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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단편소설2

85. 타임 킬링

by 자한형 2022. 3.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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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 임 킬 링 -최수철

 

그는 어둠 속에서 팔목을 걷고 손가락 끝으로 더듬어서 전자 시계의 맨 아래 쪽 단추를 눌렀다. 이미 전지를 한번 갈아 끼웠던 터이라. 그 시계를 차고 다닌 지가 햇수로 얼마나 되는지 기억나지 않을 정도였지만 시간은 그런대로 지키는 편이었다. 그러나 제 수명의 막바지에 거의 이른 탓인지, 시계의 숫자판을 밝히는 라이트는 세 번 네 번 거듭 단추를 누른 후에야 불이 켜졌다. 하지만 그가 팔을 들어 눈 가까이에 시계를 들이대고 막 시간을 읽기 바로 전, 잠시 방심한 사이에 깜빡 밝아졌던 전구가 다시 꺼져 버렸고, 시계의 겉 유리에는 앞쪽에서 비쳐지는 희미한 빛의 음영과 천정에서 떨어지는 전등의 빨간 빛 덩어리가 떠올랐다.

그는 종전의 수고를 다시 몇 번이나 거듭한 후에야 간신히 시간을 알 수 있었다. 아직 사무실로 돌아가기에는 다소 이른 시간이었다. 이곳에서 두 시간 정도가 수월하게 깨어져나간다 하더라도, 등판을 떼밀어서라도 보내버려야 하는 시간이 여전히 두어 시간이나 남아 있다는 사실은 그로 하여금 시간이라는 것에 이물감(異物感) 내지는 일종의 거추장스러운 착용감을 느끼게 하기 시작했다. 이전까지 시간이 부담스러운 하중으로 느껴진 적 이 간혹 있긴 했지만. 언제인가부터는 시간은 벗어버릴 수 없는 등짐이나 맨살에 붙어버린 불유쾌한 감각이 되어 버린 것이었다. 그것은 연체 동물의 빨판처럼 그의 팔다리에 흡착되어 떨어지지 않았다.

시간은 이제 그가 앉아 있는 딱딱한 의자의 반란을 일으켜 엉덩이에 고통을 가하기 시작했고, 또한 그것은 실내의 잡다한 냄새들, 마치 모든 종류의 색상들이 한데 뒤섞이면 혼돈의 검은색이 되어버리듯이, 오랜 시간 동안 서서히 얽혀버린 온갖 종류의 냄새들이 그의 콧잔등을 자극했다. 그러나 지금 그는 추운 한겨울 에 난방 시설도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삼류 영화관의 오른쪽 귀퉁이에 앉아서 오히려 눅눅한 습기를 느끼고 있었다.

시간은 그에게 다른 무엇보다도 축축한 끈적거림이었다. 그것은 그의 등허리나 아랫배의 군살 위에서 땟국물의 흔적을 이루고 있거나, 땀 때문에 살이 짓물러지는 무릎의 안쪽이나 겨드랑, 등의 여린 살 속에 파고들어 만성 피부염을 유발시키고 있었다. 그것을 긁을 때에만 순간적인 쾌감이 주어졌고, 거의 동시에 더욱 거센 가려움이 수반되었다. 가려움증은 긁자고 들면 한이 없는 법이었다,

다시 말하면 한낮의 권태로운 시간을 보내기 위해 미적지근한 맥주를 마시고 비몽사몽의 낮잠을 자고 나면 그날 밤에는 더욱 절실한 무위(無爲)의 고통에 개미굴 속으로 들어가 누운 듯한 불면증까지 첨가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는 실내의 냄새들, 혹은 시간의 습기 찬 끈끈함을, 아니 그것들보다는 온몸의 살가죽을 들고 일어서는 듯한 가려움을 떨쳐버리기 위해 허리에 힘을 주고, 물에서 막 뛰어나온 푸들처럼 머리카락에서 발끝까지 몸 전체를 거세게 추스렸다. 그러자 놀랍게도 엉덩이에 못 박히던 권태의 고통이 잠시나마 꼬리뼈 부분을 통해 밖으로 까져 나갔다.

그는 고개를 들어 흐릿한 화면으로 눈길을 옮겼다. 그에게는 화면이 흐린 이유가 관객들이 포도 압착기를 닮은 엉덩이로 깔아뭉개는 시간의 주검이 수증기처럼 실내를 가득 채웠기 때문으로 여겨졌다. 화면은 퍼런 계곡 사이로 흐르는 개울을 침침한 색조로 그려나가고 있었다. 잠시 산허리를 감고, 흐르는 듯 멈추어 있는 안개가 깊은 산중의 그윽한 경관을 보여주는 듯하다가, 이내 새소리가 그쳐버리고 화면의 전면에 삿갓을 쓰고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는 젊은 사내의 상체가 클로즈업되었다. 삿갓 밑으로 날카로운 두 눈이 꿈틀거리는 시커먼 눈썹과 함께 번득이며 움직였다. 주위에서 심상치 않은 살기를 느꼈음에 틀림이 없었다. 그때 사내의 예감대로 고의 주위로 검푸른 옷에 칼을 한 자루씩 든 검객들이 뛰어들었다. 고들은 모두 다섯에 달했다.

