 안에 목 전체를 'PRO-SPECS'라는 대자상표를 둘러치고 자신만만하게 투덜대는 갓 스물짜리 매끄러운 얼굴들과 마주칠 때, 벽촌을 기웃거리다 만난 어느 문제 학생의 학부형이던 늙은 농부가

"내가 보기에도 우리 자식 하는 짓이 옳소만."

하고 대번에 말을 매듭질 때, 산사태의 위험 때문에 주거지인 움막이 철거되는 날에도 훈련에 불려나온 막노동자 예비군이 대낮부터 술에 취해 다짜고짜 중대장의 멱살을 움겨잡는 것을 뜯어말릴 때, 세상이 더러워 못 살겠다고 아우성을 치다가 시위에 길이 막히자

"저 빨갱이놈의 새끼들 다 잡아 처넣지 않고 뭐하노!"

라고 버럭 성을 낼 때, 어디론가 끌려갔다 돌아온 실업자 친구가 비오는 날이면 뼈에 스민 아픔을 호소할 때, 종합무역상사에서 외국 구매자들을 상대하는 대학 동창이

"내가 포주냐, 내가 포주야?"

투덜대며 그 외국 구매자들을 대접하는 고급 술집으로 데려가 회사 돈으로 술을 사줄 때, 동네 꼬마가 고급 관리인 자기 아버지에게는 선물 가져오는 사람들이 많다고 자랑할 때, 성냥갑 같은 아파트촌을 벗어나고 싶다면서도 아이 학군 때문에 참자고 결심하는 나 자신에 눈감고 싶어질 때, 차마 수위치를 끌 수 없어 밤새도록 따라 울먹이며 이산가족 찾기 방송을 보았을 때, 제 몸에 불을 지른 어느 청년 노동자의 일기를 읽으며 어떻게 이런 사람이 이런 말을 할 수 있었을까 멍멍하게 가슴이 넓어질 때, 뭔가 쓰려던 이야기를 문득 멈추고 섬쩍지근한 기분으로 이런 걸 쓰면 졸지에 칼부림을 당하는 것이 아닐까 주저할 수밖에 없을 때....

나는 계속 모른다, 무엇이 당신들과 그들과 나들의 모여-삶을 엮어왔는지. 아버지와 어머니가 아직 스쳐 지나가 본 인연조차 없었으므로 내 존재가 전혀 예정되어 있지 않았던 때의, 한 분의 삼촌을 묻고 한 분의 삼촌을 남겨둔 채 우리 가족을 월남하게 만든 해방과 분단을 모른다. 내가 태어나기 직전에 끝난, 평안도의 아버지와 함경도의 어머니가 남쪽 막다른 곳에서 나를 낳게 만든 전쟁을 모른다. 구구단만이 머릿속을 맴돌던 내 한 자리 숫자의 나이에 스쳐간, 다혈질의 할아버지를 만세 부르게 만들었던 학생 혁명과 아버지를 무표정하게 화단에 물만 주며 한숨짓게 했던 군사 쿠데타를 모른다. 신문도 잘 안 읽고 시험 때문에 구헌법을 외우던 재수 시절에 홍두깨처럼 지나간, 어머니마저도

"어쩔려구 이러지요? 어떻게 되는 거예요?"

신음하게 만들었던 0월 유신을 모른다. 정치, 사회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우던 나이였으나 서울에 멀리 살았던 탓에 그저 불안과 초조 속에 소문만을 추적했던 광주의 5월을 모른다. 그 무형의 시간들은 뒤섞여, 안개처럼 자라나며, 당신들과 그들이 들어와 있는 내 마음의 공간을 갈수록 자욱이 뒤덮는다. 뒤덮어 시야를 흐린다. 뿌옇게, 습하게, 불투명하게, 모두들 사이를. 그러나 그 안개를 어떻게 거둘 수 있을지, 나는 모른다.

이제, 알고 싶다. 모르기 때문에.

