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연설, 졸업식치사, 칼럼, 기사, 논설

졸업식 치사(2/2)

by 자한형 2021. 9. 19.
728x90

 

축사2 조앤 롤링

저는 코딱지만 한 제 사무실에서 독재정권 하에서 탄압받는 사람들이 서슬이 시퍼런 권력의 눈을 피해 몰래 밀반출한 편지들을 읽었습니다. 목숨을 걸고 자기 나라의 상황을 바깥세상에 알리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다급하게 손으로 휘갈겨 쓴 편지들이었습니다. 저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사람들의 사진을 보았는데, 이 사진들은 실종된 사람들의 가족과 친구들이 절박한 심정으로 저희에게 보낸 사진이었습니다. 저는 끔찍한 고문을 당한 사람들의 증언도 읽었고 고문이 남긴 상처를 찍은 사진도 보았습니다. 저는 즉결심판과 처형, 납치와 강간 등에 대해 증인들이 직접 쓴 기록도 읽었습니다.

제 동료들 가운데는 과거에 정치범이었던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단지 권력자와 다른 의견을 표명할 용기가 있다는 이유로 삶의 터전에서 추방당하고 망명한 이들이었습니다. 우리 사무실을 찾아온 사람들 가운데는 정보를 제공하려는 사람들도 있었고, 고국에 남겨둔 가족친지나 친구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보려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저는 고문당한 한 아프리카 인을 절대로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는 당시 제 나이보다 많지 않았고 고국에서 겪은 고통의 후유증으로 정신질환을 앓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가해진 폭력에 대한 증언을 카메라에 녹화하는 동안 끔직한 기억에 대한 두려움에 몸을 부들부들 떨었습니다. 그는 저보다 키가 30센티미터 가량 컸는데 마치 아이처럼 나약한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증언 녹화를 마치고 저는 그를 지하철까지 안내해 주었고 잔인 무도한 정권에 삶이 산산이 조각난 이 젊은이는 깍듯이 예절 바르게 제게 악수를 청했고 작별인사를 했습니다.

한번은 텅 빈 사무실 복도를 걷고 있는데 갑자기 문이 닫힌 어느 사무실에서 고통과 두려움에 찬 비명소리가 흘러나왔습니다. 저는 그렇게 고통스러운 비명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 소리는 아마 제가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겁니다. 그런데 그 비명소리가 흘러나온 사무실 문이 열리고 연구직 여직원이 머리를 문 밖으로 내밀더니 따뜻한 음료를 갖다 달라고 했습니다. 그녀가 비명을 지른 그 청년에게 막 비보를 전했던 겁니다. 그가 고국의 정권에 대해 거침없이 비판을 한 데 대한 보복으로 정권이 그의 어머니를 처형한 것입니다.

20대 초반에 그 일을 하면서 저는 하루도 빠짐없이 제가 얼마나 행운아인지 절실히 느꼈습니다. 민주주의적 절차에 따라 선출된 정부가 나라를 통치하고 국민 누구나 법적 대리인을 선정하고 공개재판을 받을 권리가 있는 나라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운인지를 말입니다.

매일매일 저는 권력을 얻고 유지하기 위해 인간이 인간에게 얼마나 극악무도한 폭력을 가하는지 그 증거를 보았습니다. 제가 보고 듣고 읽은 이런 끔직한 내용들 때문에 저는 말 그대로 악몽까지 꾸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저는 국제사면위원회에서 일하는 동안, 인간의 선한 면에 대해서 이전보다 더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국제사면위원회에서 일하는 수천 명의 직원들은 그들 자신은 신념 때문에 고문을 당하거나 투옥된 경험이 없지만 그런 고통을 겪은 사람들을 위해 일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인간적인 공감을 바탕으로 함께 힘을 모아 위기에 처한 생명을 구하고 속박당한 사람들에게 자유를 되찾아주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편안하고 안정된 삶이 보장된 보통사람들이 힘을 모아서 자신들이 알지도 못하고 평생 만날 일도 없을 사람들을 구하려고 애씁니다. 그러한 일에 조금이나마 제가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은 제가 한 그 어떤 경험보다도 저 자신을 겸허하게 만들고 고무시켜주었습니다.

지구상의 다른 생물들과는 달리 인간은 직접 경험하지 않은 것을 배우고 이해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타인의 마음을 읽고 타인의 처지에 자신을 놓아 이해할 능력이 있습니다.