그러나 낚시꾼의 자세에서는 한 올의 흐트러짐도 엿보이지 않았다. 다섯 사내들은 자기들끼리 몇 마디 수작을 주고받고는 소리를 내지르며 주저 없이 오방(五方)에서 그를 향해 덤벼들었다. 순간 낚시꾼의 몸이 바위 위로 풀쩍 도약하였고, 동시에 그가 물에 담그고 있던 낚싯줄이 뱀의 혀처럼 허공을 날아올라 맨 먼저 칼을 앞으로 하여 뛰어들던 사내의 몸 속에 깊이 박혔다. 그 사내는 비명을 지를 사이도 없이 낚싯줄에 매달려 허공에 떠올랐다가 물 속에 거꾸로 처박혔다. 나머지들은 멈칫 몸을 움츠렸지만 곧 칼을 꼬나 잡고 놀라움을 감추려는 공허한 기합소리로 기세를 올리며 달려들었다.

화면 속에는 다시 격렬한 칼부림이 시작되었고, 실내의 딱딱한 의자 밑, 담배 꽁초와 먼지가 가득한 음습한 곳에까지 과장된 칼 부딪치는 소리와 옷깃이 일으키는 바람소리가 가득 찼다. 그때 관객석에서 다리를 꼬고 앓아 있던 그는 화면에서 다섯 사내들의 얼굴이 서로 정신 없이 교차되는 순간을 가르고 조금 전부 터 한 사내의 모습에 시선을 얽어매고 있었다. 그 사내는 결국 낚시꾼의 뒤에서 장검을 쳐들고 내려치려다가 어느새 상대방의 겨드랑 사이에서 뒤쪽으로 튀어나온 칼날을 가슴에 받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나머지 세 검객들도 차례로 쓰러져 갔고 잠시 후에 화면과 실내에는 정적 이 엄습했다. 낚시꾼은 다섯 장의 이파리가 달려 있는 나무줄기를 엄지와 검지로 훑어버린 것이었다.

그는 꼬았던 다리를 풀고 상체를 조금 일으켜서 의자의 썰렁한 등받이에 허리를 가져다댔다. 그러나 그가 잠시나마 화면에 몰두한 것은 화면에서의 작위적인, 하지만 어느 정도 통쾌한 액션 장면 때문이 아니었고, 더우기 어떤 섬뜩함 때문도 아니었다. 그는, 허탈한 듯이 고개를 숙이고 서 있는 낚시꾼의 모습에보다는 그의 등뒤에서 가슴에 칼을 맞고 넘어진 사내의 반쯤 물에 잠긴 모습에, 그저 아직 무어라고 규정할 수 없는 감정의 공백상태 속에서, 오랫동안 시선을 주고 있었다. 그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피가 개울물을 붉게 물들였다. 무협 영화 한 편에 수도 없이 등장했다가 방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처럼 쓸려나가는 단역들 중의 어느 하나에 그토록 시선이 쏠렸다는 것은 그가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었다.

그는 자신의 낯선 감정을 더듬으면서 어디엔가 터져 있을 입구를 찾기 위해 한동안 그 주변을 서성거렸다. 그가 그토록 관심이 끌렸던 것은 아마도 그 사내의 행동의 어설픔과 거기에 어울리지 않는 나름대로의 표정의 터무니없는 진지함이 빚어내는 불균형 때문이었는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는 다시 엉덩이를 앞쪽으로 배서 의자의 끝에 걸고 상체를 뒤로 눕혀 의자 속에 깊이 파묻었다. 그는 사내의 모습을 볼 때 그 측은할 정도의 심각함 때문에 웃음이 터질 듯했으며, 반면에 코미디언의 하체를 연상시키는 어수룩한 연기 때문에 착잡할 정도로 우울해졌었다. 사내는 여전히 얼굴을 물 속에 박은 채로 물거품 하나 떠올리지 않으면서 엎어져 있었다. 그때 불현듯 사내의 얼굴을 다시 한번 보고 싶은 열망이 술취한 때의 객기처럼 그의 속에서 번져나갔다. 언뜻 거리며 지나치는 단역들의 얼굴은 대로 엷은 천으로 가려진 여배우의 알몸처럼 그로 하여금 오래 들여다보고 싶은 욕망을 자극하는 경우가 있었다. 가능하다면 물에 젖은 사내의 머리카락을 손아귀에 몰아 쥐고 얼굴을 쳐들어서 들여다보기라도 해야 했다. 무언가 다시 확인해보고 싶은 것이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고, 그것은 단지 그들의 얼굴들이 자세히 바라고기 전에 사라져버린다는 그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번 경우에는 그 사내의 얼굴이 얼핏 얼핏 화면을 스칠 때 그는 사내의 오른쪽 윗입술에서 선명한 검은 점을 보았던 것 같은 생각이 들었었다. 그러나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의 맹목적인 바람에도 불구하고 화면은 번잡한 저자 거리로 옮겨지고 있었다. 노점상들의 시끄러운 소시가 중국사람들에게서 간혹 발견되는 수다스러움을 재현하고 있었다.

그는 주머니 속의 손을 빼내어 어둠 속에서 그의 꺼칠한 오른쪽 윗입술을 더듬었다. 손끝에 만져지지는 않았지만 점은 오늘 아침에도 보았듯이 흉터처럼 그곳 에 선명하게 남아 있을 것이었다.