한 사회적 구성체로서의 '우리'를 더듬어보던 어떤 때(그러나 그때, 어떤 응집 개념인 '우리'가 한쪽으로만 묶으면서 한쪽으로는 때어놓는 한정된 관계의 틀은 아니었던가), 나는 지극히 추상적으로 이런 생각을 했었다. 문학은 칼이 되어야 한다고. 문학은 읽힐 때만 그 무엇이 되는 법이니까, 적에게 읽히도록 잘 조준하고 깊이 벼르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그의 가슴을 찌르는 단 한 번의 무기가 되어야 한다고. 하지만 다른 어떤 때는, 또 지극히 추상적으로 이런 생각을 했었다. 문학은 서럽고 약한 자들이 지친 마음을 끌고 와 울음을 터뜨릴 수 있는, 또 죄지은 자들이 숨어들어 저 혼자 속죄 울음을 터뜨릴 수 있는, 또 죄지은 자들이 숨어들어 저 혼자 속죄할 수 있는 은밀한 방이 되어주어야 한다고. 현실에서의 패배가 꼭 패배는 아니며 삶을 저렇게가 아니라 이렇게도 볼 수 있다는 위안을 주어야 한다고. 그 희망들이 지극히 추상적이었던 까닭에 이제는 적이 아니라고 나눌 수 있는 건지, 적이 있다면 그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문학이 어떻게 그런 적들에 대한 칼이 될 수 있으며 그 칼이 어떤 상처를 줄 수 있는 건지...., 반대로 문학이 단지 울음이나 속죄의 밀실이 된다면 삶을 바꾸고자 하는 욕망은 어디로 가는 건지, 보다 근본적으로 삶을 바꾼다는 것이 대체 무엇인지, 바뀐다면 어떻게 바뀌기를 바라는 것인지..., 나는 알고 싶다. 앎을 향해 뻗치고 싶다. 이 역시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나는, 그렇다면, 지금 무엇을 알고 있는가? 나는 내가 모른 것들을 모른다는 사실만은 확실히 알고 있다. 나는, , 무엇인지는 모르나, 무엇인가가 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어떻게인지는 모르나, 그 어떻게를 찾아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소설을 쓴다? 의식과 감각과 상상의 더듬이로 암중모색하듯, 다른 체계로 공부하듯, 더듬어 앎으로 가며 삶을 바꾸어보려고? 그러므로(!), 나는 당신을 부른다? 소설적으로 내가 모르는 것을 되묻고, 그것이 당신에게도 소중한 물음인지 확인하고, 서로 모르면 같이 뒤져보기 위해서?... '소설적'이란 정녕 어떤 것일까? '철학적'이나 '경제적'과 다름은, 하다못해 '생활적'과도 다름은? 내가 모르는 나와 당신들과 그 밖의 모든 이들을, 그리고 그 모두를 둘러싼 모든 것들을, 함께 언어로 열고 밀고 나갈 수 있다는 것? 총체적 언어로 면모를 드러내고, 허구적 언어로 변모를 시도하는? 언어 자체의 탐색인 까닭에 한 구조적 전복의 가능성을 실험해볼 수 있다는 빌미로, 그러면서도 언어를 통한 탐색인 까닭에 그 실패가 치명적이지 않다는 담보로?....

그러나 그 아득한 첫걸음 앞에, 사무치는 암담함이 있다. 다시금 '우리'를 응시해보는 지금(지금이라고 이 '우리'라는 틀이 무한정의 포용력을 지닐 수 있느가), 그 우리 총체의 실제 삶은 결코 쉽게 바뀌지 않으리라는 예감. 생각을 설득하기는 쉽다면 쉬워도, 정서를 설득하기는 어렵고 몸을 설득하기는 더더욱 어렵다. 그것도 이제는 알 듯싶다. 입는 옷과 먹는 음식과 읽는 책과 듣는 음악과 보는 그림과 노는 오락과 하는 일과 그 모든 것에 대한 해석이 동시에 바뀌는 것. 그렇게 바뀌려면, 그러나 또한 관계의 바뀜이 있어야 한다. 내가 바꿔 입는 옷을 만들어주는 누군가가 있어야 하며, 내가 음악을 바꿔 들으려면 다른 음악을 작곡하고 연주하고 노래하는 누군가가 있어야 하니까. 그 모든 것이 어느 날 폭풍처럼 한꺼번에 휘몰아칠 수 있을까? 삶의 온 체계의 혁명? 하지만, 혁명이 습관마저 대번에 바꿔줄 수 있을까? 습관이 바뀌지 않았는데 사람이, 삶이 바뀐 것일 수 있을까?