물론 제 소설 속의 가상의 마법의 힘과 마찬가지로 이는 도덕적으로 중립성을 띤 능력입니다. 어떤 이는 이러한 능력을 다른 사람을 이해하거나 공감하는데 쓰기보다는 다른 사람을 자기 마음대로 통제하고 조종하는 데 쓸 지도 모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가진 이러한 상상력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사는 편을 택합니다. 이들은 자신이 직접 경험한 세상의 경계선 안에서 편안하게 사는 편을 택하고 자신이 지금과 다른 환경에서 태어났다면 어떠했을지 느껴보려고 애쓰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비명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귀를 틀어막고 속박당한 이들이 갇혀있는 감옥을 들여다보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삶에 직접 영향을 미치지 않는 한 남의 고통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마음의 문을 닫아버립니다. 그들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부럽다가도 그런 사람들이라고 해서 저보다 악몽에 덜 시달리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면 부럽다는 생각이 사라집니다. 그렇게 자기만의 협소한 공간 안에서 살다 보면 정신적인 광장공포증에 시달리게 되고 이 증세로 인해 나름대로 엄청난 공포감을 느끼게 됩니다. 상상하지 않고 살려고 애쓰는 사람들은 더 많은 괴물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더 큰 두려움에 시달립니다.

타인과의 공감을 거부하는 행위는 진짜 괴물들이 힘을 휘두를 능력을 갖게 만듭니다. 우리가 스스로 악을 행하지는 않아도 악이 행해지는 상황을 외면하면 악의 공모자나 다를 바 없습니다.

열여덟 살 때, 그 때는 딱 꼬집어 말할 수 없었던 그 무엇을 찾기 위해서 제가 발을 들여놓은 고전 문학부 건물 복도 끝에서 제가 얻은 수많은 깨달음 가운데 하나는 그리스의 저자인 플루타르크(Plutarch)의 바로 이 구절입니다.

우리가 내면에서 성취하는 것이 우리 외면의 현실을 바꾸어놓을 것이다.”

정말 놀라운 구절입니다만, 이 말의 진리는 우리 일상생활에서도 매일 수없이 증명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은 우리와 바깥세상이 연결되어있음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고, 우리는 그저 우리가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다른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오늘 하버드를 졸업하는 여러분들은 다른 사람들의 삶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게 될 것 같습니까? 여러분은 탁월한 지적 능력을 지녔고 성실하며 훌륭한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남다른 위치에 서있고 따라서 여러분이 짊어진 책임도 남다르다고 봅니다. 여러분의 국적조차도 여러분을 남다른 위치에 서게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대다수는 세계 유일한 강대국의 국민입니다. 여러분이 행사하는 투표권, 여러분이 삶을 사는 방식, 여러분이 정부에 압력을 넣고 저항하는 방식은 미국 국경 너머 멀리까지 영향을 미칩니다. 바로 이 사실이 여러분이 가진 특권인 동시에 짊어져야 할 책임이기도 합니다.

여러분께서 여러분의 위치와 영향력을 바탕으로 힘없는 사람들을 돕는 길을 선택한다면, 여러분께서 힘 있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힘없는 사람들과 자신을 동일시하겠다는 선택을 한다면, 여러분께서 여러분만큼 혜택 받지 못한 사람들의 삶을 이해할 수 있는 상상력을 지녔다면, 여러분의 가족뿐만 아니라 여러분의 도움으로 더욱 나은 삶을 살게 된 수많은 사람들이 여러분께서 존재한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여러분을 자랑스러워 할 것입니다. 세상을 바꾸는 데 마법은 필요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마음속에 이미 세상을 바꿀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더 나은 세상을 상상할 수 있는 힘을 지녔습니다.

오늘 제가 여러분께 드릴 말씀이 거의 끝나갑니다. 여러분께 제가 바라는 것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그것은 제가 스물한 살 때 이미 갖고 있던 것입니다. 졸업식 날 제 곁에 있었던 친구들이 지금까지 평생 친구로 남아있습니다. 그들은 제 아이들의 대부와 대모가 되어주었고 곤경에 처할 때마다 제가 도움을 청할 수 있었던 친구들입니다. 제 소설 속의 악당들의 이름을 이 친구들의 이름을 따서 지었는데도 저를 법적으로 고소하지 않을 정도로 너그러운 친구들입니다. 졸업식 날 우리는 다시는 오지 않을 학창시절을 함께 한 소중한 경험으로 똘똘 뭉쳐 우리의 끈끈한 우정을 확인했습니다. 우리 중에서 누군가가 훗날 영국 수상 자리에 오른다면 그날 같이 찍은 사진이 요긴하게 쓰일 것이라는 계산도 하긴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여러분께 제가 지금까지 지녀온 우정 못지않은 우정을 간직하기를 바랍니다. 내일이 오고 여러분께서 오늘 제가 드린 말씀 가운데 한 마디도 기억하지 못하시더라도 세네카(Seneca)가 한 말만큼은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세네카는 제가 직장에서의 승승장구라는 목표를 내팽개치고 고대 현인들의 지혜를 찾아 고전 문학부 복도를 내달을 때 마주쳤던 로마의 현인 가운데 한 분입니다. 세네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야기에서 중요한 것은 이야기의 길이가 아니라 그 내용이 얼마나 훌륭한가 하는 점이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여러분께서 내면이 충만한 삶을 살기를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