그는 언제나처럼 영화관에 들어온 사실을 서서히 후회하기 시작했다. 차라리 여인숙의 구석방에서 눅진한 낮잠을 자거나. 술집에서 위장에 각을 지게 할 소주를 홀짝거 리는 편이 나을 듯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영화 속에는 현실과는 다른 면으로 그를 압박하는 것들이 있었다. 그것은 일정한 시간을 간격으로 하여 죽어 넘어지거나 스쳐 지나가는 엑스트라들이었다, 그것은 마치 그가 바깥에서 죽여 없애는 시간의 입자들처럼 맥없고 공허했다. 고러나 좀 전에 화면에서 사라진 사내의 모습은 전례가 없을 정도로 그의 망막에 오래 살아남아 있었다.

이윽고 극()은 거의 마무리 단계에 이르고 있었다. 그때 이미 그는 극의 전반적인 줄거리를 파악할 수 있었다. 늙은 방물장수의 허름한 꾸러미 속에 들어 있는 내용물들은 뻔했다. 그것은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포르노 영화의 사건 전개를 위한 구성과 별다를 바가 없었다, 그 줄거리는 사실 현란한 액션을 적절히 배합하기 위한 단순히 장식적인 것에 불과했다. 대중소설이 간간이 정사(情事) 장면을 삽입하여 그것들을 마치 요소 요소에 배치된 핵()처럼 사용하듯이. 이 극 속에서는 사건이나 갈등이 계속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일련의 폭력 장면들이라는 줄기에 잡다한 잎새들이 붙어 있는 형국이었다,

그러나 어쨌든 극의 내용 - 내용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배경이라는 말이 더 잘 맞아떨어질 것이었다- 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었다.

장소는 중국. 시대는 17세기, 명말 청초(明末淸初). 중국 본토를 거의 장악한 청조에 대항하여 강남을 중심으로 한 명의 유민들과 타이완의 정성공이 결탁하여 명의 복원을 꾀하기 위해 최후의 발흥을 시도하던 때였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자신들이 한족(漢族)의 진정한 후예라는 정통성이 결여되어 있었다. 즉 그들에게는 명의 왕통을 이어나갈 후계가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한 사람 남아 있는 명의 왕손을 데려다가 황제로 옹립하는 것이 가장 시급히 선결할 문제였다.

그들이 신중히 이 계획을 위한 모의를 꾀하던 중, 드디어 왕손의 신변이 확보되었고, 남은 문제는 그를 호위하여 청나라 군사들의 삼엄한 포위망의 고물을 찢고 데려오는 일만이 남게 되었다. 그리고 그 과업은 당시에 무술의 정통적인 본산이었으며 명을 지지하던 소림사에 맡겨졌던 것이다.

그러나 이상의 내용은 이미 언급했듯이, 이 영화를 성립시키는 뼈대에 불과했고, 실제적인 줄거리라는 것은 그에 비해 무척이나 단순했다. 소림사에서 무술이 뛰어난 고수들 중에서 열 명이 선발되고 그들은 각기 밀명을 받은 후에 각지로 흩어진다. 즉 그들의 우두머리 격인 주인공은 우선 왕손을 만나서 그를 옹위하여 강남으로 향한 도정에 오르고, 그들 둘이 지나는 길목에 나머지 아홉 명의 소림사 고수들이 민간인으로 변장하고 숨어 있다가 추적해 오는 청의 군사들을 막아내거나 그들의 포위망을 뚫는다는 것이었다.

이제 영화는 단속반원에게 쫓기는 노점상인처럼 서둘러서 보따리를 싸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무협 영화가 피러하듯이 당연히 해피 엔딩의 결말이 이루어지거나 조금 멋을 부린다면 주인공이 장렬히 전사하는 것으로 끝날 것이 애초부터 불을 보듯 환했지만 정작 실상은 그의 기대에서 완전히 벗어나 버렸다.

왕손 일행이 거의 목적지에 이르렀을 때는 열 명 중에서 셋만이 살아남아 있었다. 그때 그들은 청의 군사들에게 완전히 포위되는 위기를 맞는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들은 수세에 몰리다가 주인공을 제외한 나머지 둘이 죽임을 당하고 왕손은 체포된다. 홀로 남은 주인공은 왕손을 구출할 기회를 노리다가 그를 추격해 온 적의 대장과 마지막 혈전을 치른다. 그러나 지칠 대로 지쳤고 상처까지 입은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하지만 힘이 적에게 미치지 못한다. 적은 의기양양한 태도로 쓰러져 있는 그에게 한 발 한 발 다가서기 시작한다.

다른 관객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적이 오히려 거꾸러질 것이 자명한 마지막 장면을, 그러나 어느 정도 긴장과 조바심을 태우며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주인공이 마지막으로 몸을 솟구쳐 적의 두개골을 부수어뜨리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으나,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주인공이 이겨주기를 바라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것은 주인공이 이겨주는 편이 여러 모로 훨씬 편할 듯했기 때문이었다. 적이 수도(手刀)로 정면 공격을 가하자 가까스로 땅바닥에서 일어서던 주인공은 다시 뒤로 넘어졌다. 그는 입안이 텁텁할 때 쩝쩝 입맛을 다시듯이 주머니에서 손을 꺼내 손가락을 폈다가 접는 일을 몇 번 되풀이하였다. 상황에 뛰어들 수 없고 사태의 추이를 그저 지켜보는 수밖에 없을 때 그가 자주 하는 버릇이었다.