막판에 오니, 다시 슬그머니 내 현실주의자가 고개를 쳐드는 모양이다. 그런데 지금의 그 현실주의자는 작가가 아닌 나로서의 현실주의자인지 작가인 나로서의 현실주의자인지 애매하기 이를 데 없다. 전자라면 이미 보았듯 지금의 안전한 삶의 기득권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일 것인즉, 당장 어쩌랴, 내 후자가 그와 살을 섞어 변모시켜주기만 기다릴밖에. 하지만 후자의 경우라면, 우리는 당혹스런 문학적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나는 지금 여기서 쓴다. 당신은 그 언젠가 그 어느 곳에서 읽을 것이다. 수많은 당신들이 그렇게 따로따로. 그러면 그 다음 언제 당신들은 하나의 입지점으로 모여 하나의 '당신'이 되고, 그래서 언제 나와 다음 단계의 이야기를 나누고, 언제 실천의 새로운 장을 모색할 것이며, 언제 삶의 다양한 영역들과 손잡을 것인가. 물론 그 움직임이 순차적인 건 아니다. 때로는 동시적이며 때로는 병렬적이다. 그래도 이 언어의 유통이 너무도 더디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으리라. 예컨대 문학은 더다'는 내 조금 전의 판단이 언제 당신들에 의해 공감이나 반감으로 응집되고 언제 그 극복이 토론될 것인가, 모두의 문제로서. 그것이 절망의 진술이 아니다. 더구나 당신이 보았듯 얼마든지 더 속물스러울 수 있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그나마 문학은 스스로를 직시하게 해주고, 실현되지는 않았으나 가능성을 꿈꾸게 해주지 않았는가. 그러니 '말로만'이라고 말하기보단, 먼저 '말로나마' '말로부터' '말과 더불어' 라고 말해야 하지 않겠는가. 되뇌이지만, 나에게 문학은 위대한 영감도 소박한 도구도 아니다. 그건 삶의 약한 활시위이긴 해도 강한 버팀대이기도 하다. 적어도 그 문학은 희미하게나마 '우리'를 의식시키고, 그 속에서 보다 뚜렷한 '당신'을 주었다. 그 당신 뜻은 어떠한가? 이 소설을 쓰게 해주고 읽어주었기에 고맙게 되묻는 바, 이런 언어 행위가 아무리 치열하더라도 삶이라는 대설 앞에서는 역시 쓰잘데 없는 소설에 불과한가? 언어란 그다지도 삶에 밀착해 있으면서 그다지도 허약하거늘,

그렇다면 당신은 언어를 훌쩍 뛰어 넘는 무슨 더 큰 복안이라도 가지고 있는가?

아아, 독자여, 용서하라. 내 자기 진술의 마무리가 어찌하여 당신에게 글자의 침을 옮겨 튀게 하는지. 그런데 뭐, 마무리? 마무리라고? 이걸로 끝낸단 말인가? 도대체 내가 자백다운 자백을 얼마나 했길래? 당신의 심문은 더 쌓여 있는데. 그리고도 또 쌓이고 있는데. 나는 아직 내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자세히 자백하지 않았고, 무엇을 사랑하며 무엇을 증오하는지도 아직 제대로 진술하지 못했는데... 나는 아직, 그러니까, ..., 그런데, 그래도, 이건, 그냥, 이대로....

 

 

이인성(李仁成: 1953- )

 

경남 김해 출생. 서울대 불문과 졸업. 1980<문학과 지성> 봄호에 <낯선 시간 속으로>를 발표하여 등단. 작품집으로는 <낯선 시간 속으로><한없이 낮은 숨결>이 있다. 그의 작품들은 실험적인 문체를 보이며, 독창적인 의식의 세계를 형상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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