그때 썰렁한 실내에 난데없이 영화가 끝났음을 알리는 종소리가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이토록 한랭하고 무미건조한 장소에서 이제 그나마 영화 속에 조금은 몸을 맡길 수 있었던 그는 다시 딱딱한 의자의 고통이 엉덩이에 따갑게 느껴져서 바닥에 굴러 떨어질 듯한 현기증을 느꼈고, 새삼스레 코를 맵게 하는 실내의 악취 때문에 잔기침을 몇 번 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누군가가 시간을 잘못 알고 실수로 종극을 알리는 종의 스위치를 눌렀을 것이라 생각하고 설마 이대로 영화가 끝나지는 않으리라고 믿으려 했다. 화면에서는 여전히 고전을 치르는 주인공이 입에서 피를 흘리며 일어서고 있었다. 그때 천정에 설치된 전등불이 앞에서부터 하나씩 차례로 켜지기 시작했다. 주위가 환히 밝아지자 화면은 더욱 흐릿해지고 더러워졌다. 여기저기에서 웅성거리는 항의 소리가 일어났으며, 그도 몸을 앞으로 당겨서 어이없는 표정으로 주위를 돌아보다가는 다시 화면을 바라보았다. 이 번엔 주인공이 적에게 몸을 날렸으나 오히려 역습을 당하고 또다시 땅바닥에 거꾸로 넘어졌다. 적의 웃는 얼굴이 화면 전체에 가득 메워졌다. 아랫입술로 내는 휘파람 소리가 몇 번 일어났다.

그러나 마치 그것마저 일축시켜버리려는 듯이 이층에서 화면으로 보내지던 빛의 횐 줄기가 끊어졌고 몇 개의 전등까지 켜져서 실내는 완전히 환해졌다. 사림들이 일어서서 조금 전까지 영사막을 비추던 이층의 영사실을 올려보다가 고개를 돌려 이제 흰색 여백으로 남겨진 화면을 바라보는 일을 번갈아 하고 있었다.

서로 구별되지 않는 무관심과 나태를 주위에 뿌려놓고 앉아 있던 그 자신도 이곳이 아무리 변두리 삼류 극장이지만 소위 위기일발의 순간에 극적인 역전극은 고사하고, 순전히 제한된 상영 시간 때문에 멋대로 극의 흐름을 끊어버린 극장측의 처사에 불쾌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는 밝아진 실내를 돌아보며 시루떡에 박혀 있는 대추처럼 드문드문한 사람들의 머리 수를 헤아렸다. 그가 이곳에 들어왔을 때는 이미 영화가 반 이상 시작된 이후인데다가 화면 자체가 침침해서 실내가 너무 어두웠었고, 더우기 나쁜 시력 탓으로 앞쪽에 앉아 있어서 관객들의 숫자를 전혀 가늠할 수 없던 터였다.

그들은 고작해야, 이곳을 놀이터로 삼고 층계를 뛰어다니는 아이들과, 낮술을 몇 잔씩 걸친 듯한 일단의 젊은이들, 삼삼오오 오여 앉아서 직업이라도 드러낼 셈인지 검을 씹어대는 여인들이 전부였다. 잠시동안의 소음은 모두 그들이 일으킨 것이었다.

그는 다시 의자 속에 깊숙이 파묻히며 손목을 걷고 시계를 보았다. 시계 앞판이 여윈 손목을 반 바퀴 돌아서 손바닥 쪽으로 향해 있었다. 숫자판에 씌어진 아라비아 숫자의 콤퓨터식 레터링은 여간해도 그의 눈에 익숙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한참이나 눈을 들이대고 있어야 했다.

점점 실내의 분위기가 가라앉고 몇 명 되지 않던 관객들 중에서 또 몇이 자리를 뜨자 극장 안은 더욱 황량해지기 시작했다. 들개 몇 마리가 객석 사이를 어슬렁거린다면 더욱 적격일 듯했다. 그러자 그의 불쾌감도 가상의 짐승들이 떼어놓은 발걸음에 따라 서서히 묽어지기 시작했다. 그는 그저 당혹감을 느끼며 표정을 바꾸지도 않고 코로 쿡쿡쿡 웃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이건 결국 대단한 전위극이라는 생각을 하며 느슨해진 고무줄처럼 즐거워지기 시작했다. 애초부터 열세에 몰려 고초를 겪던 주인공 일행이 일방적으로 당하다가 영화가 끝이 났고, 더구나 대의명분까지 가지고 있던 그들의 의거가 수포로 돌아갔으니 이러한 과감한 대단원을 도입한 극장측의 의도는 사실 현대의 부조리극을 닮은 전위적 수법과 다를 바가 없다고 할 수 있을 터였다. 마음만 먹는다면 그것에 대한 의미 부여가 얼마나 많이 가능할 것인가.

그는 다음 회를 끝까지 다 보아야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그러한 결심의 이유는 영화의 결말에 대한 호기심, 주인공이 여하한 계기로 힘을 되찾고 여하한 수단으로 적을 넘어뜨릴 것인가 하는 궁금함 때문이 아니었다. 고것은 그처럼 아무래도 상관이 없는 성격의 것이 아니라 영화가 다음 번에는 끝까지 상연될 것인가, 아니면 이번엔 어느 부분에서 잘려버리고 말 것인가, 그리고 그때의 관객들의 태도는 어떠할 것인가를 알고 싶은 극렬한 심리 상태의 발로였다.

그러나 그의 심중에는 더욱 절실한 이유들이 도사리고 있었다. 아직 보내야 하는 많은 시간에 비해 이곳을 나가봐야 갈곳이 없다는 것이 그 하나였으며, 조금 전에 계곡에서 죽어 넘어지던, 어딘가 낯이 익은 듯한 엑스트라의 얼굴을 다시 한 번 확인해보고 싶은 것이 그 두 번째였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이유들이 결국은 그 자신을 이 영화관에 오래 눌러 있게 하려는 수단으로서의 정당화에 불과하다는 것을 내심으로 절감하고 있었다. 그는 앞자리에 두 발을 걸쳐놓고 양쪽 어깨가 맞닿을 정도로 상체를 죄었다.

영화관에 불이 들어온 이후에 그가 발견했던 특이한 점의 하나는 난로였다. 아무리 삼류 극장이라 하더라도 일층의 한쪽 귀퉁이에 난로가 놓여져 있고 연통이 교묘히 이층 객석을 피하여 높은 천정에까지 뽑아 올려진 것을 보는 것도 그에게는 처음 있는 일이었고, 조금은 인상적이기까지 했다. 어쨌든 그는 이러한 희한한 경험 탓에, 식용유를 한 컵 들이키고 난 듯이 조금은 누그러지고 느긋해지는 자신을 느꼈다. 권태가 조금은 덜 절실하게 느껴진다는 증거였다.

난롯가에는 껌을 소리내어 씹어대는 여인들과 머리를 목뒤까지 기른 사내들이 모여 서서 즉석 미팅을 이루고 있었다. 그들의 필요 이상으로 요란한 웃음소리가 연통에 감겨진 철사를 타고 높이 치솟아 올랐다. 한 낮에 이런 좁은 공간에서 같이 시간을 보낸다는 연대감과 난로가 이루어주는 원형의 모임이 그들 모두를 스스럼없이 연결시켜 주고 있었다. 여인들은 때때로 교태스러운 몸짓을 했고. 사내들은 속이 텅 빈 대나무 줄기처럼 뻣뻣하게 서 있었다.

한기가 소맷부리 사이로 스며들어 온몸을 떨리게 했지만 그는 난롯가로 가고 싶지 않았다. 이미 그들과 한배를 탄 처지에 잡인들 틈에 끼여 손과 엉덩이를 들이밀고 싶지 않다는 고고함 때문이 아니라 그것은 단지 그의 지금 자세를 풀고 일어서서 그곳에까지 다가가는 과정의 번거로움 때문이었다. 그는 더욱 어깨를 죄고 허벅지를 밀착시켰다. 잠시동안 잊고 있었던 시간의 고통이 다시 활발한 세포 분열을 하기 시작했다.

시간을 수월하게 보낼 추 있기 위하여 죽치고 있는 이런 장소에서 맞이하는 잠깐동안의 무료함은, 잠복기를 거친 세균처럼 바깥에서 겪는 것보다 몇 배 더 극심한 고통을 불러일으키는 법이었다, 성능이 좋지 않은 스피커에서는 유행가 가락이 오래 써먹어서 비가 내리는 영사 필름처럼 잡음에 섞여서 간신히 이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는 점점 이전에 수월하게 보낼 수 있었던 시간의 하중까지 온몸으로 떠받들어야 했다. 간헐적으로 그의 마음의 벽에 부딪쳐 떨어지는 갖가지 추억들은 오로지 이 순간의 권태를 강조하는 듯했다. 쾌락에 필수조건이 되는 시간이 일단 독소로 화하면 그 고통의 양은 쾌락보다 훨씬 엄청나다는 사실을 그 가 너무 오래 잊어왔었던 것에 대한 보복키라고 할 수도 있었다.

이제 저녁 어스름이 지나고 소태처럼 씁쓸한 어둠이 깔리면 그는 -하면 된다- ()의 열 개나 되는 구호가 적혀진 현관을 보기 위하여 사무실로 돌아가야 했다. 그가 처음 B()에 입사해서 일 주일간의 교육을 받았을 때는 자신의 가능성에 대한 극히 소극적인 믿음을 얻고 스스로 감격할 수 있었다. 그가 여러 회사들을 전전하다가 끝내는 적성과 상관없이 B사에 들어가게 된 동기는 그곳이 다른 회사와는 달리 세일즈맨을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었고, 특히 대학 졸업자 이상만을 선발한다는 규정 때문이었다.

그것은 어느 정도 그의 초라한 자존심의 한 구석을 만족시켜주었던 것이다. 하긴 그곳은 물품을 들고 팔러 다니거나 구독 신청을 받아내는 세일과는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본사를 미국에 둔 한국 지점인 B사는 고객들을 회원으로 모셔서 그들에게 회사의 여러 시설을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했고, 물론 여러 가지 품목을 세일하기도 했다. 일단 회원이 되면 한 달에 한 번씩 일정한 기간 동안 은행에 돈을 불입하면 되는 것이었다.

처음에 일주일간 하루에 여섯 시간씩 꼬박 앉아서 교육을 마치고 났을 때는 그 자신도 다른 세일즈맨과는 다른 일을 하게 되리라는 교묘히 은폐된 긍지를 가질 수 있었고, 그러자 스스로 놀랍게도 그것은 소위 사명감이나, 자신의 정신적, 신체적 노동력을 공히 사회에 투입시킴으로써 얻어지는 진정한 대차 관계라는 의미로까지 과장되었다.

그가 삼 일 동안의 정신 교육과 세일의 요령, 다시 삼일 동안 물품 설명과 회원 가입시의 특혜에 대한 강의를 듣고 나서, 파란 색과 노란 색의 두 가지 입회 용지, 즉 오더지 (order)가 들어 있는 공공칠 가방을 들고 거리에 나왔던 것은 거의 이 주일 전이었다. 그 가방은 교육이 끝나던 날 이층의 사무실에서 미리 와 기다리던 가방 회사의 판매 부장에게 다른 동료들과 함께 단체로 주문한 것이었다. 대차 관계는 도처에서 발견되는 것이었다. 어쨌든 거리에 내몰린 미아처럼 막막했던 그때의 기분과, 비록 그가 직접 물품을 만지는 것이 아니라 오더지 만을 갖고 회원 가입을 설득한다 해도 결국 그것도 효과적 인 상술이란 명목으로 개발된 새로운 세일에 불과하다는 낭패감을 그는 가방의 무게로 간신히 상쇄해나갈 수 있었다.

매일 아침 저녁으로 사무실에서의 모임이 있었고, 그 첫날 저녁은 회사 전체가 아이스 브레이크를 해낸 사원들에 대한 축하로 떠들썩했다. 커다란 얼음 덩어리는 처음에 깨뜨리기 시작할 때가 어려운 법이고 일단 깨지기 시작하면 손쉽게 갈라져 버리듯이, 그 회사의 신입사원이 처음으로 고객을 회원에 가입시켜, 오더지를 받아오는 것을 아이스 브레이크라는 용어로 부르는 것도 그곳에서 얻은 지식이었다. 770지역에 소속된 열다섯 명의 사원들이 교육받은 대로 회원 가입의 용지를 가지고 거리로 나선 후 저녁 일곱 시에 다시 사무실에 모였을 때, 그들 중 여덟 명이 아이스 브레이크를 해냈었다. 지역장으로부터 그들에 대한 거창한 치사가 있었고 나머지 일곱 사람들은 우울한 기분으로 그들에게 축하하는 박수를 보내야 했다.

그는 그날 아침 일찍 회사에 들렀다가 거리로 나와 헤매면서 성과는커녕 오히려 허벅지 근육만을 잔뜩 늘여뜨렸다. 그리고 점심 시간이 훨씬 지난 후에는 모든 것을 포기한 상태로 목욕탕에 들어가 늘어지게 낮잠을 잤다. 시간에 비례하여 끼는 때는 그의 온몸 구석구석에서 허옇게 밀려나왔다. 시간은 일종의 때에 다름 아니었고, 때는 심지어 시간을 가늠하는 척도일 수도 있었다.

목욕탕을 나섰을 때는 이미 회사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결국 그는 여덟 명의 동료들을 위해 묵은 때를 벗겨서 고와진 손으로 박수를 쳐야 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교육받은 대로 B사의 구호를 지역장의 구호에 따라 소리 높여 복창해야 했다. 상환은 다음날도 마찬가지였고, 그 다음날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로서는 도저히 낯선 사람 앞에서 다른 동료들처럼 다짜고짜로, 축하합니다, 이제 사장님께서는 저희 B사의 무진장한 자료를 거의 무료나 다름없는 비용으로 이용가실 수 있는 기회를 얻으신 것입니다. 이런 훌륭한 시설과 자료를 이제야 소개하여드리게 되어 죄송합니다. 그 동안 제가 조금 바빴거든요. 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일주일 정도가 지났을 때 그가 얻은 것이라고는 무료한 시간을 쉽게 보낼 수 있는 장소, 즉 목욕탕이나 영화관, 일요일의 경마장, 그리고 때때로 TV 공개 방송의 방청석 등의 파악이었다.

그때쯤에는 나머지 일곱 중에서 둘이 더 아이스 브레이크를 해냈고 그를 제외한 넷은 스스로 포기한 것인지 사무실에 얼굴을 내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그는 아침저녁으로 사무실에 들르는 일을 걸르지 않았다. 고러나 그것은 미련 때문은 아니었다. 언젠가는 고도 아이스 브레이크를 하리라는 희망이 그에게서 따라진지 이미 오래였다. 그렇다고 해서 특히 각별했던 지역장의 격려 때문도 물론 아니었다. 그가 이제까지 B사에서 주급(週給)을 한 푼도 받지 못하면서 버티고 있고, 오늘도 저녁에 시간 맞추어 사무실에 들르려 하는 것은 그와는 다른 미묘한 심리적 동기가 있었다. 지역장은 그와 먼 인척 관계가 있었던 터이라 매일 저녁 그에게 차가와 한 두 마디씩 그를 위로하는 말을 하곤 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자격지심 탓인지는 알 수 없어도, 지역장의 말 속에 검푸른 이끼처럼 끼어 있는 경멸의 습기 찬 냄새를 맡곤 했다. 고는 차라리 지역장이 솔직한 얘기를 털어놓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그는 지역장에 대항한 미묘한 승부욕에 집착하고 있었다. 언젠가는 지역장으로부터. 자네는 아무래도 가능성이 없는 듯 싶네, 라는 말을 듣고야 말리라는 오기 내지는 심산이 그가 출근을 하는 거의 대부분의 이유였던 것이다. 그가 자신의 의사에 의하여 임의로 회사를 포기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그의 자존심으로서는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난롯가에 가지 않는 것과 화장실에 가기를 걸르는 것은 그 중요성의 정도를 달리하는 것이었다. 화장실을 다녀오고 나서도 시간은 십 분밖에 지나지 않고 있었다. 자주 오지 않는 시내버스를 기다리는 기분과 흡사한 감정에 시달리고 있을 때. 화면이 조금 어두워지더니 광고 프로가 시작되었다. 고는 한기가 스멀스멀 기어다니는 무릎 위를 손바닥으로 비 볐다. 난롯가의 모임은 난초의 열기를 받아 더욱 가열되고 있는 듯했다.

잠시 후에 날카로운 금속성이 느껴지는 벨소리와 함께 대한 뉴스가 시작되었다. 그제서야 난롯가에 모여서 웅성거리던 일단의 사람들이 하나씩 흩어져서 난로에서 가능한 한 가까운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피워댄 담배연기가 잠시 난로 위쪽에 몰려 있다가 뜨거워진 송기를 타고 천정으로 날아올랐다. 화면에서는 이미 거의 한 달이 지난 사건들이 생생한 현재성을 지니고 소개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에 다시 종소리 길게 울려서 본영화의 시작을 알렸다. 이제 그는 조금은 덜 고통스럽게 시간을 보낼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질 수 있었다.

화면에 적혀진 감독과 출연자들의 이름으로 보아 이것은츤 정통 무협 영화와는 거리가 멀었고, 단지 배우 몇 명과 중국어로 녹음이 되었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한중 합작이라는 미명하의 한국판 영화임을 알 수 있었다. 변장을 하고 소림사를 나서는 고수들의 모습을 그리면서 극이 시작되고 있었다. 거기에 맞춰 나레이터가 유창한 중국어로 이미 전회에서 그가 짐작했던 내용을 구술하기 시작했고. 그것이 끝나자마자, 화면과 실내에 또다시 살벌한 싸움과 요란한 기합소리가 현란하게 들어찼다.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하루 중 다양한 시각에, 그리고 산과 강 도처에서 살상이 이루어졌고 무수한 인명이 죽어 넘어졌다.

그러나 그는 언제부터인가 위기를 아슬아슬하게 피해나가는 주인공들의 모습에 보다는 창과 칼을 휘두르며 무더기로 덤벼드는 엑스트라들의 일거수일투족에 집중되어 있는 자신의 시선을 느꼈다. 그들은 모두 자기들의 임무인 칼에 찔려 넘어지는 행위를 무난히 마치고 땅바닥에 편안히 누울 수 있기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그들은 마치 곡예를 부리는 원숭이떼 같이 칼을 든 조련사 앞에서 이리저리 넘어지거나 멋지게 재주를 넘곤 했다. 그들의 연기는 몸에 밴 무술 탓인지 모두 훌륭했다. 무수한 청나라 군사들이 대나무 밭이나 음식점에 숨어 있다가 튀어나왔고 그들 대부분은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하였다.

화면에는 잠시 정적이 흐르고 있었다. 주인공 일행은 새벽 안개를 헤치고 황폐한 사원을 지나는 중이었다. 그때 돌비석이나 아름드리 나무 등걸의 뒤에서 일군의 청나라 군사들이 쏟아져 나왔고, 다시 일당십의 혈전이 벌어졌다.

이미 그러한 과장된 싸움 장면에 식상해버린 그가 크게 하품을 하고 나서 눈썹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채로 화면에 시선을 돌렸을 때, 화면 속의 한 인물이 그의 주의를 잡아끌었다. 요란한 청나라 군사의 복장을 카고 창을 든 그 사내는 동료들과 함께 넓은 사원의 앞마당에서 주인공을 포위하고는 창을 앞으로 꼬나 잡고 덤벼들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 사내가 특히 눈길을 끌었던 것은 우선 그 의 행동이 무척이나 어색했다는 점이었다. 사내는 동료들을 따라 엉거주춤한 진퇴(進退)를 거듭하고 있었으나, 남들처럼 창을 함부로 휘둘러 대거나 소리를 지르지도 못한 채 잔뜩 긴장하고 상기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물론 그의 모습은 화면의 왼쪽 모서리 부분에서 어쩌다 한번씩 비추어질 뿐이었지만 그때마다 사내가 주인공에게 헛되이 다가들었다가 뒤쪽으로 주르르 물러나는 모습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마침내 감독의 신호가 떨어진 모양이었다, 사내는 카메라 녹의 방향을 힐끗 보고는 입을 반쯤 벌리고 주인공에 덤벼들었고, 아주 잠깐 사이에 가슴이 깊게 베어져서 땅바닥으로 뒹굴었다.

그때 그는 관객석의 딱딱한 의자에서 몸을 반쯤 일으켰다. 그때까지 그는 빙글빙글 웃으며 그 사내의 모습이 화면에 잡힐 때마다 놓치지 않고 주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사내가 땅바닥에 넘어지고 잠시 그의 얼굴이 크게 비추어졌을 때 어딘가 낯이 익은 구석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는 사내의 입술 끝에서 점 같은 것을 얼핏 본 듯했다. 이 모두는 아주 잠시동안에 이루어졌지만, 그는 사내의 입술 한쪽이 검게 보인 것은 점 때문이 아니라 시퍼렇게 멍이 든 위에다 화장을 한 연유이며, 그 사내가 바로 그가 전회의 중반 부분에서 보았던 그 사내일지도 모른다는, 아니 분명히 기()일 것이라는 심증을 굳혔다. 그는 한 영화에서 두 번, 한번은 민간인 복장으로, 또 한번은 청나라 군사 제복으로 출연하여 거의 비슷한 죽음을 당하고 있었다. 이제 그는 잠시 후에 계곡의 찬 개울물에 얼굴을 박고 죽은 듯이 넘어져 있는 연기를 해야 할 것이었다.

그는 안경을 벗어 새끼 손가락에 걸고 두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피곤한 눈두덩을 지긋이 누르자 상쾌한 쾌감이 망막 뒤쪽으로 전해졌다. 그는 손을 얼굴 양편으로 하여 세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눌렀다. 그때 스피커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실내가 조용해졌다. 필름이 끊어진 모양이었다. 그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사내들의 휘파람 소리와 여자들의 반쯤 떠드는 목소리들이 여기저기서 일어났다. 관객의 수는 아까보다 거의 두 배는 될 듯했다. 그러나 그들이 내는 소음의 크기는 그들의 양보다는 질에 더 관련되어 있었다. 마치 그들의 입에 앰프를 달기라도 했듯이, 그 시끄러운 소리는 그들의 수에 비해 훨씬 크게 울려 나왔다.

그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이번에는 눈두덩 위쪽과 아래쪽을 차근차근 눌러나갔다. 실내의 소란은 제풀에 차츰 꺾이기 시작했다. 오른쪽 둘째손가락에 감긴 일회용 밴드가 볼을 자극했다. 눈가를 마치자 그는 손을 더 위로 뻗어 엄지손가락으로 한참동안 정수리를 누르고는 곧 이어 다섯 손가락을 모두 사용하여 앞머리 쪽에서 귀 뒤쪽까지 힘을 주어 눌렀다. 필름은 여간해서 다시 돌아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소리를 지르지는 않았지만 웅성웅성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그때 그의 마음속에 지난날의 회한(悔恨)처럼 직접 마주 대하기 싫은 감정이 기포처럼 떠올랐다. 그것은 이 극장 앞의 조금 넓은 공터를 가로질러 매표소에서 표를 사고 극장 안에 들어서기 바로 직전까지 느꼈던, 그리고 곧 영화가 끝난 후 극장 문을 열고 나와 공터를 가로질러 사람들 속에 묻히기 바로 직전에 그가 느끼게 될 감정과 비슷한 것이었다.

얼마 후 필름이 다시 돌아가고 소음이 가라앉았다. 그제서야 안경을 쓰고 고개를 든 그의 시야는, 어느 사이에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앞자리에 앉아 있는 장발의 남자에 의해 반 이상이 가려지고 있었다. 그는 몸을 일으켜 옆으로 한간 건너가서 앉아야 했다. 이미 영화가 반쯤 지난 것인지 화면에서는 새 소리와 함께 퍼런 두 산들 사이의 계곡을 흐르는 개울이 그려지고 있었고, 예의 그 낚시꾼의 모습이 화면에 가득 클로즈업되었다.

그때 통로의 바로 옆자리에 앉아 있던 그의 옆으로 한 노인이 천천히 지나갔다. 그는 고개를 돌려 노인을 바라보았다. 체구가 아주 작은 그 노인은 청색 싱글 양복차림에 조끼에다 넥타이까지 맨 정장을 하고서 아까부터 일층과 이층을 오르내리거나 통로를 누비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그 노인을 바라본다 해도 그로서는 도저히 기의 정체를 알아낼 수 있는 여지가 없었다.

다섯 사내가 낚시꾼 주위를 둘러쌌다, 낚시꾼의 삿갓이 뒤로 넘어가고 동시에 낚싯대가 허공을 갈랐다. 앞쪽에서 피어오르는 담배연기가 그의 시야를 방해했다. 한 사내가 거꾸로 들렸다가 개울에 떨어졌다. 담배연기가 천천히 퍼져나갔다. 그는 거의 자동적으로 주머니를 뒤져서 담배 한 개비를 꺼냈다. 그가 막 성냥갑에서 성냥개비를 찾으려 할 때였다. 어느새 다마왔는지 좀 전의 노인이 앞자리에서 담배를 피우는 사내의 목덜미를 쳤다. 노인은 손을 들어 앞쪽을 가리키다가 손끝으로 극장 안을 한바퀴 빙 돌렸다. 두 사람이 잠시 벌이던 실랑이는 끝내는 노인의 손에 외투의 깃을 잡힌 사내가 끌려나가는 것으로 일단락 되었다.

그는 한동안 앞자리와 화면의 중간 부분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고개를 더욱 숙이며 손바닥 속에서 담배를 으깨어버렸다. 낚시꾼의 등뒤에서 배를 찔린 사내가 개울물에 얼굴을 박았다. 사내의 검푸른 입술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허리의 아래쪽을 손등으로 두들기며 어두운 통로를 천천히 걸어나갔다, 그는. 이런 곳을 나갈 때는 자신의 의사에 의하는 것보다 제3의 압력에 의하는 편이 훨씬 편하다고 생각을 하며 저으기 만족감을 느끼고 있었다, 열려진 입구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그를 감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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